르비우 포그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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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비우 포그롬은 1941년 나치 독일의 점령 직후 리비우(현 리비우)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폭력 사태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의 연루와 희생자 수에 대한 다양한 추정치가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다문화 도시였던 리비우는 소련 점령 후 독일군을 기다리는 폴란드인과 독일과 협력하는 OUN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OUN 내 반유대주의가 포그롬의 배경이 되었다. 포그롬은 독일군의 지원 하에 우크라이나 민병대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첫 번째 포그롬과 "페틀류라 데이"로 불리는 두 번째 포그롬을 통해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사건 이후 희생자 수, OUN의 역할, 소련 및 우크라이나의 역사 기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적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 연구는 OUN의 반유대주의와 포그롬에서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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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비우 포그롬 |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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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생 기간 | 1941년 6월 – 1941년 7월 |
| 발생 장소 | 르비우, 동부 폴란드/서부 우크라이나 |
| 유형 | 구타, 성적 학대, 강도, 대량 살인 |
| 가해자 | 독일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지역 군중 |
| 희생자 수 | 수천 명의 유대인 (추정치 참조: 희생자 수) |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르비우(당시 폴란드령 르보프)는 폴란드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다문화 도시였으나, 1918년부터 1939년까지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일부였다.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독소 국경 조약에 따라 르비우는 소련에 병합되었다.
소련 점령 하에서 민족 간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폴란드인들은 도시 통제권 상실에 불만을 가졌고,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소련 통치를 독립의 좌절로 여기며 독일과의 협력을 통해 독립 국가 건설을 기대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내 강경파인 OUN-B는 스테판 반데라와 야로슬라프 스테츠코의 지도 아래 활동하며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독일 침공 시 민족 청소를 계획하기도 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퇴각하는 소련 비밀경찰(NKVD)은 서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NKVD 죄수 학살을 자행했다. 이러한 소련의 점령과 철수 과정에서의 폭력,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민족 갈등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은 르비우 포그롬 발생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리비우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르비우(당시 폴란드명 르보프, Lwów)는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사는 다문화 도시였다. 1918년부터 1939년까지 제2 폴란드 공화국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312,231명이었다. 이 중 폴란드인이 157,490명으로 절반을 조금 넘었고(약 50%), 유대인이 99,595명(32%), 우크라이나인이 49,747명(16%)을 차지했다.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9월 28일에 체결된 독소 국경 조약에 따라 폴란드 영토 약 200000km2 (인구 1,350만 명)가 소련에 할당되었고, 리비우 역시 소련에 병합되었다.소련 점령 하에서 각 민족의 상황은 복잡했다. 폴란드인들은 도시의 통제권을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독일의 등장을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기다렸다. 우크라이나인들은 1939년부터 명목상 도시의 주인이 되었지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소련의 통치를 진정한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희망을 꺾는 실망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들은 독일이 소련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독립 국가 건설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의 일부 세력은 독일의 침공 이전부터 독일과 협력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비밀경찰인 NKVD는 후퇴하면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전역에서 대규모 죄수 학살을 자행했다. NKVD 기록에 따르면 약 9,000명의 죄수가 살해되었으나, 급박한 후퇴와 불완전한 기록 때문에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서우크라이나 지역의 NKVD 죄수 학살 희생자 수를 10,000명에서 40,000명 사이로 추산한다. 희생자 중 약 70%는 우크라이나인이었고, 폴란드인이 20%를 차지했다.
한편, 당시 리비우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는 스테판 반데라를 따르는 강경파(OUN-B)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조직의 지역 지도자였던 야로슬라프 스테츠코는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스테츠코는 1939년에 유대인을 "유목민과 기생충", "사기꾼", "이기주의자"로 묘사하며, 그들이 "전사 국가의 영웅적 문화를 부패시킨다"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자본가와 공산주의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다. OUN-B는 유대인을 볼셰비키의 지지자로 규정했지만, 1941년 4월 크라쿠프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서는 반유대인 포그롬이 주된 적인 모스크바와의 투쟁에서 벗어나는 행위라며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5월, OUN-B는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민병대 조직 계획을 세우면서 "혼란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폴란드인, 러시아인, 유대인 활동가들을 제거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은 "러시아인, 폴란드인, 유대인"을 우크라이나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전투 중에 파괴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민족 청소를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2. 2. 소련의 점령과 NKVD 학살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르비우(당시 폴란드령 르보프)는 인구 312,231명의 다문화 도시였다. 1939년 기준으로 폴란드인이 인구의 절반을 약간 넘는 157,490명(50% 이상)이었고, 유대인이 99,595명(32%), 우크라이나인이 49,747명(16%)을 차지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양국은 독소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영토 약 200000km2(소련 점령 지역)를 소련에 할양했다. 이로써 르비우는 소련에 병합되었다.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비밀 경찰인 NKVD는 우크라이나 SSR 전역에서 대규모 죄수 학살을 자행했다(NKVD 죄수 학살). NKVD 기록에 따르면 약 9,000명의 죄수가 살해되었으나, 소련군의 급속한 후퇴와 기록 부족으로 인해 실제 희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서우크라이나 지역의 희생자 수를 10,000명에서 40,000명 사이로 추산한다. 희생자들의 민족 구성은 우크라이나인이 약 70%, 폴란드인이 약 20%를 차지하는 등 다양했다.
소련 점령 하에서 폴란드인들은 도시의 통제권을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독일군의 도착을 기다렸으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1939년 이후 명목상 도시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소련 통치를 독립 국가 건설의 희망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독일의 도움을 기대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의 일부 세력은 독일 침공 이전부터 독일과 협력해왔다.
당시 OUN은 분열된 상태였는데, 르비우에서는 스테판 반데라를 따르는 OUN-B 분파가 야로슬라프 스테츠코의 주도 하에 활동했다. 스테츠코는 반데라의 측근이자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39년 발표한 글에서 유대인을 "유목민과 기생충", "사기꾼", "이기주의자"로 묘사하며 그들이 "전사 국가의 영웅적인 문화를 부패시키려 한다"고 주장했고, 유대인 자본가와 공산주의자 간의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OUN-B는 유대인을 볼셰비키의 지지자로 규정했지만, 1941년 4월 크라쿠프에서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반유대인 포그롬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는 주된 적인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에서 벗어나는 행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OUN-B는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며 민병대 조직 계획과 함께 민족 청소 지침을 마련했다. 이 지침에는 "혼란과 혼란의 시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폴란드, 러시아, 유대인 활동가, 특히 [소련 정권] 지지자를 제거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내용과 함께 "러시아인, 폴란드인, 유대인"을 우크라이나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전투에서 파괴"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2. 3.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
소련 침공 이전부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내 일부 세력은 독일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OUN은 분열된 상태였다. 르비우(당시 르보프)에서는 스테판 반데라를 따르는 OUN-B 분파가 민족주의 운동을 장악했는데, 이 조직은 '반데라의 저명한 부관이자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알려진 야로슬라프 스테츠코가 지역적으로 이끌었다.스테츠코는 1939년에 유대인을 '유목민과 기생충', '사기꾼', '이기주의자'로 폄하하며, 그들이 '전사 국가의 영웅적 문화를 부패시키려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자본가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OUN-B는 유대인을 볼셰비키의 지지자로 몰아갔지만, 1941년 4월 크라쿠프에서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반유대인 포그롬을 피하라고 명시적으로 촉구하기도 했다. 이는 진짜 적인 모스크바 공격에서 벗어나는 행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입장과는 별개로, 지역 OUN-B는 1941년 5월,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민병대 운영 지침에 민족 청소 계획을 포함시켰다. 이 지침에는 '혼란과 혼돈의 시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폴란드인, 러시아인, 유대인 활동가, 특히 그 지지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러시아인, 폴란드인, 유대인'은 우크라이나 국가에 적대적이므로 '전투 중에 파괴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3. 포그롬과 대량 학살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르비우(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 소련 점령 하)에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여러 차례의 포그롬과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이러한 폭력 사태는 독일 점령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와 연계된 우크라이나 민병대, 그리고 일부 지역 주민들이 가담하여 자행되었다.
주요 사건으로는 1941년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발생한 첫 번째 포그롬, 아인자츠그루펜 C 부대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 그리고 7월 말에 일어난 "페틀류라 데이" 포그롬이 있다. 첫 번째 포그롬은 독일군이 르비우를 점령한 직후 시작되었으며, NKVD가 자행한 포로 학살에 대한 분노가 유대인에게 전가되면서 폭력이 확산되었다.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유대인들을 거리로 끌어내 모욕하고, 폭행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도착한 아인자츠그루펜은 더욱 체계적인 대량 학살을 실행했으며, "페틀류라 데이" 포그롬 역시 독일 당국의 사주 아래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주도하여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러한 포그롬과 학살의 배경에는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선동, OUN의 정치적 계산과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소련 점령기에 대한 반감, 그리고 지역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 정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르비우의 유대인 공동체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수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3. 1. 첫 번째 포그롬 (1941년 6월 30일 ~ 7월 초)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당시 르비우(당시 렘베르크)에는 약 16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9년 말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피난 온 유대인 난민 수만 명이 더해져 그 수는 더욱 늘어난 상태였다.
1941년 6월 30일 새벽, 독일 국방군이 르비우를 점령했다. 점령 부대는 제1 산악 사단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아프베어 산하 나흐티갈 연대였다. 같은 날, 독일군은 유대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NKVD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의 시신을 감옥에서 수습하게 하거나 폭격 피해 복구, 건물 청소 등의 작업에 투입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일부 유대인들은 독일군에게 학대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당일 오후, 독일군은 르비우 주민들이 감옥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분노를 "볼셰비키와 항상 협력했던 유대인들"에게 표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6월 30일 아침, 도시에는 임시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 민병대에는 독일군과 함께 크라쿠프에서 이동해 온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활동가, 르비우에 거주하던 OUN 회원, 그리고 소련 경찰 조직을 이탈했거나 OUN이 잠입시킨 전직 소련 경찰 등이 포함되었다. OUN은 유대인에 대한 폭력을 적극적으로 부추겼고, 6월 30일 오후부터 우크라이나 국기 색깔(노란색과 파란색) 완장을 착용한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폭력 행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전직 소련 경찰들은 파란색 소련 제복을 그대로 입었지만, 모자의 붉은 별 대신 우크라이나의 삼지창 문양을 달았다. 독일 침공 초기에 OUN이 배포한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직 무기를 버리지 마십시오. 무기를 들고 적을 파괴하십시오. ... 모스크바, 헝가리인, 유대인 - 이것이 당신의 적입니다. 그들을 파괴하십시오."
같은 날 저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스테츠코를 수반으로 하는 독립 우크라이나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스테츠코가 서명한 이 선언("우크라이나 국가의 부활에 관한 법률")은 OUN이 나치 독일과 긴밀하며 향후 협력할 것임을 밝혔는데, OUN은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 국민이 모스크바 점령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NKVD의 학살로 인해 도시의 세 개 감옥에서 수천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본격적인 포그롬은 다음 날인 7월 1일에 시작됐다. 유대인들은 집에서 끌려 나와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청소를 하거나, 공산주의와 관련된 모욕적인 행동을 강요당했다. 비유대인 주민들은 거리에 모여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특히 유대인 여성들은 표적이 되어 옷이 벗겨지고 구타당하는 등 심한 굴욕과 학대를 겪었다. 독일 국방군 선전 부대는 이러한 장면들을 촬영하기도 했다. 강간 사건 또한 보고되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세 개의 감옥으로 끌려가 시신을 발굴하는 작업에 동원된 후 살해당했다. 역사가 존 폴 힘카는 포그롬 당시 사진에서 OUN-B의 회원인 이반 코발리신과 미하일로 페차르스키를 포함한 최소 두 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힘카에 따르면, OUN이 유대인을 주요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주요 적은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이었다), 독일의 환심을 사서 꼭두각시 우크라이나 국가 수립을 허가받기 위해 르비우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스테츠코를 비롯한 OUN 지도부의 반유대주의 성향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크세냐 키에부진스키와 알렉산더 모틸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지적한다: 유대인 활동가들이 공산주의 세력 내에서 두드러졌다는 점(실제로는 소수의 유대인만이 소련 점령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공산주의와 소련을 지지한다는 인식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 그리고 우크라이나 및 폴란드 공동체 내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이웃 및 난민과의 교류 부족 등. 이들은 폭력을 선동하는 나치 선전의 역할 또한 강조한다.
제프리 콥스타인은 독일군이 현지 주민들의 반유대주의 폭력을 조장했지만, 독일군이 없는 곳에서도 유사한 폭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존재가 포그롬을 촉진하고 더 잔혹하게 만들었을 뿐, 필수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소련 점령에 대한 불만이 분명한 요인이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 출신의 소련 협력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역할이 중요했음에도, "주로 OUN의 작전으로 [포그롬]을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OUN은 지상에 얇게 퍼져 있는 작은 조직이었다. 그들은 현지인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지지율은 들쭉날쭉하고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의 역할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본질적인 특징, 즉 포그롬의 대중적이고 카니발적인 특성에 우크라이나 인구의 광범위한 부분이 참여했다는 것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콥스타인은 또한 르비우 유대인 사회 내에서 시오니즘이 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던 점(이는 시오니스트 지지가 낮거나 공산주의 지지가 높았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들과 대조적으로, 해당 지역들에서는 포그롬이 적었다)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모두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3. 2.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아인자츠그루페 C의 하위 부대가 7월 2일에 도착하면서 폭력 사태는 더욱 격화되었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 총살당하고 새로 파낸 구덩이에 묻혔다. 이 시점에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SS에 배속되었다.포그롬 참여 외에도 아인자츠그루페 C는 다음 며칠 동안 일련의 대량 학살 작전을 수행했다. 이전에 있었던 "감옥 작전"과는 달리, 이 총격 사건들은 군중의 직접적인 참여 없이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유대인들은 경기장으로 몰려갔고, 그곳에서 트럭에 실려 총격 현장으로 이송되었다.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OUN의 조직 구조를 따랐으며, 조직화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 일반 군중 및 미성년 청소년들의 지원도 받았다. 독일군 병사들은 구경꾼이자 가해자로서 현장에 자주 나타났으며, 반유대주의 폭력과 굴욕을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7월 2일 오후, 독일군은 폭동을 중단시켰는데, 이는 상황이 처음부터 궁극적으로 독일군의 통제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3. "페틀류라 데이" (1941년 7월 말)
1941년 7월 말, 르비우에서는 두 번째 포그롬이 발생했는데, 이는 암살된 우크라이나의 지도자 시몬 페트류라를 기리기 위해 Dni Petlury|드니 페틀루리pol('페틀류라 행동')라고 불렸다. 이 학살은 독일 당국의 권유로 조직되었고, 도시 외곽에서 온 우크라이나 민병대는 농기구를 들고 학살에 가담했다.7월 25일 아침, 민병대는 도시의 경찰서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보조 경찰과 합세하여 곤봉, 도끼, 칼 등으로 거리의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오후부터는 체포와 약탈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경찰은 미리 준비된 명단을 이용해 집에서 유대인들을 체포했으며, 일반 시민들까지 거리에서 유대인 폭력에 가담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드러나지 않게 살해되었다. 야드 바셈은 약 3일 동안 대략 2,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한다.[2]
4. 희생자 수
르비우 포그롬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다. 포그롬 직후 르비우 유대인 평의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7월 초까지 2,000명의 유대인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7월 16일 독일 보안 보고서에는 7,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 평의회의 수치는 실제보다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독일 측 기록은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과장되었을 수 있다.
수용소와 게토 백과사전, 1933–1945에 따르면, 첫 번째 포그롬(6월 말~7월 초)으로 인한 유대인 희생자는 2,000명에서 5,000명에 달했다. 그 직후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특수작전집단)에 의해 2,500명에서 3,0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학살되었다. 7월 말에 벌어진 소위 "페틀류라의 날" 학살 기간에는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역사학자 페터 롱게리히(Peter Longerich)는 첫 번째 포그롬으로 최소 4,000명이 사망했으며, 이후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2,500명에서 3,000명이 체포 및 처형되었고, "페틀류라의 날" 학살로 2,000명 이상이 추가로 희생되었다고 추산했다. 역사학자 디터 폴(Dieter Pohl)은 7월 1일부터 25일 사이에 포그롬으로 살해된 르비우 유대인이 4,000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브라이트만(Richard Breitman)은 포그롬으로 5,00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 이와 별도로 약 3,000명(대부분 유대인)이 독일군에 의해 시립 경기장에서 처형되었다고 보았다.
5. 사건의 여파
(내용 없음)
5. 1. 나치 독일의 선전
독일 선전은 르비우에서 NKVD에 의해 살해된 모든 희생자들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치부했지만, 실제 소련 포로 명단의 약 3분의 1은 뚜렷하게 폴란드인이거나 유대인이었다. 그 후 2년 동안 독일과 친나치 우크라이나 언론 - 예를 들어, ''우크라인스키 쇼덴니 비스티''(Ukrains'ki shchodenni visti)와 ''크라키우스키 비스티''(Krakivs'ki visti)'' - 는 실제적이든 상상이든 끔찍한 ''체키스트''(소련 비밀 경찰) 고문 행위를 묘사했다. 독일 선전 뉴스 릴은 우크라이나인 살해에 소련 유대인을 연루시켰고, 점령된 유럽 전역에 방송되었다.전쟁 후 수십 년 동안 서우크라이나의 포그롬은 제한적인 학문적 관심을 받았고, 대부분 르비우 포그롬 동안 촬영된 일련의 사진의 맥락에서 논의되었다.[4] 역사가들은 이 사진들을 "악명 높은",[4] "끔찍한", 그리고 "거의 상징적인" 것으로 묘사했다.[5] 첫 번째 포그롬의 일부 영상과 사진은 NKVD의 희생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사실, 이 이미지들은 시신을 발굴한 후 살해된 유대인 희생자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감옥에서 금지되었을 흰 셔츠와 멜빵, 그리고 무질서하게 놓인 시체 위치로 식별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NKVD의 희생자들은 깔끔하게 줄을 서서 놓여 있었고 칙칙한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5. 2.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입장 변화
독일 선전 당국은 르비우에서 NKVD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들을 모두 우크라이나인으로 몰아갔지만, 실제 소련 측 포로 명단에는 폴란드인이나 유대인 이름이 약 3분의 1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2년간 독일과 친나치 성향의 우크라이나 언론(예: Ukrains'ki shchodenni visti|우크라인스키 쇼덴니 비스티uk, 크라키우스키 비스티)은 소련 비밀 경찰의 잔혹한 고문 행위를 실제 또는 상상에 기반하여 상세히 묘사했다. 독일 선전 뉴스 영상은 소련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내용을 담아 점령된 유럽 전역에 방송되었다.OUN 지도부는 우크라이나 국가 선포를 통해 나치 당국이 파시스트 우크라이나를 괴뢰 국가로 인정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는 점령 동부 영토 제국부 장관이 된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 아프베어 측근들에 의해 부추겨진 면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새로 점령한 영토의 철저한 경제적 착취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가 건설에 강하게 반대했다. OUN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는 7월 5일 체포되어 베를린에서 가택 연금을 당했고, 9월 15일 다시 체포되어 이후 3년간 독일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그는 1944년 10월 석방되어 독일과의 협력을 재개했다.
나흐티갈 대대가 조직적인 형태로 르비우 포그롬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생존자들은 포그롬 당시 국방군 군복을 입은 우크라이나인들을 목격했지만, 이것이 나흐티갈 대대의 개입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다른 부대에 배속된 통역관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따르면 나흐티갈 대대는 이후 1941년 7월 빈니차 인근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량 학살에는 참여했다.
르부프 게토는 1941년 11월, 렘베르크(르비우의 독일식 명칭)의 SS 및 경찰 지도자(SSPF)였던 SS-여단지도자 프리츠 카츠만의 명령으로 설립되었다.[3] 게토에는 한때 약 12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되었으나, 대부분 벨제크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거나 이후 2년 동안 현지에서 살해되었다. 1941년의 포그롬과 아인자츠그루페의 학살, 그리고 게토의 열악한 환경과 벨제크, 야노프스카 강제 수용소로의 이송을 거치며 유대인 인구는 거의 전멸했다. 1944년 7월 21일 소련군이 르비우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유대인 중 1% 미만이 살아남았다.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서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포그롬은 학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주로 르비우 포그롬 당시 촬영된 사진들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4] 이 사진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악명 높은",[4] "끔찍한", 그리고 "거의 상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5] 초기에는 포그롬 사진 중 일부가 NKVD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실제로는 시신 발굴 작업 후 살해된 유대인 희생자들을 담고 있었다. 사진 속 희생자들은 감옥에서는 입을 수 없었을 흰 셔츠와 멜빵을 착용하고 있었고, 시신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는 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반면, NKVD 희생자들은 비교적 정돈된 상태로 놓여 있었고 칙칙한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러한 사진 해석의 오류는 사건의 진실을 가리고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5. 3. 르부프 게토 설치
르부프 게토는 1941년 11월, 당시 렘베르크의 SS 및 경찰 지도자(SSPF)였던 SS-''여단지도자'' 프리츠 카츠만의 명령으로 설치되었다.[3] 게토가 가장 활발하게 운영될 때는 약 12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되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벨제크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거나 이후 2년 동안 현지에서 살해되었다. 1941년 포그롬과 아인자츠그루페의 살해 이후, 게토 내부의 열악한 환경과 벨제크 절멸 수용소 및 야노프스카 강제 수용소로의 지속적인 이송으로 인해 유대인 인구는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1944년 7월 21일 소련군이 르비우를 점령했을 때, 나치 점령에서 살아남은 르비우 유대인은 전체의 1% 미만에 불과했다.6. 역사적 논쟁과 기억
르비우 포그롬에 대한 기억과 역사 서술은 오랜 기간 복잡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소련 시대의 역사 기록은 희생자와 가해자의 민족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하고, 나치 독일의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소련 체제 하의 단일한 피해 서사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가 포그롬에서 수행한 역할을 축소하거나 미화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러한 경향과 달리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이나 존-폴 힘카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 내에 존재했던 반유대주의의 역할을 강조하고, OUN이 홀로코스트 관련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시도들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OUN이 포그롬 발생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J. 모틸 등 다른 역사가들은 힘카 등의 주장이 사건의 특정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한다고 비판하며, 폴란드인의 참여를 포함한 사건의 다층적인 복잡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OUN 지도부의 공식 입장과 현장 가담자들의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OUN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지역에서도 유사한 폭력이 발생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OUN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묻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6][7]
이러한 역사적 논쟁은 OUN의 과거 행적을 둘러싼 "역사 세탁" 시도와도 연결된다. 루들링 등에 따르면, OU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부터 자신들의 반유대주의적 행적을 축소하고 책임을 전가하려는 선전 활동을 벌였으며, 전쟁 후에도 관련 기록물을 통제하고 우호적인 역사 서술을 유도하는 등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비판이 있다. 2008년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이 OUN의 책임을 축소하는 듯한 문서를 공개했을 때도, 이것이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오늘날 리비우에서는 포그롬과 관련된 기억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도시의 기념 문화가 주로 우크라이나 민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거 도시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지적된다. 포그롬 희생자들을 위한 공식적인 추모 공간 마련이 지연되거나, 관련 역사적 장소의 전시에서 포그롬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는 등의 문제가 그 예이다. 이처럼 르비우 포그롬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 규명과 올바른 기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6. 1. 소련 시대의 역사 서술
소련 시대의 역사 서술에서는 르비우 포그롬을 포함한 사건들에서 희생자와 가해자의 민족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나치 독일의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전쟁의 참상을 소련 시민 전체의 피해로 일반화하려는 시도였다.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새로운 역사 해석이 시도되었으나, 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OUN)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과 존-폴 힘카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문제를 제기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 내의 반유대주의 역할과 OUN이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시도들을 밝히는 데 집중했다. 반면, 알렉산더 J. 모틸 등 다른 역사가들은 힘카 등의 주장이 사건의 복잡성을 간과하고 폴란드인의 참여 등 다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루들링에 따르면, OUN이 홀로코스트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부터 시작되었다. 1943년 10월, OUN 지도부는 반유대인 폭력의 책임을 독일과 폴란드에 떠넘기는 내용의 자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리비우 유대인 협의회가 우크라이나인을 포그롬의 가해자로 지목한 것이 독일의 압력 때문이라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려 시도했다. 이 시기 OUN의 선전물에서는 이전의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표현들이 사라지는 등 어조의 변화가 나타났다.
전쟁 후에도 OUN은 자신들의 과거를 "나치와 공산주의자에 맞선 영웅적인 우크라이나 저항"으로 포장하는 선전 활동을 지속했다. 이는 OUN,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SS 갈리치아 사단 참전 용사들의 회고록 출판과 함께 이루어졌다. OUN은 관련 기록 보관소를 철저히 통제하며 정보 접근을 제한했고, 문서를 학자들에게 공개하기 전에 내용을 수정하거나 날짜를 조작하고 검열하는 행태를 보였다. 또한, OUN 참전 용사이자 역사가인 타라스 훈자크, UPA 참전 용사이자 역사가인 레프 샨코프스키 등 해외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 학자들과 관계를 맺고, 이들을 통해 OUN에 우호적인 역사 서술을 확산시키려 했다. 1990년대 소련의 기록 보관소가 개방되면서 이러한 OUN의 주장과 실제 기록을 비교 검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대 리비우는 인구의 90%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이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시절에는 소련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의 주요 대상이었던 유대인 희생자들이 전쟁 중 희생된 일반적인 소련 민간인으로 취급되어 그 특수성이 희석되었다. 탈소련 우크라이나에서는 도시의 기념 문화가 주로 우크라이나인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거 리비우에 거주했던 유대인과 폴란드인 공동체의 역사는 소홀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1941년 7월 NKVD의 학살과 포그롬이 발생했던 장소 중 하나인 Lącki 거리의 감옥 부지에 세워진 박물관의 상설 전시에서는 포그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2014년 기준). 또한 같은 시기까지 포그롬으로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공식적인 기념물은 세워지지 않았다.
2008년,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은 OUN의 포그롬 연루 정도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적을 수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힘카, 루들링 등 여러 역사가는 이 문서 모음집("시작을 위해: 사실의 책", Do pochatku knyha faktiv|도 포찻쿠 크니하 팍티우uk)이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공개된 문서 중 하나는 1941년 OUN 활동에 대한 동시대 기록이라고 주장되었으나, 실제로는 전후에 작성된 정황이 명백했다. 힘카는 이 문서가 OUN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반유대주의 폭력과 거리를 두려 했던 시도를 보여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SBU는 또한 UPA 소속으로 싸웠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여성 스텔라 크렌츠바흐의 "회고록"을 근거로 제시했으나, 이 회고록과 크렌츠바흐라는 인물 자체가 민족주의 성향의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에 의해 전후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았다.[6][7]
최근에는 크세냐 키에부진스키와 알렉산더 모틸 등이 힘카와 같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책임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민족주의 지도부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이 일반 민중에게 미친 영향을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 포그롬에 폴란드인들도 가담했다는 점, 유대인 생존자들이 가해자를 정치적 인물보다는 일반 범죄자로 증언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티모시 스나이더가 지적했듯이 OUN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유사한 폭력이 발생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OUN 중앙 지도부는 반유대주의 폭력에 반대했으며, 일부 지역 조직의 가담이 전체 조직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건의 복잡성을 강조한다.
6. 2.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관점
르비우 포그롬의 기억과 역사 서술은 많은 논쟁을 낳았다. 소련의 역사 기록은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의 민족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흐리고, 나치 독일이 소련 시민에게 가한 폭력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가 포그롬에서 수행한 역할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이나 존-폴 힘카와 같은 일부 최근 역사가들은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 내 반유대주의의 역할을 강조하고 OUN이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시도들을 기록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J. 모틸과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힘카의 입장이 다소 일방적이라고 비판하며, 폴란드인의 참여를 포함한 사건의 복잡성을 강조하기도 했다.루들링에 따르면, 홀로코스트에서 OUN의 역할을 부인하려는 시도는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부터 시작되었다. 1943년 10월, OUN은 독일과 폴란드에 반유대인 폭력의 책임을 돌리는 내용의 자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OUN은 리비우 유대인 협의회가 독일의 압력 때문에 포그롬에 대해 우크라이나인들을 비난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리려 시도했다. OUN의 선전물 어조 역시 변화하여, 이전에는 포함되었던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언급들이 삭제되었다.
루들링에 따르면, OUN의 선전이 자신들의 유산을 "나치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영웅적인 우크라이나 저항"으로 묘사하면서 "세탁"은 전쟁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는 OUN,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OUN 회원들이 지배하게 됨) 및 SS 갈리치아 사단의 참전 용사들의 회고록이 쏟아지면서 함께 이루어졌다. OUN은 아카이브를 엄격하게 관리하여 정보 접근을 제한하고, 문서를 학자들에게 공개하기 전에 다시 입력하고, 날짜를 소급하고, 검열했다. OUN은 또한 OUN 참전 용사이자 역사가인 타라스 훈자크와 UPA 참전 용사이자 역사가인 레프 샨코프스키와 같은 우크라이나계 학자들을 포함하여 대서양 전역의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와 관계를 발전시켰다. 이들 학자들은 차례로 OUN에 우호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1990년대 소련 아카이브가 개방된 후, OUN의 역사 버전을 진본 문서와 비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현대 르비우는 인구의 90%가 우크라이나인이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나치 대량 학살의 주요 표적이었던 유대인들이 전쟁의 차별화되지 않은 소련 민간인 희생자들로 포함되어 개별적인 피해가 희석되었다. 탈소련 우크라이나에서는 새로운 기념 관행이 주로 리비우의 우크라이나 과거에 초점을 맞추었고, 잃어버린 유대인과 폴란드 인구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이러한 관행 중 일부는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41년 7월의 "감옥 작전"의 여러 장소 중 하나인 Lącki 거리의 감옥 부지는 현재 박물관이다. (2014년 기준) 이 박물관의 영구 전시에서는 포그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 기간 동안 포그롬의 유대인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는 없었다.
2008년, 우크라이나 보안국 (SBU)은 OUN이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덜 관련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힌 문서를 공개했다. 존-폴 힘카,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 마르코 카린닉에 따르면, "시작을 위해: 사실의 책"(Do pochatku knyha faktivuk)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 모음은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조작하고 위조하려는 시도였다. 예를 들어, 공개된 문서 중 하나는 1941년 OUN의 활동에 대한 동시대 연대기라고 주장했다. 사실, 문서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전후 생산물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힘카에 따르면, 이 문서는 OUN이 서방과의 관계를 구축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유대인 폭력과 거리를 두려 했다는 것만을 증명했다. SBU는 또한 UPA의 일원으로 싸운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스텔라 크렌츠바흐의 "회고록"에 의존했다. 회고록과 크렌츠바흐라는 인물 자체는 민족주의적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에 의한 전후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6][7]
더 최근에는 크세냐 키에부진스키와 알렉산더 모틸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책임을 돌리는 힘카와 같은 역사가들을 비판했다. 그들의 비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1) 민족주의적 책임에 대한 강조는 "대부분 (이민자) 민족주의자 및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상대적으로 소수의) 반유대주의적 진술 또는 글을, 후자가 이러한 글을 읽고 동화했는지 여부와 유대인 및 기타 민족 집단에 대한 태도의 출처를 묻지 않고 서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평범한 민족주의자들에게 전가한다." 2) "폴란드인들이 포그롬에 참여했고, 그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선동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3) 유대인 목격자들과 생존자들은 현장의 가해자들이 반드시 정치적 인물이 아니라 사소한 범죄자들이었다고 강조한다. 4) 티모시 스나이더가 주장하듯이, OUN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지역(예: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폭력이 발생했다. 5) 국가 차원에서 OUN-B는 반유대인 폭력에 반대했고, 지역 단체의 관련성은 조직 전체의 프로그램을 반영하지 않는다.
6. 3. 최근 연구 동향
포그롬에 대한 기억과 역사 서술은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소련 시대의 역사 기술은 나치 독일의 폭력성을 강조하면서도, 희생자와 가해자 양측의 민족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가 폭력 사태에 개입한 역할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6][7]최근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기존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며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존-폴 힘카(John-Paul Himka)와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Per Anders Rudling) 같은 학자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 내부에 존재했던 반유대주의의 역할을 강조하며, OUN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시도들을 기록했다. 이들은 OUN이 포그롬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주장한다. 반면, 알렉산더 J. 모틸(Alexander J. Motyl)과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힘카 등의 주장이 다소 일방적일 수 있다고 비판하며, 사건에는 폴란드인의 참여를 포함한 여러 복잡한 요인이 얽혀 있음을 강조한다.
루들링에 따르면, OUN이 홀로코스트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부터였다. 1943년 10월, OUN 지도부는 반유대인 폭력의 책임을 독일과 폴란드에 돌리는 내용의 자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OUN은 리비우의 유대인 협의회가 독일의 압력 때문에 포그롬에 대해 우크라이나인들을 비난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 OUN의 선전물에서는 이전에 포함되었던 노골적인 반유대주의적 표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루들링은 OUN의 이러한 "역사 세탁" 작업이 전쟁 후에도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OUN은 자신들의 활동을 "나치와 공산주의자에 맞선 영웅적인 우크라이나 저항"으로 포장하는 선전을 펼쳤다. 이와 함께 OUN,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SS 갈리치아 사단 참전 용사들의 회고록이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OUN은 자신들의 기록물 보관소를 엄격하게 통제하여 정보 접근을 제한했으며, 문서를 학자들에게 공개하기 전에 내용을 다시 타이핑하거나 날짜를 소급 적용하고 검열하는 등의 조작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OUN은 타라스 훈자크(Taras Hunczak)나 레프 샨코프스키(Lev Shankovsky)처럼 OUN 또는 UPA 참전 용사이자 역사학자인 우크라이나계 학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역사 서술을 유도했다. 1990년대 소련의 기록물 보관소가 개방되면서, OUN이 제시해 온 역사 버전과 실제 문서 기록을 비교 검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2008년,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은 OUN의 포그롬 연루 정도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적을 수 있다는 내용의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힘카, 루들링, 마르코 카린닉(Marco Carynnyk) 등은 Do pochatku knyha faktiv|도 포차트쿠 크니하 팍티우ukr('시작을 위해: 사실의 책')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 모음집이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공개된 문서 중 하나는 1941년 OUN 활동에 대한 동시대 연대기라고 주장했지만, 문서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전후에 작성된 것임이 명백했다. 힘카는 이 문서가 OUN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반유대인 폭력과 거리를 두려 했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SBU는 또한 UPA 소속으로 싸웠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여성 스텔라 크렌츠바흐(Stella Krentsbakh)의 "회고록"을 근거로 제시했으나, 이 회고록과 크렌츠바흐라는 인물 자체가 민족주의 성향의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에 의해 전후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6][7]
한편, 크세냐 키에부진스키(Ksenya Kiebuzinski)와 알렉산더 모틸은 힘카와 같은 역사가들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했다. 첫째, 소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이나 글이 일반 서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명확히 증명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포그롬에 가담한 폴란드인들이 정치적 반대자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셋째, 유대인 생존자들은 현장의 가해자들이 정치적 인물보다는 일반 범죄자에 가까웠다고 증언하는 경우가 많다. 넷째, 티모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가 지적했듯이, OUN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도 유사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다섯째, OUN-B 지도부 차원에서는 반유대인 폭력을 공식적으로 반대했으며, 일부 지역 조직의 연루가 전체 조직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 르비우는 인구의 90%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이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시절에는 소련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의 주요 대상이었던 유대인 희생자들이 전쟁 중 희생된 일반 소련 시민으로 뭉뚱그려져 기억되었다. 탈소련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새로운 기념 방식들이 등장했지만, 주로 르비우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과거에 초점을 맞추면서 도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유대인과 폴란드인 공동체의 기억은 소홀히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1941년 7월 NKVD의 '감옥 학살' 현장 중 하나였던 Lącki 거리의 감옥 부지에 세워진 박물관은 (2014년 기준) 상설 전시에서 포그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같은 시기 포그롬으로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기념물은 세워지지 않았다.
6. 4. 리비우의 현재 상황과 기념 문제
현대 리비우는 인구의 90%가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나치의 대량 학살 주요 대상이었던 유대인들이 전쟁 중 희생된 일반적인 소련 시민으로 간주되어 그 특수성이 희석되었다.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는 새로운 역사 기념 방식이 나타났지만, 이는 주로 리비우의 우크라이나 민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도시를 떠나거나 희생된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 기념 시설 운영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1941년 7월 NKVD가 자행한 수감자 학살 현장 중 하나인 Lącki 거리의 감옥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2014년 기준으로 이 박물관의 상설 전시에서는 같은 시기 발생한 르비우 포그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포그롬으로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공식적인 기념비 역시 오랫동안 세워지지 않았다.
포그롬에 대한 기억과 역사 서술,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의 역할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2008년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은 OUN의 포그롬 관여도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낮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문서를 공개했다. 하지만 존-폴 힘카,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이 문서들이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려는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SBU가 공개한 자료 중 일부가 실제로는 OUN이 냉전 시기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들의 반유대주의적 폭력 행위와 거리를 두려 했던 정황을 보여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SBU가 주요 근거로 제시했던 스텔라 크렌츠바흐라는 인물의 '회고록' 역시, 그가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소속 유대인이었다는 주장과 달리, 전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이민자 사회에서 만들어진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을 받았다.[6][7]
참조
[1]
서적
Complicated Complicity European Collaboration with Nazi Germany During World War II
De Gruyter
2021
[2]
웹사이트
July 25: Pogrom in Lwów
http://www1.yadvashe[...]
Yad Vashem
[3]
간행물
SS Man Katzmann's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 in the District of Galicia"
http://www.uvm.edu/~[...]
University of Vermont
2015-01-30
[4]
서적
Shared History, Divided Memory
https://books.google[...]
Leipziger Universitätsverlag
2020-01-06
[5]
서적
Stalin and Europe: Imitation and Domination, 1928–1953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0-01-06
[6]
웹사이트
Falsifying World War II history in Ukraine
http://www.kyivpost.[...]
2011-12-28
[7]
웹사이트
Історична напівправда гірша за одверту брехню
http://society.lb.ua[...]
LB.ua
20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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