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롤린스
1. 개요
리치 롤린스는 전 야구 선수로, 1961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켄트 주립 대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1962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8위를 기록하고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롤린스는 1968년 시애틀 파일럿츠, 1970년 밀워키 브루어스를 거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79년 켄트 주립 대학교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99년 오하이오주 서밋 카운티, 2001년 대 애크런 야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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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리치 롤린스 |
|---|---|
| 원어 이름 | Richard John Rollins |
| 포지션 | 3루수 |
| 타석 | 우타 |
| 투구 | 우투 |
| 출생일 | 1938년 4월 16일 |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마운트플레전트 |
| 데뷔 리그 | MLB |
|---|---|
| 데뷔일 | 1961년 6월 16일 |
| 마지막 리그 | MLB |
| 마지막 경기일 | 1970년 9월 26일 |
| 타율 | .269 |
|---|---|
| 홈런 | 77 |
| 타점 | 399 |
| 팀 | 미네소타 트윈스 (1961–1968) 시애틀 파일럿츠 / 밀워키 브루어스 (1969–197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70) |
|---|
| 하이라이트 | 2× 올스타 (1962, 1962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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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파일럿츠 선수 -
스티브 바버
스티브 바버는 1960년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올스타에 두 차례 선정된 미국의 전직 프로 야구 선수로, 은퇴 후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장애 아동들을 위한 운전사로 일했다. -
시애틀 파일럿츠 선수 -
짐 보턴
짐 보턴은 1962년부터 1978년까지 MLB에서 활동한 미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작가, 방송인으로, 뉴욕 양키스 시절 강속구 투수로 활약하며 올스타에 선정되고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계 뒷이야기를 담은 책 《볼 포》를 출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
1938년 출생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1938년 출생 -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페루 중앙준비은행 총재, 에너지광산부 장관, 경제재정부 장관, 총리 등을 역임했으며, 2016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오데브레히트 스캔들로 인해 2018년에 사임했다. -
밀워키 브루어스 선수 -
호세 카페얀
호세 카페얀은 미국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메이저 리그와 KBO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1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밀워키 브루어스 선수 -
펠리페 로페스
펠리페 로페스는 1998년 드래프트에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지명되어 데뷔 후 여러 메이저 리그 팀에서 활동하며 2005년 실버슬러거상과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1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와 대만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2. 초기 생애 및 아마추어 경력
리치 롤린스는 1938년 4월 16일 펜실베이니아 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피츠버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지역으로 이사했고, 롤린스는 파르마 고등학교에 다녔다. 롤린스는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했으며, 미국 군단 팀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켄트 주립 대학교로부터 야구 장학금을 받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골든 플래시스에서 뛰었다. 1959년에는 .429의 타율을 기록했고, 졸업반 때는 .358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은 .3891이었다. 그는 세 차례나 올 미드 아메리칸 컨퍼런스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2루수를 맡았고, 미래의 메이저 리그 선수이자 감독인 진 마이클이 유격수를 맡았다.
그는 1960년에 건강, 체육 및 레크리에이션 분야의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2.1. 유년 시절
리치 롤린스는 1938년 4월 16일 펜실베이니아 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피츠버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지역으로 이사했고, 롤린스는 파르마 고등학교에 다녔다. 롤린스는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했으며, 미국 군단 팀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켄트 주립 대학교로부터 야구 장학금을 받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골든 플래시스에서 뛰었다. 1959년에는 .429의 타율을 기록했고, 졸업반 때는 .358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은 .3891이었다. 그는 세 차례나 올 미드 아메리칸 컨퍼런스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2루수를 맡았고, 미래의 메이저 리그 선수이자 감독인 진 마이클이 유격수를 맡았다.
그는 1960년에 건강, 체육 및 레크리에이션 분야의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2.2. 고등학교 시절
롤린스는 1938년 4월 16일 펜실베이니아 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피츠버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지역으로 이사했고, 롤린스는 파르마 고등학교에 다녔다. 롤린스는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했으며, 미국 군단 팀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켄트 주립 대학교로부터 야구 장학금을 받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골든 플래시스에서 뛰었다. 1959년에는 .429의 타율을 기록했고, 졸업반 때는 .358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은 .3891이었다. 그는 세 차례나 올 미드 아메리칸 컨퍼런스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2루수를 맡았고, 미래의 메이저 리그 선수이자 감독인 진 마이클이 유격수를 맡았다.
그는 1960년에 건강, 체육 및 레크리에이션 분야의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2.3. 대학교 시절
리치 롤린스는 1938년 4월 16일 펜실베이니아 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피츠버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지역으로 이사했고, 롤린스는 파르마 고등학교에 다녔다. 롤린스는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했으며, 미국 군단 팀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켄트 주립 대학교로부터 야구 장학금을 받아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골든 플래시스에서 뛰었다. 1959년에는 .429의 타율을 기록했고, 졸업반 때는 .358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은 .3891이었다. 그는 세 차례나 올 미드 아메리칸 컨퍼런스 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2루수를 맡았고, 미래의 메이저 리그 선수이자 감독인 진 마이클이 유격수를 맡았다.
그는 1960년에 건강, 체육 및 레크리에이션 분야의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3. 프로 선수 경력
3.1. 마이너 리그 경력
롤린스는 1960년 시즌 시작 전, 워싱턴 세네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금 6,000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이후 잭 맥키언 감독의 지도 아래 클래스 B 캐롤라이나 리그의 윌슨 톱스에 배정되었다. 그는 첫 프로 경기에서 트리플 플레이를 기록했는데, 이는 굴욕적인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롤린스가 더 나은 야구 선수가 되도록 이끄는 주요 동기가 되었다.
1961년, 62경기에서 타율 0.341, 8홈런, 43타점을 기록한 후, 롤린스는 트리플 A 인터내셔널 리그의 시러큐스 치프스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시즌 시작 몇 주 후, 단 3경기만 출전한 뒤 싱글 A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의 샬럿 호네츠로 다시 배정되었다. 그는 샬럿에서 시즌 초 36경기에서 타율 0.270, 4홈런, 16타점을 기록했으며, 외야수로 4경기에 출전한 후 3루수로 포지션을 옮겼다.
3.2. 메이저 리그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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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린스는 1961년 6월 16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했다. 미네소타가 6-1로 승리한 경기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그의 메이저 리그 첫 안타는 명예의 전당 투수 얼리 윈을 상대로 나왔다. 롤린스는 시즌 나머지 기간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벤치 선수로 보냈으며, 13경기에서 타율 0.294, 3타점을 기록했다.
1962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롤린스는 유격수와 3루수로 출전했다. 캘빈 그리피스(Calvin Griffith) 트윈스 구단주는 롤린스의 3루수로서의 잠재력을 보고, 하먼 킬리브루(Harmon Killebrew)와 존 고릴(John Goryl)과 같은 경험 많은 선수들보다 롤린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권했다. 그리피스는 롤린스가 포지션을 다루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그가 아메리카 리그에서 선발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롤린스는 이 기회를 잡고 트윈스의 첫 10경기에서 .486의 타율을 기록했다. 159경기에 출전한 롤린스는 시즌을 타율 .298, 16홈런, 96타점으로 마쳤으며, 이 성적은 적어도 팀 동료들 사이에서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명예의 전당 3루수 파이 트레이너(Pie Traynor)의 이름을 따서 "파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롤린스는 또한 오랫동안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3루수를 맡았던 오시 블루지(Ossie Bluege)와 비교되기도 했다. 롤린스는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8위를 기록했으며, 명예의 전당 3루수 브룩스 로빈슨(Brooks Robinson)을 제치고 그 해 두 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며 가장 많은 올스타전 투표를 받았다. 롤린스는 경기에서 트윈스를 잘 대표하며 6타석에서 3번 출루했고, 7월 10일 경기에서 AL의 유일한 득점을 기록하며 3-1 패배를 막았다. MVP 후보와 올스타 출전을 뒷받침하는 롤린스는 리그에서 단타(2위), 타석(3위), 희생 플라이(3위), 안타(6위), 타수(6위), 득점(7위), 출루율(7위), 타점(9위), 타율(10위)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의 트윈스 팀 동료들은 1962년에 그를 팀 MVP로 선정했다. 그는 3루수 보살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그의 28개 실책은 AL 3루수 중 가장 많았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내야수 딕 맥컬리프(Dick McAuliffe)에 이어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롤린스의 수비는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그의 실책은 다음 4시즌 동안 28개에서 8개로 감소), 그의 타격 결과는 1963년 시즌(.307, 16홈런, 61타점)에도 불구하고 시즌 초반 투구에 맞아 턱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인해 하락했다. 타율 .307은 아메리칸 리그에서 3위였다. 그는 1965년 트윈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팀에서 140경기에 출전했다.
1966년 6월 9일,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와의 경기 7회에서 롤린스는 5명의 트윈스 선수 중 한 명으로 홈런을 쳤다. 다른 선수들은 하먼 킬리브루(Harmon Killebrew), 돈 민처(Don Mincher), 토니 올리바(Tony Oliva), 조일로 베르사예스(Zoilo Versalles)였다. 이 5개의 홈런은 단일 이닝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메이저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선발 투수 캣피시 헌터(Catfish Hunter) (2개)와 구원 투수 폴 린드블라드(Paul Lindblad) (2개) 및 존 와이어트(John Wyatt) (1개)를 상대로 기록되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2022년에 이 기록을 세웠다. 그 시즌 동안 그는 킬리브루와 세자르 토바르(César Tovar)와 번갈아 가며 3루수를 맡았으며, 킬리브루는 3루수로 107경기에 출전했다.
롤린스의 선수 생활은 질병과 부상으로 얼룩졌다. 1963년 턱뼈 부러짐 외에도, 그는 1964년 시즌 전에 엉덩이의 칼슘 침착을 치료하기 위해 메이요 클리닉에 갔다. 1967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손에 감염과 심한 무릎 타박상을 입었고, 이후 무릎 부상으로 3주 동안 결장했다. 그의 관절염성 엉덩이는 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무릎 부상으로 인한 만성적인 고통도 겪었다. 캘빈 그리피스 트윈스 구단주는 롤린스가 은퇴하는 대신 메이요 클리닉에서 무릎 치료를 받도록 설득했다. 롤린스는 1968년에 여러 가지 이상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968년 확장 드래프트에 노출된 롤린스는 10월 15일 시애틀 파일럿츠의 26번째 지명을 받았다. 토미 하퍼의 백업 3루수로 활동한 후, 그는 1970년 5월 13일, 시즌 초 14경기에서 타율 .200, 5타점을 기록한 후 신생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방출되었다. 롤린스는 즉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맺었고, 그곳에서 시즌을 마친 후 은퇴했다.
3.2.1. 미네소타 트윈스 시절 (1961-1968)
롤린스는 1961년 6월 16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했다. 미네소타가 6-1로 승리한 경기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그의 메이저 리그 첫 안타는 명예의 전당 투수 얼리 윈을 상대로 나왔다. 롤린스는 시즌 나머지 기간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벤치 선수로 보냈으며, 13경기에서 타율 0.294, 3타점을 기록했다.
1962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롤린스는 유격수와 3루수로 출전했다. 캘빈 그리피스(Calvin Griffith) 트윈스 구단주는 롤린스의 3루수로서의 잠재력을 보고, 하먼 킬리브루(Harmon Killebrew)와 존 고릴(John Goryl)과 같은 경험 많은 선수들보다 롤린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권했다. 그리피스는 롤린스가 포지션을 다루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그가 아메리카 리그에서 선발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롤린스는 이 기회를 잡고 트윈스의 첫 10경기에서 .486의 타율을 기록했다. 159경기에 출전한 롤린스는 시즌을 타율 .298, 16홈런, 96타점으로 마쳤으며, 이 성적은 적어도 팀 동료들 사이에서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명예의 전당 3루수 파이 트레이너(Pie Traynor)의 이름을 따서 "파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롤린스는 또한 오랫동안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3루수를 맡았던 오시 블루지(Ossie Bluege)와 비교되기도 했다. 롤린스는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8위를 기록했으며, 명예의 전당 3루수 브룩스 로빈슨(Brooks Robinson)을 제치고 그 해 두 경기 모두 선발 출전하며 가장 많은 올스타전 투표를 받았다. 롤린스는 경기에서 트윈스를 잘 대표하며 6타석에서 3번 출루했고, 7월 10일 경기에서 AL의 유일한 득점을 기록하며 3-1 패배를 막았다. MVP 후보와 올스타 출전을 뒷받침하는 롤린스는 리그에서 단타(2위), 타석(3위), 희생 플라이(3위), 안타(6위), 타수(6위), 득점(7위), 출루율(7위), 타점(9위), 타율(10위)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의 트윈스 팀 동료들은 1962년에 그를 팀 MVP로 선정했다. 그는 3루수 보살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그의 28개 실책은 AL 3루수 중 가장 많았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내야수 딕 맥컬리프(Dick McAuliffe)에 이어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롤린스의 수비는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그의 실책은 다음 4시즌 동안 28개에서 8개로 감소), 그의 타격 결과는 1963년 시즌(.307, 16홈런, 61타점)에도 불구하고 시즌 초반 투구에 맞아 턱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인해 하락했다. 타율 .307은 아메리칸 리그에서 3위였다. 그는 1965년 트윈스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팀에서 140경기에 출전했다.
1966년 6월 9일,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와의 경기 7회에서 롤린스는 5명의 트윈스 선수 중 한 명으로 홈런을 쳤다. 다른 선수들은 하먼 킬리브루(Harmon Killebrew), 돈 민처(Don Mincher), 토니 올리바(Tony Oliva), 조일로 베르사예스(Zoilo Versalles)였다. 이 5개의 홈런은 단일 이닝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친 메이저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선발 투수 캣피시 헌터(Catfish Hunter) (2개)와 구원 투수 폴 린드블라드(Paul Lindblad) (2개) 및 존 와이어트(John Wyatt) (1개)를 상대로 기록되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2022년에 이 기록을 세웠다. 그 시즌 동안 그는 킬리브루와 세자르 토바르(César Tovar)와 번갈아 가며 3루수를 맡았으며, 킬리브루는 3루수로 107경기에 출전했다.
롤린스의 선수 생활은 질병과 부상으로 얼룩졌다. 1963년 턱뼈 부러짐 외에도, 그는 1964년 시즌 전에 엉덩이의 칼슘 침착을 치료하기 위해 메이요 클리닉에 갔다. 1967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손에 감염과 심한 무릎 타박상을 입었고, 이후 무릎 부상으로 3주 동안 결장했다. 그의 관절염성 엉덩이는 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무릎 부상으로 인한 만성적인 고통도 겪었다. 캘빈 그리피스 트윈스 구단주는 롤린스가 은퇴하는 대신 메이요 클리닉에서 무릎 치료를 받도록 설득했다. 롤린스는 1968년에 여러 가지 이상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3.2.2. 시애틀 파일럿츠 / 밀워키 브루어스 시절 (1968-1970)
1968년 확장 드래프트에 노출된 롤린스는 10월 15일 시애틀 파일럿츠의 26번째 지명을 받았다. 토미 하퍼의 백업 3루수로 활동한 후, 그는 1970년 5월 13일, 시즌 초 14경기에서 타율 .200, 5타점을 기록한 후 신생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방출되었다. 롤린스는 즉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맺었고, 그곳에서 시즌을 마친 후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