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레테 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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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가레테 힘러는 하인리히 힘러의 아내로, 1893년 서프로이센 곤차제보에서 태어났다. 간호사로 일했으며,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하인리히 힘러를 만나 1928년에 재혼했다. 나치 시대에 독일 적십자사에서 활동했으며, 남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에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탈나치화 과정에서 나치 정권의 수혜자로 분류되어 처벌받았다. 그녀는 남편의 범죄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지만, 나치 이념을 지지하고 그 혜택을 누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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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헤르만 힘러는 1905년 뮌헨에서 태어나 나치당과 친위대에서 활동했으며, 베를린 전투에서 사망한 인물이다.
| 마르가레테 힘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본명 | 마르가레테 보덴 |
| 다른 이름 | 마르가레테 지그로트 마르가 히믈러 |
| 직업 | 간호사 |
| 개인 정보 | |
| 출생 | 1893년 9월 9일 |
| 출생지 | 곤차제비(비드고슈치 근처), 서프로이센, 독일 제국 |
| 사망 | 1967년 8월 25일 |
| 사망지 | 뮌헨, 서독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하인리히 힘러(1928년 7월 결혼, 1945년 5월 23일 사망) |
| 자녀 | 구드룬 부르비츠 |
| 부모 | 알려진 정보 없음 |
| 형제자매 | 알려진 정보 없음 |
| 경력 | |
| 활동 기간 | 알려진 정보 없음 |
| 알려진 업적 | 알려진 정보 없음 |
| 주요 작품 | 알려진 정보 없음 |
2. 초기 생애 및 결혼
마르가레테 보덴은 1893년 9월 19일 브롬베르크 인근 곤차제보에서 지주 한스 보덴과 그의 아내 엘프리데(결혼 전 성은 포프)의 딸로 태어났다.[3] 형제자매로는 세 자매 엘프리데, 리디아, 파울라와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1909년, 당시 독일 제국의 도시였던 브롬베르크(현재 비드고슈치, 폴란드)에 있는 외레 퇴흐터슐레(여자 고등학교)에 다녔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간호사로 훈련받고 일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 적십자사 병원에서 잠시 근무했다.[2]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베를린에서 개인 간호 클리닉을 운영했다.[4] 첫 번째 결혼은 짧았고 아이는 없었다.[4]
1927년 강연 투어 중 하인리히 힘러를 만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했다.[5] 마르가레테는 남아있는 편지에서 힘러를 "마음이 차가운 란츠크네히트"[5]라고 칭했지만, 그의 낭만적인 글과 진실한 사랑에 감명을 받았다.[6][7]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간호사였던 마르가레테는 힘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7]
약초 의학 및 동종요법에 대한 관심을 힘러와 공유했으며, 작은 개인 진료소의 공동 소유주였다. 이들은 과도한 효율성과 깔끔함, 엄격한 가정생활, 검소한 생활 방식을 선호했다.[8] 또한, 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반유대주의와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그녀의 반유대주의는 1928년 6월 22일 힘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를린 개인 진료소 공동 소유주인 산부인과 의사 베른하르트 하우스실트에 대해 "저 하우스실트! 저 유대인들은 다 똑같아!"라며 폄하하는 발언에서 드러났다.[6]
1928년 7월에 결혼했다.[8] 힘러는 그녀가 7살 연상, 이혼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부모에게 관계를 밝히는 것을 망설였다.[7] 힘러 가족 중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신부 아버지와 남동생이 신랑 들러리를 섰다.[7]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마르가레테 보덴은 브롬베르크 근처 곤차제보에서 지주 한스 보덴과 그의 아내 엘프리데(결혼 전 성은 포프)의 딸로 태어났다.[3] 마르가레테는 엘프리데, 리디아, 파울라 이렇게 세 자매와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1909년, 그녀는 당시 독일 제국의 도시였던 브롬베르크(현재 비드고슈치, 폴란드)에 있는 외레 퇴흐터슐레(여자 고등학교)에 다녔다. 마르가레테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간호사로 훈련받고 일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 적십자사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2]2. 2. 첫 번째 결혼과 이혼
마르가레테 보덴은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베를린에서 개인 간호 클리닉을 운영하고 관리했다.[4]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짧았고 아이는 없었다.[4]2. 3. 하인리히 힘러와의 만남과 결혼
하인리히 힘러는 1927년 강연 투어 중 미래의 아내인 마르가레테 보덴을 만났다. 이후 서신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했다.[5] 마르가레테는 남아있는 편지에서 하인리히 힘러를 "마음이 차가운 란츠크네히트"[5]라고 칭했지만, 그의 낭만적인 글쓰기 방식과 진실한 사랑에 감명을 받았다.[6][7]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간호사였던 마르가레테는 하인리히 힘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7]마르가레테는 약초 의학 및 동종요법에 대한 관심을 하인리히 힘러와 공유했으며, 작은 개인 진료소의 공동 소유주였다. 그들은 과도한 효율성과 깔끔함에 대한 성향을 공유했으며, 엄격한 가정생활을 갈망했고, 검소한 생활 방식을 선호했다.[8] 또한, 마르가레테는 남편으로부터 지속적인 반유대주의와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그녀의 반유대주의는 1928년 6월 22일 하인리히 힘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났는데, 베를린의 개인 진료소 공동 소유주인 산부인과 의사이자 외과 의사인 베른하르트 하우스실트에 대해 "저 하우스실트! 저 유대인들은 다 똑같아!"라며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6]
하인리히와 마르가레테는 1928년 7월에 결혼했다.[8] 하인리히는 마르가레테와의 관계를 부모에게 밝히는 것을 망설였는데, 그녀가 7살 연상이었고, 이혼녀였으며,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이다.[7] 힘러의 가족 중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신부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신랑 들러리를 섰다.[7]
3. 나치 시절
마르가레테는 남편 하인리히 힘러의 영향을 받아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사상을 가졌다.[6] 1928년 나치당에 가입했다(당원 번호 97,252).[9][10]
힘러 부부는 1928년 7월 결혼하여[8] 1929년 외동딸 구드룬을 낳았고,[8] 친위대 장교의 아들인 게르하르트 폰 아헤를 위탁 양육했다.[8] 1933년 나치 집권 후 뮌헨과 군트 암 테게른제 등지로 이주했다.[8]
마르가레테는 친위대 고위 지도자 부인들의 사교 모임을 주관했지만, SS 내부에서는 인기가 없었다.[11] 발두어 폰 쉬라흐는 마르가레테가 남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회고했고,[11] 리나 하이드리히는 마르가레테를 "편협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여성"으로 묘사하며 혐오감을 드러냈다.[1]
1941년경, 마르가레테는 남편이 헤드비히 포트하스트와 내연 관계를 맺고 사생아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1] 딸을 위해 이 관계를 용인하고 별거했다.
3. 1. 나치당 가입 및 활동
하인리히 힘러의 영향을 받아, 마르가레테는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프리메이슨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6] 1928년 6월 22일, 하인리히 힘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를린 개인 진료소의 공동 소유주였던 유대인 의사 베른하르트 하우스실트에 대해 "저 하우스실트! 저 유대인들은 다 똑같아!"라며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6]1928년, 마르가레테는 나치당에 가입했다 (당원 번호 97,252).[9][10]
3. 2. 힘러 가족의 생활
하인리히 힘러와 마르가레테는 1928년 7월에 결혼했다.[8] 1929년 8월 8일, 외동딸 구드룬이 태어났다.[8] 이들은 전쟁 전에 사망한 친위대(SS) 장교의 아들인 게르하르트 폰 아헤를 위탁 양육하기도 했다.[8]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진료소 지분을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뮌헨 근교 발트루데링에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힘러가 당 업무로 집을 비우는 동안, 마르가레테는 가축을 키우는 일을 담당했다.[8]1933년 1월 나치가 집권한 후, 힘러 가족은 처음에는 뮌헨 시내로 이사했다가, 1934년에 군트 암 테게른제로 이주하여 그곳에 집을 구매했다.[8] 이후 힘러는 베를린 다렘에 관저를 얻었지만,[8] 업무에 몰두하느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적었다.[8]
3. 3. SS 내부에서의 위치
마르가레테는 SS 고위 지도자 부인들의 사교 모임을 주관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수요일 오후에는 이들을 초대하여 커피와 차를 대접했다.하지만 마르가레테는 'SS 제국 지도자'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SS 내부에서 인기가 없었다. 전 히틀러 청소년단 지도자 발두어 폰 쉬라흐는 회고록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안주인에게 휘둘렸다"고 썼으며, 가정에서 영향력이 없었고 마르가레테의 뜻에 굴복해야 했다고 평가했다.[11]
1938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마르가레테는 최고위 SS 지도자 부인들 대부분과 갈등을 겪었는데, 이들은 집단적으로 마르가레테의 지시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전기 작가들과 역사가인 로버트 게르바르트에 따르면, 리나 하이드리히는 마르가레테 힘러에 대해 "격렬한 혐오감"을 품었고, 아마도 서로에게 마찬가지였을 것이다.[1] 전쟁 후, 리나 하이드리히는 ''슈피겔''의 기자에게 마르가레테를 "편협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금발 머리의 여성"[1]으로 묘사했으며,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었다고 비난했다.[12]
3. 4. 하인리히 힘러의 혼외 관계
하인리히 힘러는 1936년부터 자신의 비서였던 헤드비히 포트하스트와 1938년에 내연 관계를 맺었다.[1] 포트하스트는 1941년에 비서직을 그만두었다. 힘러는 포트하스트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 헬게(1942년생)와 난네테 도로테아(1944년 베르히테스가덴 출생)를 두었다. 당시 바이에른의 군트 암 테게른제에서 딸 구드룬과 함께 살고 있던 마르가레테는 1941년경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르가레테와 힘러는 이미 별거 중이었고, 마르가레테는 딸을 위해 이 관계를 용인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마르가레테 힘러는 독일 적십자사에서 활동했다.
4. 1. 독일 적십자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마르가레테 힘러는 독일 적십자사에서 활동하며 군 병원 운영을 지원했다.[13] 1939년 12월부터 군관구 III (베를린-브란덴부르크)의 적십자 병원 감독을 맡았다. 이 직책을 통해 그녀는 독일 국방군이 점령한 폴란드 등지를 방문했다.1940년 3월, 마르가레테는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포젠, 우치, 바르샤바 등을 방문하여 참상을 목격했다. 그녀는 복무 중 작성한 일기에서 "이 유대인 족속,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인간처럼 보이지 않고, 더러움은 형언할 수 없다. 그곳에 질서를 세우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라고 기록하며 유대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마르가레테는 독일 적십자사에서 대령 계급까지 올랐다.[13]
5. 전후
1945년 마르가레테는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딸 구드룬과 함께 귐트를 떠났고, 그해 5월 미 육군이 이탈리아 볼차노를 침공하면서 모녀는 체포되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의 여러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5] 마르가레테는 심문을 받았지만, 남편의 공적인 업무에 대해 알지 못했고 "소도시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15]
1945년 9월, 마르가레테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시 심문을 받았다. 이후 그녀와 구드룬은 플라크-카제르네 루드비히스부르크 포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가[15] 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1946년 11월에 석방되었다.[15]
5. 1. 체포 및 수감
1945년, 마르가레테는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딸 구드룬과 함께 귐트를 떠났다. 그해 5월 미 육군이 이탈리아 볼차노를 침공하면서 모녀는 체포되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의 여러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5] 마르가레테는 심문을 받았지만, 남편의 공적인 업무에 대해 알지 못했고 "소도시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15]
1945년 9월, 마르가레테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다시 심문을 받았다. 이후 그녀와 구드룬은 플라크-카제르네 루드비히스부르크 포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15] 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1946년 11월에 석방되었다.[15]
5. 2. 탈나치화 과정
1946년 11월, 마르가레테 힘러는 딸 구드룬과 함께 석방된 후 빌레펠트의 베텔 재단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베텔 재단 집행 이사회의 명시적인 지지가 있었지만, 1947년 6월 4일 ''뉴욕 트리뷴'' 유럽판에 "하인리히 힘러의 미망인은 숙녀처럼 산다"라는 기사가 실리는 등 논란이 있었다.[16]1948년, 마르가레테는 빌레펠트에서 3등급 범죄자로 분류되어 탈나치화 대상이 될 예정이었다. 1950년,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나치당 가입이 형식적이었고, 높은 지위는 1914년부터 봉사한 독일 적십자에서의 초기 활동 결과라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데트몰트의 탈나치화 위원회는 마르가레테가 나치당의 목표를 지지하고 남편의 행동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르가레테의 변호사는 마르가레테가 남편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으며, 공식 결정이 가족 관계를 통해 책임을 묻는 ''Sippenhaft'' 개념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1951년 3월 19일, 마르가레테는 최종적으로 4등급(''Mitläuferin'')으로 분류되었다.[17]
마르가레테는 남편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지만, 남편의 승진으로 이익을 얻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바이에른 주 총리 한스 에하르트는 영국 점령 지역에서 또 다른 탈나치화 절차를 재개했다. 1953년 1월 15일, 뮌헨에서 열린 최종 심리에서 마르가레테는 나치 정권의 수혜자로 분류되어 2등급(활동가, 무장세력 및 폭리자, 또는 기소된 사람/독일어: ''Belastete'')으로 상향 조정되었고, 30일의 징벌적 노동, 연금 수급권 및 투표권 박탈 처분을 받았다.[17]
6. 평가
피터 론게리히는 마르가레테 힘러가 나치 시대 동안 남편의 공식적인 비밀이나 계획된 프로젝트에 대해 몰랐을 것이라고 언급한다.[20] 마르가레테 힘러는 전쟁 후 나치 범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헌신적인 국가 사회주의자였고 반유대주의자였다.[20] 위르겐 마테우스는 그녀를 유대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나치라고 묘사했으며, 정권과 그 범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려는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들로부터 이익을 얻었다고 지적했다.[21]
참조
[1]
웹사이트
Nazi wives: the women beside Hess, Goebbels, Göring and Himmler
https://www.historye[...]
BBC History Revealed
2020-02-11
[2]
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3]
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4]
간행물
'"Es war sehr nett". Auszüge aus dem Tagebuch der Margarete Himmler, 1937–1945'
2000
[5]
문서
[6]
뉴스
Verschollene Briefe Heinrich Himmlers aufgetaucht
https://www.welt.de/[...]
Die Welt
2014-01-24
[7]
웹사이트
Ich fahre nach Auschwitz. Küsse, Dein Heini
http://news.de.msn.c[...]
201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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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9]
간행물
'"Es war sehr nett". Auszüge aus dem Tagebuch der Margarete Himmler, 1937–1945'
2000
[10]
서적
Das Kulturlexikon zum Dritten Reich. Wer war was vor und nach 1945
S. Fischer
2007
[11]
서적
Ich glaubte an Hitler.
Mosaik-Verlag
1967
[12]
기타
speaking about Margarete Himmler
1950
[13]
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14]
서적
Stille Hilfe für braune Kameraden.
Christoph Links Verlag
2002
[15]
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16]
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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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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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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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as Kulturlexikon zum Dritten Reich. Wer war was vor und nach 1945.
S.Fischer
20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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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ben im Verborgenen. Die Witwe des „Reichsführers SS“ Heinrich Himmler Margarete Himmler (1893–1967)
2010
[21]
간행물
'"Es war sehr nett". Auszüge aus dem Tagebuch der Margarete Himmler, 1937–1945'
http://www.werkstatt[...]
2000
[22]
간행물
'"Es war sehr nett". Auszüge aus dem Tagebuch der Margarete Himmler, 1937–194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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