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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16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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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1634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의 딸로, 1634년 비너노이슈타트에서 태어났다. 펠리페 4세의 두 번째 왕비가 되어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근친혼의 영향으로 대부분 요절하고 장녀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막내아들 카를로스 2세만이 생존했다. 펠리페 4세 사후, 어린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스페인 궁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696년 마드리드에서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나 제도가 명명되었으며,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초상화는 그녀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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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163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비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림, 1652-1653년)
왕비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디에고 벨라스케스 그림, 1652-1653년)
칭호스페인 왕비
재위 기간1649년 10월 7일 – 1665년 9월 17일
결혼1649년 10월 7일 나발카르네로
배우자펠리페 4세
자녀마르가리타 테레사
펠리페 프로스페로
카를로스 2세
가문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페르디난트 3세
어머니마리아 안나 폰 슈파니엔
출생일1634년 12월 23일
출생지비너노이슈타트, 오스트리아 대공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696년 5월 16일
사망지마드리드, 카스티야 왕관
매장지엘 에스코리알
서명
종교로마 가톨릭
추가 칭호
기타 칭호나폴리 왕비
시칠리아 왕비
섭정
섭정 재위1665년 9월 17일 – 1675년 11월 6일
이전 통치자 유형군주
이전 통치자카를로스 2세

2. 생애

마리아 아나는 1634년 비너노이슈타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의 딸로 태어났다. 본래 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사촌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약혼했으나, 1646년 그가 요절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후계자를 원했던 삼촌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1649년 14세의 조카 마리아나와 결혼했고, 그녀는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펠리페 4세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근친혼의 영향 등으로 인해 장녀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막내아들 카를로스 2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카를로스 2세는 신체적으로 매우 허약했으며,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랜 근친혼과 연관 지어 설명되기도 한다.

1665년 남편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어린 아들 카를로스 2세를 대신하여 섭정이 되었다. 공식적인 섭정 기간은 1675년까지였으나, 카를로스 2세의 건강 문제와 통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사실상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섭정 기간 동안 펠리페 4세의 서자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와 권력 다툼을 벌였고, 1678년에는 그에 의해 잠시 궁정에서 추방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복귀하여 권력을 되찾았다. 마리아나는 1696년 마드리드에서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족

마리아나는 1634년 12월 24일 비너노이슈타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 사이에서 둘째 아이이자 큰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637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마리아나에게는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두 형제가 있었는데, 오빠 페르디난트 4세(1633–1654)와 남동생 레오폴트 1세(1640–1705)이다. 레오폴트 1세는 1658년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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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년, 마리아나는 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사촌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약혼했다. 그러나 발타사르 카를로스는 같은 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로 인해 마리아나는 미래의 남편을 잃었고, 그녀의 삼촌이자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후계자를 잃게 되었다. 펠리페 4세는 이미 2년 전 왕비 프랑스의 이사벨을 잃은 상태였고, 새로운 후계자를 얻기 위해 1649년 10월 7일 마드리드 외곽의 나발카르네로에서 14세의 조카딸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이는 고모부와 조카 사이의 근친혼이었다.

마리아나와 펠리페 4세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근친혼의 영향 등으로 인해 오직 두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장녀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훗날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다. 둘째 딸 마리아 암브로시아는 태어난 지 15일 만에 사망했고, 이후 아들 펠리페 프로스페로(1657–1661)와 페르디난트 토마스(1658–1659)도 요절했다. 1661년 11월 6일, 마리아나는 마지막 아이이자 유일하게 성인이 된 아들 카를로스를 낳았다.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발달이 늦고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복된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문제로 보기도 하지만, 그의 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에게는 비슷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 2. 스페인 왕비

마리아나는 본래 사촌이자 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약혼했다. 그러나 1646년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16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마리아나는 미래의 남편을 잃었고 그녀의 삼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후계자를 잃게 되었다. 펠리페 4세는 이미 1644년 첫 번째 왕비 프랑스의 이사벨과 사별한 상태였기에, 왕위 계승을 위한 새로운 아들이 필요했다.

결국 펠리페 4세는 1649년 10월 7일, 마드리드 외곽의 나발카르네로에서 당시 14세였던 조카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마리아나의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가 펠리페 4세의 여동생이었으므로, 이는 삼촌과 조카 사이의 근친혼에 해당했다.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근친혼의 영향으로 자녀들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장녀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와 막내아들 카를로스(1661–1700) 둘 뿐이었다. 둘째 딸 마리아 암브로시아는 태어난 지 15일 만에 사망했고, 아들 펠리페 프로스페로(1657–1661)와 페르디난트 토마스(1658–1659)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장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훗날 외삼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지만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막내아들 카를로스는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을 포함한 여러 신체적, 정신적 문제를 안고 태어났다. 그는 매우 허약했고 발달이 늦었으며, 평생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부모의 근친혼이 지목되기도 하지만, 그의 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에게는 비슷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고, 유전 질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는 연구도 있다. 카를로스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1665년 남편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당시 3살이었던 아들 카를로스 2세가 왕위에 올랐고 마리아나가 섭정이 되었다. 공식적인 섭정 기간은 카를로스 2세가 성년이 되는 1675년까지였으나, 카를로스 2세의 건강 문제와 통치 능력 부족으로 인해 마리아나는 사실상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를로스는 10살이 될 때까지 안겨서 옮겨질 정도로 보행과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섭정 기간 동안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서자이자 카를로스 2세의 이복형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1678년, 후안 호세는 마리아나가 중용한 페르난도 데 바렌수엘라에 대한 불만을 명분으로 궁정 혁명을 일으켜 마리아나를 일시적으로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듬해 후안 호세가 사망하면서 마리아나는 다시 궁정으로 복귀하여 권력을 되찾았다.

마리아나는 1696년 마드리드에서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2. 3. 섭정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리아나 왕비, 1656년경


1665년 9월 17일 남편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당시 세 살이었던 아들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마리아나는 카를로스가 14세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의 조언을 받아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펠리페 4세가 확립했던 valido|발리도es 시스템을 채택했는데, 이는 국왕의 총애를 받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최고 고문을 의미한다. 첫 번째 발리도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이자 개인 고해 신부였던 후안 에베라도 니타르트였다. 펠리페 4세의 유언은 섭정 위원회에서 외국인을 배제했기 때문에, 니타르트는 스페인으로 귀화해야 했고 이는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다른 비공식 고문으로는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 페냐란다 백작과 마리아나 엔그라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포르투갈 이 알폰소-피멘텔이 있었다.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이 좋지 않고 후계자가 없다는 점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권력 투쟁을 야기했다. 마리아나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 파벌'과 카를로스 2세의 사생아 이복형인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이 이끄는 '친프랑스 로비'가 대립했다. 또한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관과 아라곤 왕관으로 나뉘어 정치 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개혁을 시행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정부 재정은 끊임없는 위기에 시달렸고, 왕실은 1647년, 1652년, 1661년, 1666년에 파산을 선언해야 했다.

스페인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17세기 후반은 소빙하기로 알려진 극심한 추위와 겹쳤다. 1692년부터 1699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작황 부진으로 인구의 5~10%가 굶어 죽었다. 마리아나 정부는 오랫동안 지속된 포르투갈 복구 전쟁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물려받았다. 1667년 5월 프랑스가 다시 한 번 유산 전쟁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슈콩테 백국의 스페인 영토를 점령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668년 아헨 조약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같은 해 리스본 조약으로 포르투갈 왕국의 독립이 회복되었다. 평화는 스페인 자원의 소모를 종식시켰고, 프랑스는 유산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 대부분을 반환했다. 이는 상당한 외교적 성과였지만, 많은 스페인 군 장교들은 그 조건을 굴욕적으로 여겼다.

1668년, 마리아나는 디에고 루이스 데 산 비토레스와 성 페드로 칼룽소드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회 선교단의 설립을 승인했다. 이 선교단은 당시 스페인이 라드로네스(Ladrones, 도둑들의 섬)라고 부르던 일련의 섬에 파견되었으며, 이 섬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마리아나 제도로 개명되었다.

1668년 6월, 아라곤 출신 대위 호세 마야다스가 니타르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이는 돈 후안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669년 2월, 니타르트는 발리도 자리를 아이토나에게 넘겨주고 축출되었고, 아이토나는 1670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1661년부터 마리아나의 가신이었던 페르난도 데 발렌수엘라, 비야시에라 후작이 임명되었다. 스페인 귀족의 하위 계층 출신 외부인인 발렌수엘라는 그의 지위를 전적으로 마리아나에게 의존했다.

1672년 스페인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1675년 카를로스 2세가 성인이 되자 발렌수엘라는 해임되었지만, 권력 투쟁으로 인해 스페인 정책은 계속 불안정했다. 마리아나는 카를로스 2세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1677년에 섭정을 재개했고 발렌수엘라는 복귀했지만, 같은 해 돈 후안이 쿠데타를 일으켜 통제권을 장악하고 마리아나를 궁정에서 추방했다.

과부 시절의 마리아나, 클라우디오 코엘로 작, 1685–1693년경


돈 후안은 1679년 9월에 사망했고, 마리아나는 다시 섭정으로 복귀하여 죽을 때까지 스페인 궁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돈 후안의 마지막 행동 중 하나는 17세의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와 카를로스 2세의 결혼을 주선한 것이었고, 이는 1679년 11월에 이루어졌다. 마리 루이즈는 1689년 2월에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당시 제한적인 의학 지식으로 인해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녀의 증상에 대한 현대적인 평가는 거의 확실하게 맹장염이었을 것으로 결론 내린다. 아마도 출산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시행된 치료가 원인이었을 수 있다.

마리 루이즈의 후임은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였다. 그녀는 다산으로 명성이 높았던 12명의 자녀 중 한 명으로, 왕실 결혼에 인기 있는 선택지였다. 그녀의 자매 중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소피아는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와 결혼했고,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마리아 안나는 미래의 황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고모였으며, 이는 그녀를 오스트리아 파벌에게 이상적인 선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이제 거의 확실하게 생식 능력이 없었고, 나중에 부검 결과 위축된 고환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점점 더 격화되었고, 친프랑스 파벌의 지도력은 톨레도 대주교 루이스 마누엘 페르난데스 데 포르토카레로에게 넘어갔다. 1690년,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대동맹에 9년 전쟁에 참전했다. 1692년에 다시 파산했으며, 1696년까지 프랑스는 카탈루냐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마리아나는 마리아 안나의 오빠인 카를 필리프 휘하의 독일 보조군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유지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마리아나의 사후 추방되었다. 그녀는 1696년 5월 16일, 마드리드의 우세다 궁전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아마도 유방암 때문이었을 것이다.

2. 4. 죽음

그녀는 1696년 마드리드에서 유방암으로 죽었다.

3. 자녀

마리아 아나는 펠리페 4세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카를로스 2세 두 명뿐이었다. 막내아들 카를로스 2세는 부모로부터 여러 유전 질환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그의 건강 문제는 후계자 문제와 연결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이름생년월일사망년월일비고
마르가리타 테레사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년 7월 12일1673년 3월 12일 (21세)외삼촌이자 사촌인 레오폴트 1세의 황후
마리아 암브로시아1655년 12월 7일1655년 12월 21일 (요절)
펠리페 프로스페로
펠리페 프로스페로1657년 11월 28일1661년 11월 1일 (3세)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 토머스 카를로스1658년 12월 23일1659년 10월 22일 (요절)
카를로스 2세
카를로스 2세1661년 11월 6일1700년 11월 1일 (38세)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


4. 평가와 유산

(내용 없음)

4. 1. 예술 작품


5. 가계도

마리아 아나는 1634년 12월 24일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37년 신성 로마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1608–1657)이고, 어머니는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이다. 부모 사이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마리아 아나와 두 오빠 페르디난트(1633–1654), 그리고 1658년 황제가 된 레오폴트(1640–1705)이다.

1646년, 마리아 아나는 사촌이자 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아스투리아스 공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약혼했다. 그러나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약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마리아 아나는 발타사르 카를로스의 아버지이자 홀아비가 된 자신의 삼촌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1649년 10월 7일 마드리드 외곽의 나발카르네로에서 결혼했다. 당시 마리아 아나는 14세였다.

펠리페 4세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두 명뿐이다.


  • 마르가리타 테레사 (1651–1673): 1666년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다.
  • 마리아 암브로시아 데 라 콘셉시온 (1655년 12월 7일 – 1655년 12월 21일): 태어난 지 15일 만에 사망했다.
  • 펠리페 프로스페로 (1657–1661): 유아기에 사망했다.
  • 페르디난트 토마스 카를로스 (1658–1659): 유아기에 사망했다.
  • 카를로스 (1661–1700): 스페인 국왕이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Mariana Engracia de Toledo Portugal y Pimentel http://dbe.rah.es/bi[...]
[2] Britannica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3] EB1911 Joanna
[4] BLKO Habsburg, Elisabeth (eigentlich Isabella von Oesterreich)
[5] CathEncy Philip II
[6] BLKO Habsburg, Maria von Spanien
[7] BLKO Habsburg, Karl II. von Steiermark
[8] NDB Maximilian II.
[9] BLKO Habsburg, Anna von Oesterreich (1528–1587)
[10] BLKO Habsburg, Anna von Oesterreich (Königin von Spanien)
[11] ADB Wilhelm V. (Herzog von Bayern)
[12] BLKO Habsburg, Maria von Bayern
[13] 서적 Christina of Denmark, Duchess of Milan and Lorraine, 1522–1590 https://archive.org/[...] E. P. Dutton
[14] BLKO Habsburg, Philipp III.
[15] NDB Ferdinand II.
[16] BLKO Habsburg, Margaretha (Königin von Spanien)
[17] BLKO Habsburg, Maria Anna von Bayern
[18] BLKO Habsburg, Maria Anna von Spanien
[19] BLKO Habsburg, Philipp IV.
[20] BLKO Habsburg, Maria Anna (Königin von Spanien)
[21] EB1911 Charles II. (King of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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