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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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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폴트 1세는 1658년부터 1705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페르디난트 3세의 아들로, 형의 사망으로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대립하며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헝가리 대부분을 확보했다. 그는 또한 음악을 후원하고 작곡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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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벤야민 폰 블로크가 그린 레오폴트 1세 초상, 1672년경
벤야민 폰 블로크가 그린 초상 (1672년경),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전체 이름레오폴트 이그나츠 요제프 발타자르 프란츠 펠리치안
출생일1640년 6월 9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사망일1705년 5월 5일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매장지황가납골당
서명
통치
신성 로마 황제즉위: 1658년 7월 18일
대관식: 1658년 8월 1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이전 통치자: 페르디난트 3세
다음 통치자: 요제프 1세
헝가리 왕즉위: 1655년 6월 27일
대관식: 1655년 6월 27일, 프레스부르크
이전 통치자: 페르디난트 3세
다음 통치자: 요제프 1세
보헤미아 왕즉위: 1656년 9월 14일
대관식: 1656년 9월 14일, 프라하
이전 통치자: 페르디난트 3세
다음 통치자: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 대공, 크로아티아 왕즉위: 1657년 4월 2일
이전 통치자: 페르디난트 3세
다음 통치자: 요제프 1세
가문
왕가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페르디난트 3세
어머니마리아 안나 데 에스파냐
종교
종교가톨릭 교회
배우자
배우자마르가리타 테레사 데 에스파냐 (결혼: 1666년, 사망: 1673년)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 폰 외스터라이히-티롤 (결혼: 1673년, 사망: 1676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폰 팔츠-노이부르크 (결혼: 1676년)
자녀
자녀마리아 안토니아, 바이에른 선제후비
요제프 1세
마리아 엘리자베트, 네덜란드 총독
레오폴트 요제프 대공
마리아 아나, 포르투갈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녀
카를 6세
마리아 요제파 대공녀
마리아 막달레나 대공녀

2. 초년 및 즉위

16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안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직자가 될 목적으로 교육받았으나, 1654년 7월 그의 형 페르디난드 4세가 사망하자 황제의 상속자가 되었다.[2] 1655년 헝가리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1656년 보헤미아 왕, 1657년에는 크로아티아 왕이 되었다. 1657년 페르디난트 3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추기경 마자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즉위를 막기 위해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등을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레오폴트 1세는 이를 물리치고 1658년 7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자랭은 레오폴트 1세로부터 스페인에 대한 원조 및 프랑스와의 전쟁 지원을 하지 않고, 프랑스가 독일 내 제후들의 동맹인 라인 연맹을 설립하여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약조를 받아내었다.[6]

익명의 화가가 그린 젊은 레오폴트, 1660년경


레오폴트는 인문학, 역사, 문학, 자연과학, 천문학 등 전통적인 교양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처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대한 기질을 보였으며,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에 능통했다. 독일어 외에도 이탈리아어는 그의 궁정에서 가장 선호하는 언어였다.

레오폴트는 고위 성직자 경력을 위해 포괄적인 교회 교육을 받았으나, 1654년 형 페르디난트 4세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면서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2] 그럼에도 레오폴트의 종교 교육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성직자 교육과 예수회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군주로서 신학, 형이상학, 법학, 과학에 대해 매우 박식했다. 또한 예수회 교사들 밑에서 발전시킨 점성술연금술에 대한 관심도 유지했다.[2]

3. 초기 전쟁

레오폴트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전쟁을 치렀다. 첫 번째 전쟁은 제2차 북방 전쟁(1655년~1660년)으로, 스웨덴의 칼 10세와 그의 동맹인 트란실바니아공 라코치 죄르지 2세에 맞서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참전했다.[1][7] 이 전쟁은 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끝났다.

이후 레오폴트 1세는 트란실바니아를 둘러싸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은 트란실바니아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충돌로 이어져 1663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했고, 1664년 8월 라이몬도 몬테쿠콜리가 지휘하는 신성 로마 제국 군대가 생고타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20년간의 휴전을 내용으로 하는 버슈바르 조약을 체결했다.[29]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에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30]

4. 프랑스와의 대립

레오폴트 1세, 귀도 카냐치 작 (1657~1658)


프랑스의 확장은 1670년 전략적 요충지인 로렌 공국 점령과 1672년 네덜란드-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멸망 직전에 놓였고, 레오폴트는 1672년 6월 25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1] 그러나 헝가리 반란 문제와 라인란트에서의 프랑스 정복을 더 중대한 과제로 여겨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678년 나이메헌 조약은 프랑스의 승리로 여겨지지만, 동맹은 프랑스의 팽창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7] 평화 체결 직후, 루이 14세는 ''레위니옹'' 정책을 통해 독일 국경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휘말린 황제는 1682년 프랑스에 반대하는 연합 동맹에 가입했지만, 2년 후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맺었다.

1689년 5월, 황제, 잉글랜드, 스페인, 덴마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등을 포함한 대동맹이 형성되어 프랑스와 거의 전 서유럽에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1697년 9월 잉글랜드, 스페인, 네덜란드는 라이스베이크 조약에서 프랑스와 평화를 맺었다.[1] 레오폴트는 동맹국들이 자신의 이익을 무시했다고 여겨 처음에는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음 달 합의하여 여러 지역이 프랑스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전되었다.

프랑스와의 평화는 약 4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유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렸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그의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에게 남기자 평화적인 해결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레오폴트는 분할에 동의하지 않았고, 카를에게 스페인 왕위에 대한 주장을 양도했다. 전쟁 초반은 제국군에게 불리했지만, 블렌하임에서의 큰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었다.[8]

4. 1. 대립의 시작

레오폴트 1세는 47년간의 통치 기간 대부분을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대립해야 했다. 루이 14세의 네덜란드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은 유럽에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레오폴트 1세는 초기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1672년 네덜란드-프랑스 전쟁에 네덜란드와 동맹하여 참전했다.[1] 이 동맹은 브란덴부르크의 탈퇴로 깨졌지만, 이후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제후들과 새로운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견제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국 연합 형태였기 때문에 지휘가 어려웠고, 결국 1679년 네이메헌 조약으로 전쟁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끝났다.[7]

전쟁 초기, 프랑스는 1670년 전략적 요충지인 로렌 공국을 점령하고, 1672년에는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제국에 대한 위협을 가중시켰다. 네덜란드는 멸망 직전에 놓였고, 레오폴트 1세는 1672년 6월 25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헝가리 반란 등의 문제로 인해 적극적인 군사 행동은 어려웠다. 1673년 6월, 브란덴부르크는 포세 조약을 통해 전쟁에서 이탈했다.[1]

1674년 8월,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레오폴트 1세, 로렌 공작이 참여한 반프랑스 사중 동맹이 결성되었고, 같은 해 5월 국회는 이를 제국 전쟁으로 선포했다. 1678년 나이메헌 조약은 프랑스의 승리로 여겨지지만, 동맹은 프랑스의 팽창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7]

휴전 후에도 루이 14세는 다시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레오폴트 1세는 1682년 반 프랑스 동맹에 다시 참여했고, 168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휴전을 맺었다.[1]

4. 2. 대동맹 전쟁 (1688-1697)

1686년 레오폴트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연맹을 결성했다.[1] 1689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스페인, 덴마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등 반 프랑스 세력이 결집한 대동맹이 결성되었다.[1] 이는 1688년 빌헬름 3세 오라녜가 영광스러운 혁명을 통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고 루이가 독일을 침공할 때까지 지속된 긴장상태의 결과였다.[1]

1697년 9월, 잉글랜드, 스페인, 네덜란드는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레오폴트 1세는 동맹국들이 자신의 이익을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음 달에 합의에 도달하여 여러 지역이 프랑스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전되었다.[1]

4.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왕위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넘어갔다. 이에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레오폴트 1세는 이 동맹에 참여했다. 1703년, 레오폴트 1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의 왕위를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8]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동맹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1705년 5월 5일 에서 사망하기 직전에 이 승전보를 접하게 되었다.[8]

5.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과의 마찰

레오폴트 1세는 헝가리를 다스리면서 개신교에 대한 적대감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671년1681년에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레오폴트 1세는 일부 억압 정책을 폐지하고 헝가리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반영하였다. 그러나 헝가리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인들의 반란을 지원하였고, 1683년에는 을 침공하여 7월부터 9월까지 포위하였다. 레오폴트 1세는 파사우로 피신하였고, 작센과 바이에른의 선제후들을 규합하여 로렌 공작 카를 4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군을 이끌도록 하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을 경계하던 폴란드의 왕 얀 3세 소비에스키는 가장 큰 동맹자였다. 이들 동맹군은 1683년 9월 12일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고 빈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다.[1]

이후 1697년 젠타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후, 1699년 1월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하여 헝가리의 거의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1] 1687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선거 없이도 헝가리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헌법을 수정했고, 레오폴트 1세의 맏아들 요제프 1세가 헝가리 왕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불안정했던 트란실바니아 내정에 자주 간섭했고, 이는 1663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초래했다. 레오폴트 1세는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지원을 요청하여 프랑스에서도 군대가 파견되었다. 1664년 8월, 황제군 장군 라임온도 몬테쿠콜리는 생고타르 전투에서 승리했다.[1][7] 바슈바르 조약에 따라 황제는 술탄과 20년간 휴전했는데, 이는 당시 승리를 고려할 때 지나치게 관대한 조건이었다.

1660년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오스만 제국군에 패배하여 사망하고, 바르차이 아르코슈가 옹립되었다.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측근 케메니 야노슈도 트란실바니아 공을 자칭하며 대립했다. 1661년 레오폴트 1세는 몬테쿠콜리 장군을 헝가리로 파병했으나, 1662년 케메니 야노슈는 전사했고, 오스만 제국 측 아파피 미하이 1세가 즉위했다. 1663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레오폴트 1세는 제후들에게 지원을 받아 헝가리의 몬테쿠콜리에게 보냈다.

1664년 생트고트하르트 전투에서 몬테쿠콜리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으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의 내분으로 반격하지 않고 바슈바르 조약을 맺어 오스만 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20년간 휴전했다. 이는 헝가리의 친합스부르크파 귀족들을 분노하게 하여 독립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1670년 베셰레니 음모가 발각되어 엄벌에 처해졌다. 레오폴트 1세는 이를 계기로 헝가리에 절대주의를 도입하고, 부왕 직책을 폐지하고 헝가리 의회를 정지시키며, 프로테스탄트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혹한 조치로 인해 헝가리 귀족들은 반항 운동을 일으켰고,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테케리 임레가 1678년 반란을 일으켜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했다. 1679년 빈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레오폴트 1세는 1681년 헝가리 의회를 열고 절대주의 정책을 철회하며, 부왕의 부활과 프로테스탄트 탄압 중지 및 관용 정책을 약속했다. 반란 측도 레오폴트 1세와 화해했으나, 테케리 임레는 저항을 계속했다.

1682년부터 다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았고, 1683년에는 테케리 등과 손을 잡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빈이 포위되었다(제2차 빈 포위). 레오폴트 1세는 빈에서 파사우로 이동하여 독일 제후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폴란드 국왕 얀 3세, 로렌 공작 샤를 5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 등의 군사적 지원으로 격퇴했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의 약체를 드러냈지만, 동쪽으로 반격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30][31][32][33]

5. 1. 대 튀르크 전쟁 (1683-1699)

1683년 9월 12일,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을 구원했다. 사보이아 공 에우제니오가 황제군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687년 모하치 전투와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승리했다. 1699년 1월, 술탄 무스타파 2세카를로비츠 조약에 서명하여 헝가리 전역(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 포함)을 거의 모두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할양했다. 합스부르크 군대가 후퇴하면서 페치 세르비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아르세니예 3세 차르노예비치 휘하 3만 7천 가구의 세르비아인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1690년1691년 레오폴트 1세는 여러 칙령(특권)을 통해 그의 영토 내 세르비아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였고, 이는 1912년 폐지될 때까지 2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687년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헝가리 국회는 헌법을 변경하였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선거 없이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였으며, 황제의 장남인 요제프 1세는 헝가리의 세습 국왕으로 즉위하였다.[12][13]

빈 탈환 이후 공세에 나선 레오폴트 1세는 1684년 폴란드와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신성 동맹을 체결하고, 로렌 공작 샤를 5세를 지휘관으로 도나우 강을 따라 헝가리 원정을 감행했다(대튀르크 전쟁). 원정군은 1686년 부다를 함락시키고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1687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승리한 후 트란실바니아에도 개입했다. 아파피 미하이 1세는 합스부르크가와 협정을 맺었고, 끝까지 저항한 테케리 임레는 몰락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원 없이는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1687년 브라티슬라바에서 헝가리 의회를 소집하여 황제 측 권력을 크게 신장시켜 귀족의 권리 인정과 맞바꾸는 대가로 남계 세습 승인, 귀족의 저항권 포기, 장남 요제프 1세의 헝가리 국왕 즉위를 인정받았다. 이듬해 1688년 헝가리에 개혁 위원회를 설치하여 행정·사법 정비와 상급 귀족에 대한 과세를 실시했다. 트란실바니아에도 변경을 가하여 1691년 신앙의 자유와 국정 보장과 맞바꾸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를 사실상 영유하고, 이듬해 1692년 트란실바니아 공 아파피 미하이 2세로부터 통치권을 양도받았으며, 1698년 동방 예식 가톨릭 교회를 설립하여 종교에도 개입함으로써 도나우 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루이 14세가 독일에 출병하여 대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잉글랜드 국왕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 및 제국 제후들과 함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맺고 루이 14세와 싸웠다. 이때 원정군의 대부분을 독일과 이탈리아로 돌린 탓에 헝가리 전선은 정체되었다. 1696년 이탈리아에서 사보이 공국 사보이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프랑스와 강화하여 이탈하고 함께 중립에 동의했기 때문에 동맹은 종전을 향해 나아가 1697년 레이스웨이크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해방된 후 이탈리아 원정군을 헝가리 전선으로 보내 오이겐 왕자가 젠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헝가리 왕국 대부분(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및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가는 18세기를 앞두고 대국 부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폴란드 국왕 얀 3세가 사망했을 때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국왕 선거에서 지원하여 다음 국왕에 즉위시켜 폴란드에도 영향을 미쳤다.[34][35][36][37]

6.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1663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의회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상설화되었으며, 이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692년 하노버 공작이 선제후가 되어 황제 선출권을 가진 9번째 제후가 되었다. 1700년에는 프랑스 견제를 위한 동맹 구성 차원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프로이센 왕 칭호를 부여했다. 이러한 변화는 제후들에 대한 황제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레오폴트 1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보헤미아 왕으로서의 지위에 의존하게 되었다.[9]

7. 문화적 업적

레오폴트 1세는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처럼 음악 후원자이자 작곡가였다.[18] 그는 안토니오 베르탈리, 조반니 보논치니, 요한 카스파르 케를, 페르디난트 토비아스 리히터, 알레산드로 포글리에티, 요한 푸크스와 같은 저명한 작곡가들을 고용하고 지원하여 궁정의 음악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또한 안토니오 비탈리,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 요한 카스파르 켈러, 요한 요제프 푹스, 요한 하인리히 슈멜처를 후원하며 빈을 음악의 도시로 발전시켰다.

1666년 첫 번째 부인 마르가레테와의 결혼식에서는 웅장한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를 개최하고, 오페라 상연과 호화로운 전시물도 마련되었으며, 이듬해 1667년에 열린 오페라에서는 마르가레테도 함께 주연을 맡았다. 이 거대한 행사는 바로크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레오폴트 1세의 남아 있는 작품들은 베르탈리와 비엔나 작곡가들(오라토리오와 기타 극적인 작품에서)의 영향과 요한 하인리히 슈멜처(발레와 독일 코미디에서)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의 성스러운 음악은 아마도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일 것이다. 특히 그의 첫 번째 부인을 위한 레퀴엠 미사인 ''Missa angeli custodis''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된 ''세 개의 강독''이 그러하다.[19] 레오폴트 1세의 음악 상당 부분은 그의 아버지의 작품과 함께 출판되었고, "매우 높은 가치의 작품"으로 묘사되었다.[20][21]

레오폴트 1세는 생애 동안 353곡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그중 217곡은 교회 음악으로, 항상 궁정에서 연주되었다. 또한 궁정 악장 안토니오 드라기가 작곡한 오페라 중 일부는 레오폴트 1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레오폴트 1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설명
『발레트 모음곡』(Balletti)
『즐거워라 하늘의 여왕』(Regina coelila)작곡 연도: 1655년
『육욕에 대한 그리스도 수난의 승리』(Sig des Leydens Chiristi die Sinnlichkeitde)시: J.A. 뤼돌프, 초연: 1682년, 빈


8. 평가

레오폴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의 위협 속에서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생존과 번영을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다. 특히 헝가리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탈환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을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38][39]

하지만 그의 통치는 종교적 불관용 정책과 가혹함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레오폴트 1세는 헝가리에서 불관용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29] 또한, 그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폴트 1세는 문화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군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그는 안토니오 비탈리, 조반니 바티스타 보논치니, 요한 카스파르 켈러, 요한 요제프 푹스, 요한 하인리히 슈멜처 등 당대 유명 음악가들을 후원하며 빈을 음악의 도시로 발전시켰다. 그 자신도 작곡가로서 교회 음악뿐만 아니라 발레 음악까지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레오폴트 1세의 치세는 조선 왕조와 비교해 볼 때, 강대국 간의 경쟁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며, 내부적인 안정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른베르크,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로렌 공 샤를 5세, 프린츠 오이겐과 같은 명장들의 활약은 레오폴트 1세의 업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 출신인 오이겐의 군사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한 것은 합스부르크 제국 재건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이들의 공적에 합당한 보답을 했고, 그를 섬긴 많은 이들은 큰 충성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레오폴트 1세는 제후들에게 작위와 왕위를 수여함으로써 제국의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 칼렌베르크 백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를 수여하고, 프로이센 공을 겸임하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프로이센의 왕" 칭호를 인정한 것은 훗날 하노버 왕국프로이센 왕국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9. 가족

레오폴트 1세는 세 번 결혼하였다.


  • 첫 번째 황후는 펠리페 4세의 딸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이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73년에 사망하였다.
  • * 페르디난트 벤첼 (1667~1668)
  •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비 마리아 안토니아 (1669~1692)
  • * 요한 레오폴트 (1670)
  • * 마리아 안나 안토니아 (1672)

  • 두 번째 황후는 티롤의 상속녀 오스트리아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이다.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는 1676년 사망하였다.
  • * 안나 마리아 조피 (1674)
  • * 마리아 요제파 클레멘티네 (1675~1676)

  • 세 번째 황후는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이다.
  •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 (1678~1711)
  • * 크리스티네 (1679)
  • * 마리아 엘리자베트 (1680~1741)
  • * 레오폴트 요제프 (1682~1684)
  • * 주앙 5세의 비 마리아 안나 요제파 (1683~1754)
  • * 마리아 테레지아 (1684~1696)
  •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 (1685~1740)
  • * 마리아 요제파 (1687~1703)
  • * 마리아 막달레나 요제파 (1689~1743)
  • * 마리아 마르가레테 (1690~1691)

참조

[1] 서적 Die andere Sonne: Kaiserbild und Medienstrategien im Zeitalter Leopolds I.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2012-09-13
[2] 서적 Facts on File library of world history
[3] 문서 Heide Dienst
[4] 서적 History of the House of Austria: From the Foundation of the Monarchy by Rhodolph of Hapsburgh, to the Death of Leopold the Second: 1218 to 1792 https://archive.org/[...] London: Henry G. Bohn
[5] 서적 Encyclopedia of the Early Modern World
[6] 서적 Vollendung und Neuorientierung des frühmodernen Reiches https://www.hsozkult[...] H-Soz-Kult 2020-03-19
[7] 서적 Kriege und Krisen: Deutschland 1600–1715 https://books.google[...] C.H.Beck
[8] 서적 Die Frühe Neuzeit als Epoche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19-05-06
[9] NDB Leopold I.
[10] 서적 Das Königreich Ungarn: Ein topograph.-hist.-statistisches Rundgemälde, d. Ganze dieses Landes in mehr denn 12,400 Artikeln umfassend, Band 3 J.C. von Thiele
[11] 서적 Bielsko-Biała. Zarys Rozwoju miasta i powiatu. Wydawnictwo "Śląsk"
[12] 서적 The Habsburg Monarchy, 1618–1815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00-00
[13] 서적 The Enemy at the Gate: Habsburgs, Ottomans and the Battle for Europe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2009-11-10
[14] 서적 Western Civilization: Beyond Boundaries Cengage Learning.
[15] 학술지 The Development of the Eternal Diet in Regensburg
[16] 서적 Das Reich und Österreich 1648-1740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17] 서적 Die Kaiser der Neuzeit, 1519-1918: Heiliges Römisches Reich, Österreich, Deutschland https://books.google[...] C.H.Beck
[18] 서적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Volume V: The Age of Louis XIV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 Grove Leopold I
[20] 학술지 Musical times https://books.google[...] 2009-03-16
[21] 서적 Musikalishe Werke der Kaiser Ferdinand III., Leopold I., and Joseph I. Vienna, Austria: Antaria & Company
[22] NDB Ferdinand III.
[23] BLKO
[24] NDB Ferdinand II.
[25] BLKO
[26] BLKO
[27] BLKO
[28] 문서 菊池 2009
[29] 문서 成瀬ら編 1996
[30] 문서 成瀬ら編 1996
[31] 문서 長谷川ら 1997
[32] 문서 南塚編 1999
[33] 문서 マッケイ 2010
[34] 문서 成瀬ら編 1996
[35] 문서 長谷川ら 1997
[36] 문서 南塚編 1999
[37] 문서 マッケイ 2010
[38] 문서 友清 2007
[39] 문서 マッケ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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