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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위글스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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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631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에서 활동한 청교도 목사이자 시인이다. 그는 《심판의 날》을 저술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세일럼 마녀 재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1705년 매든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일기와 사적인 문서들은 사후에 코튼 매더에 의해 설교에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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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위글스워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이클 위글스워스의 서명 (1631–1705)
마이클 위글스워스의 서명 (1631–1705)
이름마이클 위글스워스
출생일1631년 10월 18일
사망일1705년 6월 10일
출생지요크셔, 잉글랜드
사망지맬든,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시대식민지 시대
직업미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시인
모교하버드 대학교
대표작최후의 날
서명Signature of Michael Wigglesworth (1631–1705).png
인용문

2. 가족 및 초기 생애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631년 10월 18일 잉글랜드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638년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 정착했으며, 이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이사했다. 위글스워스는 10살 때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 농장 일을 도와야 했다.[1]

2. 1. 가족

마이클 위글스워스의 아버지는 1603년 잉글랜드 링컨셔 스코튼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위글스워스이며, 어머니는 배틀리 출신의 에스터 미들브룩이다. 두 사람은 1629년 10월 27일 Wrawby에서 결혼했다. 위글스워스 가족은 1638년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 정착했으나, 곧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이사했다. 위글스워스가 10살 때 그의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 농장 운영을 도와야 했다.

위글스워스는 여러 차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첫째 딸인 머시 위글스워스는 1655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두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 중에는 1689년경 태어난 아들 사무엘 위글스워스가 포함된다. 그의 세 번째 아내인 시빌 (에이버리) 스파르호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은 목사가 된 에드워드 마이클 위글스워스 (c. 1693–1765)이다.[2]

아들 사무엘 위글스워스는 12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인 에드워드 위글스워스(1741–1826)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대령으로 복무했다.

2. 2. 어린 시절 및 교육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631년 10월 18일, 잉글랜드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603년 링컨셔 스코튼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위글스워스였고, 어머니는 배틀리 출신의 에스터 미들브룩으로, 두 사람은 1629년 10월 27일에 결혼했다. 위글스워스 가족은 1638년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 정착했으나, 곧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이사했다.

위글스워스가 10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 농장 일을 도와야 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1651년에 졸업했으며, 1654년까지 모교에서 튜터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는 때때로 찰스타운매사추세츠주 말덴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1654년에는 말덴 제일 교구의 목사가 되었고, 1656년에 정식으로 안수를 받았다.[1]

3. 목회 활동 및 작품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뉴잉글랜드청교도 목회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생 동안 세 번 결혼했는데, 1655년 메리 레이너, 1679년 마사 머지, 1691년 시빌 (에이버리) 스피어호크와 결혼했다. 그의 목회 활동과 주요 작품은 당대 뉴잉글랜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3. 1. 목회 활동

한때 위글스워스는 설교를 하기 어렵다고 느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질환을 겪었다. 이로 인해 혼란과 실망을 느낀 교인들은 그를 대신할 다른 설교자를 선임했으나, 그 설교자가 교회 자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위글스워스는 다시 복직되어 설교 활동을 재개하도록 격려받았다.

1662년, 그는 그의 대표작인 ''심판의 날 또는 대최후 심판의 시적 묘사''(The Day of Doom|or, A Poetical Description of the Great and Last Judgmenteng)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칼뱅주의 신학을 요약한 것으로 평가받았으며, 출간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첫해에만 1,800부가 판매되었고, 이후 약 1세기 동안 뉴잉글랜드 청교도 가정에서 중요한 서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는 죄인에 대한 강한 비판과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심판의 날''에서 보여준 엄격한 내용과는 달리, 위글스워스 본인은 "쾌활한 박애주의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교인들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어려움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를 돕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위글스워스의 다른 주요 저작으로는 ''하나님과 뉴잉글랜드의 논쟁''(God's Controversy with New-Englandeng), ''먹는 자에게서 나온 고기''(Meat out of the Eatereng) 등이 있다.[7] 특히 "하나님과 뉴잉글랜드의 논쟁"(1662)은 출판되지 않았으나, 당시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신의 벌을 받고 스튜어트 왕가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7]

3. 2. 주요 작품

위글스워스의 대표작은 1662년에 출판된 ''심판의 날 또는 대최후 심판의 시적 묘사''이다. 이 작품은 후대의 선집 ''식민지 산문과 시''(1903)에 따르면 "칼뱅주의 신학의 엉터리 요약"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출간 즉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출간 1년 만에 1,800부가 팔렸고, 이후 한 세기 동안 뉴잉글랜드 청교도 가정의 필수 서적으로 자리 잡았다. 1828년에도 많은 노인들이 어릴 적 교리 문답과 함께 배운 이 시를 암송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뉴잉글랜드의 지배적인 신학 사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문학적으로는 히브리어 및 기독교 성경의 여러 내용을 참고하여 풍부하고 극적인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8음절 행(옥타시나)을 이중 운율로 복잡하게 엮은 형식을 보여준다.[6]

''심판의 날''은 죄인에 대한 강한 비난과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정작 저자인 위글스워스는 "쾌활한 박애주의자"로 알려졌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늘 아프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쾌활했다고 생각했으며, 피바디 박사는 그를 '팔복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교구민들의 영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필요까지 돌보기 위해 직접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위글스워스의 다른 작품으로는 ''하나님과 뉴잉글랜드의 논쟁''(1662)과 ''먹는 자에게서 나온 고기'' 등이 있다. ''하나님과 뉴잉글랜드의 논쟁''은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스튜어트 왕가에 의해 박해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길게 서술한 시이다.[7]

4. 신학적 고뇌와 동성애적 성향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평생 동안 깊은 신학적 고뇌와 씨름했으며, 이는 그의 삶과 저술 활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청교도 신앙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생각에 시달렸으며, 특히 젊은 시절의 경험과 몽정 등을 통해 지옥행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3] 이러한 신학적 죄책감과 더불어, 그는 동시대 남성들, 특히 자신의 제자들에게 느끼는 감정으로 인해 큰 내적 갈등을 겪었다. 위글스워스는 이러한 복잡한 감정과 신앙적 고민을 자신의 일기에 상세히 기록했으며, 일부 내용은 비밀 코드로 작성하기도 했다.[4][5] 그의 삶은 엄격한 신앙 체계 속에서 인간적인 욕망과 씨름했던 한 개인의 고뇌를 보여준다.

4. 1. 신학적 고뇌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스스로를 타락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 근본적으로 신을 믿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겪었던 몽정은 그에게 자신이 지옥행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인간 본성의 타락이라 여겨지는 것에 끊임없이 끌리면서도, 동시에 순수하고 선하게 살고자 애쓰는 내적 투쟁을 기록했다.[3]

한때 위글스워스는 정신적, 육체적 문제로 인해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느꼈다. 혼란과 실망에 빠진 교인들은 그를 대신할 다른 설교자를 선출했으나, 그 설교자는 교회 자금을 횡령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이후 위글스워스는 다시 복직하여 설교를 재개하도록 격려받았다.

위글스워스의 깊은 열등감은 그의 일기에도 드러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하버드 총장직 제안을 거절했으며, 다른 여성을 찾을 만큼 자신이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촌과 결혼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위글스워스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 학생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문제로 고통받았다. 그는 이러한 감정에 대한 일기 내용을 비밀 코드로 작성하여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두려움을 표현했다. 1653년 4월 5일자 일기에는 "나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정신이 너무나 휩싸여서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4] 같은 해 7월 4일에는 "그들 앞에 있을 때 제자들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더러운 욕정"과 싸우고 있다고 기록했다. 1655년에 결혼했지만, 남성에 대한 그의 감정은 계속되었다. 결혼 다음 날 그는 일기에 "결혼 생활을 한 후에도 이전의 질병이 여전히 느껴져서 매우 두렵다"라고 고백했다.[5] 그는 이후 두 번의 사별을 겪고 총 세 번 결혼했다. 1655년 메리 레이너, 1679년 마사 머지, 1691년 시빌 (에이버리) 스피어호크와 결혼했다.

1662년, 위글스워스는 그의 대표작인 ''심판의 날 또는 대최후 심판의 시적 묘사''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후대의 선집 ''식민지 산문과 시''(1903)에서 "칼뱅주의 신학의 엉터리 요약"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출간 즉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년 만에 1,800부가 팔렸고, 이후 한 세기 동안 뉴잉글랜드 청교도 가정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1828년에도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어릴 적 교리 문답과 함께 배운 이 시를 암송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은 히브리어 성경과 기독교 성경의 여러 내용을 바탕으로 풍부하고 극적인 이미지를 사용했으며, 이중 운율을 가진 8음절 행의 복잡한 연 구조를 보여준다.[6]

''심판의 날''에서 죄인에 대한 혹독한 비난과 지옥의 끔찍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저자 위글스워스 자신은 "쾌활한 박애주의자"로 알려졌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말하는 것만큼 아프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피바디 박사는 그를 '팔복의 사람'이라 칭했으며, 그는 교구민들의 영적인 필요뿐 아니라 육체적인 필요까지 돌보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위글스워스의 다른 작품으로는 ''하나님과 뉴잉글랜드의 논쟁'', ''먹는 자에게서 나온 고기'' 등이 있다. 특히 1662년에 쓰였으나 출판되지 않은 시 "하나님과 뉴잉글랜드의 논쟁"은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고 스튜어트 왕가로부터 박해받을 것이라는 당대의 두려움을 길게 서술하고 있다.[7]

4. 2. 동성애적 성향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특히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남자 학생들에게 끌리는 감정으로 인해 내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는 이러한 감정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때로는 비밀 코드를 사용하여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두려움을 표현했다.

1653년 4월 5일자 일기에는 "나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정신이 너무나 휩싸여서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4] 같은 해 7월 4일에는 제자들 앞에서 느낀 애착 때문에 "더러운 욕정"과 싸우고 있다고 기록했다.

위글스워스는 1655년에 메리 레이너와 결혼했지만, 남성들에 대한 끌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결혼 다음 날, 위글스워스는 일기에 "결혼 생활을 한 후에도 이전의 질병[남자 학생들에 대한 끌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됨]이 여전히 느껴져서 매우 두렵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지속적인 갈등을 드러냈다.[5]

5. 세일럼 마녀 재판과 책임 문제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세일럼 마녀 재판 당시 케임브리지 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692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협회는 마녀술 교리에 대한 논의를 위해 자주 모였으나, 위글스워스는 회의에 참석했음에도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8] 이는 그가 매더 가문과 달리 마녀술 문제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시사한다.[9] 그는 1692년 10월, 인크리스 매더의 에세이에 대한 새뮤얼 윌라드의 서문에는 서명했지만,[10][11] 재판 이후 새뮤얼 패리스 목사 문제로 열린 교회 협의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4]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말년에 이른 위글스워스는 세일럼 마녀 재판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1704년 7월 22일,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인크리스 매더에게 편지를 보내 1692년 사건 당시 목회자들의 책임을 정면으로 제기했다.[15] 위글스워스는 이 편지에서 마녀 재판 과정에서 "무고한 피가 흘려졌다"고 지적하며, 관련된 모든 이들이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인 손해 배상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하며, 국가적인 차원의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15]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재판의 부당함을 인정하고 책임을 촉구한 중요한 목소리였다. 그는 더 나아가 인크리스 매더에게 당시 불편한 관계였던 새뮤얼 윌라드에게도 회개의 뜻을 전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16]

5. 1. 케임브리지 협회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690년, 당시 27세였던 코튼 매더와 연로한 찰스 모튼이 조직한 케임브리지 협회에 초청받았다. 협회가 처음 맡은 일은 세일럼 빌리지의 목사 새뮤얼 패리스가 보낸 편지에 답하고, 일주일 후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서 만나자는 그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협회 가입 당시 목사들의 서명.


1692년 세일럼 마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협회 회원들은 도서관에 자주 모여 마녀술 교리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8] 위글스워스는 그 해 여러 차례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은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30년 전에 발표한 유명한 시 "심판의 날"에서는 '마녀'라는 단어가 단 한 번 간략하게 언급될 뿐이었다.[9] 매더 가문과는 달리, 위글스워스는 마녀술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692년 10월 3일, 위글스워스는 새뮤얼 윌라드가 작성한 짧고 강력한 서문에 서명했다. 이 서문에는 "''그러므로 이런 시기에는 무엇이 증거이고 무엇이 증거가 아닌지를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10]"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이는 인크리스 매더의 에세이 Cases of Conscience Concerning Evil Spiritseng을 위한 것이었다. 인크리스 매더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아들 코튼 매더는 윌라드의 서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재판이 끝난 뒤, 세일럼 빌리지에서 고통을 겪거나 가족을 잃은 교회 신도들은 새뮤얼 패리스 목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교회 협의회 소집을 요청했고, 이는 새뮤얼 윌라드의 지지를 받았다.[12] 패리스는 가능한 한 시간을 끌면서 매더 가문에 편지를 보내는 등 지지 세력을 모으려 했고, 몰든에 있는 자신의 교회를 통해 위글스워스를 협의회에 초청했다.[13] 패리스가 왜 위글스워스를 가능한 동맹으로 여겼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위글스워스는 1695년 4월 3일에 열린 협의회에 결국 참석하지 않았다.[14]

5. 2. 회개 촉구

1704년 7월 22일, 위글스워스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의 증언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크리스 매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1692년 세일럼 마녀 재판 당시 목회자들의 책임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15]

위글스워스는 편지에서 당시 사건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하며, 공개적인 회개와 피해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을 촉구했다.

> ''존경하는 목사님,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님, 저는 당신과 당신의 아들, 그리고 보스턴에 계신 모든 형제님들께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불쾌감의 징후에 대해 깊이 느끼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진지하고 엄숙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나누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우리의 수많은 다른 도발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마녀재판 시대에 행해진 일들에 대해 우리와 논쟁을 벌이고 계신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저는 무고한 피가 흘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 피로 손을 더럽혔을까 두렵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의 피를 흘렸지만, 무지했기에 자비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것에 대해 얼마나 슬퍼하고 부끄러워했습니까.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이와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확신합니다. 즉, 그것을 공개적으로, 엄숙하게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강조 추가) 그리고 그것이 행위자였던 모든 사람들에 의해 더욱 구체적이고 개인적으로 행해질수록, 하나님께 더욱 기쁘게 될 것입니다... 온 나라가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존경받는 주지사와 일반 법정이 마녀 혐의손해를 배상하고 보상하기 위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파괴함으로써 파멸된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때까지... 저는 허약한 몸과 떨리는 손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의 증언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5]

그는 더 나아가 인크리스 매더에게 "존경하는 새뮤얼 윌라드"에게도 회개의 뜻을 밝히라고 권고했다. 이는 인크리스 매더가 1701년 대학 총장직을 윌라드에게 빼앗긴 일로 인해 앙금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한 발언이었다.[16]

매더 가문이 위글스워스의 편지에 직접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과거 브래틀 광장 교회 설립 논란 등에서 보인 그들의 태도를 고려할 때, 위글스워스의 비판을 쉽게 넘기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7][18]

위글스워스는 편지를 보낸 지 약 1년 후인 1705년 6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매더 가문은 위글스워스의 유산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빠르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코튼 매더는 위글스워스의 일기와 개인 문서들을 확보하여 1705년 6월 24일 몰든(Malden)에서 행한 설교에서 그 내용을 인용했다. 이후 매더 가문은 이 설교 내용을 보스턴에서 인쇄하여 인크리스 매더의 서명이 담긴 사본을 몰든 교회에 전달했다.[17][18]

6. 죽음과 유산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705년 6월 10일 매든, 미들섹스 카운티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매든의 벨 록 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삶과 사역을 기리는 묘비명과 추모사가 남아있다.

마이클 위글스워스의 묘비

6. 1. 죽음과 묘비명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705년 6월 10일 매든, 미들섹스 카운티에서 사망했다.

벨 록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인

:목사, 마이클 위글스워스 목사

:매든의 그리스도 교회 목사가 묻혀있다.

:< > 년간 일했으며,

:그의 사역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주님의 날 1705년 6월 10일

:그의 나이 74세에.

:여기에 침묵의 무덤에 묻히다

:매든의 영혼과 육신의 의사 아래.

그의 추모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의 펜은 한때 먹는 자에게서 고기를 빼앗았고

:이제 그는 먹는 자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의 몸은 한때 너무 말라서 거의 없었고

:여기서 그는 육체가 없는 영으로 날아갔다.

:한때 그의 희귀한 기술은 모든 질병을 치유했고

:그는 이제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기쁨으로 자신의 낙원에 왔고

:그의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기다린다.

6. 2. 추모사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705년 6월 10일 매든, 미들섹스 카운티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매든의 벨 록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인

:목사, 마이클 위글스워스 목사

:매든의 그리스도 교회 목사가 묻혀있다.

:< > 년간 일했으며,

:그의 사역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주님의 날 1705년 6월 10일

:그의 나이 74세에.

:여기에 침묵의 무덤에 묻히다

:매든의 영혼과 육신의 의사 아래.

그의 추모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의 펜은 한때 먹는 자에게서 고기를 빼앗았고

:이제 그는 먹는 자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의 몸은 한때 너무 말라서 거의 없었고

:여기서 그는 육체가 없는 영으로 날아갔다.

:한때 그의 희귀한 기술은 모든 질병을 치유했고

:그는 이제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기쁨으로 자신의 낙원에 왔고

:그의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기다린다.

6. 3. 유산

마이클 위글스워스는 1705년 6월 10일 매든, 미들섹스 카운티에서 사망했다.

벨 록 묘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인

:목사, 마이클 위글스워스 목사

:매든의 그리스도 교회 목사가 묻혀있다.

:< > 년간 일했으며,

:그의 사역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주님의 날 1705년 6월 10일

:그의 나이 74세에.

:여기에 침묵의 무덤에 묻히다

:매든의 영혼과 육신의 의사 아래.

그의 추모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의 펜은 한때 먹는 자에게서 고기를 빼앗았고

:이제 그는 먹는 자의 손길을 벗어났다.

:그의 몸은 한때 너무 말라서 거의 없었고

:여기서 그는 육체가 없는 영으로 날아갔다.

:한때 그의 희귀한 기술은 모든 질병을 치유했고

:그는 이제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기쁨으로 자신의 낙원에 왔고

:그의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기다린다.

참조

[1] 서적 Colonial Prose and Poetry: The Beginnings of Americanism 1650–1710 Thomas Y. Crowell Co. 1903
[2] 웹사이트 Wigglesworth Family Papers: Guide to the Collection http://www.masshist.[...] Massachusetts Historical Society 2010-08-18
[3] 간행물 The Diary of Michael Wigglesworth, 1653-1657 https://www.colonial[...] Colonial Society of Massachusetts 1946-12
[4] 문서 The Diary of Michael Wigglesworth, 1653-1657 https://www.colonial[...]
[5] 웹사이트 Out of the Past https://www.pbs.org/[...]
[6] 문서 Trent and Wells, ibid.
[7] 서적 The Bi-Centennial Book of Malden Geo. C. Rand & Co. 1850
[8] 문서 Cambridge Association Minutes https://babel.hathit[...]
[9] 문서 Day of Doom https://play.google.[...]
[10] 문서 Cotton Mather letter October 20, 1692 https://upload.wikim[...] 1692-10-20
[11] 서적 Increase Mather Cases bound with Cotton Mather Wonders of the Invisible World https://play.google.[...] London reprint 1862
[12] 문서 Salem Village Church Recordbook https://www.danversl[...] Danvers Library 1693-10-13
[13] 문서 Salem Village Church Recordbook https://www.danversl[...]
[14] 서적 More Wonders of the Invisible World https://play.google.[...] The Witchcraft Delusion, Vol II 1866
[15] 서적 Salem Witchcraft and Cotton Mather https://play.google.[...] 1869
[16] 문서 Autobiography of Increase Mather https://www.american[...] 1703
[17] 서적 Sibley's Harvard Graduates https://play.google.[...] 1885
[18] 문서 What seems to be a much abridged version of the sermon is re-printed with an 1867 reprint of Wigglesworth's Day of Doom and other works https://play.google.[...] 1867
[19] 서적 The New England soul : preaching and religious culture in colonial New England https://www.worldcat[...]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20] 웹인용 마이클 위글스워스 (Michael Willesworth, 1631 - 1705) http://blog.daum.net[...]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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