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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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코튼은 1585년 영국에서 태어난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링컨셔 보스턴의 교회 목사로 활동했으며, 1633년 아내와 함께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보스턴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코튼은 회중교회 정치와 언약 신학을 주창했으며, 로저 윌리엄스와 종교적 관용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앤 허친슨과의 반율법주의 논쟁에도 연루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회중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남겼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영향력 있는 목사로 활동하며, 그의 저술과 설교는 미국 교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52년 사망했으며, 그의 저서에는 설교, 교리 문답서, 교회 정치에 관한 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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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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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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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튼 | 존 코튼 |
다른 이름 | 해당 없음 |
개인 정보 | |
존칭 접두사 | 성직자 |
출생일 | 1585년 12월 4일 |
출생지 | 더비, 더비셔, 잉글랜드 왕국 |
사망일 | 1652년 12월 23일 (향년 67세) |
사망지 |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보스턴 |
매장지 | 보스턴, 킹스 채플 묘지 |
직업 | 성직자 |
학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BA, 160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 (MA, 1606년; BD, 1613년) |
부모 | 메리 헐버트와 롤랜드 코튼 |
배우자 | (1) 엘리자베스 호록스 (2) 사라 (호크레드) 스토리 |
자녀 | (모두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시본, 사리아, 엘리자베스, 존, 마리아, 롤랜드, 윌리엄 |
친척 | 코튼 매더 (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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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종교 | 청교도 |
2. 초기 생애
존 코튼은 1585년 12월 4일 잉글랜드 더비에서 태어났으며, 11일 뒤 세인트 알크먼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더비의 변호사였던 롤랜드 코튼이었고, 어머니 메리 헐버트는 코튼의 손자인 코튼 매더에 의해 "은혜롭고 경건한 어머니"로 묘사되었다. 그는 4명의 자녀 중 둘째였다. 코튼은 현재 더비 구 문법 학교로 알려진 더비 학교에서 잉글랜드 국교회 사제인 리처드 존슨의 지도를 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2. 1.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존 코튼은 1598년, 재정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을 위한 시저 제도를 통해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수사학, 논리학, 철학을 공부하며 라틴어 변론 실력을 쌓았고, 1603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당시 "왕국에서 가장 청교도적인 대학"으로 알려진 케임브리지 엠마누엘 칼리지에 진학하여 그리스어, 천문학, 원근법 등을 배우고 1606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엠마누엘 칼리지에서 펠로우십을 얻은 코튼은 5년간 히브리어, 신학, 논쟁 등을 깊이 연구하며 설교 활동도 병행했다. 그는 라틴어는 물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연구에 매진했다.
코튼은 대학원 시절 뛰어난 학문과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후배들을 지도하는 튜터와 학장 역할도 수행했다. 전기 작가 라저 지프는 그의 학문을 "심오하다"고, 언어 능력을 "경이적"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케임브리지 피터하우스의 전 학장 로버트 솜의 장례식에서 행한 설교는 그의 태도와 내용 모두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추종자를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문학 석사 학위 취득 후 7년의 의무 기간을 거쳐 1613년에 신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610년 7월 13일에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부제와 사제로 서품받았다.

엠마누엘 칼리지 시절 코튼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은 윌리엄 퍼킨스였다. 코튼은 퍼킨스로부터 유연하고 실용적인 청교도 정신과 함께,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잉글랜드 국교회 내에서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겉으로는 순응하는 듯 보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방법을 익혔다.
설교가로서 명성이 높아지던 시기, 코튼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졌다. 구원의 확신을 찾지 못해 3년간 절망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으나, 1611년경 마침내 "구원으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얻으며 영적인 안정을 찾았다.
코튼은 자신의 영적 조언자였던 리처드 시브스의 가르침과 설교가 자신의 회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겼다. 시브스가 강조한 "마음의 종교"는 코튼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으며, 그는 "그처럼 온화한 구세주의 사신들은 지나치게 권위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기록했다. 회심 이후 그의 설교는 이전의 화려함 대신 간결하고 평이한 스타일로 변했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새로운 설교 방식은 훗날 엠마누엘 칼리지 학장이자 영향력 있는 청교도 목사가 되는 존 프레스턴의 회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코튼의 신학은 점차 변화하여,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준비주의)보다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회심 순간의 변혁적 성격"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신성한 은혜를 받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선행과 도덕성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본 토마스 후커, 피터 벌클리, 토마스 셰퍼드 등 다른 뉴잉글랜드의 동료 목사들의 준비주의 신학과 차이를 보였다.

코튼의 신학은 퍼킨스, 시브스 외에도 여러 인물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뿌리는 종교 개혁가 존 칼빈에게 있었다. 그는 "교부들과 스콜라 학자들, 그리고 칼빈도 읽었지만, 칼빈을 가진 자는 그들 모두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 외에도 사도 바울, 주교 키프리아누스, 종교 개혁 지도자들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테오도르 베자, 프란치스쿠스 유니우스(장로), 장키우스, 페터 마르터 베르밀리, 요하네스 피스카토르, 마르틴 부처 등에게서 신학적 영감을 얻었다. 영국의 폴 베인스, 토마스 카트라이트, 로렌스 채더턴, 아서 힐더샴, 윌리엄 에임스, 윌리엄 휘태커, 존 주얼, 존 휘트기프트 등도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코튼은 강한 반가톨릭 정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저술에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청교도적 관점에서 볼 때 가톨릭 교회와 형식적으로만 분리되었을 뿐 본질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 잉글랜드 국교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성공회 교회의 예배 형식과 교회 구조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코튼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이러한 관행들을 "정화"하고자 했으며, 이로 인해 "청교도"라는 다소 경멸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국교회의 문제점을 인식했지만, 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국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이는 영국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리주의 청교도(필그림 등)들의 입장과는 달랐다.
비분리주의 청교도들은 헨리 8세 시대에 시작된 잉글랜드 교회의 종교 개혁을 지속하고 완성하려는 노력을 추구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칼뱅주의와 가톨릭 사이에서 중도 노선을 택했지만,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교회가 대륙의 개혁 교회들처럼 더욱 철저히 개혁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성인 기념일 폐지, 십자성호와 성찬 시 무릎 꿇기 폐지, 성직자의 서플리스 착용 의무 폐지 등을 주장했으며, 감독제 대신 장로제 중심의 교회 통치 구조를 선호했다.
청교도들은 대륙의 개혁가 테오도르 드 베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도덕적 변화 추구, 경건한 삶의 실천, 기도서나 의식 대신 성경 중심의 신앙 회복, 엄격한 안식일 준수 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코튼 역시 이러한 청교도적 가치를 받아들였다. 트리니티 칼리지 시절에는 청교도적 영향이 미미했지만, 엠마누엘 칼리지에서는 로렌스 채더턴의 지도 아래 기도서 없는 예배, 서플리스 미착용, 성찬식을 위한 탁자 사용 등 청교도적 관행을 경험하며 더욱 깊이 동화되었다.
청교도 운동은 "지상에 거룩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했으며, 이는 코튼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으며,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의 "굳어진 마음을 찔러야" 회심의 첫 단계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점에서 청교도주의는 제단 중심의 가톨릭과 달리, 설교단과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였다.
2. 2. 링컨셔 보스턴에서의 목회

1612년, 존 코튼은 케임브리지 엠마누엘 칼리지를 떠나 링컨셔 보스턴의 세인트 보톨프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왕국에서 가장 웅장한 교구 건물"로 묘사될 만큼 규모가 컸다. 당시 코튼은 27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학문적 깊이와 활기차고 설득력 있는 설교는 그를 잉글랜드의 주요 청교도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빠르게 부상시켰다.
청교도 성직자 존 프레스턴이 종교적으로 개종한 데에는 코튼의 영향이 컸다. 프레스턴은 케임브리지 퀸스 칼리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고, 나중에는 엠마누엘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으며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꾸준히 학생들을 코튼에게 보내 배우고 함께 생활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코튼은 "프레스턴 박사의 양념통"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코튼이 1612년 세인트 보톨프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이미 약 30년간 비국교도주의적 관행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코튼은 초기에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잉글랜드 국교회의 관습을 따르려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비국교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이를 옹호하는 글을 써서 지지자들에게 배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코튼의 설교는 큰 명성을 얻었고, 그의 강의에는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기존의 일요일 아침 설교와 목요일 오후 강의 외에도 주중에 세 번의 강의가 추가될 정도였다. 잉글랜드 전역의 청교도들이 그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직접 만나 조언을 구했으며, 여기에는 훗날 그와 불편한 관계가 되는 로저 윌리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1615년, 코튼은 교회 내에서 청교도 신앙을 온전히 실천하고 기존 교회의 형식적인 관행을 피하기 위해 특별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이러한 방식에 불만을 품고 주교 법원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코튼은 잠시 정직되었으나, 지역 유지였던 앨더맨 토마스 레버렛 등의 도움으로 항소가 받아들여져 곧 복직되었다. 레버렛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의 지속적인 비호 덕분에 코튼은 윌리엄 바로우, 리처드 네일, 조지 몽테인, 존 윌리엄스에 이르는 네 명의 링컨 주교 아래에서도 자신의 청교도적 신념을 유지하며 목회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세인트 보톨프 교회에서의 마지막 12년은 존 윌리엄스 주교 아래에서 보냈다. 윌리엄스는 비교적 관대한 성향의 주교였기에 코튼은 자신의 비국교도적 견해를 어느 정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코튼은 자신의 양심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주교에게 순응하고,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겸손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윌리엄스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다.
3. 신학
존 코튼의 신학은 칼빈주의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언약 신학과 회중 정치를 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상호 언약적인 교회관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회중과 목회자 간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하는 중요한 개념이었다.[11][12]
코튼은 매우 강한 반가톨릭 정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여러 저술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영국 국교회가 이름만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었을 뿐, "공식적으로 승인된 예배 형식과 확립된 교회 구조" 등 여전히 가톨릭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공회 교회의 정체와 의식이 성경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행들을 "정화"하고자 했던 청교도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로 인해 그는 "청교도"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코튼은 영국 국교회의 본질에 반대하면서도, 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국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에는 반대하는 비분리주의 입장을 취했다. 이는 영국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리주의 청교도(예: 메이플라워 필그림)들과는 다른 노선이었다.
비분리주의 청교도들은 헨리 8세 치하에서 시작된 잉글랜드 교회의 종교 개혁을 지속하고 완성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엘리자베스 1세가 칼뱅주의와 가톨릭 사이의 중도 노선을 택한 이후에도, 이들은 영국 교회가 대륙의 개혁 교회들처럼 더욱 철저히 개혁되기를 원했다. 구체적으로 성인의 날 기념 폐지, 십자가 성호 폐지, 성찬 시 무릎 꿇기 폐지, 목사의 서플리스 착용 의무 폐지 등을 주장했으며, 교회 정치 구조에 있어서도 감독제보다는 장로교 제도를 선호했다.
청교도들은 대륙의 개혁가 테오도르 드 베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도덕적 변화 추구, 경건 생활 실천, 기도서나 의식 대신 성경 중심의 신앙 회복, 엄격한 안식일 준수 등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코튼 역시 이러한 청교도적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특히 청교도 운동은 "지상에 거룩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했는데, 이는 코튼의 설교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개인의 "굳어진 마음을 찌르는 것"이 회심의 첫 단계라고 믿었다. 이러한 점에서 청교도주의는 제단 중심의 가톨릭과 달리, 설교단 중심의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찰스 1세가 1625년 즉위한 후 청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자, 많은 청교도들이 네덜란드 등으로 이주했다. 찰스 1세는 청교도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영국 교회는 점차 가톨릭적인 의례 중심으로 회귀하고 코튼이 따르던 칼뱅주의에 대한 적대감도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코튼은 한동안 지지자들의 도움과 자신의 유연한 태도 덕분에 박해를 피할 수 있었으나, 결국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탄압을 피해 은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3. 1. 언약 신학
존 코튼은 뉴잉글랜드에서 상호 언약적인 교회관을 가졌다. 그는 회중이 목회자의 설교에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목회자들이 성경적 교리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회중은 목회자들을 계속 감시하고 그들의 권한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코튼은 만일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신자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은 자연재해를 통해 징벌하시며, 이 재해의 모든 원인은 언약을 깨뜨린 성도에게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언약관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2]
3. 2. 준비론
그는 중생 이전에 인간 측에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은혜 준비론의 입장을 가졌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로 오실 길을 예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사용한 문구는 '그리스도로의 일치(Fit for Christeng)'였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로 하여금 되길 원하시는 그 무엇이든 기꺼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을 만큼 그와 일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13]3. 3. 율법관
회중 교회주의자였던 토머스 굿윈과 예레미야 버로우즈는 존 코튼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초대하였다. 코튼은 이 총회에서 이단자들을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가 언급한 이단자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했다. 코튼은 이단자 사형 주장의 근거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14] 첫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점, 둘째, 사람들을 유혹하여 미신을 숭배하게 만들었다는 점, 셋째, 영혼을 살인하는 자들에게 사형이 합당한 처벌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를 배신하는 가톨릭 사상을 주입하는 행위는 반역에 해당한다는 점이다.[14] 이러한 주장을 통해 코튼은 십계명을 자연법의 영역까지 확장하여 적용하는 것을 정당화했다.[14]4. 뉴잉글랜드에서의 활동
1633년, 존 코튼은 아내 세라, 그리고 의붓딸과 함께 ''그리핀''(''Griffin'')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다. 그는 토마스 후커와 더불어 뉴잉글랜드에 온 초창기 저명한 목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윈throp 주지사의 개인적인 초청을 받아 보스턴에 도착한 그는, 1633년 9월부터 보스턴 교회의 두 목사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공개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가 주요 도시인 보스턴에 자리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으며, 실제로 잉글랜드 링컨셔주 보스턴 출신의 많은 이들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정착해 있었다.
코튼은 뉴잉글랜드 도착 후 곧 식민지 최고의 지성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천년설을 설교한 첫 목사이자 회중주의라는 새로운 교회 정치 체제의 주요 대변자로 부상했다. 그는 개별 회중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잉글랜드 국교회와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의 뉴잉글랜드 활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신학, 특히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자유 은혜' 사상은 다른 목사들의 '준비론'(선행을 통한 구원 준비)과 충돌하며 반율법 논쟁이라는 큰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코튼 자신과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앤 허친슨, 존 휠라이트, 젊은 총독 헨리 베인 등이 있었다. 코튼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과 동료 목사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코튼은 세일럼의 목사 로저 윌리엄스와도 중요한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윌리엄스의 엄격한 분리주의와 종교적 관용 요구는 코튼의 입장과 달랐으며, 이는 결국 윌리엄스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코튼은 윌리엄스의 추방 결정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서신을 통해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다. 이러한 논쟁들은 초기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신학과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2][3][4]
4. 1. 보스턴 교회 목회
코튼과 토마스 후커는 코튼의 전기 작가 라저 지프에 따르면 뉴잉글랜드에 온 최초의 저명한 목사였다. 코튼은 1633년 9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보스턴 교회에서 두 명의 목사 중 한 명으로 부임했을 때 윈throp 주지사의 개인적인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환영받았다. 지프는 "식민지에서 가장 저명한 설교자가 주요 도시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다수가 느꼈다"고 썼다. 또한, 링컨셔주 보스턴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정착했다는 점도 그의 부임에 영향을 미쳤다.
1630년대의 보스턴 회의장은 작고 창문이 없었으며, 흙 벽과 짚 지붕으로 되어 있어, 코튼이 이전에 사역했던 성 보톨프 교회의 넓고 편안한 환경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새로운 교회에 자리를 잡은 후 그의 복음주의적 열정은 종교 부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목사직을 수행한 첫 6개월 동안의 개종자 수가 전년도 전체 개종자 수보다 더 많았다. 그는 식민지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 인정받았으며 뉴잉글랜드에서 천년설의 주제를 설교한 최초의 목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회중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교회 정치 체제의 주요 대변인이 되었다.
회중주의자들은 개별 회중이 진정한 교회이며, 잉글랜드 국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강하게 믿었다. 청교도 지도자 존 윈throp가 1630년 윈throp 함대와 함께 세일럼에 도착했을 때, 사무엘 스켈턴 목사는 윈throp 일행이 잉글랜드 교회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성찬 참여를 거부하고 자녀들의 세례도 허용하지 않았다.[1] 코튼은 처음에는 이러한 조치에 불쾌감을 느꼈고 세일럼의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식민지의 분리주의자들처럼 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코튼은 결국 스켈턴의 입장에 동의하게 되었고, 유일한 진정한 교회는 자율적인 개별 회중이며 그 위에 합법적인 상위 교회 권력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2][3][4]


코튼의 목회 기간 동안 앤 허친슨 논쟁이 발생했다. 1637년 3월 무렵, 정치적 상황은 자유 은총 논쟁의 옹호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존 휠라이트는 금식일 설교로 인해 모욕과 선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아직 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1637년 5월에는 존 윈throp이 헨리 베인을 대신하여 총독이 되었고, 허친슨과 휠라이트를 지지했던 다른 모든 보스턴 치안 판사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휠라이트는 1637년 11월 법원에서 추방형을 선고받고 식민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앤 허친슨은 1638년 3월 15일 보스턴 회의소에서 성직자들과 회중 앞에 섰다. 여러 신학적 오류가 지적되었고, 9시간 동안의 심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튼은 과거 자신의 가르침을 따랐던 허친슨을 훈계해야 하는 불편한 입장에 놓였다. 그는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우리 가운데서 좋은 일을 하는 도구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날카로운 이해력, 빠른 발언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대의를 표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코튼을 포함한 목사들은 허친슨의 믿음이 공동체의 영적 복지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코튼은 허친슨의 신학이 반율법주의나 가족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당신은 그 논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인들의 더러운 죄와, 결혼의 구별이나 관계 없이 모든 남녀가 무차별적이고 더럽게 함께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결혼 서약에서 남편에게 불성실했다고 들은 적도, 생각한 적도 없지만, 그것이 뒤따를 것입니다.
코튼은 허친슨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훈계하고, 또한 내가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손, 당신이 교회에 끼친 큰 해,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져온 큰 불명예, 그리고 당신이 많은 가련한 영혼에게 행한 악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를 바랍니다.
코튼은 아직 허친슨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는 코튼의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존 데이븐포트 목사와 함께 지냈다. 두 목사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자신의 비정통적인 견해에 대한 공식적인 철회문을 작성하도록 도왔다. 3월 22일 다음 회의에서 허친슨은 철회문을 읽으며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목사들의 계속된 심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일관되지 못한 진술을 했고, 결국 그녀의 변론은 힘을 잃었다. 이 시점에서 코튼은 더 이상 그녀를 변호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동료 목사인 존 윌슨이 그녀에 대한 파문 명령을 선언했다.
4. 2. 로저 윌리엄스와의 논쟁

뉴잉글랜드에서의 활동 초기에 로저 윌리엄스는 세일럼 교회에서의 활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교회는 1629년 설립되었고, 1630년에는 이미 분리주의 교회가 되어 있었다. 이는 존 윈스럽과 그의 아내가 매사추세츠에 도착했을 때 성찬을 거부하고, 바다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1631년 5월 보스턴에 도착하여 보스턴 교회의 교사직을 제안받았으나, 교회가 잉글랜드 교회와 충분히 분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보스턴 교회 회원이 되는 것조차 거부했지만, 프랜시스 히긴슨 사망 후 1631년 5월까지 세일럼의 교사로 선택되었다.
윌리엄스는 비타협적인 태도와 경건함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역사가 에버렛 에머슨은 그를 "존경할 만한 인성과 불편한 우상 파괴주의가 혼합된 골칫거리"라고 평가했다. 보스턴의 목사 존 윌슨이 1632년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을 때, 윌리엄스는 그의 부재 중 대리직 제안을 다시 거절했다. 윌리엄스는 독특한 신학적 견해를 가졌고, 코튼은 분리주의와 종교적 관용 문제에 대해 그와 의견이 달랐다. 윌리엄스는 잠시 플리머스로 갔다가 세일럼으로 돌아와, 사무엘 스켈턴 사망 후 세일럼의 목사직을 맡게 되었다.
세일럼에서 목사로 재직하는 동안 윌리엄스는 잉글랜드 교회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중생하지 않은 자"로 간주하며 그들과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다. 그는 지역 치안 판사 존 엔디콧의 지지를 받았는데, 엔디콧은 잉글랜드 국기의 십자가가 우상 숭배의 상징이라며 제거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엔디콧은 1635년 5월 1년간 치안 판사직에서 배제되었고, 두 달 뒤 세일럼의 추가 토지 청원은 윌리엄스가 그곳의 목사라는 이유로 매사추세츠 법원에 의해 거부되었다.
결국 윌리엄스는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 코튼은 이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윌리엄스에게 편지를 보내 추방의 원인이 "윌리엄스의 교리가 교회와 국가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식민지 당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윌리엄스는 매사추세츠 치안 판사에 의해 잉글랜드로 송환될 예정이었으나, 대신 황야로 도망쳐 시콩크 근처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봄, 그는 내러갠셋 만 근처에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을 설립하여 완전한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에 기반한 공동체를 세웠다. 윌리엄스는 이후 코튼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주요 대변인"이자 "자신이 겪은 문제의 근원"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코튼은 1636년 세일럼으로 가서 회중에게 설교했다. 그의 목표는 신도들과 화해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윌리엄스와 다른 이들이 옹호하는 분리주의 교리의 위험성을 설득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코튼이 1635년 윌리엄스 추방 직후 보낸 편지는 1643년 런던에서 인쇄되었다. 당시 로드아일랜드 특허를 얻기 위해 잉글랜드에 있던 윌리엄스는 이 출판과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 편지에 대한 윌리엄스의 답변은 1644년 ''최근에 인쇄된 Mr. 코튼의 편지, 검토 및 답변''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윌리엄스는 ''The Bloudy Tenent of Persecutioneng''(피의 박해 조항)이라는 중요한 저작도 출판했다. 이 저술들에서 그는 뉴잉글랜드 교회의 순수성, 자신의 추방의 부당함, 그리고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매사추세츠 정책의 적절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윌리엄스는 갈등의 근본 원인이 식민지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 논쟁으로 코튼은 양극단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한쪽에는 교회 회원 자격에 더 개방적이기를 원했던 장로교인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교회가 어떤 교회 계층과도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며 성공회에서 분리된 사람들만 회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윌리엄스가 있었다. 코튼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찾으려 했다. 그는 교회 회원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분리시키는 것을 미워해야 하지만, 아직 모든 부정한 행위를 거부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코튼은 또한 윌리엄스의 엄격한 분리 정책이 "기독교인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여겼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학자 에버렛 에머슨은 "코튼의 하나님은 윌리엄스의 하나님보다 훨씬 더 관대하고 용서하신다"고 평가했다.
코튼과 윌리엄스 모두 성경을 신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해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윌리엄스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에 뚜렷한 구분을 두었지만, 코튼은 두 성경이 연속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코튼은 구약 성경을 기독교 통치의 모델로 간주하며, 교회와 국가가 긴밀히 협력하여 신정정치적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윌리엄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구약 시대의 언약과 신약 시대의 은혜를 구분했으며, 국가가 개인의 양심과 신앙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 중 하나"라고 믿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1647년 코튼이 윌리엄스의 책에 ''The Bloudy Tenent, Washed, And made white in the bloud of the Lambeeng''(피의 조항, 어린 양의 피로 씻기고 희게 됨)으로 답하면서 계속되었고,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다.
4. 3. 반율법주의 논쟁
코튼의 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스스로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반면, 뉴잉글랜드의 다른 목사들 대부분은 "준비론자"로서, 도덕성과 선행이 하나님의 구원을 준비하는 데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코튼의 보스턴 교회 교인 대부분은 그의 신학에 매료되었는데, 그중에는 앤 허친슨도 있었다. 허친슨은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으로, 매주 60명 이상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코튼의 설교를 토론하고 다른 목사들을 비판했다. 코튼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지지자는 젊은 총독 헨리 베인이었는데, 그는 보스턴에 머무는 동안 코튼의 집에 별채를 짓고 살았다. 허친슨과 베인은 코튼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일부 견해는 급진적이거나 이단적으로 여겨졌다.
존 휠라이트는 허친슨의 매형으로 1636년 뉴잉글랜드에 도착했으며, 코튼의 자유 은혜 신학을 공유하는 유일한 다른 성직자였다. 뉴타운(현 케임브리지)의 목사였던 토마스 셰퍼드는 1636년 봄부터 코튼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설교와 보스턴 교인들 사이의 이단적 견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자신의 설교에서도 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허친슨과 다른 자유 은혜 지지자들은 식민지의 정통 목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비판하며 도전했다. 목사들과 치안 판사들은 종교적 불안을 감지했고, 존 윈throp은 1636년 10월 21일경 일기에 허친슨을 비난하며 이 위기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1636년 10월 25일, 일곱 명의 목사가 코튼의 집에 모여 허친슨과 보스턴 교회의 다른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비공개 회의를 열어 불화를 해결하려 했다. 일부 신학적 차이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코튼은 다른 목사들을 만족시켰으며, "성결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 모두와 동의했으며, 휠라이트 씨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성결이 칭의를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고, 코튼, 허친슨,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은 반율법주의와 가족주의를 포함한 여러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반율법주의는 신학적으로 인간이 어떤 도덕적 또는 영적 율법도 지킬 의무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며, 가족주의는 16세기 종파의 이름을 따서 인간이 성령 아래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죄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르쳤다. 허친슨, 휠라이트, 베인이 정통파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지만, 코튼의 신학적 차이 자체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겨울이 되자 신학적 분열은 더욱 커졌고, 일반 법정은 1637년 1월 19일을 기도하는 금식의 날로 선포했다. 코튼은 그날 아침 화해적인 설교를 했으나, 오후에 휠라이트가 한 설교는 청교도 성직자들의 관점에서 "비난받을 만하고 해악을 조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코튼은 이 설교가 "방식 면에서는 부적절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3월 무렵, 정치적 상황은 자유 은총 지지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휠라이트는 금식일 설교로 모욕과 선동 혐의로 재판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형 선고는 보류되었다. 1637년 5월, 존 윈throp이 헨리 베인을 대신해 총독이 되었고, 허친슨과 휠라이트를 지지했던 다른 보스턴 치안 판사들은 모두 해임되었다. 휠라이트는 1637년 11월 2일 법원에서 추방형을 선고받고 14일 이내에 식민지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앤 허친슨은 1638년 3월 15일 보스턴 회의소에서 성직자와 회중 앞에 섰다. 여러 신학적 오류 목록이 제시되었고, 9시간의 회의 동안 네 가지가 다루어졌다. 이후 코튼은 한때 자신의 추종자였던 허친슨에게 훈계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 놓였다. 그는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우리 가운데서 좋은 일을 하는 도구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날카로운 이해력, 빠른 발언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대의를 표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목사들은 허친슨의 건전하지 못한 믿음이 그녀가 행한 어떤 선한 일보다 더 크며, 공동체의 영적 복지를 위협한다고 압도적으로 결론지었다. 코튼은 계속해서 말했다.
> 당신은 그 논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인들의 더러운 죄와, 결혼의 구별이나 관계 없이 모든 남녀가 무차별적이고 더럽게 함께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결혼 서약에서 남편에게 불성실했다고 들은 적도, 생각한 적도 없지만, 그것이 뒤따를 것입니다.
여기서 코튼은 허친슨의 신학적 사상이 기독교인은 도덕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가르치는 반율법주의자 및 가족주의자들의 사상과 연결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훈계하고, 또한 내가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손, 당신이 교회에 끼친 큰 해,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져온 큰 불명예, 그리고 당신이 많은 가련한 영혼에게 행한 악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를 바랍니다.
코튼은 아직 허친슨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는 마침 존 데이븐포트 목사도 머물고 있던 코튼의 집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두 목사는 일주일 내내 그녀와 함께 일했고, 그녀는 그들의 감독하에 자신의 비정통적 의견에 대한 공식 철회문을 작성했다. 3월 22일 목요일 다음 회의에서 그녀는 일어나 회중에게 철회문을 읽으며 자신의 많은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목사들은 심문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하여 그녀의 모든 변호는 무너졌다. 이 시점에서 코튼은 그녀를 포기했고, 그의 동료 목사 존 윌슨이 파문 명령을 읽었다.
코튼은 자신의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목사들과 달랐기 때문에 논쟁에 깊이 연루되었으며, 허친슨을 지지하려 하면서도 동료 목사들과 화해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 중 일부는 그의 독특한 교리를 받아들여 청교도 정통성을 훨씬 넘어섰다. 코튼은 영국에 있는 동료들에게 식민지 내 불화의 모습을 축소하여 알리려 했다. 1637년 2월,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논쟁이 하나님의 은혜를 칭송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한쪽은 인간 내면의 은혜에, 다른 쪽은 인간을 향한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뉴잉글랜드는 여전히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좋은 곳이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코튼은 나중에 서신에서 사건의 일부를 요약했다. 한 편지에서는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명성 뒤에 숨었다"고 주장했다. 1638년 3월 하트포드의 사무엘 스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허친슨과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때마침 발견되지 않았다면 믿음과 종교를 부패시키고 파괴했을 사람들"이라고 언급했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완전하게 진술한 것은 1640년 4월 휠라이트에게 보낸 긴 편지였는데, 여기서 그는 논쟁이 진행되면서 그들 모두가 저지른 잘못을 검토했다. 그는 자신의 회중 구성원들이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얼마나 잘 알고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며, 특히 윌리엄 아스핀월과 존 코게셜의 이단적인 견해를 언급했다. 그는 휠라이트가 허친슨과 코게셜이 말하는 요점을 알아차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논쟁이 한창일 때 코튼은 뉴헤이븐으로 이주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1637년 8월 시노드에서 자신의 교구민 중 일부가 이단적인 견해를 품고 있으며, 다른 목사들이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견해가 옳았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부 치안 판사와 교회 장로들이 그에게 보스턴을 떠나는 것이 매우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사적으로 알렸고, 그는 동료 목사들과 화해할 방법을 찾으면서 보스턴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논쟁이 끝난 후 코튼은 아퀴드넥 섬(당시 로드아일랜드라고 불림)으로 간 사람들 중 일부와 연락을 지속했다. 그중 한 명은 링컨셔 출신의 친구 윌리엄 코딩턴이었다. 코딩턴은 자신과 아내가 논쟁 후 코튼의 설교가 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들었다고 썼다. "우리가 전에 그가 무엇을 주장했는지 알지 못했다면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코딩턴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판단 오류"를 개혁하라는 코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640년 보스턴 교회는 아퀴드넥으로 사절을 보냈지만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앤의 아들인 젊은 프랜시스 허친슨이 보스턴 교회에서 탈퇴하려 했으나, 코튼은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코튼은 휠라이트의 추방 명령 해제를 돕는 데 계속 관심을 가졌다. 1640년 봄, 그는 휠라이트에게 일반 법원에 편지를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부 지침을 보냈다. 그러나 휠라이트는 아직 코튼이 제안한 수준의 과오를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법원에서 그의 추방을 해제할 만큼 충분한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4년이 더 걸렸다.
논쟁 동안 코튼의 가장 혹독한 비판자 중 일부는 사건 이후 그와 화해할 수 있었다. 허친슨 파문 1년 후, 토마스 더들리는 록스버리 교회의 평신도인 윌리엄 데니슨을 상담하는 데 코튼의 도움을 요청했다. 1646년, 토마스 셰퍼드는 안식일에 대한 그의 책인 ''Theses Sabbaticae''를 작업하면서 코튼의 의견을 구했다.
5. 말년과 유산
반율법주의 논쟁 이후 존 코튼은 자신의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목사들과 달라 어려움을 겪었으며, 앤 허친슨을 옹호하려다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는 논쟁이 격화되자 영국에 있는 동료들에게 식민지 내 불화의 심각성을 축소하여 전달하려 했으며, 논쟁의 본질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차이일 뿐이며 뉴잉글랜드는 여전히 좋은 정착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코튼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서신을 통해 허친슨과 다른 이들이 "믿음과 종교를 부패시키고 파괴했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으며, 논쟁 과정에서 자신을 포함한 관련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성찰했다. 특히 자신의 교인 일부가 자신의 가르침을 넘어 급진적인 견해로 나아간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인정했다. 논쟁이 한창일 때는 뉴헤이븐으로 이주하는 것도 고려했으나, 1637년 8월 시노드를 거치며 자신의 교인 일부가 실제로 이단적 견해를 가졌음을 인식하고 동료 목사들과 화해의 길을 모색하며 보스턴에 남기로 결정했다.
논쟁 이후에도 코튼은 아퀴드넥 섬(당시 로드아일랜드)으로 이주한 윌리엄 코딩턴 등 일부 인사들과 교류를 이어갔으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코딩턴은 논쟁 이후 코튼의 설교가 크게 변했다고 지적했으며, 보스턴 교회가 아퀴드넥으로 보낸 사절단은 환영받지 못했다. 한편, 코튼은 추방된 존 휠라이트의 복권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4년 만에 휠라이트는 잘못을 인정하고 추방 명령이 해제되었다. 논쟁 중 코튼을 강하게 비판했던 토마스 더들리나 토마스 셰퍼드 같은 인물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코튼과 화해하고 그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코튼은 뉴잉글랜드에서 교인들과 동료 목사들에게 성경 해석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콩코드의 피터 벌클리 목사나 플리머스의 존 레이네스 목사, 윌리엄 브루스터 장로 등이 교리적 문제나 교회 운영의 어려움에 대해 코튼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또한 대서양 건너 영국에 있는 목회자 및 평신도들과도 활발히 서신을 교환하며 기독교 공동체의 유대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뉴잉글랜드에서의 코튼의 명성은 영국 링컨셔 시절과 비슷했지만, 환경에는 차이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큰 석조 교회에서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했지만, 뉴잉글랜드에서는 작은 목조 건물에서 소규모 회중을 대했다. 영국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했지만, 뉴잉글랜드에서는 거의 여행하지 않았고, 대신 다른 지역 목회자들이 그의 목요 강연을 듣기 위해 보스턴을 찾았다. 젊은 학자들을 지도하는 일은 계속했지만, 그 수는 영국 시절보다 훨씬 적었다.
코튼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뉴잉글랜드 교회의 정치 체제, 즉 교회정치였다. 그는 1636년경부터 독립적인 개별 교회가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회중주의 모델을 정립했으며, 이는 "뉴잉글랜드 방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장로교의 계층적 구조나 잉글랜드 국교회의 감독 정치와는 다른 형태였다. 회중주의자들은 각 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에는 반대하며 내부 개혁을 추구했다.
코튼은 그의 경건함, 학식, 온화한 성품 덕분에 뉴잉글랜드 회중주의 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로저 윌리엄스의 분리주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윌리엄스가 추방되기 전 그의 생각을 바꾸려 시도했다. 코튼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구약성서를 모델로 한 신정정치를 이상적인 정부 형태로 여겼다. 그는 민주주의가 교회나 국가에 적합한 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견해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주장한 로저 윌리엄스와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1640년대 초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과 함께 잉글랜드 의회에서 청교도 세력이 부상하자, 교회 정치 문제는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되었고, 코튼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도자들에게 참석 요청이 있었으나, 코튼은 불참했다. 그는 총회가 장로교 중심으로 운영될 것을 예상했고, 글을 통해 회중주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한 코튼의 응답이 1644년에 출판된 ''천국의 열쇠'' (''The Keyes of the Kingdom of Heaven'')였다. 이 책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회중주의적 교회 정치를 설득하려는 시도였으며, 토마스 굿윈과 필립 나이 같은 잉글랜드 목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코튼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는 내가 교회나 연방 모두에 적합한 정부로 하나님께서 결코 제정하신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다시 한번 명시했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립한 회중주의는 역설적으로 이후 북미 식민지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 장로교도들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잉글랜드 공화국 시기 독립파 지도자가 되는 존 오웬과 같은 인물의 사상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회중주의는 뉴잉글랜드 내외에서 비판에 직면했는데, 특히 잉글랜드의 장로교 목사들과의 논쟁이 두드러졌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 로버트 베일리는 1645년 ''시대의 오류에 대한 경고'' (''A Dissuasive from the Errours of the Time'')를 출판하여 회중주의를 비판하고 코튼을 직접 공격했다. 베일리는 회중주의가 "비성경적이고 실행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코튼의 견해를 "불안정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코튼은 1648년 ''회중 교회의 길을 깨끗이 함'' (''The Way of Congregational Churches Cleared'')을 출판하여 베일리의 비판에 답했다. 이 책에서 그는 반율법주의 논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포함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더 드러냈으며, 회중주의와 장로교주의 모두 이단에 맞서는 데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베일리와 새뮤얼 러더퍼드 등의 추가 비판에 대해 코튼은 1650년 ''교회 회원들의 거룩함에 대하여'' (''Of the Holinesse of Church-Members'')를 통해 최종적으로 반박했다.
5. 1. 케임브리지 회의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끝난 후, 뉴잉글랜드 목사들은 장로교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가 위치한 케임브리지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초기 논의는 존 코튼과 토머스 후커가 주도했다.3년 뒤인 1646년 9월, 케임브리지에서 공식적인 시노드(종교회의)가 열려 "교회 정부의 모델"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회의를 이끌도록 임명된 세 명의 주요 목사는 존 코튼, 리처드 매더, 랄프 파트리지였다. 회의의 결과로 케임브리지 강령이라는 중요한 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는 코튼과 매더의 저술 내용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었다.
이 강령은 뉴잉글랜드 지역 대부분의 교회에서 받아들여졌으며, 1648년에는 매사추세츠 일반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 이를 통해 회중교회의 교회 정치를 규정한 공식적인 입장이 확립되었고, 이는 "뉴잉글랜드 방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5. 2. 후기 저술 활동

미국 식민지 개척 초기에는 다양한 종교적 종파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기존의 정통 청교도들에게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집단에는 반율법주의자, 패밀리스트, 재세례파 (일반 및 특별 침례교도 포함), 퀘이커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매사추세츠에서 추방되어 포츠머스, 뉴포트 또는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 등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이러한 종파들 가운데 특히 논란이 된 인물은 새뮤얼 고턴이었다. 그는 플리머스 식민지와 포츠머스 정착지에서 모두 쫓겨났고,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에서는 자유 시민권을 거부당했다. 1642년, 그는 이후 워릭이 되는 지역에 정착했으나, 이듬해 추종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다소 의심스러운 법적 근거로 보스턴으로 압송되었다. 1643년 10월, 그는 보스턴에서 코튼의 설교를 강제로 들어야 했고, 그 내용에 대해 반박했다. 그의 종교적 견해를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코튼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뉴잉글랜드의 좋은 평판을 지키기 위해" 고턴의 처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고턴의 신학적 견해가 회중주의에 매우 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총회에서 행정관들은 사형을 요구했지만, 대의원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좀 더 동정적인 입장이었다.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고턴과 그의 추종자들은 풀려났다.
존 코튼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종교적 견해에 있어서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법률주의자"에 가까워졌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의회의 성공 이후 다양한 종교적 견해가 자유롭게 표출되는 상황에 대해 당혹감을 느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잉글랜드에서 새로 도착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로드아일랜드에서 오는 방문객들까지 "끔찍하게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1651년 7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 침례교 신자가 된 로드아일랜드 주민 세 명, 즉 존 클라크, 오바디아 홀름스, 존 크랜달이 방문했다. 매사추세츠 당국은 이들의 방문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여 세 사람을 투옥했다. 코튼은 이들의 재세례파적 견해가 지닌 "극악함"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세 사람에게는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벌금이 부과되었다. 친구들이 클라크와 크랜달의 벌금을 대신 내주었지만, 홀름스는 타인이 자신의 벌금을 내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공개적으로 매우 잔인한 채찍질 형벌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몇 주 동안 팔꿈치와 무릎으로만 엎드려 잠을 잘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박해 소식은 잉글랜드에 전해져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코튼의 링컨셔 시절 친구였던 리처드 살턴스톨 경은 1652년 코튼과 존 윌슨에게 편지를 보내 식민지의 종교적 박해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당신들의 폭정과 박해에 대해 매일같이 들려오는 슬픈 소식에 내 영혼이 깊이 슬퍼하고 있다. 당신들은 양심을 이유로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채찍질하고, 투옥한다"고 썼다. 또한 "이러한 가혹한 방식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당신들의 평판을 매우 떨어뜨렸다"고 덧붙였다. 로저 윌리엄스 역시 이러한 박해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이 글은 코튼이 사망한 후에 출판되었다.
5. 3. 죽음과 유산
존 코튼은 생애 마지막까지 교회 정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와 서신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회중주의에 관한 그의 마지막 출판물은 1652년에 완성된 ''장로교와 회중 교회 간의 조정 및 친교를 위한 몇 가지 질문''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가 장로교 교회 정치에 대해 이전보다 더 관대한 태도를 보였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튼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진행되던 종교적 관용 정책의 방향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잉글랜드가 자신이 발전시킨 미국의 회중주의 방식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회중주의 지지자들이 자신이 혐오했던 관용 정책을 채택한 것에 실망감을 느꼈다.
1652년 가을, 코튼은 하버드 학생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찰스 강을 건너다가 병을 얻었다. 그의 건강은 빠르게 악화되어 11월에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보스턴 교회를 위해 디모데 전서에 대한 연속 설교를 진행 중이었는데, 12월에 병상에 누워서도 이 설교를 마무리 지었다. 1652년 12월 2일, 아모스 리처드슨은 존 윈throp 주니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코튼 씨는 매우 아프며, 이 병에서 살아남지 못할까 봐 매우 두렵습니다. 그는 다리와 몸에 큰 부종이 있습니다."라고 그의 위독한 상태를 전했다.
코튼의 사망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보스턴 생명 기록''은 12월 15일을 사망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자료에서는 1652년 12월 23일을 사망일로 제시하며 이 날짜가 더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보스턴에서 사망하여 킹스 채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초기 퍼스트 처치 목사였던 존 데이븐포트(1670년 사망), 존 옥스브리지(1674년 사망), 토마스 브리지(1713년 사망)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다. 그러나 1686년 보스턴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킹스 채플이 묘지 부지 위에 세워지면서 코튼을 포함한 많은 1세대 정착민들의 정확한 매장 위치와 원래 묘비는 소실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 있는 표지석은 후대에 교회에서 설치한 것으로, 실제 유해가 묻힌 곳이라기보다는 기념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코튼은 뉴잉글랜드 청교도 신학, 특히 교회 정치 이론인 회중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뉴잉글랜드 방식'으로 알려진 회중 교회의 조직 형태를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저서 ''천국의 열쇠'' 등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비록 그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 총회는 장로교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존 오웬과 같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튼 자신은 신정정치를 선호하며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그가 정립한 회중주의는 이후 북미 잉글랜드 식민지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신학과 교회론은 이후 미국 교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저서
존 코튼은 방대한 양의 서신과 수많은 설교, 그리고 여러 교리 문답서를 남겼다. 그의 저술 활동은 신학, 교회 정치,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6]
어린이들을 위한 짧은 교리 문답서인 ''보스턴의 아기들을 위한 영적 젖'' Spiritual Milk for Boston Babeseng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미국인이 쓴 최초의 어린이 책으로 여겨지며, 1646년에 출판되어 17세기에만 아홉 번 인쇄되었다.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이 교리 문답서는 1701년경 ''뉴잉글랜드 프라이머''에 포함되어 150년 이상 그 일부로 남아 있었다. 코튼의 손자인 코튼 매더는 당시 뉴잉글랜드 어린이들이 대부분 이 교리 문답서로 교육받았다고 기록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 중 하나는 1630년, 존 윈throp의 함대를 타고 잉글랜드를 떠나려는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약속, 그의 식민지에'' God’s Promise to His Plantationeng이다.
코튼은 법률 제정에도 관여했다. 1636년 5월,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법률 초안 작성을 위한 위원회에 임명되어 ''모세의 재판관'' Moses his Judicialseng을 작성했지만, 이는 채택되지 않았다.[6] 그 결과로 나온 법전은 ''현재 제정된 뉴잉글랜드 법의 개요'' An Abstract of the Laws of New England As They Are Now Established, 1641eng라는 제목을 가졌다. 이 법은 매사추세츠에서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으나, 존 데이븐포트가 뉴헤이븐 식민지에서 법 체계의 기초로 삼았고, 롱아일랜드의 사우스햄튼 정착지의 모델이 되었다.
교회 정치에 관한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으로는 ''천국의 열쇠'' The Keyes of the Kingdom of Heaveneng와 ''회중 교회 정화의 길'' The Way of Congregational Churches Clearedeng이 있다. 이 책들에서 코튼은 장로교 통치 대신 회중 정치 체제를 옹호했다.
코튼은 또한 분리주의와 양심의 자유 문제에 대해 로저 윌리엄스와 격렬한 팜플렛 논쟁을 벌였다. 윌리엄스가 ''박해의 피 묻은 교리'' The Bloudy Tenent of Persecution, 1644eng를 출판하자, 코튼은 ''어린 양의 피로 씻어 희게 된 피 묻은 교리'' The Bloudy Tenent, Washed, And Made White in the Bloud of the Lambeeng로 반박했다. 이에 윌리엄스는 다시 ''코튼 씨가 어린 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하려는 시도에 의해 더욱 피 묻은 교리'' The Bloody Tenent Yet More Bloody by Mr. Cotton's Endeavor to Wash it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eeng로 응수했다.
그의 사후에는 찰스타운의 전 교사이자 토마스 앨런이 코튼의 설교를 편집하여 ''은혜 언약에 관한 논문'' A Treatise of the Covenant of Graceeng을 1659년에 출판했다.[7] 이 책은 1662년 보스턴 시노드 보고서에서 조나단 미첼이 서문에서 길게 인용하기도 했다.[8]
코튼의 저작 전체 목록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9]
참조
[1]
서적
Hot Protestants: A History of Puritanism in England and America
Yale University 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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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7
[4]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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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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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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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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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quod.lib.umi[...]
Thomas Allen
1659
[8]
문서
"Propositions concerning the subject of baptism and consociation of churches, collected and confirmed out of the word of God, by a synod of elders and messengers of the churches in Massachusetts-Colony in New England. Assembled at Boston, ... in the year 1662"
https://archive.org/[...]
S.G. [i.e., Samuel Green] for Hezekiah Usher at Boston in New-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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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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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인용
청교도 설교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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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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