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카이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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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두카이 카툰은 1448년 또는 1449년 몽골 옹구트부 초로스 씨족 출신으로, 만두울 칸의 소 카툰이 된 인물이다. 만두울 칸 사후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투 몽케를 다얀 칸으로 추대하고 섭정 역할을 수행하며 오이라트 정벌과 명나라와의 대립을 이끌었다. 그녀는 다얀 칸과의 사이에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낳았으며, 몽골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만두카이의 삶은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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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몽골 부족 연합에서 시작된 오르도스부는 칭기스 칸의 영묘를 수호하며, 다얀 칸에 의해 재통일된 몽골에 복속, 알탄 칸 시대를 거쳐 청나라 지배 아래 7개의 기로 재편되었고, 현재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시의 기원이다. - 북원 - 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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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몽골 부족 연합에서 시작된 오르도스부는 칭기스 칸의 영묘를 수호하며, 다얀 칸에 의해 재통일된 몽골에 복속, 알탄 칸 시대를 거쳐 청나라 지배 아래 7개의 기로 재편되었고, 현재 내몽골 자치구 오르도스 시의 기원이다.
만두카이 카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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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 | |
칭호 | 몽골의 하툰 |
생애 | |
출생 | 기원후 1449년경 |
출생지 | 몽골 |
사망 | 1510년 |
사망지 | 몽골 |
매장지 | 알려지지 않음 |
아버지 | 초로스바이 친상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만둘 칸 다얀 칸 |
자녀 | 투르볼라드 울루스볼루드 아르수볼루드 바르스 볼루드 지농 토롤투 오치르볼라드 알추볼루드 |
왕조 | |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왕조 | 북원 |
2. 생애
몽골비사에 따르면, 만두카이는 투메드 옹구트의 초로스바이 테무르 친상의 딸로 태어났다. 성장한 만두카이는 만두울 하안의 소 카툰(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만두울 하안은 베그 아르슬란과 대립, 이스마일과 투르겐과 협력하여 베그 아르슬란을 살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만두울 하안과 예케 하바르트 중궁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만두카이와의 사이에서는 딸 2명만 태어났기 때문에 차기 하안을 둘러싼 혼란이 발생했다.
호르친부의 우네 보라트는 만두카이와 재혼하여 하안위에 오르려 했고, 만두카이에게 구혼했다. 당시 몽골에는 칭기스 칸의 혈통을 잇는 바투 몽케라는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만두카이는 우네 보라트와 바투 몽케 중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라크추트의 상가이 오르루크는 바투 몽케와의 결혼에 찬성했지만, 골라트의 사다이는 우네 보라트와의 결혼을 권했다. 그러나 만두카이는 상가이 오르루크의 아내 지간 아가의 조언에 동의, 바투 몽케와 결혼을 결심했다.
만두카이는 당시 7세였던 바투 몽케를 데리고 에시 카툰의 영전에 "저의 몸을 살펴주시고, 7남 1녀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고, 이를 들은 우네 보라트는 구혼을 철회했다고 한다.[2]
1479년, 만두카이는 바투 몽케와 결혼했고, 바투 몽케는 "다얀 칸"으로 즉위했다. 같은 해, 만두카이는 다얀 칸을 데리고 도르벤 오이라트에 원정, 테스 부르투에서 승리했다.[4] 만두카이는 다얀 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으며, 아들들은 각각 왕가를 형성하여 번영했다.
2. 1. 생애 초기
1448년 몽골 옹구트부 초로스 씨족 출신으로 태어났다.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설에는 1449년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는 초로스 바이 테무르 칭상(승상)이며, 북원과 명나라의 경계 지역인 투메드부의 후허하오터(현재 내몽골 자치주 남부 후허하오터시) 또는 오르도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만두카이는 몽골 문자 읽고 쓰기, 승마, 양궁 등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며 성장했다. 1464년 (혹은 1465년) 16세의 나이로 만두울 칸의 소카툰(후비)이 되었으며,[2] 만두울 칸과의 사이에서 두 명의 딸을 낳았다.

2. 2. 만두울 칸의 소카툰
만두울 칸은 벡 아르슬란 타이시의 지원으로 1475년에 대칸위에 올랐으나, 벡 아르슬란과 대립하게 되었다. 벡 아르슬란은 자신의 딸 예케 카바르투를 만두울 칸의 대카툰(첫 번째 부인)으로 만들어(1463) 실권을 쥐고 흔들었다.[2] 만두울 칸은 벡 아르슬란의 친척 동생인 이스마일 타이시, 투메드부의 투르겐 등과 손잡고 벡 아르슬란을 살해했다.[2] 얼마 뒤 만두울 칸은 자신의 지위를 노린다고 의심되는, 혹은 대칸위를 원하던 조카 혹은 종손인 바얀 몽케 볼후 지농(친왕)과 싸우다가 1478년에 사망했다.[2] 일설에는 병으로 사망했다고도 한다.만두울 칸과 예케 하바르투 카툰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만두카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2명만이 있었기 때문에, 차기 칸을 둘러싸고 혼란이 발생했다.[2] 잭 웨더포드(Jack McIver Weatherford)는 자신의 저서에서 두 사람은 실제로는 딸이 아니라 만두울 칸의 친척으로, 만두카이에 의해 돌봐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했다.[2]
2. 3. 만두울 칸 사후의 혼란기
1478년 만두울 칸이 타이순 칸의 손자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 사망한 후, 몽골은 혼란에 빠졌다. 싸움에서 이긴 바얀 몽케 볼후 지농도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479년에 피살되었다.[2] 만두울 칸의 첫 부인 예케 카바르투는 행방불명되었고, 몽골 왕자들은 서로 대칸이 되려고 경쟁했다.바얀 몽케 볼후 지농은 이스마일 타이시에게 암살되었고, 그의 부인 시케르는 이스마일 타이시와 재혼하여 떠났다.[2] 만두카이는 숨어 지내던 바얀 몽케 볼후 지농의 아들 바투 몽케를 선택했다. 당시 바투 몽케는 영양실조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나, 만두카이는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보르지긴 가문에 충성하던 투무르하닥은 바투 몽케를 데려와 암낙타 아홉 마리의 젖을 먹이고, 은잔 세 개가 닳도록 은잔으로 살을 문질렀다고 한다.[2]
만두울 칸 사후, 쿠빌라이 칸의 자손 대부분이 사라진 상황에서 바투 몽케는 거의 유일하게 남은 귀한 황금씨족의 황손이었다. 그는 대칸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 재혼한 생모에게 천대받는 버려진 아이였다. 만두카이는 이런 바투 몽케를 거두어 돌보았다.[2]
당시 유력했던 호르친부의 우네 보라트는 만두울 칸의 유산을 물려받은 만두카이와 재혼하여 하안위에 오르려 꾀했고, 만두카이에게 구혼했다. 한편, 당시 몽골에는 칭기스 칸의 혈통을 잇는 바투 몽케라는 남자아이가 있었고, 만두카이는 우네 보라트와 바투 몽케 중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아라크추트의 상가이 오르루크는 바투 몽케와의 결혼에 찬성했지만, 골라트의 사다이는 우네 보라트와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만두카이는 상가이 오르루크의 아내 지간 아가의 조언에 동의하고, 바투 몽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2]
만두카이는 당시 7세였던 바투 몽케를 데리고 에시 카툰(Esi qatun)의 영전에 "저의 몸을 살펴주시고, 7남 1녀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고, 이것을 들은 우네 보라트는 구혼을 철회했다고 한다.[2]
1479년, 만두카이는 바투 몽케와 결혼했고, 바투 몽케는 "다얀 칸(Dayan qaγanmn)"으로 즉위했다. 같은 해, 만두카이는 다얀 칸을 데리고 도르벤 오이라트에 원정하여 승리했다.[4]
2. 4. 하르친부의 청혼과 거절
칭기즈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의 후손인 하르친(호르친)부의 우느 볼라드는 만두울 칸의 후비 만두카이에게 청혼했으나, 만두카이는 이를 거절했다. 만두카이는 우느 볼라드의 계속된 청혼에 뜨거운 차를 쏟아붓고 쫓아냈다고 한다.[2]몽골원류에 따르면 만두하이 카툰은 하르친부의 우느 볼라드와 재혼할지, 칭기즈 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바투몽케와 재혼할 것인지 고민했다. 당시 영향력이 컸던 호르친 일족의 우네 보라드는 만두룬 칸의 재산을 물려받은 만두하이와 재혼하여 칸이 되려고 했고, 만두하이에게 구혼했다. 한편, 당시 몽골에는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투 몽케라는 소년이 있었고, 만두하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네 보라드나 바투 몽케와 결혼해야 하는지 물었다. 아라쿠트의 상가이 올루크는 바투 몽케와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했고, 고라트의 사다이는 우네 보라드와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만두하이는 상가이 올루크의 아내 지간 아가로부터 대칸의 후손과 결혼하는 것이 옳다는 조언을 듣고 바투몽케를 선택했다.[2]
사간 세첸의 『몽골비사』에 따르면, 만두카이는 지간 아가의 다음과 같은 조언에 동의하며 사다이를 꾸짖고 바투 몽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2]
:Qasar-un üre bolai kemen|카사르의 자손이라고 해서mn
:qarangγui mör-i ködelgegči boluyu|어두운 길을 걷게 되고mn
:qamuğ ulus-iyan qayačaqu boluyu|모든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멀어져mn
:qatun ner-e-ben aldaqu boluyu|카툰의 칭호를 잃을 것입니다.mn
:Qayan-u üre bolai kemen|칸의 자손이라고 해서mn
:qayiral ügei egüde-yi bariğči boluyu|하늘의 신의 가호를 받게 되고mn
:qamuğ ulus-iyan aburaqu boluyu|모든 당신의 백성을 지배하고mn
:qatun ner-e-ben aldarsiğulqu boluyu|카툰의 명예를 칭송받을 것입니다.mn
:Qayan-u üre-yi bičikēn kemen|칸의 자손이 작다고 해서mn
:Qasar-un üre-yi yeke kemen|카사르의 자손이 크다고 해서mn
:qatun bidan-i ebderebei kemen|카툰인 나의 신세가 과부라고 해서mn
:yambar üge-yi kelelčebai či|그대는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가mn
만두카이는 당시 7세였던 바투 몽케를 데리고 에시 카툰(Esi qatun)[3]의 영전에 "저의 몸을 살펴주시고, 7남 1녀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고, 이를 들은 우네 보라트는 구혼을 철회했다고 한다.[2]
2. 5. 바투 몽케의 대칸 추대와 섭정
1479년, 만두카이는 몽골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자 국조인 칭기즈 칸의 가묘가 있는 성지 나이만 차강게르 앞에서 바투 몽케를 대칸으로 추대하고 성대한 즉위식을 열었다. 바투 몽케는 대칸위에 오르며 칸호를 '다얀 칸'이라고 했는데, '다얀'은 '大元'을 의미하는 것으로, 몽골 제국 부활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4] 칭기즈 칸의 가묘 앞에서 치러진 즉위식은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몽골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옛 선조의 영화를 재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짐하는 자리였다.만두카이는 '세첸'이라는 존호를 받고 섭정으로서 통치하며, 대칸의 자리를 노리는 이스마일 타이시를 제거했다.
2. 6. 오이라트 정벌
1479년, 만두카이는 몽골군을 이끌고 오이라트와 전쟁을 벌여 타스 부르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4] 만두카이는 오이라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항을 부과했다.- 오이라트는 손가락 두 개보다 긴 깃털이 달린 헬멧을 착용할 수 없었다.
- 오이라트는 자신들의 ''게르'' 또는 유르트를 궁궐을 뜻하는 ''오르돈''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 오이라트는 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황금씨족사》에 따르면 만두카이의 정복 이후 오이라트인들에게 칼끝으로 고기를 집어 먹는 행동을 금지시켰다고 한다.[4]
2. 7. 명나라와의 관계
만두카이는 1480년 다얀 칸의 이름으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명나라는 사신을 처형했다.[4] 만두카이는 국경 지대를 폐쇄하고 무역을 중단했으며, 명나라 북부를 약탈했다. 이에 명나라는 만리장성을 증축했다. 1481년, 만두카이는 34세, 다얀 칸은 18세 때 두 사람은 결혼했다. 1501년, 만두카이는 명나라의 공격을 피해 케룰렌 강변으로 이동했다.2. 8. 다얀 칸의 카툰
1498년 오이라트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동몽골을 습격하자, 만두카이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오이라트 군대와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만두카이는 다얀 칸과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들(세 쌍둥이 포함)을 낳았으며, 이들은 이후 칭기즈 칸 가계의 새로운 몽골족을 탄생시켰다. 만두카이는 다얀 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으며, 몽골 제국 부활을 위한 역할을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1487년 만두카이는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동몽골의 주도권을 확립한 후, 장성한 다얀 칸에게 몽골의 통치권을 넘겼다.
1480년부터 다얀 칸과 만두카이는 국경 무역을 폐쇄하고 북원 사절을 살해하여 명나라에 압력을 가했다. 명나라는 만두카이를 견제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빠르게 확장했다. 만두카이는 오르도스 지역을 재점령하고 병사를 주둔시켜 명나라를 감시했다. 케를렌 강으로 이동한 후에도 만두카이의 남편 다얀 칸은 명나라에 대한 약탈을 계속했다.
3.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
만둘 칸 | 이름 미상의 딸 2명 |
다얀 칸 | 장남: 투루 볼라드 |
차남: 올로스 볼라드 | |
3남: 바르수 볼라드 | |
4남: 아르소 볼라드 | |
5남: 오치르 볼라드 | |
6남: 알초 볼라드 | |
7남: 알 볼라드 | |
딸: 토르롤투 |
4. 평가
만두카이는 다얀 칸을 칭기스 칸의 후계자로 옹립하고 오이라트를 물리치는 등 몽골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은 그녀의 삶을 다룬 전설의 바탕이 되었다.[1] 그녀는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남겼으며, 알탄 칸과 리그덴 칸을 포함한 모든 후대 몽골의 칸과 귀족들은 그녀의 후손이다.
만두카이 카툰은 몽골 연대기에서 다얀 칸 옹립의 주역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동시대 한문 사료에는 만두카이의 존재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옹기예부의 이스마일, 투메트부의 투르겐 등이 다얀 칸 옹립에 기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만두카이 카툰의 실제 역할은 제한적이었거나, 관련 설화의 대부분이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5]
하지만 몽골 역사에서 칸의 선출에 큰 역할을 한 여성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며, 한문 사료에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만두카이 카툰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노우에 오사무는 만두카이의 배려와 이스마일의 지지 모두 다얀 칸의 즉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6]
만두카이의 삶은 여러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 샤그다자빈 나차그도르지의 소설 《지혜로운 만두카이 여왕》(1981)과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몽골 영화(1987)는 만두카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음악은 몽골의 저명한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잔차노로브 나차그가 만들었다.
- 2021-2022년에 출판된 스타 Z. 데이비스의 역사 소설 《Fractured Empire Saga》는 만두카이의 삶을 허구화한 작품으로, 《황룡의 딸》, 《흑기사의 군주》, 《푸른 늑대의 어머니》, 《옥의 제국의 여제》의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
- 2014년 독일 작가 타냐 킨켈이 쓴 역사 소설 《Manduchai - Die letzte Kriegerkönigin》는 만두카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의 삶과 백성의 카툰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5. 관련 작품
샤그다자빈 나차그도르지의 소설(1981)을 바탕으로 한 몽골 영화 《지혜로운 만두카이 여왕》(Мандухай сэцэн хатанmn, 1987)이 제작되었으며, 영화 음악은 잔차노로브 나차그가 작곡했다.
5. 1. 영화
- 만두카이 현명한 여왕 (1988년, 몽골 영화) - 수부드 남시라이 주연[1]
- 만두하이 (1988년, 몽골) - 남스라인 소브드 주연, 나차그돌지 샤그다르샤브의 소설 『현비 만두하이』가 원작.
5. 2. 소설
샤그다르자빈 나차그도르지의 소설 《현비 만두하이》(나차그돌지 샤그다르샤브 저, 코이부치 신이치 역, 요미우리 신문사, 1989년)는 1988년 몽골에서 영화 만두하이(1988년, 몽골, 출연: 남스라인 소브드)로 제작되었다.[1]스타 Z. 데이비스의 역사 소설 《Fractured Empire Saga》(2021-2022)는 만두카이의 삶을 다룬 4권짜리 소설 시리즈로, 《황룡의 딸》, 《흑기사의 군주》, 《푸른 늑대의 어머니》, 《옥의 제국의 여제》로 구성되어 있다.[1]
독일 작가 타냐 킨켈의 역사 소설 《Manduchai - Die letzte Kriegerkönigin》(2014)은 만두카이가 어떻게 자신의 백성의 카툰이 되었는지를 다룬다.[1]
참조
[1]
서적
Fractured Empire Saga
2021-2022
[2]
문서
アルタン・ハーン伝
[3]
문서
ソルコクタニ・ベキ
[4]
문서
[5]
간행물
2003
[6]
간행물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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