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도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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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도스부는 15세기경 몽골 고원에서 활동하던 몽골 부족 연합의 투멘 중 하나로, 칭기스 칸의 영묘를 봉사하는 집단에서 유래했다. 오르도스라는 명칭은 "궁정"을 의미하며, 지논이 수장으로 원나라 시대 칭기스 칸 영묘를 수호하던 왕족의 칭호를 따랐다. 15세기에는 황하 유역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 고원을 형성했으며, 16세기에는 다얀 칸의 지배를 받다가 토메트부와 분열되었다. 이후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1635년 청나라에 복속되어 맹기제 하에 7개의 기로 나뉘었다. 현재는 이커자오 맹이 오르도스 시로 변경되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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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탄 칸은 16세기 몽골의 지배자로서 투메트부를 다스리고 명나라와 교역을 시도하다 베이징을 공격하고 화의를 맺었으며, 티베트 불교를 몽골에 부흥시키고 후허하오터를 건설하는 등 몽골의 종교적,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 바투몽케 다얀 칸 - 군빌리크 메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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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몽골 제국 붕괴 후, 오르도스부는 우익 지농직을 세습했다. 알탄 칸 생전에는 그가 우익 3투멘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초, 다얀 칸은 차남 울루스 보라트를 오르도스의 지농으로 보냈으나, 그는 용시에부의 이브라힘 타이시에게 살해당했다. 1510년 다얀 칸이 이브라힘을 멸망시키고 몽골을 재통일하자, 오르도스는 토메트에 사위로 들어간 셋째 아들 바르스 보라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르스 보라트는 다얀 칸 사후, 차하르부와 대칸 지위를 계승한 조카 보디 아라크를 제쳐두고 칸을 자칭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으나, 사후 장남 군빌리크(오르도스)와 차남 알탄 칸(토메트)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1542년 군빌리크가 죽자 알탄 칸이 오르도스를 능가하는 세력을 얻었고, 차하르 대칸에게서 칸 칭호를 받았다. 이후 오르도스 지농 가문은 토메트 칸 가문과 함께 오이라트를 격파하고 칭하이를 점령했으며, 준가리아와 티베트까지 진출했다.[5]
1572년 명나라에 입공했고, 1628년 린단 칸이 토메트 칸 가문을 멸망시키자 차하르에 복속되었다. 1635년 후금(청나라)에 항복했다.[6]
청나라 통치 아래 맹기제로 오르도스에 7개 기가 설치되었고, 바르스 보라트의 후예 7가문이 기장을 세습했다. 오르도스 7기는 이커자오(이푸 조) 맹을 이루었다. 2002년 이커자오 맹은 지급시인 오르도스시로 변경되었다.
2. 1. 기원과 형성 (15세기)
15세기경, 몽골 고원에서 활동하던 몽골 부족 연합의 투멘 (부족(오토크)이 모여 형성된 부족 집단) 중 하나로서 역사에 등장한다.오르도스라는 이름은 몽골어·튀르크어로 "궁정"을 의미하는 "오르도"를 어원으로 하며, 이 집단은 몽골 제국의 시조 칭기스 칸의 생전 궁정을 칭기스의 영묘로서 봉사했다. 집단의 장은 지논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원나라 시대에 몽골 고원에 주둔하며 칭기스 칸의 영묘를 수호했던 왕족의 칭호 "진왕"이 몽골어로 차용된 것이다. 따라서 오르도스부는 원나라의 진왕령을 기원으로 하는 집단으로 여겨진다[4]。
원의 시대에 칭기스 칸의 영묘는 몽골 고원 북동부의 켈렌 강 유역에 있었으며, 오르도스부의 선조들도 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했지만, 15세기경 오르도스부는 영묘와 함께 남하하여, 한족이 예로부터 "하투오"라고 불렀던 황하의 굴곡부에 들어가, 이후 오르도스 고원으로 불리는 고원으로 이주했다.
15세기 말경, 오르도스부를 포함한 몽골 서부는 오이라트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동부의 차하르부를 지배하는 몽골의 칸의 권위는 미치지 못했다.
2. 2. 남하와 정착 (15세기 ~ 16세기)
15세기경, 몽골 고원에서 활동하던 몽골 부족 연합의 투멘 (부족(오토크)이 모여 형성된 부족 집단) 중 하나로서 역사에 등장한다. 15세기 말경, 오르도스부를 포함한 몽골 서부는 오이라트의 영향 하에 있었으며, 동부 차하르부를 지배하는 몽골 칸의 권위는 미치지 못했다.[4]16세기 초, 몽골 다얀 칸은 오르도스에 차남 울루스 보라트를 사위로 보내 지논으로 삼았으나, 울루스 보라트는 용시에부의 이브라힘 타이시에게 살해당했다. 1510년 이브라힘이 다얀 칸에게 멸망하고 몽골이 재통일되자, 오르도스는 같은 서부 투멘인 토메트에 사위로 들어간 셋째 아들 바르스 보라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르스 보라트는 아버지 다얀 칸 사후, 차하르부와 대칸 지위를 계승한 조카 보디 아라크를 제쳐두고 한때 칸을 자칭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지만, 그가 죽은 뒤 장남 군빌리크가 오르도스, 차남 알탄이 토메트를 계승하면서 오르도스와 토메트는 다시 분할되었다. 1542년 군빌리크가 죽자 토메트의 알탄의 세력이 오르도스를 능가하게 되었고, 알탄은 차하르의 대칸으로부터 칸 칭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오르도스의 지논 가문은 주로 토메트 칸 가문과 함께 행동하며 오이라트와 싸워 칭하이를 점령하고, 준가리아나 티베트까지 침공하는 등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5]
1572년 토메트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입공했다. 1628년 차하르의 린단 칸이 토메트 칸 가문을 멸망시키자 차하르에 복속되었고, 1635년 차하르 정벌을 위해 오르도스 지방으로 진군해 온 후금(후의 청나라)에 항복했다.[6]
2. 3. 몽골 재통일과 분열 (16세기)
1510년 다얀 칸이 몽골을 재통일하면서, 오르도스는 서부 투멘인 토메트에 사위로 들어간 셋째 아들 바르스 보라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르스 보라트는 아버지 다얀 칸이 사망한 후, 차하르부와 대칸의 지위를 계승한 조카 보디 아라크를 제쳐두고 한때 칸을 자칭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4]바르스 보라트 사후, 장남 군빌리크가 오르도스를, 차남 알탄이 토메트를 계승하면서 오르도스와 토메트는 다시 분할되었다. 1542년 군빌리크가 사망하자, 알탄의 세력이 오르도스를 능가하게 되었고, 알탄은 차하르의 대칸에게 칸 칭호를 받았다. 이후 오르도스의 지논 가문은 주로 토메트의 칸 가문과 함께 행동하며, 오이라트와 싸워 칭하이를 점령하고, 준가리아나 티베트까지 침공하는 등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5]
2. 4. 알탄 칸 시대와 서방 진출 (16세기 ~ 17세기)
몽골 제국이 붕괴된 후, 오르도스부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알탄 칸 생전에는 우익 3투멘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4]1542년, 오르도스의 군빌리크가 사망하자, 토메트의 알탄 칸의 세력이 오르도스를 능가하게 되었다. 알탄 칸은 차하르의 대칸으로부터 칸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오르도스의 지논 가문은 주로 토메트의 칸 가문과 함께 행동하며, 오이라트와 싸워 칭하이를 점령하고, 준가리아나 티베트까지 침공했다.[5]
1572년에는 토메트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입공했다. 1628년 린단 칸이 토메트 칸 가문을 멸망시키자 차하르에 복속되었고, 1635년 후금(이후의 청나라)에 항복했다.[6]
오르도스부 지농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2. 5. 명나라와의 관계 (16세기 ~ 17세기)
16세기 초, 몽골의 다얀 칸은 오르도스에 차남 울루스 보라트를 사위로 보내 지논으로 보냈으나, 울루스 보라트는 용시에부의 이브라힘 타이시에게 살해당했다.[4]1510년 다얀 칸에게 이브라힘이 멸망하고 몽골이 재통일되자, 오르도스는 같은 서부 투멘인 토메트에 사위로 들어간 셋째 아들 바르스 보라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바르스 보라트는 아버지 다얀 칸 사후, 차하르부와 대칸의 지위를 계승한 조카 보디 아라크를 제쳐두고 한때 칸을 자칭할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지만, 그가 죽은 후 장남 군빌리크가 오르도스, 차남 알탄이 토메트를 계승하면서 오르도스와 토메트는 재분할되었다. 1542년, 군빌리크가 죽자, 토메트의 알탄의 세력이 오르도스를 능가하게 되었고, 알탄은 차하르의 대칸으로부터 칸의 칭호를 허가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오르도스의 지논 가문은 주로 토메트의 칸 가문과 행동을 함께하며,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했다.[5]
1572년에는 토메트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입공했다. 이후, 1628년에 차하르의 린단 칸이 토메트 칸 가문을 멸망시키자 차하르에 복속되었고, 1635년에는 차하르 토벌을 위해 오르도스 지방으로 진군해 온 후금(후의 청나라)에 항복했다.[6]
2. 6. 청나라 복속과 맹기제 (17세기 ~ 20세기)
1572년 투메드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입공했다. 1628년 차하르의 린단 칸이 투메드 칸 가문을 멸망시키자 차하르에 복속되었고, 1635년 차하르 토벌을 위해 오르도스 지방으로 진군해 온 후금 (후의 청나라)에 항복했다.[6]청나라 통치 하에 맹기제가 시행되면서 오르도스에는 7개의 기가 설치되었고, 바르스 보라트의 후예인 7 가문이 기장을 세습했다. 오르도스의 7기만으로 하나의 맹(이커자오(이푸 조) 맹)이 설치되었다.
이커자오 맹은 2002년 맹에서 지급시로 변경되어 오르도스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7. 현대 (20세기 ~ 현재)
청나라의 통치 아래 맹기제 하에 오르도스에는 7개의 기가 설치되었고, 바르스 보라트의 후예인 7 가문이 기장을 세습했다. 오르도스의 7기만으로 하나의 맹(이커자오(이푸 조) 맹)이 설치되었다.[6]이커자오 맹은 2002년에 맹에서 지급시로 변경되어, 오르도스 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구성 부족
16세기 말경에 편찬된 차간 테우케에서는 오르도스가 "12 오토크"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7], "12 오토크"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는 다양한 몽골어 사료를 상호 비교하여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8]
3. 1. 우익
16세기 말경에 편찬된 차간 테우케에서는 오르도스가 "12 오토크"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7], "12 오토크"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는 다양한 몽골어 사료를 상호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케구트와 시바구친 (Kegüd/Sibaγučin)
- 우라트와 탕구트 (Urad/Tangγud)
- 다라트와 한린 (Dalad/Qanglin)
- 메르키트와 바하나스 (Merkid/Baqanas)
- 베수트와 우구신 (Besüd/Ügüsin)
- 바타긴과 할리구친 (Batagin/Qaliγučin)
3. 2. 좌익
16세기 말경에 편찬된 차간 테우케에서는 오르도스가 "12 오토크"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7], "12 오토크"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는 다양한 몽골어 사료를 상호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하우친(Qaučin(Qaγučin))
- 케리예스(Keriyes(Kirgis))
- 차하트(Čaqad)
- 밍간(Mingγad(Mingγan))
- 호니친(Qoničin)
- 후야구친(Quyaγučin(Qoyar Küriyen))
이 외에도 칭기스 칸 묘를 관리하는 "사호리야(Dörben qoriya)", 원래는 욘시에부의 이브라힘 타이시의 산하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사오토크 우이구르친(Dörben otoγ Uyiγurčin)"・"삼오토크 아마하이(γurban otoγ Amaqai)"와 같은 집단이 소속되어 있었다.
3. 3. 기타
16세기 말경에 편찬된 차간 테우케에서는 오르도스가 "12 오토크"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7], "12 오토크"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에는 다양한 몽골어 사료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하우친(Qaučin(Qaγučin))
- 케리예스(Keriyes(Kirgis))
- 차하트(Čaqad)
- 밍간(Mingγad(Mingγan))
- 호니친(Qoničin)
- 후야구친(Quyaγučin(Qoyar Küriyen))
이 외에도 칭기스 칸 묘를 관리하는 "사호리야(Dörben qoriya)", 원래는 욘시에부의 이브라힘 타이시의 산하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사오토크 우이구르친(Dörben otoγ Uyiγurčin)"・"삼오토크 아마하이(γurban otoγ Amaqai)"와 같은 집단이 소속되어 있었다.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에는 당초 6개 기(旗)였으나, 이후 1개 기가 더해져 7개 기(Doloγan qosiγu)로 재편성되었다.
4. 역대 통치자
몽골 제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오르도스부의 우익 지농직은 세습되었다. 알탄 칸 생존 시에는 사실상 우익 3투멘의 영향력은 그가 행사했다. 몽골 제국 붕괴 이후 청나라 시대에는 자사크(札薩克)를 두어 통치했다.[1]
4. 1. 지논 (진왕)
몽골 제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우익 지농직을 세습했다. 알탄 칸의 생존 시에는 사실상 우익 3투멘의 영향력은 그가 행사했다.역대 지논(진왕)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4. 2. 청나라 시대 자사크
Эринчинmn이 청나라에 귀순한 후, 청나라는 오르도스부를 6개의 기(旗)로 나누고, 각 기에 자사크(札薩克)를 두어 통치하게 했다. 각 기의 자사크는 세습되었으며, 그 명칭과 세습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웹사이트
Mongolian, Peripheral
http://www.ethnologu[...]
20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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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ongolian Music, Dance, & Oral Narrative: Performing Diverse Identit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1
[3]
서적
The Mongolic Languag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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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岡田2010,305-306頁
[5]
문서
岡田2010,77-78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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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田2010,83-84頁
[7]
문서
森川1973,320-321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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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岡田 2004
[10]
문서
『清史稿』藩部世表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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