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4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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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티네이아 전투는 기원전 418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와 아테네-아르고스 동맹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스파르타는 테게아를 지원하기 위해 출병했으며, 아테네,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 연합군과 대치했다. 아기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위상을 회복하고, 아르고스와의 평화 협정을 통해 동맹을 약화시켰다. 이 전투는 팔랑크스 전술의 특징과 한계를 보여주며,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복잡한 동맹 관계와 갈등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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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네이아 전투 (기원전 418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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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 만티네이아 전투 |
부분전 | 펠로폰네소스 전쟁 |
날짜 | 기원전 418년 |
장소 | 만티네이아 |
결과 | 스파르타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파르타 |
교전국 1 동맹 | 테게아 헤라이아 마이날리아 스파르타의 기타 아르카디아 동맹국 |
교전국 2 | 아르고스 |
교전국 2 동맹 | 아테네 만티네이아 아르고스의 기타 아르카디아 동맹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아기스 2세 |
교전국 1 추가 지휘관 | 파락스 히포노이다스 아리스토클레스 |
교전국 2 지휘관 | 라케스 † |
교전국 2 추가 지휘관 | 니코스트라토스 †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총 병력 | 약 9,000명 |
교전국 1 상세 병력 | 스파르타인 3,600명 브라시다스의 베테랑 및 네오다모데스 2,000명 스키리타이 600명 아르카디아인 3,000명 (테게아인 1,500명 포함) |
교전국 2 총 병력 | 약 8,000명 |
교전국 2 상세 병력 | 아르고스인 4,000–5,000명 아테네인 1,300명 만티네이아인, 클레오나이인, 오르네아인, 아이기나인 및 기타 동맹군 2,000–3,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사상자 | 스파르타인 약 300명, 기타 동맹군 사상자는 미미함 |
교전국 2 사상자 | 약 1,100명 (아르고스인 700명, 만티네이아인 200명, 아테네 및 아이기나인 200명) |
2. 배경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강화조약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기원전 420년 아테네,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가 동맹을 체결했고, 기원전 419년 아르고스가 에피다우로스를 침공하면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아르고스 간의 긴장 관계는 높아졌다.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는 아기스 2세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했다.
2. 1.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개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 조약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기원전 420년 아테네,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가 동맹을 맺었고,[10] 기원전 419년 아르고스가 에피다우로스를 침공하면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아르고스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는 동맹군과 함께 "그리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대를 아기스 2세의 지휘 아래 파견했다.[11][12]아기스 2세는 유리한 전투를 이끌었지만, 아르고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단적으로 4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11] 이후 아테네(라케스와 니코스트라토스가 이끄는 보병 1,000명과 기병 300명), 엘리스, 만티네이아의 지원군을 받은 아르고스는 오르코메노스를 공격해 항복시키고,[13] 테게아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이때 레프레온 공격을 주장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엘리스 군대는 귀국했다.)[14]
이 때문에 아기스는 적과 마음대로 휴전하고 아르고스에게 오르코메노스를 넘겨준 원인을 만들었다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스파르타는 100000드라크마 벌금과 가옥 철거를 결의하려 했다. 아기스는 실패를 승리로 만회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렇지 못하면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다고 호소했다.[27] 그래서 에포로스(행정감독관)들은 형벌 적용을 유보하고, 군사 원정 중에 스파르타 시민 10명을 고문으로 붙여 군사 행동은 그들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도록 하는 전례 없는 법을 마련하였다.[28][15]
이후, 스파르타는 테게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아르카디아 동맹국에 참전을 요청하여 군대를 동원, 아기스를 총사령관으로 출진시켰다. 테게아는 라코니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여 스파르타에게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아르카디아 군이 합류하자, 스파르타는 코린토스, 보이오티아, 포키스, 로크리스 등 다른 동맹국에도 참전을 요청했다. 동시에 스파르타군은 위위구조 작전으로 테게아 북쪽 만티네이아 영토를 침공하여 황폐화시켰다.[16] 그러나 스파르타의 원군을 향하려면 아르고스 및 오르코메노스 영토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코린토스 등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스파르타군의 행동에 따라 아르고스와 동맹군은 험준한 언덕 위에 진을 쳤다. 아기스는 공격하려 했지만, 한 장로가 "화(禍)로 화를 치유하려 하는가"라며 충고하여 공격을 멈추고 테게아 영토로 군을 물렸다. 디오도로스는 이때 아기스에게 충고한 사람이 상담역 중 한 명인 팔라크스라고 전한다.[17] 아기스는 적을 평지로 유인하기 위해 테게아 영토의 폭우 흐름을 만티네이아 영토로 바꾸는 공사를 시작했다. 아르고스와 동맹군은 처음에는 적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적을 향해 진군했다.[18]
2. 2. 아테네-아르고스 동맹의 형성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강화조약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기원전 420년 아테네,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가 동맹을 맺었고,[10] 기원전 419년 아르고스가 에피다우로스를 침공하면서 스파르타와 아테네-아르고스 동맹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2. 3. 스파르타의 대응과 아기스 2세의 위기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는 동맹군을 소집하여 아기스 2세의 지휘 아래 아르고스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아기스 2세는 아르고스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단적으로 4개월 간의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하여,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26] 스파르타인들은 10만 드라크마의 벌금과 가옥 철거를 결의하려 했으나, 아기스가 실패를 승리로 만회하겠다고 호소하여 형벌 적용을 유보했다.[27]이후 아기스는 스파르타 시민 10명의 고문(심불로이)을 붙여 군사 행동에 대한 동의를 얻도록 하는 전례 없는 법에 따라야 했다.[28] 이는 스파르타 정치 시스템의 특징인 에포로이(감독관) 제도와 관련이 있었다.
아기스는 테게아에서 구원 요청을 받고, 아르카디아 동맹군과 합류하여 북부 동맹군(고대 코린토스, 보이오티아, 포키스, 로크리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부 동맹군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아기스는 이미 신임을 잃은 상태였기에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만티네이아 주변 영토를 침공하여 아르고스 군과 정면 대결을 강요했으나, 아르고스 군은 "가파르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기스는 돌격하려 했지만, "노련한 스파르타인" (또는 심불로스인 파락스)[3][4]의 조언으로 후퇴하여 아르고스 군을 유인할 방법을 찾았다.
3. 전투의 전개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군과 아르고스 동맹군은 격돌했다. 아기스 2세는 팔랑크스 진형이 전투 중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이용하여, 양군 우익이 적 좌익보다 돌출될 것이라 예상했다. 아기스는 좌익의 스키리티스 부대와 구 헤일로타이 부대에 전열을 넓혀 만티네이아 군과 전열 길이를 맞추도록 명령하고, 우익 지휘관 히포노이다스와 아리스토클레스에게는 부대를 좌익으로 이동시켜 간격을 메우도록 했다.[21]
그러나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 두 지휘관은 공격 직전 내려진 명령에 따르지 않아 아기스의 전략은 실패했다.[21] 스키리티스 부대와 구 헤일로타이 부대는 만티네이아 군에 격파되었고, 만티네이아 군과 아르고스 정예 부대는 스파르타군 좌익과 중앙 사이 틈으로 돌입해 스파르타군 본대를 측면 공격, 스파르타군을 열세에 빠뜨렸다.[22]
반면 스파르타군과 테게아 군으로 구성된 우익은 아테네 군을 압도하며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아기스는 좌익의 위기를 알고 전군에 구원 명령을 내려 아테네 군은 포위망을 벗어났다. 적 전군이 접근하자 만티네이아 군과 아르고스 정예 부대도 퇴각했다. 스파르타군은 적을 깊이 추격하지 않았다.[23]
3. 1. 스파르타군의 진군과 초기 전략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는 테게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아르카디아 동맹군에 참가를 요청하여 군대를 동원했다. 아기스 2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출진했다. 테게아는 라코니아 입구에 위치하여 스파르타에게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아르카디아 군이 합류한 후, 스파르타는 코린토스, 보이오티아, 포키스, 로크리스 등의 동맹국에도 참가를 요청했다.[29]스파르타군은 위위구조 전략으로 테게아 북쪽에 있는 만티네이아 영토를 침공하여 휩쓸었다.[29] 그러나 스파르타가 참가를 요청했던 코린토스 등의 동맹군은 스파르타 원군으로 가는 길에 아르고스와 오르코메노스 영토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29]
아기스 2세는 적을 평지로 유인하기 위해 테게아 영토에 있는 사란다포타모스 강의 물길을 더 작은 강인 자노비스타스 강으로 돌렸다. 이는 만티네이아 영토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의도였다.[31]
3. 2. 양측 군대의 배치와 병력
스파르타군은 좌익에 스키리티스 부대 700명, 브라시다스 휘하에 있던 숙련병과 구 헤일로타이 부대를 배치했다. 중앙에는 스파르타 본대 약 3,500명, 헤라이아 군, 마이날로스 군을 배치했다. 우익에는 테게아 군과 소수의 스파르타 군, 그리고 양 날개에는 기병을 배치했다.[19]아르고스 동맹군은 우익에 만티네이아 군, 아르고스 동맹군, 아르고스 정예병 1,000명, 기타 아르고스 군, 클레오나이 군, 오르네아이 군을 배치했다. 좌익에는 아테네 군을 배치했다.[19]
투키디데스는 양측 병력 규모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언급했지만, 스파르타군이 수적으로 우세했던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19] 이치카와 사다하루는 스파르타군 총 병력을 15,000명, 아르고스 동맹군 총 병력을 12,000명 또는 14,000명으로 추정했다.[20]
다른 자료에 따르면, 스파르타군은 약 9,000명으로, 약 3,600명의 스파르타인, 약 2,000명의 브라시다스 참전 용사와 네오다모데스, 600명의 스키리타이, 3,000명의 아르카디아인(1,500명의 테게아인 포함)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6] 아르고스 동맹군은 4,000~5,000명의 아르고스인, 2,000~3,000명의 아르카디아인(만티네아인, 클레오나인, 오르네아인), 1,000명의 아테네 중장보병과 300명의 아테네 기병으로 구성되었다.[7]
3. 3. 아기스 2세의 전략 변경과 전투의 양상
아르고스와 동맹군이 전투 대형을 갖춘 반면, 스파르타 군대도 왕의 명령에 따라 전투 대형을 갖췄다. 스파르타 군의 진영은 좌익에는 스키리티스 부대 700명, 트라키아 원정에서 브라시다스 휘하에 있던 숙련병과 브라시다스와 함께 싸워 시민으로 격상된 구 헤일로타이 부대, 스파르타 본대 약 3500명, 아카디아의 헤라이아 군과 마이나로스 군을 배치했다. 그리고 우익은 테게아 군과 왕 자신이 이끄는 소수의 스파르타 군인이 차지했으며, 양 날개에는 기병이 배치되었다.[33]한편 아르고스와 그 동맹군은 우익에는 만티네이아 군과 아르고스의 동맹군, 아르고스의 정병 1000명, 기타 아르고스 군, 크레오나이와 오르네아이 군을 배치하고, 가장 좌익은 아테네 군이 차지했다. 투키디데스는 양측 군대의 병력 수에 대해 각 나라의 병력 과장과 스파르타의 비밀주의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지만, 숫자는 스파르타 측이 우세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이치카와 사다하루는 스파르타 군의 총 병력을 15,000명, 아르고스와 그 동맹군의 총 병력을 12,000명 또는 14,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32]
이 전투에서 아기스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채택했다. 팔랑크스는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양군이 충돌하면 저절로 양군의 우익은 적의 좌익 왼쪽으로 돌아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군이 적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스키리티스 부대와 구 헤일로타이 부대에게 싸울 때 현재의 위치에서 이동하여 전열을 펼쳐 만티네이아 군과 같은 길이의 전열을 짜게 명하였고, 게다가 우익에 있던 부대장 히포노이다스와 아리스토클레스에게 각 부대를 좌익으로 향하게 명령했다.[33]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대장은 공격 직전에 나온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기스의 전략은 빗나가고 말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각 진영의 우익은 서로의 좌익을 포위하려 했다. 이는 각 호플리테가 옆 사람의 방패로 자신을 가리려 하면서 불규칙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기스는 스키리타이와 자신의 좌익에게 나머지 군대와의 접촉을 끊고 아르고스 진영의 길이에 맞추라고 명령하여 전열을 강화하려 했다. 이렇게 생겨난 빈틈을 메우기 위해 그는 히포노이다스와 아리스토클레스의 부대에게 중앙의 위치를 떠나 전선을 덮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실행되지 못했다. 두 지휘관이 이러한 기동을 짧은 시간에 완료할 수 없었거나,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널드 케이건은 이것이 현명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고 보고, 스파르타를 위해 전투를 잃을 수도 있었던 명령을 거부한 두 지휘관에게 공을 돌렸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원래의 기동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스키리티스 부대와 구 헤일로타이 부대는 만티네이아 군의 강력한 공세에 흩어졌다. 만티네이아 군과 아르고스의 정예 부대는 스키리티스 부대와 구 헤일로타이 부대, 스파르타 군 본대의 틈새에 돌입하여 스파르타 군 본대를 측면에서 공격하였고, 금세 스파르타 군은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정면에서 스파르타 군은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이때 스파르타와 테게아 우익은 아테네 군을 바로 옆에서 포위하려고 했지만, 아기스는 좌익의 고전을 알아채고 전군에게 구원을 보내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아테네 군은 겨우 위기를 벗어나 전장에서 탈주할 수 있었다. 한편, 적의 전군이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본 만티네이아 군과 아르고스의 정예 부대도 후퇴했다. 스파르타 군은 적을 깊숙이 추격하지 않았다.[8]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아르고스와 그 동맹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스파르타는 스파크테리아 전투 이후 실추되었던 명성을 회복했다. 그해 겨울,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협정 조건은 아르고스가 아르고스 포로를 반환받고, 에피다우로스에서 철수하며, 엘리스 및 아테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파르타 편에 서는 것이었다.[35]
4. 1. 양측의 피해
아르고스와 그 동맹군은 아르고스, 오르네아이, 크레오나이에서 700명, 만티네이아에서 200명, 아테네와 아이기나에서 200명으로 총 1,100명의 전사자를 냈다. 무엇보다 아테네는 라케스와 니코스트라토스 두 장군을 잃었다. 스파르타 측의 전사자는 약 300명이었다.[34]4. 2. 스파르타의 승리와 아르고스와의 평화 협정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스파크테리아 전투 이후 실추되었던 명성을 회복했다.[35][25] 필로스에서의 참사 이후 스파르타는 전투에서 비겁하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만티네이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켰다.그해 겨울,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35][25]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에 사절단을 보냈고, 아르고스는 휴전을 받아들여 오르코메누스를 포기하고 모든 인질을 넘겨주었으며, 에피다우루스에서 아테네인들을 몰아내는 데 스파르타와 합류했다. 또한 엘리스 및 아테네와의 동맹을 포기했다.
4. 3.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미친 영향
만티네이아 전투의 승리로 스파르타는 스파크테리아 전투 이후 실추되었던 명성을 회복했다.[35] 필로스에서의 참사 이후 전투에서 비겁하고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스파르타는 만티네이아에서의 승리로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아르고스는 스파르타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오르코메누스를 포기하고 모든 인질을 넘겨주었으며, 에피다우루스에서 아테네군을 몰아내는 데 스파르타와 협력했다. 또한 엘리스 및 아테네와의 동맹을 파기했다.[9] 시키온의 민주 정부가 폐위된 후, 아르고스 천인대는 아르고스의 민주 통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전투에서 아테네군과 일반 군대의 저조한 성과로 인해 민주주의자들의 사기가 저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아르고스 동맹군은 총 1,1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아르고스, 오르네아이, 크레오나이에서 700명, 만티네이아에서 200명, 아테네와 아이기나에서 200명이 전사했다. 특히 아테네는 라케스와 니코스트라토스 두 장군을 잃었다.[34] 반면 스파르타 측의 전사자는 약 300명이었다.[34]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만티네이아 전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그 동맹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의 패권을 재확인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위협을 일시적으로나마 잠재울 수 있었다. 아테네는 이 전투에서 주력군이 크게 패하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만티네이아 전투가 전쟁의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지은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는 이후에도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는 등,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만티네이아 전투는 스파르타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고, 결국 아테네의 패배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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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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