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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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게아는 고대 아르카디아의 중요한 도시로,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위치한 종교 중심지였다. 테게아는 테게아타이족의 고향이었으며, 호메로스의 《선박 목록》에 언급될 정도로 중요했다. 고대 시대에는 9개의 데모이로 구성되었으며, 스파르타와 대립하거나 동맹을 맺는 등 복잡한 역사를 거쳤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카이아 동맹에 속했으나 로마 제국 시대에도 시민 생활을 유지했다. 중세 시대에는 아미클리온으로 불리며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 아카이아 공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현재는 알레아 마을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 공동체로 나뉘어져 있다. 테게아는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유적지이며, 아테나 알레아 신전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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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게아 - 아우게
아우게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카디아 영웅 아르카스의 손녀이자 알레우스의 딸로, 아테나 여사제였으나 헤라클레스에게 강간당해 텔레포스를 낳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아르카디아현 - 만티네이아
만티네이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민주정을 채택하고 스파르타와 대립하며 두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를 거쳐 현재는 트리폴리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 아르카디아현 - 트리폴리 (그리스)
트리폴리(그리스)는 1770년에 건설된 고대 도시 유적 위에 세워진 도시로,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중심지였으며 현재 펠로폰네소스 지방의 행정 중심지이다. - 펠로폰네소스주의 관광지 - 미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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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다우로스는 아테네에서 남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사로니코스 만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로,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하는 아스클레피에이온이 있어 의료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고대 극장이 있다.
테게아 | |
---|---|
개요 | |
![]() | |
위치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아르카디아 현 |
현재 행정 구역 | 트리폴리 시 |
고도 | 650m |
좌표 | 37°27′32″N 22°25′23″E |
행정 구역 | |
지방 | 펠로폰네소스 |
현 | 아르카디아 현 |
자치체 | 트리폴리 |
지방 단위 | 테게아 |
인구 통계 | |
2021년 인구 | 2,959명 |
2011년 인구 | 3,544명 |
면적 | 118.35 제곱킬로미터 |
일반 정보 | |
우편 번호 | 220 12 |
지역 번호 | 2710 |
차량 번호판 코드 | TP |
2. 역사
테게아는 스파르타가 아르카디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할 때 오랫동안 저항했다. 스파르타 왕 카릴라우스는 신탁에 속아 테게아를 침략했다가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11][12] 레온과 아게시클레스 통치 시기에도 스파르타는 테게아 정복에 실패했다.[13] 그러나 아낙산드리다스 2세 시대에 스파르타는 오레스테스의 유골을 얻은 후 테게아를 격파하고, 기원전 560년경 스파르타의 지배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13][14] 이로써 테게아는 스파르타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을 끝내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초기 구성원이 되었다.
테게아는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군대는 스파르타에 의존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테게아는 펠로폰네소스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도시로, 연합군의 좌익을 담당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는 500명,[15] 플라타이아이 전투에는 3000명의 테게아군이 참전했는데, 절반은 중장 보병, 절반은 경무장 부대였다.[15] 당시 테게아의 군사 인구는 4000명, 전체 자유 인구는 약 17,400명으로 추산된다.[16]
플라타이아이 전투 직후, 테게아는 다시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479년에서 464년 사이에 테게아는 아르고스와 연합하거나, 마이날리아 지역의 다른 아르카디아인들과 함께 스파르타와 두 번 싸워 모두 패배했다.[17][18] 이 시기에 테게아, 특히 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은 헤게시스트라투스,[19] 레오티키데스, 파우사니아스[20][21][22] 등의 피난처가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테게아는 스파르타의 동맹이었다. 그들은 귀족정을 유지하고 이웃한 민주정 도시 만티네이아를 경계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에 충성했다. 기원전 421년 스파르타에 대항하는 동맹에 아르고스가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기원전 418년에는 스파르타의 아르고스 원정에 함께했다.[23] 기원전 394년 코린토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 편에서 싸웠다.[24] 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기원전 39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스코파스의 설계로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을 묘사한 부조와 함께 웅장하게 재건되었다.[25]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 이후, 테게아의 스파르타 지지 세력은 축출되었고, 다른 아르카디아 도시들과 함께 메갈로폴리스를 건설하고 아르카디아 동맹을 결성했다.[26] 이후 만티네이아가 아르카디아 동맹과 갈등을 빚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자, 테게아는 아르카디아 동맹에 남아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미논다스 휘하에서 스파르타와 싸웠다.[27]
테게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아이톨리아 동맹에 가입했지만, 클레오메네스 3세가 스파르타 왕이 되자 만티네이아, 오르코메노스와 함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 인해 아카이아 동맹과 적대 관계가 되었고,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안티고노스 도손에게 점령되어 기원전 222년에 아카이아 동맹에 병합되었다.[28] 기원전 218년, 스파르타 왕 리쿠르고스의 공격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점령당했다. 이후 스파르타의 폭군 마키니다스에게 넘어갔지만, 필로포이멘에게 패배한 후 아카이아인들이 다시 회복했다.[29]
스트라보 시대에 테게아는 아르카디아에서 유일하게 주민이 계속 거주하는 도시였고,[30] 파우사니아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다.[31]
로마 제국 시대에도 테게아는 시민 생활을 유지했지만, 서기 395–396년에 고트족에게 약탈당했다.
중세 시대에 테게아는 아미클리온(Amyklion, 이후 아미클리, 니클리로 약칭)으로 불렸다. 1082년에 라케다이몬 대교구의 주교 관할구인 아미클레 주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1206년에서 1209년 사이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어 아카이아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모레아 연대기''는 니클리를 중요하고 요새화된 장소로 묘사하며, 포위 공격 후에야 함락되었다고 한다. 세속적인 남작령의 소재지가 되었고, 로마 가톨릭 주교가 임명되었다. 1280년까지 프랑크인들이 점령했지만, 1302년 비잔틴 제국에 의해 탈환되었고, 정교회 성직자가 지역 관구를 되찾았다.
2. 1. 신화 시대
테게아(Τεγέα|테게아grc; )는 고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했던 도시 중 하나로,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있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 중심지였다.[75]테게아타이족은 리키온의 아들인 테게아테스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며, 원래 8개, 나중에는 9개의 데모이 또는 읍에 거주했다. 고대 시대에 테게아를 이루는 9개의 데모이는 시노이키즘을 통해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었다. 알레우스는 이 데모이의 주민들을 테게아 시에 통합하였으며, 테게아의 설립자로 여겨진다. 파우사니아스가 보존한 9개의 읍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레아타이 (Γαρεᾶται), 필라이케이스 (Φυλακεῖς), 카리아타이 (Καρυᾶται), 코리테이스 (Κορυθεῖς), 포타키다이 (Πωταχίδαι), 오에아타이 (Οἰᾶται), 만튀레이스 (Μανθυρεῖς), 에케우에테이스 (Εχευήθεἱς)이며, 아페이다스 왕 시대에 아페이단테스 (Ἀφείδαντες)가 아홉 번째로 추가되었다.[4][5]
테게아타이족은 일찍이 클라레오티스 (Κλαρεῶτις, 비문에서는 Κραριῶτις[6]), 히포토이티스 (Ἱπποθοῖτις), 아폴로네아티스 (Ἀπολλωνεᾶτις), 아토네아티스 (Ἀθανεᾶτις)라고 불리는 4개의 부족(필라이) (φυλαί)으로 나뉘었으며, 각 부족에는 일정 수의 메토이코이 (μέτοικοι) 또는 거주 외국인이 소속되었다.[7]
테게아는 호메로스의 선박 목록에서 그 군대가 아가페노르에 의해 이끌린 장소 중 하나로 언급된다.[8] 아마도 고대 아르카디아 도시 중 가장 유명했을 것이며, 그 왕인 에케무스가 헤라클레스의 아들인 힐루스를 단독 전투에서 죽였다고 전해진다.[9][10]
2. 2. 고대
고대 테게아는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으며,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있었다.[75] 테게아(Τεγέαgrc; )는 고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했던 도시 중 하나였다. 테게아가 위치한 지역은 '''테게아티스'''(Τεγεᾶτις)라고 불렸으며, 동쪽으로는 키누리아와 아르고스 지역, 남쪽으로는 라코니아, 서쪽으로는 마이날리아, 북쪽으로는 만티네이아의 영토와 접해 있었다. 테게아타이족은 리키온의 아들인 테게아테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하며, 처음에는 8개, 나중에는 9개의 데모이 또는 읍에 거주했다. 이 데모이들은 알레우스에 의해 테게아 시로 통합되었으며, 알레우스는 테게아의 설립자로 여겨진다. 파우사니아스가 기록한 이 9개의 읍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레아타이 (Γαρεᾶται), 필라이케이스 (Φυλακεῖς), 카리아타이 (Καρυᾶται), 코리테이스 (Κορυθεῖς), 포타키다이 (Πωταχίδαι), 오에아타이 (Οἰᾶται), 만튀레이스 (Μανθυρεῖς), 에케우에테이스 (Εχευήθεἱς). 아페이다스 왕 시대에 아페이단테스 (Ἀφείδαντες)가 아홉 번째로 추가되었다.[4][5] 테게아타이족은 클라레오티스 (Κλαρεῶτις, 비문에서는 Κραριῶτις[6]), 히포토이티스 (Ἱπποθοῖτις), 아폴로네아티스 (Ἀπολλωνεᾶτις), 아토네아티스 (Ἀθανεᾶτις)라고 불리는 4개의 부족(필라이)으로 나뉘었으며, 각 부족에는 일정 수의 메토이코이가 소속되었다.[7]테게아는 호메로스의 선박 목록에서 그 군대가 아가페노르에 의해 이끌린 장소 중 하나로 언급된다.[8] 테게아의 왕 에케무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 힐루스를 단독 전투에서 죽였다고 전해진다.[9][10] 테게아타이족은 스파르타가 아르카디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 했을 때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스파르타의 왕 카릴라우스는 신탁에 속아 테게아티스를 침략했다가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11][12] 2세기 이상이 지난 후, 레온과 아게시클레스의 통치 기간에 스파르타인들은 테게아타이족과의 전투에서 다시 실패했다. 그러나 아낙산드리다스 2세의 시대에 스파르타인들은 오레스테스의 유골을 손에 넣은 후 테게아타이족을 격파하고 기원전 560년경 스파르타의 지배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13][14] 이로써 테게아는 스파르타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을 끝내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초기 구성원 중 하나가 되었다.
테게아는 독립을 유지하면서 군대는 스파르타에 맡겨졌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연합군의 좌익에서 영예를 얻으며 펠로폰네소스에서 두 번째 군사 강국으로 나타났다. 테게아타이족 500명이 테르모필레 전투에 참전했고, 3000명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이 중 절반은 중장 보병이었고 절반은 경무장 부대였다.[15] 윌리엄 스미스와 헨리 파인스 클린턴은 테게아의 군사 인구가 4000명, 전체 자유 인구는 약 17,400명이었을 것으로 추산했다.[16]
플라타이아이 전투 직후, 테게아타이족은 다시 스파르타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479년에서 464년 사이에 테게아타이족은 스파르타인과 두 번 싸웠고, 각각 아르고스와 연합하여, 그리고 마이날리아 지역의 디파이아에서 만티네이아인을 제외한 다른 아르카디아인들과 함께 패배했다.[17][18] 이 무렵, 테게아, 특히 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스파르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예언자 헤게시스트라투스[19]와 왕 레오티키데스,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아들 파우사니아스가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20][21][22]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테게아타이족은 스파르타의 확고한 동맹국이었으며, 귀족 정치를 가지고 있었고, 자주 전쟁을 벌였던 인접한 민주주의 도시인 만티네이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들에게 충실했다. 테게아타이족은 기원전 421년에 스파르타에 대항하여 결성된 동맹에 아르고스인들과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418년에 아르고스에 대한 원정에 라케다이몬인들과 함께 했다.[23] 그들은 또한 기원전 394년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편에서 싸웠다.[24] 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기원전 394년에 불탔고, 파로스의 스코파스의 설계에 따라 웅장하게 재건되었으며, 정면에는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을 묘사한 부조가 있었다.[25]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 이후, 테게아의 스파르타 지지 세력은 축출되었고, 도시는 다른 아르카디아 도시들과 함께 메갈로폴리스를 건설하고 아르카디아 동맹을 결성했다.[26] 몇 년 후 만티네이아가 최고 아르카디아 정부와 다투고, 오랜 적대국인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을 때, 테게아는 새로운 연맹에 충실했고,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미논다스 휘하에서 스파르타인들과 싸웠다.[27]
테게아는 후기에 아이톨리아 동맹에 가입했지만, 클레오메네스 3세가 스파르타 왕위에 오른 직후 만티네이아, 오르코메노스와 함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아카이아인과 적대 관계가 되었고,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아카이아인들의 동맹국인 안티고노스 도손에게 점령되어 기원전 222년에 아카이아 동맹에 병합되었다.[28] 기원전 218년에 테게아는 스파르타 왕 리쿠르고스에게 공격을 받았고,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도시 전체를 점령당했다. 그 후 스파르타의 폭군인 마키니다스의 손에 들어갔지만, 필로포이멘에게 전투에서 살해된 마키니다스의 패배 후 아카이아인들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29] 스트라보 시대에 테게아는 아르카디아 도시 중 유일하게 계속 거주하는 곳이었으며,[30] 파우사니아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다.[31]
2. 3.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테게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아이톨리아 동맹에 가입했지만, 클레오메네스 3세가 스파르타 왕위에 오른 직후 만티네이아, 오르코메노스와 함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 인해 아카이아 동맹과 적대 관계가 되었고, 클레오메네스 전쟁에서 아카이아인들의 동맹국인 안티고노스 도손에게 점령되어 기원전 222년에 아카이아 동맹에 병합되었다.[28] 기원전 218년, 테게아는 스파르타 왕 리쿠르고스의 공격을 받아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점령당했다. 이후 스파르타의 폭군인 마키니다스의 손에 들어갔지만, 필로포이멘에게 전투에서 살해된 마키니다스가 패배한 후 아카이아인들에게 다시 회복되었다.[29]스트라보 시대에 테게아는 아르카디아 도시 중 유일하게 계속 거주하는 곳이었으며,[30] 파우사니아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다.[31] 그는 이곳의 공공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는데, 그가 본 "무덤"은 지하의 창립 '다이몬'에게 바쳐진 신전이었다. 또한 리키온의 아들인 테게아테스와 그의 아내 마이라 (또는 마에라)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이라는 아틀라스의 딸이었으며,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서 언급되었다.[32]
고대 테게아는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으며,[33] 아테나 알레아 신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파우사니아스는 알레우스가 테메노스를 세웠다고 전했다.[34] 기하학적 및 고대 시대의 유물로는 말과 사슴 모양의 청동 조각이 있으며, 인장석과 피불라도 발견되었다.
테게아는 로마 제국 시대에도 시민 생활을 유지했으며, 서기 395–396년에 고트족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견뎌냈다. 로마 시인들은 테게이우스 또는 테게아이우스라는 형용사를 아르카디아와 동등하게 사용했다.
2. 4. 중세
중세 시대에, 어떤 불분명한 과정을 거쳐 테게아는 10세기까지 아미클리온 (나중에 일반적으로 아미클리 및 니클리로 축약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082년에 라케다이몬 대교구의 주교 관할구인 아미클레 주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1206년에서 1209년 사이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니클리와 아르카디아의 나머지 지역은 점령되어 새로운 프랑크 아카이아 공국의 일부가 되었고, 곧 펠로폰네스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모레아 연대기''는 니클리를 중요하고 요새화된 장소로 묘사하며, 포위 공격 후에야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곳은 세속적인 남작령의 소재지가 되었고, 로마 가톨릭 주교가 주교 관할구에 임명되었다. 니클리는 1280년에도 프랑크인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1302년까지 부활한 비잔틴 제국에 의해 빼앗겼으며, 비잔틴 제국은 현지 주교 관할구를 정교회 성직자에게 돌려주었다.3. 지리
테게아는 트리폴리 남동쪽에 위치했던 고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했던 도시 중 하나였다. 테게아티스(Τεγεᾶτιςel)라고 불리는 그 영토는 동쪽으로 키누리아와 아르고스에 접해 있었으며, 파르테니온 산이 그 경계를 이루었다. 남쪽으로는 라코니아, 서쪽으로는 아르카디아의 지역인 마이날리아, 북쪽으로는 만티네이아의 영토에 접해 있었다.[4]
고대 테게아의 유적지는 현재 알레아 (1915년 이전에는 '피알리'로 불림) 마을에 위치해 있다. 알레아는 트리폴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다. 테게아 자치체의 소재지는 스타디오에 있다.
테게아 지방 자치 단체는 다음과 같은 지역 공동체(괄호 안에 구성 마을)로 세분된다.
공동체 | 구성 마을 |
---|---|
알레아 | 알레아 |
에피스코피 | 에피스코피 |
가레아 | 가레아 |
카마리 | 카마리 |
칸달로스 | 칸달로스 |
케라시차 | 케라시차 |
리토부니아 | 리토부니아 |
마굴라 | 마굴라, 지오카레이카 |
만티레아 | 만티레아 |
마브리키 | 마브리키 |
프실리 브리시 | 프실리 브리시, 부자네이카 |
리제스 | 리제스 |
스타디오 | 스타디오, 아기오스 소스티스, 아크라 |
지바스 | 지바스 |
부노 | 부노 |
스트린고스 | 스트린고스, 데미리 |
4. 정치
테게아는 스파르타가 아르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 했을 때 오랫동안 저항했다. 스파르타의 왕 카릴라우스는 승리할 것이라는 신탁에 속아 테게아를 침공했다가 패배했고, 살아남은 병사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39][40][41][42][43][44] 2세기 이상 지난 후, 레온과 아가시클레스 시대에 스파르타는 다시 테게아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45] 그러나 그 다음 세대인 아낙산드리데스 시대에 스파르타는 신탁에 따라 오레스테스의 유해를 테게아에서 가져온 후 전쟁에서 승리했고, 테게아는 기원전 560년경 스파르타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다.[46][47] 이로써 테게아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초기 구성원이 되어 협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테게아는 독립을 유지하면서 군사력은 스파르타에 맡겼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테게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군사 강국으로 등장하여 연합군의 좌익을 담당하는 영예를 얻었다. 테게아는 테르모필레 전투에 500명, 플라타이아이 전투에 3,00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싸웠다. 부대의 절반은 중장 보병이었고, 절반은 경무장 부대였다.[48][38] 윌리엄 스미스와 Henry Fynes Clinton|헨리 핀즈 클린턴영어은 당시 테게아의 전체 병력을 4,000명, 전체 자유민 인구를 약 17,400명으로 추정했다.[49]
플라타이아이 전투 직후, 테게아는 다시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였지만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테게아는 기원전 479년부터 기원전 464년 사이에 스파르타와 두 번 싸웠고, 두 번 모두 패배했다. 한 번은 아르고스인과, 두 번째는 마이날리아 지역의 Dipaea|디파에영어의 만티네이아인을 제외한 다른 아르카디아인들과 함께 싸웠다.[50][51] 이 시대와 그 후에도 테게아와 Temple of Athena Alea|아테나 알레아 신전영어은 스파르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자주 피난하는 장소였다. 예언자헤게시스트라토스,[50] 에우리폰 가문 출신의 스파르타 왕 레오튀키데스, 아기스 가문 출신의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가 이곳으로 도망쳤다.[52][53][54]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테게아는 스파르타의 확고한 동맹국이었다. 그들은 과두정치를 유지하고 있었고, 자주 전쟁을 벌였던 인근의 민주정 도시 국가 만티네이아를 경계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에 충성했다. 테게아는 기원전 421년에 스파르타와 맺은 동맹에 아르고스가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의 아르고스 원정에 참여했다.[55][56] (아르고스는 역사 시대에 민주주의 국가였다.) 또한 기원전 394년 코린토스 전쟁에서도 스파르타 편에서 싸웠다.[57] 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같은 해에 소실되었지만 파로스의 스코파스의 설계로 웅장하게 재건되었으며, 주요 부분에는 페디먼트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 부조가 있었다.[58] 그러나 레욱트라 전투 (기원전 371년) 이후, 테게아의 스파르타 지지 세력은 추방되었고, Megalopolis, Greece|메갈로폴리스영어 건설과 아르카디아 동맹 결성을 통해 아르카디아의 여러 도시들과 협력했다.[59] 몇 년 후, 만티네이아가 아르카디아 동맹과 대립하여 오랜 적 스파르타와 손을 잡았을 때, 테게아는 동맹에 충실했고, 기원전 362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에파미논다스 휘하에서 스파르타와 싸웠다.[60][61]
후기 테게아는 아이톨리아 동맹에 가입했지만, 클레오메네스 3세가 스파르타 왕위에 오르자마자 만티네이아와 오르코메노스와 함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테게아는 스파르타와 아카이아 동맹 간의 적대 관계에 관여하게 되었고, 클레오메네스 전쟁이라고 불리는 마케도니아를 끌어들인 전쟁에서 안티고노스 3세 도손에게 약탈당한 후 기원전 222년에 아카이아 동맹에 병합되었다.[62][63] 기원전 218년, 테게아는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도시 전체를 점령한 스파르타 왕 뤼쿠르고스에게 공격받았다. 그 후 스파르타의 참주 마카니다스의 손에 떨어졌지만, 기원전 207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마카니다스가 메갈로폴리스의 필로포이멘에게 살해된 후 아카이아인들에 의해 재건되었다.[64][65]
5. 사회
테게아(Τεγέαgrc)는 고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했던 도시 중 하나로, 이 지역 동남부에 위치했다. 테게아는 9개의 데모이(읍)로 구성되었는데, 이 데모이들은 알레우스에 의해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었다.[4][5]
테게아타이족은 클라레오티스, 히포토이티스, 아폴로네아티스, 아토네아티스라고 불리는 4개의 부족(필라이)으로 나뉘었으며, 각 부족에는 일정 수의 메토이코이(거주 외국인)가 소속되었다.[7]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테게아는 펠로폰네소스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윌리엄 스미스와 헨리 파인스 클린턴은 당시 테게아의 군사 인구를 4,000명, 전체 자유 인구는 약 17,400명으로 추산했다.[16]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테게아는 과두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확고한 동맹국이었다. 그들은 인접한 민주정 도시인 만티네이아를 경계하며 스파르타에 충성했다.
5. 1. 인구
연도 | 인구 |
---|---|
1991 | 4,539 |
2001 | 3,858 |
2011 | 3,544 |
2021 | 2,959 |
5. 2. 종교
고대 테게아는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으며,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있었다.[75] 파우사니아스는 알레우스가 이 신전을 세웠다고 전했다.[34] 기하학 양식 및 고대 시대의 유물로는 말과 사슴 모양의 청동 조각, 인장석, 피불라 등이 있다.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기원전 394년에 불탔지만, 파로스의 스코파스의 설계에 따라 웅장하게 재건되었으며, 정면에는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을 묘사한 부조가 있었다.[25]
파우사니아스 시대에도 테게아는 여전히 중요한 곳이었으며, 그는 이곳의 공공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남겼다.[31] 그가 본 "무덤"은 지하의 창립 영웅에게 바쳐진 신전이었다. 또한 리키온의 아들인 테게아테스와 그의 아내 마이라의 무덤이 있는데, 마이라는 아틀라스의 딸이었다.[32]
6. 문화
테게아는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으며,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있었다.[33] 파우사니아스는 알레우스가 테메노스를 세웠다고 전했다.[34] 기하학적 및 고대 시대의 유물로는 말과 사슴 모양의 청동 조각, 인장석, 피불라 등이 있다.
아테나 알레아 신전은 기원전 394년에 불탔으나, 파로스의 스코파스가 설계를 맡아 웅장하게 재건되었다. 신전 정면에는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을 묘사한 부조가 있었다.[25]
6. 1. 테게아와 크레타
고대 시대에 테게아 사람들은 그들의 왕 테게아테스의 아들 키돈, 아르케디우스, 고르티스가 자발적으로 크레타로 이주했으며, 키도니아, 고르티나, 카트레우스가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레타인들은 이를 부인하며, 이 세 인물을 지역 영웅 미노스와 라다만티스의 자손으로 묘사하려 했다.[35]7. 현대의 테게아
고대 테게아는 현재 알레아(Alea) 마을 안에 있으며, 1915년 이전에는 피아리(Piali)라고 불렸다. 알레아는 트리폴리 남동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다. 테게아의 자치 단체는 스타디오(Stadio)에 거점을 두고 있으며, 다음 커뮤니티로 구성되어 있다.
커뮤니티 | |
---|---|
7. 1. 고고학
고대 테게아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 중심지였으며,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있었다.[75]1879년 아서 밀히호퍼가 발굴하기 전부터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을 통해 아테나 알레아 신전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성역은 부분적으로 하기오스 니콜라오스 교회와 겹쳐 있었고, 성역 내에 점재하는 다수의 도리아식 드럼을 통해 상당히 큰 규모의 신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막스 트로이(Max Treu)는 유적에서 발견된 몇몇 조각품이 스코파스의 양식이며, 스코파스가 재건한 신전의 페디먼트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1882년 빌헬름 데르프펠트는 유적의 일부를 발굴했지만, 1900년 이후 신전 전체를 발굴한 것은 아테네 프랑스 학교였다. 1900년부터 1902년에 걸쳐 멘델(Mendel)은 가옥으로 덮인 남서쪽 구석을 제외한 신전 전체의 모습을 밝혀냈고, 1909년 고고학자 콘스탄티노스 로마이오스(Konstantinos Romaios)는 유적 전체의 발굴을 완료했다. 1910년 아테네 프랑스 학교로부터 유적 공개를 의뢰받은 샤를 드가(Charles Dugas)는 상세한 발굴을 실시했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는 아테네의 노르웨이 연구소(Norwegian Institute at Athens)가 E・오스트비(E. Oestby)의 지휘 아래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발굴된 유물은 주로 테게아 고고학 박물관이나 트리폴리 고고학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특히 테게아 고고학 박물관은 아테나 알레아 신전에 기인하는 스코파스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8. 저명한 출신 인물
- 테게아의 아리스타르코스 : 기원전 5세기경 시인이다.
- 테게아의 아니테 : 기원전 3세기경 시인이다.
- 케페우스 : 신화 속 왕이자 아르고 원정대의 일원이다.
- 에케무스 : 신화 속 왕이다.
- 그레고리스 람브라키스 : 정치인이다.
- 텔레포스 : 신화 속 왕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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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lydonian boar and the head of Atalanta have been removed to th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of Ath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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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anctuary had been respected from early days by all the Peloponnesians, and afforded peculiar safety to its suppli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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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escription of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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