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메이지마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메이지마루는 1874년 영국에서 건조되어 1875년 일본에 도착한 등대 순시선으로, 일본 최초의 등대 순시선 역할을 했다. 등대 순찰 외에도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 분쟁, 메이지 천황의 홋카이도 및 도호쿠 지방 순행에 사용되었으며, 1882년에는 박영효 등 제3차 조선 수신사 일행이 태극기를 그려 사용한 배로도 알려져 있다. 1897년부터 도쿄 해양대학의 연습선으로 사용되었으며, 태풍, 지진, 전쟁 등 여러 피해를 입었지만, 1978년 선박 최초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5년 대규모 수리 공사를 마치고 복구 완공 기념식을 가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연습선 - 닛폰마루 (1984년)
    일본마루(1984년)는 4개의 돛대에 36장의 돛을 가진 바크형 범선으로, 파란색 옆면 라인과 선수상이 특징이며, 자매선인 해왕마루 2세와 구분된다.
  • 일본의 연습선 - 닛폰마루 (1930년)
    닛폰마루 (1930년)는 1930년에 건조된 일본의 4마스트 바크형 범선으로, 훈련선, 수송선으로 사용되다가 퇴역 후 보존되어 활용되고, 영화 울트라맨 8형제에 등장하기도 한다.
  • 도쿄도의 중요문화재 - 게이오기주쿠 대학
    게이오기주쿠 대학은 1858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 대학으로, "독립자존"의 교육 이념 아래 다양한 학부와 대학원을 운영하며 일본 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명문 사학이다.
  • 도쿄도의 중요문화재 - 와세다 대학
    와세다 대학은 1882년 오쿠마 시게노부가 설립한 사립 종합대학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함께 일본 최초의 사립 대학으로 인정받았으며, 다양한 분야의 학부와 대학원을 운영하고 여러 캠퍼스를 통해 국제적인 교육 및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메이지마루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만선 장식을 한 메이지마루
만선 장식을 한 메이지마루
이름메이지마루
원어 이름明治丸
이름 유래메이지 천황
선박 종류등대 순시선
현재 상태박물관 선박
선박 이력
국적일본
깃발[[File:Flag of Japan.svg|100x35px|border|일본의 국기]]
소유주일본 정부
도쿄 상선학교
도쿄 해양대학
건조 회사로버트 네이피어 앤드 선스
야드 번호338
진수1874년 9월 26일
완공1873년
상태박물관 선박
선박 제원
배수량1027 grt
전체 길이68.6 미터 (240.3)
9.1 미터 (29.4)
추진 방식트윈 스크류
추가 정보
건조 장소글래스고
착공 년도1873년
준공 년도1874년 11월 24일
취항 년도1875년
퇴역 년도1954년 3월
그 이후작업장으로 사용, 후에 수리되어 도쿄도고토구엣추지마 2-1-6, 도쿄 해양대학 엣추지마 캠퍼스에서 공개
재료철제 기선
선급 협회로이드 선급 협회
기관왕복 엔진
출력1530 마력
속력11.5 노트

2. 역사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선박인 메이지마루는 등대 순시선으로 건조되었지만,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일본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겼다.

1876년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 분쟁 해결에 기여했으며, 메이지 천황의 순행에 사용되어 '바다의 날'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1882년 박영효 등 조선 수신사 일행이 태극기를 처음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13][14]

이후 도쿄 해양대학의 연습선으로 활용되면서 1911년1917년태풍, 1923년 관동대지진, 1945년 도쿄 대공습 등 여러 차례 피해를 겪었지만, 복원 과정을 거쳐 1978년에는 선박 최초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 1. 건조 및 도입

메이지 시대 초기, 서양식 등대 건설에 따라 그 측량 및 유지를 위해 등대 순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1873년 일본 정부는 영국 글래스고의 네이피어 조선소에 등대 순시선을 발주했다.[10] 1874년 9월 26일 진수되었고, 같은 해 11월 24일 준공되었다.[10] '메이지마루'로 명명된 이 배는 1875년 2월 20일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여 등대 순시선 임무를 시작했다.[10]

2. 2. 등대 순시선 및 다양한 활동

메이지 시대 초기 서양식 등대 건설에 따라 등대 측량과 유지 보수를 위한 등대 순시선이 일본에 등장했다. 등대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선박이 필요해졌고, 일본 정부는 영국 글래스고의 네이피어 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하여 1874년 9월 26일에 진수, 11월 24일에 준공하였다.[10] '메이지마루'로 명명된 이 선박은 이듬해인 1875년 2월 20일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여 등대 순시선 임무를 맡았다.

'메이지마루'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이었기 때문에[11], 일반적인 등대 순찰 업무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며 일본 근현대사에 업적을 남겼다.

1876년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 분쟁 당시, 일본 정부 조사단을 태우고 11월 21일 요코하마 항을 출발, 11월 24일 치치지마에 입항했다. 빠른 속도 덕분에 11월 22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영국 군함 '카류'보다 이틀 먼저 도착하여 조사를 진행, 일본의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 주장에 기여했다.

1876년 메이지 천황홋카이도, 도호쿠 지방 순행에 사용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1941년 7월 20일이 '바다의 기념일'(현재 바다의 날)로 제정되었다.[12] 1875년 3월 5일 군함 '세이키' 진수식에도 메이지 천황이 이 배를 탔다. 1879년 류큐 처분 당시 쇼타이 왕을 도쿄까지 수송했으며, 1887년에는 가잔 열도 탐험 항해에 이용되기도 했다.

1882년 9월 박영효 등 제3차 조선 수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 메이지마루 선상에서 태극기를 직접 그려 사용하였다.[13][14]

2. 3. 도쿄 해양대학 연습선

해군성에서 양도된 '신하쓰덴마루'(新発電丸)가 후임으로 취임하면서 '메이지마루'는 1897년 9월에 상선학교(현 도쿄 해양대학)로 대여되었다.[12] 같은 해 11월에는 학교에 이관되어 계류 연습선으로 조작, 항해 훈련 등에 사용되었다. 1901년 12월 25일 현재의 도쿄 해양대학 엣추지마(越中島) 캠퍼스로 이동하였다.[12]

2. 4. 피해와 복원

1911년1917년 태풍해일로 바우 스핏이 부러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1945년 도쿄 대공습 때에는 수천 명의 이재민을 수용했다.[12]

1945년 9월, 도쿄 해양대학은 진주한 미군에 접수되어 군 매점으로 사용되었다. 1951년 계류 지역에서 좌초한 것을 계기로 접수가 해제되었고, 1952년 상갑판 등을 수리했다. 그러나 1954년 노후화로 연습선 임무가 해제되었다. 이후 1975년까지 결삭 실습 등에 선내가 사용되었으며, 1978년 5월 31일 선박 최초로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8년 1월 29일 저장 수리 공사를 마치고, 1989년 5월 16일부터 2009년 1월까지 공개되었다.

1988년 수리 후에도 노화로 다시 대규모 복구가 필요하게 되어, 도쿄 해양대학문화청이 메이지마루 원형 복구 계획을 수립하였다. 2013년 12월부터 대규모 수리 공사가 진행되어 2015년 3월 준공되었다. 2015년 7월 19일 복구 완공 기념식을 거행하고, 다음 날인 7월 20일 특별 공개되었다.

3. 구조

1878년 11월 18일 글래스고에서 시운전 당시 배수 톤수는 1235톤, 속력은 12.66노트, 지시마력(ihp)은 1450 마력이었다. 다만, 속력과 선박 크기 등은 기록마다 수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3. 1. 외관

처음에는 외륜선으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결국 프로펠러 선박으로 건조되었다. 돛은 2개의 마스트를 가진 톱세일 스크루너였다[2]가, 1898년시나가와에 있는 오아케 조선소에서 3개의 마스트를 가진 쉽으로 개조되었다.[4] 1937년에는 미즌마스트의 부패로 바크가 되었지만, 1983년부터의 수리 공사로 다시 쉽형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선수선미에는 아칸서스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3. 2. 선내

갑판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주 갑판에는 처음에는 세분화된 객실이 배치되었다. 이후 공실, 침실, 욕실 겸 변소로 구성된 3실 연속의 메이지 천황 어좌소가 우현 후방에 설치되었다. 어좌소 내 공실의 모란, 목련, 복숭아, 오동나무 등이 그려진 식물화 판화는 전후 접수 시에 페인트가 칠해졌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또한 주 갑판의 마지막 부분에는 살롱이 설치되어 마호가니 테이블이 전시되어 있다. 1892년의 수리에서 기존의 조타실은 해도실로 변경되었고, 상갑판에 조타실이 설치되었다.

하갑판에는 석탄고와 왕복 기관 2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1927년에 제거되어 기술 연습장이 설치되었다.

4. 성능

1878년 11월 18일 글래스고 시운전에서 배수 톤수 1235톤, 속력 12.66노트, 지시 마력(ihp) 1450 마력을 기록했다. 속력과 선박 크기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1]

5. 기타

도쿄 해양대학은 2009년부터 복구 사업 등의 비용에 충당하기 위해 ‘메이지마루 해양 박물관 사업 기금’을 설치하여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10]

참조

[1] 웹사이트 The Meiji Maru https://www.kaiyodai[...] Tokyo University of Marine Science and Technology website 2015-11-11
[2] 웹사이트 International Archives - East Asia - Japan http://www.gla.ac.uk[...] University of Glasgow website 2015-11-11
[3] 뉴스 Marine Day Fair 10 July 2015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15-11-12
[4] 웹사이트 Sailing Ships - Meiji Maru http://sailing-ships[...] 2015-11-12
[5] 웹사이트 山尾庸三の生涯 http://ktymtskz.my.c[...]
[6] 서적 『막말의 오가사와라』136-187, 205-206페이지
[7] 서적 『막말의 오가사와라』237-242페이지
[8] 서적 『막말의 오가사와라』245페이지
[9] 서적 『막말의 오가사와라』245, 248페이지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뉴스 태극기 창안자는 박영효 아닌 이응준 http://news.chosun.c[...]
[14] 문서 그동안 태극기는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조약]]의 사후 처리로 3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증기선 메이지마루에서 처음 도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또한 [[박영효]] 이전에 미국 측 요청으로 [[김홍집]]의 주도 아래 [[이응준 (조선)|이응준]]이 태극기를 만들어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사용했다.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사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미 조선 왕조의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태극기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태극팔괘도’를 변형하여,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