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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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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디모스는 4세 때 시력을 잃었지만 뛰어난 기억력으로 학문에 정진한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그는 맹인들을 위한 점자 시스템과 유사한 나무 글자를 새기는 실험을 했으며,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아 아리우스와 마케도니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했다.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서 활동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독창적인 신학 사상을 펼쳤다. 그의 저작은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으로 인해 정죄받기도 했지만,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고 있으며, 일부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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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모스
기본 정보
성 디디모스
직함알렉산드리아 신학대학 학장
축일6 파오니 (콥트 교회)
인물 정보
존칭성인
이름디디모스 블린트 (Didymus the Blind)
출생일기원후 313년경
사망일기원후 398년경
공경하는 교회콥트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기타 정보
수호시각 장애인

2. 생애와 교육

디디모스는 네 살 때 시력을 잃었고, 글을 배우기 전이었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추종자였으며,[15] 아리우스와 마케도니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했다.[3] 맹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학문에서 뛰어났다. 다른 사람들이 잠든 동안 정보를 기억하고 숙고했으며, 시각 장애인이 글을 읽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 오늘날 맹인들이 사용하는 브라유 점자 시스템과 유사한 나무 글자를 새기는 실험을 했다.[4]

2. 1. 어린 시절과 시력 상실

디디모스는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전에 시력을 잃었다. 맹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학문에서 뛰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잠든 동안 정보를 기억하고 숙고했다. 그는 시각 장애인이 글을 읽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 오늘날 맹인들이 사용하는 브라유 점자 시스템과 유사한 나무 글자를 새기는 실험을 했다.[4]

그는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추종자였으며,[15] 아리우스와 마케도니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했다.[3]

2. 2. 학문적 성취와 교육 활동

디디모스는 네 살 때 시력을 잃었고, 글을 배우기 전이었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충실한 추종자였으며,[15] 아리우스와 마케도니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했다.[3]

디디모스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기억력 덕분에 학문에서 뛰어났다. 그는 시각 장애인이 글을 읽도록 돕는 방법을 찾아 오늘날 맹인들이 사용하는 브라유 점자 시스템과 유사한 나무 글자를 새기는 실험을 했다.[4]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잠든 동안 정보를 기억하고 숙고했다.

3.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서의 역할

루피누스에 따르면, 디디모스는 "교회 학교의 교사"였으며, "아타나시우스 주교"와 다른 학식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았다. 후대 학자들은 그가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수장이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는 디디모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으며, 루피누스는 다른 학교를 언급했을 수도 있다.[5] 디디모스는 평생 평신도로 지냈으며, 당대 가장 학식이 풍부한 수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그는 기독교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교도적 예언으로 헤르메티카를 사용한 최초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기독교인이었다.[7] 루피누스, 팔라디우스, 제롬이 그의 제자였다.[8]

루피누스는 8년 동안 디디모스의 제자였다. 그가 오리게네스의 『원리에 관하여』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 그는 디디모스의 그에 대한 주석을 참조했다. 제롬은 그의 많은 책 서문에서 디디모스가 그의 사상에 기여한 점을 언급하며, 디디모스를 "예언자 디디모스"라고 불렀다.[9] 루피누스는 제롬이 디디모스와 오리게네스를 비난한 후에도 디디모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디디모스는 정통 기독교 교사로 여겨졌으며, 최소 553년까지 매우 존경받고 칭찬받았다.[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디디모스의 니케아 신조에 대한 충실성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에 비유했다. 그는 교사로서 유대인, 이교도, 마니교도, 그리고 다른 기독교 교사들과 토론하고 그들에게 배웠다. 디디모스의 강의 기록과 학생들이 한 질문들은 그가 같은 교육받은 학생들을 여러 번 가르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맹인 성 디디모스로 칭한다.[10]

4. 신학 사상

디디모스는 마니교가현설주의와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속죄론에서는 신격화 대신 속량과 형상의 회복에 초점을 맞췄다. 예로니모는 디디모스가 악마의 궁극적인 회복을 믿었다고 비난했다.[5]

디디모스는 영혼의 선재를 받아들이고 사후 세계를 정화의 과정으로 보았지만, 윤회는 거부했다. 주의 날을 영혼의 내적 조명으로 묘사했으며, 미래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처럼, 그는 ''참된'' 영지주의자들이 신성한 철학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그의 신학에는 오리게네스의 영향이 나타나며, 특히 종말론은 그의 작품이 단죄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5]

4. 1. 삼위일체론

철저한 삼위일체론자인 디디모스는 하나님을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오직 이미지와 무파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본질을 초월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양 없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5] 그의 작품에서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영향이 나타나며, 하나의 신적 실체(οὐσία)를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 위격(철학) 개념에 초점을 맞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독립적인 실재를 표현한다.[16] 이 세 위격 안에서, 성부는 신성의 근원이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며, 성자는 생성된다. 디디모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데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플로롭스키는 "디디모스는 자신의 표현에 있어서 정확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일반적인 특징이다."라고 평가했다.[5]

4. 2. 그리스도론

철저한 삼위일체론자인 디디모스는 하나님을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오직 이미지와 무파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본질을 초월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양 없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5] 그의 작품에서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영향이 나타나며, 하나의 신적 실체(οὐσία)를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 위격(철학) 개념에 초점을 맞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독립적인 실재를 표현한다.[16] 이 세 위격 안에서, 성부는 신성의 근원이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며, 성자는 생성된다. 디디모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데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플로롭스키는 "디디모스는 자신의 표현에 있어서 정확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일반적인 특징이다."라고 평가했다.[5]

마니교가현설주의자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이단에 맞서 싸우면서, 디디모스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연합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이들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추측하지 않고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국한했다. 그의 속죄론에서 디디모스는 신격화를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속량과 형상 및 형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저술이 단편적인 특성 때문에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는 "보편적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로니모는 아마도 정확하게 디디모스가 악마의 궁극적인 회복을 고백했다고 비난했다.[5]

4. 3. 종말론과 구원론

철저한 삼위일체론자인 디디모스는 하나님을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하며, 오직 이미지와 무파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본질을 초월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양 없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5] 그의 작품에서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영향이 나타나며, 하나의 신적 실체(οὐσία)를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 위격(철학) 개념에 초점을 맞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독립적인 실재를 표현한다.[16] 이 세 위격 안에서, 성부는 신성의 근원이고,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며, 성자는 생성된다. 디디모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데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플로롭스키는 "디디모스는 자신의 표현에 있어서 정확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일반적인 특징이다."라고 평가했다.[5]

마니교가현설주의자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이단에 맞서 싸우면서, 디디모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연합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이들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추측하지 않고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국한했다. 그의 속죄론에서 디디모스는 신격화를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속량과 형상 및 형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저술이 단편적인 특성 때문에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는 "보편적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로니모는 아마도 정확하게 디디모스가 악마의 궁극적인 회복을 고백했다고 비난했다.[5]

디디모스는 또한 영혼의 선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사후 세계를 정화의 과정으로 간주하지만, 플로롭스키에 따르면 그는 윤회를 거부한다. 그는 주의 날을 영혼의 내적 조명으로 묘사하며, 미래 세계에서는 악이 "하나의 속성"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와 마찬가지로, ''참된'' 영지주의자들은 신성한 철학을 소유하며, 이를 통해 이단자들에게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신앙을 명확하게 고백할 수 있다. 그의 신학 전반에 걸쳐 오리게네스의 영향이 드러나며, 특히 그의 종말론의 다양한 측면은 그의 작품에 대한 단죄로 이어졌을 것이다.[5]

5. 저작

디디모스는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수장으로 여겨지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이 학교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5] 그는 평생 평신도로 지내며 당대 가장 학식이 풍부한 수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헤르메티카를 기독교 도래 예언으로 사용한 최초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기독교인이었다.[7] 루피누스, 제롬 등이 그의 제자였다.[8] 루피누스는 8년 동안 디디모스의 제자로 지내며 그의 오리게네스 『원리에 관하여』 라틴어 번역에 도움을 주었다. 제롬은 디디모스를 "예언자 디디모스"라 칭하며 그의 사상적 기여를 언급했다.[9]

디디모스는 정통 기독교 교사로 존경받았으며,[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그의 니케아 신조에 대한 충실성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비견했다. 그는 교사로서 유대인, 이교도, 마니교도 등 다양한 이들과 토론하고 배웠으며, 그의 강의 기록과 학생들의 질문은 그가 같은 학생들을 여러 번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5. 1. 현존하는 주요 저작

디디모스는 많은 저작을 남겼으나, 그의 비난으로 인해 중세 시대에 필사되지 않아 유실된 것이 많다. 고대 작가들의 인용을 통해 부분적인 목록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교의론』,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하여』, 『아리우스 반박』, 『첫 번째 말씀』 등이 있다.[14] 예로니모에 따르면 디디모스는 오리게네스의 『원리강해』에 대한 주석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이해를 해석하려고 시도했다.[14]

카테나에서 디디모스의 성경 주석 발췌 내용이 발견되었다. 1941년 투라, 이집트(카이로 남쪽) 근처 탄약고에서 발견된 6세기 또는 7세기 파피루스 필사본 묶음에는 즈가리야서, 창세기 1-17장, 욥기의 일부, 그리고 (진위가 불확실한) 전도서와 시편 20-46장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15] 이 주석에서 디디모스는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며, 모든 곳에서 상징을 찾았다. 예를 들어, 즈가리야서의 산들이 성경의 두 언약을 나타낸다고 썼다.

디디모스는 『성령에 관하여』(381년 이전에 그리스어로 작성)라는 논문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예로니모에 의해 라틴어 번역본으로 보존되었다. 『가톨릭 서신에 대한 주석』 또한 디디모스에게 귀속되지만 확실하지 않다.[6] 『마니교 반박』이라는 논문도 디디모스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위일체론』은 18세기에 디디모스의 작품으로 확인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출처' 부족과 투라에서 발견된 주석과의 모순으로 인해 의심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디디모스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학자들은 디디모스가 바질의 『에우노미우스 반박』 4권과 5권으로 보존된 작품을 저술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즈가리야서 주석에서 디디모스는 성경에 대한 철저한 상호 텍스트적 독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의 철학적 용어와 범주에 익숙함을 보여준다.[16] 그의 작품은 구약 외경뿐만 아니라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의 목자 및 요한의 행전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트 에르만에 따르면, 그의 정경은 적어도 바나바와 목자를 포함했다.[16]

라틴어로만 남아 있는 디디모스에게 귀속된 주석은 베드로후서가 위조되었음을 시사한다.[17] 하지만, 디디모스가 진정한 저자였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다른 저작물은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18]

튀라니우스 루피누스에게 보낸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논문(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에서 디디모스는 유아들이 죽는 이유에 대해 "많이 죄를 짓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의 육체적 감옥에 닿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형벌이었다"고 답했다.[19]

5. 2. 소실된 저작 (일부 내용이 알려진)

디디모스의 많은 작품들은 중세 시대에 필사되지 않아 소실되었다. 하지만 고대 작가들의 인용을 통해 일부 내용이 알려진 저작들이 있다. 여기에는 『교의론』,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하여』, 『아리우스 반박』, 『첫 번째 말씀』 등이 있다.[14]

예로니모에 따르면, 디디모스는 오리게네스의 『원리강해』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이 주석에서 오리게네스 신학의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이해를 해석하려 했다. 그는 영혼의 선재와 만물 회복을 가정했고,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은 인간이지만, 그리스도는 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튀라니우스 루피누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논문인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하여』는 "어째서 유아들이 죽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예로니모에 따르면, 디디모스는 유아들이 "많이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육체적 감옥에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형벌"이라고 답했다.[19]

6. 오리게네스주의 논쟁과 사후 평가

루피누스는 8년 동안 디디모스의 제자였다. 그가 오리게네스의 『원리에 관하여』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 그는 디디모스의 주석을 참조했다. 제롬은 그의 많은 책 서문에서 디디모스가 자신의 사상에 기여한 점을 언급하며, 디디모스를 "예언자 디디모스"라고 불렀다.[9] 루피누스는 제롬이 디디모스와 오리게네스를 비난한 후에도 디디모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디디모스는 정통 기독교 교사로 여겨졌으며, 최소 553년까지 매우 존경받고 칭송받았다.[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디디모스의 니케아 신조에 대한 충실성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에 비유했다. 그는 교사로서 유대인, 이교도, 마니교도, 그리고 다른 기독교 교사들과 토론하고 그들에게 배웠다. 디디모스의 강의 기록과 학생들이 한 질문들은 그가 같은 교육받은 학생들을 여러 번 가르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맹인 성 디디모스로 칭한다.[10]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우스의 저작과 함께 그의 저작을 정죄했지만, 그 인물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았다.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디디모스는 오리게네스와 연관되어 함께 정죄되었다.[11] 많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견해들이 오리게네스와 연관되었으며, 공의회에 귀속된 15개의 아나테마는 영혼 선재설, 범신론(이 맥락에서는 이단적인 그리스도론), 그리고 육체의 실질적이고 영원한 부활의 부정을 포함하여 종말 복원주의의 한 형태를 정죄한다.[12]

그의 저작이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세르비아 정교회 성인전인 ''오흐리드의 서문''에 "성 디디모스 눈먼 자"로 등재되어 있으며, 축일은 10월 18일로 기록되어 있다.[13]

7. 현대의 재조명

디디모스는 "교회 학교의 교사"였으며,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았다.[5]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수장이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5] 디디모스는 평생 평신도로 지내면서 당대 가장 학식이 높은 수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6] 그는 헤르메티카를 통해 기독교 도래를 예언한 최초의 알렉산드리아 출신 기독교인이었다.[7] 루피누스, 제롬 등이 그의 제자였다.[8]

루피누스는 8년 동안 디디모스의 제자로 지내면서 오리게네스의 『원리에 관하여』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디디모스의 주석을 참고했다. 제롬은 디디모스를 "예언자 디디모스"라고 부르며 그의 사상적 기여를 언급했다.[9] 디디모스는 정통 기독교 교사로 존경받았으며,[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그의 니케아 신경에 대한 충실성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비교했다. 그는 교사로서 유대인, 이교도 등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고 배웠으며, 그의 강의 기록과 학생들의 질문은 그가 같은 학생들을 여러 번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여러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맹인 성 디디모스라고 부른다.[10] 그의 비난으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중세 시대에 필사되지 못하고 유실되었는데, 『교의론』,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하여』, 『아리우스 반박』 등이 그 예이다.[14] 디디모스의 유실된 작품 중에는 오리게네스의 『원리강해』에 대한 주석이 있으며, 예로니모에 따르면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이해를 해석하려 했다. 그는 영혼의 선재와 만물 회복을 가정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은 인간이었지만 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디디모스의 성경 주석은 카테나에서 발견되었다. 1941년 투라, 이집트(카이로 남쪽) 근처 탄약고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필사본 묶음은 디디모스에 대한 현대 지식을 크게 확장시켰다. 여기에는 즈가리야서, 창세기 1-17장 등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15] 그는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곳에서 상징을 보았으며, 개인의 덕으로의 움직임이 성경과의 상호 작용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디디모스는 『성령에 관하여』(381년 이전)라는 논문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베드로후서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했다.[17] 튀라니우스 루피누스에게 보낸 『어린아이들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는 유아들이 "많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 감옥에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형벌"이라고 답했다.[19]

디디모스는 하나님을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무파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독립적인 실재를 표현했다.[16] 마니교와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주장했다. 그의 속죄론은 신격화보다는 속량과 형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고, "보편적 구원"을 이야기하며 악마의 궁극적인 회복을 언급하기도 했다.[5]

디디모스는 영혼의 선재를 받아들이고 사후 세계를 정화의 과정으로 간주했지만, 윤회는 거부했다. 그는 주의 날을 영혼의 내적 조명으로 묘사하고, 미래 세계에서는 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게네스와 마찬가지로, ''참된'' 영지주의자들이 신성한 철학을 소유하여 이단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신앙을 명확하게 고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신학 전반에 걸쳐 오리게네스의 영향이 드러난다.[5]

8. 작품 속 묘사

키 롱펠로우의 소설 『은처럼 흘러내려라,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에 디디무스 더 블라인드가 등장한다.[20]

참조

[1] 웹사이트 St Didymus the blind: Author, ascetic, theologian, dean & polymath https://theartoforth[...] 2022-06-16
[2] 웹사이트 Dedimus (Didymus) 313-398 AD http://www.acsu.buff[...] Judith Felson Duchan
[3] EB1911 Didymus
[4] 간행물 Didymus the Blind: An unknown precursor of Louis Braille and Helen Keller
[5] 서적 From Nicaea to Chalcedon: a guide to the literature and its background SCM Press 2010
[6] 웹사이트 Didymus The Blind https://www.britanni[...] 2017-11-13
[7] 서적 The Egyptian Hermes : a historical approach to the late Pagan mi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
[8] 서적 Didymus the Blind and His Circle in Late-Antique Alexandria University of Illinois 2004
[9] 웹사이트 Didymus the Blind https://www.newadven[...] 2021-03-22
[10] 웹사이트 Coptic Orthodox Church Centre, UK http://www.copticcen[...] 2007-09-07
[11] 서적 African Christian Mothers and Fathers: Why They Matter for the Church Today https://books.google[...] Cascade books 2015
[12] 서적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I, Volume XIV (The Seven Ecumenical Councils)" Hendrickson Publishers
[13] 웹사이트 Western American Diocese - October 18 http://westserbdio.o[...] 2022-05-15
[14] 서적 The Eastern Fathers of the Fourth Century Nordland Publishing Company
[15] 서적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http://www.oxfordref[...]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16] 서적 Commentary on Zechariah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06
[17] 서적 Forgery and Counterforgery: The Use of Literary Deceit in Early Christian Polemics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18] 간행물 The New Testament Canon of Didymus the Blind 1983
[19] 웹사이트 Apology Against Rufinus (Book III) https://www.newadven[...]
[20] 서적 Flow Down Like Silver, Hypatia of Alexandria Eio books
[21] 웹사이트 Judy Duchan. http://www.acsu.buff[...]
[22] 서적
[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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