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군인 고려대학교 난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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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장군인 고려대학교 난입 사건은 1965년과 1971년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자 무장 군인들이 고려대학교에 진입하여 학생들을 폭행하고 연행했으며, 연세대학교에도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했다. 1971년에는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가 고려대학교에 진입하여 학생들을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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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5년 무장 군인 난입 사건

1965년 한일협정 비준안 처리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박정희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 속에서 1965년 8월 25일 무장 군인이 고려대학교 교내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인들은 교내에서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수십 명을 연행했으며, 이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군 병력이 직접 대학 캠퍼스에 투입되어 학생 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2.1. 배경

1965년 8월 11일, '한일협정비준안'이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 의해 국회 비준특별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강행 통과되었다. 이에 야당인 민중당은 8월 12일 총사퇴를 결의하고, 소속 의원 68명 중 61명이 사퇴서를 제출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나 공화당만 남은 국회는 8월 13일 본회의에서 '전투부대월남파병동의안'을, 다음 날인 8월 14일에는 '한일협정비준안'을 차례로 통과시켰다.

이러한 여당의 독단적인 처리 방식에 반발하여, 8월 17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는 '한일협정비준안 1당국회통과무효 선언식'을 열고 개학 후 강력한 저항 운동을 벌일 것을 예고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확산되어 8월 23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 1,500여 명이 시위에 나섰고, 24일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모인 학생 약 1만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국회 해산'과 같은 구호까지 등장했다. 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휴교 조치, 군대를 동원한 강제 진압, 시위 주동 학생들의 구속 범위 확대 등을 포함한 강경 대응책을 검토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시위가 계속되는 학교는 폐쇄하고 관련 교직원에게도 책임을 묻는 등 매우 강경하게 대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2.2. 사건 발생 및 경과

1965년 8월 25일 13시 30분경, 무장한 군인 약 500명이 고려대학교 교내로 난입했다. 이들은 강의실, 고대 신문사, 도서실, 강당, 식당 등에서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던졌으며, 학생들을 발로 밟고 곡괭이 자루로 구타하며 수십 명을 연행했다. 교문 밖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 대신 무장 군인들이 투입되어 강경하게 진압했으며, 취재 중이던 기자에게도 욕설과 폭력을 행사했다. 군인들은 기자와 조교, 학생 30여 명을 추가로 연행했으나, 이들은 다음 날인 8월 26일 오전에 모두 훈방 조치되었다.

8월 26일, 정부는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했다. 이 조치로 수도경비사령부와 서울 근교의 예비사단, 야전군 소속 1개 사단 병력이 학생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이러한 병력 동원에 대해 유엔군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과도 협의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14시경, 트럭 여러 대에 나눠 탄 무장 군인 약 200명이 연세대학교에 투입되었다. 이 중 50여 명은 교내에서, 150여 명은 교문 근처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연행했다. 취재하던 기자는 군인들에게 폭행당하고 필름을 빼앗기기도 했다. 교내에 진입한 군인들은 M1 소총에 대검까지 착검한 상태였다고 보도되었다. 이어 15시경에는 전날에 이어 고려대학교 교내에 다시 200여 명의 무장 군인이 진입하여, 군인들에게 돌을 던진 학생 수십 명을 연행했다. 이때 취재 중이던 기자도 함께 연행되었다.

한편, 8월 26일 서울 시내 여러 학교에서는 '한일협정 비준 무효'를 주장하고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광운공업고등학교와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도 언론에 보도되었다.

2.3. 사회적 여파 및 반향

사건이 진행되자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에 대한 사회 각계 각층의 반발이 잇따랐다.

고려대학교 긴급 교수회에서는 성명 발표를 통해 8월 25일의 무장군인 고려대학교 난입사건을 '잔악한 폭거'로 규정하였다.

경향신문》에서는 이를 두억시니의 민화에 비유하여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 평가하면서, '학원은 현대의 성역'이며, '민족의 생명과 희망이 자라고 정의가 자라는 곳'임을 주장하였다.

3. 1971년 무장 군인 고려대학교 난입 사건

1971년 10월 5일 새벽 1시 10분경,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 소속 소령이 인솔하는 무장 군인 22명이 고려대학교 교내에 진입하여 학생회관에 있던 학생 5명을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행된 학생들은 이후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인계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국방부 장관은 10월 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일부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이며 군의 잘못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3.1. 배경

당시 국제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유엔 가입이 논의되고 있었고, 베트남에서는 티우 대통령의 단독 출마에 반대하는 반정부·반미 학생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좌익 성향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으며, 필리핀에서는 반정부 학생 시위대가 무장 괴한에게 총격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국내에서는 1971년 9월 28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교련 반대 시위를 벌였고, 같은 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사치와 향락 등 퇴폐 풍조를 배격하자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9월 30일 교련 과목의 전면 철폐 요구로 이어졌다.

3.2. 사건 발생 및 경과

1971년 9월 말, 대한민국 내 대학가에서는 교련 반대 시위와 사회 정화 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9월 28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교련 반대 시위를 벌였고, 같은 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사치와 향락을 배격하는 퇴폐풍조 배격 시위를 시작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는 9월 30일 교련 과목의 전면 철폐 요구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1년 10월 5일 새벽 1시 10분경,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 소속 소령이 이끄는 무장 군인 22명이 고려대학교 교내로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학생회관에서 쉬고 있던 학생 5명을 강제로 사령부로 연행했다가, 이후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인계하였다.

사건 발생 후, 국방부 장관은 10월 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하여 이 사건에 대해 해명했다. 그는 학생들이 교내에서 기거하며 교련 반대 시위를 벌여 명예 훼손 등의 처벌이 어려워지자, 일부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군의 잘못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