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에슈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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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에슈코 1세는 963년 폴란드 공에 즉위하여 폴란드 국가를 건설한 인물이다. 그는 초기 생애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나, 966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보헤미아 공녀 도브라바카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는 등 외교 정책을 펼쳤다. 또한, 포메라니아를 정복하고 소폴란드, 실레지아를 병합하여 폴란드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 992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뒤를 이었다. 미에슈코 1세는 폴란드를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 통합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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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슈코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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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폴란드 공작 |
재위 기간 | 960년 – 992년 5월 25일 |
즉위 | 960년 |
퇴위 | 992년 5월 25일 |
전체 이름 | (알 수 없음) |
이전 통치자 | 셰모미수 |
후임 통치자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
배우자 | 보헤미아의 도브라바 |
배우자 2 | 할덴슬레벤의 오다 |
자녀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시비엥토스와바 블라디보이, 보헤미아 공작 (?)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람베르트 |
왕조 | 피아스트 왕조 |
아버지 | 셰모미수 |
출생일 | 대략 930년 |
사망일 | 992년 5월 25일 |
사망 장소 | 포즈난, 폴란드 |
종교 | 슬라브 신화 (966년 이전) 칼케돈 기독교 (966년 – 사망 시까지)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보헤미아의 도브라바 할덴슬레벤의 오다 |
자녀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시비엥토스와바 블라디보이, 보헤미아 공작 (?)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람베르트 |
이름 | |
추가 정보 | |
참고 | 그녀의 아버지는 스코글라르 토스테로 확인됨. |
2. 초기 생애
미에슈코 1세가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소 폴란드 연대기》에서 출생 연도를 920~931년 사이로 기록하고 있지만(사본에 따라 다름), 현대 연구자들은 이 연대기를 신뢰할 만한 자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연구를 바탕으로 미에슈코 1세의 출생 연도를 922~945년 사이로 추정했으며,[2]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의 활동을 고려할 때, 출생 연도는 후자에 더 가깝다.[3]
963년, 미에슈코 1세는 폴란드 공에 즉위했으나, 비엘토, 볼리니아 등 슬라브계 부족과 작센 귀족 비히만 2세(빌룽 가문,en)의 침공으로 발트 해 연안의 포메라니아 지방을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966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포즈난 주교좌는 교황에 직속되었으며, 작센계가 아닌 바이에른계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미에슈코라는 이름은 전통적으로 미에치슬라프의 애칭으로 여겨졌지만, 현대 역사학자 대다수는 이를 부정한다. 미에슈코의 또 다른 이름인 "다고메"는 《다고메 이우덱스》 문서에 등장하지만, 그 기원은 불확실하다.[5]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미에슈코가 채택한 기독교식 이름인 다고베르트에서 유래되었거나, "다고"는 다고베르트, "메"는 미에슈코를 뜻하는 두 이름의 약자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4]
3. 통치
체코 공국 공녀 도브라바카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 포모제를 되찾았으며, 마워폴스카, 실레지아를 병합하여 훗날 폴란드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3000명 규모의 종사단은 통일의 핵심 동력이었다.
992년 사망 후, 도브라바(보헤미아 공 볼레스와프 1세의 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공위를 계승했다. 현재 폴란드에서 발행되는 10즈워티 지폐 앞면에 미에슈코 1세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3. 1. 초기 통치
미에슈코 1세는 아버지 사후 960년경 통치를 시작했다.[6] 그가 물려받은 영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폴라니, 고플라니 거주 지역,[7] 시에라츠-웽치차, 쿠야비아,[8] 마조비아,[9] 그단스크 포메라니아[10] 등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에슈코 1세는 이질적인 부족 통합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단일 언어, 유사 신념,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가졌지만, 부족 구조로 사회적으로 연결되었다.[12]
966년경 아브라함 벤 야곱은 미에슈코 1세를 광대한 "북부" 지역 통치 슬라브족 왕 중 한 명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기록했다.[11]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와 티트마르 기록에서도 미에슈코 1세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미에슈코 1세는 폴란 부족 연맹의 팽창 정책을 계승, 마조비아 정복,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일부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8] 그는 동쪽 폴라비안 슬라브족 지역에 주로 관심을 가졌다.
963년 마르크그라프 게로의 루사티아, 슬루피안 부족 영토 정복으로 폴란드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에슈코 1세는 벨룬자니, 루티치 부족 확장을 시작했다. 아브라함 벤 야곱에 따르면, 미에슈코 1세는 베레티(웰타바 부족 추정)와 싸웠다. 젊은 비크만은 미에슈코 1세를 두 번 격파, 963년경 미에슈코 형제가 전사했다. 오데르강 어귀는 독일 마르크그라프들의 목표였고, 실레시아, 소폴란드 소유 베레티 보헤미아도 폴란드에 위협이었다.
3. 2. 독일과의 관계
티에트마르의 연대기는 마르크그라프 게로가 슬라브 부족을 공격한 사건을 다루면서, 게로가 "황제의 권위에 루사티아와 셀풀리(Słupian 부족)를 종속시켰고, 미에슈코도 그의 백성과 함께 그렇게 했다"고 기록했다.[13]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티에트마르가 비두킨트의 연대기를 요약하면서 오류를 범하여, 게로의 공격을 미에슈코가 당시 비흐만 더 영거와 벌인 전투 대신 배치했다고 본다. 다른 자료에서는 그러한 정복이나 폴란 국가를 폴라비안 슬라브와 같은 반열에 두었다는 언급이 없다.[14]
반면 게로의 침략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르크그라프가 실제로 성공적인 침략을 감행하여 미에슈코 1세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당했고, 독일 교회를 통해 가톨릭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전쟁의 결과로 가톨릭교가 도입되었다는 주장은 독일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14]
티에트마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실제로 "우스케 인 부르타 플루비움"(바르타 강)까지의 영토에서 황제에게 공물을 바쳤다.[15] 아마도 미에슈코는 루사티아가 겪었던 것과 유사한 침략을 피하기 위해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을 것이며, 이 조공은 965년 또는 늦어도 966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공물은 독일의 영향권에 있던 루부시 지방에만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6] 이러한 정황은 967년에 미에슈코 1세가 작센 연대기에서 황제의 친구(또는 동맹, 지지자, 라틴어: ''amicus imperatoris'')로 묘사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한편, 미에슈코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막대한 공물을 보내 원조를 받고, 966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때 설치된 포즈난의 주교좌는 교황에 직속되었다. 또한, 작센계 성직자가 아닌 바이에른계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들어가는 것을 교묘하게 피했다.
3. 3. 기독교 개종
966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1세의 딸 도브라바와 결혼했다.[17] 이 결혼은 정치적인 폴란드-보헤미아 동맹을 맺기 위한 것으로, 폴란드 통치자에 의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8]
미에슈코 1세는 이듬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체코인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고 폴라비안 슬라브족 지역에서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다.[19] 동시에, 세례는 독일 변경백의 공격 가능성을 줄이고, 무력으로 폴란드를 기독교화하려는 시도를 막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중앙 집권적인 통치를 확립하려는 미에슈코 1세의 노력을 방해했을 수도 있는 영향력 있는 이교 사제 계급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9]
익명의 갈루스와 연대기 작가 티에트마르는 미에슈코 1세의 개종이 도브라바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통치자의 아내가 남편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당시 흔한 관례였기 때문에, 도브라바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미에슈코 1세의 세례는 966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세례 장소는 그니에즈노 또는 오스트루프 레드니키와 같은 폴란드 도시 중 하나였을 수도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아마도 레겐스부르크)였을 수도 있다.[22] 미에슈코 1세가 독일과 독일 교회의 종속을 피하기 위해 체코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보헤미아는 973년까지 자체 교회 조직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보헤미아 교회는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일부였고, 따라서 폴란드 통치자가 프라하의 중재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면 레겐스부르크에서 승인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세례, 설교, 기도, 교회, 사도, 주교 또는 견신례와 같은 종교적 어휘는 체코어에서 차용되었으며, 이는 도브라바의 측근과 그녀와 함께 온 교회 요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대 폴란드 주교 요르단도 도브라바와 함께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에슈코 1세가 체코를 선호한 이유는 보헤미아에 비잔틴 그리스 형제이자 나중에 성 치릴로와 메토디우스의 계율을 따르는 선교가 존재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들은 슬라브 의식으로 전례를 개발하고 수행하여 미에슈코 1세와 그의 백성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3. 4. 포메라니아 정복
신성 로마 제국 및 보헤미아와의 관계가 정상화된 후, 미에슈코 1세는 포메라니아 서부 정복 계획을 추진했다. 967년 9월 21일, 폴란드-보헤미아군은 비흐만 청년이 이끄는 볼린인과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에슈코가 오드라강 하구를 장악하게 되었다.[23] 이 승리는 미에슈코에게 과거 비흐만에게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는 만족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미에슈코 1세의 포메라니아 서부 전투의 정확한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이 지역을 잃은 것은 정복이 어려웠고 해당 영토에 대한 지배가 다소 불안정했음을 시사한다. 갈루스 아노니무스 연대기에는 "폴란드 공작에게 패배한 군대의 지도자들은 종종 세례를 통해 구원을 구했지만, 힘을 되찾자마자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고 기독교인을 상대로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5. 오도 1세와의 전쟁
972년 폴란드는 작센 동부 변경백 오도 1세의 공격을 받았다. 티에트마르 연대기에 따르면, 오도는 황제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행동했다. "그 동안,[24] 고귀한 변경백 호도는 군대를 모아 바르타 강까지 (토지에 대해) 황제에게 충실히 조공을 바치고 있던 미에슈코를 공격했다."[25]
이 침략의 이유에 대해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변경백 오도는 폴란드 국가의 성장하는 힘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오도는 자신의 영향권으로 여겨지는 볼린 국가가 폴란드에 병합되는 것을 막고 싶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6] 볼린인들 스스로 변경백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27] 어쨌든 오도의 군대는 진격했고, 972년 6월 24일, 일반적으로 체디니아로 알려진 '치디니' 마을에서 미에슈코의 군대와 교전했다. 처음에는 변경백이 미에슈코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후 공작의 형제 츠치보르가 독일군을 격파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미에슈코가 의도적으로 퇴각을 유도했고, 독일 추격군의 측면을 기습했을 가능성이 있다.[28] 이 전투 이후 미에슈코와 오도는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973년 퀘들린부르크에서 제국 다이어트에 소환되었다. 황제의 정확한 판결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판결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다이어트 후 몇 주 뒤에 황제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 판결은 폴란드 통치자에게 불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타이히 연대기'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집회 기간 동안 퀘들린부르크에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아들 볼레스와프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29]
미에슈코와 오도 1세의 갈등은 놀라운 사건이었는데, 티에트마르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변경백을 매우 존경했기 때문이다. 티에트마르는 "미에슈코는 오도가 있는 집에서는 결코 겉옷을 입지 않았고, 오도가 일어선 후에도 앉아 있지 않았다"고 썼다.
체디니아에서의 승리는 실질적으로 서포메라니아의 운명을 미에슈코의 속령으로 굳힌 것으로 여겨진다.
3. 6. 동방 확장
970년대에 산도미에시 지역과 렌지아니가 거주하던 프셰미실 지역이 폴란드에 편입되었다.[30] 서면 자료가 부족하여 확실한 것은 없다. 특히 프셰미실 지역은 백크로아티아인이 거주했으며, 당시에는 보헤미아에 속해 부크강과 스티르강까지 영토가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1] 원초 연대기는 981년에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1세가 루리크 왕조의 일원으로 "라흐족을 향해 가서 그들의 도시 프셰미실, 체르벤 및 기타 요새 (...)를 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2]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은 불확실한데, 루스인의 단어 "라흐족"은 폴란드인 전체와 남동부 렌지아니를 모두 의미했기 때문이다.[32] 미에슈코의 산도미에시 정복은 비스툴란 (서부 및 중부 소폴란드)을 점령하면서 더 늦게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33] 그러나 10세기의 비두킨트는 미에슈코가 렌지아니와 동일시되는 "리치카비키" 부족인 "슬라비"를 다스렸다고 언급했다.[34][35][36][37][38][39]
일부 역사가들은 산도미에시, 루블린 및 체르벤(서부 붉은 루테니아) 지역이 무역적 가치가 있고, 당시 보헤미아의 영토였던 소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970년대에 실제로 미에슈코의 국가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산도미에시는 이 지역의 중심 허브였으며, 체르벤, 프셰미실, 헬름은 방어 국경 요새의 기능을 수행했다.[40]
3. 7. 독일 내 분쟁 개입
973년 오토 1세 황제가 사망한 후, 미에슈코 1세는 매형인 보헤미아의 볼레스와프 2세와 함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를 지지하며 독일 내 권력 투쟁에 개입했다.[41] 미에슈코 1세가 이러한 선택을 한 동기는 퀘들린부르크 회담의 부정적인 판결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독일과의 협력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41] 그러나 바이에른 공작은 패배했고, 오토 2세 황제가 권력을 완전히 되찾았다.
977년 미에슈코 1세의 아내 도브라바가 사망했지만, 폴란드 통치자는 보헤미아와의 동맹을 유지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뚜렷한 여파가 없었다.
979년 오토 2세가 폴란드를 공격했다는 주장이 있다. 11세기의 ''캉브레 주교 연대기''에 관련 기록이 있지만, 이 원정의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악천후로 인해 황제가 그해 12월에 튀링겐과 작센의 국경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42] 침공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며, 연대기에는 "슬라브족을 상대로 한" 원정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다만,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10세기 마지막 분기에 그니에즈노와 오스트로프 레드니키의 요새화가 급격히 확장되었는데, 이는 폴란드-독일 전쟁이나 그러한 전쟁의 예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42] 원정 기간으로 보아 포즈난 인근까지 도달했을 수도 있다.[43]
980년 봄 또는 여름에 폴란드-독일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44] 그해 11월에 오토 2세가 자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미에슈코 1세는 북부 변경백령의 변경백 할덴스레벤의 디트리히의 딸인 오다를 칼베 수도원에서 납치한 후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45]
3. 8. 스웨덴과의 협력
980년대 초, 미에슈코 1세는 덴마크에 대항하기 위해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동맹은 미에슈코의 딸인 스웨토슬라바와 스웨덴 국왕 에리크의 결혼으로 굳건해졌다.[48] 브레멘의 아담이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덴마크 궁정에서 유래한 이 조약의 내용은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는 혼동으로 인해 미에슈코의 이름 대신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48]
::"스웨덴의 왕 에리크는 폴란의 매우 강력한 왕 볼레스와프와 동맹을 맺었다. 볼레스와프는 에리크에게 그의 딸 또는 여동생을 주었다. 이러한 협력으로 인해 덴마크인들은 슬라브족과 스웨덴인들에게 패배했다."
미에슈코는 덴마크 국왕 하랄드 블루투스와 그의 아들 스벤으로부터 포메라니아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스웨덴과의 동맹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들은 볼린 자치 단체와 협력했을 수도 있다. 덴마크는 991년경에 패배했고, 그들의 통치자는 추방되었다. 스웨덴과의 왕조적 동맹은 아마도 미에슈코의 군대의 장비와 구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바랑기아 전사들이 모집되었을 것이며, 그들의 존재는 포즈난 인근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된다.[48]
3. 9. 보헤미아와의 전쟁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와 전쟁을 벌여 실레시아와 소폴란드를 점령했다.[52] 이 전쟁은 폴란드와 보헤미아 사이의 오랜 갈등의 결과였으며, 폴란드의 영토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에슈코 1세는 966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 교황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침략을 막고, 체코 공국과 동맹을 맺어 포모제를 되찾는 등 폴란드의 기틀을 다졌다.
3. 10. 다고메 이우덱스
미에슈코 1세는 생애 말년인 991년에서 992년 사이에 《다고메 이우덱스》라는 문서를 발행하여 자신의 영토를 교황의 보호 아래 두었다. 이 문서는 그의 두 번째 부인 오다와 그 아들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죽음과 유산
미에슈코 1세는 992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65] 티트마르에 따르면 그는 "노령에 열병으로 쇠약해져" 사망했으며, 자연사 외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다는 근거는 없다. 그의 유해는 포즈난 성 베드로-바오로 대성당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폴란드 최초의 역사적 통치자의 유해는 발견된 적이 없어 정확한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66] 1836~1837년에는 포즈난 대성당의 골든 채플(Złota Kaplica|즈워타 카플리차pl)에 미에슈코 1세와 그의 후계자 볼레스와프 1세를 위한 가묘가 세워졌으며, 볼레스와프의 14세기 무덤에서 발견된 손상된 유해가 안치되었다.
티트마르에 따르면 미에슈코 1세는 죽기 전에 자신의 국가를 여러 공작에게 분할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그의 아들들인 볼레스와프 1세, 미에슈코, 람베르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 고고학자 한나 코츠카-크렌츠는 포즈난에서 미에슈코의 궁전-성당 단지의 잔해를 찾아냈다.[67]
미에슈코 1세는 폴란드 영토를 통일한 것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국가는 폴란드라고 불릴 수 있는 최초의 국가였다. 그는 종종 폴란드 국가의 창시자, 주요 창조자이자 건설자로 여겨진다.[68] 그는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하여 폴란드를 로마 가톨릭 유럽의 주류 문명과 정치 구조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 건립을 후원했으며, 오스트루프 툼스키의 교회와 포즈난 대성당을 건립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69] 미에슈코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는 자체적인 동전인 데나리우스를 주조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S. 수호돌스키에 따르면 화폐 시스템은 미에슈코 1세의 손자이자 동명이인인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에 의해 설치되었다.
미에슈코 1세는 통치 말년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영토보다 최소 두 배나 큰 영토를 아들들에게 남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레시아, 서포모제, 그리고 아마도 크라쿠프를 포함한 소폴란드의 추가였다. 그는 독일, 보헤미아, 스웨덴과의 협정을 포함하는 효율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군사 자원을 신중하게 사용했다.
미에슈코 1세는 10 즐로티 지폐 앞면에 등장한다.[70]
5. 결혼과 자녀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의 도브라바와의 사이에서 볼레스와프 1세와 시그리드를 낳았다.[71] 볼레스와프 1세는 훗날 폴란드의 왕이 되었고, 시그리드는 에리크 6세 스웨덴 왕과 스벤 1세 덴마크 왕과 차례로 결혼했다. 시그리드는 스벤 1세와의 사이에서 크누트 대왕의 어머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2]
일부 연구자들은 미에슈코 1세와 할덴슬레벤의 오다의 딸인 벤덴의 군힐다가 스벤 1세의 아내였으며, 크누트 대왕과 하랄 2세의 어머니였다고 주장한다.[72]
또한, 미에슈코 1세에게는 포메라니아 슬라브 공작과 결혼한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도브라바 또는 이전 이교도 아내 중 한 명의 딸일 수 있다. 이 딸과 포메라니아 남편은 포메라니아 공작 제무질의 부모였다는 설이 있다.[73] 티트마르에 근거한 이론에 따르면, 1002~1003년에 보헤미아 공작으로 통치한 블라디보이는 미에슈코 1세와 도브라바의 아들이었다.[73]
미에슈코 1세는 978/79년에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결혼하여 미에슈코, 시벤토페우크, 람베르트 세 아들을 두었다.[74][75]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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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
문서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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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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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Zakład Narodowy imienia Ossolińskich Wydawn. Polskiej Akademii Nauk
1967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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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Brill
2008
[6]
문서
K. Jasiński, ''Siemomysł'', Polski Słownik Biograficzny, vol. 37, 1996, pp. 58–59.
[7]
문서
[[Gerard Labuda]], ''Mieszko I'', pp. 18–22
[8]
뉴스
''Początki Polski w nowym świetle'' (The beginnings of Poland in new perspective) by [[Tomasz Jasiński (historian)|Tomasz Jasiński]], p. 17. The [[Polish Academy of Sciences]], Portal Wiedzy www.portalwiedzy.pan.pl "Nauka", April 2007
[9]
문서
G. Labuda, ''Mieszko I'', p. 85; S. Szczur, ''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pp. 34–35
[10]
문서
S. Szczur, ''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p. 34; Henryk Łowmiański, ''Początki Polski'', vol. V, p. 502; G. Labuda, ''Mieszko I'', pp. 121–122
[11]
문서
[[Jerzy Wyrozumski]] – ''Dzieje Polski piastowskiej'' (VIII w. – 1370) (History of Piast Poland (8th century – 1370)), Kraków 1999, p. 76
[12]
문서
Jerzy Wyrozumski – ''Dzieje Polski piastowskiej'' (VIII w. – 1370) (History of Piast Poland (8th century – 1370)), Kraków 1999, p. 77
[13]
문서
see for example G. Labuda, ''Mieszko I'', chap. III.2.
[14]
문서
see for example Henryk Łowmianski, ''Początki Polski'', Warsaw, 1973.
[15]
문서
''Thietmari chronicon'', vol. II chap. 29
[16]
문서
G. Labuda, ''Mieszko I'', chap. III.2.; A.F. Grabski, ''Bolesław Chrobry'', p. 25
[17]
문서
G. Labuda, ''Mieszko I'', pp. 43–45.
[18]
문서
G. Labuda, ''Mieszko I'', p. 92
[19]
문서
G. Labuda, ''Mieszko I'', chap. IV.3.
[20]
문서
H. Łowmiański, ''Początki Polski'', pp. 342–345.
[21]
문서
Between 965–967 according to the ''Monumenta Poloniae Historica'' ed. by A. Bielowski, vol. II, Lwów 1872; in 966 according to Tadeusz Wojciechowski.
[22]
문서
G. Labuda, ''Mieszko I'', pp. 92–97.
[23]
문서
Probably not the main stronghold of the region – [[Wolin (town)|Wolin]]. G. Labuda, ''Mieszko I'', cap. V.3.
[24]
문서
At that time, Emperor Otto I was in Italy.
[25]
문서
''Thietmari chronicon'', vol. II p. 29
[26]
문서
G. Labuda, ''Mieszko I'', p. 122.
[27]
문서
J.P. Sobolewski, ''Niemcy, Polska a Pomorze Zachodnie w latach 971–972'', "Kwartalnik Historyczny", Vol. 95, 1988, No. 1. The same argument was also given by S. Szczur, ''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p. 51.
[28]
문서
According to the reconstruction of the battle by W. Filipiowak.
[29]
서적
Die grösseren Jahrbücher von Altaich
https://books.google[...]
Franz Duncker
1871
[30]
문서
''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p. 35.
[31]
문서
The limits were described in the document issued by the bishop of Prague to [[Henry IV, Holy Roman Emperor]]. This document is preserved in the Chronicles of [[Cosmas of Prague]] and is considered a reliable copy; from G. Labuda ''Mieszko I'' pp. 148–15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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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Labuda, ''Mieszko I'', pp. 160, 174.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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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Labuda, ''Mieszko I'', cap. VI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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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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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blematyka początków państwa polskiego w nowszych badaniach historyczny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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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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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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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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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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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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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etmari chron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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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lesław Chrob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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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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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etmari chron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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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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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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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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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hietmari chron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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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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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Początki Po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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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57]
문서
Archeologia Polski wczesnośredniowieczn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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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etmari chron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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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czątki Po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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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etmari chron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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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eszk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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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czątki Po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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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jdawniejsza bu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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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rsawv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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