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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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직수는 대한민국의 법조인, 군인, 정치인이다. 1927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군법무관으로 복무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으나, 이는 조작으로 밝혀졌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된 후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200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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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직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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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신직수 |
출생일 | 1927년 3월 21일 |
사망일 | 2001년 9월 9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별명 | 호(號)는 인강(仁崗) |
본관 | 평산(平山) |
종교 | 천주교(세례명: 나자렛의 요셉) |
배우자 | 김순아 |
자녀 | 3남 2녀 |
친인척 | 신현성(손자) 신은지(손녀) 홍석현(사위) 조혜진(자부) |
군 복무 | |
군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52년~1961년 12월 |
계급 | 육군 소령 |
근무 | 육군본부 헌병참모부 |
지휘 | 법무장교 |
참전 | 한국 전쟁 |
정당 | |
정당 | 무소속 |
직책 | |
대통령 | 박정희 |
총리 | 백두진 김종필 |
국가 | 대한민국 |
직책 | 법무부 장관 |
전임자 | 배영호 |
후임자 | 이봉성 |
대수 | 22 |
임기 | 1971년 6월 4일~1973년 12월 3일 |
차관 | 오탁근 이선중 |
학력 | |
학력 | 전주사범학교 졸업 한국대학교 법학과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서훈 | |
서훈 |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청조근정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중화민국 특종대수운마훈장 |
경력 | |
경력 | 육군군사고등법원 군법무관 육군본부 헌병참모부 법무장교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 부장 대통령 비서실 법률담당 특별보좌관 |
2. 생애
신직수는 평산 신씨로 1927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미군정 시대에 전주공립학교 교사로 잠시 일했다. 이후 한국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갑종사관으로 임관하여 군법무관을 거쳐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박정희가 제5보병사단 사단장이었을 때 그의 법무참모를 지냈으며, 5·16 군사 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을 맡았다. 1971년 검찰총장을 거쳐 1973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으나,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해임되었다. 1981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1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청조근정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중화민국 특종대수운마훈장 등을 받았다.[1][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평산 신씨인 신직수는 1927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1세까지 미군정 시대에서 1년 동안 전주공립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사퇴했다. 1948년부터 학업을 계속하여 1952년 한국대학(현재 서경대학교) 법률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1]2. 2. 군 법무관 경력
1952년 육군 갑종사관으로 군법무관 장교 임관 후, 1961년 12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군 장교 시절 박정희가 제5보병사단 사단장이었을 때 그의 법무참모를 지냈다.[1][2]2. 3. 검찰총장 및 법무부 장관
5·16 군사 정변으로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의장 법률고문을 맡았다. 1971년 12월 6일, 검찰총장에 임명되었고, 1973년 12월 3일에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1976년 코리아게이트 스캔들로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있었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하자 1976년 12월 4일, 자리에서 물러났다.[1]2. 4. 중앙정보부장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1년 12월 6일, 검찰총장에 임명되었고, 1973년 12월 3일에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코리아게이트 스캔들로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있었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하자 1976년 12월 4일,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1]2. 4. 1. 울릉도 간첩단 사건 조작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1974년 3월 15일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언론은 ‘울릉도 거점 간첩단 47명 검거’라고 제목을 달았다. ‘정부전복 획책…10여년간 암약’, ‘위장업체·서클 등 구성’, ‘지식층·군부 침투 기도’가 부제였다. 47명의 인적 사항과 얼굴 사진을 1면에 실었다.[1] 하지만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조작이었다. 울릉도 주민과 1960년대 중반 일본 농업연수를 다녀온 전북 사람들을 억지로 엮어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간첩단을 만들어낸 것이었다.[1] 유신 정권의 대법원은 전영관·김용득·전영봉 세 사람에게 사형,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15년에서 1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사형은 1977년 12월 5일 집행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감옥생활과 보안관찰로 고통을 받았다.[1]2006년 피해자 한 사람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고, 위원회는 2010년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피해자들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을 포함해 19명이 지금까지 무죄를 선고받았다.[1]
2. 5.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된 후, 1981년부터 일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활동했다. 코리아게이트 스캔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있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하자, 1976년 12월 4일 해임되었다.[1][2]2001년 9월 9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공직 시절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청조근정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중화민국 특종대수운마훈장 등을 받았다.[1][2]
3. 학력
- 1946년 전주사범학교 졸업
- 1952년 한국대학 법률학과 학사[3][4][5]
- 1953년 육군보병학교 졸업
- 1954년 육군정훈학교 졸업
- 1955년 육군포병학교 졸업
- 1958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기
4. 경력
연도 | 직책 |
---|---|
1961년 |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고문 |
1961년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
1963년 | 중앙정보부 차장 |
1963년 12월~1971년 6월 | 제11대 검찰총장 |
1971년 6월~1973년 12월 | 제22대 법무부 장관 |
1973년 12월~1976년 12월 | 제7대 중앙정보부장 |
1981년 | 일양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활동 사항 |
---|---|---|---|---|
배우자 | 김순아(金順兒) | 1929년 10월 6일 | 2009년 7월 3일 |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
장남 | 신창균(申敞均) | 1950년 3월 27일 | - | 동광기업 대표 |
장녀 | 신연균(申硯均) | 1953년 2월 21일 | - | 홍석현의 아내, 기업인 이재용의 외숙모 |
차남 | 신헌(申獻) | 1954년 9월 7일 | - | 조혜진의 남편 |
3남 | 신황균(申晃均) | 1957년 1월 10일 | 2019년 2월 5일 | 전 광륜상사 대표 |
차녀 | 신선균 | 1961년 11월 28일 | - | - |
손자 | 신현성 | 1985년 11월 12일 | - | 티켓몬스터 대표 |
6. 비판 및 논란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으나, 이는 중앙정보부가 고문을 통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유신 정권은 관련자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을 선고했으나,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6. 1. 울릉도 간첩단 사건 조작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1974년 3월 15일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언론은 '울릉도 거점 간첩단 47명 검거'라고 제목을 달았고, '정부전복 획책…10여년간 암약', '위장업체·서클 등 구성', '지식층·군부 침투 기도'라는 부제를 달았다. 47명의 인적 사항과 얼굴 사진을 1면에 실었다. 그러나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조작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울릉도 주민과 1960년대 중반 일본 농업연수를 다녀온 전북 사람들을 억지로 엮어 고문으로 간첩단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유신 정권의 대법원은 전영관·김용득·전영봉 세 사람에게 사형,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15년에서 1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사형은 1977년 12월 5일 집행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감옥생활과 보안관찰로 고통을 받았다.2006년 피해자 한 사람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고, 위원회는 2010년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피해자들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을 포함해 19명이 지금까지 무죄를 선고받았다.
7. 신직수를 연기한 배우
참조
[1]
뉴스
신직수 전 법무장관 별세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1-09-09
[2]
뉴스
신직수 전법무부장관 별세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1-09-09
[3]
일반
[4]
일반
[5]
뉴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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