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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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활동하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으며, 진단학회를 창설하여 한국사 연구를 진행했다. 경성제국대학, 서울대학교 교수,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실증사학을 통해 한국 근대사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사 연구와 저술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조선사 편수회에서의 활동으로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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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요시 주이치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의 일본 고위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여러 현의 현지사와 조선총독부 총무국장, 정무총감을 지내며 현대화 사업과 도시 재건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에 관여한 점은 비판적으로 평가되며 귀족원 의원과 요코하마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 조선사 편수회 - 이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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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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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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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6년 4월 28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용인 |
사망일 | 1989년 8월 14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직업 | 역사가 |
배우자 | 조남숙 |
자녀 | 9명 |
정치 | |
학력 및 경력 | |
가족 관계 | |
종교 | |
2. 일생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활동했다. 이 경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5] 조선사 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6]
1934년,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 학술 단체인 진단학회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국사대관(1948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추구하여 한국 근대 사학이 성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7]
해방 후 1945년부터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교수를, 1955년부터 1982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60년 허정 과도 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했으나, 4개월 만인 8월에 사임했다.[2]
2. 1. 출생과 성장
그는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泉里)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와 나주 김씨 사이의 오남으로 출생하였다. 한때 경기도 수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12세가 되던 1907년 7월 가족 모두 한성부로 이주하여 이후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같은 해 11월 부친이 작고하였다. 1907년 이종일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재정난으로 폐교할 때까지 수학하였다. 15세였던 1910년 육군 참장 조성근의 장녀 조남숙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3월 사립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3월 보성전문학교(현재 수송동 조계사 자리) 법과에 입학하여 1915년 3월 졸업하였다. 1916년 4월 와세다 대학 사학 및 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에 입학하여 1919년 7월 졸업하였다.2. 2. 일제강점기 활동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 경력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5]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서 한국사 왜곡과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6]한편, 1934년 일본인을 배제하고 이상백, 조윤제 등과 함께 민간학술단체 진단학회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다.
2. 2. 1. 일제 강점기 초반
1919년 10월부터 7년간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중앙학교에서 지리, 역사, 영어를 가르쳤다. 야간에는 영어강습소에 나갔으며, 1920년 4월부터 1년간 최규동의 요청으로 중동학교(야학)에서 영어를 강의했다. 1920년 7월 김억, 남궁벽, 김혁로, 김영환, 나혜석, 민태원, 김찬영,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김원주 등 12인(후에 변영로가 참여하여 13인)과 함께 동인지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폐허는 2호까지 출판되었다.[8] 1921년 4월부터 1년간 경신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강의했다. 1922년부터는 주로 한국사상사와 지리도참 등 사상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일했는데, 금서룡(今西龍)의 촉탁(囑託)을 도와 수사관보로 일했다.[8]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해방 때까지 임시직인 촉탁으로 있었다. 그러나 실제 조선사편수회 임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활동, 특히 촉탁으로서의 활동은 사실상 이름만 올렸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맡지 못했다.[9]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 강의를 담당하였다.[10]2. 2. 2. 일제 강점기 후반
1934년 5월 7일 이상백, 조윤제, 김상기, 이병기, 손진태, 송석하, 이희승, 김태준 등과 함께 한국과 근린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황국사관에 젖어 있던 일본 사학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한민족 고유의 국명인 ‘진(震)’과 단군의 ‘단(檀)’을 합해 ‘진단학회’로 하였다.[10] 진단학회 발기식겸 창립총회는 경성부 長谷川町(현 소공동 50번지) "푸라디아느" 다방에서 개최하였다. 같은 해 11월 28일 진단학보 창간호를 간행하면서 "삼한문제의 신고찰(1):진한급삼한고"라는 논문을 투고하고 자신은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진단학회의 주소는 "경성부 계동 98번지" 자신의 집 주소지로 하였다. 또한 진단학보 창간호에 "하멜표류기"를 번역하여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7일 진단학보 제2호를 발간했다. 1941년 4월부터 3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학강좌 담당 강사로 출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9월 진단학보 제14호 발행을 끝으로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2. 3. 광복 후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활동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5] 조선사 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6]광복 후 1945년 경성대학 교수가 되었고,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1962년까지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59년 종신회원이 되었으며, 1955년부터 1982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1956년 김창룡의 묘비명을 썼다.[12]
1957년 동아문화연구위원회 이사,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9년 학술원 종신회원,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으나, 4개월만인 8월에 사임하였다. 같은 해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 3.1문화상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미국 학술원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고, 하바드 엔칭 연구소에서 특강을 했다.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64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학술원 회장(3선), 고려대학교 교우회장(4선)을 역임했다. 1965년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7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학술원 회장(5선)을 역임했다. 1965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현 한국고전번역원)를 발족하고, 1970년 재단법인으로 개편하면서 이사가 되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고전국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학술원 회장(8선)을 역임했다. 1981년 학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75년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취임하였다. 1984년 다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2. 3. 1. 광복 직후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친일 어용 역사학회인 조선사 편수회를 계속 존속시켜 나갔다.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동지들과 서지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지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일본인 교원이 전부 빠져나가고, 조선인만으로 운영되던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국대안의 제정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임명되어 사학과의 창설에 기여하였다.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간행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년 8월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54년까지 맡았다. 1953년 10월에 진단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재편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한국 역사학자들은 새로운 한국 역사를 제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는 ‘한국사 실론’(한국사실론)이라 불렸다. 이병도는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했지만, 이는 일본 학계에서 물려받은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이름만 새로운 것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3]
조윤제, 손진태, 이인용 등 진단학회 역사학자들을 포함한 한국 역사학자들은 다른 방향으로 학문을 추구했으며, 이 또한 "새로운" 것, 즉 새로운 민족주의 역사학 또는 ‘신민족주의역사학’(신민족주의역사학)이라고 불렀다.[4] 이 그룹은 특히 이병도를 식민 정부, 특히 한국사 편찬위원회(朝鮮史編修會, Chosenshi henshukai)와의 관계 때문에 배제했다. 이 위원회는 『삼국유사』와 같은 중요한 자료를 억압하거나 정당성을 훼손하여 한국 역사를 왜곡하는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4]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해방 후 한국 정치의 일부가 된 친일파 숙청 때문에 이러한 비난이 정치적인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4]
이병도 자신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것은 일본의 한국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며 논란에 대응했다. 이는 일본 식민 정부와 연관된 다른 역사학자들이 사용한 주장과 같은 맥락이었다.[4]
2. 3. 2. 교육자로서의 삶
1934년 진단학회를 설립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동지들과 서지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지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일본인 교원이 전부 빠져나가고, 조선인만으로 운영되던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국대안의 제정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임명되어 사학과의 창설에 기여하였다.[7]1947년 10월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년 8월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54년까지 맡았다.[7]
1945년 경성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경성대학과 다른 관공사립전문학교들이 통합되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되었고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7]
1960년 4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키는 한편, 대학 총학장의 교수직선제를 채택했다. 그해 8월에 사임하고 9월에 서울대학교대학원장 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2]
1961년 4월에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4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9월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원장이 되었다.[7]
1967년 6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7]
2. 4. 말년
1980년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1985년 11월 민족문화추진회 창립 20주년 및 "두계이병도 이사장구순기념 특집호"(민족문화 제11집)가 간행되었다. '두계 이병도 이사장 연보 및 논저목록'에는 연보, 상훈, 저술, 논문 목록, 訟壽의 글이 실렸다. 특집호 '권두언'에 '고전의 현대화 작업 20주년을 맞으며'를 게재했다. 1986년 5월 9일 고려대학교 교우회 '교우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고대인'으로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9일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단군조선 실재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13] 1987년 10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을 봉정받았다.
1987년 11월 4일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으로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였다. 1989년 8월 14일 새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국병원에서 영면했다.
3. 사후
이병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5]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 있을 때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다.[6]
1991년 10월 10일, 진단학회는 중진 역사학자 39인이 기고한 책 "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歷史家의 遺香: 斗溪李丙燾先生追念文集(일조각)"을 발간하였다. 2008년 4월 29일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사편수회 경력 및 그의 연구활동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4776명에 포함하여 발표했다. 2005년 서울대 학생단체에서 발표한 ‘서울대 친일인물1차12인 명단’[14], 2005년 고려대 총학이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에 포함되어 있다.[15]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 학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6]
4. 연구 및 평가
이병도는 실증사학을 추구하여 한국 근대사학 성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했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0년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며 교육 민주화에 기여했고, 민족문화추진위원회(현 한국고전번역원)를 발족하여 고전 국역 사업을 전개했다.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1년 진단학회에서 추념 문집을 발간했고, 2008년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6]
1950년대 이후 고대사학계를 이끌며 고구려 국호 기원 문제, 위만의 조선계 인물설 등을 주장했고, 1976년 《한국고대사연구》, 1977년 《국역 삼국사기》, 1987년 《한국유학사》 등을 출간했다.
이병도는 문헌을 기본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 대한민국 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4. 1. 주요 비판점
이병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활동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5] 조선사 편수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비판이 있다.[6]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다는 주장이 있다.[11]1934년 진단학회를 창립하여 한국사를 연구했으나, 일본 학계에서 물려받은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적 관점을 계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 진단학회는 이병도를 식민 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배제했다는 주장도 있다.[4]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것은 일본의 한국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4]
해방 이후, 이병도의 제자들이 고대사학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면서, 일부 민족사학계 인사 및 일반인들은 그의 후학이 한국사학계를 장악하였다고 비판한다.[18] 또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일본 덴리대학교(天理大學校)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제기되어 비판을 받았다.[19]
5. 주요 저서
제목 | 출판사 | 발행년도 | 기타 |
---|---|---|---|
조선사 | 조선총독부 | 1922년 ~ 1938년 | 총 35권, 총 24,409페이지 |
역주 삼국사기 | 박문서관 | 1943년 | 초판 발행, 박문문고 2책 (1책 342(?)쪽, 2책 479쪽), 1945년, 1956년(춘조사 재발행), 1965년(동국문화사, 468쪽), 1977년(을유문화사, 국역본 736쪽, 원문교열본 463쪽) |
조선사대관 | 동지사 | 1948년 | 1949년 수정 3판(501쪽) |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을 중심으로 | 을유문화사 | 1948년 | 1986년 개정판(아세아문화사, 446쪽) |
새국사 교본 | 동지사 | 1948년 | 208쪽 |
한국사(고대편) | 을유문화사 | 1959년 | 김재원 공저, 진단학회 편, 1965년 수정판(730쪽), 1980년 16판(70쪽, 부록 색인 31쪽, 역대왕실계보 외 도표) |
한국사(중세편) | 을유문화사 | 1961년 | 진단학회 편 |
하멜표류기(역서) | 박문각 | 1939년 | 초판, 1946년(재판), 일조각(1954년) |
중등사회 생활과 우리나라의 생활 (역사) | 일조각 | 1949년 | 210쪽 |
국사대관 | 보문각 | 1954년 | 1955년(613쪽, 색인 6쪽), 1958년, 1959년 |
국사와 지도이념 | 삼중당, 보문각 | 1954년 | 90쪽 |
이병도수필집 두계잡필(斗溪雜筆) | 일조각 | 1956년 | 519쪽 |
중학교사회생활과 중등국사 | 을유문화사 | 1956년 | 204쪽, 1963년판(212쪽), 1964년판(212쪽) |
역주 삼국유사 | 동국문화사 | 1956년 | 1962년(재판, 468쪽), 1965년(3판, 468쪽), 1976년(광조출판사 수정판), 2000년(명문당, 468쪽), 2000년(조선일보, 누리미디어 제작 CD) |
고등학교 사회과 국사 | 일조각 | 195?년 | 197쪽 |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 | 서울대 문리대사학연구실 | 1959년 | 유인물, 철필 등사본 |
중국어판 한국사대관(許宇成 역) | 正中書局 | 1963년 | |
한국사대관 | 보문각 | 1964년 | 1969년(589쪽) |
내가 본 어제와 오늘 | 신광문화사 | 1966년 | 289쪽 |
인문계고등학교 국사 | 일조각 | 1969년 | 274쪽 |
나의 인생관: 풀뭇간의 쇠망치 | 휘문출판사 | 1971년 | 1974년(수정3판, 436쪽) |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 | 서문당 | 1973년 | |
한국사회와 그 문화 | 서문당 | 1973년 | |
율곡의 생애와 사상 | 서문당 | 1973년 | |
두실여적(斗室餘滴) | 박영사 | 1975년 | |
수정판 역주화선 제주도난파기 | 일조각 | 1975년 | |
한국고대사연구 | 박영사 | 1976년 | 2001년(818쪽) |
일본어판 한국고대사연구 | 學生社 | 1980년 | |
한국의 유학사상 퇴계집/율곡집(한국사상전집2, 공역) | 삼성출판사 | 1981년 | |
한국사대관 | 동방도서 | 1983년 | 538쪽 |
성기집(成己集) | 정화출판문화사 | 1983년 | 318쪽 |
한국사의 이해 | 삼성출판사 | 1984년 | |
한국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 한문본 | 아세아문화사 | 1986년 | 322쪽 |
한국유학사(한국유학사략 국역본) | 아세아문화사 | 1987년 | 506쪽 |
두계이병도박사화갑기념사업위원회,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 일조각 | 1956년 | 729쪽 |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 | 지식산업사 | 1987년 | |
진단학회 편, 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 | 일조각 | 1991년 | 336쪽 |
최태영 공저, 한국상고사입문 | 고려원 | 1989년 |
6. 상훈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고조부 | 이각(李珏) |
증조부 | 이호정(李鎬貞) |
조부 | 이태용(1824년 10월 22일 ~ 1899년 12월 25일) (이완용과 생계 22촌, 양계 36촌) |
아버지 | 이봉구(李鳳九, 1847년 10월 15일 ~ 1907년 10월 22일), 수군절도사 |
어머니 | 나주 김씨(1864년 4월 23일 ~ 1926년 12월 30일) |
형 | 이병묵(李丙默, 1876년 6월 19일 ~ 1950년 2월 12일) |
형 | 이병훈(李丙薰, 1880년 8월 17일 ~ 1953년 7월 29일) |
여동생 | 이병영(李丙暎, 1900년 ~ 사망) |
매제 | 윤치영(1898년 2월 10일~ 1996년 2월 9일), 한국의 정치인·독립운동가.[20] |
사돈 | 윤치소(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조카며느리의 친정아버지, 윤치영의 형, 6촌 형수 윤노덕의 오빠로 겹사돈. |
부인 | 조남숙(1895년 11월 16일 ~ 1967년 5월 4일) |
장인 | 조성근(1876년 3월 12일 ~ 1938년 5월 15일) |
처남 | 조백현(1900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13일), 농학자, 토양학자, 농화학자. 아호는 화농. 서울대학교 대학원 농학박사 |
장남 | 이기령(1914년 7월 26일 ~ 2002년 1월 29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수) |
손자 | 이웅무(1944년 1월 1일 ~ , 아주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
차남 | 이춘녕(1917년 3월 27일 ~ 2016년 7월 31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장) |
손자 | 이장무(1945년 5월 14일 ~ , 전 서울대학교 총장) |
손자 | 이건무(1947년 9월 19일 ~ , 전 문화재청 청장) |
삼남 | 이태령(1924년 2월 8일 ~ 2019년 3월 6일,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 명예교수) |
사남 | 이동녕(1927년 7월 22일 ~ ,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
오남 | 이본녕(1936년 1월 14일 ~ ,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장녀 | 이순경(1920년 9월 3일 ~ 2022년 8월 18일) |
사위 | 장욱진(1918년 1월 8일 ~ 1990년 12월 27일, 화가 ) |
차녀 | 이운경(1931년 9월 9일 ~ , 이운경내과의원 원장) |
사위 | 민헌기(1928년 12월 7일 ~ 2021년 3월 6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교수), 민영휘(1852년 5월 15일 ~ 1935년 12월 30일)의 증손자, 민덕기(1915년 ~ 1980년 3월 8일)의 동생. |
8. 이완용과의 관계
이병도는 이완용과 22촌 관계이며, 이병도의 조부가 이완용과 항렬이 같다.[21][22] 항간에는 이병도의 할아버지가 이완용이라는 주장이 떠돌기도 했으나, 이병도의 손자 이건무는 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21][22]
이병도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이완용의 관 뚜껑을 ‘매국노의 관 뚜껑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불태웠다.[23]
9. 윤치영, 윤보선 가문과의 관계
이병도는 4대 대통령 윤보선과 사돈 관계였다. 윤보선의 가문과는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병도는 윤보선의 삼촌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 이재녕(李宰寧, 1918년 5월 4일 ~ 2006년 2월 19일)은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2011년 3월 22일)과 결혼했다.[20] 이재녕은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이다.
이병도, 이병묵은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영의 형인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했다. 또한, 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은 윤치오의 아들인 윤승선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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