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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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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로, 1500년 아메리카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는 히스파니올라에서 사업 실패 후, 1509년 산토 도밍고를 떠나 파나마 지역에서 활동하며 유럽인 최초로 카리브해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1513년에는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하고 '남쪽 바다'라고 명명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이 두 개의 대양에 접해 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와의 갈등으로 인해 반역죄로 기소되어 1519년 처형당했다. 그는 파나마에서 기념되며, 파나마 발보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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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직업해상 탐험가, 카스티야 왕국
출생일c. 1475년
출생지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스페인
배우자마리아 데 페날로사
사망일1519년 1월 (약 43–44세)
사망지아클라, 파나마
사망 원인참수
본명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서명
탐험
태평양 발견유럽인 최초의 태평양 발견
기타

2. 초기 생애

발보아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주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난에 시달렸다.[24] 1500년 이스파니올라 섬으로 이주하여[24] 정착민으로 살았으나, 경영 능력 부족과 방탕한 생활로 빚을 지게 되었다. 1509년, 산토 도밍고의 채권자들을 피해 그의 개 "레온시코"와 함께 통 속에 숨어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가 지휘하는 탐험대에 몰래 승선했다.[3]

2. 1. 출생과 가문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스페인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온과 갈리시아의 경계에 있는 발보아 성 영주의 후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바다호스의 영부인이었고, 아버지는 히달고(귀족) 누뇨 아리아스 데 발보아였다. 바스코는 가족에서 네 명의 아들 중 셋째였으며,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사춘기 동안 그는 모게르의 영주인 돈 페드로 데 포르토카레로의 시종무사로 일했다.[4]

2. 2. 신대륙으로의 이주

1500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세계 항해 소식이 알려진 후, 발보아는 후안 데 라 코사와 함께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의 탐험대에 합류하여 아메리카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바스티다스는 "왕실 5분의 1(quinto real)" 정책에 따라 왕과 왕비를 위해 보물을 가져오는 대신 5분의 4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1501년 파나마 동부에서 카리브해 연안을 따라 콜롬비아 해안, 우라바 만을 지나 카보 데 라 벨라 쪽으로 항해했다. 탐험대는 남아메리카 북동부를 계속 탐험했지만, 결국 인원 부족을 인지하고 히스파니올라로 항해했다.[5]

1505년 발보아는 이 항해에서 얻은 수입으로 히스파니올라에 정착하여 몇 년 동안 농장주이자 돼지 농부로 살았다. 하지만 사업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결국 빚에 시달리게 되어 섬을 떠나야만 했다.

1509년 발보아는 산토 도밍고의 채권자들을 피해 그의 개 "레온시코"와 함께 통 속에 숨어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가 지휘하는 탐험대에 몰래 승선했다.[3] 엔시소의 임무는 알론소 데 오헤다를 돕는 것이었다.[6] 오헤다는 70명의 부하와 함께 누에바 안달루시아의 산 세바스티안 데 우라바(후에 카르타헤나가 건설된 곳)에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정착민들은 독극물이 묻은 무기를 사용하는 현지 원주민(인디오·인디헤나)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오헤다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오헤다는 히스파니올라로 항해했고, 식민지는 당시 단지 병사였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감독하에 남겨졌다. 피사로는 엔시소의 탐험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헤다는 피사로에게 50일 동안 일부 병력을 정착지에 남겨두고, 그 기간이 지나도 도움이 오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히스파니올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탐험대가 산 세바스티안 데 우라바에 도착하기 전,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배에서 발보아를 발견하고 그를 첫 번째 무인도에 버리고 갈 위협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마음을 바꾸었고, 8년 전에 탐험했던 그 지역에 대한 발보아의 지식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선원들이 발보아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한 덕분에,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발보아를 살려두고 배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니쿠에사를 베라과 주지사직에서 해임하기로 합의했다.

50일이 지난 후, 피사로는 히스파니올라로 귀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엔시소의 배가 도착했다. 발보아는 카리스마와 지역에 대한 지식으로 선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반대로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선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 세바스티안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반대했는데, 특히 그곳에 도착해서 정착지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원주민들이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끊임없는 공격이 이어지자 더욱 그랬다.

발보아는 1510년 카리브해에 면한 유럽인 최초의 식민 도시 산타 마리아 라 안티구아(현 콜롬비아와 파나마 국경 부근)로 이주하여 이후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3. 탐험 경력

1500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세계 항해 소식이 알려진 후, 후안 데 라 코사와 함께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의 탐험대에 합류하여 아메리카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바스티다스는 "왕실 5분의 1(quinto real)" 정책에 따라 왕과 왕비를 위해 보물을 가져오는 대신 5분의 4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1501년 파나마 동부 카리브해 연안을 따라 콜롬비아 해안, 우라바 만을 지나 카보 데 라 벨라 쪽으로 항해했다. 남아메리카 북동부를 계속 탐험했지만, 인원 부족을 인지하고 히스파니올라로 항해했다.[5]

이 항해에서 얻은 수입으로 히스파니올라에 정착하여 농장주이자 돼지 농부로 살았으나, 사업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빚에 시달려 섬을 떠나야만 했다.

1508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2세는 티에라 피르메 정복을 시작했다. 카보 데 라 벨라와 카보 데 그라시아스 아 디오스 사이 지역에 두 개의 새로운 영토를 만들었는데, 동쪽에는 알론소 데 오헤다가 통치하는 누에바 안달루시아가, 서쪽에는 디에고 데 니쿠에사가 통치하는 베라과가 있었다.

1509년, 산토 도밍고의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발보아는 그의 개 "레온시코"와 함께 통 속에 숨어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가 지휘하는 탐험대에 몰래 승선했다.[3] 오헤다는 누에바 안달루시아의 산 세바스티안 데 우라바에 정착지를 건설했는데, 정착민들은 원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했고, 오헤다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오헤다는 히스파니올라로 항해했고, 식민지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감독하에 남겨졌다. 피사로는 엔시소의 탐험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탐험대가 도착하기 전,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배에서 발보아를 발견하고 위협을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고, 발보아의 지식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선원들의 간청 덕분에 발보아는 목숨을 구했고, 두 사람은 니쿠에사를 베라과 주지사직에서 해임하기로 합의했다.

50일이 지난 후, 피사로는 귀환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엔시소의 배가 도착했다. 발보아는 카리스마와 지역에 대한 지식으로 선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반대로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인기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 세바스티안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에 반대했는데, 특히 정착지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원주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더욱 그랬다.

발보아는 금이 풍부한 새로운 왕국이라는 소식을 듣고 큰 관심을 보였다. 1513년 초 산타마리아로 돌아와 병력을 모집하려 했으나,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가 산타마리아에서 일어난 일을 식민 당국에 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발보아는 엔리케 데 콜메나레스를 스페인으로 직접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발보아 탐험의 주된 목적은 판키아코(Panquiaco)가 약속한 금이 풍부한 왕국을 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코케라(Coquera)와 투마코(Tumaco) 카시케의 땅을 통과하며, 그들을 물리치고 금과 진주를 약탈했다. 테라레키(Terarequí) 카시케가 통치하는 섬에 진주가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된 발보아는 1513년 10월 초,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척의 카누를 타고 이 섬들로 향했다. 가장 큰 섬을 이스라 델 레이(오늘날 이스라 델 레이) 즉, 리카 섬(Isla Rica)이라고 명명하고, 전체 섬들을 아르키피엘라고 데 라스 페를라스(진주 군도)라고 명명했다.

1513년 11월, 발보아는 영토를 확장하고 더 많은 금을 얻기 위해 다른 길로 산타 마리아로 돌아갔다. 테오카(Teoca), 파크라(Pacra), 부게 부게(Bugue Bugue), 보노나이마(Bononaima), 초리조(Chorizo) 지역을 통과하면서 정복하거나 우호 관계를 맺었다. 투바나마(Tubanamá) 카시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513년 12월, 탐험대는 산 블라스 만을 통해 카리브해 연안에 도착했다. 코모그레(Comogre)의 땅으로 향했지만, 그의 동맹이 죽고 아들 판키아코가 추장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폰카(Ponca)와 카레타(Careta)의 땅을 통과하여 1514년 1월 19일 산타 마리아에 도착했고, 면화 제품과 100000gold 상당의 금과 진주를 가져왔다. 이는 스페인을 위해 남해를 발견한 것의 중요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발보아는 페드로 데 아르볼란차에게 이 발견 소식을 스페인으로 전달하도록 명령했고, 법에 따라 보물의 5분의 1을 왕에게 보냈다.

발보아의 주요 탐험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500년이스파니올라섬으로 개척민으로 이주[24]
1510년산타 마리아 라 안티구아 델 다리엔으로 이주
1513년 9월190명의 부대를 조직하여 황금 탐색 시작
1513년 9월 25일파나마 지협을 넘어 태평양(발보아는 “남쪽 바다(El mar del Sur)”라고 명명)에 도달


3. 1. 초기 탐험과 다리엔 정착

1509년 파나마에 상륙한 발보아는 풍토병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원정대를 이끌고 원주민 부락을 습격하여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무능한 총독을 몰아내고 새로운 총독이 되었다.[3][6] 발보아는 다른 정복자들처럼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지만, 코마그레라는 인디언 부족의 추장과 대화를 나눈 후 학살을 멈추고 원주민과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양심의 가책이나 현실적인 협력 필요성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티에라 피르메(Tierra Firme) 1513 – 카스티야 데 오로(Castilla de Oro)


발보아는 우라바 만 서쪽의 다리엔 지역이 토양이 비옥하고 원주민의 저항이 덜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산 세바스티안 정착지를 그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스페인군은 다리엔에서 원주민 카시케(족장) 세마코와 전투를 벌였다. 어려운 전투 끝에 스페인군은 승리했고, 세마코는 정글로 도망쳤다. 발보아는 1510년 9월, 안티구아의 성모에게 한 서약대로 미국 본토 최초의 영구 정착지인 산타 마리아 라 안티구아 델 다리엔을 건설했다.[4]

산타 마리아 라 안티구아 델 다리엔 건설은 발보아에게 동료들의 존경과 권위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원주민의 금 획득을 제한하여 탐욕스러운 폭군으로 여겨지던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를 몰아내고, 마르틴 사무디오와 함께 두 명의 알칼데(시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7]

얼마 후, 로드리고 엔리케 데 콜메나레스가 이끄는 소함대가 도착하여 디에고 데 니쿠에사를 찾고자 했다. 콜메나레스는 정착민들에게 니쿠에사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설득했고, 두 명의 대표를 니쿠에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니쿠에사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발보아를 처벌하겠다고 맹세했고, 이에 발보아와 시 당국은 니쿠에사를 막기로 결정했다.

니쿠에사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폭동이 일어났고, 결국 니쿠에사는 도시 상륙에 실패했다. 그는 부적합한 배에 강제로 태워져 1511년 3월 1일에 바다로 보내졌고, 이후 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로써 발보아는 베라과의 총독(gobernador)이 되었다.[8]

3. 2. 태평양 발견

1513년 9월 25일, 발보아는 원주민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유럽인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하고 '남쪽 바다(Mar del Sur)'라고 명명했다.[3] 이는 아메리카 대륙이 두 개의 대양에 접하는 대륙임을 밝혀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발보아는 원주민 추장으로부터 남쪽에 금이 나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190명의 부대를 조직하여 탐험을 시작했다.[25] 이때 부관은 훗날 잉카 제국 정복자로 알려진 프란시스코 피사로였다.

발보아는 탐험 과정에서 약탈과 학살 등 잔혹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후세의 평가는 좋지 않다. 스페인 본국 정부도 발보아의 리더십에 우려를 품고 파나마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다리엔 총독직을 해임하고, 페드라리아스 다비라(en)를 새 총독으로 파견했다.

3. 2. 1. 탐험 과정

발보아는 쿠데타로 쫓겨난 전임 총독과 부하들이 왕에게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자, 본국으로 돌아가 사형당하는 대신 정글에서 객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시누스 마그누스'(태평양)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감행했다. 1513년 원주민의 도움으로 발보아는 태평양에 도착했고, 그 이름을 남쪽 바다(Mar del Sur)라고 명명했다.[13]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발보아 역시 태평양을 작은 만으로만 여겼다.

산타마리아와 베라과 전역에 대한 총독 직함과 함께 절대적인 권한을 받은 발보아는 총독으로서 첫 조치로 총독의 권한을 찬탈했다는 혐의로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를 재판에 회부했다.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는 투옥되어 재산을 몰수당했으나, 곧 히스파니올라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발보아의 대표 두 명도 함께 파견되어 식민 당국에 상황을 알리고 베라과 정복을 위한 추가 병력과 보급품을 요청했다.

발보아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개를 풀어놓는 모습 (1594); 뉴욕 공공 도서관의 판화. 플랑드르의 개신교 화가 테오도르 드 브리(Theodor de Bry)의 작품.


발보아는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다른 부족과는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강, 산, 질병이 창궐하는 늪지를 탐험하며 금과 노예를 찾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권위에 도전하는 부하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힘, 외교, 협상을 통해 원주민들 사이에서 존경과 공포를 얻었다. 그는 스페인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탐험 과정에서 화해의 힘으로 행동해야 했다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그는 옥수수 재배에 성공했고, 히스파니올라와 스페인으로부터 새로운 보급품을 받았으며, 부하들이 새로운 영토에서 탐험가로서의 삶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발보아는 많은 양의 금을 모았는데, 대부분은 원주민 여성들의 장신구에서 나온 것이었고 나머지는 폭력으로 획득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역사가 페터 마르티르 다앙기에라(Peter Martyr d'Anghiera)는 저서 『신세계의 10년(De orbe novo decades)』에서 발보아가 소돔 행위(동성애)를 이유로 40명의 원주민을 개를 풀어 죽였다고 묘사한다.[9] 작가 제니 비먼(Genny Beeman)은 원주민들이 출생 시에는 남자로 분류되었지만 여성의 성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성별 이분법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한다.[10]

1512년 말과 1513년 초, 발보아는 카레타(Careta) 카시케(cacique)가 지배하는 지역에 도착하여 그를 쉽게 정복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카레타는 세례를 받고 발보아의 주요 동맹자가 되었으며, 스페인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하여 정착민들의 생존을 보장했다. 발보아는 여정을 계속하여 카레타의 이웃이자 라이벌인 폰카(Ponca) 카시케의 땅에 도착했으나, 폰카는 백성과 함께 산으로 도망쳤고 그의 마을은 스페인 사람들과 카레타의 부하들에게 약탈당했다. 며칠 후, 탐험대는 비옥하지만 위험한 것으로 알려진 코모그레(Comogre) 카시케의 땅에 도착했고, 발보아는 평화롭게 맞이받았으며 그의 명예를 위한 축제에 초대받기도 했다. 코모그레는 카레타처럼 세례를 받았다.

1513년 발보아의 태평양(남해)으로 가는 여정


1513년, 발보아는 스페인 국왕에게 긴 편지를 써서 이미 적응한 히스파니올라 출신의 병력, 무기, 보급품, 조선에 정통한 목수, 그리고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요청했다. 1515년의 후속 편지에서 그는 "양떼 같았던 인디언들이 사자처럼 되었다"고 말했다.[11] 그는 원주민에 대한 인도적인 정책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식인종과 폭력적인 부족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극도의 엄격함을 권고했다.

발보아가 처음으로 "저쪽 바다"에 대해 들은 것은 코모그레의 땅에서였다.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할당된 적은 양의 금에 불만을 품은 다툼이 벌어졌고, 스페인 사람들의 탐욕에 분노한 코모그레의 장남 판키아코(Panquiaco)는 금을 재는 저울을 넘어뜨리며 "당신들이 다른 사람들의 땅에 분쟁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의 땅을 떠날 정도로 금에 굶주렸다면, 내가 당신들의 그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지방을 보여주겠소."라고 외쳤다. 판키아코는 남쪽에 있는 왕국에 대해 말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매우 부유해서 금으로 만든 접시와 잔으로 먹고 마셨지만, 정복자들은 내륙과 "저쪽 바다" 해안에 사는 부족들을 정복하기 위해 최소한 천 명의 병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12]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의 태평양 발견, 파나마 – 1513년 9월 25일, 마티아스 로렌츠 그래프(2009/10) 작


발보아는 금이 풍부한 새로운 왕국이라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고 큰 관심을 보였다. 1513년 초 산타마리아로 돌아와 이스파니올라섬에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려 했으나,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가 산타마리아에서 일어난 일을 식민 당국에 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파니올라섬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발보아는 엔리케 데 콜메나레스를 스페인으로 직접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남해(당시 태평양의 명칭) 탐험이 산타마리아에서 조직되는 동안, 일부 탐험가들은 내륙을 향해 아트라토 강을 따라 10리그(약 50km)를 이동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발보아의 인원과 보급품 요청은 거부되었다. 엔시소의 사건은 당시 스페인 궁정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발보아는 산타마리아에 있던 적은 자원으로 탐험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발보아는 여러 친근한 카시케들의 정보를 이용하여 1513년 9월 1일 190명의 스페인인, 몇 명의 원주민 안내자, 그리고 개 떼를 이끌고 파나마 지협을 가로질러 여정을 시작했다. 작은 브리간틴과 10척의 원주민 카누를 이용하여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카레타 카시케의 영토에 상륙했다. 9월 6일, 탐험대는 카레타의 1,000명의 병력으로 증강되어 폰카 카시케의 땅으로 진입했다. 폰카는 재정비하여 공격했지만 패배하여 발보아와 동맹을 맺었다. 며칠 후, 폰카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탐험대는 9월 20일 밀림에 들어갔고, 약간의 어려움 끝에 나흘 후 쿠아레쿠아 마을을 다스리는 토레차 카시케의 땅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발보아의 병력은 토레차를 물리쳤으며, 토레차는 발보아의 개 중 하나에게 죽임을 당했다.[14] 토레차의 추종자들은 탐험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룹은 그때쯤 지쳐 있었고 여러 명이 심하게 부상을 입어 많은 사람들이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쿠아레쿠아에 남기로 결정했다.

발보아와 함께 여정을 계속한 소수의 사람들은 다음 날 추쿠나케 강을 따라 산맥에 들어갔다. 원주민들의 정보에 따르면, 이 산맥의 정상에서 남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발보아는 앞서 나가 그날 정오 전인 9월 25일 정상에 도착하여 수평선 저편에 미지의 바다의 물을 보았다. 감격은 너무나 컸기에 다른 사람들도 발보아의 발견에 대한 기쁨을 보이기 위해 열렬히 참여했다. 탐험대의 사제인 안드레스 데 베라는 ''테 데움''을 읊조렸고, 사람들은 돌 피라미드를 세우고 칼로 나무 껍질에 십자가를 새겨 남해 발견 장소를 표시했다.

3. 2. 2. 영유권 선포

발보아가 남해(태평양)의 영유권을 선포하는 모습 (19세기 미상 화가의 판화)


발보아는 1513년 9월 1일, 스페인 병사 190명, 원주민 안내인, 개들을 이끌고 파나마 지협을 건너는 여정을 시작했다. 카레타 추장의 영토에 상륙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폰카 추장을 격파한 후 동맹을 맺었다. 9월 20일, 밀림에 진입하여 4일 후 쿠아레쿠아 추장 토레차를 물리치고 탐험에 합류시켰다. 지치고 부상당한 일부는 남고, 나머지는 추쿠나케 강을 따라 산맥으로 향했다.[14]

원주민들의 정보에 따르면, 산 정상에서 남쪽 바다(태평양)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발보아는 9월 25일 정오 전에 정상에 올라 수평선 너머의 바다를 발견했다. 탐험대 사제 안드레스 데 베라는 ''테 데움''을 읊었고, 돌 피라미드를 세우고 나무에 십자가를 새겨 발견 장소를 표시했다.[14]

발견 후, 탐험대는 바다로 내려가 치아페스 추장을 격파하고 탐험에 합류시켰다. 알론소 마르틴 일행은 카누를 타고 신대륙 연안에서 태평양을 항해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발보아는 26명의 부하와 함께 해안에 도착하여 칼과 깃발을 들고 바닷물에 들어가 새로운 바다와 인접한 모든 땅을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점령했다.[3]

발보아는 110km 이상을 여행한 후, 그들이 도착한 만을 산 미구엘이라 명명하고, 새로운 바다를 마르 델 수르(Mar del Sur)(남해)라고 명명했다.[13]

4. 몰락과 죽음

페드로 아리아스(페드라리아스)와의 갈등, 그리고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체포되어 결국 누명을 쓰고 1519년에 교수형을 당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한 후, 그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신임 총독 페드라리아스는 그를 경계했다. 발보아와 페드라리아스는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 점차 대립을 심화시켜 갔다.

발보아는 남해 탐험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페드라리아스는 이를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다. 결국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에게 1년 반 동안 탐험할 허가를 주었다. 1519년, 발보아는 아클라로 이동하여 배를 건조하고 태평양을 탐험했다. 귀환 후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를 만나자고 했고, 발보아는 즉시 따랐다. 그러나 도중에 피사로가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페드라리아스의 권력을 찬탈하고 남해에 별도의 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발보아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재판을 받기 위해 스페인으로 압송될 것을 요구했다. 페드라리아스는 마르틴 엔시소와 함께 재판을 지체 없이 진행하도록 명령했다.[19]

발보아의 재판은 1519년 1월에 시작되었고, 그 달 15일에 가스파르 데 에스피노사는 그에게 참수형을 선고했다. 공범으로 기소된 발보아의 네 친구, 페르난도 데 아르궤요, 루이스 보텔로, 에르난 무뇨스, 안드레스 발데라바노도 같은 운명을 선고받았다. 그 판결은 아클라에서 집행되어 음모가 그 식민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발보아와 그의 친구들이 단두대 앞으로 끌려가자, 마을 종치기는 "이것은 왕과 그의 부관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가 왕관의 영토를 배반하고 찬탈한 이 남자들에게 내리는 정의입니다."라고 외쳤다. 발보아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거짓말입니다! 그러한 범죄는 결코 제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항상 왕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했으며, 그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페드라리아스는 단상 뒤에 숨어 처형을 지켜보았다. 처형자는 도끼로 발보아와 그의 네 친구의 목을 베었다. 발보아의 머리는 첫 번째 시도에서는 깨끗하게 잘리지 않았고 세 번이나 시도했다. 페드라리아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는 며칠 동안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발보아의 유해의 최종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20]

4. 1.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와의 갈등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페드라리아스 다빌라)는 발보아의 인기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발보아에게 협력한 원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학살을 자행했으며, 발보아는 이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25]

발보아가 축출했던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의 고발과 알론소 데 오헤다 총독의 실종으로 인해, 스페인 국왕은 카스티야 데 오로 주의 총독으로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를 임명했다. 페드라리아스 다빌라는 이후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15] 그는 1,500명의 병력과 17척의 배를 이끌고 온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었는데, 이는 발보아가 왕실에 요청했던 추가 병력과 보급품 요청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 원정에는 발보아가 망명시켰던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도 '알구아실 마요르'(Chief Constable)로 동행했다.[15]

발보아는 1514년 7월 페드라리아스와 그의 대표들을 맞이하여 총독 및 시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착민들은 이러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일부는 발보아가 새로운 식민 당국에 존중을 표하는 와중에도 페드라리아스에 맞서 무기를 들 계획을 세웠다.

페드라리아스가 직무를 맡자마자 가스파르 데 에스피노사는 발보아를 체포하여 '궐석재판'을 열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와 다른 사람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판결했다. 그러나 그는 디에고 데 니쿠에사 살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아 얼마 후 석방되었다.

산타 마리아의 인구 과잉으로 인해 페드라리아스는 새로운 정착지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여러 탐험대를 파견했다. 발보아는 페드라리아스에게 아트라토 강을 따라 다바이베 지역을 탐험할 수 있도록 요청했는데, 거기에 막대한 부를 가진 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 탐험은 실패로 끝났고, 발보아는 지역 원주민들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발보아는 남해를 탐험하려는 야망을 꺾지 않았다. 그는 비밀리에 쿠바에서 병력을 모았으나, 페드라리아스는 곧 배에 대한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발보아를 체포하고 그의 모든 부하들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후안 데 케베도 주교가 페드라리아스에게 발보아에게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고 호소하여 이를 막았다.

스페인 국왕은 발보아에게 "아델란타도[16] 남해"와 "파나마코이바 주지사" 칭호를 수여했다. 국왕은 페드라리아스에게 발보아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고 카스티야 데 오로의 정복과 통치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해 발보아와 상의하도록 지시했다. 이 때문에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를 석방하고 모든 혐의를 취소했다.

호방한 발보아와 의심이 많은 다빌라는 성격이 맞지 않아 점차 대립을 심화시켜 갔다.[25]

4. 2. 반역 혐의와 처형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한 후, 그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신임 총독 페드로 아리아스는 그를 경계했다. 1519년, 발보아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체포되어 누명을 쓰고 교수형당했다.[19]

발보아가 축출했던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의 고발 등으로 인해, 국왕은 카스티야 데 오로 주의 총독으로 페드로 아리아스 데 아빌라(페드라리아스 다빌라)를 임명했다. 페드라리아스는 1,500명의 병력과 17척의 배를 이끌고 온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와 발보아가 요청했던 추가 병력과 보급품을 충족시켰다.

발보아는 1514년 7월 페드라리아스를 맞이하여 총독 및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페드라리아스가 직무를 맡자마자 가스파르 데 에스피노사는 발보아를 체포하여 재판을 열었지만, 니쿠에사 살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산타 마리아의 인구 과잉으로 인해 페드라리아스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기 위해 탐험대를 파견했다. 발보아는 아트라토 강을 따라 다바이베 지역을 탐험했으나 실패하고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발보아는 남해 탐험의 야망을 꺾지 않고 비밀리에 쿠바에서 병력을 모았으나, 페드라리아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케베도 주교의 호소로 풀려났다.

이후 국왕은 발보아에게 "아델란타도 남해"와 "파나마코이바 주지사" 칭호를 수여하고,[16] 페드라리아스에게 발보아와 상의하도록 지시했다.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를 석방하고 모든 혐의를 취소했다.

발보아와 페드라리아스의 경쟁은 주교 데 케베도와 이사벨 데 보바디야의 중재로 종식되었고, 페드라리아스의 딸 마리아 데 페냐로사와 발보아의 결혼이 주선되었다.[17] 발보아는 남해 탐험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페드라리아스는 지연시키려 했다. 결국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에게 1년 반 동안 탐험할 허가를 주었다.

1519년, 발보아는 아클라로 이동하여 배를 건조하고 태평양을 탐험했다. 귀환 후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를 만나자고 했고, 발보아는 즉시 따랐다. 그러나 도중에 피사로가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페드라리아스의 권력을 찬탈하고 남해에 별도의 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발보아는 혐의를 부인하고 스페인으로 압송될 것을 요구했지만, 페드라리아스는 재판을 진행시켰다.[19]

재판은 1519년 1월에 시작되었고, 에스피노사는 발보아에게 참수형을 선고했다. 발보아의 네 친구도 같은 운명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아클라에서 집행되었고, 발보아와 그의 친구들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발보아의 머리는 첫 시도에 잘리지 않아 세 번이나 시도해야 했다. 페드라리아스는 처형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머리는 며칠 동안 공개 전시되었다. 발보아 유해의 최종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20]


5. 유산

발보아 1센트, 1914년 발행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1913년 파나마-태평양 만국 박람회의 1센트 화폐에 등장했다. 1센트 발보아는 1센트 우편 요금을 지불했으며,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해외로 보낼 때 다른 액면과 함께 사용되었다. 미국 조폐국은 이것을 3억 3천만 개 이상 대중에게 발행했다.[22]

파나마 시티에 있는 SENAN의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해군 기지와 2020년 이베르드롤라가 스페인 서부 바다호스의 우사그레에 건설한 누녜스 데 발보아 태양광 발전소(당시 유럽 최대 태양광 발전소, 500MW 용량)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3]

5. 1. 역사적 평가

발보아는 비록 요절했고 원주민 학살에 개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억된다.[21] 파나마에는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라는 이름을 딴 공원과 거리가 여러 곳 있으며, 그의 남해 발견을 기리는 기념물도 많다. 파나마의 통화는 발보아이며, 그의 초상은 대부분의 파나마 동전 앞면에 새겨져 있다. 그의 이름은 파나마 시티의 주요 항구인 발보아(파나마 운하의 태평양 입구), 그가 발견한 진주 제도가 속한 파나마 주의 발보아 지구, 파나마 맥주에도 붙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이름을 딴 거리 중 하나로 발보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발보아 공원 지역과 발보아 고등학교(엑설시어 구역)도 있다. 1910년 발보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발보아 공원이라는 대규모 공원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시내 인근에 있다.[21] 발보아의 이름은 마드리드의 한 거리와 지하철역에도 남아 있다.

파나마 정부가 국내외 저명하고 뛰어난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 중 하나는 1933년 1월 28일 제정된 법률 27호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훈장''이다.

달 분화구 발보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발보아는 작곡가이자 가수인 랜디 뉴먼의 "유럽의 위대한 국가들"이라는 노래 가사에 등장한다.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1913년 파나마-태평양 만국 박람회의 1센트 화폐에 등장했다. 1센트 발보아는 1센트 우편 요금을 지불했으며,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해외로 보낼 때 다른 액면과 함께 사용되었다. 미국 조폐국은 이것을 3억 3천만 개 이상 대중에게 발행했다.[22]

파나마 시티에 있는 SENAN의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해군 기지는 발보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20년 이베르드롤라는 스페인 서부 바다호스의 우사그레에 누녜스 데 발보아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했다. 500MW의 용량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태양광 발전소였다.[23]

5. 2. 기념

역사는 비록 발보아가 요절했고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개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발보아를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억한다. 파나마의 통화는 발보아이며, 그의 초상은 대부분의 파나마 동전 앞면에 새겨져 있다. 그의 이름은 파나마 맥주에도 붙어 있다.[21]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이름을 딴 거리들 중 하나로 발보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발보아 공원 지역과 발보아 고등학교(엑설시어 구역)도 있다. 또한 1910년 발보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발보아 공원이라는 대규모 공원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시내 인근에 있다.[21] 발보아의 이름은 마드리드의 한 거리와 지하철역에도 남아 있다.

달 분화구 발보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발보아는 작곡가이자 가수인 랜디 뉴먼의 "유럽의 위대한 국가들"이라는 노래 가사에 등장한다.

2020년 이베르드롤라는 스페인 서부 바다호스의 우사그레에 누녜스 데 발보아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했다. 500MW의 용량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태양광 발전소였다.[23]

5. 2. 1. 파나마 발보아

역사는 비록 발보아가 요절했고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개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발보아를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기억한다. 파나마 전역에는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라는 이름을 딴 공원과 거리가 여러 곳 있으며, 그의 남해 발견을 기리는 기념물도 여러 개 있다. 파나마의 통화는 발보아이며, 그의 초상은 대부분의 파나마 동전 앞면에 새겨져 있다. 그의 이름은 파나마 시티의 주요 항구인 발보아(파나마 운하의 태평양 입구)와 그가 발견한 진주 제도가 속한 파나마 주의 발보아 지구, 그리고 파나마 맥주에도 붙어 있다.[21]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는 1913년 파나마-태평양 만국 박람회의 1센트 화폐에 등장했다. 1센트 발보아는 1센트 우편 요금을 지불했으며, 무게가 많이 나가거나 해외로 보낼 때 다른 액면과 함께 사용되었다. 미국 조폐국은 이것을 3억 3천만 개 이상 대중에게 발행했다.[22]

파나마 시티에 있는 SENAN의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해군 기지는 발보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2. 2. 발보아 (파나마)

파나마 시티의 주요 항구 이름은 발보아이며, 파나마 운하의 태평양 입구에 있다. 또한 발보아가 발견한 진주 제도가 속한 파나마 주의 한 지역 이름 역시 발보아이다.[21]

5. 2. 3.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훈장

파나마 정부가 국내외 저명하고 뛰어난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 중 하나는 1933년 1월 28일 제정된 법률 27호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훈장''이다.[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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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l Tratado de Tordesillas ¿Una 'revolución espacial'? Cosmografía, prácticas jurídicas y la historia del derecho internacional público https://dialnet.unir[...] 202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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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웹사이트 1-cent Balboa 2014-04-18
[23] 뉴스 Iberdrola conecta la mayor planta fotovoltaica de Europa: Núñez de Balboa (500 MW) ha vertido sus primeros MWh a la red https://elperiodicod[...] 2020-04-06
[24] 문서
[25] 서적 世界探検史 白水社
[26] 서적 삐딱하고 재미있는 세계 탐험이야기 푸른숲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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