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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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 출신의 화가로, 한국적인 서민의 삶을 소박하게 담아낸 독창적인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화단에 등장했으며,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평양에서 활동하며 주호회 회원으로 참여했고, 한국 전쟁 중 서울로 이주하여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했으며, 국내외 미술전에 참여하고, 해외 전시를 통해 작품을 알렸다. 1963년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1965년 간경변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작품은 현재 국내외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향 양구에는 박수근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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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글) | 박수근 |
이름 (한자) | 朴壽根 |
로마자 표기 | Bak Su-geun |
다른 이름 | 호(號)는 미석(美石) |
![]() | |
출생일 | 1914년 2월 21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
사망일 | 1965년 5월 6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화가 |
종교 | 개신교(감리교) |
학력 | |
학교 | 강원도 양구보통학교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前 서라벌예술학교 전임교수 前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
작품 활동 | |
스타일 | 값찾기 |
대표작 | 값찾기 |
수상 및 훈장 | |
수상 | 값찾기 |
훈장 | 1980년 은관문화훈장 추서 |
영향 관계 | |
영향 받음 | 값찾기 |
영향 줌 | 값찾기 |
기타 | |
관련 웹사이트 |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
2. 생애
박수근은 회백색을 주로 사용하여 단조로우면서도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으며, 한국인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 조선일보사 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1959년 제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었다.
사후 1965년 10월, 중앙공보관에서 박수근 추모 개인전이 열렸다.[46] 그의 작품은 미시간 대학교 미술관[47][48]과 USC 퍼시픽 아시아 박물관을 포함하여 전 세계 여러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49] 2002년에는 박수근의 고향인 양구군에 박수근미술관이 건립되었다.[50]
2. 1. 초기 생애와 경력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 양구읍) 정림리에서 태어나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인제군에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으며,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등장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53]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채색 판화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라는 작품으로 입선하였다. 1935년 춘천시로 이주하여 오득영과 미요시 이와키치의 도움을 받았으며, 1936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8번 입상하였다. 1939년에는 그의 많은 여인 그림의 모델이 될 김복순(1922–1979)과 결혼했다.
2. 2. 평양 시기 (1940-1950)
박수근은 미요시의 도움을 받아 1940년 평안남도 도청 서기로 일하기 위해 평양으로 이주했다.[11] 평양에서 근무하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으며,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미술 단체 주호회(주호회|珠壺會한국어) 회원으로 활동하며 그룹전에 참여했다.[12] 평양 체류 기간 동안 "맷돌질하는 여인"(1940), "망질하는 여인"(1941), "모자"(母子, 1942), "실을 뽑는 여인"(1943) 등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13][14] 박수근의 아내는 일상적인 가사일을 하는 평범한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들의 모델이 되었다.1940년대에 박수근은 고대 한국의 석조 탑과 석불에서 영감을 얻어 독특한 돌과 같은 회화 표면 기법을 개발했다.[15][16]
박수근은 평양 체류 및 주호회와의 관계를 통해 판화 실험도 했다.[17]
2. 3. 서울 시기 (1950-1965)
한국 전쟁 중 박수근은 1950년 평양에서 서울로 혼자 이주했으며, 1952년 가족과 합류했다.[18] 대한민국으로 망명할 때, 춘천과 평양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과 한국 전쟁 중 피난하며 제작한 작품 다수가 북한에 그림을 남겨둔 채 분실되거나 파괴되었다.[19] 그러나 익숙하고 현실적인 농촌 생활을 묘사하는 데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인 형태와 단순한 선을 사용하는 그의 예술적 스타일은 이미 이때 확립되었으며, 박수근은 전쟁 이후 많은 이전 작품을 다시 다루고 더욱 발전시켰다.[20]서울에서의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지만, 박수근은 서울에 주둔한 미군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21][22] 1953년, 박수근은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집"으로 1등상을 수상한 후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23]
박수근은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회원이 되어 1960년까지 협회 연례전에 참여했다.[24] 1958년 한국판화협회의 창립 멤버였으며, 협회 첫 번째 연례 그룹전에 목판화 작품 "노인과 여인"을 출품했다.[25] 그는 또한 1960년 김환기, 최영림, 유강렬, 정규와 함께 현대판화동인의 창립 멤버로 그룹 전시에 참여했다.[26] 195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가 되었고, 1962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27]
박수근은 1957년 홍콩,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1958년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 등 해외 그룹 전시에 유화를 출품했다.[28] 그는 미국 저널리스트 마가렛 G. 밀러의 도움을 받아 해외 전시 참여 및 작품 판매를 도왔으며, 그녀에게 그림 판매, 재정 상황, 그의 일상에 관한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29]
해외에서 그의 그림이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의 그림은 주요 한국 전시회에서 종종 거절당하여 작가를 실망시켰다. 그는 1957년 전시회에서 "세 여인"이 입상을 하지 못한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1959년 국전 심사위원회에 의해 추천 작가로 임명되어 이후 "봄", "휴녀", "노인과 유동" 등의 작품을 출품했다.[30]
2. 4. 사망
그는 평생 동안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고, 말년에는 비교적 꾸준한 판매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화실을 소유하지 못했고, 그림을 통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36] 1963년, 백내장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1965년 51세의 나이로 간경변으로 사망했다.[27] 그는 생애 대부분을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살았지만, 1980년 사후에 문화훈장 은관장을 수여받았다.[27]3. 예술적 특징
한국 전쟁 중 평양에서 서울로 온 박수근은 익숙한 농촌 생활을 기하학적이고 평면적인 형태와 단순한 선으로 묘사하는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했다.[20] 전쟁 이후에도 이 화풍을 유지하며 이전 작품을 발전시켰다.[20]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집"으로 1등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3]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했고,[24]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 멤버로 목판화 "노인과 여인"을 출품했다.[25] 1960년에는 김환기 등과 함께 현대판화동인 창립 멤버로도 활동했다.[26] 1959년에는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1962년에는 심사위원을 역임했다.[27]
1957년 홍콩,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58년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 등 해외 전시에 유화를 출품하기도 했다.[28] 미국 저널리스트 마가렛 G. 밀러의 도움으로 해외 전시 및 작품 판매를 진행했다.[29]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국내 주요 전시회에서는 종종 거절당했다.[30] 1957년 "세 여인"이 입상하지 못한 후 국전에 출품을 거부했지만, 1959년 추천 작가로 임명되어 "봄", "휴녀", "노인과 유동" 등을 출품했다.[30]
박수근은 평범하고 검소한 사람들의 일상, 특히 한국 농촌의 진솔한 가족 생활을 그리고자 했다.[31] 여성과 나무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으며, "절구질하는 여인"(1952), "빨래터"(1954), "귀가"(1962), "고목과 여인"(1964) 등이 대표적이다.[33] 그의 그림 속 나무는 앙상하고 뒤틀린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함과 동시에 고난을 이겨내는 굳건함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33][32] 농촌 여성들은 주로 그의 아내를 모델로 했으며,[34] 뚜렷한 이목구비 없이 겸손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국가적 어려움 속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35]
화강암과 같은 독특한 질감과 옅은 회색, 갈색 톤을 사용하여 단순한 한국 풍경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했다. 마티에르 기법한국어을 사용하여[36] 입체주의 화풍과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37][38] 유화를 걸러내 붓과 칼로 다루어 거친 질감을 표현하고,[39][40][41] 두껍고 대담한 선으로 단순한 형태를 묘사했다.[42] 1950년대 후반부터는 평면적이고 대조적인 모양과 형태를 병치하여 공간 구성을 실험했다.[31] 후기 작품은 현실적인 배경과 원근법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43]
판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44]
박수근의 그림은 평범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독창적인 예술성과 한국 근대 미술사에 대한 기여는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당시 서양 화풍을 모방하던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한국적인 소재와 기법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45]
4. 논란
박수근의 그림은 대한민국 미술품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되며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지만, 〈빨래터〉를 둘러싸고 위작 논란이 일기도 했다.[57]
4. 1. 경매와 위작 논란
박수근의 그림 〈노상〉은 2006년 12월 14일 케이 옥션 경매에서 10.4억원에 낙찰되어 당시 대한민국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55] 2007년 3월,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원에 낙찰되며 이 기록을 경신했고,[56] 같은 해 5월에는 〈빨래터〉가 45.2억원에 낙찰되어 다시 한번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57]그러나 〈빨래터〉의 구체적인 감정 결과가 공개되지 않아, 2007년 12월 미술 잡지 〈아트레이드〉는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옥션은 이에 30억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2009년 1심 재판부는 "위작은 아니지만 정당한 언론활동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며 기각했다.[58]
5. 사후
한국 전쟁 이후, 박수근은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집"으로 1등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23]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했고,[24]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 멤버로 참여했으며,[25] 1960년에는 김환기 등과 함께 현대판화동인 창립 멤버로도 활동했다.[26] 195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가 되었고, 1962년에는 심사위원을 맡았다.[27]
박수근은 1957년 홍콩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58년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 등 해외 전시에도 참여했다.[28] 미국 저널리스트 마가렛 G. 밀러의 도움으로 해외 전시 참여와 작품 판매를 진행했다.[29] 그러나 국내 주요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이 종종 거절당하기도 했다. 1957년 "세 여인"이 입상하지 못한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했지만, 1959년 추천 작가로 임명되어 다시 참여했다.[30]
그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생전에 자신만의 화실을 갖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36] 1963년 백내장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1965년 간경변으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27] 사후인 1980년에 문화훈장 은관장을 수여받았다.[27]
1965년 10월, 중앙공보관에서 박수근 추모 개인전이 열렸다.[46] 그의 작품은 미시간 대학교 미술관[47][48]과 USC 퍼시픽 아시아 박물관 등 전 세계 여러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49] 2002년에는 그의 고향인 양구에 박수근 미술관이 건립되었다.[50]
6. 서훈
박수근은 평생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살았지만, 1980년 사후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27]
7.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박향지 |
어머니 | 윤복주 |
배우자 | 김복순 (1922년 ~ 1979년) |
딸 | 박인숙 (1946년 ~ ) |
아들 | 박성남 (1947년 ~ )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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