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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앙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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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루아앙주가는 1350년대 프랑스 왕 장 2세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된 가문으로, 앙주 카페가의 후손인 마르그리트 당주를 통해 나폴리 왕국과의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아라곤 왕국과의 분쟁 속에서 나폴리 왕위를 두고 경쟁했으며, 프로방스를 확보하기도 했다. 1435년 두라초 앙주가의 단절로 나폴리를 일시적으로 확보했지만, 1442년 아라곤 왕국에 의해 축출되었다. 르네 당주의 사망으로 앙주가 프랑스 왕실에 귀속되었으며, 르네의 딸 욜랑드의 후손인 로렌 가문이 나폴리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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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앙주가
개요
국가신성 로마 제국
국가프랑스 왕국
국가나폴리 왕국
부모 가문발루아 가문 (남성 계통)
부모 가문앙주 카페 가문 (여성 계통)
작위나폴리 왕국의 왕
작위앙주 공작
작위로렌 공작
작위바 공작
작위프로방스 백작
존칭전하
존칭존엄
설립1356년 (668년 전)
설립자루이 1세, 앙주 공작
마지막 통치자샤를 4세, 앙주 공작
해체1481년
퇴위1442년 (아라곤의 나폴리 정복)
문장
앙주 공작 에르퀼의 문장
앙주 공작의 문장
거주지
주요 거주지앙제 성 (본거지)
기타 거주지보제 성
기타 거주지레지아 디 퀴지사나 (나폴리 소재)
프랑스어
명칭Maison de Valois-Anjou
이탈리아어
명칭Casa Valois-Angiò

2. 역사

발루아앙주가는 1350년대 프랑스장 2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친할머니인 마르그리트 당주는 앙주 카페가의 여공이었다. 그녀는 나폴리의 군주 카를로 2세 디 나폴리의 장녀였기에, 장 2세는 그의 차남인 루이에게 이후에 앙주 공국이 되는 백국을 주었다.

앙주 카페가의 주요 일족이었던 조반나 1세 디 나폴리 여왕은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라초 앙주가 같은 앙주 카페가의 주요 일족의 후계자들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루이를 그녀의 최종적 후계자로서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남부에 아라곤인들과 앙주 카페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앙주 카페가의 고위 일족과 하위 일족들은 나폴리 왕국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펼쳤다.

두라초 앙주가는 초기에는 나폴리의 통제권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해내지만, 발루아앙주가프로방스를 확보해내고 1389년에서 1399년까지 실질적인 나폴리 도시의 장악력을 지니면서, 나폴리 왕좌 경쟁을 계속해내었다.

1435년에 두라초 앙주가의 단절로 일시적으로 발루아앙주가는 나폴리를 확보해냈지만, 1442년에 알폰소 5세 다라곤에게 나폴리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발루아앙주가 계열의 마지막이자 세 번째 공작인 르네가 1480년에 사망하고, 앙주는 프랑스 왕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의 조카인 샤를 5세 당주 멘 공작도 1481년에 사망하면서 프로방스를 포함한 모든 앙주 가문의 영지는 왕실 소유지로 반환되었다.

앙주 가문의 나폴리에 대한 주장은 르네의 장녀인 욜랑드의 후손들인 로렌가에 의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으며, 특히 발루아앙주가의 방계 가문인 기즈가 출신인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이 나폴리 왕국을 상대로 프랑스 원정군을 이끈 1551년에서 1559년 사이 발생한 발루아 합스부르크 전쟁 동안이 그랬었다.

2. 1. 가문의 기원과 초기 확장 (1350년대-1380년대)

발루아앙주가는 1350년대 프랑스장 2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친할머니인 마르그리트 당주는 앙주 카페가의 여공이었다. 그녀는 나폴리의 군주 카를로 2세 디 나폴리의 장녀였기에, 장 2세는 그의 차남인 루이에게 이후에 앙주 공국이 되는 백국을 주었다. 1360년에 앙주 백작령은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앙주 카페가의 주요 일족이었던 조반나 1세 디 나폴리 여왕은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라초 앙주가 같은 앙주 카페가의 주요 일족의 후계자들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루이를 그녀의 최종적 후계자로서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남부에 아라곤인들과 앙주 카페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앙주 카페가의 고위 일족과 하위 일족들은 나폴리 왕국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펼쳤다. 두라초 앙주가는 초기에는 나폴리의 통제권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발루아앙주가프로방스를 확보해내고 1389년에서 1399년까지 실질적인 나폴리 도시의 장악력을 지니면서, 나폴리 왕좌 경쟁을 계속해내었다.

2. 2.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과 프로방스 확보 (1380년대-1442년)

조반나 1세 여왕은 후사가 없자 루이 1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로 인해 발루아앙주 가문은 나폴리 왕위를 두고 두라초 앙주가 및 아라곤 왕국과 경쟁하게 되었다. 이 분쟁 과정에서 루이 1세와 그의 아들 루이 2세아비뇽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교황우르바노 6세가 나폴리 왕위를 공인한 앙주-드라초 가문의 카를로 3세, 라디슬라오 부자와 대립하였다.

두라초 앙주가는 초기에는 나폴리의 통제권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발루아앙주가는 프로방스를 확보하고 1389년에서 1399년까지 실질적인 나폴리 도시의 장악력을 지니면서, 나폴리 왕좌 경쟁을 계속했다. 1435년 두라초 앙주 가문이 단절되면서 발루아앙주 가문은 일시적으로 나폴리 왕국을 확보했지만, 1442년 알폰소 5세에게 축출되었다.

2. 3. 프랑스와의 관계 및 로렌 가문과의 연결 (1422년-1480년)

발루아앙주 가문은 백년 전쟁 중 프랑스 왕 샤를 7세를 보호했으며, 1422년 루이 2세의 딸 마리가 샤를 7세와 결혼했다. 루이 11세는 샤를 7세와 마리의 아들이다.

르네는 조반나 2세의 양자가 되어 1435년 나폴리 왕위를 계승했으나,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아라곤 왕 알폰소 5세에게 1442년 패배하여 프랑스로 돌아왔다. 한편, 르네는 로렌 공작 가문의 상속녀 이자벨과 결혼하여, 1431년 로렌 공작위를 획득했다. 르네의 장녀 욜랑드의 후손에서는 신성 로마 황제프란츠 1세가 나왔다.

2. 4. 가문의 단절과 유산 (1480년-1559년)

1480년 르네가 사망하면서 앙주는 프랑스 왕실에 귀속되었다. 1481년 르네의 조카 샤를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발루아앙주가는 단절되었고, 프로방스를 포함한 모든 영지가 왕실 소유지로 반환되었다.

앙주 가문의 나폴리 왕위 주장은 르네의 장녀 욜랑드의 후손인 로렌 가문으로 이어졌다. 특히, 기즈 공작 가문의 일원인 기즈 공작 프랑수아는 1551년부터 1559년까지의 발루아-합스부르크 전쟁에서 나폴리에 대한 실패한 프랑스 원정을 이끌기도 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발루아앙주 가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나폴리를 침공했고,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3. 주요 칭호 및 영지

루이 1세는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겸 앙주 공작, 투렌 공작, 메인 백작, 프로방스 백작 겸 포르칼키에 백작, 에탕프 백작, 피에몬테 백작, 루시 백작이었다. 또한 나폴리 왕(이후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기간은 명목상)이자, 예루살렘 왕(명목상) 그리고 라틴 제국 황제(명목상)였다.

르네는 로렌 공작 겸 바르 공작이자, 아라곤 왕 겸 바르셀로나 백작 (명목상)이었다.

샤를 4세는 모르탱 백작 겸 기즈 백작이었다.

4. 가계도

프랑스 왕본 드 룩셈부르샤를 5세
프랑스 왕루이 1세
앙주 공장 1세
베리 공필리프 2세
부르고뉴 공샤를 6세
프랑스 왕루이 2세
앙주 공욜랑드 다라곤샤를샤를 7세
프랑스 왕마리루이 3세
앙주 공르네
나폴리 왕
로렌 공
앙주 공이자벨
로렌 여공샤를(4세)
메느 백욜랑드프랑수아 1세
브르타뉴 공루이 11세장 2세
로렌 공욜랑드
로렌 여공마르그리트헨리 6세
잉글랜드 왕샤를(5세,4세)
앙주 공샤를 8세
프랑스 왕니콜라 1세
로렌 공르네 2세
로렌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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