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카를루 1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카를루 1세는 1226년 프랑스 왕 루이 8세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266년 교황의 지원을 받아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지중해 제국 건설을 시도했으나,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시칠리아를 잃고 몰락했다. 카를루 1세는 법률과 학문을 장려하고 건축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1285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앙주 카페가 - 발루아앙주가
    발루아앙주가는 1350년대 프랑스 왕 장 2세가 시작한 가문으로, 나폴리 왕국과의 연관성을 맺고 아라곤 왕국과 경쟁하며 프로방스를 확보했으나, 두라초 앙주가의 단절과 르네 당주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실에 귀속되었다.
카를루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사진
머리에 왕관을 쓴 석상 머리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샤를 1세 당주 석상 머리 부분, 1277년경
기본 정보
칭호시칠리아 왕
통치 기간 (시칠리아 섬 및 본토)1266년–1282년
통치 기간 (본토, 나폴리 왕국)1282년–1285년
대관식1266년 1월 5일
이전 통치자만프레디
후임 통치자 (시칠리아 섬)페로 1세와 콘스탄차 2세
후임 통치자 (나폴리 왕국)카를로 2세
백작앙주 및 메이유
통치 기간1246년–1285년
후임카를로 2세
프로방스 백작프로방스 백작
통치 기간1246년–1285년
이전베아트리스
후임카를로 2세
알바니아 왕알바니아 왕
통치 기간1272년 2월 – 1285년
후임카를로 2세
아카이아 공작아카이아 공
통치 기간1278년–1285년
이전기욤
후임카를로 2세
배우자베아트리스 드 프로방스 (1246년 1월 31일 결혼, 1267년 9월 23일 사망)
마르게리타 디 보르고냐 (1268년 11월 18일 결혼)
자녀블랑슈 디 시칠리아
베아트리체 디 나폴리
카를로 2세 디 나폴리
필리포 디 시칠리아
엘리자베타 디 시칠리아
가문카페 왕조 (출생)
아버지루이 8세
어머니블랑슈 드 카스티야
출생일1226년/1227년 초
사망일1285년 1월 7일 (57–59세)
사망 장소포자, 나폴리 왕국
매장 장소나폴리 대성당

2. 생애

프랑스루이 8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카를루는 형 루이 9세로부터 앙주와 메인의 백작령을 받아 카페 왕조의 일원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와의 결혼을 통해 프로방스 백작이 되었으나, 중앙 집권적 통치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현지 귀족 및 도시들과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형을 따라 제7차 십자군에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혔다.

카를루의 야심은 이탈리아로 향했다. 교황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지배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노렸고, 결국 베네벤토 전투(1266년)와 탈리아코초 전투(1268년)에서 각각 만프레디와 콘라딘을 격파하며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남부 이탈리아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앙주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칠리아 왕이 된 카를루는 지중해를 아우르는 제국 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알바니아 왕, 아카이아 공작, 명목상 예루살렘 왕 칭호를 얻으며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최종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여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교황청,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동맹을 맺고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계획은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프랑스인들의 통치에 대한 시칠리아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고, 이 틈을 타 아라곤의 페드로 3세가 개입하여 시칠리아 섬을 장악했다. 카를루는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해 시칠리아 만종 전쟁을 벌였으나 나폴리 만 해전에서의 패배 등 연이은 실패를 겪었고, 결국 1285년 포자에서 병사하며 그의 지중해 제국 구상은 미완으로 남았다. 그의 사후 왕국은 시칠리아를 제외한 나폴리 왕국으로 축소되어 아들 카를로 2세에게 계승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초기 활동

카를로는 1226년 말 또는 1227년 초에 프랑스루이 8세 국왕과 카스티야의 블랑슈 왕비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를로가 태어나기 직전인 1226년 11월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카를로는 카페 왕조에서 샤를마뉴의 이름을 딴 최초의 인물이었다.

말을 탄 기사가 검을 치켜들고 있다
샤를은 그의 작품 와 함께 에 묘사되어 있다.


루이 8세는 유언으로 막내 아들들이 교회에서 경력을 쌓도록 지시했다. 카를로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주요 가톨릭 교리를 이해하고 라틴어 텍스트의 오류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는 시, 의학, 법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블랑카는 국정 운영에 바빠 어린 자녀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며, 카를로는 형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와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의 궁정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242년, 형제들과 함께 군사 작전에 참여하면서 그는 더 이상 성직자의 길을 걷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원래 막내 아들이었던 카를로는 아버지로부터 아파나주를 받지 못했으나, 위의 형들인 필리페 다고베르트와 장 트리스탕이 일찍 사망하면서 봉토를 받을 자격이 생겼다. 1246년 5월, 형 루이 9세는 카를로를 기사로 서임하고, 8월에는 앙주와 메인 백작령을 아파나주로 수여했다. 카를로는 야심이 많아 항상 더 큰 성공을 추구했다.

1246년 1월 31일, 카를로는 프로방스 백작 레이몽 베렝게르 5세의 막내딸이자 상속녀인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하여 프로방스 백작이 되었다. 레이몽 베렝게르 5세는 1245년 8월 사망하며 프로방스와 포르칼키에를 막내딸 베아트리스에게 유증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스의 언니들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루이 9세의 부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부인)는 자신들이 부당하게 상속에서 제외되었다고 여겼고, 어머니 사보이의 베아트리체는 프로방스의 사용권을 주장하며 카를로와 갈등을 빚었다.

프로방스는 법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나 카를로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그는 프로방스에서 백작의 권리와 수입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고 프랑스식 중앙 집권적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그 지역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리던 봉신들과 마르세유, 아를, 아비뇽과 같은 도시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카를로의 장모 사보이의 베아트리체 역시 불만을 품고 반란 세력을 지원했다.

1248년, 카를로는 형 루이 9세가 주도한 제7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이집트로 향했다. 그는 다미에타 공격 등에 참여하며 군사적으로 기여했으나, 형과 같은 깊은 신앙심은 없었으며 1250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사이 프로방스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로는 귀환 후 이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1262년까지 이어지는 저항을 제압하고 프로방스에서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2. 2. 시칠리아 정복

끊임없이 야심을 가진 카를로는 교황청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노렸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하던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반목하던 교황청은 시칠리아에 우호적인 세력을 세우고자 했고, 카를로가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1252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콘라트 4세 대신 카를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으나, 형 루이 9세가 유럽의 평화를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1258년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인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자, 교황청은 다시 카를로에게 적극적으로 왕위를 제안했다. 교황 우르바노 4세교황 클레멘스 4세 등 프랑스 출신 교황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카를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자로서 왕위를 차지한 만프레디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루이 9세 역시 이번에는 카를로의 시칠리아 진출을 승인했다.

1263년 루이 9세는 카를로의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265년 카를로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이름으로 시칠리아 원정군을 조직했고, 교황은 이를 십자군 성전으로 선포하며 지원했다. 카를로는 교황의 봉신으로서 매년 금 8,000온스의 공물을 바치고 황제 칭호를 추구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며, 이탈리아 은행가들로부터 군자금을 빌렸다. 1266년 1월 5일, 로마에서 다섯 명의 추기경에 의해 시칠리아 왕 카를로 1세로 즉위했다.

네 명의 주교와 다섯 명의 젊은이가 왕좌에 앉아 있는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카를루가 로마에서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다(1266), 다음 세기의 삽화


백합이나 독수리를 묘사한 방패를 든 기사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베네벤토 전투: 카를루가 그의 적수, 만프레디를 격파하다(1266).


카를로는 즉위 직후인 1월 20일 로마를 떠나 남부 이탈리아 침공을 개시했다. 프랑스와 프로방스에서 온 군대(기병 6,000명, 기마 궁수 600명, 보병 20,000명으로 보고됨)[2]를 이끌고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베네벤토로 향했다. 1266년 2월 26일 베네벤토 전투에서 카를로의 군대는 만프레디가 이끄는 시칠리아군을 격파했고, 만프레디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2] 베네벤토 전투 이후 왕국 전역의 저항은 급속히 무너졌고, 많은 도시들이 카를로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항복했다. 루체라의 사라센들도 카를로에게 복종했으며, 시칠리아 섬 역시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만프레디의 미망인 에피루스의 헬레나와 자녀들은 포로로 잡혔다.

1268년, 만프레디의 조카이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 상속자인 콘라딘알프스산맥을 넘어 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공했다. 그러나 카를로는 같은 해 8월 23일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콘라딘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콘라딘은 나폴리에서 공개 처형되었고, 이로써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콘라딘의 처형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은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기벨린파(황제파)에서 프랑스계 앙주 가문과 구엘프파(교황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2. 3. 지중해 제국 건설 시도

시칠리아 왕위에 오른 카를루 1세는 곧 동쪽으로 눈을 돌려 지중해를 아우르는 제국 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기 전인 1265년에 이미 교황 클레멘스 4세, 아카이아의 기욤 2세 공작, 몰락한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 2세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 카를루는 라틴 제국의 부활을 돕는 대가로 장차 수복될 영토의 3분의 1을 약속받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야심을 드러냈다.

시칠리아 왕이 된 후(1266년), 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케르키라섬(코르푸)과 에피루스 해안 일부를 점령하여 비잔티움 제국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복의 권리로 만프레드의 미망인 에피루스의 헬레나의 지참금이었던 코르푸 섬과 두라초(현 알바니아 두러스)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의 군대는 그해 말 이전에 코르푸를 점령했다. 1272년에는 지진으로 성벽이 파괴된 두라초를 현지 알바니아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점령하고, 그들과 협정을 맺어 보호를 약속하는 대가로 알바니아 왕 칭호를 얻었다.

카를루는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도 병행했다. 헝가리 왕국벨러 4세,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1세, 불가리아 제2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셀주크 술탄, 아르메니아, 심지어 몽골과도 접촉했다. 1269년 8월에는 제노바와 통상 조약을 맺어 비잔티움의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후 제노바와는 이해관계 충돌로 갈등을 겪게 된다.

카를루는 십자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270년, 그는 형인 루이 9세가 주도한 제8차 십자군에 합류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카를루는 시칠리아의 옛 종주권을 주장하며 튀니지를 공격하도록 루이 9세를 부추겼다고도 전해진다. 원정 도중 루이 9세가 병으로 사망하자 카를루가 십자군의 지휘를 맡아 튀니스의 아미르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전쟁 비용 보상과 연간 조공을 약속받았고, 튀니스에서 얻은 금과 롱고부코 광산의 은으로 시칠리아 왕국에서 '칼리니'라는 새 동전을 주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칠리아로 귀환하던 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함대의 상당수(대형 선박 18척 포함)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1271년에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제9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아크레로 진격해 맘루크 왕조와 싸웠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A map presenting Charles's realms: Anjou and Maine in the middle of present-day France; Provence in southeastern France; the Regno in southern Italy; Albania in present-day Albania and northeastern Greece; Achaea in southern Greece.
1270년대 초 카를루의 제국


카를루는 비테르보 조약(1267년)을 통해 아카이아 공국의 계승권도 확보했다. 남자 후계자가 없던 아카이아 공작 기욤 2세 드 빌아르두앵은 카를루의 차남 필리프와 자신의 딸 이자벨을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다. 만약 이들 사이에 아들이 없으면 카를루 자신이 아카이아 공작위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었다. 1278년 기욤 2세가 사망하고, 앞서 1277년 차남 필리프마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카를루는 직접 아카이아 공작이 되었다. 또한 1277년에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로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1,000 비잔틴과 4,000 투르 리브르의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사들여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을 칭하기도 했다. 그의 세네찰 로제 데 산 세베리노가 아크레에 파견되어 통치했으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압박으로 왕국의 영토는 2600km2 정도의 해안 지역에 불과했고 충돌을 피해야 했다.

이처럼 카를루는 시칠리아 왕, 알바니아 왕, 아카이아 공작, 예루살렘 왕 등의 칭호를 얻으며 지중해 동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여 라틴 제국을 부활시키고, 나아가 샤를마뉴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프랑스 왕실의 위광과 로베르 기스카르 이래 시칠리아 왕국의 오랜 염원이었던 동로마 정복을 실현하여 지중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비잔티움 제국 정복을 위한 카를루의 노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동서 교회 통합 정책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카를루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탄력을 받았다. 마르티노 4세는 1281년 미카일 8세 황제를 파문하고 카를루에게 비잔티움 침공을 승인했다. 카를루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1281년 7월 3일)을 맺고 "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며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알바니아에서는 그의 군대가 베라트를 포위했으나 비잔티움 구원군에게 패배하고 내륙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1282년 봄, 비잔티움 제국을 향한 십자군 함대가 메시나에 집결하고, 또 다른 함대는 아를 왕국 장악을 위해 론 강을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계획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2. 4. 시칠리아 만종 사건과 몰락

비잔티움 제국 정복을 계획하던 카를루 1세는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즉위(1281년)로 강력한 지지자를 얻었다. 마르티노 4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카를루 1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베네치아 공화국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여 해로를 통한 원정을 준비했다. 교황은 이 원정을 십자군으로 격상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규모 원정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부과된 중과세와 프랑스인 관리들의 가혹한 압제로 인해 시칠리아 내부에서는 카를루 1세와 앙주 가문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만프레디의 사위로서 자신이 시칠리아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시칠리아 내부의 불만을 이용해 배후에서 반란을 조장하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 역시 카를루 1세의 침공을 막기 위해 아라곤, 제노바와 결탁하고 시칠리아의 반 프랑스 감정을 부추기는 공작을 펼쳤다.

1282년 부활절 다음 날인 3월 30일 월요일 저녁, 팔레르모 외곽의 성령 교회 앞에서 한 프랑스 군인이 현지 여성을 모욕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폭동이 일어났다. 분노한 시칠리아 시민들은 Moranu Li Franchiski|모라누 리 프린치스키scn("프랑스인에게 죽음을!")를 외치며 시칠리아 내 프랑스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반란은 순식간에 시칠리아 섬 전체로 퍼져나갔다. 카를루 1세는 처음에 이 반란을 가볍게 여겨 초기 대응이 늦었고, 결국 비잔티움 정복을 위해 모았던 군대를 시칠리아 반란 진압에 투입해야 했다. 7월, 카를루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여 메시나를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칠리아의 주요 도시들은 코뮌을 결성하고 교황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나, 카를루 1세를 지지하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오히려 5월 7일 반란 가담자들을 파문했다. 교황에게 외면당한 시칠리아인들은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페드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8월 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그는 9월 4일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결국 카를루 1세는 메시나 포위를 풀고 시칠리아 섬에서 철수하여 이탈리아 반도 본토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시칠리아 섬은 아라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생드니 대성당에 있는 카를루 1세의 무덤. 자신의 심장을 들고 있음.


본토로 퇴각한 카를루 1세는 교황과 자신의 조카인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지원을 받아 아라곤에 맞섰다.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1283년 1월에는 시칠리아인들에 대한 전쟁을 십자군으로 선포했다. 나아가 1284년 2월에는 페드로 3세의 아라곤 왕위를 박탈하고 프랑스 필리프 3세의 아들인 발루아의 샤를에게 수여하며 아라곤 십자군을 일으켰다. 필리프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라곤을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패퇴했다.

한편, 시칠리아 만종 전쟁은 이탈리아 남부와 해상에서 계속되었다. 아라곤의 제독 라우리아의 로제르가 이끄는 시칠리아-아라곤 연합 함대는 1283년 몰타 근해에서 카를루 1세의 프로방스 함대를 격파했다. 카를루 1세는 프랑스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여 반격을 준비하며 아들 카를로 2세에게 나폴리 방어를 맡겼다. 그러나 1284년 6월 5일, 라우리아의 로제르 함대는 나폴리 만 해전에서 카를루 1세의 명령을 어기고 출전한 카를로 2세의 함대를 대파하고 카를로 2세마저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를루 1세는 격분했지만,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칼라브리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레조디칼라브리아를 잠시 포위했으나 아라곤 군의 반격으로 포위를 풀고 철수해야 했다.

왕관을 쓴 남자가 침대에 누워 두 명의 사제로부터 성찬을 받고 있다.
카를루 1세의 죽음


카를루 1세는 브린디시에서 재차 시칠리아 침공을 준비했지만, 1284년 말 심각한 병에 걸려 포자로 옮겨졌다. 그는 1285년 1월 7일 포자에서 사망했다.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서 그는 당시 카탈루냐에 포로로 잡혀있던 아들 카를로 2세에게 모든 권한과 왕위를 넘기고, 카를로 2세가 석방될 때까지 아르투아의 로베르 2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의 시신은 나폴리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파리의 생 자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카를로 2세가 1288년 석방되어 왕위를 계승했지만, 시칠리아 섬을 되찾지 못하고 나폴리 왕국의 군주로 남게 되었다.

3. 유산

두 명의 13세기 역사가, 네오카스트로의 바르톨로메우스와 사바 말라스피나의 저서는 편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루에 대한 현대적 견해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전자는 시칠리아 만종을 정당화하기 위해 카를루를 폭군으로 묘사했고, 후자는 1285년 아라곤 원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루는 주화, 과세, 아말피 출신의 인기 없는 관리 임용 등 여러 분야에서 이전 황제들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군주제는 "프랑스화" 또는 "프로방스화"를 겪었다. 그는 레뇨(시칠리아 왕국)에 있는 영지를 프랑스 또는 프로방스 출신의 귀족 약 70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비잔틴 및 이슬람 왕실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화려한 의례복 대신, 다른 서유럽 군주처럼 옷을 입거나, 1267년 나폴리를 방문한 연대기 작가 토마스 투스쿠스가 관찰한 바와 같이 "단순한 기사"처럼 옷을 입었다.

갑옷 위에 코트를 입고 칼을 든 중년 남성
프로방스 백작 카를루(루이 조제프 도마의 이에르 조각상)


1310년경, 피렌체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카를루가 1270년대 후반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군주였다고 평가했다. 제노바 시인 루체토 가틸루시오는 카를루를 샤를마뉴와 직접 비교하기도 했다. 이 두 기록은 카를루가 거의 황제처럼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현대 역사가 중 스티븐 런시먼은 카를루가 동부 지중해에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고 보았고, 제라르 시베리는 그가 서부를 지배하려 했다고 썼으며, 장 던바빈은 그의 "영토의 집합체가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타카야마 히로시는 카를루의 지배 영역이 "통제하기에는 너무 컸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토 간의 경제적 연결은 강화되었다. 프로방스 소금이 다른 영토로 운송되었고, 레뇨의 곡물이 아카이아, 알바니아, 아크레, 토스카나에서 판매되었으며, 토스카나 상인들은 앙주, 메인, 시칠리아, 나폴리에 정착했다. 그의 최고위 관리들은 다른 지역을 대표하기 위해 고향에서 이동 배치되었다. 예를 들어, 프로방스의 세네샬은 앙주 출신이었고, 프랑스 및 프로방스 귀족들은 레뇨에서 최고 관직을 맡았으며, 로마의 부왕은 남부 이탈리아 및 프로방스 귀족 중에서 선택되었다. 그의 제국은 그가 죽기 전에 붕괴되었지만, 그의 아들 카를로 2세는 남부 이탈리아와 프로방스를 유지했다.

카를루는 항상 자신의 왕족 지위를 강조했지만, "제국적 수사"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의 유명한 치안 판사 마리노 데 카라마니코는 새로운 정치 이론을 개발했다. 로마법의 전통적인 해석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만이 법을 제정할 독점권을 가진다고 보았으나, 카라마니코는 황제가 왕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반박하며 카를루가 법령을 발포할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법률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카를루는 나폴리 대학교의 법학 석사에게 연간 금 20~50 온스라는 높은 급여를 지급했다. 의학 석사도 비슷한 보수를 받았고, 이 대학은 의학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루는 평생 의학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튀니스의 통치자로부터 아랍 의학 서적을 빌려 번역하도록 했다. 그는 아랍어 텍스트를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는 팔레르모의 유대인 학자 모세를 고용하기도 했다.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알 라지의 의학 백과사전인 Kitab al-Hawi|키타브 알 하위ara는 카를루의 명령으로 번역된 책 중 하나였다.

카를루는 또한 시인이었는데, 이는 그의 카페 왕조 친척들과는 다른 면모였다. 그는 사랑 노래와 ''죄-파르티''(후자는 피에르 당지쿠르와 함께)를 작곡했다. 젊은 시절 두 번의 시 경연 대회를 심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프로방스 트루바두르들은 카를루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글을 썼지만, 프랑스 시인(트루베르)들은 그를 칭찬하려 했다. 베르트랑 달라마논은 소금세에 반대하는 시를 썼고, 라이몽 드 토르 드 마르세이하는 카를루의 레뇨 침공을 비난했다. 반면, 트루베르 아담 드 라 알레는 미완성 서사시인 ''시칠리아 왕''을 카를루에게 헌정했고, 장 드 묑은 ''장미 이야기''에서 그의 승리를 찬양했다. 단테신곡연옥 편에서 "남성다운 코를 가진 자" 카를루가 한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아라곤의 페로 3세와 함께 평화롭게 노래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카를루는 건축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브린디시에 탑을 설계했지만, 이는 곧 붕괴되었다. 그는 나폴리에 카스텔 누오보 건설을 명령했으며, 현재는 그가 지은 예배당만이 남아있다. 그는 또한 프랑스식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남부 이탈리아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가계

카를루 1세는 프랑스 왕국의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제로는 루이 9세, 아르투아의 로베르 1세, 푸아티에의 알퐁스가 있었다.

카를루는 1246년 1월 31일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다. 베아트리스는 프로방스 백작 레이몽 베렝게르 5세와 사보이의 베아트리체의 막내딸로, 아버지로부터 프로방스 백국과 포르칼키에 백국을 상속받았다. 이 결혼은 형 루이 9세의 제안과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지지로 이루어졌다. 동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베아트리스는 언니들처럼 왕비가 되기를 열망하여 카를루에게 시칠리아 왕국 정복을 부추겼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1267년 7월에 사망했으며, 죽기 전 프로방스의 사용권을 카를루에게 유증했다.

모든 기록에 따르면 카를루는 충실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카를루와 베아트리체 사이에는 4남 3녀, 총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다.


  • 루이 (1248년 출생)
  • 블랑슈 (1250년 ~ 1269년):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3세 (플랑드르 백작)와 결혼.
  • 베아트리체 (1252년 ~ 1275년): 명목상 라틴 제국 황제 필리프 드 쿠르트네와 결혼.
  • 카를로 2세 (1254년 ~ 1309년): 나폴리 왕국의 왕. '절름발이 카를로'로 불렸으며, 1272년 살레르노 공국을 받았다. 헝가리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 필리프 (1256년 ~ 1278년): 1269년 사르데냐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교황의 승인은 받지 못했다. 아카이아 공국의 공작이었으며, 이자벨 드 빌아르두앵과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사망했다.
  • 로베르 (1258년 ~ 1265년): 어린 나이에 사망.
  • 엘리자베트 (또는 이자벨, 1261년 ~ 1300년경): 헝가리 왕국의 왕 러슬로 4세와 결혼.


베아트리체 사후 카를루는 헝가리의 마르기트에게 청혼했으나, 수녀였던 그녀는 결혼을 거부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외모를 손상시켰다고 한다. 이후 카를루는 1268년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부르고뉴 공작)의 손녀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마르그리트(마르게리타)가 태어났으나 요절했다.

5. 평가



13세기 역사가 네오카스트로의 바르톨로메우스와 사바 말라스피나의 기록은 편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루 1세에 대한 현대적 견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르톨로메우스는 시칠리아 만종을 정당화하기 위해 카를루를 폭군으로 묘사했고, 말라스피나는 1285년 아라곤 원정을 반대하며 글을 썼다. 카를루는 주화 발행, 과세, 아말피 출신 관리 임용 등 여러 면에서 이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국은 "프랑스화" 또는 "프로방스화"되었다. 그는 레뇨(Regno)의 영지를 프랑스 또는 프로방스 출신 귀족 약 70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비잔틴이나 이슬람 양식의 화려한 의례복 대신 다른 서유럽 군주들처럼 옷을 입었으며, 1267년 나폴리를 방문한 연대기 작가 토마스 투스쿠스는 그가 "단순한 기사"처럼 옷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1310년경 피렌체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카를루가 1270년대 후반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군주였다고 평가했다. 제노바 시인 루체토 가틸루시오는 카를루를 샤를마뉴에 비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카를루가 거의 황제처럼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현대 역사가 중 스티븐 런시먼은 카를루가 동부 지중해에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고 보았고, 제라르 시베리는 서유럽 지배를 목표로 했다고 분석했으며, 장 던바빈은 그의 영토 집합체가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타카야마 히로시는 카를루의 영토가 "통제하기에는 너무 컸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 아래 영토 간의 경제적 연결은 강화되었다. 프로방스 소금이 다른 영토로 운송되었고, 레뇨의 곡물은 아카이아, 알바니아, 아크레, 토스카나 등지에서 판매되었으며, 토스카나 상인들은 앙주, , 시칠리아, 나폴리에 정착했다. 그의 고위 관리들은 출신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을 대표하도록 임명되었다. 예를 들어, 프로방스의 세네샬은 앙주 출신이었고, 프랑스와 프로방스 귀족들이 시칠리아 왕국의 고위직을 맡았으며, 로마의 부왕은 남부 이탈리아와 프로방스 귀족 중에서 선발되었다. 그의 제국은 그가 사망하기 전에 붕괴되었지만, 그의 아들 카를루 2세는 남부 이탈리아와 프로방스를 유지했다.

카를루는 항상 자신의 왕족 지위를 강조했지만, 제국적인 수사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의 유명한 법관 마리노 데 카라마니코는 새로운 정치 이론을 발전시켰다. 전통적인 로마법 해석가들은 신성 로마 황제만이 법 제정의 독점권을 가진다고 보았으나, 카라마니코는 황제가 왕에 대한 주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카를루가 법령을 제정할 완전한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법학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카를루는 나폴리 대학교의 법학 교수들에게 연간 20~50 온스의 금이라는 높은 급여를 지급했다. 의학 교수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고, 대학은 의학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카를루는 평생 의학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튀니스의 통치자로부터 아랍 의학 서적을 빌려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팔레르모의 유대인 학자 모세와 같이 아랍어 텍스트를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는 학자들을 고용했다.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알 라지의 의학 백과사전인 Kitab al-Hawi|키타브 알 하위ar는 카를루의 명령으로 번역된 책 중 하나이다.

카를루는 카페 왕조 친척들과 달리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사랑 노래와 '죄-파르티'(jeu-parti, 후자는 피에르 당지쿠르와 함께)를 작곡했다. 젊은 시절 두 차례 시 경연 대회의 심사를 맡기도 했으나, 현대 학자들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프로방스의 트루바두르들은 대체로 카를루에게 비판적이었지만, 프랑스 시인들은 그를 칭찬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르트랑 달라마논은 소금세(가벨)에 반대하는 시를 썼고, 라이몽 드 토르 드 마르세이하는 카를루의 시칠리아 왕국 침공을 비난했다. 반면, 트루베르 아담 드 라 알레는 미완성 서사시 《시칠리아 왕》을 카를루에게 헌정했고, 장 드 묑은 《장미 이야기》에서 그의 승리를 찬양했다. 단테는 《신곡》의 연옥 편에서 "남성다운 코를 가진 자" 카를루가 한때 경쟁자였던 아라곤의 페터 3세와 함께 평화롭게 노래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카를루는 건축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브린디시에 탑을 설계했지만 금방 무너졌다. 나폴리에 카스텔 누오보 건설을 명령했으며, 현재는 그가 지은 예배당만이 남아있다. 또한 프랑스식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남부 이탈리아에 도입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참조

[1] 서적 イタリアの中世都市 山川出版社
[2] 서적 교황 연대기 바다출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