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번건은 삼국 시대 촉한의 관료로, 시중과 상서령을 역임했다. 제갈첨, 동궐과 함께 촉한 정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촉한 멸망 후에는 위나라에서 벼슬했으며, 서진 시대에는 사마염에게 제갈량의 치세를 칭찬하고 등애의 신원을 간청하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을 따라 북벌에 참여하는 문관으로 등장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진의 정치인 - 반악
반악은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빼어난 문학적 재능과 외모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마륜의 쿠데타로 처형되었으며, 슬픔과 비애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태강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 서진의 정치인 - 동궐
동궐은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로, 제갈량의 남정과 북벌에 참여한 후 상서령, 보국대장군 등을 역임하며 촉한 조정에서 활동했고, 촉한 멸망 후에는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이주하여 서진에서 관직을 지냈다. - 촉한의 시중 - 관흥
관흥은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관우의 아들이며, 아버지 사후 한수정후 작위를 계승하고 제갈량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시중·중감군에 임명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인물이다. - 촉한의 시중 - 제갈첨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 촉한의 상서령 - 제갈첨
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 촉한의 상서령 - 이엄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유선을 보좌하는 고명대신가 되었으나, 군량 보급 실패를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면직당하고 유배된 후 제갈량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사한 촉한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 번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번건 |
| 원어 이름 | 樊建 |
| 로마자 표기 | Fan Jian |
| 인물 정보 | |
| 출생지 | 자오양, 후베이성 |
| 사망일 | 알 수 없음 |
| 직업 | 정치가 |
| 자 | 장원(長元) |
| 관직 정보 | |
| 상서령 | 임기 시작: 261년 임기 종료: 263년 이전: 동궐 군주: 유선 |
| 시중 | 임기 종료: 263년 군주: 유선 |
| 급사중 | 임기 시작: 263년 이후 군주: 조환 |
| 산기상시 | 임기 시작: 263년 이후 군주: 조환 |
| 상국참군 | 임기 시작: 263년 이후 군주: 조환 |
2. 생애
번건(樊建)은 삼국 시대 촉한의 관료로, 자오양 출신이다. 촉한에서 시중(侍中)과 상서령(尙書令)까지 올랐다. 250년대와 260년대에 제갈첨, 동궐과 함께 촉한 정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나, 황호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제갈량 사후, 동궐의 후임으로 상서령이 되었다.
251년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제갈각은 번건을 종예보다 고아(高雅)한 성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후에 시중·상서령이 되었다.
263년 촉나라 멸망 이후, 조위에서 복무하며 낙양으로 갔다. 상국 참군(相國參軍)으로 복무했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며 옛 촉의 영토로 가 백성들을 위로했다. 이후 급사중(給事中)으로 승진했다.
서진의 급사중이었을 때, 사마염에게 제갈량의 치세를 칭찬하고, 등애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여 받아들여졌다.
2. 1. 촉한의 신하로서의 행적
황호(黃皓)가 정사를 농단할 때 유일하게 황호와 왕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251년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제갈각(諸葛恪)은 종예(宗預)보다 고아(高雅)한 성품을 가졌다고 평가했다.261년 강유(姜維)가 과도한 원정으로 나라를 피폐하게 하는 것을 우려하여 제갈첨(諸葛瞻), 동궐(董厥)과 함께 염우(閻宇)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하게 할 것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촉나라가 멸망한 후, 위나라에 의해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264년 유선(劉禪)을 따라 낙양으로 와서 상국(相國)을 보좌하는 참군(參軍)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하였다. 제갈량 사후, 동궐의 후임으로 상서령이 되었다. 연희 14년(251년), 교위의 지위였지만, 오로 사신으로서 파견되었다. 손권은 중병으로 번건과 직접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갈각에게 과거 사신으로 오를 방문한 종예와 비교하는 형태로 번건의 인물됨을 물었다. 제갈각은 "종예의 재능과 식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성질은 뛰어나다"라고 평했다.
후에 시중·상서령이 되었다. 경요 4년(261년), 제갈첨과 동궐이 평상서사가 되자, 번건과 세 명이서 국정을 맡게 되었다. 황호가 정치의 실권을 잡고 있었지만, 번건 등은 서로 감싸기만 할 뿐, 정치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번건만은 황호와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경요 6년(263년), 위가 촉을 침공하여, 유선은 항복했다. 이듬해 봄, 유선이 일가족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자, 번건은 동궐과 함께 따랐다.
2. 2. 촉한 멸망 이후
263년, 위나라가 촉을 침공하여 유선이 항복하면서 촉나라가 멸망했다. 264년 봄, 유선이 가족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될 때 번건도 함께 갔다. 낙양에 도착한 후, 번건은 옛 촉나라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열후(列侯)에 봉해졌다.그 후, 번건은 상국을 보좌하는 참군(參軍)이 되었고, 가을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여 촉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서진의 급사중(給事中)이었을 때, 사마염에게 제갈량의 치세에 대해 질문받자, 이를 칭찬하였다. 사마염도 이를 받아 제갈량을 칭찬하자, 번건은 성도에서 종회의 참언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등애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간청했다. 사마염은 웃으며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2. 3. 서진의 신하로서의 행적
273년, 의랑(議郞) 단작(段灼)이 사마염에게 상소를 올려 등애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거론하며 신원하고 그 후손들을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사마염은 아버지 사마소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당시 급사중(給事中)이었던 번건은 사마염이 제갈량과 같은 사람을 신하로 삼길 원한다는 말을 듣고, “등애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도 바로잡지 않는데, 제갈량 같은 사람을 얻었다고 해도 어찌 제대로 기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사마염은 번건이 자신을 일깨웠다고 칭찬하고 등애의 맏손자 등랑(鄧郞)을 낭중(郞中)에 임명하였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
4. 평가
번건은 삼국 시대 촉한의 관료로, 제갈첨, 동궐과 함께 250년대와 260년대 촉한 정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황호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손권은 중병으로 직접 대면하지 못했고, 제갈각은 번건을 종예에 비해 재능과 식견은 부족하지만 성품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경요 4년(261년), 번건은 제갈첨, 동궐과 함께 국정을 맡았으나, 황호의 전횡을 바로잡지 못했다. 다만, 번건만은 황호와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서진의 급사중이었을 때, 사마염에게 제갈량의 치세를 칭찬하고, 종회의 참언으로 억울하게 주살된 등애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여 사마염이 이를 받아들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