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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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궐은 촉한의 인물로, 제갈량 사후 승진을 거듭하여 상서령, 보국대장군 등을 역임했다. 강유의 북벌로 국력이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군권 박탈을 유선에게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유선의 항복으로 위나라에 투항했고, 이후 낙양으로 이주하여 상국을 보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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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첨은 제갈량의 아들이자 촉한의 장군 겸 정치가로, 무향후 작위를 계승하고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63년 위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여 충신으로 칭송받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 촉한의 상서령 - 이엄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유선을 보좌하는 고명대신가 되었으나, 군량 보급 실패를 은폐하려다 발각되어 면직당하고 유배된 후 제갈량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사한 촉한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 동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동궐 |
| 본명 | 董厥 |
| 로마자 표기 | Dǒng Jué |
| 자(字) | 공습(龔襲) |
| 출생지 | 형주 의양군 조양 |
| 사망지 | 미상 |
| 직업 | 관료, 장군 |
| 소속 | 촉한 |
| 작위 | 남향후(南鄉侯) |
| 관직 경력 | |
| 승상부 영사 및 주부 | 234년 ~ 258년 |
| 상서복야 | 234년 ~ 258년 |
| 상서령 | 258년 ~ 261년 |
| 후임 | 번건 |
| 선임 | 진지 |
| 대장군 | 미상 |
| 보국대장군 | 미상 ~ 263년 |
| 상국참군 | 264년 ~ 미상 |
| 산기상시 | 264년 ~ 미상 |
2. 생애
221년, 제갈량(諸葛亮|제갈량중국어)이 승상(丞相|승상중국어)에 오르자 승상부의 영사(令史|영사중국어)로 발탁되어 제갈량을 보좌했으며, 곧 주부(主簿|주부중국어)로 전임했다. 제갈량은 동궐을 사려 깊고 과부족이 없는 인물이라 평가했으며, 동궐은 남정(225년)과 북벌(227년~234년)에 참여하여 제갈량을 도왔다.
234년 제갈량 사후, 동궐은 점차 승진하여 상서복야(尚書僕射|상서복야중국어)를 거쳐 진지(陳祗|진지중국어)의 후임으로 상서령(尚書令|상서령중국어)에 올랐다. 이후 번건(樊建|번건중국어)에게 상서령 직을 넘겨주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보국대장군중국어) 겸 대장군평태사(大將軍平台事|대장군평태사중국어)가 되었다. 258년 진지가 사망하자 평상서사(平尚書事|평상서사중국어)가 되었고, 261년에는 제갈첨(諸葛瞻|제갈첨중국어)에게 평상서사 직을 넘긴 뒤 번건과 함께 조정을 운영하며 남향후(南鄕侯|남향후중국어)에 봉해졌다.
이 시기 촉한 조정은 군권을 쥔 강유(姜維|강유중국어)가 북벌에 몰두하는 동안, 환관 황호(黃皓|황호중국어)가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어지럽히는 상황이었다. 동궐은 제갈첨, 번건과 함께 있었으나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강유의 잦은 북벌로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우려한 동궐은 제갈첨, 번건과 함께 강유의 군권을 박탈하고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할 것을 유선(劉禪|유선중국어)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263년, 위나라의 종회(鍾會|종회중국어)와 등애(鄧艾|등애중국어)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위의 촉 정복), 동궐은 요화(廖化|요화중국어), 장익(張翼|장익중국어) 등과 함께 검각(劍閣|검각중국어)에서 방어에 나섰다.[3][4] 그러나 성도의 유선이 항복하면서(촉한의 멸망) 동궐 역시 위나라에 항복하였다.[6]
264년, 번건과 함께 항복한 유선을 따라 낙양(洛陽|낙양중국어)으로 이주하였다.[3] 위나라 조정에서 상국(相國|상국중국어)의 참군(參軍|참군중국어)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는 번건과 함께 산기상시(散騎常侍|산기상시중국어)를 겸임하며 옛 촉나라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3]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간 다른 많은 촉나라 신하들이 후에 열후(列侯)에 봉해졌지만, 동궐의 이름은 그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3]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촉나라 멸망 후 유선이 낙양으로 향할 때 병이 들어 요화와 함께 근심 속에 사망한 것으로 묘사된다.
2. 1. 제갈량 시대
221년, 제갈량(諸葛亮|제갈량중국어)이 승상(丞相|승상중국어)에 오르자, 동궐은 승상부의 영사(令史|영사중국어)가 되어 제갈량을 보좌하였다. 제갈량은 동궐을 사려 깊고 과부족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이후 동궐은 주부(主簿|주부중국어)로 전임되었다.동궐은 제갈량이 추진한 남정(225년)과 북벌(227년~234년)에 참여하여 서기 및 기록관으로 활동하며 제갈량을 도왔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동궐은 점차 승진하여 상서복야(尚書僕射|상서복야중국어)를 거쳐 진지(陳祗|진지중국어)의 후임으로 상서령(尚書令|상서령중국어)에 임명되었다.
2. 2. 촉한 중신 시대
221년, 제갈량(諸葛亮)이 승상(丞相)에 오르자, 동궐은 승상부의 영사(令史)로 임명되어 제갈량을 보좌했으며, 곧 주부(主簿)로 전임했다. 제갈량은 동궐을 사려 깊고 과부족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남정(225년)과 북벌(227년~234년)에 참여하며 제갈량을 도왔다.234년 제갈량이 사망한 후, 동궐은 점차 승진하여 상서복야(尚書僕射)를 거쳐 258년에는 진지(陳祗)의 후임으로 상서령(尙書令)에 올랐다. 이후 번건(樊建)에게 상서령 직을 넘겨주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대장군평태사(大將軍平台事)가 되었다. 261년에는 제갈첨(諸葛瞻)이 평상서사가 되면서, 동궐은 번건과 함께 조정의 정사를 처리하게 되었고, 이때 보국대장군 직함을 유지하며 남향후(南鄕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군권을 장악한 강유(姜維)는 계속되는 북벌에 집중했고, 조정 내부에서는 진지와 환관 황호(黃皓)가 권력을 장악하여 정사를 어지럽혔다. 강유가 외정에 몰두하는 사이 황호가 정치 실권을 잡았으나, 동궐 등 조정 대신들은 서로를 옹호하며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일각에서는 동궐이 번건과 달리 제갈첨과 함께 황호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다고도 전해진다. 강유의 잦은 북벌로 국력이 피폐해지는 것을 우려한 동궐은 제갈첨, 번건과 함께 강유의 군권을 박탈하고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할 것을 유선에게 건의했으나, 유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263년, 위나라의 종회(鍾會)와 등애(鄧艾)가 대군을 이끌고 촉을 침공하자, 동궐은 장익(張翼), 요화(廖化)와 함께 방어에 나섰다.[3] 장익과 함께 양안관(陽安關) 입구로 향했으나,[4] 한수(漢壽)에 이르렀을 때 음평(陰平)에서 패퇴한 강유, 요화와 합류하여 검각(劍閣)에서 굳게 수비했다.[4] 그러나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면죽을 함락시키고 제갈첨을 전사시키자[5], 성도의 유선은 초주의 권유에 따라 위나라에 항복을 결정했다(촉한의 멸망).[6] 동궐은 강유 등과 함께 종회에게 항복하고 성도로 돌아왔다.
264년 봄, 동궐은 번건과 함께 항복한 유선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다.[3] 위나라 조정에서 상국(相國)의 참군(參軍)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는 번건과 함께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며 옛 촉나라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3]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간 촉의 옛 신하들 중 다수가 열후에 봉해졌으나, 동궐의 이름은 봉작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3]
2. 3. 촉한 말기의 정치 상황과 동궐의 역할
234년 제갈량 사후 승진을 거듭하여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었으며, 진지(陳祗)의 후임으로 상서령(尙書令)에 올랐다. 이후 번건(樊建)에게 상서령 직을 넘겨주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겸 대장군평태사(大將軍平台事)가 되었다. 258년 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평상서사(平尙書事)가 되어 국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261년에는 제갈첨(諸葛瞻)에게 평상서사 직을 넘겨주고 번건과 함께 조정의 일을 처리하며 남향후(南鄕侯)에 봉해졌다.이 시기 촉한 조정은 군권을 쥔 강유(姜維)가 북벌에 집중하는 동안, 내부적으로는 진지와 환관 황호(黃皓)가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는 상황이었다. 동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지 못했으며[2], 일부 기록에 따르면 번건과 달리 제갈첨과 함께 황호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강유의 계속된 북벌로 국력이 소모되는 것을 우려한 동궐은 제갈첨, 번건과 함께 강유의 군권을 박탈하고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할 것을 유선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263년 위나라의 종회(鍾會)와 등애(鄧艾)가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동궐은 요화(廖化), 장익(張翼) 등과 함께 방어에 나섰다.[3] 장익과 함께 양안관(陽安關) 방면으로 향했으나[4], 한수(漢水)에서 음평 방면에서 후퇴해 온 강유, 요화와 합류하여 검각(劍閣)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4] 그러나 등애가 이끄는 위군이 검각을 우회하여 면죽(綿竹)을 함락시키고 제갈첨을 전사시키자[5], 수도 성도는 위기에 처했다. 결국 유선이 초주(譙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위나라에 항복하자[6](촉한의 멸망), 동궐 역시 강유 등과 함께 종회에게 항복하였다.
264년 항복 후 유선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으며[3], 번건과 함께 상국(相國)의 참군(參軍)이 되었다가 같은 해 가을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며 익주 지역 민심 수습에 관여했다. 촉한의 옛 신하 다수가 위나라에서 작위를 받았으나, 동궐의 이름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3]
2. 4. 촉한 멸망과 그 이후
258년, 진지(陳祗)가 세상을 떠나자 평상서사(平尙書事)가 되었다.[2] 261년에는 제갈첨(諸葛瞻)에게 평상서사를 양도하고, 번건(樊建)과 함께 조정의 일을 처리하며 남향후(南鄕侯)에 봉해졌다.[2]그러나 이 시기 촉한의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군권을 쥔 강유(姜維)는 북벌에 계속 힘을 쏟았고, 조정 안에서는 환관 황호(黃皓)가 권력을 휘두르며 정사를 농단했다. 동궐은 번건, 제갈첨과 함께 있었지만, 황호의 영향력을 막거나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지는 못했다.[2] 심지어 동궐은 제갈첨과 함께 황호와 사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2] 강유의 잦은 북벌로 나라가 피폐해지는 것을 우려한 동궐은 제갈첨, 번건과 함께 강유를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하여 그의 군권을 빼앗을 것을 유선(劉禪)에게 건의했으나, 유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263년, 위(魏)의 종회(鍾會)와 등애(鄧艾)가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로 침공해오자(위의 촉 정복), 동궐은 요화(廖化), 장익(張翼) 등과 함께 검각(劍閣)으로 나아가 방어에 나섰다.[3][4] 동궐은 장익과 함께 양안관(陽安關) 입구로 향했으나, 한수(漢水)에 이르렀을 때 음평(陰平)에서 패퇴한 강유, 요화와 합류하여 검각에서 굳게 지키기로 했다.[4] 그러나 등애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는 면죽(緜竹)에서 제갈첨을 전사시키고 성도(成都)로 향했고,[5] 결국 유선은 초주(譙周)의 건의를 받아들여 위나라에 항복했다(촉한의 멸망).[6] 동궐은 강유 등과 함께 종회에게 항복하고 성도로 돌아왔다.
264년 봄, 번건과 함께 항복한 황제 유선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다.[3] 낙양에서는 상국(相國)의 참군(參軍)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가을에는 번건과 함께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며 옛 촉나라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3]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간 다른 많은 촉나라 신하들이 후에 열후(列侯)에 봉해졌지만, 동궐의 이름은 그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3]
참조
[1]
서적
三国志
晋百官表
[2]
서적
異同記
[3]
서적
三国志
[4]
서적
三国志
[5]
서적
三国志
[6]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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