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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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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토학은 에도 시대 미토 번에서 시작된 학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사국을 설치하고 《대일본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초기에는 하야시 라잔의 문파 출신과 주순수 등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하여 일본의 역사, 문화, 사상 등을 연구했다. 후기에는 농촌 황폐화와 외세의 위협 속에서 존왕양이 사상이 대두되었으며, 고도칸 설립을 통해 교육 개혁이 이루어졌다. 메이지 시대에는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숭상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현대에는 미토 사학회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토시에서는 '미토학의 길'을 조성하여 미토학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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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학 - [지명]에 관한 문서
미토학
개요
유형미토 도메인
위치 정보
도시미토 시
국가일본
주요 정보
설립 연도1657년
쇼코칸 홀 부지

2. 전기 미토학 (17세기 중반 - 18세기 중반)

1657년, 미토 번의 세자 도쿠가와 미쓰쿠니에도에 사국(史局)을 설치하면서 전기 미토학이 시작되었다. 미쓰쿠니는 기전체 형식의 일본 통사 편찬을 목표로 하였고, 이는 훗날 《대일본사》로 결실을 맺게 된다.

대일본사》 편찬에는 하야시 라잔 학파 출신 유학자들과 명나라 출신 망명 학자 주순수 등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주순수는 양명학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미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 미토학은 역사 연구뿐만 아니라 일본 전통 문학, 천문, 지리, 신토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학문적 성과를 남겼다.

대일본사》는 남조정통론을 제창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미쓰쿠니는 명분론을 통해 북조와 무가 정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미쓰쿠니 사후에도 편찬 사업은 계속되었으나, 1737년 아사카 단파쿠 사후 50년간 중단되기도 하였다.[4]

2. 1. 미토 번과 《대일본사》 편찬

메이레키 3년(1657년), 미토 번의 세자였던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에도 고마고메의 별저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기전체 형식의 일본 통사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다.[4] 간분 3년(1663년) 미쓰쿠니가 번주가 된 후, 사국은 고이시카와 저택으로 옮겨져 쇼고칸(彰考館)이라 불리게 되었다.

훗날 《대일본사》로 불리며 미토학, 나아가 에도 시대 일본 학술사의 위대한 학문적 성취 중 하나로 꼽히게 될 이 일본 통사는 쇼고칸에서 편찬되었다. 초기 쇼고칸에는 막부의 유학 교육을 담당하던 하야시 라잔 학파 출신으로 미토 번에 출사한 자들이 많았다. 간분 5년(1665년)에는 왕조의 옛 신하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주순수가 미토로 초빙되었다. 양명학을 수용하고 실학파이기도 했던 주순수는 번주 미쓰쿠니의 우대를 받았다.[4]

간분 12년(1672년)에는 24명, 조쿄 원년(1684년) 37명, 겐로쿠 9년(1696년) 53명으로 편집원의 수가 점차 늘어 40~50명 선에서 안정되었다. 전기 쇼고칸의 편집원은 미토 번 출신자들보다 다른 번, 특히 천황이 머무는 교토 인근인 긴키 지방 출신자들이 많았다.[4]

대일본사》 편찬 과정에서는 와분(和文) ・ 와카(和歌) 등의 일본 전통 문학, 천문 ・ 역학(暦学) ・ 산수 ・ 지리 ・ 신토(神道) ・ 고문서 ・ 고고학 ・ 병학(兵学) ・ 서지(書誌) 등 많은 저서 편찬물을 남겼다. 편집원을 각지로 파견하여 고증이나 인용한 출전 명기, 사료 ・ 유물 보존에 힘을 쏟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 무렵을 대표하는 학자로는 나카무라 고켄(中村顧言, 고케이篁溪), 사사 무네아츠, 마루야마 요시즈미(丸山可澄, 가쓰도活堂), 아즈미 탄파쿠, 쿠리야마 센포, 우치코시 나오마사(打越直正, 보쿠사이撲斎), 모리 나오카네, 미야케 칸란 등이 있다.[4]

2. 2. 전기 미토학의 학문적 특징

메이레키(明暦) 3년(1657년)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는 에도(江戸) 고마고메(駒込)의 별저(別邸) 안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기전체(紀伝体) 형식의 일본통사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다.[4] 번주가 된 뒤인 간분(寛文) 3년(1663년)에는 사국을 고이시카와 저택(小石川邸)으로 옮겨 쇼고칸(彰考館)이라 불렀다.[4]

도쿠가와 미츠쿠니


훗날 《대일본사》라 불리며 미토학, 나아가 에도 시대 일본 학술사의 위대한 학문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될 이 일본 통사 편찬에는 하야시 라잔 문파 출신으로 미토 번에 출사한 자들이 많았는데, 간분 5년(1665년) 의 옛 신하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주순수(朱舜水)도 미토로 초빙되었다.[4] 양명학을 수용한 인물로써 실학파이기도 했던 그는 번주 미쓰쿠니의 우대를 받았다. 이후 편집원은 간분 12년(1672년) 24명, 조쿄(貞享) 원년(1684년) 37명, 겐로쿠(元禄) 9년(1696년) 53명으로 늘어 4~50명 선에서 안정되었다. 전기 창고관의 편집원은 미토 번 출신자들보다 다른 번, 특히 천황이 머무는 교토 인근 긴키 지방에서 초빙된 자들이 많았다.[4]

대일본사》 편찬 외에도 와분(和文) ・ 와카(和歌) 등의 일본 전통 문학, 천문 ・ 역학(暦学) ・ 산수 ・ 지리 ・ 신토(神道) ・ 고문서 ・ 고고학 ・ 병학(兵学) ・ 서지(書誌) 등 많은 저서를 편찬하였다.[4] 실제로 편집원을 각지에 파견하여 고증이나 인용한 출전 명기, 사료 ・ 유물 보존에 힘을 쏟았다.[4] 이 무렵 대표적인 학자로는 나카무라 고켄(中村顧言), 사사 무네키요(佐々宗淳), 마루야마 요시즈미(丸山可澄), 아사카 단파쿠(安積澹泊), 구리야마 센포(栗山潜鋒), 우치코시 나오마사(打越直正), 모리 쇼켄(森尚謙), 미야케 간란(三宅観瀾) 등이 있다.[4]

대일본사》 편찬 방침에 있어 남조정통론(南朝正統論)을 제창한 것은 후세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남북조정윤론).[4] 다만 막부 최측근 인사였던 미쓰쿠니는 북조 및 무가 정권 확립을 이단시할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명분론을 토대로 이를 합리화하는 것이 주요 연구 과제였다.[4]

미쓰쿠니 사후에도 《대일본사》 편찬 사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겐분(元文) 2년(1737년) 아사카 단파쿠 사후 《대일본사》 수사(修史) 사업은 50년간 중단되었다.

2. 3. 주요 학자

이 무렵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나카무라 고켄(中村顧言, 고케이篁溪), 사사 무네키요(佐々宗淳), 마루야마 요시즈미(丸山可澄, 가쓰도活堂), 아사카 단파쿠(安積澹泊), 구리야마 센포(栗山潜鋒), 우치코시 나오마사(打越直正, 보쿠사이撲斎), 모리 쇼켄(森尚謙), 미이케 간란(三宅観瀾) 등이 있다.[4]

3. 후기 미토학 (18세기 후반 - 19세기 후반)

1824년(분세이 7년) 미토 번 오쓰 촌(大津村)에서 영국 포경선 선원들이 상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막부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자, 후지타 유코쿠를 따르는 이들은 이를 굴욕적이라 비판하며 양이 사상을 강조했다. 이듬해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존왕양이 사상을 체계화한 《신론》을 저술하여 막말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4]

1837년(덴포 8년), 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고도칸을 설립하고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를 교수두로 임명했다. 후지타 도코가 기초한 「고도칸기」에는 '존황양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1844년(고카 원년) 나리아키가 막부의 탄압으로 실각하면서 개혁은 좌절되고, 도코는 「고도칸 기술의」를 집필하며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쿠가쿠를 수용, 존왕의 절대화와 민중 동원을 꾀하는 사상을 펼쳤다.[4]

1853년 페리 내항 이후 개혁파가 복권되고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막부 정치에 참여, 후지타 도코 등과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안세이 대지진안세이 대옥으로 미토 번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4] 이후 고메이 천황무오밀지 반납 문제, 안세이 대옥, 덴구토 사건, 쇼세이도의 탄압, 메이지 유신 후 덴구토의 보복 등 격렬한 내부 항쟁으로 미토 번은 피폐해졌다.

고도칸 (미토)

3. 1. 후기 미토학의 등장 배경

하루모리 대에 대일본사 편찬 사업이 재개될 무렵, 미토 번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번내 농촌은 황폐화되었고, 에조치(蝦夷地)에는 러시아 선박이 출몰하는 등 안팎으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미토 번은 심각한 재정난까지 겪고 있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미토 번의 관료들은 대일본사 편찬 작업에만 머무를 수 없었고, 농정 개혁이나 대(對)러시아 외교와 같은 번 안팎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3. 2. 다치하라 스이켄과 학문적 변화

도쿠가와 하루모리 대에 이르러 다치하라 스이켄이 쇼고칸 총재(彰考館総裁)에 취임하면서 《대일본사》 편찬 사업이 재개되었다.[4]

당시 미토 번은 농촌 황폐화와 에조치에서의 러시아 선박 출몰 등 대내외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고, 심각한 재정난까지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관료들은 단순히 편찬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농정 개혁, 대러시아 외교 등 번의 여러 문제 개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스이켄의 제자로는 고미야마 후켄, 아오야마 노부유키, 후지타 유타쿠 등이 있었다. 이 중 후지타 유타쿠는 1791년(간세이 3년) 후기 미토학의 선구로 평가받는 정명론(正名論)을 저술했다. 그러나 9년 뒤 번주 도쿠가와 하루야스에게 올린 의견서가 번의 정치를 비판하는 과격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아 《대일본사》 편수직에서 면직되고 좌천되었다. 이 무렵부터 《대일본사》 편찬 방침을 둘러싸고 스이켄과 유타쿠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었고,[4] 스이켄은 유타쿠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803년(교와 3년) 유타쿠는 오히려 스이켄 일파를 몰아내고 1807년(분카 4년) 자신이 총재로 취임했다. 이후 유타쿠 문하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후지타 도고, 도요타 덴코 등이 미토 학파의 중심이 되었다.[4]

3. 3. 후지타 유코쿠와 존왕양이 사상

도쿠가와 하루모리 대에 《대일본사》 편찬 사업이 재개되었으나, 미토 번은 농촌 황폐화와 러시아 선박 출몰 등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재정난까지 겪었다. 이에 번 관료들은 단순 편찬 작업을 넘어 농정 개혁, 대러시아 외교 등 번 안팎의 문제 개혁에 나섰다.[4]

다치하라 스이켄의 제자로는 고미야마 후켄, 아오야마 노부유키, 후지타 유코쿠 등이 있었다. 후지타 유코쿠는 1791년(간세이 3년) 후기 미토학의 선구로 평가되는 정명론을 저술하고, 1797년(간세이 9년) 번주 도쿠가와 하루야스에게 올린 의견서가 번의 정치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처벌받아 《대일본사》 편수직에서 면직되고 좌천되었다. 이 무렵부터 《대일본사》 편찬 방침을 둘러싸고 스이켄과 유코쿠 사이에 대립이 깊어졌고,[4] 스이켄은 유코쿠를 파문했다. 그러나 1803년(교와 3년) 유코쿠는 도리어 스이켄 일파를 몰아내고 1807년(분카 4년) 자신이 총재로 취임했다. 유코쿠 문하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후지타 도코, 도요타 덴코 등이 이후 미토 학파의 중심이 되었다.[4]

1824년(분세이 7년) 미토 번 오쓰 촌(大津村)에 영국 포경선 선원 12명이 상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막부가 이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자, 유코쿠 일파는 이를 굴종적이라고 비판하며 미토 번 내 양이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듬해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존왕양이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신론》을 저술하여 막부 말기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4. 고도칸 설립과 교육 개혁

덴포(天保) 8년(1837년), 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斉昭)는 번의 무사 및 그 자제들을 위한 번립 학교인 고도칸을 설립하였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가 총재 겸 교수두(教授頭)가 되었다.[4] 고도칸의 교육 이념을 보여주는 「고도칸기」(弘道館記)는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의 아들인 후지타 도코(藤田東湖)가 기초하였다.[4] 「고도칸기」에서는 기존의 존왕양이(尊王攘夷)에서 '왕'을 '황'으로 바꾼 '존황양이(尊皇攘夷)'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4]

고카(弘化) 원년(1844년),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막부로부터 개혁이 과격하다는 지적을 받고 번주 사임 및 근신 처분을 받으며 개혁은 좌절되었다. 나리아키의 측근인 개혁파 가신들 역시 근신형에 처해졌다.[4]

근신 기간 동안 후지타 도코는 「고도칸기」의 해설서인 「고도칸 기술의(弘道館記述義)」를 집필하였다. 도코는 이 책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고쿠가쿠(国学)를 대폭 수용하여, 유학의 입장에서 아이자와 등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존왕(尊王)의 절대화와 함께 광범위한 민중 동원을 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고도칸의 교육 방침뿐만 아니라 번의 정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4]

3. 5. 흑선 내항과 개혁 운동

1853년 페리 내항(흑선 내항) 이후, 미토 번에서는 개혁파가 복권되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막부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후지타 도코 등도 나리아키의 측근으로 등용되어 농병 편성 등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4] 그러나 안세이 대지진으로 도코가 사망하고, 안세이 대옥으로 나리아키가 다시 처벌받으면서 미토 번의 정치적, 사상적 혼란은 더욱 깊어졌다.[4]

3. 6. 덴구토의 난과 미토 번의 혼란

분세이(文政) 7년(1824년) 미토 번 영내의 오쓰 촌(大津村)에서 영국 포경선 선원 12명이 물과 식료를 구하러 상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막부는 이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는데, 후지타 유코쿠(藤田幽谷) 일파는 이를 굴종적인 태도라 비판하며 미토 번 내에서 양이(攘夷) 사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듬해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신론》(新論)을 저술했다. 이 책은 막부 말기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4]

덴포(天保) 8년(1837년), 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斉昭)는 번교(藩校)인 고도칸(弘道館)을 세웠고,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교수두(教授頭)가 되었다. 고도칸의 교육 이념을 보여주는 「고도칸키」(弘道館記)는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기초자는 유타쿠의 아들인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카(弘化) 원년(1844년) 나리아키는 막부로부터 개혁이 과격하다는 지적을 받고 번주 사임 및 근신 처분을 받으며 개혁은 좌절되었다. 나리아키의 측근인 개혁파 가신들도 근신형에 처해졌다. 이 근신 중에 후지타 도고는 「고도칸키」의 해설서인 「고도칸 기술의(弘道館記述義)」를 집필했다. 도고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고쿠가쿠(国学)를 대폭 채용하여 유학의 입장에서 아이자와 등의 비판을 초래하면서도 존왕(尊王)의 절대화와 함께 광범위한 민중 동원을 기도하는 사상을 펼쳤고, 이는 고도칸의 교육 방침뿐 아니라 번의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도고가 지은 「회천시사」(回天詩史)의 문천상의 정기가에 화답하여(和文天祥正気歌, 약칭 정기가正気歌)는 좌막(佐幕) ・ 도막(倒幕) 할 거 없이 모든 지사가 애독하였다.

가에이(嘉永) 6년(1853년)의 흑선 내항으로 미토 번 개혁파들은 복권되었다. 나리아키는 막부 정치 참여직에 취임하고, 도고 등도 나리아키의 측근으로 등용되어 농병(農兵) 편성 등의 군사 개혁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안세이 대지진(安政の大地震)으로 도고가 사망하고, 안세이 대옥사(安政の大獄)로 나리아키가 다시금 처벌되면서 미토 번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혼미한 상황이 더욱 깊어졌다.

안세이(安政) 5년(1858년) 고메이 천황의 무오밀지(戊午の密勅)에 대한 반답 문제, 이듬해 6년(1859년) 나리아키의 영구 칩거를 포함한 안세이 대옥사, 겐지(元治) 원년(1864년)의 덴구토(天狗党) 사건, 이에 대한 쇼세이도(諸生党)의 탄압, 메이지 유신 뒤 덴구토의 보복 등 격렬한 내부 항쟁으로 미토 번은 피폐해지고 말았다.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미토학

메이지 유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까지 미토학은 도쿠가와 미쓰쿠니와 더불어 일본 사회에서 크게 칭송받았다. 특히 1890년 메이지 천황의 미토 행차 직후 발호된 교육칙어에는 '국체', '사도' 등 미토학의 중심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 내용 또한 미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메이지 천황은 미쓰쿠니와 나리아키에게 정1위를 추증하고, 도키와 신사라는 사호와 각각의 신호를 하사하여 별격관폐사 반열에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토학은 천황제군국주의를 뒷받침한 사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칭송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일본에서 미토학은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미토 사학회에서 연구되고 있다. 미토시2018년 미토성 터와 고도칸 등에 이르는 길을 '미토학의 길'로 정했다.[5]

4. 1. 메이지 정부의 미토학 숭상

메이지 유신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에 이르기까지 미토학은 그 원류이기도 한 도쿠가와 미쓰쿠니와 더불어 일본 사회에서 지극히 칭송되었고 찬양을 받았다. 특히 1890년 메이지 천황의 미토 행차 직후 발호된 이른바 교육칙어는 「국체」(国体)나 「사도」 (斯道) 등 미토학에 있어 중심적으로 쓰였던 용어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내용도 미토학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이었다.[5]

메이지 천황은 미쓰쿠니와 나리아키에게 정1위 관위를 추증하고, 그 뒤 미쓰쿠니와 나리아키를 제향하는 신사가 세워짐에 즈음하여 도키와 신사라는 사호(社号)와 각각의 신호(神号)를 하사하고 별격관폐사 반열에 두었다.[5]

1906년 미토학의 명저로 꼽히게 될 대저술 《대일본사》가 편찬 시작 249년 만에 전402권으로 완성되어 메이지 천황에게 올려졌다. 그 편찬에 사용된 사서를 보존하기 위한 비용이 하사라는 명목으로 지급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쇼코칸 문고가 세워졌다. 나아가 《대일본사》 편찬의 공적으로 미토 도쿠가와 가를 도쿠가와 종가나 고셋케 등과 같은 공작(公爵)의 작위를 주었다. 한편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자결한 노기 마레스케 일본 육군 대장은 자결하기 전에 당시의 황태자 히로히토에게 미토학과 관련한 서적을 바쳤다고 한다.[5]

4. 2. 《대일본사》 완성

1906년 미토학의 명저로 꼽히는 대저술 《대일본사》가 편찬 시작 249년 만에 전402권으로 완성되어 메이지 천황에게 헌상되었다.[5] 이 책의 편찬에 사용된 사서를 보존하기 위한 비용이 하사되었고, 이를 토대로 쇼코칸 문고가 설립되었다.[5]

4. 3.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쇠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미토학은 천황제군국주의를 뒷받침한 사상으로 여겨져 부정적으로 다루어졌다. 전쟁 이전만큼 칭송받거나 찬양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일본에서 미토학은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있는 미토 사학회(水戸史学会)에서 연구되고 있다. 미토시는 관광 명소로 활용하기 위해 2018년 1월 미토성 터 및 고도칸 등에 이르는 약 2.8km의 길을 '미토학의 길'(水戸学の道)이라고 정하였다.[5]

4. 4. 현대의 미토학 연구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토학은 천황제군국주의를 뒷받침한 사상으로 여겨져 이전만큼 칭송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일본에서 미토학은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있는 미토 사학회(水戸史学会)에서 연구되고 있다. 미토 사학회는 미토학의 역사적, 사상적 측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주요 저작으로는 신토 수세이, 대일본신기사, 신기사료 등이 있다. 또한 풍토기와 고사수이에 대한 수집 및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5]

미토시는 관광 자원으로 미토학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8년 1월, 미토성 터와 고도칸 등에 이르는 약 2.8km의 길을 '미토학의 길'(水戸学の道)로 지정하였다.[3]

참조

[1] 웹사이트 水戸学 (in Japanese) – Mitogaku - https://kotobank.jp/[...] 2021-12-06
[2]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5巻 岩波書店 1984-10
[3] 뉴스 尊王攘夷思想、倒幕の原動力/維新150年 水戸学知って/市、周遊コースや城跡整備 日本経済新聞 2018-03-24
[4]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5巻 岩波書店 1984-10
[5] 뉴스 尊王攘夷思想、倒幕の原動力/維新150年 水戸学知って/市、周遊コースや城跡整備 니혼게이자이 신문 201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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