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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쿠슈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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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프랑스의 의사이자 정치인으로, 국경 없는 의사회와 세계의사회를 설립하여 인도주의 활동을 펼쳤다. 그는 '개입의 의무'를 주장하며 코소보에서 유엔 최고 대표를 역임했다. 프랑스 정부에서 보건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이란 핵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다양한 국제 기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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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쿠슈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0년 상하이 프랑스인들을 위한 리셉션에서의 베르나르 쿠슈네르
2010년 상하이 프랑스인들을 위한 리셉션에서의 베르나르 쿠슈네르
이름베르나르 장 쿠슈네르
원어 이름Bernard Jean Kouchner
출생일1939년 11월 1일
출생지아비뇽, 프랑스
사망일해당 없음
사망지해당 없음
국적프랑스
직업의사, 정치인, 외교관
정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2007년–현재), 과거 프랑스 공산당(1966년 이전), 사회당(1966년–2007년)
프랑스 외무유럽부 장관내각: 프랑수아 피용
임기 시작: 2007년 5월 17일
임기 종료: 2010년 11월 13일
이전: 필리프 두스트블라지 (외무유럽부 장관)
이후: 미셸 알리오마리
코소보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임기 시작: 1999년 7월 15일
임기 종료: 2001년 1월 12일
이전: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
이후: 한스 해케루프
프랑스 보건부 장관내각: 피에르 베레고부아
임기 시작: 1992년 4월 2일
임기 종료: 1993년 3월 29일
이전: 클로드 에뱅
이후: 시몬 베유
개인 정보
학력파리 대학교
배우자에블린 피시에 (사별, 자녀 3명), 크리스틴 오크랑 (자녀 1명)
수상대영 제국 훈장

2. 초기 생애 및 교육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아비뇽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개신교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쿠슈네르의 부계 조부모는 러시아 출생 유대인으로, 유대인 학살을 피해 프랑스로 이민했지만 수십 년 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3]

1968년 5월 프랑스 제5공화국 혁명 당시 파리 대학교 의학부 파업 위원회의 간부였다.

3. 인도주의 활동

쿠슈네르는 1968년 나이지리아 내전 중 비아프라에서 적십자 의사로 활동하며 인도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국경 없는 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를 공동 설립했고, 1980년에는 세계의사회(Médecins du Monde)를 설립했다. 레바논 내전 중에는 인도주의적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시아파 성직자 이맘 무사 알-사드르와 협력하기도 했다.[6]

1987년에는 법학자 Mario Bettati|마리오 베타티프랑스어와 함께 "개입 의무"(Le devoir d'ingérence|프랑스어)라는 책을 저술하여 국제 기구의 인도적 개입을 주장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프랑스에서 보건·인도주의 활동 장관을 역임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 의해 유엔 코소보 임시 행정 기구(UNMIK) 대표로 임명되어 코소보 지역의 안정과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3. 1. 국경 없는 의사회와 세계의사회 설립

쿠슈네르는 1968년 나이지리아 내전 중 비아프라에서 적십자 의사로 일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1년 국경 없는 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를 공동 설립했다. 이후 국경 없는 의사회 회장 클로드 말레와의 의견 충돌로 1980년 세계의사회(Médecins du Monde)를 설립했다.[6] 레바논 내전 중에는 동 베이루트의 나바 난민 캠프 포위 기간 동안 인도주의적 자원봉사자로 일했으며, 시아파 성직자 이맘 무사 알-사드르와도 긴밀히 협력했다.[6]

1968년 5월 프랑스 제5공화국 혁명 당시 파리 대학교 의학부 파업 위원회 간부였다. 이후 프랑스 의료 구호단과 함께 비아프라에서 활동했으며, 이 단체가 1971년 국경 없는 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프랑스어)로 변혁하는 데 기여했다. 1979년 국경 없는 의사회 지도자 그룹 내에서 클로드 말레와 대립하여 국경 없는 의사회를 떠나 세계 의사회(Médecins du monde프랑스어)를 창설했다.

3. 2. '개입의 의무' 주창

쿠슈네르는 오랫동안 인도적 개입을 지지해 왔다.[11] 2003년 초, 그는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11] 독재에 대한 개입이 세계적인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는 실제 국민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며, 그들만이 전쟁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2월 4일, 앙투안 베이유와 함께 ''르몽드''에 게재한 "전쟁도 사담도 아닌"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쿠슈네르는 임박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제목이 시사하듯이, 사담 후세인의 권력 유지를 반대했고, 그의 제거는 바람직하게는 외교적인 유엔의 협력적인 해결책을 통해 달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2][13] 그는 이후 점령이 진행된 방식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11]

1987년에는 "Droit_d'ingérence프랑스어" (개입의 권리) 저술로 알려진 법학자 Mario Bettati프랑스어와 공저한 "개입 의무"(Le devoir d'ingérence프랑스어)에서 국제 기구의 인도적 개입을 주장했다.

3. 3. 코소보에서의 활동

1999년 7월 15일, 결의안 1244에 따라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쿠슈네르를 유엔 특별 대표 겸 유엔 코소보 임시 행정 기구(UNMIK) 대표로 임명했다.[7] 그는 18개월 동안 세르비아의 행정 체제를 대체하고 코소보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민간 행정 및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유엔의 노력을 이끌었다. 이로써 2000년 말까지 지방 자치 의회가 지역 수준에서 선출되었다.[8] 2001년 1월 21일 덴마크 사회 민주당 출신 한스 헤케루프로 교체되었다. 이후 그는 코소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리슈티나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9년 7월부터 2001년 1월까지 유엔 최고 대표로서 코소보를 통치했다. 이 임무는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가 '국제 문민 통괄' 기관에 의한 통치를 인정한 제1244호 결의에 따른 것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에서 인도적 지원, 시민 생활의 통치, 경제 정책, 민주주의 기구의 발전을 지휘하며, 그의 이론을 실천하는 장이 되었다.

4. 정치 경력

쿠슈네르는 1964년 쿠바 방문 당시 피델 카스트로와 낚시를 하고 술을 마셨으며,[5] 1968년 5월 혁명 당시 소르본 대학교 의학부 파업위원회를 이끌었다. 1994년에는 판사 안드레 뤼포와 함께 몬트리올에 본부를 둔 국제 아동 권리 사무국(IBCR)이라는 비정부 기구를 설립했다.

2003년 초, '반전, 반 후세인'[36]으로 요약되는 글을 통해 사담 후세인이라크 망명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개입은 국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2004년 미국의 잡지 타임은 "인권의 이름으로 미국의 이라크 개입을 지지했다"라는 이유로 쿠슈네르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2007년 유럽 위원회는 쿠슈네르를 국제 저명 인사 독립 그룹(IIGEP)의 대표로 임명했다. 이 그룹은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혐의 인권 침해에 대한 위원회의 모든 조사 및 심문을 관찰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1999년 7월부터 2001년 1월까지 유엔 최고 대표로서 코소보를 통치했다. 이 임무는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244호에 따른 것으로,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에서 인도적 지원, 시민 생활 통치, 경제 정책, 민주주의 기구 발전을 지휘했다.

4. 1. 프랑스 국내 정치

쿠슈네르는 정치 경력을 프랑스 공산당(PCF) 당원으로서 시작했지만, 1966년 지도부를 전복하려 한 시도로 인해 제명되었다.[4] 1988년부터 사회당(PS) 당원은 아니었지만, 사회주의 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미셸 로카르 내각에서 인도주의적 행동 담당 국무장관, 1992년 피에르 베레고부아 내각에서 보건부 장관(Minister of Health)을 역임했다.

1997년 리오넬 조스팽 총리 시절 다시 보건부 장관이 되어 1999년까지 재직했다. 2002년 선거까지 세 번째로 보건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당선 후, 프랑수아 피용 총리의 내각에 프랑스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 직책을 수락한 이유로 사회당에서 제명되었다.[10] 2010년 11월 피용 3차 내각 개편에서 해임되었다.

1987년 법학자 Mario Bettati프랑스어와 함께 "개입 의무"(Le devoir d'ingérence프랑스어)에서 국제 기구의 인도적 개입을 주장했으며, 1988년 국무 차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입각했다.

1994년 사회당 당원이었지만, 미셸 로카르의 당파로서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5년 베르나르 타피를 따라 좌파 급진당에 입당하여 대변인이 되었다. 1998년 10월 6일 사회당에 재입당했다.

2007년 5월 18일, 사회당원이었음에도 프랑수아 피용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서 외무·유럽 관계부 장관을 맡게 되자 사회당은 즉시 제명 절차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2010년 8월 25일,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으로 외무 장관 사임 의사를 밝혔고,[41] 11월 내각 개편 때 외무 장관을 사임했다.

쿠슈네르의 각료 및 정부 서기관 경력은 다음과 같다.

직책기간내각
보건·인도주의 정책 장관1992년 4월 4일 - 1993년 3월 30일피에르 베레고부아 내각
외무·유럽 담당 장관2007년 5월 18일 - 2010년 11월 13일프랑수아 피용 제1차·제2차 내각
고용·사회 정책 장관 보좌 보건 장관(각외 장관)2001년 2월 6일 - 2002년 5월 7일리오넬 조스팽 내각
사회 문제 담당·고용 장관 보좌 고용 촉진 담당 서기관(정부 서기관)1988년 5월 13일 - 1988년 6월 28일미셸 로카르 제1차 내각
총리실 직속 인도주의 문제 담당 서기관(정부 서기관)1988년 5월 13일 - 1991년 5월 17일미셸 로카르 제1차 내각
내무·외무 장관 보좌 인도주의 문제 담당 서기관(정부 서기관)1991년 5월 17일 - 1992년 4월 4일에디트 크레송 내각
고용·사회 정책 장관 보좌 보건 담당 서기관(정부 서기관)1997년 6월 4일 - 1999년 7월 28일리오넬 조스팽 내각


4. 2. 유럽 의회 의원

쿠슈네르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개발 및 협력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인권 소위원회에서 활동했다.[1] 또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위한 의회 대표단의 일원이었다.[1]

1994년 쿠슈네르는 판사 안드레 뤼포와 함께 몬트리올에 본부를 둔 국제 아동 권리 사무국(IBCR)이라는 비정부 기구를 설립했다.[1]

기간직책
1994년-1997년유럽 의회 의원


4. 3. 유엔 고위직 도전

2005년, 쿠슈네르는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UNHCR) 직에 지원했지만, 당시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지명한 포르투갈 전 총리 안토니우 구테흐스에게 밀려 임명되지 못했다.

2006년에는 세계 보건 기구의 사무총장 후보로도 나섰으나, 최종 선거 전에 탈락했고, 홍콩 출신의 마거릿 찬이 선출되었다.

이처럼 쿠슈네르는 2005년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2006년 세계 보건 기구 사무총장 후보로 나섰으나, 기여도, 지명도, 경험에도 불구하고 모두 선출되지 못했다.

5. 정치적 입장 및 논란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1968년 5월 프랑스 제5공화국 혁명 당시 파리 대학교 의학부 파업 위원회 간부로 활동했다. 이후 프랑스 의료 구호단과 함께 비아프라에서 활동했으며, 1971년 이 단체가 '''국경 없는 의사회'''로 변혁하는 데 기여했다. 1979년에는 국경 없는 의사회를 떠나 '''세계 의사회'''를 창설했다. 1987년에는 법학자 마리오 베타티와 공저한 《개입 의무》(Le devoir d'ingérence프랑스어)에서 국제 기구의 인도적 개입을 주장했다.

쿠슈네르는 사회당 당원으로, 우파가 추진하는 신규 채용 계약이나 프랑스 전력 공사의 주식 공개와 같은 정책에 찬성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가진 좌파 운동가라고 표현한다.

2007년 5월, 쿠슈네르는 사회당원임에도 프랑수아 피용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서 외무·유럽 관계부 장관을 맡게 되면서 사회당에서 제명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는 2007년 5월 20일 자 『르몽드』지에 기고문을 통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입장에서 우파 정부와 협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프랑스 외교 정책은 좌우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맞춰 프랑스의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2010년 11월, 쿠슈네르는 내각 개편 때 외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5. 1.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입장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오랫동안 인도적 개입을 지지해 왔다.[11] 2003년 초, 그는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으며,[11] 독재에 대한 개입이 세계적인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는 실제 국민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며, 그들만이 전쟁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3년 2월 4일, 앙투안 베이유와 함께 ''르몽드''에 게재한 "전쟁도 사담도 아닌"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쿠슈네르는 임박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제목이 시사하듯이, 사담 후세인의 권력 유지를 반대했고, 그의 제거는 바람직하게는 외교적인 유엔의 협력적인 해결책을 통해 달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2][13] 그는 이후 점령이 진행된 방식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11]

2003년 초,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반전, 반 후세인'[36]으로 요약되는 글을 통해 사담 후세인이라크를 망명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그는 개입은 국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또한,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미국의 이라크 통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과거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쓴소리를 했다.[38]

2004년에는 미국의 잡지 '타임'에 "인권의 이름으로 미국의 이라크 개입을 지지했다"라는 이유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5. 2. 이란 핵 문제에 대한 발언

2007년 9월, 쿠슈네르는 이란 핵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여 많은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다. 2007년 9월 16일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끝까지 협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은 전쟁입니다."[18]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가 외교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군사적 행동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란의 핵무기는 "전 세계에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19]

이란 관리들은 이 발언을 "선동적"이라고 비판했다.[18] 국제 원자력 기구(IAEA)의 수장인 UN 수석 핵 사찰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이란 공격에 대한 논의를 "과장"이라고 묘사하며, 무력 사용은 최후의 수단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며 쿠슈네르에게 간접적으로 대응했다.[20]

쿠슈네르는 "나는 어떤 무력 사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007년 9월 18일, 쿠슈네르는 비판에 답변하려고 시도했다. 신문 ''르 몽드''에 대한 논평에서 그는 "나는 내가 호전적이라고 말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제 메시지는 평화, 진지함, 결의의 메시지였습니다. [...] 최악의 상황은 전쟁이 될 것입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프랑스의 입장은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협상하고, 협상하고, 협상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제재에 대해 유럽의 친구들과 협력하는 것입니다."[21]라고 밝혔다.

5. 3. 친유럽주의적 입장

쿠슈네르는 잘 알려진 친유럽주의자이다. 그는 리스본 조약이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위기에 처했을 때 비준을 지지했다.[14] 리스본 조약 비준에 대한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쿠슈네르는 조약에 대한 "반대" 투표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경제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한 "유럽에 자주 의존해 온 아일랜드인들을 믿을 수 없다면 매우 곤란할 것"이라고 말했다.[15] 그의 발언은 아일랜드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일부 언론 평론가들은 그의 발언이 2008년 6월 13일 리스본 조약 부결을 앞두고 "반대" 캠페인에 불을 지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16]

2012년, 쿠슈네르는 조지 소로스와 함께 유로존 위기에 대한 해답으로 유럽의 특권을 강화하라는 요구에 서명했다.[17]

6. 정계 은퇴 이후 활동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정계 은퇴 이후 다음과 같은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직책기관
이사회 위원쿠르디스탄 아메리카 대학교
선정 위원회 위원오로라 인류 각성상 (2017년~)
자문 위원회 위원Devex
국제 자문 위원회 위원에코 재단
위원유럽 외교 관계 위원회
이사회 위원소외 퇴치 재단
국제 자문 위원회 위원국제 티베트 지원 캠페인
자문 위원회 위원톨레도 국제 평화 센터


7. 수상 경력


  • 미국 성취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 상 (2005)[31][32]
  • 자유 기사 훈장 (2011)[33]
  • 인류에 반하는 범죄에 맞서 싸우는 그의 "평생 동안 변함없는 헌신"을 기리기 위한 빅터 골란츠 상 (2014)[34]
  • 대영 제국 훈장 명예 기사 사령관[35]

참조

[1] 웹사이트 World's 50 most influential Jews http://www.jpost.com[...] 2010-05-21
[2] 웹사이트 Finanznachrichten - Börse & Wirtschaft aktuell http://www.wallstree[...]
[3] 뉴스 France's top diplomat: A doctor who's direct https://www.nytimes.[...]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2007-05-18
[4] 간행물 Nouveau Grub Street http://www.economist[...] The Economist 2007-05-31
[5] 뉴스 A Statesman Without Border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2008-02-03
[6] 뉴스 Civil society represents Kouchner's conscience, says doctor http://www.nowlebano[...] nowlebanon.com 2007-07-26
[7] 웹사이트 Biography Bernard Kouchner http://www.un.org/pe[...] UN
[8] 웹사이트 What is UNMIK? http://www.un.org/pe[...] UN
[9] 뉴스 Field of 11 Candidates Competes to Head WHO https://www.washingt[...] 2006-11-05
[10] 간행물 France New's Government – A study in perpetual motion http://www.economist[...] The Economist 2007-06-23
[11] 뉴스 Foreign minister set to ruffle diplomatic feathers https://www.ft.com/c[...] Financial Times 2007-05-18
[12] 뉴스 Ni la guerre ni Saddam http://www.reunir.as[...] Le Monde 2003-02-04
[13] 뉴스 La dernière mission du docteur Kouchner http://www.lemonde.f[...] Le Monde 2007-05-18
[14] 웹사이트 Bernard Kouchner : "Tout le monde se tourne vers l'Europe au moment où on la refuse à l'intérieur" http://www.rtl.fr/ac[...] 2012-02-13
[15] 뉴스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8-06-11
[16] 뉴스 http://www.france24.[...] France 24 2008-06-13
[17] 뉴스 As concerned Europeans we urge eurozone leaders to unite http://www.ft.com/in[...] 2012-02-13
[18] 뉴스 Iran scorns French warning of war http://news.bbc.co.u[...] BBC News 2007-09-17
[19] 뉴스 After Talk of War, Cooler Words in France on Ira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 뉴스 ElBaradei concerned over Iran row http://news.bbc.co.u[...] BBC 2007-09-17
[21] 뉴스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7-09-17
[22] 뉴스 EU will only accept Tsvangirai as Zimbabwe leader: Kouchner http://afp.google.co[...] 2008-07-01
[23] 뉴스 Pope protesters, supporters clash in France https://www.reuters.[...] 2009-03-22
[24] 문서 Board of Trustees American University of Kurdistan
[25] 문서 Selection Committee Aurora Prize for Awakening Humanity
[26] 문서 Board of Advisors Devex
[27] 문서 International Board of Advisors Echo Foundation
[28] 문서 Members of the Council European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29] 문서 International Council of Advisors International Campaign for Tibet
[30] 문서 Advisory Council Toledo International Centre for Peace
[31] 웹사이트 Golden Plate Awardee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https://achievement.[...]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32] 뉴스 2005 Summit Highlights Photo https://achievement.[...]
[33] 웹사이트 Bernard Kouchner http://pulaski.pl/me[...] 2018-01-06
[34] 웹사이트 Invitation to the awarding of the "Victor Gollancz Prize" to Bernard Kouchner http://www.gfbv.de/i[...] 2015-05-18
[35] 웹사이트 Honorary Knighthoods Awarded 1997-2006 http://data.parliame[...]
[36] 뉴스 ル・モンド 2003-02-04
[37] 뉴스 ル・モンド 2007-05-18
[38] 기타 訳注:元のフランス語版に註が欠如
[39] 뉴스 Kouchner veut toujours participer à un gouvernement d'union nationale http://tempsreel.nou[...] Nouvel observateur誌 2006-12-28
[40] 뉴스 Assez de l'esprit sectaire ! http://www.lejdd.fr/[...] Le Journal du dimanche誌 2007-04-15
[41] 뉴스 クシュネル外相、8月に辞意=大統領顧問から「屈辱」と抗議-仏 http://www.jiji.com/[...] 201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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