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황책
1. 개요
부역황책은 명나라 홍무제 14년(1381년)에 처음 작성된 호적 및 조세 관련 장부이다. 각 호의 인구, 재산, 직업 등과 세금 정보를 기록하여 10년마다 작성되었으며,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 분산 보관되었다. 호적대장과 조세대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국자감 학생들이 작성에 동원되었다. 난징에 보관되던 황책은 청나라 점령 시 소실되었으나, 지방에서 보관되던 일부가 발견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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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
홍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은 14세기 중반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도 한산동과 유복통 등이 주도하여 부패한 정치와 자연재해로 피폐해진 민심을 기반으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고려 침입과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에 영향을 주었다. -
명나라 -
자금성
자금성은 명, 청나라 황제들이 거주했던 베이징의 거대한 궁궐로, 황실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며 현재 고궁박물원으로 개장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중국의 제도사 -
녹영군
녹영군은 청나라가 한족 군인 중심으로 창설한 군대로, 삼번의 난을 거치며 핵심 군사력으로 부상했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신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해체되었으며 청나라 군사력 변화와 흥망성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
중국의 제도사 -
이갑제
이갑제는 명나라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및 세금 징수 제도로, 110호 단위로 백성을 편성하여 납세와 노역을 담당하게 했으며, 경제 변화로 인해 한계에 직면하여 일조편법으로 대체되었다.
2. 작성 과정
1381년에 처음으로 작성되어 종전의 호첩(戶帖)을 대체하였다. 황책에는 각 호(戶)에 속한 가족의 적관(籍貫)·인구(人口)·성명·연령·재산·직업 등을 기입하였다. 모두 4부의 장부를 작성하여, 1부는 현(縣)에, 1부는 부(府)나 주(州)에, 1부는 포정사(布政司)에 보관하고, 마지막 1부는 중앙의 호부에 보냈다. 호부에서는 이를 남경(南京)의 후호(後湖) 가운데 5개의 섬에 위치한 창고에 나눠 보관했는데, 그 표지를 황색 종이로 했기 때문에 황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과거의 왕조들이 성인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과 달리 황구(黃口)를 모두 포함시켰기 때문에 황책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현과 부·주, 포정사에서 보관하는 장부는 푸른색 종이를 표지로 했다.
황책 작성 과정에는 국자감의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1381년 처음 조사를 시행하였을 때 국자감 학생 50명을 동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후로 장부를 접수·분류·검토·보관하는 과정에 국자감 학생을 사용하였다. 1391년에 두 번째 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국자감생의 수는 1,2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외에도 잡노동에 사용된 인력을 포함하면 조사가 시행된 해에 후호에서 작업하던 인원은 모두 1,400명 정도였다. 1381년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농촌을 부흥시키고 조세 기반을 확립하고자 호적대장 겸 조세대장으로 전국에 일제히 부역황책을 작성하게 했다. 그 목적은 유민을 호적에 등록하여 조세를 부담시키는 것이었다. 표지가 노란색이었기 때문에 "부역황책"이라고 불렸다. "부(賦)"는 농작물 현물 납부를 의미하고, "역(役)"은 노동력 부담을 의미한다.
3. 내용 구성
1381년에 처음으로 작성된 부역황책은 이전의 호첩(戶帖)을 대체하였다. 부역황책은 10년마다 작성되었으며, 각 호(戶)에 속한 가족 구성원의 정보와 재산, 직업 등을 기록했다. 모두 4부의 장부가 작성되었는데, 1부는 현(縣)에, 1부는 부(府)나 주(州)에, 1부는 포정사(布政司)에 보관하고, 나머지 1부는 중앙의 호부(戶部)에 보냈다. 호부에서는 난징(南京)의 후호(後湖)에 있는 5개의 섬에 위치한 창고에 이를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표지가 황색이었기 때문에 황책이라고 불렀다. 또한, 과거 왕조들이 성인 남성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과 달리 황구(黃口)를 모두 포함시켰기 때문에 황책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현과 부·주, 포정사에서 보관하는 장부는 푸른색 종이를 표지로 사용했다.
황책 작성 과정에는 국자감(國子監)의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1381년 처음 조사를 시행할 때 국자감 학생 50명이 동원되었고, 이후 장부 접수, 분류, 검토, 보관 과정에 국자감 학생이 사용되었다. 1391년 두 번째 조사에서는 국자감생의 수가 1,200명으로 늘었다. 잡역에 동원된 인력까지 포함하면 조사 시행 해에 후호에서 작업하던 인원은 모두 1,400명 정도였다.
1381년 태조 홍무제(주원장)는 농촌을 부흥시키고 조세 기반을 확립하고자 호적대장 겸 조세대장으로 전국적으로 부역황책을 작성하게 했다. 이는 유민을 호적에 등록하여 조세를 부담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부역황책의 "부(賦)"는 농작물 현물 납부를, "역(役)"은 노동 부담을 의미한다.
3.2. 재산 및 경제 상황
황책에는 각 호(戶)에 속한 가족의 적관(籍貫중국어, 호적에 등록된 출신지), 인구, 성명, 연령, 재산, 직업 등이 기입되었다. 1381년(홍무 14년)에 처음 작성되어 종전의 호첩(戶帖)을 대체하였다. 황책은 유민을 호적에 등록하여 조세를 부담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부(賦)"는 농작물 현물 납부를 의미하고, "역(役)"은 노동 부담을 의미한다.
4. 보관 현황
1381년에 처음 작성된 이후 매 조사마다 6만 권의 기록이 축적되어, 1482년에는 후호의 창고가 285개로 늘어났다. 1612년에는 창고 수가 667개로 증가하고 기록은 153만 권에 달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명나라의 마지막 인구조사 당시에는 700여 개 창고에 170여만 권이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정부는 매번 조사한 모든 기록을 보관했지만, 지방 정부는 보관상의 어려움 때문에 해당 회차의 장부만 보관했다.
4.1. 현존하는 황책
난징에 위치한 황책은 청나라가 점령하였을 때 모두 불에 타 사라졌지만, 지방에서 보관하고 있던 장부 중 일부가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