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작전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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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풍 작전(1995년)은 1995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상대로 벌인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크로아티아가 점령당했던 영토의 18.4%에 해당하는 10,400 평방킬로미터를 탈환하는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작전 결과,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이 발생했으며, 이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지상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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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풍 작전 (1995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명칭 | 오페라치야 올루야 () 오페라치야 올루야 () |
| 시기 | 주 작전: 1995년 8월 4일~7일 후속 작전: 1995년 8월 8일~14일 |
| 장소 |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 관련 분쟁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보스니아 내 무슬림 전쟁 |
| 결과 |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승리 크로아티아가 의 영토를 회복함.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크로아티아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 교전국 2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스릅스카 공화국 서보스니아 자치주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즈보니미르 체르벤코 안테 고토비나 미르코 노라츠 밀렌코 크르냐츠 이반 바사라츠 페타르 스티페티치 루카 잔코 아티프 두다코비치 이제트 나니치 라힘 아데미 |
| 지휘관 2 | 밀레 므르크시치 밀레 노바코비치 슬로보단 코바체비치 스테반 셰보 체도 불라트 밀로라드 스투파르 슬로보단 타르부크 라트코 믈라디치 피크레트 압디치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크로아티아: 130,000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 3,000명 |
| 병력 2 | 세르비아 크라이나군(ARSK): 27,000–34,000명 서보스니아 자치주: 4,000–5,000명 |
| 피해 규모 | |
| 사상자 1 | 사망: 174–211명 부상: 1,100–1,430명 포로: 3명 |
| 사상자 2 | 사망: 560명 포로: 4,000명 |
| 민간인 사상자 | 세르브계 민간인 사망자: 214명 (크로아티아 주장) – 1,192명 (세르비아 주장) 크로아트계 민간인 사망자: 42명 |
| 난민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출신 세르브인: 150,000–200,000명 서보스니아 자치주 출신 보스니아인: 21,000명 스릅스카 공화국 출신 보스니아인 및 크로아티아인: 22,000명 |
| 기타 사상자 | 유엔 평화유지군: 4명 사망, 16명 부상 |
2. 배경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통나무 혁명이 발생하여, 크닌 주변의 달마티아 배후지와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등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을 중심으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이 수립되었다.[330][331]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크로아티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였다.[332]
1991년 3월, 갈등이 고조되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333]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334][335]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인종 청소를 시작했다.[336]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따르면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살해되었고, 17만 명에서 25만 명에 이르는 크로아티아인과 기타 비세르비아인들이 추방되었다.[337][338]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크로아티아 경찰은 이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고, 이후 크로아티아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344] 그러나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345]
1992년 1월, 밴스 계획이 체결되었으나, 휴전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유엔 보호군(UNPROFOR)이 배치되었다.[348][349]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후퇴하였다.[348]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였지만,[350] 크로아티아군은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종결[351] 및 마슬레니차 작전[352] 등을 통해 일부 지역을 수복하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이 스릅스카 공화국을 선포하고 보스니아 전쟁을 일으켰다.[355] 세르비아 크라이나는 스릅스카 공화국으로부터 제한적인 지원을 받았다.[361][362]
2. 1.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통나무 혁명이라 불리는 반란이 일어났다.[330] 이 반란은 크닌 주변 달마티아 내륙,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등 세르비아계 주민이 많이 사는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331] 이 지역들은 나중에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을 형성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로부터 분리되어 세르비아 공화국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반란군으로 규정했다.[332]1991년 3월, 갈등이 심화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333] 같은 해 6월,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했다.[334]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의 선언에는 3개월간의 유예 기간이 주어졌고, 10월 8일부터 이 결정이 효력을 발휘했다.[335] 이 기간 동안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주민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시작했다. 1991년에는 8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점령한 영토를 탈출했다.[336] 1993년 초까지 세르비아 크라이나에서 대부분의 비세르비아인들이 추방되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따르면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살해되었고, 추방된 크로아티아인과 다른 비세르비아인들의 수는 170,000명에 달하며,[337] 휴먼 라이츠 워치는 250,000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338] 1993년 11월까지 약 400명 이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유엔 보호 지역 남부에,[339] 1,500명에서 2,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북부에 남아 있었다.[340]
크로아티아군 또한 슬라보니아 동부와 서부, 크라이나 일부 지역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벌였지만, 규모는 제한적이었고 세르비아인 희생자는 세르비아군의 크로아티아인 희생자보다 적었다.[341] 1991년에는 70,000명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쫓겨났다.[336] 1993년 10월 유엔난민기구(UNHCR)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지역에서 온 세르비아인 및 기타 비세르비아인 실향민이 247,000명, 크로아티아 나머지 지역에서 온 세르비아인 실향민 및 난민이 254,000명일 것으로 추정했으며, 이 중 87,000명은 유엔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했다.[342]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지원하고 크로아티아 경찰이 이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고, 이후 크로아티아군으로 명칭을 변경했다.[344] 크로아티아 군대의 창설은 9월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345] 1991년 마지막 달 동안 양측은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막사 전투,[346] 두브로브니크 포위전,[347] 부코바르 전투 등이 발생했다. 1992년 1월 크로아티아, 유고 인민군, 유엔 대표들은 밴스 계획을 실행하기로 합의했다.[348]
밴스 계획을 통한 휴전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유엔 보호군(UNPROFOR)이 크로아티아에 배치되어 협정을 유지하고 감독하였다.[349] 크로아티아 분쟁이 참호전으로 발전하면서 전쟁은 교착 상태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에서 새로운 분쟁이 예상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후퇴하였다.[348]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였으나,[350]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이 끝나고 크로아티아군이 진격하면서 일부 지역이 크로아티아 영토로 수복되었고,[351] 마슬레니차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은 약간의 전술적 이득을 얻었다.[352] 크로아티아군의 성공에 맞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육군(ARSK)은 간헐적으로 대포와 미사일로 크로아티아의 여러 마을을 공격하였다.[331][353][354]
2. 2. 통나무 혁명과 세르비아계 크라이나 공화국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통나무 혁명이라고 알려진 반란이 일어났다.[330] 이 반란은 크닌 주변의 달마티아 배후지와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등 세르비아계 주민이 많이 사는 크로아티아 동부 촌락을 중심으로 일어났다.[331] 이 지역들은 나중에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준국가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을 형성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크로아티아로부터 분리되어 세르비아 공화국에 가입할 것을 선언하자 크로아티아 공화국 정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반란군으로 선언하였다.[332]
1991년 3월, 갈등이 고조되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333]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주민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시작하였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따르면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살해당했으며, 추방된 크로아티아인과 다른 비세르비아인들의 수는 170,000명에 이르고,[337] 휴먼 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이 수는 250,000명에 이른다.[338] 1993년 11월까지 약 400명 이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남부 섹터로 알려진 유엔 보호 지역에 남아 있었고,[339] 1,500명에서 2,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북부 섹터에 남아 있었다.[340]
2. 3.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 밴스 계획과 Z-4 계획
국제사회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중재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예로 밴스 계획과 Z-4 계획이 있다.1994년 12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도로 및 철도 연결, 수도 및 가스 공급, 아드리아 송유관 일부 사용 등을 복구하기 위한 경제 협정을 체결했다.[385] 협정의 일부는 이행되지 않았지만, 오쿠차니 근처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영토를 통과하는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과 송유관은 개통되었다.[385] 그러나 1995년 4월 말,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일련의 살인 사건들과[385][386] 이로 인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 간의 무력 충돌[387]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었다.
3. 서막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통나무 혁명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크닌 주변의 달마티아 배후지와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지역 등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촌락을 중심으로 발생했다.[330][331] 이 지역들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을 형성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로부터 분리되어 세르비아 공화국에 가입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크로아티아 정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반란군으로 규정했다.[332]
1991년 3월, 갈등이 고조되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333] 같은 해 6월,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했다.[334]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의 선언에 3개월간 유예 기간이 주어졌고, 10월 8일부터 이 결정이 발효되었다.[335] 이 기간 동안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주민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시작했다. 1991년에는 8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점령한 영토를 탈출했다.[336] 1993년 초까지 세르비아 크라이나에서 대부분의 비세르비아인들이 추방되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따르면,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살해되었고 추방된 크로아티아인과 다른 비세르비아인들의 수는 170,000명에 달했으며,[337] 휴먼 라이츠 워치는 250,000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338] 1993년 11월까지 유엔 보호 지역 남부 섹터에는 400명 이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남아 있었고,[339] 북부 섹터에는 1,500명에서 2,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남아 있었다.[340]
크로아티아군 또한 슬라보니아 동부와 서부 및 크라이나 지역 일부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벌였지만, 규모는 제한적이었고 세르비아인 희생자는 세르비아군의 크로아티아인 희생자보다 적었다.[341] 1991년에는 70,000명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쫓겨났다.[12] 1993년 10월 유엔난민기구(UNHCR)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지역에서 온 세르비아인 및 기타 비세르비아인 실향민이 247,000명, 크로아티아 나머지 지역에서 온 세르비아인 실향민 및 난민이 254,000명일 것으로 추정했으며, 이 중 87,000명은 유엔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했다.[342]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지원하고 크로아티아 경찰이 상황에 대처할 수 없게 되자,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고, 이후 크로아티아군으로 명칭을 변경했다.[344] 크로아티아 군대 창설은 9월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345] 1991년 마지막 달 동안 양측은 막사 전투,[346] 두브로브니크 포위전,[347] 부코바르 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92년 1월, 크로아티아, 유고 인민군, 유엔 대표들은 밴스 계획을 실행하기로 합의했다.[348]
밴스 계획을 통한 휴전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유엔 보호군(UNPROFOR)이 크로아티아에 배치되어 협정을 유지하고 감독하였다.[349] 전쟁은 교착 상태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후퇴하였다.[348]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였으나,[350]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이 끝나고 크로아티아군이 진격하면서 일부 지역이 크로아티아 영토로 수복되었고,[351] 마슬레니차 작전으로 크로아티아군은 약간의 전술적 이득을 얻었다.[352] 크로아티아군의 성공에 맞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육군(ARSK)은 간헐적으로 크로아티아의 여러 마을을 공격하였다.[331][353][354]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1992년 1월 9일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부대원들은 새로운 보스니아 세르비아군 창설을 준비하였다. 이 국민투표는 보스니아 전쟁의 구실로 이용되었다.[355]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은 3월 1일 수도 사라예보 등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고, 다음 날 사라예보와 도보이에서 보스니아 전쟁의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1992년 3월 말엽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은 보산스키브로드를 포격하기 시작하였고,[356] 4월 4일 사라예보가 공격을 받았다.[357] 스릅스카 공화국이 선포된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군으로 명칭을 변경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은 1992년 말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약 70%를 장악하였다.[358] 스릅스카 공화국이 차지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 비율은 1994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359] 원래 보스니아 전쟁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비세르비아인들이 맞붙었지만,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되면서 1992년부터 3파전으로 변하게 되었다.[360] 세르비아 크라이나는 바냐루카에서 이따금 공습을 가하고 크로아티아의 여러 도시를 폭격한 스릅스카 공화국의 지원을 제한적으로 받았다.[361][362]
1994년, 미국, 러시아, 유럽 연합, 유엔은 기존의 밴스 계획을 대체할 새로운 Z-4 계획을 준비했다. 이 계획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자치주 설립을 골자로 했다. 서슬라보니아는 즉시 크로아티아에 반환되고, 동슬라보니아는 유엔 임시 행정 기간을 거쳐 반환될 예정이었다. 1994년 9월, Z-4 계획 초안이 마련되었으나, 데이비드 오웬과 토르발트 스톨텐베르그는 여러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후 오웬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병합하자는 수정안을 냈지만, 클라우스 킹켈 독일 외무부 장관과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94년 10월 1일, 피터 갤브레이스는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에게, 아렌스와 아이데는 밀란 마르티치 세르비아 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이 계획을 알렸다. 주요 내용은 10월 중순 베오그라드와 자그레브 신문에 유출되었다. 투지만은 세르비아 국가 구상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내 비세르비아인 지역에 적용될 위험한 선례를 우려하여 이 계획을 싫어했다.
1995년 플래시 작전 당시 Z-4 계획 재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양측 이견으로 협상은 실패했다. 1995년 6월 28일, 클라우스 킹켈과 에르베 드 샤렛 프랑스 외무부 장관의 회담에서 Z-4 계획 부활이 다시 언급되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의 협상 거부로 무산되었다.
1995년 7월 15일, 크로아티아군은 얀코 보베트코 대신 즈보니미르 체르벤코를 사령관으로 교체했다.[397]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거미 작전을 통해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 복구와[398][399] 비하치 점령을 계획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프라뇨 투지만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1995년 7월 27일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하여 크로아티아군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 파견을 가능하게 했다.[401][402]
1995년 여름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7월 26일, 크로아티아군은 스릅스카 공화국군 후방을 공격하여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고, 7월 28일 보스산스코그라호보를 점령했다.[404] 7월 29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글라모치를 점령했다.[404] 7월 30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전시령을 선포했고,[405] 라트코 믈라디치는 크닌을 방문해 영토 수복을 언급했다.[406] 그러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공격 능력이 없다고 결론지었고,[407]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다.[409]
1995년 7월 30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미국에 크로아티아 공격 중단을 요청했다. 새로운 협상이 예정되었지만, 8월 2일 밀로셰비치는 피터 갤브레이스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갤브레이스는 밀란 바비치에게 크로아티아 조건 수용을 권고했고, 바비치는 토르발트 스톨텐베르그 제안을 수용하여 8월 3일 회담이 열렸다. 제네바 근처 젠호드에서 열린 회담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대표는 밀레 노바코비치, 크로아티아 대표는 이비치 파샬리치가 맡았다. 스톨텐베르크는 7개 타협안을 제시했고, 바비치는 처음에 수락했지만 Z-4 계획에는 유보적이었다. 파샬리치는 크로아티아의 7가지 요구 수용을 요청했지만, 노바코비치는 거절했고, 파샬리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협상 거절을 선언했다.
8월 2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민간방위당국은 탈출 준비를 명령했다.[410] 밀란 바비치는 정부 부처를 도니라파츠로 이동하는 것을 고려했다.[409] 여성과 어린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8월 3일까지 동원을 완료했다.[411]
3. 1. 비하치 포위전과 서구의 개입
1994년 11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의 통제 하에 있던 비하치가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스릅스카 공화국에게 점령될 위기에 놓이면서 비하치 포위전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비하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363] 1993년 6월부터 유엔 안전 구역 중 하나였다.[364]
클린턴 행정부는 비하치의 점령이 지역에서의 확전과 큰 인도주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공습을 결정했다. 하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는 보스니아 내 유엔 안전 지역 보호 방법을 두고 이견을 보였다.[363][365] 미국은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대한 공습을 주장했지만, 지상군 투입 의사는 없었다.[366] 반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세르비아인들에 맞선 군사적 충돌을 제안하는 것에 자유로울 수 있어도, 그러한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 열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367]
특히 1994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어떠한 군사 개입에도 반대했고,[368]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 역시 세르브계에 공격을 가할 경우 보스니아에 파견된 유엔 보호군과 영국군이 보복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 개입을 반대했다.[369] 1995년 5월 자크 시라크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가 영국 정부에 압박을 넣으면서,[370]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에 맞선 공습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기조도 달라지게 되었다.[371]
한편 크로아티아군은 비하치의 함락에 대해 전략적인 중요성이 없다고 부정했으나, 크로아티아군 참모총장 얀코 보베트코는 크로아티아의 전쟁 수행 능력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비하치의 함락 가능성을 고려했다.[372]

이와 더불어 워싱턴 협정이 체결되어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끝남에 따라, 1993년 2월 클린턴 행정부의 군사 계획[373]을 반영한 미국 정부는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를 통해 크로아티아에 미국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다.[374][375]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매체 및 자료에 따르면,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는 크로아티아군에 군사 교리 자문, 작전 시나리오 구상, 미국 인공위성을 통한 지리 정보 제공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374][376][377] 미국 정부와 크로아티아 정부 그리고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 모두 이를 부정하고 있다.[378][379] 1994년 11월 미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무기 제재를 취하했으며,[380] 이에 따라 보스니아 내부의 크로아티아군은 크로아티아를 통해 무기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381]
3. 2. Z-4 계획
1994년 미국, 러시아, 유럽 연합(EU) 및 UN은 UNPROFOR를 도입한 반스 계획을 대체하려 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다수 지역에 상당한 자치를 부여하는 Z-4 계획을 수립했다.[60]10월에 언론에 계획 초안 내용이 유출되는 등 계획 수정이 수없이 이루어졌고 조정되지 않은 변경이 빈번하게 발생한 후, Z-4 계획은 1995년 1월 30일에 제시되었다. 크로아티아와 RSK 모두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RSK가 이 계획을 수락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지만, 프라뇨 투지만은 RSK를 위해 최종 결정을 내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61] 코소보에서 정치적 합의의 선례를 세울 것을 우려하여 이 계획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다.[60] RSK는 계획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수락하는 것조차 거부했다.[62]
1995년 5월 플래시 작전 당시 Z-4 계획을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측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측의 이견으로 인해 양측의 협상은 실패했고, 5월 Z-4 계획 입안 시도는 붕괴되었다. 하지만 1995년 6월 28일 클라우스 킹켈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 에르베 드 샤렛의 회담을 통해 Z-4 계획의 부활이 다시 언급되었다. 킹켈과 샤렛은 휴전을 시행하기 위해 분리 구역을 설정하고, 세르비아계의 외부 국경을 감시하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의 안전을 위한 구체적인 보장을 제공하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 간의 경제 협력을 통해 신뢰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
3. 3. 크로아티아군의 진격
크로아티아군은 1994년 워싱턴 협정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과 함께 전력을 크게 강화했다. 양국은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무기로 재정비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사 훈련 지원을 받았다.
양군은 세르비아인 세력보다 짧은 연락선을 가진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우위는 1995년 서슬라보니아에서 벌어진 플래시 작전에서 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인 지배 지역을 빠르게 제압하는 데 기여했다. 세르비아인 세력은 자그레브 로켓 공격으로 보복했으나, 이는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다.[366]
1995년 7월,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군은 합동으로 글라모치, 보산스코그라호보, 리브노 서쪽 마을들을 점령했다. 이로써 보스니아 영내 세르비아인 지역에서 크라이나 수도 크닌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가 차단되었고, 크닌은 세 방향에서 포위되는 상황에 놓였다.
한편, 크라이나 세르비아인군은 스릅스카 공화국군 및 피크레트 압디치가 이끄는 서보스니아 자치주와 함께 비하치를 소멸시키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비하치는 1992년부터 포위되어 4만 명의 보스니아인 난민이 고립된 지역이었다. 이는 스레브레니차 학살 직후의 일로, 국제 사회는 스레브레니차의 비극이 비하치에서 재현될 것을 우려했다.[363]
1995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크로아티아군은 크라이나 본토 및 동 슬라보니아 전선을 따라 대규모 군대를 배치했다.
3. 4. 1995년 여름의 상황
1994년 11월, 스릅스카 공화국군(VRS)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 통제 하의 비하치를 점령 직전까지 몰고 가면서 비하치 포위전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비하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363] 1993년 6월부터 유엔 안전 구역 중 하나였다.[364]클린턴 행정부는 비하치 점령이 전쟁 확전과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안전 지역 보호 방법을 두고 이견을 보였다.[363][365] 미국은 공습을 주장했지만 지상군 투입은 꺼렸고,[366]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 개입에 반대했다.[367] 특히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군사 개입에 반대했으며,[368] 존 메이저 영국 총리도 보복 공격을 우려해 반대했다.[369] 1995년 5월 자크 시라크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공습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기조가 달라졌다.[370][371]
크로아티아군 참모총장 얀코 보베트코는 비하치 함락 가능성이 크로아티아의 전쟁 수행 능력을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372] 워싱턴 협정 체결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은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MPRI)를 통해 크로아티아에 군사 고문을 파견했다.[374][375] 여러 매체에서 MPRI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나왔지만,[374][376][377] 미국, 크로아티아 정부, MPRI는 이를 모두 부정했다.[378][379] 1994년 11월 미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무기 제재를 중단했고,[380] 크로아티아를 통해 무기를 보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381]
1995년 플래시 작전 당시 Z-4 계획을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양측의 이견으로 협상은 실패했다. 1995년 6월 28일 회담을 통해 Z-4 계획 부활이 다시 언급되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7월 15일, 크로아티아군은 얀코 보베트코 대신 즈보니미르 체르벤코를 사령관으로 교체했다.[397]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거미 작전을 통해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하고[398][399]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과 1995년 7월 27일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했다.[401] 이 협정으로 크로아티아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402]
1995년 여름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7월 26일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고, 7월 28일 보스산스코그라호보를 점령했다.[404]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7월 29일 글라모치를 점령했다.[404] 7월 30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전시령을 선포했고,[405] 라트코 믈라디치 스릅스카 공화국군 총사령관도 영토 수복을 언급했다.[406] 그러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공격 능력이 없다고 결론지었다.[407] 세르비아 크라이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대한 공포가 퍼져 나갔다.[409]
1995년 7월 30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미국에 크로아티아의 공격 중단을 요청했다. 새로운 협상이 예정되었지만, 8월 2일 밀로셰비치는 피터 갤브레이스 미국 대사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갤브레이스는 밀란 바비치에게 크로아티아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고, 바비치는 토르발트 스톨텐베르그의 제안을 수용하여 8월 3일 회담이 열렸다. 제네바 근처 젠호드에서 열린 회담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대표단은 밀레 노바코비치 소장이, 크로아티아 대표단은 이비치 파샬리치가 맡았다. 스톨텐베르그는 7개 타협안을 제시했고, 바비치는 처음에 수락했지만 Z-4 계획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파샬리치는 노바코비치에게 크로아티아의 7가지 요구를 수용할 것을 요청했지만, 노바코비치는 거절했고, 파샬리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협상을 거절했다고 선언했다.
8월 2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민간방위당국은 탈출 준비를 명령했다.[410] 밀란 바비치는 정부 부처를 도니라파츠로 이동시키는 것을 고려했다.[409] 여성과 어린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8월 3일까지 동원을 완료했다.[411]
3. 5. 협상의 실패와 주민 탈출
Z-4 계획을 통해 크로아티아 내부에 영구적인 세르비아계 자치주가 설립될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60] 그러나 이 계획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양측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이 계획을 수락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는 아예 계획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62]1995년 5월 섬광 작전 당시 Z-4 계획을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양측의 이견으로 인해 협상은 실패했다.[65] 1995년 6월 28일, 클라우스 킹켈 독일 외무부 장관과 에르베 드 샤렛 프랑스 외무부 장관의 회담을 통해 Z-4 계획 부활이 다시 언급되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171]
1995년 여름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맞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409]
1995년 8월 4일 오후 4시 45분,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크닌, 벤코바츠, 오브로바츠, 드르니시, 그라차츠 지역 주민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436][437] 이 결정은 스르브를 거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향하는 경로를 따랐다.[274]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에 따르면, 마르티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돕도록 설득하기 위해 피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38]
4. 전투 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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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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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군(HV)은 1995년 7월 15일 사령관을 얀코 보베트코에서 즈보니미르 체르벤코로 교체했다.[397] 크로아티아군은 스플리트, 고스피치,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벨로바르의 5개 군단과 특별 경찰 부대로 구성되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을 공격했다.[76]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은 북 달마티아 군단, 리카 군단, 코르둔 군단, 바니야 군단으로 구성되어 크로아티아군에 맞섰다. 이들은 거미 작전을 통해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하려 했다.[398][39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은 제5군단을 중심으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84]
| 세력 | 총 병력 | 주요 부대 | 비고 |
|---|---|---|---|
| 크로아티아 육군 (HV) | 약 130,000명[90][91] | 5개 군단 (스플리트, 고스피치,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벨로바르), 특별 경찰 | |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 (ARSK) | 약 30,000명[90] | 북 달마티아 군단, 리카 군단, 코르둔 군단, 바니야 군단 |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ARBiH) | 약 3,000명[84] | 제5군단 | 비하치 인근 ARSK 진지 담당 |
| 서보스니아 자치주 | 4,000~5,000명[94] | - | 벨리카 클라두샤 남쪽, ARBiH에 맞섬 |
| 군단 | 부대 | 비고 |
|---|---|---|
| 스플리트 군단 | 제4 근위 여단 | 보산스코 그라호보 지역 |
| 제7 근위 여단 | ||
| 제81 근위대대 | 글라모치 지역 | |
| 제1 크로아티아 근위 여단 | 제1 크로아티아 근위 군단의 일부; 보산스코 그라호보 지역의 예비 | |
| 제6 국토 방위 연대 | 시니 지역 | |
| 제126 국토 방위 연대 | ||
| 제144 국토 방위 연대 | ||
| 제142 국토 방위 연대 | 시베니크 지역 | |
| 제15 국토 방위 연대 | ||
| 제113 보병 여단 | ||
| 제9 근위 여단 제2대대 | 자다르 지역 | |
| 제112 보병 여단 | ||
| 제7 국토 방위 연대 | ||
| 제134 국토 방위 연대 | ||
| HVO 제10 포병-로켓 연대 | 스플리트 군단 지원 | |
| 제14 포병 대대 | ||
| 제20 포병 (곡사포) 대대 | ||
| 제5 근위 여단 포병 대대의 부대 | ||
| 제11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
| 고스피치 군단 | 제138 국토 방위 연대 | 사보르스코 지역 |
| 제133 국토 방위 연대 | ||
| 제9 근위 여단 | 제2대대 없이, 고스피치 지역 | |
| 제118 국토 방위 연대 | 고스피치 지역 | |
| 제111 보병 여단 | ||
| 제12 포병 대대 | 고스피치 군단 지원 | |
| 제1 근위 여단 | HV 참모부에 직접 배속; 8월 4~6일 고스피치 군단에 임시 배속 | |
| 카를로바츠 군단 | 제104 보병 여단 | 카를로바츠 지역 |
| 제110 국토 방위 연대 | ||
| 제137 국토 방위 연대 | ||
| 제14 국토 방위 연대 | 오굴린 지역 | |
| 제143 국토 방위 연대 | ||
| 제99 보병 여단 | ||
| 제148 보병 여단 제1대대 | 예비 | |
| 제7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카를로바츠 군단 지원 | |
| 제13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
| 제33 공병 여단 | ||
| 자그레브 군단 | 제17 국토 방위 연대 | 순자 지역 |
| 제103 보병 여단 | ||
| 제151 보병 여단 | ||
| 제2 근위 여단 | 페트리냐 지역 | |
| 제57 보병 여단 | ||
| 제12 국토 방위 연대 | ||
| 제20 국토 방위 연대 | 페트리냐 및 글리나 지역 | |
| 제153 보병 여단 | 글리나 지역 | |
| 제202 포병-로켓 여단 | 자그레브 군단 지원 | |
| 제67 군사 경찰 대대 | ||
| 제252 독립 통신 중대 | ||
| 제502 기계화 NBC전 중대 | ||
| 제33 공병 여단 제1대대 | ||
| 제31 공병 대대 | ||
| 제36 공병-폰툰 대대 | ||
| 제1 내륙 군단 | ||
| 제6 포병 대대 | ||
| 제8 곡사포 포병 대대 (203mm) | ||
| 제16 포병-로켓 여단 제1대대 | ||
| 제5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
| 제15 대전차 포병-로켓 여단 제1대대 | ||
| 벨로바르 군단 | 제125 국토 방위 연대 | 야세노바츠 지역 |
| 제52 국토 방위 연대 | ||
| 제34 공병 대대 | ||
| 제24 국토 방위 연대 | ||
| 제18 포병 대대 | ||
| 제121 국토 방위 연대 | 오쿠차니 지역 |
| 군단 | 부대 | 비고 |
|---|---|---|
| 북 달마티아 군단 | 제75 기계화 여단 | 스플리트 군단 맞은편 |
| 제92 기계화 여단 | ||
| 제1 경보병 여단 | ||
| 제4 경보병 여단 | ||
| 제2 보병 여단 | ||
| 제3 보병 여단 | ||
| 제7 혼성 포병 연대 | ||
| 제7 혼성 대전차 포병 연대 | ||
| 제7 경포병-로켓 연대 | ||
| 특수 부대 군단 | 제2 근위 여단 | |
| 리카 군단 | 제9 기계화 여단 | 고스피치 군단 맞은편 |
| 제18 보병 여단 | ||
| 제50 보병 여단 | ||
| 제103 경보병 여단 | ||
| 제37 보병 대대 | ||
| 제15 혼성 포병 대대 | ||
| 제15 혼성 대전차 포병 대대 | ||
| 제70 보병 여단 | 고스피치 및 카를로바츠 군단 맞은편 | |
| 코르둔 군단 | 제11 보병 여단 | 카를로바츠 군단 맞은편 |
| 제13 보병 여단 | ||
| 제19 보병 여단 | ||
| 제21 국경 비행대 | ||
| 제21 정찰 비행대 | ||
| 제21 혼성 포병 비행대 | ||
| 제75 혼성 대전차 포병 비행대 | ||
| 제75 공병 대대 | ||
| 특수 부대 군단 (제2 근위 여단 제외) | 카를로바츠 군단 맞은편 | |
| 바니야 군단 | 제24 보병 여단 | 자그레브 군단 맞은편 |
| 제33 보병 여단 | ||
| 제31 기계화 여단 | ||
| ARSK 참모 포병 그룹 | ||
| 제26 보병 여단 | 자그레브 및 벨로바르 군단 맞은편 | |
| 스릅스카 공화국군 | 제11 여단 | 스릅스카 공화국 내, RSK 바니야 군단의 우익 |
| 군단 | 부대 | 비고 |
|---|---|---|
| 제5군단 | 제501 산악 여단 | 리카 군단 맞은편 |
| 제502 산악 여단 | ||
| 제505 산악 여단 | 바니야 군단 맞은편 | |
| 제511 산악 여단 |
4. 1. 크로아티아 육군
크로아티아 육군(HV)은 폭풍 작전에 참여한 주력군이었다. 15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이 중 8만 명은 여단 소속, 7만 명은 향토방위연대 소속이었다. 예비 병력으로는 5만 명이 있었고, 25개 여단으로 구성된 제3 예비대가 있었다. 크로아티아 육군은 T-55 전차 280대, M-84 전차 80대, 중화기 800문, 로켓 발사기 45~50문을 보유했다. 또한 MiG-21 "피시베드" 전투기 18기, Mi-8 "힙" 수송 헬리콥터 5기, Mi-24D "힌드" 공격 헬리콥터 12기를 동원했다.[95]크로아티아 육군은 스플리트, 고스피치,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벨로바르의 5개 군단으로 구성되어 작전을 수행했다.[76] 각 군단은 '폭풍-1'부터 '폭풍-4'까지 4개의 작전 계획 중 하나를 할당받았으며, 각 계획은 4~5일이 소요될 예정이었다.[74]
| 군단 | 주요 지휘관 | 담당 지역 | 주요 임무 | 병력 규모 | 상대 세르비아 크라이나 군단 |
|---|---|---|---|---|---|
| 스플리트 군단 | 안테 고토비나 중장 | 작전 지역 최남단, 크닌 주변 | 폭풍-4 (주요 공격) | 30,000명 | 북 달마티아 군단 (10,000명, 슬로보단 코바체비치 소장 지휘) |
| 고스피치 군단 | 미르코 노라크 준장 | 특별 경찰 구역 좌측, 리카 지역 | 폭풍-3 (RSK 양분, ARBiH와 연결) | 25,000명 | 리카 군단 (6,000명, 스테반 세보 소장 지휘) |
| 카를로바츠 군단 | 밀리엔코 크르냐크 소장 | 고스피치 군단 좌측, 오굴린-카를로바츠, 코르둔 지역 | 폭풍-2 (측면 보호, ARSK 병력 고정) | 15,000명 | 코르둔 군단 (4,000명, 벨리코 보사나크 대령, 이후 체도 불라트 대령 지휘) |
| 자그레브 군단 | 이반 바사라크 소장 | 카를로바츠 군단 좌측, 글리나, 페트리냐, 흐르바츠카 코스타이니차 | 폭풍-1 (페트리냐 우회, ARSK 포병 무력화, 순자-흐르바츠카 코스타이니차 공격) | 30,000명 | 바니야 군단 (9,000명, 슬로보단 타르부크 소장 지휘) |
| 벨로바르 군단 | 루카 잔코 소장 | 자그레브 군단 좌측, 우나 강변 | 별도 작전 계획 없음 (8월 2일 공격 참여) | - | 바니야 군단 일부 |
스플리트 군단은 작전의 주 공격인 폭풍-4를 담당했으며, 크닌을 중심으로 한 북 달마티아 군단에 맞섰다.[77] 고스피치 군단은 리카 군단을 상대하며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을 양분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과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다.[81] 카를로바츠 군단은 코르둔 군단에 맞서 측면을 보호하고, 자그레브 군단은 바니야 군단을 상대로 페트리냐를 우회하여 포병을 무력화하는 임무를 수행했다.[84][86] 벨로바르 군단은 8월 2일에 공격에 합류하여 우나 강변 지역을 담당했다.[87]
| 군단 | 부대 | 비고 |
|---|---|---|
| 스플리트 군단 | 제4 근위 여단 | 보산스코 그라호보 지역 |
| 제7 근위 여단 | ||
| 제81 근위대대 | 글라모치 지역 | |
| 제1 크로아티아 근위 여단 | 제1 크로아티아 근위 군단의 일부; 보산스코 그라호보 지역의 예비 | |
| 제6 국토 방위 연대 | 시니 지역 | |
| 제126 국토 방위 연대 | ||
| 제144 국토 방위 연대 | ||
| 제142 국토 방위 연대 | 시베니크 지역 | |
| 제15 국토 방위 연대 | ||
| 제113 보병 여단 | ||
| 제9 근위 여단 제2대대 | 자다르 지역 | |
| 제112 보병 여단 | ||
| 제7 국토 방위 연대 | ||
| 제134 국토 방위 연대 | ||
| HVO 제10 포병-로켓 연대 | 스플리트 군단 지원 | |
| 제14 포병 대대 | ||
| 제20 포병 (곡사포) 대대 | ||
| 제5 근위 여단 포병 대대의 부대 | ||
| 제11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
| 고스피치 군단 | 제138 국토 방위 연대 | 사보르스코 지역 |
| 제133 국토 방위 연대 | ||
| 제9 근위 여단 | 제2대대 없이, 고스피치 지역 | |
| 제118 국토 방위 연대 | 고스피치 지역 | |
| 제111 보병 여단 | ||
| 제12 포병 대대 | 고스피치 군단 지원 | |
| 제1 근위 여단 | HV 참모부에 직접 배속; 8월 4~6일 고스피치 군단에 임시 배속 | |
| 카를로바츠 군단 | 제104 보병 여단 | 카를로바츠 지역 |
| 제110 국토 방위 연대 | ||
| 제137 국토 방위 연대 | ||
| 제14 국토 방위 연대 | 오굴린 지역 | |
| 제143 국토 방위 연대 | ||
| 제99 보병 여단 | ||
| 제148 보병 여단 제1대대 | 예비 | |
| 제7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카를로바츠 군단 지원 | |
| 제13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
| 제33 공병 여단 | ||
| 자그레브 군단 | 제17 국토 방위 연대 | 순자 지역 |
| 제103 보병 여단 | ||
| 제151 보병 여단 | ||
| 제2 근위 여단 | 페트리냐 지역 | |
| 제57 보병 여단 | ||
| 제12 국토 방위 연대 | ||
| 제20 국토 방위 연대 | 페트리냐 및 글리나 지역 | |
| 제153 보병 여단 | 글리나 지역 | |
| 제202 포병-로켓 여단 | 자그레브 군단 지원 | |
| 제67 군사 경찰 대대 | ||
| 제252 독립 통신 중대 | ||
| 제502 기계화 NBC전 중대 | ||
| 제33 공병 여단 제1대대 | ||
| 제31 공병 대대 | ||
| 제36 공병-폰툰 대대 | ||
| 제1 내륙 군단 | ||
| 제6 포병 대대 | ||
| 제8 곡사포 포병 대대 (203mm) | ||
| 제16 포병-로켓 여단 제1대대 | ||
| 제5 대전차 포병-로켓 대대 | ||
| 제15 대전차 포병-로켓 여단 제1대대 | ||
| 벨로바르 군단 | 제125 국토 방위 연대 | 야세노바츠 지역 |
| 제52 국토 방위 연대 | ||
| 제34 공병 대대 | ||
| 제24 국토 방위 연대 | ||
| 제18 포병 대대 | ||
| 제121 국토 방위 연대 | 오쿠차니 지역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 제5군단은 비하치 포위망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5개 산악 보병 여단으로 구성된 약 25,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제5군단은 T-55 전차 15대와 중화기 80문을 보유했다.[96]
4. 2.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
1995년 7월 '95 여름 작전에서 크로아티아군이 승리하면서,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세력은 병참에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되었다. '95 여름 작전으로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의 수도 크닌과 보스니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을 잇는 간선 도로가 크로아티아군에 점령되었다. 크라이나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크라이나 정부의 명령으로 시장은 폐쇄되었다.[297] 또한, 심각한 내부 대립에도 빠졌다.[298]크라이나 세르비아인군(VSK)은 심각한 인원 부족에 시달렸다. 이들이 방어해야 할 전선은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령 크로아티아인 지배 지역에 대해 600km에 달했고, 후방에는 보스니아군이 있는 비하치 비행 지대를 따라 100km에 걸쳐 있었다. 이 전선을 지키는 병력은 55,000명 정도였으며, 이 중 16,000명은 동 슬라보니아 지방 방위에 투입되어, 크라이나 본토를 지키는 병력은 최대 39,000명에 불과했다.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군(VRSK)'''
- 총병력: 40,000명
- 제1예비대: 20,000명
- 제2예비대: 10,000명
- 제3예비대: 10,000명
- 전차
- M-84 주력 전차: 30대
- T-72 주력 전차: 2대
- T-55 전차: 200대
- T-34/85 전차: 수 대
- 장갑 수송차 및 보병 전투차: 160대 (M-60P, M-80A, BTR-50, BRDM-2, BOV APC)
- 야포: 560문
- 다연장 로켓: 28문 (M-63 Plamen, M-77 Oganj, M-87 Orkan)
- 헬리콥터: 18대 (소코 가젤, Mi-8)
- 대공 방어 무기: 360문 (SA-2, SA-7, SA-9, ZSU-57-2, BOV-3, Bofors L/70)
- 항공기: 22대 (소코 G-2, 소코 J-21, 소코 J-20, Utva 66)
| 군단 | 부대 | 비고 |
|---|---|---|
| 북 달마티아 군단 | 제75 기계화 여단 | 스플리트 군단 맞은편 |
| 제92 기계화 여단 | ||
| 제1 경보병 여단 | ||
| 제4 경보병 여단 | ||
| 제2 보병 여단 | ||
| 제3 보병 여단 | ||
| 제7 혼성 포병 연대 | ||
| 제7 혼성 대전차 포병 연대 | ||
| 제7 경포병-로켓 연대 | ||
| 특수 부대 군단 제2 근위 여단 | ||
| 리카 군단 | 제9 기계화 여단 | 고스피치 군단 맞은편 |
| 제18 보병 여단 | ||
| 제50 보병 여단 | ||
| 제103 경보병 여단 | ||
| 제37 보병 대대 | ||
| 제15 혼성 포병 대대 | ||
| 제15 혼성 대전차 포병 대대 | ||
| 제70 보병 여단 | 고스피치 및 카를로바츠 군단 맞은편 | |
| 코르둔 군단 | 제11 보병 여단 | 카를로바츠 군단 맞은편 |
| 제13 보병 여단 | ||
| 제19 보병 여단 | ||
| 제21 국경 비행대 | ||
| 제21 정찰 비행대 | ||
| 제21 혼성 포병 비행대 | ||
| 제75 혼성 대전차 포병 비행대 | ||
| 제75 공병 대대 | ||
| 특수 부대 군단 (제2 근위 여단 제외) | 카를로바츠 군단 맞은편 | |
| 바니야 군단 | 제24 보병 여단 | 자그레브 군단 맞은편 |
| 제33 보병 여단 | ||
| 제31 기계화 여단 | ||
| ARSK 참모 포병 그룹 | ||
| 제26 보병 여단 | 자그레브 및 벨로바르 군단 맞은편 | |
| 스릅스카 공화국군 | 제11 여단 | 스릅스카 공화국 내, RSK 바니야 군단의 우익 | |
4. 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제5군단은 비하치 포위망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후방에 약 3,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84] 1994년 말, 피크레트 아브디치가 이끄는 서보스니아 자치주는 비하치 북서쪽, 동맹국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과 포위망 사이의 좁은 땅을 통치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에 맞서 벨리카 클라두샤 남쪽에 4,000~5,000명의 병사를 배치했다.[9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제5군단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96]
| 군단 | 부대 | 비고 |
|---|---|---|
| 제5군단 | 제501 산악 여단 | 리카 군단 맞은편 |
| 제502 산악 여단 | ||
| 제505 산악 여단 | 바니야 군단 맞은편 | |
| 제511 산악 여단 |
1995년 7월,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군은 합동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도시 글라모치 및 보산스코 그라호보, 리브노 서쪽의 마을들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보스니아 영내 세르비아인 지역에서 크라이나의 수도 크닌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양국 정부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크라이나는 중요한 보급로가 끊긴 데다가 수도 크닌이 세 방향에서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이 되었다.
크라이나 세르비아인군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세력(스릅스카 공화국군) 및 보스니아인 반란 세력(피크레트 아브디치가 이끄는 서보스니아 자치주)과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가 지배하는 비하치 월경지를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비하치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비하치는 1992년 이후 양 세르비아인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된 월경지가 되었고, 4만 명의 보스니아인 난민이 도망쳐 있었다. 이는 비하치와 마찬가지로 수년 동안 세르비아인 세력에 둘러싸여 있던 스레브레니차가 7월 11일 세르비아인 세력에 점령되어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발생한 직후의 일이었다. 국제 사회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비하치에서 재현될 것을 우려했다.
5. 작전

1995년 8월 4일 오전 5시, 크로아티아 공군의 공습과 함께 정찰 및 파괴 부대의 협동 공격으로 폭풍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지휘, 통제 및 통신을 교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33] 유엔 크로아티아 신뢰회복활동(UNCRO)으로 알려진 유엔 평화 유지군은 공격 3시간 전에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인 흐르보예 샤리니치를 통해 통보받았다.[434] 각 크로아티아군 군단은 공격 경로에 있는 UNCRO 구역에 정보를 통보하고, 정보 수신에 대한 서면 확인을 요청했다. UNCRO는 이 정보를 세르비아 크라이나에 전달했으며,[99] 이는 전날 유고슬라비아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받은 경고를 확인하는 것이었다.[100]
- '''남쪽 전선'''
스플리트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오전 5시에 제7근위여단은 포병 지원을 받으며 보산스코그라호보에서 크닌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전투단(북달마티아 군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경찰로 구성)에 맞서 제7근위여단은 이날의 목표를 달성하고 제4근위여단의 공격을 지원했다. 두 여단의 좌측에 있는 HV 신즈 작전단이 공격에 합류했고, 제126근위여단은 신즈-크닌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우니슈타를 점령했다. 144여단과 제6근위여단도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밀어냈다. 시베니크 작전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의 제2보병여단의 일부와 교전했다. 제142근위연대와 제15근위연대는 크르카와 드르니시 사이에서 약간 진격했고, 제113보병여단은 좌익에서 치스타벨리카로 진격했다. 자다르 작전단에서는 제134근위연대(제2대대 제외)가 진격에 실패했으나, 제7근위연대와 제112보위여단은 벤코바츠에서 ARSK 제92기동여단과 제3보병여단에 맞서 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벨레비트에서는 제7근위연대 중대와 증강된 제9근위여단 제2대대, 제134근위연대 제2대가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브로바츠-스베티록 도로 확보를 위해 충분히 진격했다. 오후 4시 45분,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역 주민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436][437]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은 마르티치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돕도록 설득하기 위해 대피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438] 대피는 코둔 지역을 제외한 남북 지역 전체로 확대되었다.[439] 저녁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주요 참모진은 크닌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440] 스르브[436]로 이동했다.
8월 4일과 5일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가 제75기동여단 대대에게 크닌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을 때 크로아티아 육군은 크닌을 향해 진격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은 크로아티아 육군 제4기동여단이 크닌을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제7기동여단의 우측을 보호하면서 점점 더 조직화되지 않았다. 후자는 거의 저항을 받지 못했고 오전 11시에 마을에 진입했다. 이반 체르막 중장은 새로 창설된 크로아티아 크닌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신 작전단은 목표를 완수하여 벨리키코자크와 브를리카를 점령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경여단이 분해되어 크닌으로 후퇴하고 나중에 리카로 후퇴하면서 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오후 8시에 시베니크 작전단은 폴리치니크(제113여단), 제브르스케(제15향토방위연대)로 진격했고 드르니시(142향토방위연대)를 점령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은 제3보병단과 제92기동여단과 함께 스르브와 보산스키페트로바츠로 후퇴했고, 자다르 작전단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제7향토방위연대는 벤코바츠를 점령했고, 제112여단은 스밀치치로 진입했고 제9기동여단 부대는 오브로바츠에 도달했다.[446]
8월 6일,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이 크닌을 방문했을 때, 크로아티아 육군은 오브로바츠, 벤코바츠, 드르니시, 브를리카 주변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452]
제1 크로아티아 근위 여단(1. hrvatski gardijski zdrug - HGZ)은 다음 날 북쪽으로 진격할 제4, 제7, 제9 근위 여단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크닌 지역에 도착했다. 스플리트 군단 사령부도 크닌으로 이동했다.[463]
8월 8일, 제4 및 제7근위여단, 제9근위여단 제2대대, 크로아티아 제1근위여단은 리치카칼드르마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경까지 북쪽으로 진격한 뒤, 오후 8시까지 도니라파츠와 스르브 지역에 남아있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을 제거하였고,[469] 이로서 스플리트 군단의 폭풍 작전 목표는 모두 달성되었다.[463]
- '''북쪽 전선'''
크로아티아 특수 경찰은 오전 5시에 벨레비트 산을 통과하기 위해 말리알란 고개로 진격, 세르비아 크라이나 리카 군단의 제4경전여단과 제9기동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고개는 오후 1시에, 스베티록 마을은 오후 5시에 점령되었다. 특수경찰은 말리 알란 너머로 진격하여 오후 9시에 더 많은 저항에 부딪친 후 오전 5시까지 포격을 가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9기동여단은 벨레비트 산에서 쫓겨난 후 우드비나로 철수했다. 아침에 특수경찰은 로비나크, 그라차크, 메다크를 점령했다.[441]
고스피치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는 제138향토방위연대와 제1근위여단 제1대대가 아침에 말라카펠라 지역에서 동쪽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0보병여단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나머지 제1근위여단은 자정 무렵 합류했다. 제133향토방위연대는 오토차츠 동쪽의 브르호빈 방면으로 공격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50보병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03보병여단의 일부를 포위하려 했다. 연대가 진격했지만, 그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연대의 오른쪽 측면에서 크로아티아 제128여단은 제8향토방위연대의 제3대대와 함께 진격하여 브르호빈-코레니차 도로를 통과했다. 제9근위여단의 나머지 대부분인 크로아티아 제118향토방위연대와 제111보병여단은 고스피치와 리치키오시크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였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8보병여단의 매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고스피치 군단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했다.[442]
크로아티아 카를로바츠 군단 작전책임구역의 오굴린 지역에서는 제143향토방위연대 사보르스코 중대가 증원 부대로 파견된 제99여단이 오전 5시에 플라슈키를 향해 이동했지만 병력은 멈춰 있었고 오후 6시에는 혼란 상태로 돌아갔다. 제143향토방위연대는 요시프돌에서 플라슈키를 향해 진격하면서 지뢰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요소들은 제14향토방위연대와 연결되어 바릴로비치를 거쳐 슬룬을 향해 진격했다. 카를로바츠 시 근처에서 제137향토방위연대는 8월 3일에서 4일 사이의 자정 경에 4개 정찰대를 배치했고, 뒤이어 오전 5시에 포병을 준비한 뒤 코라나강을 도하했다. 진격 중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3보병여단의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렸지만 그 날이 끝날 때까지 교두보는 안정적이었다. 제137향토방위연대의 중대가 증원부대로 파견된 제110향토방위연대는 카를로바츠에서 보이니치와 슬룬으로 이어지는 남쪽 도로의 동쪽으로 진격했는데, 그곳에서 적의 심한 저항을 맞닥뜨렸고 지뢰로 인해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더 이상의 진격할 수 없었다. 제137향토방위연대와 제104여단의 부속 중대는 연대의 측면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제104여단은 오전 5시에 쿠파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오전 8시에 출발 지점으로 후퇴했고, 그때 110향토방위연대가 설립한 교두보로 이동했다. 제99여단의 중대는 다음날 작전을 위해 제143향토방위연대에 부속되었고, 250명의 전투단은 여단에서 제거되어 카를로바츠 군단에 직접 예속되었다.[443]
자그레브 군단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육군은 쿠파강을 가로질러 제20향토방위연대와 제153여단을 사용하여 포쿱스코 근처와 글리나 쪽 두 지점으로 이동했다. 두 지점 모두 교두보를 구축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반격하면서 대부분의 부대는 후퇴해야 했다. 제153여단의 대대와 제20향토방위연대의 일부만이 그들의 자리를 지켰다. 크로아티아군의 진격으로 글리나의 중요한 도로가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420]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는 특수부대 제2기갑여단에게 슬룬에서 교두보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444] 크로아티아 제2근위여단과 제12향토방위연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1기갑여단으로부터 페트리냐를 신속하게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페트리냐에서 남쪽으로 6km 에서 7km 떨어진 곳까지의 공격 축을 포함하는 원래 계획은 바사라츠의 지시에 따라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수정되었다.[413] 우측에 있던 연대는 곧 지뢰밭에 의해 저지되어 후퇴했고, 반면 제2기갑여단의 대부분은 중대장과 5명의 병사를 잃은 후 사기가 흔들릴 때까지 전진했다. 제2기갑여단의 나머지는 제12향토방위연대, 제5대전차포병대대 및 제31공병 대대의 부대원들로 보강된 제2대대가 공격의 좌측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제2전술단을 형성했다. 제2전술단은 페트리냐에서 짧은 거리에 있는 모슈체니차로 진격했지만, 제2대대장과 6명의 병사가 사망한 후 진격은 중단되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1기갑여단도 당황했지만 증원을 받아 방어부대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육군 제57여단은 페트리냐-흐르바츠카코스타이니차 도로에 도달할 목적으로 페트리냐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여단장이 사망한 지뢰밭에 부딪혔고, 제101여단이 후방으로 가는 동안 적의 포격을 받았다. 그날 오후, 제151여단의 별도 공격도 실패했다. 크로아티아 제103여단은 순자-시사크 철도로 진격했지만, 거센 포화를 받으며 퇴각해야 했다. 자그레브 군단은 첫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부족한 인력 때문이었고, 그 결과 군단은 제102여단과 제1 및 제21향토방위연대의 동원을 요청했다. 제2보위여단은 이전에 이바니치그라드에 예비되어 있던 제149여단의 제1대대가 증원부대로 파견되었다.[444]
벨로바르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제125향토방위연대의 2개 대대가 야세노바츠 근처의 사바강을 건너 크로아티아 육군 부대를 뒤쫓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흐르바츠카두비카를 향해 진격했다. 2개 대대 뒤를 이어 제52 향토방위연대의 1개 대대, 제265정찰중대,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24향토방위연대 전투단이 뒤따랐다. 제52향토방위연대의 정찰 소대가 사바강을 건너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들어간 뒤 2개 보병 중대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후 보산스카 두비차–그라디슈카 도로를 철거하고 크로아티아 땅으로 돌아갔다. 벨로바르 군단 부대는 해가 지기 전에 흐르바츠카 두비카 외곽에 도달했다. 그날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주민들은 흐르바츠카 두비카 마을을 버린 뒤, 사바강을 건너 남쪽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도망쳤다.[445]
1995년 8월 6일,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합류한 크로아티아 제1 방위 여단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제5군단은 슬루니 부근까지 북쪽으로 진격하여 벨리카클라두샤 근처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국경에 도달했다. 이 기간 동안 페트리냐, 코스타이니차, 오브로바츠, 코레니차, 슬루니, 브루브노, 브르호비네, 플라슈키, 체팅그라드, 플리트비체, 글리나는 모두 이날 안에 제압되었다. 이 중에서 강한 저항이 있었던 곳은 글리나(시사크 남쪽) 마을뿐이었다.[452] 크로아티아 정부의 통치하에 있는 카를로바츠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군에 의해 보복적으로 포위되었고, 보스니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의 항공기가 쿠티나의 화학 공장을 공격했다.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크닌에 개선 입성했으며, 크닌 언덕 위의 요새에는 거대한 크로아티아 국기가 펄럭였다.[452]
8월 8일, 보이니치를 점령한 후, 카를로바츠 군단 부대의 대부분은 작전 지역(AOR)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135] 제2 근위 여단 병력은 드보르 남서쪽의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달하여 도시의 완전한 통제를 위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으며, ARBiH 제5 군단과 연결되었다.[136]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이 군사 작전 중단을 명령한 8월 8일 오후,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은 항복을 받아들였다. 항복 조건 협상은 같은 날 오후 1시 20분 우크라이나 유엔 크로아티아 신뢰회복활동(UNCRO) 군대 지휘소에서 글리나에서 열렸으며, 항복 문서는 오후 2시에 토푸스코에서 서명되었다. 크로아티아는 페타르 스티페티치 중장이, 세르비아 크라이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 사령관 불라트와 내무부 장관 토소 파이치가 대표했다. 항복 조건은 다음 날 장교의 보조 무기를 제외한 무기 인도와 토푸스코에서 글리나, 시사크,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를 통해 세르비아로의 사람 대피를 명시했으며, 이는 크로아티아 군대와 민간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137]
8월 9일, 특수 경찰은 4일 만에 150km 이상을 걸어간 후 크로아티아군(HV)에 자신의 위치를 넘겨주었다.[129] 제1 근위 여단은 다른 HV 부대의 뒤를 이어 브르긴모스트에 진입했다. 제110 및 제143 국토방위 연대는 브르긴모스트와 라시냐 주변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제137 국토방위 연대는 보이니치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으며, 제14 국토방위 연대는 슬루니, 체팅그라드, 라코비차 지역에서 동일한 작전을 수행했다.[138] HV는 민간인이 대피를 완료한 직후 늦은 저녁에 드보르를 확보했다. 많은 HV 국토방위 부대가 나중에 추가 소탕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136]
8월 10일, HV 제57 여단은 그보즈단스코 남쪽의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달했으며, 제2 근위 여단 병력은 드보르에 도달했고, 제12 국토방위 연대는 크로아티아 국경의 드보르 바로 남쪽에 있는 마티예비치를 점령했다. 자그레브 군단은 작전 지역(AOR)의 전체 국경이 확보되었고 모든 폭풍 작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고했다. 바노비나에서의 소탕 작전은 8월 14일까지 지속되었으며, 특수 경찰 부대가 즈린스카 고라와 페트로바 고라 산에서 작전에 합류했다.[139]
- '''공군 작전'''
크로아티아 공군(CAF)은 1995년 8월 4일, MiG-21 17대, 공격 헬리콥터 5대, 수송 헬리콥터 9대, 수송기 3대, 정찰기 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40] 폭풍 작전 첫날, MiG-21 13대는 고스피치와 자그레브 군단 작전 지역 내 6개 목표물을 파괴하거나 무력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대는 심각한 피해를, 3대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같은 날, Mi-8 3대가 의료 후송에 사용되었다.[140] 미국 해군 EA-6B와 F/A-18은 거부 비행 작전의 일환으로 순찰하던 중 SAM 레이더가 제트기에 고정되자 우드비나와 크닌에 있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지대공 미사일(SAM) 기지를 공격했다.[141]
8월 5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군은 바냐루카 근처의 자루자니 비행장으로 철수를 시작하여 그날 이전을 완료했다. 같은 날, 크로아티아 공군은 MiG-21 11대를 배치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전역의 통신 시설과 저장 시설, 기타 5개의 군사 기지를 공격했다. 또한 Mi-24를 배치하여 시사크 인근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기갑 부대를 공격하고, Mi-8 5대를 배치하여 사상자를 수송하고 병력과 화물을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공군 소속 MiG-21 5대가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다음 날, 제트기는 카를로바츠와 글리나 근처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지휘소, 다리 및 최소 4개의 다른 목표물을 공격했다. Mi-24는 슬룬 지역에 배치되어 세르비아 크라이나 탱크를 공격했으며, Mi-8 3대는 부상자와 물자를 수송했다. MiG-21 2대는 이바니치 그라드 상공에서 공중 경계를 펼치며 보스니아 세르비아 전투기 2대를 요격하려 했지만, 해당 지역의 안개와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실패했다.[140]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 공군은 쿠티나의 페트로케미야 화학 공장을 공격했다.[177]
8월 7일, 스릅스카 공화국 공군 제트기 2대가 사바 강 바로 북쪽, 즉 해당 지역의 국제 국경선인 노바 그라디슈카 지역의 마을을 공격했다.[144] 크로아티아 공군은 보산스키 페트로바츠 근처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지휘소, 저장 시설 및 여러 대의 탱크를 폭격했다.[140] 크로아티아 공군 제트기는 또한 보산스키 페트로바츠 근처의 세르비아 난민 대열을 공격하여 어린이를 포함한 9명이 사망했다.[145] 크로아티아는 민간인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146] 8월 8일, 크로아티아 공군은 작전에서 마지막 전투 임무를 수행하여 보산스키 노비와 프리예도르 사이의 탱크와 장갑차를 공격했으며, MiG-21 2대가 손상되었다.[140] 같은 날, 크로아티아 비행장에 배치된 UN 군사 옵서버는 크로아티아 공군이 드보르 지역에서 군사 목표물과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주장했으며,[177] 난민 대열이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중화기와 대량의 탄약을 수송하는 것과 섞여 있었다.[147]
폭풍 작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공군은 총 67회의 근접 항공 지원, 3회의 공격 헬리콥터 임무, 7회의 정찰 임무, 4회의 전투 항공 순찰 및 111회의 수송 헬리콥터 임무를 수행했다.[140]
- '''기타 합동 작전'''
폭풍 작전과 연계하여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은 여러 합동 작전을 펼쳤다.
피닉스 작전 (Operacija Fenix): 동슬라보니아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군단이 수행한 작전이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또는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서진을 저지하고, 부코바르 주변 ARSK 점령 지역에 대한 반격을 목표로 했다.
마에스트랄 작전: 크로아티아 남부에서 트레비네와 코토르만 주변에 주둔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군 헤르체고비나 군단과 유고슬라비아군으로부터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이다.
이 외에도, 1995년 여름 작전, 거미 작전, 스플리트 협정 등이 폭풍 작전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1995년 여름 작전은 비하치 점령을 막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가 참여하여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맞섰다. 스플리트 협정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간의 상호방위협정으로,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하였다.
피닉스 작전Operacija Fenix|links=nohr로 명명된 피닉스 작전은 동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군단이 수행했다. 이 군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또는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고, 부코바르 주변의 ARSK 점령 지역으로 반격을 가하는 임무를 맡았다. 오시예크 군단은 제3 근위 및 제5 근위 여단, 그리고 6개의 다른 크로아티아군(HV) 여단과 7개의 국토 방위 연대를 지휘했다. 또한 Mi-24 공격 헬기 편대의 일부를 포함하여 HV 참모부에 직접 종속된 전문 군단급 부대의 형태로 추가 지원이 제공되었다.[148]
크로아티아군과 이 지역의 ARSK 제11 슬라보니아-바라냐 군단 사이에는 포격과 소형 화기 공격이 오갔지만, 큰 공격은 발생하지 않았다.[148] 1995년 8월 5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군의 공습 3차례와 빈코브치 북동쪽의 누슈타르를 겨냥한 보병 및 전차 공격이 결합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합동 작전이 개시되었다.[152] 폭풍 작전으로 유고슬라비아 육군은 다수의 포병, 전차 및 보병을 동부 슬라보니아 근처의 국경 지역으로 배치했지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53]
마에스트랄 작전크로아티아 남부에서 크로아티아군은 트레비네와 코토르만 주변에 주둔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군 헤르체고비나 군단과 유고슬라비아군으로부터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작전명 마에스트랄 작전에는 제114, 제115, 제163 여단, 제116, 제156 국토방위 연대, 제1 국토방위 대대(두브로브니크), 제16 포병 대대, 제39 공병 대대 및 이동식 해안 포병 포대가 배치되었다. 8월 8일 폭풍 작전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한 제144 여단이 이 지역을 증원했다. 크로아티아 공군은 스플리트에 주둔한 MiG-21 두 대와 Mi-24 두 대를 작전 마에스트랄에 투입했다. 크로아티아 해군은 코르출라, 브라치 및 흐바르 해병대 분대와 미사일정, 소해정, 대잠수함전 함정 및 해안 포병을 배치하여 작전을 지원했다. 그 기간 동안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은 포병만을 사용하여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간헐적으로 공격했다.[154]
1994년 11월,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스릅스카 크라이나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의 통제 하에 있던 비하치를 점령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비하치 포위전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비하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고,[363] 1993년 6월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설립된 6개의 유엔 안전 지역 중 하나였다.[364]
클린턴 행정부는 비하치 점령이 지역에서의 확전과 큰 인도주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공습을 결정했다. 하지만 보스니아의 유엔 안전 지역을 보호하는 방법을 두고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363][365] 미국은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대한 공습을 주장했지만 지상군을 투입할 의사는 없었다.[366] 반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세르비아인들에 맞선 군사적 충돌을 제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어도 그러한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 열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367] 특히 1994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어떠한 군사 개입에도 반대하고 있었
5. 1. 1995년 8월 4일
폭풍 작전은 1995년 8월 4일 오전 5시에 크로아티아 공군의 공습과 함께 정찰 및 파괴 부대가 협동 공격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지휘, 통제 및 통신을 교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433] 유엔 크로아티아 신뢰회복활동(UNCRO)으로 알려진 유엔 평화 유지군은[98]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인 흐르보예 샤리니치가 UNCRO 사령관인 프랑스 육군의 베르나르 장비에르 장군에게 전화하여 공격 3시간 전에 통보받았다.[434] 또한, 각 크로아티아군 군단은 공격 경로에 있는 UNCRO 구역에 정보를 통보하고, 정보 수신에 대한 서면 확인을 요청했다. UNCRO는 이 정보를 세르비아 크라이나로 전달했으며,[99] 이는 전날 유고슬라비아군 참모총장으로부터 받은 경고를 확인하는 것이었다.[100]
- '''남쪽 전선'''
스플리트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오전 5시에 제7근위여단은 포병을 준비한 후 보산스코그라호보에서 크닌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전투단(북달마티아 군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경찰로 구성)에 맞서 제7근위여단은 이날의 목표를 달성하고 제4근위여단의 공격을 허용했다. 2개 여단의 좌측에 있는 HV 신즈 작전단이 공격에 합류했고 제126근위여단은 신즈-크닌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우니슈타를 점령했다. 144여단과 제6근위여단도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밀어냈다. 시베니크 작전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의 제2보병여단의 일부와 마주했다. 그곳에서 제142근위연대와 제15근위연대는 크르카와 드르니시 사이의 지역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룬 반면 제113보병여단은 그들의 좌측 측면에서 치스타벨리카로 진격했다. 자다르 작전단 지역에서 제134근위연대(제2대가 없는)는 진격에 실패한 반면 제7근위연대와 제112보위여단은 벤코바츠에서 ARSK 제92기동여단과 제3보병여단에 비해 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벨레비트에서 제7근위연대의 중대와 보강된 제9근위여단 제2대대와 제134근위연대 제2대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오브로바츠-스베티록 도로의 이용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히 진격했다. 오후 4시 45분에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역의 인구를 대피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436][437] 세르비아 크라이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에 따르면, 마르티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피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둔 지역을 제외한 남북 지역 전체로 대피가 확대되었다.[439] 저녁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주요 참모진은 크닌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440] 스르브[436]로 이동했다.
- '''북쪽 전선'''
크로아티아 특수 경찰은 오전 5시에 벨레비트를 통과하기 위해 말리알란 고개로 진격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리카 군단의 제4경전여단과 제9기동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고개는 오후 1시에, 스베티록 마을은 오후 5시에 점령되었다. 특수경찰은 말리 알란 너머로 진격하여 오후 9시에 더 많은 저항에 부딪친 후 오전 5시까지 포격을 가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9기동여단은 벨레비트의 위치에서 쫓겨난 후 우드비나로 철수했다. 아침에 특수경찰은 로비나크, 그라차크, 메다크를 점령했다.[441]
고스피치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제138향토방위연대와 제1근위여단 제1대대는 아침에 말라카펠라 지역에서 동쪽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0보병여단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나머지 제1근위여단은 자정 무렵 합류했다. 제133향토방위연대는 오토차츠 동쪽의 브르호빈 방면으로 공격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50보병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03보병여단의 일부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연대가 진격했지만, 그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연대의 오른쪽 측면에서 크로아티아 제128여단은 제8향토방위연대의 제3대대와 함께 진격하여 브르호빈-코레니차 도로를 통과했다. 제9근위여단의 나머지 대부분인 크로아티아 제118향토방위연대와 제111보병여단은 고스피치와 리치키오시크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였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8보병여단의 매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패배의 결과로, 고스피치 군단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했다.[442]
크로아티아 카를로바츠 군단 작전책임구역의 오굴린 지역에서는 제143향토방위연대 사보르스코 중대가 증원 부대로 파견된 제99여단이 오전 5시에 플라슈키를 향해 이동했지만 병력은 멈춰 있었고 오후 6시에는 혼란 상태로 돌아갔다. 제143향토방위연대는 요시프돌에서 플라슈키를 향해 진격하면서 지뢰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요소들은 제14향토방위연대와 연결되어 바릴로비치를 거쳐 슬룬을 향해 진격했다. 카를로바츠 시 근처에서 제137향토방위연대는 8월 3일에서 4일 사이의 자정 경에 4개 정찰대를 배치했고, 뒤이어 오전 5시에 포병을 준비한 뒤 코라나강을 도하했다. 진격 중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3보병여단의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렸지만 그 날이 끝날 때까지 교두보는 안정적이었다. 제137향토방위연대의 중대가 증원부대로 파견된 제110향토방위연대는 카를로바츠에서 보이니치와 슬룬으로 이어지는 남쪽 도로의 동쪽으로 진격했는데, 그곳에서 적의 심한 저항을 맞닥뜨렸고 지뢰로 인해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더 이상의 진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제137향토방위연대와 제104여단의 부속 중대는 연대의 측면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제104여단은 오전 5시에 쿠파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오전 8시에 출발 지점으로 후퇴했고, 그때 110향토방위연대가 설립한 교두보로 이동했다. 제99여단의 중대는 다음날 작전을 위해 제143향토방위연대에 부속되었고, 250명의 전투단은 여단에서 제거되어 카를로바츠 군단에 직접 예속되었다.[443]
자그레브 군단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육군은 쿠파강을 가로질러 제20향토방위연대와 제153여단을 사용하여 포쿱스코 근처와 글리나 쪽 두 지점으로 이동했다. 두 건널목 모두 교두보를 구축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반격하면서 대부분의 부대는 후퇴해야 했다. 제153여단의 대대와 제20향토방위연대의 일부만이 그들의 자리를 지켰다. 크로아티아군의 진격으로 글리나의 중요한 도로가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420] 이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가 특수부대 제2기갑여단에게 슬룬에서 교두보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도록 자극했다.[444] 크로아티아 제2근위여단과 제12향토방위연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1기갑여단으로부터 페트리냐를 신속하게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페트리냐에서 남쪽으로 6km 에서 7km 떨어진 곳까지의 공격 축을 포함하는 원래 계획은 바사라츠의 지시에 따라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수정되었다.[413] 우측에 있던 연대는 곧 지뢰밭에 의해 저지되어 후퇴했고, 반면 제2기갑여단의 대부분은 중대장과 5명의 병사를 잃은 후 사기가 흔들릴 때까지 전진했다. 제2기갑여단의 나머지는 제12향토방위연대, 제5대전차포병대대 및 제31공병 대대의 부대원들로 보강된 제2대대가 공격의 좌측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제2전술단을 형성했다. 제2전술단은 페트리냐에서 짧은 거리에 있는 모슈체니차로 진격했지만, 제2대대장과 6명의 병사가 사망한 후 진격은 중단되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1기갑여단도 당황했지만 증원을 받아 방어부대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육군 제57여단은 페트리냐-흐르바츠카코스타이니차 도로에 도달할 목적으로 페트리냐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여단장이 사망한 지뢰밭에 부딪혔고, 제101여단이 후방으로 가는 동안 적의 포격을 받았다. 그날 오후, 제151여단의 별도 공격도 실패했다. 크로아티아 제103여단은 순자-시사크 철도로 진격했지만, 거센 포화를 받으며 퇴각해야 했다. 자그레브 군단은 첫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부족한 인력 때문이었고, 그 결과 군단은 제102여단과 제1 및 제21향토방위연대의 동원을 요청했다. 제2보위여단은 이전에 이바니치그라드에 예비되어 있던 제149여단의 제1대대가 증원부대로 파견되었다.[444]
벨로바르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제125향토방위연대의 2개 대대가 야세노바츠 근처의 사바강을 건너 크로아티아 육군 부대를 뒤쫓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흐르바츠카두비카를 향해 진격했다. 2개 대대 뒤를 이어 제52 향토방위연대의 1개 대대, 제265정찰중대,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24향토방위연대 전투단이 뒤따랐다. 제52향토방위연대의 정찰 소대가 사바강을 건너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들어간 뒤 2개 보병 중대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후 보산스카 두비차–그라디슈카 도로를 철거한 후 크로아티아 땅으로 돌아갔다. 벨로바르 군단 부대는 해가 지기 전에 흐르바츠카 두비카 외곽에 도달했다. 그날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주민들은 흐르바츠카 두비카 마을을 버린 뒤, 사바강을 건너 남쪽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도망쳤다.[445]
5. 1. 1. 남쪽 전선
1995년 7월 27일,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했다.[401] 이 협정은 양측의 상호 방위 협정으로,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하였다.[402]비하치의 점령을 막기 위한 1995년 여름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95년 7월 25일 작전 개시일에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진전이 거의 없었으나,[403] 다음 날인 7월 26일 제9근위여단 제2대대가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보스산스코그로노보로부터 7km 떨어진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404] 7월 27일 스플리트 협정이 서명되던 날, 크로아티아군은 보스산코크로노보 공격 축을 강화하기 위해 제4보위여단을 축 우익에 파견했다.[404] 크로아티아 공군 미코얀구레비치 MiG-21 2대를 파견해 글라모츠 인근의 스릅스카 공화국군을 공격했는데, 이는 비행공제작전을 통해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한 것이었다.[404]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 28일 크로아티아군은 보스산코크로노보에 주둔한 스릅스카 공화국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404]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1995년 7월 29일 글라모츠를 점령하였다.[404]
1995년 7월 30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크로아티아군에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것을 선언하며 전시령을 선포했고,[405]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도 7월 30일 크닌을 방문해 크로아티아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406] 그러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서부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에게 맞서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부대가 없다고 결론지었다.[407]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분석에 따르면,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다시 무위로 만들었고,[408] 세르비아 크라이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맞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409]
폭풍 작전은 1995년 8월 4일 오전 5시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지휘, 통제 및 통신을 방해하기 위한 크로아티아 공군의 공습과 함께 정찰 및 방해 공작 분리대에 의한 공동 공격으로 시작되었다.[433] 유엔 크로아티아 신뢰회복활동(UNCRO)으로 알려진 유엔 평화유지군은 투지만의 참모총장 흐르보예 샤리니치가 프랑스 육군 장군 베르나르 장비에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인 공격 3시간 전에 통보를 받았다.[434] 또한 각 크로아티아 육군 군단은 공격 경로에 있는 UNCRO 부문에 통보하여 정보 수신에 대한 서면 확인을 요청했다. UNCRO는 세르비아 크라이나에 정보를 전달하였고,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전날 유고슬라비아 육군 총참모부로부터 받은 경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435]
스플리트 군단의 작전책임구역에서 오전 5시에 제7근위여단은 포병을 준비한 후 보산스코그라호보에서 크닌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북달마티아 군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경찰로 구성된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전투단에 맞서서 제7근위여단은 이날의 목표를 달성하고 제4근위여단의 공격을 허용했다. 2개 여단의 좌측에 있는 HV 신즈 작전단이 공격에 합류했고 제126근위여단은 신즈-크닌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우니슈타를 점령했다. 144여단과 제6근위여단도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밀어냈다. 시베니크 작전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의 제2보병여단의 일부와 마주했다. 그곳에서 제142근위연대와 제15근위연대는 크르카와 드르니시 사이의 지역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룬 반면 제113보병여단은 그들의 좌측 측면에서 치스타벨리카로 진격했다. 자다르 작전단 지역에서 제134근위연대(제2대가 없는)는 진격에 실패한 반면 제7근위연대와 제112보위여단은 벤코바츠에서 ARSK 제92기동여단과 제3보병여단에 비해 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벨레비트에서 제7근위연대의 중대와 보강된 제9근위여단 제2대대와 제134근위연대 제2대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오브로바츠-스베티록 도로의 이용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히 진격했다. 오후 4시 45분에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역의 인구를 대피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436][437] 세르비아 크라이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에 따르면 마르티치는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피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둔 지역을 제외한 남북 지역 전체로 대피가 확대되었다.[439] 저녁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주요 참모진은 크닌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440] 스르브[436]로 이동했다.
8월 4일과 5일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가 제75기동여단 대대에게 크닌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을 때 크로아티아 육군은 크닌을 향해 진격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은 크로아티아 육군 제4기동여단이 크닌을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제7기동여단의 우측을 보호하면서 점점 더 조직화되지 않았다. 후자는 거의 저항을 받지 못했고 오전 11시에 마을에 진입했다. 이반 체르막 중장은 새로 창설된 크로아티아 크닌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신 작전단은 목표를 완수하여 벨리키코자크와 브를리카를 점령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경여단이 분해되어 크닌으로 후퇴하고 나중에 리카로 후퇴하면서 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오후 8시에 시베니크 작전단은 폴리치니크(제113여단), 제브르스케(제15향토방위연대)로 진격했고 드르니시(142향토방위연대)를 점령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은 제3보병단과 제92기동여단과 함께 스르브와 보산스키페트로바츠로 후퇴했고, 자다르 작전단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제7향토방위연대는 벤코바츠를 점령했고, 제112여단은 스밀치치로 진입했고 제9기동여단 부대는 오브로바츠에 도달했다.[446]
8월 6일, 크로아티아 대통령 투지만이 크닌을 방문했을 때 크로아티아 육군은 오브로바츠, 벤코바츠, 드르니시, 브를리카 주변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452]
제1 크로아티아 근위 여단(1. hrvatski gardijski zdrug - HGZ)은 다음 날 북쪽으로 진격할 제4, 제7, 제9 근위 여단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크닌 지역에 도착했다. 스플리트 군단 사령부도 크닌으로 이동했다.[463]
8월 8일, 제4 및 제7근위여단, 제9근위여단 제2대대, 크로아티아 제1근위여단은 리치카칼드르마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경까지 북쪽으로 진격한 뒤, 오후 8시까지 도니라파츠와 스르브 지역에 남아있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을 제거하였고,[469] 이로서 스플리트 군단의 폭풍 작전 목표는 모두 달성되었다.[463]
5. 1. 2. 북쪽 전선
1994년 11월,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스릅스카 크라이나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의 통제 하에 있던 비하치를 점령하는 것을 목전에 둠으로써, 비하치 포위전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비하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고,[363] 1993년 6월 이래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설립된 6개의 유엔 안전 지역 중 하나였다.[364]클린턴 행정부는 비하치의 점령이 지역에서의 확전과 큰 인도주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공습을 결정했다. 하지만 보스니아에 있는 유엔 안전 지역을 보호하는 방법을 두고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로 이견이 있었다.[363][365] 미국은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대한 공습을 주장하였지만 지상군을 투입할 의사는 없었다.[366] 반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세르비아인들에 맞선 군사적 충돌을 제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어도 그러한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 열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367] 특히 1994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어떠한 군사 개입에도 반대하고 있었고,[368]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 역시 세르브계에 공격을 가할 경우 보스니아에 파견된 유엔 보호군과 영국군이 보복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 개입을 반대했다.[369] 1995년 5월 자크 시라크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가 영국 정부에 압박을 넣으면서,[370]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에 맞선 공습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기조도 달라지게 되었다.[371]
한편 크로아티아군은 비하치의 함락에 대해 전략적인 중요성이 없다고 부정하였으나, 크로아티아군 참모총장인 얀코 보베트코는 크로아티아의 전쟁 수행 능력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비하치의 함락에 대한 가능성을 고려했다.[372] 이와 더불어 워싱턴 협정이 체결되어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끝남에 따라, 1993년 2월 클린턴 행정부의 군사 계획[373]을 반영한 미국 정부는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를 통해 크로아티아에 미국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다.[374][375]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매체 및 자료에 따르면,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는 크로아티아군에 군사 교리 자문, 작전 시나리오 구상, 미국 인공위성을 통한 지리 정보 제공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374][376][377] 미국 정부와 크로아티아 정부 그리고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 모두 이를 부정하고 있다.[378][379] 1994년 11월 미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무기 제재를 취하했으며,[380] 이에 따라 보스니아 내부의 크로아티아군은 크로아티아를 통해 무기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381]
1995년 플래시 작전 당시 Z-4 계획을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측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측의 이견으로 인해 양측의 협상은 실패했고 5월 달 Z-4 계획 입안 시도는 붕괴되었다. 하지만 1995년 6월 28일 클라우스 킹켈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 에르베 드 샤렛의 회담을 통해 Z-4 계획의 부활이 다시 언급되었다. 킹켈과 샤렛은 휴전을 시행하기 위해 분리 구역을 설정하고, 세르비아계의 외부 국경을 감시하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의 안전을 위한 구체적인 보장을 제공하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 간의 경제 협력을 통해 신뢰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
크로아티아군은 7월 15일 기존의 얀코 보베트코를 대신하여 즈보니미르 체르벤코로 사령관을 대체했다.[397] 한편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은 1994년 타이거 작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에게 빼앗긴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시키고자 1994년 11월부터 거미 작전을 개시한 뒤, 1995년 7월 17일 거미 작전을 통해 얻은 군사적 우위를 확장하면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하는 한편[398][399]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새로운 계획을 마련했다. 거미 작전에서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이 성공을 거두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및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에 맞서 혼자 싸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크로아티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400]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의 요청에 응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1995년 7월 27일 스플리트에서 양측의 상호방위협정인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했다.[401] 이 협정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로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402]
비하치의 점령을 막기 위해 시작된 1995년 여름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1995년 7월 25일 작전 개시일에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진전이 거의 없었으나,[403] 다음 날인 7월 26일 제9근위여단 제2대대가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보산스코그라호보로부터 7km 떨어진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404] 7월 27일 스플리트 협정이 서명되던 날 크로아티아군은 보산스코그라호보 공격축을 강화하기 위해 제4보위여단을 축 우익에 파견했다.[404] 크로아티아 공군 미코얀구레비치 MiG-21 2대를 파견해 글라모츠 인근의 스릅스카 공화국군을 공격했는데, 이는 비행공제작전을 통해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한 것이었다.[404]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 28일 크로아티아군은 보산스코그라호보에 주둔한 스릅스카 공화국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404]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1995년 7월 29일 글라모츠를 점령하였다.[404] 1995년 7월 30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군에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것을 선언하며 전시령을 선포했고,[405]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도 7월 30일 크닌을 방문해 크로아티아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406] 그러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서부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에게 맞서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부대가 없다고 결론지었다.[407]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분석에 따르면,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다시 무위로 만들었고[408] 세르비아 크라이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맞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409]
5. 2. 1995년 8월 5일
1995년 8월 5일, 크로아티아군은 여러 전선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남쪽 전선:스플리트 군단 지역에서는 오전 5시에 제7근위여단이 포병 지원을 받으며 보산스코그라호보에서 크닌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전투단에 맞서 목표를 달성하고 제4근위여단의 공격을 지원했다. 좌측에서는 HV 신즈 작전단이 공격에 합류, 제126근위여단이 우니슈타를 점령했다. 144여단과 제6근위여단도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밀어냈다. 시베니크 작전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 및 제2보병여단 일부와 교전, 제142근위연대와 제15근위연대가 크르카와 드르니시 사이에서 약간 진격했고, 제113보병여단은 치스타벨리카로 진격했다. 자다르 작전단에서는 제134근위연대(제2대대 제외)가 진격에 실패했으나, 제7근위연대와 제112보위여단은 벤코바츠에서 ARSK 제92기동여단과 제3보병여단에 맞서 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벨레비트 산에서는 제7근위연대 중대와 증강된 제9근위여단 제2대대, 제134근위연대 제2대가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브로바츠-스베티록 도로 확보를 위해 충분히 진격했다.
오후 4시 45분,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역 주민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436][437]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은 마르티치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돕도록 설득하기 위해 대피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438] 대피는 코둔 지역을 제외한 남북 지역 전체로 확대되었다.[439] 저녁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주요 참모진은 크닌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440] 스르브[436]로 이동했다.
북쪽 전선: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은 오전 5시에 벨레비트 산을 통과하기 위해 말리 알란 고개로 진격, 세르비아 크라이나 리카 군단의 제4경전여단과 제9기동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고개는 오후 1시에, 스베티 록 마을은 오후 5시에 점령되었다. 특수경찰은 말리 알란 너머로 진격하여 오후 9시에 더 많은 저항에 부딪친 후 오전 5시까지 포격을 가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9기동여단은 벨레비트 산에서 쫓겨난 후 우드비나로 철수했다. 아침에 특수경찰은 로비나크, 그라차츠, 메다크를 점령했다.[441]
고스피치, 카를로바츠, 자그레브, 벨로바르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도 크로아티아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각 군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저항에 직면하면서도 일부 지역에서 진격을 이어나갔다. 특히 자그레브 군단 지역에서는 크로아티아군의 진격으로 글리나의 중요한 도로가 위협받자,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가 특수부대 제2기갑여단을 슬룬에서 교두보로 이동시켰다.[420][444] 벨로바르 군단은 흐르바츠카두비카 외곽에 도달했고, 그날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도망쳤다.[445]
8월 4일과 5일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가 제75기동여단 대대에게 크닌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을 때 크로아티아 육군은 크닌을 향해 진격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은 크로아티아 육군 제4기동여단이 크닌을 향해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제7기동여단의 우측을 보호하면서 점점 더 조직화되지 않았다. 후자는 거의 저항을 받지 못했고 오전 11시에 마을에 진입했다. 이반 체르막 중장은 새로 창설된 크로아티아 크닌 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신 작전단은 목표를 완수하여 벨리키코자크와 브를리카를 점령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경여단이 분해되어 크닌으로 후퇴하고 나중에 리카로 후퇴하면서 거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오후 8시에 시베니크 작전단은 폴리치니크(제113여단), 제브르스케(제15향토방위연대)로 진격했고 드르니시(142향토방위연대)를 점령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은 제3보병단과 제92기동여단과 함께 스르브와 보산스키페트로바츠로 후퇴했고, 자다르 작전단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제7향토방위연대는 벤코바츠를 점령했고, 제112여단은 스밀치치로 진입했고 제9기동여단 부대는 오브로바츠에 도달했다.[446]
5. 2. 1. 남쪽 전선
1995년 7월,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HVO)는 1995년 여름 작전을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글라모츠와 보산스코그라호보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영내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에서 크라이나의 수도 크닌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를 장악, 크라이나의 중요한 보급로가 끊기고 수도 크닌은 세 방향에서 포위되는 상황에 놓였다.[403][404]한편, 세르비아계 세력은 거미 작전을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에게 빼앗겼던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하고,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398][399] 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과 1995년 7월 27일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로 파견될 수 있게 되었다.[401][402]
1995년 여름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7월 28일 크로아티아군은 보산스코그라호보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7월 29일 글라모츠를 점령하였다.[404] 7월 30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전시령을 선포했고, 스릅스카 공화국군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도 크로아티아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고 선언했다.[405][406] 그러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서부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에 맞설 부대가 없다고 결론지었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맞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퍼져나갔다.[407][409]
스플리트 군단의 작전책임구역에서 오전 5시에 제7근위여단은 포병 준비 후 보산스코그라호보에서 크닌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전투단에 맞서 제7근위여단은 이날의 목표를 달성하고 제4근위여단의 공격을 허용했다. 두 여단의 좌측에 있는 HV 신즈 작전단이 공격에 합류했고 제126근위여단은 우니슈타를 점령했다. 144여단과 제6근위여단도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밀어냈다. 시베니크 작전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의 제2보병여단의 일부와 마주했다. 그곳에서 제142근위연대와 제15근위연대는 크르카와 드르니시 사이의 지역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룬 반면 제113보병여단은 그들의 좌측 측면에서 치스타벨리카로 진격했다. 자다르 작전단 지역에서 제134근위연대(제2대대 제외)는 진격에 실패한 반면 제7근위연대와 제112보위여단은 벤코바츠에서 ARSK 제92기동여단과 제3보병여단에 비해 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벨레비트에서 제7근위연대의 중대와 보강된 제9근위여단 제2대대와 제134근위연대 제2대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오브로바츠-스베티록 도로의 이용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히 진격했다. 오후 4시 45분에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역의 인구를 대피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436][437] 세르비아 크라이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에 따르면 마르티치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피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둔 지역을 제외한 남북 지역 전체로 대피가 확대되었다.[439] 저녁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주요 참모진은 크닌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440] 스르브[436]로 이동했다.
5. 2. 2. 북쪽 전선
1994년 11월,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스릅스카 크라이나 공화국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의 통제 하에 있던 비하치를 점령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비하치 포위전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비하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고,[363] 1993년 6월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설립된 6개의 유엔 안전 지역 중 하나였다.[364]클린턴 행정부는 비하치 점령이 지역에서의 확전과 큰 인도주의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공습을 결정했다. 하지만 보스니아의 유엔 안전 지역을 보호하는 방법을 두고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363][365] 미국은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대한 공습을 주장했지만 지상군을 투입할 의사는 없었다.[366] 반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세르비아인들에 맞선 군사적 충돌을 제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어도 그러한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유럽 열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367] 특히 1994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어떠한 군사 개입에도 반대하고 있었고,[368]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 역시 세르브계에 공격을 가할 경우 보스니아에 파견된 유엔 보호군과 영국군이 보복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 개입을 반대했다. 1995년 5월 자크 시라크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가 영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면서,[370] 세르브계 보스니아인에 맞선 공습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기조도 달라지게 되었다.[371]
한편 크로아티아군은 비하치의 함락에 대해 전략적인 중요성이 없다고 부정하였으나, 크로아티아군 참모총장인 얀코 보베트코는 크로아티아의 전쟁 수행 능력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비하치의 함락에 대한 가능성을 고려했다.[372] 이와 더불어 워싱턴 협정이 체결되어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끝남에 따라, 1993년 2월 클린턴 행정부의 군사 계획[373]을 반영한 미국 정부는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를 통해 크로아티아에 미국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다.[374][375]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매체 및 자료에 따르면,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는 크로아티아군에 군사 교리 자문, 작전 시나리오 구상, 미국 인공위성을 통한 지리 정보 제공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374][376][377] 미국 정부와 크로아티아 정부 그리고 군사전문자원 주식회사 모두 이를 부정하고 있다.[378][379] 1994년 11월 미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무기 제재를 취하했으며,[380] 이에 따라 보스니아 내부의 크로아티아군은 크로아티아를 통해 무기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381]
1995년 플래시 작전 당시 Z-4 계획을 다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측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측의 이견으로 인해 양측의 협상은 실패했고 5월 달 Z-4 계획 입안 시도는 붕괴되었다. 하지만 1995년 6월 28일 클라우스 킹켈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 에르베 드 샤렛의 회담을 통해 Z-4 계획의 부활이 다시 언급되었다. 킹켈과 샤렛은 휴전을 시행하기 위해 분리 구역을 설정하고, 세르비아계의 외부 국경을 감시하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의 안전을 위한 구체적인 보장을 제공하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 간의 경제 협력을 통해 신뢰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 계획도 무산되었다.
크로아티아군은 7월 15일 얀코 보베트코를 대신하여 즈보니미르 체르벤코로 사령관을 대체했다.[397] 한편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은 1994년 타이거 작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에게 빼앗긴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시키고자 1994년 11월부터 거미 작전을 개시한 뒤, 1995년 7월 17일 거미 작전을 통해 얻은 군사적 우위를 확장하면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를 복구하는 한편[398][399]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새로운 계획을 마련했다. 거미 작전에서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이 성공을 거두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및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에 맞서 혼자 싸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크로아티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400]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의 요청에 응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1995년 7월 27일 스플리트에서 양측의 상호방위협정인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했다.[401] 이 협정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로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402]
비하치의 점령을 막기 위해 시작된 1995년 여름 작전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1995년 7월 25일 작전 개시일에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진전이 거의 없었으나,[403] 다음 날인 7월 26일 제9근위여단 제2대대가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보스산코크로노보로부터 7km 떨어진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404] 7월 27일 스플리트 협정이 서명되던 날 크로아티아군은 보스산코크로노보 공격축을 강화하기 위해 제4보위여단을 축 우익에 파견했다.[404] 크로아티아 공군 미코얀구레비치 MiG-21 2대를 파견해 글라모츠 인근의 스릅스카 공화국군을 공격했는데, 이는 비행공제작전을 통해 유엔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을 침범한 것이었다.[404]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 28일 크로아티아군은 보스산코크로노보에 주둔한 스릅스카 공화국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하였다.[404]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는 1995년 7월 29일 글라모츠를 점령하였다.[404] 1995년 7월 30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군에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것을 선언하며 전시령을 선포했고,[405]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도 7월 30일 크닌을 방문해 크로아티아군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406] 그러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서부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에게 맞서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부대가 없다고 결론지었다.[407]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분석에 따르면,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비하치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다시 무위로 만들었고[408] 세르비아 크라이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크로아티아군에 맞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퍼져 나갔다.[409]
5. 3. 1995년 8월 6일
1995년 8월 6일,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합류한 크로아티아 제1 방위 여단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제5군단은 슬루니 부근까지 북쪽으로 진격하여 벨리카클라두샤 근처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국경에 도달했다. 이 기간 동안 페트리냐, 코스타이니차, 오브로바츠, 코레니차, 슬루니, 브루브노, 브르호비네, 플라슈키, 체팅그라드, 플리트비체, 글리나는 모두 이날 안에 제압되었다. 이 중에서 강한 저항이 있었던 곳은 글리나(시사크 남쪽) 마을뿐이었다.[452] 크로아티아 정부의 통치하에 있는 카를로바츠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군에 의해 보복적으로 포위되었고, 보스니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의 항공기가 쿠티나의 화학 공장을 공격했다.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은 크닌에 개선 입성했으며, 크닌 언덕 위의 요새에는 거대한 크로아티아 국기가 펄럭였다.[452]5. 4. 1995년 8월 7일
스플리트 군단의 작전책임구역에서 오전 5시에 제7근위여단은 포병을 준비한 후 보산스코그라호보에서 크닌보다 높은 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북달마티아 군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경찰로 구성된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전투단에 맞서 제7근위여단은 이날의 목표를 달성하고 제4근위여단의 공격을 허용했다.[436] 2개 여단의 좌측에 있는 HV 신즈 작전단이 공격에 합류했고 제126근위여단은 신즈-크닌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우니슈타를 점령했다. 144여단과 제6근위여단도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밀어냈다.[436] 시베니크 작전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5기동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북달마티아 군단의 제2보병여단의 일부와 마주했다. 그곳에서 제142근위연대와 제15근위연대는 크르카와 드르니시 사이의 지역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룬 반면 제113보병여단은 그들의 좌측 측면에서 치스타벨리카로 진격했다.[436] 자다르 작전단 지역에서 제134근위연대(제2대대 제외)는 진격에 실패했고, 제7근위연대와 제112보위여단은 벤코바츠에서 ARSK 제92기동여단과 제3보병여단에 비해 거의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벨레비트에서 제7근위연대의 중대와 보강된 제9근위여단 제2대대, 제134근위연대 제2대대는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오브로바츠-스베티록 도로의 이용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히 진격했다.[436] 오후 4시 45분에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은 북달마티아와 리카 지역의 인구를 대피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436][437] 세르비아 크라이나 밀리사브 세쿨리치 소장에 따르면 마르티치는 밀로셰비치와 국제사회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피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38] 코둔 지역을 제외한 남북 지역 전체로 대피가 확대되었다.[439] 저녁에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주요 참모진은 크닌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440] 스르브[436]로 이동했다.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은 오전 5시에 벨레비트를 통과하기 위해 말리 알란 고개로 진격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리카 군단의 제4경전여단과 제9기동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고개는 오후 1시에, 스베티 록 마을은 오후 5시에 점령되었다. 특수경찰은 말리 알란 너머로 진격하여 오후 9시에 더 많은 저항에 부딪친 후 오전 5시까지 포격을 가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9기동여단은 벨레비트에서 쫓겨난 후 우드비나로 철수했다. 아침에 특수경찰은 로비나크, 그라차크, 메다크를 점령했다.[441]
고스피치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제138향토방위연대와 제1근위여단 제1대대는 아침에 말라카펠라 지역에서 동쪽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70보병여단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나머지 제1근위여단은 자정 무렵 합류했다. 제133향토방위연대는 오토차츠 동쪽의 브르호빈 방면으로 공격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50보병여단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03보병여단의 일부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연대가 진격했지만, 그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연대의 오른쪽 측면에서 크로아티아 제128여단은 제8향토방위연대의 제3대대와 함께 진격하여 브르호빈-코레니차 도로를 통과했다. 제9근위여단의 나머지 대부분인 크로아티아 제118향토방위연대와 제111보병여단은 고스피치와 리치키오시크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였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8보병여단의 매우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패배의 결과로, 고스피치 군단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했다.[442]
크로아티아 카를로바츠 군단 작전책임구역의 오굴린 지역에서는 제143향토방위연대 사보르스코 중대가 증원 부대로 파견된 제99여단이 오전 5시에 플라슈키를 향해 이동했지만 병력은 멈춰 있었고 오후 6시에는 혼란 상태로 돌아갔다. 제143향토방위연대는 요시프돌에서 플라슈키를 향해 진격하면서 지뢰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요소들은 제14향토방위연대와 연결되어 바릴로비치를 거쳐 슬룬을 향해 진격했다. 카를로바츠 시 근처에서 제137향토방위연대는 8월 3일에서 4일 사이의 자정 경에 4개 정찰대를 배치했고, 뒤이어 오전 5시에 포병을 준비한 뒤 코라나강을 도하했다. 진격 중 크로아티아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13보병여단의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렸지만 그 날이 끝날 때까지 교두보는 안정적이었다. 제137향토방위연대의 중대가 증원부대로 파견된 제110향토방위연대는 카를로바츠에서 보이니치와 슬룬으로 이어지는 남쪽 도로의 동쪽으로 진격했는데, 그곳에서 적의 심한 저항을 맞닥뜨렸고 지뢰로 인해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더 이상의 진격할 수 없었다. 제137향토방위연대와 제104여단의 부속 중대는 연대의 측면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제104여단은 오전 5시에 쿠파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오전 8시에 출발 지점으로 후퇴했고, 그때 110향토방위연대가 설립한 교두보로 이동했다. 제99여단의 중대는 다음날 작전을 위해 제143향토방위연대에 부속되었고, 250명의 전투단은 여단에서 제거되어 카를로바츠 군단에 직접 예속되었다.[443]
자그레브 군단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육군은 쿠파강을 가로질러 제20향토방위연대와 제153여단을 사용하여 포쿱스코 근처와 글리나 쪽 두 지점으로 이동했다. 두 지점 모두 교두보를 구축했지만,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반격하면서 대부분의 부대는 후퇴해야 했다. 제153여단의 대대와 제20향토방위연대의 일부만이 그들의 자리를 지켰다. 크로아티아군의 진격으로 글리나의 중요한 도로가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420] 세르비아 크라이나 총참모부는 특수부대 제2기갑여단에게 슬룬에서 교두보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444] 크로아티아 제2근위여단과 제12향토방위연대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1기갑여단으로부터 페트리냐를 신속하게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페트리냐에서 남쪽으로 6 ~ 7km 떨어진 곳까지의 공격 축을 포함하는 원래 계획은 바사라츠의 지시에 따라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수정되었다.[413] 우측에 있던 연대는 곧 지뢰밭에 의해 저지되어 후퇴했고, 반면 제2기갑여단의 대부분은 중대장과 5명의 병사를 잃은 후 사기가 흔들릴 때까지 전진했다. 제2기갑여단의 나머지는 제12향토방위연대, 제5대전차포병대대 및 제31공병 대대의 부대원들로 보강된 제2대대가 공격의 좌측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제2전술단을 형성했다. 제2전술단은 페트리냐에서 짧은 거리에 있는 모슈체니차로 진격했지만, 제2대대장과 6명의 병사가 사망한 후 진격은 중단되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제31기갑여단도 당황했지만 증원을 받아 방어부대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육군 제57여단은 페트리냐-흐르바츠카코스타이니차 도로에 도달할 목적으로 페트리냐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여단장이 사망한 지뢰밭에 부딪혔고, 제101여단이 후방으로 가는 동안 적의 포격을 받았다. 그날 오후, 제151여단의 별도 공격도 실패했다. 크로아티아 제103여단은 순자-시사크 철도로 진격했지만, 거센 포화를 받으며 퇴각해야 했다. 자그레브 군단은 첫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부족한 인력 때문이었고, 그 결과 군단은 제102여단과 제1 및 제21향토방위연대의 동원을 요청했다. 제2보위여단은 이전에 이바니치그라드에 예비되어 있던 제149여단의 제1대대가 증원부대로 파견되었다.[444]
벨로바르 군단 작전책임구역에서 제125향토방위연대의 2개 대대가 야세노바츠 근처의 사바강을 건너 크로아티아 육군 부대를 뒤쫓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흐르바츠카두비카를 향해 진격했다. 2개 대대 뒤를 이어 제52향토방위연대의 1개 대대, 제265정찰중대,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24향토방위연대 전투단이 뒤따랐다. 제52향토방위연대의 정찰 소대가 사바강을 건너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들어간 뒤 2개 보병 중대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후 코자르스카두비카-그라디슈카 도로를 철거하고 크로아티아로 돌아갔다. 벨로바르 군단 부대는 해가 지기 전에 흐르바츠카 두비카 외곽에 도달했다. 그날 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주민들은 흐르바츠카 두비카 마을을 버린 뒤, 사바강을 건너 남쪽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도망쳤다.[445]
5. 5. 1995년 8월 8일 이후


8월 8일, 제4 및 제7 근위 여단, 제9 근위 여단의 제2 대대와 제1 크로아티아 친위 여단(HGZ)은 북쪽으로 리치카 칼드르마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경까지 진격하여 8시까지 돈지 라파츠와 스르브 지역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 저항의 마지막 주요 거점을 제거하고[134] 폭풍 작전에 대한 스플리트 군단의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128] 보이니치를 점령한 후, 카를로바츠 군단 부대의 대부분은 작전 지역(AOR)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135] 제2 근위 여단 병력은 드보르 남서쪽의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달하여 도시의 완전한 통제를 위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으며, ARBiH 제5 군단과 연결되었다.[136]
프라뇨 투지만이 그날 오후 군사 작전 중단을 명령하자,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은 항복을 받아들였다. 항복 조건 협상은 같은 날 오후 1시 20분 우크라이나 유엔 크로아티아 신뢰회복활동(UNCRO) 군대 지휘소에서 글리나에서 열렸으며, 항복 문서는 오후 2시에 토푸스코에서 서명되었다. 크로아티아는 페타르 스티페티치 중장이, 세르비아 크라이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 사령관 불라트와 내무부 장관 토소 파이치가 대표했다. 항복 조건은 다음 날 장교의 보조 무기를 제외한 무기 인도와 토푸스코에서 글리나, 시사크,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를 통해 세르비아로의 사람 대피를 명시했으며, 이는 크로아티아 군대와 민간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137]
8월 9일, 특수 경찰은 4일 만에 150 km 이상을 걸어간 후 크로아티아군(HV)에 자신의 위치를 넘겨주었다.[129] 제1 근위 여단은 다른 HV 부대의 뒤를 이어 브르긴모스트에 진입했다. 제110 및 제143 국토방위 연대는 브르긴모스트와 라시냐 주변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제137 국토방위 연대는 보이니치 지역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했으며, 제14 국토방위 연대는 슬루니, 체팅그라드, 라코비차 지역에서 동일한 작전을 수행했다.[138] HV는 민간인이 대피를 완료한 직후 늦은 저녁에 드보르를 확보했다. 많은 HV 국토방위 부대가 나중에 추가 소탕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다.[136]
8월 10일, HV 제57 여단은 그보즈단스코 남쪽의 크로아티아 국경에 도달했으며, 제2 근위 여단 병력은 드보르에 도달했고, 제12 국토방위 연대는 크로아티아 국경의 드보르 바로 남쪽에 있는 마티예비치를 점령했다. 자그레브 군단은 작전 지역(AOR)의 전체 국경이 확보되었고 모든 폭풍 작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고했다. 바노비나에서의 소탕 작전은 8월 14일까지 지속되었으며, 특수 경찰 부대가 즈린스카 고라와 페트로바 고라 산에서 작전에 합류했다.[139]
5. 6. 공군 작전
크로아티아 공군(CAF)은 1995년 8월 4일, MiG-21 17대, 공격 헬리콥터 5대, 수송 헬리콥터 9대, 수송기 3대, 정찰기 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40] 폭풍 작전 첫날, MiG-21 13대는 고스피치와 자그레브 군단 작전 지역 내 6개 목표물을 파괴하거나 무력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대는 심각한 피해를, 3대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같은 날, Mi-8 3대가 의료 후송에 사용되었다.[140] 미국 해군 EA-6B와 F/A-18은 거부 비행 작전의 일환으로 순찰하던 중 SAM 레이더가 제트기에 고정되자 우드비나와 크닌에 있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지대공 미사일(SAM) 기지를 공격했다.[141]8월 5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군은 바냐루카 근처의 자루자니 비행장으로 철수를 시작하여 그날 이전을 완료했다. 같은 날, 크로아티아 공군은 MiG-21 11대를 배치하여 세르비아 크라이나 전역의 통신 시설과 저장 시설, 기타 5개의 군사 기지를 공격했다. 또한 Mi-24를 배치하여 시사크 인근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기갑 부대를 공격하고, Mi-8 5대를 배치하여 사상자를 수송하고 병력과 화물을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공군 소속 MiG-21 5대가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다음 날, 제트기는 카를로바츠와 글리나 근처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지휘소, 다리 및 최소 4개의 다른 목표물을 공격했다. Mi-24는 슬룬 지역에 배치되어 세르비아 크라이나 탱크를 공격했으며, Mi-8 3대는 부상자와 물자를 수송했다. MiG-21 2대는 이바니치 그라드 상공에서 공중 경계를 펼치며 보스니아 세르비아 전투기 2대를 요격하려 했지만, 해당 지역의 안개와 저고도 비행으로 인해 실패했다.[140]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 공군은 쿠티나의 페트로케미야 화학 공장을 공격했다.[177]
8월 7일, 스릅스카 공화국 공군 제트기 2대가 사바 강 바로 북쪽, 즉 해당 지역의 국제 국경선인 노바 그라디슈카 지역의 마을을 공격했다.[144] 크로아티아 공군은 보산스키 페트로바츠 근처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지휘소, 저장 시설 및 여러 대의 탱크를 폭격했다.[140] 크로아티아 공군 제트기는 또한 보산스키 페트로바츠 근처의 세르비아 난민 대열을 공격하여 어린이를 포함한 9명이 사망했다.[145] 크로아티아는 민간인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146] 8월 8일, 크로아티아 공군은 작전에서 마지막 전투 임무를 수행하여 보산스키 노비와 프리예도르 사이의 탱크와 장갑차를 공격했으며, MiG-21 2대가 손상되었다.[140] 같은 날, 크로아티아 비행장에 배치된 UN 군사 옵서버는 크로아티아 공군이 드보르 지역에서 군사 목표물과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주장했으며,[177] 난민 대열이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이 중화기와 대량의 탄약을 수송하는 것과 섞여 있었다.[147]
폭풍 작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공군은 총 67회의 근접 항공 지원, 3회의 공격 헬리콥터 임무, 7회의 정찰 임무, 4회의 전투 항공 순찰 및 111회의 수송 헬리콥터 임무를 수행했다.[140]
5. 7. 기타 합동 작전
폭풍 작전과 연계하여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은 여러 합동 작전을 펼쳤다.- 피닉스 작전 (Operacija Fenix): 동슬라보니아 지역에서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군단이 수행한 작전이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또는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서진을 저지하고, 부코바르 주변 ARSK 점령 지역에 대한 반격을 목표로 했다.
- 마에스트랄 작전: 크로아티아 남부에서 트레비네와 코토르만 주변에 주둔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군 헤르체고비나 군단과 유고슬라비아군으로부터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이다.
이 외에도, 1995년 여름 작전, 거미 작전, 스플리트 협정 등이 폭풍 작전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1995년 여름 작전은 비하치 점령을 막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크로아티아군과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가 참여하여 스릅스카 공화국군에 맞섰다. 스플리트 협정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간의 상호방위협정으로,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하였다.
5. 7. 1. 피닉스 작전
Operacija Fenix|links=nohr로 명명된 피닉스 작전은 동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군단이 수행했다. 이 군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ARSK) 또는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고, 부코바르 주변의 ARSK 점령 지역으로 반격을 가하는 임무를 맡았다. 오시예크 군단은 제3 근위 및 제5 근위 여단, 그리고 6개의 다른 크로아티아군(HV) 여단과 7개의 국토 방위 연대를 지휘했다. 또한 Mi-24 공격 헬기 편대의 일부를 포함하여 HV 참모부에 직접 종속된 전문 군단급 부대의 형태로 추가 지원이 제공되었다.[148]크로아티아군과 이 지역의 ARSK 제11 슬라보니아-바라냐 군단 사이에는 포격과 소형 화기 공격이 오갔지만, 큰 공격은 발생하지 않았다.[148] 1995년 8월 5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군의 공습 3차례와 빈코브치 북동쪽의 누슈타르를 겨냥한 보병 및 전차 공격이 결합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합동 작전이 개시되었다.[152] 폭풍 작전으로 유고슬라비아 육군은 다수의 포병, 전차 및 보병을 동부 슬라보니아 근처의 국경 지역으로 배치했지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53]
5. 7. 2. 마에스트랄 작전
크로아티아 남부에서 크로아티아군은 트레비네와 코토르만 주변에 주둔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군 헤르체고비나 군단과 유고슬라비아군으로부터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작전명 마에스트랄 작전에는 제114, 제115, 제163 여단, 제116, 제156 국토방위 연대, 제1 국토방위 대대(두브로브니크), 제16 포병 대대, 제39 공병 대대 및 이동식 해안 포병 포대가 배치되었다. 8월 8일 폭풍 작전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한 제144 여단이 이 지역을 증원했다. 크로아티아 공군은 스플리트에 주둔한 MiG-21 두 대와 Mi-24 두 대를 작전 마에스트랄에 투입했다. 크로아티아 해군은 코르출라, 브라치 및 흐바르 해병대 분대와 미사일정, 소해정, 대잠수함전 함정 및 해안 포병을 배치하여 작전을 지원했다. 그 기간 동안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은 포병만을 사용하여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간헐적으로 공격했다.[154]6. 평가
폭풍 작전은 군사적, 정치적,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군사적 측면:크로아티아군은 이 작전을 통해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격파하고 크닌을 비롯한 주요 거점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는 크로아티아군 자체의 전력 강화와 더불어,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취약점을 효과적으로 공략한 결과였다. 특히,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예비군 부족과 정적인 방어 전략은 크로아티아군의 기동전에 취약했다. 앤드류 레슬리 대령은 폭풍 작전을 "교과서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하며 NATO 기준으로 "A+" 등급을 부여했다.[502] 그러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유고슬라비아군의 개입을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할 시간이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488]
정치적 측면:폭풍 작전은 크로아티아가 영토를 수복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6][157][158][159] 또한 보스니아 전쟁의 종식에도 기여했다. 비하치 포위를 해제하고[171] 보스니아 전쟁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으며,[238] 데이턴 협정 체결과 에르두트 협정을 통한 동슬라보니아와 바라냐 지역 반환으로 이어져 1995년 11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을 종식시켰다.[240][241][242] 국제 사회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크로아티아는 이 작전을 통해 자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인도주의적 측면:폭풍 작전으로 인해 대규모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탈출하면서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다.[143] 국제 언론과 국제 기구는 세르비아계 난민의 수를 최대 20만 명으로 보도하기도 했다.[168][169] 이들은 탈출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공군과 육군의 공격을 받았으며,[172][173]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174] 난민들은 검문소에서 돈을 빼앗기거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79]
6. 1. 군사적 측면
크로아티아군의 성공 요인은 크로아티아군 자체의 개선과 더불어,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이 점령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진지의 돌파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폭풍 작전은 모든 곳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주요 거점을 장악하면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지휘 구조와 전반적인 방어 능력이 무너졌다.[469]폭풍 작전 직전, 크로아티아군이 보산스코그라호보를 점령하고 특수 경찰이 그라차츠로 진격하면서 크닌은 사실상 방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499] 리카에서는 2개의 근위 여단이 전술적 종심이나 기동 예비군이 부족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점령 지역을 빠르게 차단하여 저항군을 고립시키고, 제1 크로아티아 근위 여단을 카를로바츠 군단 작전구역 북쪽으로 이동시켜 세르비아 크라이나 군을 바노비나로 몰아넣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바니야 군단의 예비군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에 의해 발이 묶이면서, 글리나와 페트리냐에 있던 세르비아 크라이나 군단도 패배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정규 크로아티아 육군 여단의 공격을 억제하거나 실질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근위 여단과 특수 경찰의 공격이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500] 크닌 지역의 유엔 크로아티아 신뢰회복활동을 지휘한[501] 앤드류 레슬리 대령은 폭풍 작전을 NATO 기준으로 "A+"를 받았을 교과서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했다.[50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이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더라도 크로아티아 육군은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바니야 군단을 물리쳤을 것이 거의 확실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정적인 방어가 빠르게 진행되는 공격에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육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은 세르비아 크라이나의 핵심 약점인 예비군 부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군은 측면에서 적의 기동을 확인할 수 없었고 그들의 특수군단은 슬루니 남쪽의 크로아티아 육군 제1근위여단에 맞서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예비군으로서의 임무에 실패했다.[500] 세르비아 크라이나는 전통적으로 스릅스카 공화국군과 유고슬라비아군을 전략 예비군으로 간주했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상황은 스릅스카 공화국의 예비군을 고정시켰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유고슬라비아군의 이동을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는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설령 밀로셰비치가 개입을 명령했더라도, 전투의 속도로 인해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을 지원하기 위한 증원군을 배치하는 데 매우 제한적인 시간을 이용했어야 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488]
6. 2. 정치적 측면
폭풍 작전은 크로아티아가 자국 영토를 수복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6][157][158][159] 이 작전으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군에게 빼앗겼던 국토의 18.4%에 해당하는 10,400㎢의 땅을 되찾았다.[160] 또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종식에도 기여했다.크로아티아는 폭풍 작전을 통해 비하치 포위를 해제하고,[171] 보스니아 전쟁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238] 이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도부가 스릅스카 공화국이 점령한 바냐루카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계획할 수 있게 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새로운 세력 균형을 만들고 전쟁 종식에 기여했다.[238]
이후 1995년 NATO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격과 함께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몇 달 뒤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었다.[240] 또한, 에르두트 협정을 통해 동슬라보니아와 바라냐 지역을 크로아티아 통제 하에 복원하고,[241] 1995년 11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을 종식시켰다.[242]
국제 사회의 반응은 엇갈렸다. UN과 대다수 국제 언론은 크로아티아를 비판했지만,[245] 클라우스 킨켈 독일 외무장관은 세르비아의 오랜 공격이 크로아티아의 인내심을 시험했다고 언급했다.[246] 미국은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군사적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245] 갤브레이스는 반대했다.[244]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1009호를 통해 크로아티아의 군사 작전 중단을 촉구했지만, 군대 철수는 요구하지 않았다.[244]
세르비아에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크로아티아를 비난했지만, 세르비아 언론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지도부를 비난했다.[249] 보이슬라브 셰셸 등 극단적인 정치인들은 크로아티아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고,[250] 라도반 카라지치는 밀로셰비치를 반역죄로 비난하며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도움을 요청했다.[251]
크로아티아에서는 여러 도시에서 귀환하는 크로아티아군 부대를 환영했고, 작전 참여 군인들을 위한 기념 메달이 제작되었다.[252] 1995년 8월 26일,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자그레브에서 카를로바츠, 고스피치, 크닌, 스플리트를 잇는 '자유 열차'를 타고 각 역에서 연설하며 승리를 자축했다.[253][254]
6. 3. 난민 위기
폭풍 작전으로 인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대규모로 탈출하면서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다.[143] 1995년 8월, 국제 연합(UN)은 코르둔과 바노비나(구 북부)에 3,500명, 리카와 북부 달마티아(구 남부)에 2,000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남아있고, 15만 명 이상이 유고슬라비아로, 1만에서 1만 5천 명이 바냐루카 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산했다.[143] 국제 언론[168]과 국제 기구[169]는 세르비아계 난민의 수를 최대 20만 명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한, 구 서보스니아 자치주 소속 보스니아인 난민 21,000명이 크로아티아로 망명했다.[143][170]항복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과 함께 갇혀 있던 약 35,000명의 세르비아계 난민들은 시사크와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 대피했다.[126] 그러나 대다수의 난민들은 크로아티아군이 진격하면서 만들어진 두 개의 통로, 즉 바노비나의 드보르 또는 리카를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점령지로 가는 경로를 따라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떠났다.[102] 이 탈출로는 크닌 점령 이후 크로아티아군 스플리트 군단의 북쪽 진격이 지연되고, 크로아티아 제2경비여단 전체가 페트리냐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만들어졌다.[171] 무기, 탄약, 대포, 전차를 대량으로 수송하며 후퇴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대피하거나 도망치는 민간인들과 섞여 도로를 거의 사용할 수 없었다.[147] 탈출하는 사람들은 크로아티아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172] 크로아티아군은 민간인 근처에 있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교전하기도 했다.[173] 난민들은 스릅스카 공화국군 전투기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며,[174] 때로는 후퇴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특수 부대의 전차에 치이기도 했다.[175][176] 8월 9일, 시사크에서 크로아티아 민간인들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의 항복 협정에 따라 구 북부 섹터에서 피난 온 난민 호송차량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공격으로 민간인 한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으며, 다수의 차량이 파손되었다. 유엔 민간 경찰 감시자들의 압력이 있은 후에야 크로아티아 경찰이 개입했다.[177] 다음 날, 피터 갤브레이스 당시 크로아티아 주재 미국 대사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민 대열에 합류했고,[178] 난민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크로아티아 경찰의 수도 증가했다.[172] 스릅스카 공화국을 통과하는 난민들은 검문소에서 돈을 빼앗겼고, 지역 군인들에게 연료 및 기타 서비스에 대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179]
정치적 실패의 증거를 줄이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난민들을 세르비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수도 베오그라드에 난민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180]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난민들에게 헝가리인이 주로 거주하는 보이보디나와 알바니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코소보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하여 이 지역의 불안정성을 확대시켰다.[181][182] 코소보에 2만 명이 정착할 계획이었지만, 4,000명만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182] 8월 12일 이후 세르비아 당국은 군 복무 연령대의 난민들 중 일부를 불법 이민자로 선언하며 추방하기 시작했다.[183] 이들은 징집을 위해 동부 크로아티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이나 세르비아 크라이나로 넘겨졌다.[184] 일부 징집병들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구타를 당했다.[183] 일부 지역에서는 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새로운 숙소를 요구하는 난민들에 의해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185] 마찬가지로, 바냐루카를 통과하는 난민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스니아인들을 그들의 집 밖으로 내몰았다.[186]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초기인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22만 명 이상의 비세르비아계 인구가 세르비아계 점령 지역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187] 폭풍 작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크로아티아 난민뿐만 아니라 난민 일부가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지역의 주택에 대거 정착하면서 세르비아계 난민의 귀환에 걸림돌이 되었다.[188] 2010년 9월 기준으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에서 탈출한 세르비아인 30만 명에서 35만 명 중[189] 132,707명이 귀환한 것으로 등록되어 있으나,[190] 이 중 60%에서 65%만이 크로아티아에 영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로 귀환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2만 명에서 2만 5천 명에 불과하다.[189] 2010년 기준, 크로아티아에서 온 세르비아계 난민 약 60,000명이 세르비아에 남아 있다.[191]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크라이나에서 출발한 후 차별적 조치를 채택한 크로아티아 정부의 조치가 주민들의 출발이 강제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192] 휴먼 라이츠 워치는 1999년 세르비아계가 차별적인 법과 관행으로 인해 크로아티아 시민으로서 시민권을 누리지 못했고, 크로아티아로 자유롭게 돌아와 거주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고 보고했다.[193] 난민의 귀환은 여러 장애물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다. 여기에는 크로아티아 난민들이 빈집에 정착하면서 발생하는 재산 소유와 숙소 제공 문제,[188] 한때 정부 소유 주택에 거주했던 난민들의 임차권을 박탈하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의 법안 등이 해당된다. 이 법안은 전쟁 후 폐지되었고[194] 이후 크로아티아 정부는 귀환자들에게 대체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195] 2010년 11월까지 6,538호의 주택이 할당되었다. 또 다른 장애물은 난민들이 거주 자격이나 크로아티아 시민권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후 적용 가능한 법안이 완화되어 2010년 11월까지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발행한 신분 서류의 유효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190] 크로아티아 정부가 일반 사면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면이 전쟁 범죄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196] 난민들은 법적 기소를 두려워한다.[194]
2015년과 2017년 보고서에서 국제앰네스티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그들의 재산을 되찾는 데 지속적인 장애물이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197] 그들은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인들이 공공 부문 고용에서 차별을 하며, 전쟁 중 비워진 사회주택에 대한 임차권 회복 문제에 계속 직면했다고 보고했다.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또한 혐오 발언,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일부 마을에서 계속 정치화되고 실행되지 않는 소수 언어와 대본을 사용할 권리 등을 지적했다.[197]
7. 전쟁 범죄
1995년 8월, 유엔은 코르둔과 바노비나(구 북부 섹터)에 3,500명, 리카와 북달마티아(구 남부 섹터)에 2,000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남아있다고 추산했다. 또한 15만 명 이상이 유고슬라비아로, 1만에서 1만 5천 명은 바냐루카 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산했다.[478] 국제 언론[503]과 국제 기구[504]는 세르비아계 난민이 20만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구 서보스니아 자치주 소속 보스니아인 난민 21,000명도 크로아티아로 망명했다.[478][505]
항복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과 함께 갇혀 있던 약 35,000명의 세르비아 난민들은 시사크와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 대피했다.[461] 대다수의 난민들은 크로아티아 육군이 진격하자 바노비나의 드보르 또는 리카를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점령지로 가는 두 개의 통로를 따라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떠났다.[437] 무기, 탄약, 대포 및 전차를 대량으로 수송하며 후퇴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종종 대피하거나 도망치는 민간인들과 섞여 사용할 도로가 거의 없었다.[482] 탈출하는 부대들은 크로아티아 공군[507]과 크로아티아 육군에 의해 간헐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민간인 근처에 위치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교전을 벌였다.[508] 난민들은 스릅스카 공화국군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의 표적이 되었고[509] 때때로 후퇴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특수 부대의 전차에 치였다.[510][511] 8월 9일, 크로아티아 민간인들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의 항복 협정에 따라 이전 섹터 북부에서 피난 온 난민 호송차량을 시사크에서 공격하여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민간인이 부상을 입었으며 다수의 차량에 피해가 발생했다.[512]
정치적 실패의 증거를 줄이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세르비아 여러 지역에 난민을 분산시키고 수도 베오그라드에 난민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515]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난민들에게 헝가리인이 주로 거주하는 보이보디나와 알바니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코소보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하여 이 지역의 불안정성을 확대시켰다.[516][517] 코소보에 20,000명이 정착할 계획이었지만 4,000명만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517] 8월 12일 이후 세르비아 당국은 군 복무 연령대의 난민들 중 일부를 불법 이민자로 선언하며 추방하기 시작했다.[518] 그들은 징집을 위해 크로아티아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이나 세르비아 크라이나로 넘겨졌다.[519] 일부 징집병들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구타를 당했다.[518]
폭풍 작전의 민간인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크로아티아 검찰청은 전투 및 즉각적인 여파로 발생한 전쟁 범죄 24건에서 156명, 살인 피해자 47명 등 21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크로아티아 헬싱키 위원회는 이 주장에 반박하며 폭풍 작전 이후 67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추가로 837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실종자로 등록되었다고 보고한다.[558][559] 다른 자료에 따르면 폭풍 작전이 보스니아로 계속된 후 181명의 희생자가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사망하고 므르코니치그라드의 집단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561][562] 세르비아 자료에 따르면 1,192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563]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검찰은 민간인 사망자 수를 324명으로 집계했다.[564] 크로아티아 정부 관계자는 작전 중 크로아티아 민간인 42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565]
폭풍 작전 당시와 이후에 파괴된 재산의 정확한 수는 전쟁 초기부터 이미 많은 가옥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파악하기 어렵다.[522] 휴먼 라이츠 워치(HRW)는 전투 중과 이후에 5,000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66] 휴먼 라이츠 워치는 또한 폭풍 작전 당시의 학대의 대다수는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후 수개월 동안 대규모로 지속된 이러한 학대에는 남겨진 노약자 세르비아인에 대한 즉결 처형, 세르비아계 마을과 재산의 전면적인 방화 및 파괴 등이 포함되었다. 폭풍 작전 이후 수개월 동안 최소 150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즉결 처형되었고 또 다른 110명이 강제로 사라졌다.[568] 그러한 예로 9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사망한 바리보데 학살이 있다. 폭풍 작전 당시나 이후에 기록된 다른 세르비아계 민간인 대상 범죄는 코미치, 키야니, 골루비치, 우즈돌레, 그루보리, 고시치 등에서 발생했다.
2012년 11월 기준으로 크로아티아 당국은 폭풍 작전 기간 또는 이후에 이 지역에서 자행된 범죄에 대한 6,390건의 보고를 받았고, 약탈, 방화, 살인, 전쟁 범죄 및 기타 불법 행위를 저지른 2,380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같은 날짜 기준으로 폭풍 작전과 관련된 전쟁 범죄 재판은 24건 더 진행 중이다.[569] 2012년 세르비아 당국은 폭풍 작전 기간 동안 자행된 전쟁 범죄 사례 5건을 조사하고 있었다.[570]
7. 1. 고토비나 등의 재판

국제 유고 전범 재판소(ICTY)는 1993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27에 따라 설립되었으며,[198] 고토비나, 체르마크, 마르카치를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세르비아인을 영구적으로 제거하려는 공동 범죄 행위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199] ICTY 기소장에 따르면, 공동 범죄 행위의 다른 가담자로는 투지만, 슈삭, 보베트코와 체르벤코가 있었지만,[199] 보베트코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2001년 첫 번째 관련 ICTY 기소장이 발부되기 전에 사망했다.[200] 보베트코는 ICTY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1년 후 사망하여 ICTY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인도될 수 없었다.[201] 고토비나 외 재판은 2008년에 시작되었고,[202] 3년 후 고토비나와 마르카치의 유죄 판결과 체르마크의 무죄 판결로 이어졌다.[203] 고토비나와 마르카치는 2012년 11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204]
ICTY는 폭풍 작전이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표적으로 삼지 않았으므로, 민족 박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항소 법원은 크로아티아군과 특수 경찰이 포격 공격 이후 범죄를 저질렀지만, 국가와 군 지휘부는 범죄 계획 및 발생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ICTY는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 소수 민족을 강제로 이주시키려는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205] 또한, 고토비나와 마르카치가 세르비아 민간인의 귀환을 막는 차별적인 노력을 하는 데 역할을 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192] 5명의 재판부 중 2명의 판사가 이 판결에 반대했다.[206] 이 사건은 전쟁법에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으며 선례로 묘사되었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재판소(ICTY)는 크로아티아군의 세 지휘관인 상급 대장 이반 체르마크, 상급 대장 므라덴 마르카츠, 준장 (후에 대장) 안테 고토비나에 대한 소장을 제출했다. 소장에 따르면 이들 3명은 크라이나 세르비아인에 대한 전쟁 범죄에 대해 개인적 및 지도자로서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ICTY의 검사 루이즈 아르부르는 후에 만약 이 3명을 기소할 시점에 프라뇨 투지만이 생존해 있었다면 투지만도 기소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체르마크와 마르카츠는 ICTY에 인도되었지만 고토비나는 도주했다.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 고토비나는 영웅으로 여겨졌다. 고토비나는 크로아티아 국내, 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고 널리 믿어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당국이 고토비나가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은밀히 지원하고 있거나, 적어도 고토비나에게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후에 이들은 오해였음이 밝혀졌다. 미국은 고토비나 체포에 50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었고, 고토비나는 라트코 믈라디치나 라도반 카라지치 등과 함께 ICTY의 최중요 수배자가 되었다. 이 문제는 크로아티아의 외교 관계에 큰 지장을 주었다. 유럽 연합 가입 절차는 크로아티아 정부가 고토비나의 잠적을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 때문에 2005년 3월까지 보류되었다.
2005년 12월 8일, 고토비나는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 호텔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헤이그의 ICTY로 인도되기 전에 법적 절차를 위해 고토비나는 마드리드로 보내졌다. ICTY는 후에 3명에 대한 소송을 하나로 묶었다. 3명에 대한 소송은 2008년 3월에 시작되었지만 체르마크는 2011년, 마르카츠와 고토비나는 2012년에 각각 무죄가 확정되었다.
7. 2.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의 집단학살
1990년 8월, 크로아티아에서 통나무 혁명이 일어나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이 수립되었고, 1991년 3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333] 1991년 6월,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함께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정부는 크로아티아 주민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시작했다.[334] 1991년 8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 크라이나가 점령한 영토를 탈출했고,[336] 1993년 초까지 대부분의 비세르비아인들이 추방되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따르면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살해당했으며, 추방된 크로아티아인과 다른 비세르비아인들의 수는 170,000명에 이르고,[337] 휴먼 라이츠 워치는 250,000명으로 추정한다.[338]크로아티아군은 슬라보니아 동부와 서부, 크라이나 지역 일부에서 세르비아인을 대상으로 인종 청소를 벌였지만, 규모는 제한적이었고 세르비아인 희생자는 세르비아군의 크로아티아인 희생자보다 적었다.[341] 1991년에는 70,000명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쫓겨났다.[336]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1991년 5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이 창설되었고, 이후 크로아티아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344]
199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7호에 따라 설립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세르브인을 영구적으로 제거하려는 공동범죄집단 가담 혐의로 고토비나, 체르마크, 마르카치를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533] 2012년 11월, 고토비나와 마르카치는 항소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539] ICTY는 폭풍 작전이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목표로 삼지 않아 인종 박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540]
폭풍 작전이 전쟁 범죄인지에 대한 견해는 엇갈린다. 일부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가장 효율적인 인종 청소를 수행했다고 비난하지만,[542] 크로아티아는 이를 부인한다. 2015년 2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폭풍 작전이 대량학살이라는 세르브계 소송을 기각했지만,[553] 세르브계 민간인에 대한 심각한 범죄가 발생했음을 재확인했다.[554]
폭풍 작전의 민간인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크로아티아 검찰청은 214명, 크로아티아 헬싱키 위원회는 677명의 민간인 사망을 주장한다.[558][559] 세르비아 자료는 1,192명의 민간인 사망 또는 실종을 주장하며,[563] ICTY 검찰은 민간인 사망자 수를 324명으로 집계했다.[564]
휴먼 라이츠 워치(HRW)는 전투 중과 이후 5,000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한다.[566] HRW는 폭풍 작전 당시의 학대 대부분이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여기에는 세르비아계 민간인 즉결 처형, 마을과 재산 파괴 등이 포함된다고 보고했다.[568]
7. 3. 민간인 피해
1995년 8월, 유엔은 코르둔과 바노비나(구 북부)에 3,500명, 리카와 북부 달마티아(구 남부)에 2,000명의 세르비아계 주민이 남아있다고 추산했다. 또한 15만 명 이상이 유고슬라비아로, 1만에서 1만 5천 명은 바냐루카 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산했다.[478] 국제 언론[503]과 국제 기구[504]는 세르비아계 난민이 20만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구 서보스니아 자치주 소속 보스니아인 난민 21,000명도 크로아티아로 망명했다.[478][505]항복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과 함께 갇혀 있던 약 35,000명의 세르비아 난민들은 시사크와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 대피했다.[461] 대다수의 난민들은 크로아티아 육군이 진격하자 바노비나의 드보르 또는 리카를 통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점령지로 가는 두 개의 통로를 따라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떠났다.[437] 무기, 탄약, 대포 및 전차를 대량으로 수송하며 후퇴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종종 대피하거나 도망치는 민간인들과 섞여 사용할 도로가 거의 없었다.[482] 탈출하는 부대들은 크로아티아 공군[507]과 크로아티아 육군에 의해 간헐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민간인 근처에 위치한 세르비아 크라이나군과 교전을 벌였다.[508] 난민들은 스릅스카 공화국군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의 표적이 되었고[509] 때때로 후퇴하는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특수 부대의 전차에 치였다.[510][511] 8월 9일, 크로아티아 민간인들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코르둔 군단의 항복 협정에 따라 이전 섹터 북부에서 피난 온 난민 호송차량을 시사크에서 공격하여 민간인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민간인이 부상을 입었으며 다수의 차량에 피해가 발생했다.[512]
정치적 실패의 증거를 줄이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세르비아 여러 지역에 난민을 분산시키고 수도 베오그라드에 난민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515]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난민들에게 헝가리인이 주로 거주하는 보이보디나와 알바니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코소보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하여 이 지역의 불안정성을 확대시켰다.[516][517] 코소보에 20,000명이 정착할 계획이었지만 4,000명만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517] 8월 12일 이후 세르비아 당국은 군 복무 연령대의 난민들 중 일부를 불법 이민자로 선언하며 추방하기 시작했다.[518] 그들은 징집을 위해 크로아티아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이나 세르비아 크라이나로 넘겨졌다.[519] 일부 징집병들은 세르비아 크라이나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하고 구타를 당했다.[518]
폭풍 작전의 민간인 사상자 수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크로아티아 검찰청은 전투 및 즉각적인 여파로 발생한 전쟁 범죄 24건에서 156명, 살인 피해자 47명 등 21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크로아티아 헬싱키 위원회는 이 주장에 반박하며 폭풍 작전 이후 67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추가로 837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실종자로 등록되었다고 보고한다.[558][559] 다른 자료에 따르면 폭풍 작전이 보스니아로 계속된 후 181명의 희생자가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사망하고 므르코니치그라드의 집단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561][562] 세르비아 자료에 따르면 1,192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고 한다.[563] ICTY 검찰은 민간인 사망자 수를 324명으로 집계했다.[564] 크로아티아 정부 관계자는 작전 중 크로아티아 민간인 42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565]
폭풍 작전 당시와 이후에 파괴된 재산의 정확한 수는 전쟁 초기부터 이미 많은 가옥들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파악하기 어렵다.[522] 휴먼 라이츠 워치(HRW)는 전투 중과 이후에 5,000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66] 휴먼 라이츠 워치는 또한 폭풍 작전 당시의 학대의 대다수는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후 수개월 동안 대규모로 지속된 이러한 학대에는 남겨진 노약자 세르비아인에 대한 즉결 처형, 세르비아계 마을과 재산의 전면적인 방화 및 파괴 등이 포함되었다. 폭풍 작전 이후 수개월 동안 최소 150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즉결 처형되었고 또 다른 110명이 강제로 사라졌다.[568] 그러한 예로 9명의 세르비아계 민간인이 사망한 바리보데 학살이 있다. 폭풍 작전 당시나 이후에 기록된 다른 세르비아계 민간인 대상 범죄는 코미치, 키야니, 골루비치, 우즈돌레, 그루보리, 고시치 등에서 발생했다.
2012년 11월 기준으로 크로아티아 당국은 폭풍 작전 기간 또는 이후에 이 지역에서 자행된 범죄에 대한 6,390건의 보고를 받았고, 약탈, 방화, 살인, 전쟁 범죄 및 기타 불법 행위를 저지른 2,380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같은 날짜 기준으로 폭풍 작전과 관련된 전쟁 범죄 재판은 24건 더 진행 중이다.[569] 2012년 세르비아 당국은 폭풍 작전 기간 동안 자행된 전쟁 범죄 사례 5건을 조사하고 있었다.[570]
8. 작전 이후
폭풍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지상 작전이었으며,[490] 크로아티아의 결정적 승리로 끝났다.[491][492][493][494] 이 작전을 통해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게 빼앗겼던 국토의 18.4%에 해당하는 10,400㎢의 땅을 되찾았다.[495]
크로아티아군의 성공은 자체적인 개선과 더불어,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이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의 약점인 예비군 부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500] 세르비아 크라이나군은 정규 크로아티아군 여단의 공격을 억제하거나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근위 여단과 특수 경찰의 공격이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났다.[500]
이 작전으로 세르브계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과 그로 인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다. 1995년 8월 유엔은 세르브계 주민 15만 명 이상이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으로, 1만에서 1만 5천 명이 바냐루카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산했다.[478] 국제 언론과 기구는 세르브계 난민이 20만 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503][504]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난민을 세르비아 여러 지역에 분산시키고 수도 베오그라드에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515] 또한, 난민들에게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지역에 정착하도록 장려하여 이 지역의 불안정성을 확대시켰다.[516][517]
국제앰네스티는 세르브계 주민들이 재산을 되찾는 데 지속적인 장애물이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532] 또한,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인들이 공공 부문 고용 및 전쟁 중 비워진 사회 주택의 임차권 회복에 있어 차별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532]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패배로 세르브계 보스니아인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문제 협상의 필요성을 깨달았고,[572] 폭풍 작전 이후 세르비아에 유리하던 전세가 역전되었다.[573] 미국의 협상 주도력 역시 크게 진작되었다.[573] 또한, 폭풍 작전으로 비하치 포위전이 끝나고,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지도부는 바냐루카 지역으로의 대규모 군사 개입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572] 1995년 NATO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격과 더불어[572] 폭풍 작전으로 크로아티아와 세르브계는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이는 몇 달 뒤 데이턴 협정으로 이어졌다.[574] 또한, 크로아티아는 에르두트 협정을 통해 동슬라보니아와 바라냐 일대의 관할권을 반환받을 수 있었으며,[575] 1995년 11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에르두트 협정으로 끝나게 되었다.[576]
서방의 정보국들은 크로아티아의 패배를 예상했기에 폭풍 작전이 크로아티아 측의 승리로 끝나자 많은 관측자들이 놀랐다.[577] 유엔 관리들과 대부분의 국제 언론은 크로아티아를 비난했다.[578] 칼 빌트는 크로아티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유엔 사무총장 특별 대표 스톨텐베르크는 아카시 야스시에게 크로아티아군에 대한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공습 요청을 촉구했다. 독일 외무장관 클라우스 킹켈은 유감을 표하면서도 "세르비아의 침략의 세월은 크로아티아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했다"고 덧붙였다.[579] 미국의 반응은 엇갈렸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군사적 발전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반면[578] 피터 갤브레이스는 반대를 선언했다.
세르비아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의 공격을 비난했지만, 밀로셰비치의 영향을 받은 언론들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지도부가 무능하다고 비난했고,[582] 보이슬라브 셰셸을 포함한 가장 극단적인 정치인들은 크로아티아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583]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밀로셰비치를 반역죄로 비난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584]
크로아티아에서는 수많은 도시에서 기지로 복귀하는 크로아티아 부대의 영웅들을 환영했으며, 폭풍 작전에 참여한 크로아티아군 부대에게 수여될 기념 메달이 제작되었다.[585] 8월 26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프라뇨 투지만과 크로아티아의 공무원, 공공 인사, 언론인, 외교단 대부분을 태우고 자그레브에서 카를로바츠, 고스피치, 크닌, 스플리트를 거치는 철도 여행을 계획했다.[586] 투지만은 각 역에서 연설을 했다.[587] 크닌에서 투지만은 "[세르비아인들은] 더러운 [돈]과 더러운 속옷을 챙길 시간조차 없었다. 이 날, 우리는 크로아티아가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을 멈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땅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세기 동안 자유롭고 독립적인 크로아티아를 위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588] 30만 명의 군중이 모였던 스플리트에서의 마지막 집회에서, 투지만은 부코바르의 해방도 맹세했다.[589]
8. 1. 크로아티아의 기념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크로아티아군이 크닌을 점령한 날인 8월 5일을 승리와 조국 감사와 크로아티아 방어자의 날로 지정하여 크로아티아의 공휴일로 삼아 폭풍 작전을 공식적으로 기념한다.[258]크로아티아는 폭풍 작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서 귀환한 크로아티아군 부대를 위한 환영 행사를 열었고, 작전에 참여한 크로아티아군 병사에게 수여하는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252] 1995년 8월 26일에는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정부 관리, 공인, 언론인,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외교 사절단을 자그레브에서 카를로바츠, 고스피치, 크닌, 스플리트로 데려가는 자유 열차를 운행했다.[253] 투지만은 각 정차역에서 연설을 했다.[254] 크닌에서는 "오늘, 우리는 크로아티아가 역사적인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멈췄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땅의 해방이 아니라,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자유롭고 독립적인 크로아티아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255] 30만 명이 모인 스플리트에서의 마지막 집회 동안, 투지만은 부코바르도 해방하겠다고 다짐했다.[256]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폭풍 작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257]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에서는 작전 중 또는 작전 후에 살해되거나 피난한 세르비아인들을 애도하는 날로 기념한다.[259]
2015년, 작전 20주년을 맞아 크로아티아 국영 TV(HRT)는 폭풍 작전의 준비와 실행에 관한 4부작 다큐멘터리 ''Godina Oluje''를 제작했다. 이 시리즈는 크로아티아계 미국인 영화 제작자 잭 바릭이 연출했다.[260]
2018년 작전 23주년 기념식에는 몬테네그로의 무관인 이반 마슈로비치 준장이 참석했다. 몬테네그로가 크닌에 사절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조치는 몬테네그로 내 친세르비아 정치인들과 세르비아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261][262] 몬테네그로 국방부는 "몬테네그로는 다른 사람의 싸움을 싸우지 않을 것이다. 몬테네그로는 '가깝고 우호적인' 세르비아와 '가깝고 우호적인' NATO 동맹국 크로아티아를 포함하여 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좋은 이웃 관계를 구축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며 사절을 파견한 결정을 옹호했다.[264][265]
2020년 작전 25주년 기념식에는 처음으로 민족 세르비아인 정치 대표인 크로아티아 부총리 보리스 밀로셰비치가 참석했다. 그의 행보는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크로아티아 총리 안드레이 플렌코비치는 이 행보가 "크로아티아 사회,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 소수 민족 간의 관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관계에 새로운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270]
8. 2. 세르비아의 기념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에서는 폭풍 작전 중 또는 작전 후에 살해되거나 피난한 세르비아인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259]8. 3. 몬테네그로의 입장
몬테네그로는 폭풍 작전 23주년 기념식에 처음으로 무관인 이반 마슈로비치 준장을 파견했다.[261] 이는 몬테네그로가 크닌에 사절을 보낸 첫 사례였다. 몬테네그로 국방부는 "몬테네그로는 다른 사람의 싸움을 싸우지 않을 것이며, 세르비아, NATO 동맹국 크로아티아를 포함하여 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좋은 이웃 관계를 구축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264][265]하지만 이러한 몬테네그로의 결정은 친세르비아 정치인들과 세르비아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261][262] 우익 정당 신세르비아 민주주의(NSD)는 마슈로비치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세르비아 국민에 대한 범죄를 기념하기 위해 그를 보낸" 사람들도 비난했다.[261][262] 일부는 그를 몬테네그로 파시스트 협력자 세쿨라 드르제비치에 비유하기도 했다.[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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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ovina komentirao HOS-ovce u Kninu: 'U svemu pa i u slobodi postoji discipl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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