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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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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는 1938년,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정권의 군 장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히틀러는 국방군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와 국방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를 스캔들에 연루시켰다. 블롬베르크는 결혼 스캔들로, 프리치는 동성애 혐의 조작으로 각각 실각했다. 이 사건을 통해 히틀러는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를 설치하여 군의 권한을 축소하는 등 군부 개편을 단행했다. 이는 독일의 전쟁 준비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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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년 1월 -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은 1937년 중일 전쟁 중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후 6주 동안 자행한 대규모 학살 및 전쟁범죄로, 희생자 수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국제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범죄로 인정하고 있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
사건 개요
사건명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
다른 명칭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발생 시기1938년 초
장소독일
주요 인물
관련 인물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베르너 폰 프리치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발터 폰 브라우히치
사건 배경
원인군 내부 권력 다툼 및 나치 정권의 군 장악 시도
주요 내용국방장관 블롬베르크의 부적절한 결혼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의 간통 누명
사건 전개
블롬베르크의 실각부적절한 결혼으로 인한 사임
프리치의 해임간통 혐의로 인한 해임 (후에 무죄 판명)
군 수뇌부 개편히틀러가 직접 군 최고 지휘권을 장악, 괴링과 힘러의 영향력 확대
결과 및 영향
정치적 결과히틀러의 군 통제 강화
나치 정권의 권력 강화
군사적 영향군 내부의 반 히틀러 세력 약화
제2차 세계 대전 준비 가속화
추가 정보블롬베르크와 프리치의 대체자로 빌헬름 카이텔과 발터 폰 브라우히치가 임명됨. 이 사건은 나치 독일의 군사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침.

2. 배경

나치 정권 초기, 독일 국방군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으며, 히틀러는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특히 육군은 프로이센 군인 정신을 강조하며 히틀러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2. 1. 히틀러의 군 장악 시도

나치 정권 성립 후에도 국방군 장교단은 독립적인 기풍이 강하여, 총통아돌프 히틀러는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내려온 관습에 따라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은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각 군의 총사령관에게 위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육군의 독립 경향이 강했다. 당시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인이었으며, 장교단의 신뢰도 두터웠고, 때로는 히틀러를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한편, 국방장관 블롬베르크히틀러 내각 성립 이전부터 나치에 협력적이었으며, 장교단에서는 "고무 사자(겉만 번지르르함)"라고 조롱받았다. 히틀러는 블롬베르크를 통해 군을 지배하려 하였고, 먼저 지휘권을 국방부 장관에게 반환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리치와 참모총장베크의 저항으로 실패로 끝났다.

1937년, 히틀러는 국방군 상층부와 외무장관 노이라트를 포함한 비밀 회담에서, 가까운 미래에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에 대한 공격 계획을 발표했다. 블롬베르크와 프리치는 히틀러의 정세 분석을 비판하고, 영국프랑스를 적으로 만들 가능성을 지적하며, 군의 체제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프리치에게 압력을 가하여 국방군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히틀러에게 있었지만, 블롬베르크도 반대하여 실패로 끝났다(호스바흐 각서).

2. 2. 호스바흐 각서

1937년, 히틀러는 국방군 상층부와 노이라트 외무장관을 포함한 비밀 회담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를 공격할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블롬베르크와 프리치는 영국프랑스를 적으로 만들 가능성을 제기하며, 당시 군의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히틀러의 정세 분석과 계획에 반대했다. 이 회의는 호스바흐 각서로 알려져 있다.

3. 사건의 전개

1938년 초, 독일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가 스캔들에 휘말려 강제 퇴진당하면서, 나치 독일의 군 수뇌부가 교체되었다.

블롬베르크는 평민 출신 타이피스트 에르나 그룬과 교제하다가 1937년 결혼을 결심하고 헤르만 괴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 당시 독일 장교는 군인이나 귀족 가문 출신과 결혼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에르나는 평민 출신이었기에 이 결혼은 이례적이었다.[1]

1938년 1월 12일 블롬베르크와 에르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나, 블롬베르크 측 친척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고관의 결혼임에도 부인의 사진도 공개되지 않았다.[1] 결혼 직후, 에르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누드 사진이 베를린 경시 총감 헬도르프에게 전달되었다.[1] 경찰은 에르나가 과거에 음란 사진을 찍는 등 오랫동안 범죄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1] 뉘른베르크 재판 증언에 따르면, 에르나는 7개 대도시에서 매춘부로 등록되었고, 베를린 법원에서 음란 사진 배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도 있었다.[1]

아돌프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에게 결혼 무효화를 명령했지만, 블롬베르크는 거부했다. 괴링이 에르나의 과거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자, 블롬베르크는 1938년 1월 27일 사임했다.[1]

한편,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는 프리치를 제거하기 위해 동성애 혐의를 조작했다.[7] 1936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프리치의 동성애 혐의 파일을 만들어 히틀러에게 전달했으나, 히틀러는 거부하고 파일 파기를 명령했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파일 사본을 보존했다.[7]

1938년 하이드리히는 다시 프리치에 대한 조작된 혐의를 제기했다. 결국 1938년 1월 28일 프리치는 게슈타포 본부에서 심문을 받고, "건강상의 이유"로 면직되었다.[7] 당시 175조에 의해 남성 동성애는 범죄였으며, 프리치는 청렴하고 여성 관계에 대한 소문도 없었기 때문에, 동성애 혐의는 그를 실각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7]

프리치에 대한 혐의는 사실 아킴 폰 프리쉬라는 기병대장에 관한 것이었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한스 슈미트라는 인물을 증인으로 내세웠으나, 슈미트는 베를린 갱단의 범죄자로 드러났다.[8] 독일 장교단은 프리치의 부당한 대우에 경악했고, 명예 법정을 요구하여 괴링이 재판을 주재했다.[9]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비판은 잠잠해졌고, 슈미트는 혐의를 철회하여 프리치는 1938년 3월 18일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평판은 이미 손상된 후였다.[10] 폴란드 침공 직후, 프리치는 최전선 부대를 시찰하던 중 폴란드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11]

3. 1. 블롬베르크 결혼 스캔들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평민 출신 타이피스트인 에르나 그룬과 교제하고 있었는데, 1937년 여름 무렵 게슈타포 장관 하이드리히는 블롬베르크가 에르나를 자주 방문하는 것을 알아챘다. 1937년 11월 하순경 블롬베르크는 결혼을 결심하고 괴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독일 장교는 군인이나 귀족 가문 출신과 결혼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에르나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이례적이었다. 블롬베르크는 장교단의 반발을 예상하고 히틀러나 괴링의 도움을 받아 결혼을 성사시키려 했다.[1]

괴링은 자신도 평민 출신이었기에 이를 축복했고, 히틀러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며칠 후 블롬베르크는 괴링에게 에르나의 남자친구를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괴링의 지시로 남자친구는 아르헨티나로 "영전"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에르나에게 "불미스러운 경력"이 있다고 괴링에게 알렸다.[1]

1938년 1월 12일, 블롬베르크와 에르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지만, 블롬베르크 측 친척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고관의 결혼임에도 부인의 사진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 무렵, 에르나 부인에 대한 수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1]

결혼 직후, 에르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누드 사진이 베를린 경시 총감 헬도르프에게 전달되었다. 헬도르프는 사진과 그 여성의 매춘 행위 적발 기록을 가지고 블롬베르크의 친척인 빌헬름 카이텔을 찾아갔다. 카이텔은 괴링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확인하려 했다. 괴링은 힘러, 하이드리히와 상의한 후 히틀러에게 보고했다.[1]

베를린 경찰은 에르나 그룬이 과거에 음란 사진을 찍는 등 오랫동안 범죄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증언된 바에 따르면, 에르나는 7개 대도시에서 매춘부로 등록되어 있었고, 베를린 법원에서 음란 사진 배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도 있었다.[1]

이러한 범죄 기록을 가진 사람과의 결혼은 블롬베르크가 정의한 장교의 행동 기준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히틀러에게 충격을 주었다. 히틀러와 괴링은 이 상황을 블롬베르크를 제거할 기회로 보았다.[2]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에게 결혼을 무효화하라고 명령했지만, 블롬베르크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괴링이 에르나의 과거를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자, 블롬베르크는 1938년 1월 27일 사임했다.[1]

3. 2. 프리치 동성애 스캔들

헤르만 괴링하인리히 힘러는 베르너 폰 프리치를 제거하기 위해 동성애 혐의를 조작했다. 괴링은 프리치가 블롬베르크의 후임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힘러는 슈츠슈타펠(SS)을 강화하기 위해 국방군을 약화시키려 했다.[7] 1936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프리치에 대한 동성애 혐의 파일을 만들어 히틀러에게 전달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파일 파기를 명령했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파일 사본을 보존했다.[7]

1938년, 하이드리히는 다시 프리치에 대한 조작된 혐의를 제기했다. 하이드리히는 조서를 수정하여 히틀러에게 제출했고, 히틀러와 괴링은 호스바흐 대령에게 이 의혹을 믿도록 설득했다. 호스바흐는 장교단을 설득하기 위한 재료로 이용하려 했으나, 호스바흐는 납득하지 않고 프리치에게 알렸다.

프리치는 호스바흐의 조언을 묵살하고,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소년들의 존재를 스스로 문제 삼는 등 자충수를 두었다. 결국 1938년 1월 28일, 프리치는 게슈타포 본부에서 심문을 받았고, "건강상의 이유"로 면직되었다. 당시 175조에 의해 남성 동성애는 범죄였으며, 프리치는 청렴하고 여성 관계에 대한 소문도 없었기 때문에, 동성애 혐의는 그를 실각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7]

프리치에 대한 혐의는 사실 아킴 폰 프리쉬라는 기병대장에 관한 것이었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한스 슈미트라는 인물을 증인으로 내세웠으나, 슈미트는 베를린 갱단의 범죄자로 드러났다.[8] 독일 장교단은 프리치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경악했고, 명예 법정을 요구하여 괴링이 재판을 주재했다.[9]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비판은 잠잠해졌고, 슈미트는 혐의를 철회하여 프리치는 1938년 3월 18일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의 평판은 이미 손상된 후였다. 육군은 프리치의 복귀를 요구했지만, 히틀러는 그를 포병 연대 명예 대령으로 임명하는 데 그쳤다.[10] 폴란드 침공 직후, 프리치는 최전선 부대를 시찰하던 중 폴란드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11]

4. 나치당의 군 장악

헤르만 괴링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사임 이후 국방부 장관 자리를 노렸고, 블롬베르크 역시 괴링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국방부 장관 자리를 공석으로 두었다.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게 국방부 장관 겸임을 제안했다.

이후 히틀러는 군 기구 개편을 통해 군 최고 지휘권을 장악하고, 군 인사 개편 및 외교, 경제 분야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두 장군의 사임과 함께 1938년 2월 5일에 발표되었다. 그날 『푈키셔 베오바흐터』 지에는 "모든 권력이 총통에게 집중"이라는 큰 제목이 실렸다.

히틀러가 모략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원했던 국방군 장악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4. 1.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설치

히틀러는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을 이용하여 국방부(독일어: ''Reichskriegsministerium'')의 권한을 새로 설치한 국방군 최고사령부(독일어: ''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로 이전했다.[6] 1938년 2월 4일, 빌헬름 카이텔이 OKW의 수장이 되었다.[6] 이로써 기존의 육군 최고사령부(독일어: ''Oberkommando des Heeres'', OKH)는 OKW에 종속되어 약화되었다.

히틀러는 군 기구 개편을 통해 군 최고 지휘권을 장악했다. 국방성 국방군국은 국방군 최고사령부로 승격되었고, 빌헬름 카이텔이 대장으로 승진하여 사령부 총장이 되었다. 국방군 최고사령부에는 작전부가 설치되어 전쟁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 육군 참모본부가 담당하던 전쟁 계획 수립 권한이 이관되면서 육군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4. 2. 군 인사 개편

히틀러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여러 장군과 장관들을 자신에게 더 충성스러운 인물들로 교체하고, 이미 사실상 지휘하고 있던 ''Wehrmacht''에 대해 더욱 효과적인 사실상 통제권을 행사했다. 일부 ''Wehrmacht''의 고위 장교들은 이러한 변화에 항의하기도 했다.[6]

블롬베르크는 육군 총사령관 후임으로 발터 폰 브라우히치 대장과 발터 폰 라이헤나우 대장을 추천했다. 그러나 라이헤나우는 나치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등이 반발했기 때문에 브라우히치가 후임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브라우히치는 이혼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위자료를 대신 지불하는 등으로 해결했다. 또한, 브라우히치는 취임 후 16명의 장군 해임과 44명의 장군 보직 이동을 수반하는 대규모 숙군을 단행했다.

4. 3. 외교 및 경제 분야 인사 개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노이라트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 노이라트는 명목상 무임소 장관 겸 비밀 내각 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 외에도 대사 몇 명이 해임되었다. 샤흐트가 사임함에 따라 괴링이 겸임하던 경제 장관에는 선전성 차관 발터 훈크가 취임했다. 훈크는 차관 시절 동성애 혐의가 짙었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용서받았다. 총통 부관 호스바흐 역시 부관 임무에서 해임되었다.[1]

5. 사건의 결과 및 영향

1938년 2월 4일, 아돌프 히틀러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부 장관과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 총사령관의 스캔들을 이용하여 군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국방부의 임무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로 이전하고, 빌헬름 카이텔을 수장으로 임명하여[6] 전통적인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약화되고 OKW에 종속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여러 장군과 장관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교체했다.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통해 군부 내 인사를 단행하여 16명의 장군을 해임하고 44명의 보직을 이동시켰다.

또한, 군 기구 개편을 통해 통수권을 국방부 장관에서 히틀러 자신에게 넘기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통해 전쟁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여 육군의 영향력을 대폭 감소시켰다. 군 외부 인사 이동도 이루어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외무장관이 되었고, 발터 훈크가 경제 장관이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938년 2월 5일 발표되었으며, 『푈키셔 베오바흐터』 지는 "모든 권력이 총통에게 집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히틀러는 OKW를 통해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브라우히치를 해임한 후 스스로 OKH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OKW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카이텔은 그에게 반대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히틀러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위한 군사적 준비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5. 1. 프리치 무죄 판결과 명예 회복 실패

1938년 3월 18일, 프리치는 슈미트가 자신에 대한 혐의를 철회하면서 공식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그의 평판은 훼손된 뒤였다.[10] 육군은 프리치의 복귀를 요구했으나, 히틀러는 그를 포병 연대 명예 대령으로 임명하는 데 그쳤다.[10] 폴란드 침공 직후, 프리치는 최전선 부대를 시찰하던 중 폴란드 군의 총격(기관총 또는 저격수)에 다리를 맞아 사망했다.[11]

프리치는 조작된 사건으로 군법 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히틀러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었기에 복직되지 못했다. "명예"를 잃은 프리치는 전장에서 죽는 것을 원했고, 폴란드 전에 제12포병 연대의 명예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바르샤바 근교에서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거부했고, 사실상 자살과 같은 형태로 전사했다.

5. 2. 블롬베르크의 몰락

블롬베르크는 현역 복귀를 원했지만, 히틀러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으면 복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며 거부했다. 블롬베르크는 대전 기간 동안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인으로 출정했지만, 1946년에 암으로 사망했다.[1]

5. 3. 군부 장악과 전쟁 준비 가속화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국방부 장관과 베르너 폰 프리치 육군 총사령관이 스캔들로 인해 사임한 후, 아돌프 히틀러는 군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1938년 2월 4일 국방부의 임무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로 이전하고, 빌헬름 카이텔을 수장으로 임명했다.[6] 이로써 전통적인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약화되었고, OKW에 종속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여러 장군과 장관들을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교체했다. 특히,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를 통해 군부 내 인사를 단행하여 16명의 장군을 해임하고 44명의 보직을 이동시켰다.

또한, 군 기구 개편을 통해 통수권을 국방부 장관에서 히틀러 자신에게 넘기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통해 전쟁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여 육군의 영향력을 대폭 감소시켰다. 군 외부 인사 이동도 이루어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외무장관이 되었고, 발터 훈크가 경제 장관이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1938년 2월 5일 발표되었으며, 『푈키셔 베오바흐터』 지는 "모든 권력이 총통에게 집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히틀러는 OKW를 통해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브라우히치를 해임한 후 스스로 OKH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OKW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카이텔은 그에게 반대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히틀러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위한 군사적 준비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One hundred and fourteenth day, 25 April 1946, Morning Session http://avalon.law.ya[...] Yale Law School 2020-06-04
[2] 서적 Hitler's Hangman: The Life of Heydrich Yale University Press
[3] 서적 Hitler's Hangman: The Life of Heydrich
[4] 서적 Hitler's Hangman: The Life of Heydrich
[5] 서적 Nemesis
[6] 서적 In the Service of the Reich
[7] 서적 To the Bitter End
[8] 서적 Hitler's Hangman: The Life of Heydrich
[9] 서적 Hitler and His Generals: The Hidden Crisis, January–June 1938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0] 서적 Blitzkrieg Unleashed: The German Invasion of Poland, 1939 https://books.google[...] Stackpole Books
[11] 간행물 original official protocol written by Leutnant Rosenhagen, his adjutant and eyewitness DER SPIEGEL 194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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