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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빈델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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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빈델반트는 1848년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1915년 사망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신칸트주의 철학자로, "칸트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실증주의와 달리 철학이 인문주의적 대화를 통해 고유한 방법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칙정립적' 및 '개별기술적'이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하인리히 리케르트, 막스 베버, 에른스트 트뢸치, 알베르트 슈바이처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사》, 《근세 철학사》, 《철학 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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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빈델반트
기본 정보
빌헬름 빈델반트, 1905년 이전
빌헬름 빈델반트, 1905년 이전
이름빌헬름 빈델반트
출생일1848년 5월 11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포츠담
사망일1915년 10월 22일
사망지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국적독일 제국
학력
모교예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철학 박사, 1870년)
학위철학 박사 (1870년)
박사 학위 논문 제목Die Lehren vom Zufall (우연의 이론)
박사 학위 지도교수헤르만 롤체
지도 학생하인리히 리케르트
철학적 배경
지역서양 철학
시대19세기 철학
학파신칸트 학파 (바덴 학파)
기초주의
주요 관심사형이상학
철학 논리학
주요 아이디어정립적 방법 - 개별화 방법 구별
경력
교수 대학취리히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2. 생애

빌헬름 빈델반트는 1848년 포츠담에서 프로이센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훔볼트 대학교 베를린), 괴팅겐 대학교(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 겠팅겐)에서 의학, 자연과학, 정신과학(오늘날의 인문 과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2] 1870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2] 1873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강사로 활동하다가 1876년, 취리히 대학교 정교수로 임용되었다.[2] 1877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며, 1882년에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다.[2] 1903년, 쿠노 피셔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베를린 학사원의 원격지 회원이 되었다.[2] 191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여 베르크프리트호프(Bergfriedhof)에 묻혔다.[2]

그의 묘소는 하이델베르크의 베르크프리트호프 숲으로 이어지는 통로 바로 옆 구역 10에 있으며, 간소한 사각형 대리석 표면에 빈델반트 본인 및 아내 마르타, 딸 엘리 슈투츠-빈델반트의 생년월일이 새겨져 있다.[2]

3. 철학 사상

빈델반트는 신칸트주의 철학자로서, "칸트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실증주의와 달리, 철학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되며, 인문주의적 대화를 통해 고유한 방법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심리학과 문화 과학에 대한 관심은 심리학주의와 역사주의 학파에 대한 비판적인 철학적 체계에 의해 나타났다.

빈델반트는 칸트를 뛰어넘기 위해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헤르만 로체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의존했다.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빈델반트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그의 제자들 중에는 막스 베버와 같은 사회학자, 에른스트 트뢸치알베르트 슈바이처와 같은 신학자들도 있었다.

빈델반트는 철학사학자로서도 탁월했다. 그의 저서 『철학사 교본』(''Lehrbuch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1892년)은 철학사를 각 시대별 주제에 따른 논쟁사로서 집필한 것으로, 오랫동안 철학도들에게 널리 읽혔다. 각 시대는 철학자와 그들의 교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철학적인 논쟁 주제를 다루는 문제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세기의 부분은 하인츠 하임제트가 덧붙여 썼다. 그 외의 대표작으로, 『철학 개론』, 논문집 『프렐루디엔』 (『서곡』), 『근세 철학사』가 있다. 제자로는 하인리히 리케르트가 있으며, 일본의 교토 학파 대표 중 한 명인 아사나가 산주로는 루돌프 오이켄에게 실망하여 빈델반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3. 1. 법칙정립적 방법과 개별기술적 방법

빈델반트는 ''법칙정립적'' 및 ''개별기술적''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용어들은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빈델반트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차이에 주목했다. 자연과학은 보편 타당한 법칙을 통해 대상을 기술하는 법칙 설정적(nomothetisch)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 문화과학은 한 번뿐인 개별적이고 특수한 현상을 다루는 개성 기술적(idiographisch) 방법을 사용한다.

3. 2. 가치 철학

헤르만 로체의 영향을 받은 빈델반트는 가치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그는 사실적 인식의 조건에 따라 매개되는 존재의 영역("quaestio facti")과 인식의 활동적 조건에 따라 매개되는 타당성의 영역("quaestio iuris")을 구분하고, 후자가 전자에 우선한다고 보았다. 즉, 미리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가치 판단에 따라 사실상의 진리가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4. 영향

빈델반트는 하인리히 리케르트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막스 베버, 에른스트 트뢸치, 알베르트 슈바이처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사 연구는 철학사를 문제사(問題史) 중심으로 서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여 이후 철학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교토 학파의 철학자 아사나가 산주로는 독일 유학 중 루돌프 오이켄에게 실망하고 빈델반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차이, 즉 법칙 정립적 방법과 개별 기술적 방법의 구분에 힘썼다. 자연과학은 보편 법칙을 통해 대상을 기술하는 반면, 문화과학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다룬다고 보았다.

4. 1. 한국에의 영향

빈델반트의 저작들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의 Lehrbuch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철학사 교본de(1892년)은 『철학사 개요』, 『일반 철학사』 혹은 단순히 『철학사』 등으로 불리며, 여러 판을 거듭하며 오랫동안 한국 철학도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은 철학사를 각 시대별 주제에 따른 논쟁사로서 집필한 것으로, 각 시대 철학자와 그들의 교설을 나열하는 대신 시대의 철학적인 논쟁 주제를 다루는 문제사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20세기의 부분은 하인츠 하임제트가 덧붙여 썼다.

특히, 빈델반트가 구분한 법칙 정립적 방법과 개별 기술적 방법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방법론 논쟁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빈델반트는 자연과학은 보편 타당적인 법칙을 통해 대상을 기술하는 법칙 설정적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 문화과학(정신과학)은 한 번뿐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과 관련되며 개성 기술적 방법을 취한다고 보았다.

5. 주요 저서

제목출판 연도비고
《근세 철학사(Die 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1878년-1880년르네상스부터 칸트, 헤겔, 헤르바르트까지의 철학을 다룬다.
《프렐루디엔(Präludien)》1884년철학 입문을 위한 논문과 강연 모음집이다.
《고대 철학사(Geschichte der alten Philosophie)》1888년고대 철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1892년
플라톤(Platon)》1900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Über Willensfreiheit)》1904년의지의 자유에 관한 12번의 강연을 담고 있다.
《19세기의 독일 정신생활에서의 철학(Die Philosophie im deutschen Geistesleben des XIX. Jahrhunderts)》1909년19세기 독일 철학을 다룬 5번의 강연을 담고 있다.
논리학(Logik)》1912년
《논리학의 원리(Die Prinzipien der Logik)》1913년
《철학 개론(Einleitung in die Philosophie)》1914년
《역사 철학(Geschichtsphilosophie)》1916년유고에서 발췌, 편집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Genesis of Neo-Kantianism, 1796–1880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2] 서적 Der Heidelberger Bergfriedhof im Wandel der Zeit Verlag Regionalkultu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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