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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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는 1776년 독일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이다. 그는 서구에서 최초로 교육학을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교육의 목적을 다면적 흥미와 도덕성 함양에 두고 '관리', '수업', '훈육'을 교육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헤르바르트는 심리학을 교육학의 기초로 삼아 아동의 인격 발달과 학습을 강조했으며, 그의 사상은 헤르바르트 학파를 형성하여 전 세계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일반교육학≫, ≪심리학 교과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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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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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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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
출생 | 1776년 5월 4일 |
출생지 | 올덴부르크, 올덴부르크 공국 |
사망 | 1841년 8월 14일 (65세) |
사망지 | 괴팅겐, 하노버 왕국 |
모교 | 예나 대학교 |
소속 기관 | 괴팅겐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
학파/전통 | 독일 관념론 후기 칸트주의 |
주요 관심사 |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미학 |
주요 사상 | 다원적 실재론 교육학 (학문 분야로서) |
영향 | 임마누엘 칸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영향을 준 인물 | 프리드리히 에두아르트 베네케 헤르만 롯체 빌헬름 빈델반트 이마누엘 헤르만 피히테 에드문트 후설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모리츠 빌헬름 드로비슈 구스타프 하르텐슈타인 |
2. 생애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는 1776년 5월 4일 독일 올덴부르크에서 법률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2]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며 어려서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특히 음악에 재능을 보여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갖추었다. 올덴부르크의 김나지움에서 고전어, 수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하며 칸트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94년 예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곧 철학으로 전향하여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 피히테의 관념론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1797년부터 3년간 스위스 베른 주지사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교육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이 시기에 민중 교육의 선구자인 페스탈로치를 만나 그의 교육 실천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 경험은 훗날 그의 교육 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3]
1802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와 교수 자격을 취득한 후[2][3] 사강사를 거쳐 1805년 철학과 교육학 조교수가 되었다. 1806년에는 그의 교육 철학 체계를 보여주는 주요 저서 ≪일반교육학≫과 ≪형이상학의 주안점들≫을 출판했다. 1809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칸트가 맡았던 철학 교수직의 후임이 되었다.[3] 이곳에서 24년간 재직하며 철학 강의와 함께 교육학 세미나를 운영하고 부속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사 양성과 교육 개혁에 힘썼다. 이 시기에 ≪철학입문 교본≫, ≪심리학 교본≫ 등을 저술했으며, 1811년 영국 출신 여성 Mery Jane Drake|메리 제인 드레이크eng와 결혼했다.
1833년, 헤겔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로 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괴팅겐 대학교로 돌아와 철학 교수로 활동했다.[3] 1837년 괴팅겐 7교수 사건 당시, 반개혁적인 충성 서약을 거부한 동료 교수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아 비판을 받으며 동료 및 학생들과 소원해졌다. 이로 인해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1841년 8월 14일, 마지막 강의를 마친 지 이틀 만에 뇌졸중(일부 기록에는 심장마비)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3][4] 그의 묘소는 괴팅겐의 알바니프리드호프 묘지에 있다.[4]
헤르바르트의 교육 사상은 윤리학에 교육 목적을, 심리학에 교육 방법을 두어 교육학을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관리', '교수', '훈련'을 교육의 3요소로 제시하고, 도덕적 품성과 다면적 흥미 함양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그의 학설은 사후 헤르바르트 학파를 형성하며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나, 제자들에 의해 형식화된 5단계 교수법은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776-1797)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는 1776년 5월 4일 네덜란드 국경 부근의 올덴부르크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법률가이자 지방정부 법률고문인 토마스 게르하르트 헤르바르트였고, 어머니는 루치아 마르가레테 헤르바르트(결혼 전 성 쉬테)였다. 유복한 가정환경과 교육열 높은 어머니 덕분에 다양한 사교육을 받았다. 일설에 따르면 어린 시절 사고로 몸이 약해 12세까지 어머니에게 가정 교육을 받았다고도 한다. 그는 지적 교육 외에도 다양한 음악 교육을 받아 수준급의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다른 악기 연주와 작곡법도 익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1788년부터 6년 동안 올덴부르크의 라틴어 학교(김나지움)에 다녔다. 이곳에서 고전어, 수학, 자연과학에 열중했으며, 철학, 논리학, 그리고 당시 명성이 높던 칸트의 철학(특히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의 본질에 대한 탐구)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794년 부모의 희망에 따라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곧 철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나에서는 피히테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히테의 관념론에 의문을 품고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당시 피히테의 서클에는 셸링도 있었다. 헤르바르트는 예나 시절 피히테에게 제출한 에세이들을 통해 셸링의 작품을 비판하고, 칸트 등이 옹호하던 독일 관념론에 대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예나에서 3년을 보낸 후 1797년에 대학을 떠났다.
2. 2. 가정교사 시기와 페스탈로치와의 만남 (1797-1802)
1797년 봄, 스위스 베른주의 주지사 슈타이거(Steiger)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어 그의 두 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헤르바르트는 스위스에서 민중 교육을 실천하며 명성을 얻고 있던 페스탈로치를 만났으며,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을 데리고 페스탈로치의 학교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헤르바르트는 페스탈로치의 교육관과 실천, 그리고 당시 스위스의 학교 개혁 문제에 대한 그의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3] 약 3년간 이어진 이 가정교사 경험과 페스탈로치와의 만남은 헤르바르트가 교육 개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그의 교육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3]2. 3. 괴팅겐 시기 (1802-1809)
1802년 괴팅겐 대학교로 가서 같은 해 박사 학위와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사강사로 활동을 시작했다.[2][3] 1805년부터는 철학과 교육학 조교수로 활동하며 첫 철학 강의를 진행했다.[3] 1806년에는 그의 철학적, 교육학적 체계를 확립한 주요 저서인 ≪일반교육학≫과 ≪형이상학의 주안점들≫을 출판하였다. 헤르바르트는 1809년까지 괴팅겐 대학교에 머물렀다.[3]2. 4. 쾨니히스베르크 시기 (1809-1833)
1809년 칸트의 후임으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철학 정교수로 초빙되어 부임했다.[3] 그는 이곳에서 1833년 괴팅겐 대학교로 옮기기 전까지 24년 동안 재직하며 철학의 여러 분야를 가르쳤다. 1810년에는 새로 개설된 교육학과를 이끌었으며, 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학 세미나와 함께 일종의 부속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3] 또한 대학 외부에서는 학교 참사관으로서 프로이센의 학교 개혁 등에도 참여했다.1811년, 영국에서 이주해 온 상인 가문의 딸 Mery Jane Drake|메리 제인 드레이크eng와 결혼했다. 메리는 헤르바르트의 교육학 및 심리학 연구를 지지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헤르바르트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입문 교본≫, ≪심리학 교본≫, ≪학문으로서의 심리학≫ 등이 있다. 그는 연구에 매우 집중하여 "자신의 연구실과 교실 밖의 세상을 거의 보지 못했고", "그의 세계는 책의 세계, 오직 책의 세계"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2. 5. 말년 (1833-1841)
1831년 헤겔이 사망하자 헤르바르트는 그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교로 옮기기를 원했으나, 프로이센 정부는 다른 학자를 임명하였다.[3] 이에 실망한 헤르바르트는 프로이센에 속해 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를 떠나 1833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철학 교수로 부임했다.[3]1837년, 헤르바르트가 괴팅겐 대학교 철학부 학장을 맡고 있을 때 괴팅겐 7교수 사건이 발생했다. 새로 즉위한 하노버 왕이 요구한 반개혁적인 내용의 충성 서약을 7명의 교수(그림 형제 포함)가 거부하자 해직된 사건이었다. 이들 7명의 교수는 "괴팅겐의 7인"으로 불리며 당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헤르바르트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냉대를 받으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헤르바르트는 1841년 8월 14일, 건강하게 마지막 강의를 마친 지 이틀 만에 뇌졸중(일부 기록에는 심장마비)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3][4] 향년 65세였으며, 괴팅겐의 시립묘지(알바니프리드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4]
그의 교육학은 사후 19세기 중반 독일을 중심으로 다시금 주목받으며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들(헤르바르트 학파)은 그의 이론을 5단계 교수법으로 발전시켰으나, 점차 형식주의에 치우치면서 '악한 헤르바르트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20세기 초 신교육 운동과 개혁 교육 운동이 일어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3. 사상
헤르바르트는 30세에 ≪일반교육학≫(Allgemeine Pädagogik|알게마이네 페다고기크deu)을 발표하며 서구에서 최초로 교육학을 근대적 의미의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반교육학'이라는 명칭은 모든 종류의 교육 활동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시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이 저작에서 그는 교육의 목적을 먼저 논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교육 과정과 도덕 교육의 설계를 제시했다.
특히 헤르바르트는 "교육적 수업"이라는 개념을 통해,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인간다움을 조화롭게 기르는 수업을 강조했다. 그는 교육의 전체 영역을 조망하는 안목을 갖춘 교육자가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교육 활동을 이끌 때 진정한 교육적 수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헤르바르트는 교육의 목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삶의 다양한 필요에 대비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이를 위해 정신적 활력인 흥미를 여러 방면에 걸쳐 넓히는 다면적 흥미의 양성을 강조했다. 다른 하나는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도덕성의 확립이다. 즉,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면적 흥미와 강한 도덕적 성격의 함양에 있다.
이러한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헤르바르트는 관리, 수업, 훈육의 세 가지 요소를 제시했다. 관리는 교육을 받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예비적 활동이며, 수업은 주로 다면적 흥미를 넓히는 역할을, 훈육은 도덕적 성격을 기르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교육의 목적을 윤리학에서, 교육의 방법을 심리학에서 찾으며 교육학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이는 그가 가정교사 시절 페스탈로치의 학교를 방문하여 강한 영향을 받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헤르바르트는 "교수가 없는 교육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로 교육이 없는 어떤 교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지식 전달(교수)과 인격 형성(교육)이 분리될 수 없는 '교육적 교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게 수업을 통해 형성되는 학생의 사고권(思考圈), 즉 지적·정서적·미적·의지적 요소가 통합된 세계 파악 방식은 도덕성 발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교육 사상은 이후 헤르바르트 학파로 이어져 칠러, 라인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특히 라인의 5단계 교수법(예비-제시-비교-총괄-응용)은 메이지 시대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점차 형식주의적으로 변질되어 '악한 헤르바르트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20세기 초 신교육 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3. 1. 교육 목적론
헤르바르트는 교육의 목적을 윤리학에, 교육의 방법을 심리학에서 찾아 교육학을 체계화했다. 그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를 강한 도덕적 품성과 다면적 흥미의 함양에 두었다.헤르바르트는 교육의 목적을 '임의의 목적'과 '필연적 목적'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 임의의 목적: 개인이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상황과 필요에 대처하기 위한 실용적인 능력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정신적 활력인 '흥미'를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다면적 흥미'를 길러 변화하는 삶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정신적으로 폭넓게 개방된 교양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 필연적 목적: 인간다움을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특성으로서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헤르바르트는 교육을 통해 개인의 고유한 잠재력, 즉 개성을 발전시켜 도덕적이고 지적인 성숙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개인의 성숙을 구성하는 요소로 내적 자유, 완성, 자비, 정의, 공정(보상)이라는 다섯 가지 핵심 개념을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헤르바르트에게 교육의 목적은 다면적 흥미와 강한 도덕적 성격의 도야였다. 그는 플라톤의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이 교육을 통해 잠재력을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인 시민이 됨으로써 진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교육 목적 달성을 위해 다면적 흥미의 양성은 주로 '수업'의 과제가 되고, 강한 도덕적 성격의 도야는 '훈육(도덕 교육)'의 중심 과제가 된다고 하였다. 헤르바르트는 "교수가 없는 교육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로 교육이 없는 어떤 교수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지식 전달(교수)과 인격 형성(교육)이 분리될 수 없는 '교육적 교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 2. 교육 방법론
헤르바르트는 교육학을 체계화하면서 윤리학에서 교육의 목적을, 심리학에서 교육의 방법을 찾았다. 그는 교육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관리, 수업(교수), 훈육(훈련)이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제시했다.[1][2]- 관리: 교육을 받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와 습관 형성을 목표로 하는 예비적 활동이다.[1]
- 수업(교수): 경험과 교제를 보완하며 지식을 전달하고 흥미를 다면적으로 넓히는 활동이다. 이는 교육의 '임의의 목적'인 다면적 흥미 양성과 연결된다.[1]
- 훈육(훈련): 교사와 학생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의 마음에 도덕적 신조를 형성시키는 활동이다. 이는 교육의 '필연적 목적'인 강한 도덕적 성격 함양과 연결된다.[1]
헤르바르트는 특히 수업과 훈육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교수가 없는 교육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로 교육이 없는 어떤 교수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지식 전달(수업)과 인격 형성(훈육)이 통합된 교육적 교수를 강조했다.[2] 즉, 수업을 통해 형성된 사고권이 도덕성 발달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1] 그의 교육 방법론은 개인의 잠재력을 계발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3. 2. 1. 관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태도와 습관을 형성시키는 활동이다. 관리의 방법에는 위협과 감시, 권위와 사랑이 있는데, 위협과 감시는 불가피한 방책이기는 하지만 권위와 사랑을 위주로 관리하는 것이 좀 더 교육적인 관리라고 헤르바르트는 말한다.3. 2. 2. 수업
헤르바르트에 따르면 수업은 경험과 교제를 보완하는 활동이다. 그는 경험이 인식의 원천이며, 교제를 통해 공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인식은 관찰(좁은 의미의 경험), 사변(관찰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한 사유, 관계나 법칙 등에 대한 통찰), 취미(미적 지각)의 순서로 발달하며, 공감은 인간에 대한 공감, 사회에 대한 공감, 종교적 공감의 순서로 발달한다고 생각했다.수업의 진행 과정은 보통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 묘사: 학생이 수업 내용을 명료하게 파악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 분석: 명료하게 파악된 내용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분석) 각 단위를 비교하며 공통점(보편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고래와 인간(특수자)의 공통점(보편자)이 척추동물이라는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 종합: 분석을 통해 찾아낸 보편자를 가지고 다시 특수자들을 연결하고 포괄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어, 척추를 가진 동물들을 모두 찾아내어 척추동물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수업 과정을 통해 학생의 마음은 종합적으로 양성되는데, 헤르바르트는 이렇게 양성된 마음을 사고권(思考圈)이라고 불렀다. 사고권은 개인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며, 단순히 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미적, 정서적, 의지적 요소까지 포괄한다. 즉, 개인의 모든 정신 활동이 서로 연관되어 전체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
도덕의식 역시 이 사고권을 토양으로 하여 자라난다. 한 사람이 지닌 사고권은 그 사람의 의미 있는 세계 파악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르바르트에게 도덕성이란 한 개인에게 있어 지적, 정서적, 미적, 의지적 요소들이 조화롭고 통일된 상태를 의미한다.
헤르바르트는 교사가 효과적인 수업을 위해 다섯 단계의 형식을 갖춘 방법론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 준비: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를 준비한다.
# 제시: 주제를 제시한다.
# 연합: 아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에 도달하도록 유도한다.
# 일반화(요약): 수업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연역적으로 요약한다.
# 적용: 일상의 삶을 위한 도덕적 교훈과 관련시킨다.
또한, 학습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건조한 기본 독서 자료 대신 문학과 역사 이야기를 수업 자료로 사용할 것을 옹호했다. 그는 아이들이 정전으로 인정받는 고전 문학 작품들이 가진 심리적이고 문학적인 깊이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3. 2. 3. 훈육
훈육이란 교사와 학생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여 학생의 마음에 도덕적 신조를 형성시키는 교육 행위로서, 도덕 교육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헤르바르트는 수업을 통해 형성되는 사고권(思考圈) 속에 이미 도덕성의 싹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사고권이란 개인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며, 단지 지적(知的)인 세계 파악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적(美的), 정서적, 의지적 요소들도 포괄한다. 즉, 개인의 모든 정신 활동이 서로 연관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따라서 도덕 의식도 이 사고권을 토양으로 하여 자라난다.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고권은 그 사람의 유의미(有意味)한 세계 파악 방식이기 때문이다. 헤르바르트에게 도덕성이란 한 개인에게 있어서 지적, 정서적, 미적, 의지적 요소들이 조화와 통일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아동이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위대한 사람들의 의지적 결단이나 신조에 따른 고귀한 행위 등을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지각하면서 도덕의식이 싹트므로, 미적 감각(= 취미)의 발달은 도덕의식의 발달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도덕의식을 발달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공감이다. 헤르바르트는 도덕적 판단이 논리적 판단이라기보다는 미적, 정서적 판단일 때 실천에 직결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학생의 사고와 행위는 그가 지니고 있는 사고권의 지배를 받으므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풍부한 사고권을 아동의 마음에 도입할 수 있을 때 인간 교육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3. 4단계 교수법 (명료-연합-계통-방법)
헤르바르트는 교육의 방법을 심리학에 기초하여 이론화하고자 했다. 그는 학습자의 흥미를 '다면화'하고 이를 다시 '통일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맥락과 통일성을 갖춘 인식 과정을 밝히려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심(專心)'과 '치사(致思)'라는 두 가지 주요 단계를 제시했다.- 전심(專心): 특정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여 다른 대상들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 치사(致思): 전심을 통해 얻어진 여러 표상(개념이나 생각)들을 서로 연결하고 관계를 맺는 정신 작용을 의미한다.
헤르바르트는 이 두 단계를 다시 각각 정적(靜的) 단계와 동적(動的) 단계로 세분화하여 총 4단계의 교수 과정을 제시했다.
구분 | 단계 | 설명 | |
---|---|---|---|
전심(專心) | 정적 전심 | 명료(明瞭) | 학습할 내용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그 범위를 한정하여 학습자의 의식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단계이다. |
동적 전심 | 연합(連合) | 새롭게 명료화된 학습 내용을 학습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표상)과 연결하고 비교하는 단계이다. | |
치사(致思) | 정적 치사 | 계통(系統) | 연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지식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일반적인 개념이나 법칙을 형성하는 단계이다. |
동적 치사 | 방법(方法) | 앞선 단계들을 통해 체계화된 지식을 실제 문제 해결에 적용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응용해 보는 단계이다. |
헤르바르트의 교수 이론은 학습자의 인식이 심화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명확하게 파악하려 한 것이다. 그의 4단계 교수법은 이후 그의 제자인 칠러(Tuiscon Ziller)와 라인(Wilhelm Rein) 등에 의해 예비-제시-비교-총괄-응용의 5단계 교수법으로 더욱 발전하게 된다.
3. 4. 철학
헤르바르트에 따르면, 철학은 우리의 경험적 개념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며, 이러한 개념들을 개혁하고 정교화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는 철학을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개념을 정교화하는 세 가지 뚜렷한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첫 번째 부분인 논리학은 우리의 개념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판단, 추론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떤 개념들은 명확해질수록 오히려 요소 간의 모순이 심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된 개념들을 변화시키고 보완하여 마침내 사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철학의 두 번째 부분인 형이상학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처리만으로는 다룰 수 없지만 잠재적인 모순을 포함하지 않고 대상의 현실성과는 무관한 개념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찬성과 반대 판단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철학적 처리는 미학의 영역에 해당한다.
3. 4. 1. 논리학
헤르바르트에게 철학은 우리의 경험적 개념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며, 이 개념들을 개혁하고 정교화하는 과정이다. 그는 철학을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개념을 정교화하는 세 가지 방식에 해당한다. 첫 번째 부분인 논리학은 우리의 개념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판단, 추론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그러나 어떤 개념들은 명확해질수록 오히려 모순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개념을 수정하여 사고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철학의 두 번째 부분인 형이상학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처리만으로는 다룰 수 없지만 잠재적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며 대상의 현실성과는 무관한 개념들이 있는데, 이는 찬성과 반대 판단을 구체화하며 미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진다.
헤르바르트는 자신의 저술에서 논리학에 비교적 적은 비중을 두었다. 그는 논리학이 내용과 무관하게 순전히 형식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주로 칸트 학파의 철학자들, 예를 들어 프리스나 크루크와 유사한 입장이었다.
3. 4. 2. 형이상학
철학은 경험적 개념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이 개념들을 개혁하고 정교화하는 과정이다. 철학은 크게 논리학, 형이상학, 미학 세 부분으로 나뉜다.[3] 논리학은 개념과 판단, 추론을 명확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어떤 개념들은 명확해질수록 내부 요소 간의 모순이 심화된다. 이러한 모순된 개념들을 변화시키고 보완하여 사고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형이상학의 과제이다.[3]헤르바르트는 흄과 칸트 사상의 회의주의적 측면, 특히 로크가 실체 개념에서 느꼈던 당혹감에서 형이상학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경험의 형식조차 내포된 모순 때문에 의심하며, 이러한 형식들이 감각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본다. 이 단계에서 개념의 기원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오류인데, 탐구 과정에서 모순된 개념을 사용해야 할 뿐 아니라, 탐구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모순 해결 과제는 남기 때문이다.[3]
모순 해결을 위해 헤르바르트는 '관계 방법'(Methode der Beziehungen|메토데 데어 베치웅엔deu)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개념 A가 모순되는 두 요소 M과 N을 포함한다고 가정하자. 경험은 M과 N이 동일한 개념(A)의 표시라고 주장하지만, 논리는 이를 부정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헤르바르트는 하나의 M이 아니라 여러 개의 M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M은 각각 유효해야 하므로, 특정 M만이 N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여러 M의 조합(Zusammensein|추잠멘자인deu) 속에서 N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 체계에 상응하는 헤르바르트의 방식이다.[3]
존재론에서 이 방법은 실체, 원인, 내재, 변화와 같은 경험적 개념에 해당하는 현실(Real|레알deu)의 내용을 결정하는 데 사용된다. 현실에 대한 개념은 존재(Sein|자인deu)와 질(Qualität|크발리테트deu)로 구성된다. 존재는 지양될 수 없는 것, 즉 설정되는 것이며, 감각 경험을 통해 인식된다. 감각이 없다면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3]
현실의 질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3]
특성 | 설명 |
---|---|
부정 배제 | 비-A는 설정이 아닌 지양이며, 절대적이지 않고 A와 관련되기 때문에 배제됨. |
절대적 단순성 | 두 가지 결정(A, B)을 포함하면 하나로 축소 가능하거나, 서로 조건화되어 절대적 위치가 아니게 되므로 단순해야 함. |
양적 개념 배제 | 양은 부분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성과 양립할 수 없으므로 배제됨. |
복수 존재 가능성 | 존재 자체에 대한 단순한 개념은 현실의 수에 대해 규정하지 않으므로, 여러 개의 현실이 존재할 수 있음. |
이러한 현실론은 헤르바르트 철학의 핵심이며, 오토 플라이데러러는 이를 '''다원적 현실주의'''(pluralistischer Realismus|플루랄리스티셔 레알리스무스deu)라고 명명했다.[5]
헤르바르트는 내재(Inhärenz|인헤렌츠deu) 개념, 즉 하나의 사물(A)이 여러 속성(''a'', ''b'', ''c''...)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A를 생각할 때는 하나의 위치만을 설정하지만, 각 속성은 개별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이는 A가 단순한 현실로서 ''a''와 같고, 동시에 ''b''와 같아야 한다는 모순을 낳는다. 이는 속성이 A의 우연적 측면일 경우, 예를 들어 23, 8, 4+3+1이 8의 우연적 측면인 경우에 가능할 것이지만, 실제 속성은 그렇지 않으므로 속성만큼 많은 모순이 있다. 우리는 A가 ''a''이고, ''a''가 아니고, ''b''이고, ''b''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관계 방법에 따르면,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개의 A(A1, A2...)를 설정해야 한다. 각 속성(''a'', ''b''...)은 서로 다른 A들의 계열(A1+A1..., A2+A2...)에 해당한다. 이 계열들의 통일성은 모든 계열이 동일한 중심 현실 A에서 시작함으로써 확보된다. 그러나 각 계열은 다른 현실들과 연결되어 속성의 복수성과 차이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색깔이나 소리는 사물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나 진동하는 매체, 감각 기관 등 여러 현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내재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여러 현실 간의 관계이며, 실체성은 인과 관계 없이는 불가능하다.[3]
변화(Veränderung|페어엔더룽deu) 개념 역시 유사한 모순을 내포한다. 동일한 A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속성을 갖게 되는 것(''a'', ''b'', ''c''... 였던 A가 ''a'', ''b'', ''d''...가 되는 것)은 반성적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하다. 형이상학적 해결책은 내재의 경우와 유사하다. 속성 ''c''가 현실 계열 A3+A3+A3...에 의존하고, ''d''가 A4+A4+A4...에 의존한다면, ''c''에서 ''d''로의 변화는 중심 현실 A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A가 연결되는 현실 계열이 A3에서 A4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3]
그러나 여러 현실이 단순히 함께 있는 것(Zusammensein|추잠멘자인deu)만으로는 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현실들이 연결될 때, 서로 다른 질을 가진 현실들(A, B)은 그 차이만큼 서로를 방해(hemmen|헤멘deu)하고, 동시에 각자는 상대의 방해에 저항(widerstreben|비더슈트레벤deu)하며 자신을 보존(Selbsterhaltung|젤프스터할퉁deu)하려 한다. 이 자기 보존의 정도는 연결된 다른 현실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수소는 물과 암모니아 내에서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그 관계는 다르다. 헤르바르트는 이를 수학적 기호로 표현하여, A = ''α''+''β''-''γ'', B = ''m''+''n''+''γ'' 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γ''는 자기 보존을, 나머지는 관계 속에서 관찰 가능한 측면을 나타낸다.[3]
이렇게 규명된 '실제로 있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바탕으로, 헤르바르트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객관적 외관(der objective Schein|데어 옵옉티베 샤인deu)을 설명한다. 이 설명이 모든 지성에게 유효하려면, 존재론에서 단서를 얻어야 한다. 우리는 현실을 사유할 때 공간, 시간, 운동이라는 형식을 사용한다. 이 형식들은 단순한 심리적 산물이 아니라, 현실과 실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적인 형식'(intellektuelle Formen|인텔렉투엘레 포르멘deu)이다. 그러나 이 형식들은 현실 자체의 속성은 아니다.[3]
헤르바르트는 공간 관계의 기초를 '두 점의 인접성'(Aneinander|안아인안더deu)으로 본다.[6] 연속성 개념은 모순된 허구이지만, 객관적 외관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 현실들이 서로 불완전하게 자기 보존을 할 때, 그 결과로 공간적 외관, 즉 확장된 것처럼 보이는 분자와 인력, 척력 현상이 나타난다. 운동 역시 연속성 개념을 포함하며, 지적인 형식으로서 객관적 외관 이해에 필요하지만 실제적 술어는 아니다. 현실은 절대적으로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연결에 들어가야 하므로, 우리는 현실들이 지적인 공간을 통해 직선적이고 균일한 속도로 움직인다고 가정한다. 운동 자체는 원인이 필요 없지만, 운동의 변화는 현실들이 만나 자기 보존을 하는 과정의 객관적 외관으로 설명된다. 시간은 이러한 사건들의 부분적인 일치를 통해 연속적인 것으로 나타난다.[3]
마지막으로 헤르바르트는 인식론(Eidologie|아이돌로기deu)을 통해 지식의 가능성을 다루며 형이상학에서 심리학으로 넘어간다. 그는 자아를 '앎과 존재의 동일성' 또는 '자신을 아는 주체'로 정의하는 관념론적 개념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자아 역시 현실이므로 단순해야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복잡성을 내포한다. 관계 방법을 적용하면, 자아는 여러 객체(대상)들이 서로를 수정하며 구성된 결과물이다. 주체, 즉 영혼 자체는 단순한 질로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체가 다른 현실과 연결될 때 발생하는 자기 보존이 바로 감각(Empfindung|엠핀둥deu)이며, 이것이 지식의 유일한 자료가 된다. 감각은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확정된 그룹과 계열로 주어지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비록 현실 자체는 알 수 없지만 현실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3]
3. 4. 3. 미학
헤르바르트 철학 체계에서 미학은 논리학이나 형이상학과는 다른 종류의 개념, 즉 잠재적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면서 대상의 현실성과도 무관하게 찬성 및 반대 판단을 일으키는 개념들을 다루는 분야이다.미학은 아름다움의 속성을 부여하는 대상 관계가 불러일으키는 표현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자세히 설명한다. 헤르바르트는 아름다운 것을 유용하거나 즐거운 것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 유용하거나 즐거운 것은 시간, 장소,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지만, 아름다움은 올바른 관점에 도달한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단정되는 속성을 지닌다.
미학의 한 분야이자 주요 분야인 윤리학은 무조건적으로 기쁘거나 불쾌한 의지 관계(Willensverhältnissedeu)를 다룬다. 헤르바르트는 이러한 관계와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아이디어(Musterbegriffedeu)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3]
도덕적 아이디어 | 설명 |
---|---|
내부 자유 | 개인의 의지가 자신의 판단과 맺는 관계 |
완벽 | 여러 의지들이 강도, 다양성, 집중도 측면에서 서로 맺는 관계 |
자비 | 자신의 의지와 다른 사람의 생각 사이의 관계 |
권리 | 다른 사람과의 실제적인 갈등 상황에서의 관계 |
보상 또는 공정성 | 의도적인 선이나 악에 대한 보상 관계 |
이 다섯 가지 도덕적 아이디어는 여러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 시스템과 연결된다. 각각 법 (권리), 보상 및 처벌 시스템 (공정성), 행정 시스템 (자비), 문화 시스템 (완벽), 그리고 활기찬 사회 (내부 자유)라는 사회적 이상과 대응된다.
헤르바르트에게 덕(德)이란 의지가 이러한 도덕적 아이디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개별적인 덕목들은 이 근본적인 덕의 특별한 표현일 뿐이다. 의무의 개념은 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요소가 존재할 때 생겨난다. 행동 원칙의 일반적인 틀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이 원칙들을 적용하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로 남는다. 도덕적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실천적 학문이 바로 도덕 기술(Tugendlehredeu)이며, 이는 주로 교육학과 정치학으로 나뉜다.[3]
3. 5. 윤리학
미학의 한 분야인 윤리학은 무조건적으로 기쁘거나 불쾌한 의지(Willensverhältnissedeu)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헤르바르트는 이러한 관계와 이에 상응하는 도덕적 아이디어(Musterbegriffedeu)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3]# 내부 자유: 개인의 의지가 자신의 판단과 일치하는 관계이다.
# 완벽: 여러 의지가 강도, 다양성, 집중도 측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이다.
# 자비: 자신의 의지와 다른 사람의 생각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이다.
# 권리: 다른 사람과의 실제적인 갈등 상황에서 발생하는 관계이다.
# 보상 또는 공정성: 의도적인 선이나 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이 다섯 가지 도덕적 아이디어는 여러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 차원에서 각각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내부 자유는 활기찬 사회, 완벽은 문화 시스템, 자비는 행정 시스템, 권리는 법, 그리고 공정성은 보상 및 처벌 시스템에 해당한다.
덕은 개인의 의지가 이러한 도덕적 아이디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개별적인 덕목들은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의무의 개념은 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요소가 존재할 때 발생한다. 행동 원칙에 대한 일반적인 계획은 세울 수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이 원칙들을 적용하는 것은 실제적인 판단의 문제로 남는다. 도덕적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실천적 방법을 도덕 기술(Tugendlehredeu)이라고 하며, 이는 주로 교육학과 정치학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분야로 나뉜다.[3]
3. 6. 신학
신학에서 헤르바르트는 목적론적 논증이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신적 활동에도 타당하며, 감각을 초월하는 실재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적 실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유지될 수도 없고, 실용적인 이유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3]3. 7. 심리학
페스탈로치의 교육 방법을 기반으로, 헤르바르트는 아동의 인격 발달과 학습 촉진을 위해 교육학에 심리학적 기초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심리학이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헤르바르트는 진정한 지식 습득 방식에 대해 칸트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 칸트는 인간이 타고난 선험적 사고 범주를 통해 지식을 얻는다고 보았지만, 헤르바르트는 세상의 외부적이고 실제적인 대상과 그 관찰을 통해 생겨나는 아이디어를 연구해야만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대상의 실제 존재와 겉모습의 차이를 검토하며 "세상은 사물 자체의 세계이며 사물 자체는 지각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헤르바르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외부 대상을 '실재(Real)'라고 불렀는데, 이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과 비교될 수 있다.
경험론적 관점을 따라 로크의 ''백지설'' 개념을 수용한 헤르바르트는, 영혼이 선천적인 아이디어나 칸트가 말한 선험적 사고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실재'로 간주되는 영혼은 처음에는 수동적이며 외부 요인에 의한 변화에 저항하는 성질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실재'들은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며 각자 자신의 자기 보존(Selbsterhaltungde)을 위해 힘쓴다. 영혼이 이러한 외부 힘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은 헤르바르트가 '표상(Vorstellungende)' 또는 아이디어라고 부른 정신적 표상을 통해서이다.
헤르바르트는 이 아이디어를 역동적인 힘으로 간주하고 수학적 공식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이는 뉴턴의 영향으로, 힘이 세상에서 기계적으로 상호작용하여 현실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아이디어의 역학은 아이디어가 의식으로 이동하거나 무의식으로 물러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능력을 포함한다. 여러 아이디어는 서로 접촉하며 혼합, 융합, 퇴색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더 복잡한 아이디어를 형성한다. 헤르바르트에게 아이디어는 세상 사물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개인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한 경험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개인은 자신의 정신적 표상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함으로써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
헤르바르트는 아이디어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더 명확해지고 다른 힘들과의 경쟁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만큼 강해진다고 믿었다. 의식으로 진입할 만큼 강력한 아이디어들은 '통각적 질(Apperceptive Mass)'을 형성하는데, 이는 특정 순간에 의식을 지배하는 유사하고 관련된 아이디어들의 집합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세 지각'' 개념과 통각 개념을 발전시켜, 헤르바르트는 통각적 질이 무의식 속에서 유사한 아이디어를 선택하여 의식 속의 기존 아이디어들과 합류시키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다. 개인이 의식 속 통각적 질의 일부인 복잡한 아이디어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무의식 속의 관련 아이디어들이 결합하여 의식의 경계를 넘어서려 시도하며 현재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통각 개념은 헤르바르트 교육 이론의 핵심 요소이다. 그는 교실에서 단순한 감각 지각보다 통각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교사가 가르칠 내용과 관련하여 아동의 통각적 질에 집중하면, 아동의 생각과 아이디어가 특정 정보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교육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주요 저서
연도 | 원제 | 한국어 번역명 |
---|---|---|
1804 | Pestalozzi's Idee eines ABC der Anschauung | 페스탈로치의 직관 ABC |
1806 | Allgemeine Pädagogik aus dem Zweck der Erziehung abgeleitet | 일반교육학 |
1807 | Ueber philosophisches Studium | 철학 연구에 관하여 |
1808 | Allgemeine Praktische Philosophie | 일반 실천 철학 |
1808 | Hauptpunkte der Metaphysik | 형이상학의 주요 요점 |
1813 | Lehrbuch zur 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 철학 입문 교과서 |
1816 | Lehrbuch zur Psychologie | 심리학 교과서 |
1824–1825 | Psychologie als Wissenschaft, neu gegründet auf Erfahrung, Metaphysik und Mathematik | 학문으로서의 심리학 |
1828–1829 | Allgemeine Metaphysik, nebst den Anfängen der philosophischen Naturlehre | 일반 형이상학 |
1831 | Kurze Encyklopädie der Philosophie aus praktischen Gesichtspuncten | 철학 단기 백과사전 |
1835 (2판 1841) | Umriss pädagogischer Vorlesungen | 교육학 강의 개요 |
1839–1840 | Psychologische Untersuchungen | 심리학 연구 |
1842 | Erinnerung an die Göttingische Katastrophe im Jahr 1837 | 1837년 괴팅겐 참사에 대한 회고 |
5. 헤르바르트 학파와 영향
헤르바르트의 학설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쳐 헤르바르트 학파를 형성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칠러와 라인 등이 있다.
그의 교육학은 19세기 중반 독일을 중심으로 부흥했다. 개인의 발달과 사회적 기여를 연결하는 그의 사상은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여러 국가의 경제, 정치, 사회적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 호응을 얻었다. 캐서린 이사벨라 도드는 그의 아이디어를 지지하고 옹호한 인물 중 하나이다.
미국에서는 전국 헤르바르트 학회(National Herbart Society)가 설립되어 국립 교육 과학 연구 협회로 이어졌다.
특히 라인이 체계화한 5단계 교수법(예비-제시-비교-총괄-응용)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 교육계에 전해져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헤르바르트 사후, 그의 제자들이 제시한 교수 단계설은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 흐르면서 '악한 헤르바르트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20세기 초 신교육 운동과 독일의 개혁 교육 운동이 일어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공리주의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문학적 감상을 통한 인격 함양에 대한 강조는 다소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르바르트의 교육학은 교육에서 비판적 사고와 문학적 감상의 중요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참조
[1]
서적
Plato's Ghost: The Modernist Transformation of Mathemat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2]
서적
Johann Friedrich Herbart
http://plato.stanfor[...]
Metaphysics Research Lab, Stanford University
2015-01-01
[3]
백과사전
Herbart, Johann Friedrich
[4]
PDF
http://www.ibe.unesc[...]
2022-03
[5]
서적
The Philosophy of Religion on the Basis of Its History, Volume 2
https://books.google[...]
Williams and Norgate
1887
[6]
문서
Hence Herbart gave the name synechology to this branch of metaphysics, instead of the usual one, [[cosm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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