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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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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20세기 대표적인 인도주의자, 신학자, 음악가, 의사이며,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875년 알자스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 사상을 발전시켰다. 30세에 의학을 시작하여 아프리카 람바레네에서 의료 봉사를 시작했으며, 핵무기 반대 운동과 평화 운동에 참여했다. 슈바이처는 바흐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며, 다양한 저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그의 활동은 긍정적인 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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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존칭목사
이름알베르트 슈바이처
로마자 표기Albert Schweitzer
출생일1875년 1월 14일
출생지독일 제국 알자스-로렌 케제르스베르크
사망일1965년 9월 4일
사망지가봉 랑바레네
국적독일 (1919년까지)
프랑스 (1919년부터)
배우자헬렌 브레슬라우 슈바이처 (1912년 6월 결혼, 1957년 사망)
학력 및 경력
출신 대학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박사 지도 교수테오발트 치글러
하인리히 율리우스 홀츠만
로베르트 볼렌베르크
분야의학
음악학
철학
신학
직업의사, 음악가, 저술가, 철학자, 신학자, 루터교 목사
주요 업적
알려진 업적역사적 예수 탐구
생명 외경
일관된 종말론(사후)
수상괴테상(1928)
노벨 평화상(1952)
제임스 쿡 메달(1959)
기타
노벨상 수상 연설노벨 평화상 1952
슈바이처 (1955년)
슈바이처 (1955년)
일본어 표기アルベルト・シュヴァイツァー
한국어 표기알베르트 슈바이처

2. 생애

180px


1912년의 슈바이처. 에밀 슈나이더(Emil Schneider)의 유화(스트라스부르 현대미술관 소장)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 지방 카이저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독일 제국알자스-로렌이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영토가 되면서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종교적 관용 환경에서 성장하며 신앙과 목적의 통합을 추구하는 기독교 정신을 키웠다.[2]

슈바이처의 모국어는 독일어 알자스 방언이었다. 1893년 뮐루즈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를 받았다. 오르간 연주를 배웠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4] 1893년부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고, 피아노대위법을 배우며 음악적 소양을 넓혔다. 1894년 1년간 의무 군 복무를 마쳤다. 1898년 파리로 가 소르본 대학교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종교 철학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1899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여름 학기를 보낸 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받았다.[6][7][8] 1899년 튀빙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다.[2]

1905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1913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6][8]

스트라스부르 생 니콜라스 교회


1899년, 스트라스부르 생 니콜라스 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1900년, 신학 면허를 취득하고 조직 사제로 서임되었으며, 오베라마르가우 수난극을 보았다. 이듬해 생 토마스 신학교 임시 교장이 되었고, 1903년 정식 임명되었다.

1906년, 『예수 생애 연구사』를, 1931년에는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를 출판했다.[19]

30세가 되던 1905년, 파리 복음주의 선교회의 부름에 응답했지만, 선교회는 그의 신학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 그는 의학 박사 학위 과정 3년을 이수하기 위해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의학 박사 논문은 『예수의 정신과적 평가: 서술과 비판』이었다.[24] 그는 논문에서 예수의 정신 건강을 옹호했다.[26] 1912년 6월, 헬레네 브레스라우와 결혼했다.[27]

1912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슈바이처는 람바레네(현 가봉) 오고웨 강 유역 선교지에서 의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콘서트와 모금 활동으로 작은 병원을 설립할 준비를 했다.[28] 1913년 초,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떠났다.

오고웨 강 유역은 가봉 대부분을 차지. 람바레네는 중앙 왼쪽에 표시


처음 9개월 동안 약 2,000명의 환자를 진찰했다. 모래벼룩, 온초세르카증 감염, 야스, 열대성 식균성 궤양, 심장병, 열대성 이질, 말라리아, 수면병, 나병 등 다양한 질병을 치료했다.

헬레네 슈바이처는 수술 마취사로 일했다. 1913년 말, 철판 골함석으로 된 첫 번째 병원을 건설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슈바이처 부부는 프랑스 군대 감시를 받았다.[32] 1917년 보르도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가 1918년 7월, 알자스 집으로 이송된 후 자유를 되찾았다. 프랑스 시민권을 회복했고, 1920년까지 건강이 회복되면서 오르간 연주회와 모금 활동으로 빚을 갚고 가봉으로 돌아갈 자금을 마련했다.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성장하는 병원은 원주민 간호사들이 근무했다. 1925~6년에 새 병원 건물과 백인 환자 병동이 건설되어 마을처럼 되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1935년, 그리고 1937년 1월 다시 람바레네로 돌아와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일했다.

20세기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슈바이처는 30세에 의료와 전도에 헌신하기로 결심, 아프리카 적도 부근 가봉 람바레네에서 현지 주민들을 위한 의료 활동에 평생을 바쳤다.[79]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개념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했고, "밀림의 성자"로 불린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구로도 유명하며, "인생의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음악과 고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80]

목사 아들로 태어난 슈바이처는 어린 시절 가난한 친구들을 보며 빈부 격차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7세부터 피아노, 14세부터 파이프 오르간을 배웠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신학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1세 때, "30세까지 학문과 예술, 30세부터 헌신"을 결심하고,[82] 30세부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의학부에 다녔다. 38세에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가봉 람바레네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의료 활동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고, 독일 국적이던 슈바이처는 포로유럽에 송환되었다.

석방 후 유럽 각지에서 강연, 병원 자금 지원을 위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아프리카 의료 활동과 유럽 강연 활동을 병행했다.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57년부터 핵무기 반대를 공개 표명했다.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핵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말년에도 람바레네에서 의료 활동을 계속했고, 1965년 90세로 사망하여 묻혔다.

2. 1. 유년 시절

1875년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베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자스는 독일프랑스의 영토 다툼이 심하던 곳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슈바이처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했다.[95] 어린 시절 가난한 친구들을 보며 빈부 격차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훗날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슈바이처는 성서를 읽으며 궁금한 내용을 쉽게 배울 수 있었고, 성찬예배[95] 때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아버지의 설교를 통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슈바이처가 살던 동네에는 유대 상인이 있었는데, 반유대주의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전혀 미워하지 않았다.[96] 이를 본 슈바이처는 용서만이 악을 굴복시키고 갈등을 극복하는 길임을 확신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음악을 좋아한 슈바이처는 성 스테판 루터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오이게네 뮌히 선생님에게 오르간을 배웠다.[4] 그는 어려서부터 오르간을 배워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였으며 훗날 바흐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다.

알자스 지방 카이저스베르크에 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가(현재 프랑스 알자스 지방 소재)

2. 2. 신학 및 철학 연구

1899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이듬해 예수의 생애와 초기 기독교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98] 신학생 시절 당시 서구 신학계에 등장한 예수전들을 연구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신학적으로 맞는가를 연구하였다. 김영한에 의하면 "슈바이처에 있어서 예수십자가 죽음은, 세계기독교인들이 매년 사순절(四旬節)에 수난을 기념하는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라고 한다.[99]

그는 신학적으로 예수의 교의에 있어서의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도덕적인 인간으로 묘사하였으나,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올 것으로 기대하셨으나 그렇지 않자 스스로 고난을 받으셨다고 보았다. 또한 예수는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를 때에 그러했듯 누구에게나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써 예수가 드러난다고 생각했다.[101]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종말론적인 예언자이자 모든 기독교인들이 삶으로써 따라야 할 실천적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저자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하여,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 즉, 성인의 이미지일 뿐이지 역사적 예수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02] 슈바이처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앞으로 오게 될 종말론적인 나라로 이해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속의 나라로 이해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그의 생존 당시 일부 학문 집단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역사적 관점에 기초하는 비종교적 접근 방식과 예수를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그리스도로 보는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방식에 모두 반대하였다. 슈바이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을 예수를 완전한 윤리적 인간으로 이해한 그리스도론이 투영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슈바이처가 이해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으나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자 스스로 고난을 불러왔으며, 갈릴래아에서 그랬듯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분이다.[103]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초자연을 거부한 이성주의에 근거한 신학연구였다고 평가된다.

'''예수의 역사적 탐구'''에서 슈바이처는 제1차 '''예수의 역사적 탐구''' 당시 자유주의 및 낭만주의 학자들이 제시한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삶은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과 묵시론을 반영한 예수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자유주의적이고 낭만적인 견해 대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다고 썼다.[21]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표지


슈바이처는 20세기 신학의 가장 유명한 말로 불리는 것으로 예수에 대한 그의 논의를 마무리했다.

철학에서도 업적을 남겼으며,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개념으로 세계 평화에도 기여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린다. 또한 음악에도 정통하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구로도 유명하다. "인생의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음악과 고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80]

생명에 대한 경외는 슈바이처의 사상과 실천의 근본이 되는 생각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생명체에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 살아가려는 의지는 자아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의지이다. 슈바이처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살아가려는 의지를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자신과 함께 살아가려는 다른 생명체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 그리고 생명체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사상이다.[81]

2. 3. 의료 봉사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흑인을 위한 의료 사업에 평생을 바치기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79] 통역백인 선교사들과 동역하여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흑인 간호조무사 누쳉이 맡았으며, 병원 건물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다. 그는 저술과 강연, 연주, 레코드 등에 의한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운영하였다.

자금이 부족하여 병원 운영이 어렵게 되자, 유럽으로 돌아와 병원 기금을 모집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가 태어난 알자스 지방은 당시 프랑스 영토였기 때문에 구금되었으며,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100]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6년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과 파이프오르간 연주로 모금한 후 1924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다. 다행히 여러 곳에서 후원금이 들어와 병원은 곧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복구를 하던 때였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처지는 어려웠음에도 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민중들을 위해 기꺼이 후원한 것이었다. 그를 돕기 위하여 의사간호사들이 그곳으로 자원하러 왔다. 그는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정신적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시설도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 운영에 필요한 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2. 4. 평화 운동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일찍부터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 운동을 하였고 평화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96]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함께 핵실험 중단을 촉구하는 등 평화 운동을 전개했다.

2. 5. 말년

람바레네에 있는 슈바이처의 무덤, 그가 직접 만든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다


슈바이처는 1965년 9월 4일, 90세의 나이로 그가 사랑했던 가봉 람바레네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오고웨강 변에 있으며, 그가 직접 만든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다.

3. 신학 연구와 사상

슈바이처는 예수의 역사적 탐구에서 제1차 예수의 역사적 탐구 당시 자유주의 및 낭만주의 학자들이 제시한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예수의 삶은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과 묵시론을 반영한 예수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 그는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환난"에 대해 말하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심"을 언급하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 (마태복음 24:34)고 한 구절을 통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다고 보았다.[22] 슈바이처는 예수가 "이름 없는 알 수 없는 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와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그의 교제 속에서 겪을 수고, 갈등, 고난 속에서 자신을 계시할 것"이라고 말했다.[23]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 "밀림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모든 생명체에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으며, 이는 자아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의지라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생존 의지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자아와 타자, 그리고 생명체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그의 아프리카 의료 활동은 이러한 사상의 실천이었다.[81] 그는 서구 문명이 삶의 긍정을 윤리적 기반으로 버렸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는 "진정한 철학은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며,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들 가운데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

슈바이처에 따르면 윤리적인 인간은 가능한 한 생명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44] 그는 의지 또는 윤리적 의지를 삶의 주된 의미로 우선시하고, 문명의 도덕적 구조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생명 존중을 통해 거친 충동과 공허한 교리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5]

슈바이처의 생명 존중 사상은 인도 종교적 사상, 특히 자이나교의 아힘사(비폭력) 원리의 영향을 받았다.[46] 그는 티루쿠랄의 고대 인도 교훈적인 저술에서 "살생하지 말고 해치지 말라는 계명"을 지지한다고 언급하며, "세계 문학에 그처럼 고귀한 지혜가 담긴 격언 모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48][49]

3. 1. 자유주의 신학 비판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을 왜곡한다고 비판했다.[102]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를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 즉 성인(聖人)의 이미지로 묘사했지만, 이는 저자들의 생각과 당시 시대배경이 투영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앞으로 오게 될 종말론적인 나라로 이해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 속의 나라로 이해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02]

슈바이처는 예수를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한 종말론적 예언자로 이해했다.[101] 그는 예수가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스스로 고난을 받는 길을 택했다고 보았다. 또한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를 때처럼,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며, 그를 따르는 삶을 통해 예수가 드러난다고 생각했다.[101]

슈바이처는 저서 '''예수의 역사적 탐구'''에서 예수의 삶은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과 묵시론을 반영한 예수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 그는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환난"에 대해 말하고, 그의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심"을 말하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리라"(마태복음 24:34)라고 언급한 구절을 통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다고 썼다.[22]

슈바이처는 예수가 "이름 없는 알 수 없는 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와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그의 교제 속에서 겪을 수고, 갈등, 고난 속에서 자신을 계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의 예수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했다.[23]

3. 2. 생명에 대한 경외

카이제르스베르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슈바이처의 기독교 믿음과 정신 성숙에 영향을 주었다. 루터 교회 목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성서를 읽으며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으며, 교우들 대부분이 가난한 농부들이었던 주위 환경은 슈바이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다.[95]

슈바이처는 자그마한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생명 외경 사상(생명 경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생명은 거룩하며, 희생되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는 기독교 사상인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저서 《나의 생애와 사상》에서 주창하였다. 그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현대 사회에 분노하는 순수한 사람이 있을 때 역사가 바뀐다고 보았다.

종교학자 오강남 선생과 성공회 사제인 김기석(아모스) 신부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날벌레가 타 죽을 것이 가엾어 밤에는 창을 닫고 불을 켜지 않았으며, 나뭇가지 한 개도 함부로 꺾지 않았다. 김기석 신부는 기독교 사상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생명 윤리를 한국 사회에서 실천한다면, 을 더 많은 달걀 생산을 위해 좁은 사육장에 가두어 사육하는 폭력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슈바이처는 평생 동안 현실에 근거한 보편적 도덕 윤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기를 바랐다.[104]

1955년 슈바이처


슈바이처의 개인 철학(그는 이를 인류에 대한 자신의 가장 큰 공헌으로 여겼다)의 핵심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Ehrfurcht vor dem Lebende)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서구 문명이 삶의 긍정을 윤리적 기반으로 버렸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는 "진정한 철학은 의식의 가장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사실에서 시작해야 하며, 이는 다음과 같이 공식화될 수 있다.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며,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들 가운데 존재한다.'"라고 썼다.

자연에서 한 형태의 생명은 항상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의식은 다른 존재의 생존 의지를 인식하고 공감한다. 윤리적인 인간은 가능한 한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44]

우리가 그 노력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해야 한다. 생존 의지는 끊임없이 새롭게 되살아나는데, 그것은 진화적 필요성이자 영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삶과 사랑은 이러한 동일한 원리, 즉 우주에 대한 개인적인 영적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윤리 자체는 다른 존재의 존재 욕구를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존중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세계의 종교와 철학에서, 특히 유럽 중세와 인도 브라만 철학에서 이 원리가 부정되는 많은 사례를 발견했다.

슈바이처에게 인류는 객관적 현실이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면 영적 합리주의를 통해 새로운 계몽을 긍정하여 의지 또는 윤리적 의지를 삶의 주된 의미로 우선시할 수 있었다. 인류는 문명의 도덕적 구조를 창조하기로 선택해야 했다. 세계관은 삶의 관점에서 유래해야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생명에 대한 존중, 거친 충동과 공허한 교리의 극복은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를 섬기는 삶을 살도록 이끈다. 생존 의지를 숙고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존중이 최고의 원리가 되고 인류의 목적이 된다.[45]

이것이 슈바이처가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이론이었다. 일부 저자들에 따르면 슈바이처의 사상, 특히 생명에 대한 경외심의 발전은 인도 종교적 사상, 특히 자이나교의 아힘사 즉 비폭력 원리의 영향을 받았다.[46]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인도 사상과 그 발전》에서 인도의 영향에 대한 공헌을 언급했다.[47]

같은 책에서 아힘사와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는 티루쿠랄의 고대 인도 교훈적인 저술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붓다바가바드 기타와 마찬가지로 "살생하지 말고 해치지 말라는 계명을 지지한다"고 언급했다.[48][49] 그 작품에서 여러 연구를 번역하면서 그는 쿠랄이 "선은 그 자체를 위해 행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고 언급했고, "세계 문학에 그처럼 고귀한 지혜가 담긴 격언 모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48][49]

생명에 대한 경외는 슈바이처의 사상과 실천의 근본이 되는 생각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생명체에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 살아가려는 의지는 자아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의지이다. 슈바이처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살아가려는 의지를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자신과 함께 살아가려는 다른 생명체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 그리고 생명체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아프리카에서의 의료 활동은 바로 그 실천이었다.[81]

4. 음악

오르간 연주자이자 음악학자였던 슈바이처는 바흐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성 스테판 루터교회에서 오이게네 뮌히에게 오르간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했다.[9] 1906년 파리 바흐 협회 설립에 협력하고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으며, 아프리카 봉사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 순회 연주회를 열고 바흐의 푸가 등을 음반으로 녹음했다.

슈바이처는 바흐의 종교 음악에서 그림과 상징적 표현을 해석했다. 1899년, 바흐의 코랄 전주곡에서 도형과 모티브를 화가와 같은 음색과 리듬의 이미지로 설명하며, 이는 찬송가의 가사 주제를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05년 출판된 그의 저서 ''J. S. 바흐: 음악가-시인''은 바흐 음악의 종교적, 상징적 의미를 해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08년에는 독일어판 ''J. S. 바흐'' 두 권이 출판되었고, 1911년 어니스트 뉴먼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이 책을 바흐에 대한 "최고의 해석 중 하나"라고 불렀다.[10] 슈바이처는 코지마 바그너와 바흐의 묘사적 음악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11] 그는 바그너의 집 바인프리트의 손님이 되었으며,[12] 작곡가 클라라 마틸다 파이스트와도 친구가 되었다.[13]

스트라스부르 생토마 교회의 합창 오르간. 1905년 슈바이처가 정의한 원칙에 따라 설계됨


슈바이처는 20세기 초 오르겔베베궁을 이끌며 오르간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1906년 소책자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 및 연주 예술"을 통해 바로크 시대 오르간의 복원을 주장했다.[14] 1909년 에서 열린 "국제 음악 학회 제3차 회의"에서 이 주제로 연설하고, 여러 유럽 국가의 연주자와 오르간 제작자들에게 설문지를 배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15] 그는 프랑스 후기 낭만주의적 풀 오르간 사운드가 영국과 독일 낭만주의적 리드 파이프와 고전 알자스 질버만 오르간 자원 및 바로크 플루트 파이프와 통합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악기를 구상했다.

슈바이처는 파리 음악원의 이시도르 필립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다.

1905년 위도르와 슈바이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합창단인 파리 바흐 협회를 설립했고, 슈바이처는 1913년까지 오르간 파트를 맡았다.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오르페오 카탈라 바흐 콘서트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슈바이처와 위도르는 바흐의 오르간 작품의 새로운 판을 제작했다. 슈바이처는 전주곡과 푸가에 대한 해설을, 위도르는 소나타와 협주곡에 대한 해설을 썼다. 6권은 1912년에서 1914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1913년 람바레네로 떠날 때, 그는 오르간 건반처럼 작동하는 페달 부착물이 있는 페달 피아노를 선물 받았다.[16] 그는 바흐, 펠릭스 멘델스존, 위도르, 세자르 프랑크, 막스 레거의 작품을 공부하고 암기했다. 슈바이처의 페달 피아노는 1946년에도 람바레네에서 사용되었다.[17]

도널드 토베이는 바흐의 ''푸가의 기교''의 추측적 완성을 슈바이처에게 헌정했다.

슈바이처는 올 할로우스, 바킹-바이-더-타워의 오르간으로 1935년 12월 콜럼비아 레코드를 위해 녹음을 시작했다.[66] 그의 제안에 따라 녹음 세션은 스트라스부르의 Ste Aurélie 교회로 옮겨졌다. 이 녹음들은 1936년 10월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슈바이처는 바흐 음악 연주 녹음 기법인 "슈바이처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미드-사이드(mid-side) 기법을 개선한 것으로, 두 개의 소형 다이어프램 콘덴서 마이크로폰을 사용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초기 컬럼비아 레코드는 바흐 25곡과 프랑크 8곡을 포함하여 총 33곡이었다.

  • 퀸즈 홀(Queen's Hall): 에 단조 전주곡과 푸가(Edition Peters|에디션 페터스de)[67]; Herzlich thut mich verlangende (BWV 727); Wenn wir in höchsten Nöten seinde (7권, 58곡 (라이프치히 18)).
  • 올 할로우스(All Hallows): 다장조 전주곡과 푸가; 사단조 환상곡과 푸가(대 환상곡); 다장조 전주곡과 푸가; 사단조 전주곡과 푸가; 사단조 소푸가; 라단조 토카타와 푸가.[68]
  • 생토렐리(Ste Aurélie): 가단조 전주곡과 푸가; 에 단조 전주곡과 푸가; 라단조 토카타와 푸가. 코랄 전주곡: Schmücke dich, O liebe Seelede (페터스 7권, 49곡 (라이프치히 4)); O Mensch, bewein dein Sünde großde (5권, 45곡); O Lamm Gottes, unschuldigde (7권, 48곡 (라이프치히 6)); Christus, der uns selig machtde (5권, 8곡); Da Jesus an dem Kreuze standde (5권, 9곡); An Wasserflüssen Babylonde (6권, 12b곡); Christum wir wollen loben schonde (5권, 6곡); Liebster Jesu, wir sind hierde (5권, 부록 5곡); Mit Fried und Freud ich fahr dahinde (5권, 4곡); Sei gegrüßet, Jesu gütigde (변주 11, 5권, 부록 3곡); Jesus Christus, unser Heilandde (6권, 31곡 (라이프치히 15)); 크리스투스는 죽음의 속박에 놓여 있었다 (5권, 5곡); 영광스러운 날이 나타났다 (5권, 15곡).[69][70]


슈바이처가 후기 녹음을 했던 군스바흐(Günsbach) 교회


후기 녹음은 군스바흐 교회(Parish church, Günsbach)에서 이루어졌다.

  • 아단조 푸가 (페터스, 2권, 8곡); 사단조 환상곡과 푸가(대 환상곡) (2권, 4곡); 다장조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3권, 8곡).[71]
  • 다장조 전주곡 (4권, 1곡); 마장조 전주곡 (4권, 3곡); 라단조 칸조나 (4권, 10곡) (멘델스존, 라단조 소나타 작품 65.6과 함께).[72]
  • 코랄 전주곡: O Mensch, bewein dein Sünde großde (1차 및 2차 버전, 페터스 5권, 45곡); Wenn wir in höchsten Nöten sein (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de (7권, 58곡 (라이프치히 18)); Ich ruf zu dir, Herr Jesu Christde (5권, 30곡); Gelobet seist du, Jesu Christde (5권, 17곡); Herzlich tut mich verlangende (5권, 27곡); Nun komm, der Heiden Heilandde (7권, 45곡 (BWV 659a)).[73]


위 녹음들은 미국에서 컬럼비아 마스터웍스(Columbia Masterworks) 박스 세트 SL-175로 발매되었다.

  • 요한 세바스찬 바흐: A장조 전주곡과 푸가 BWV 536; F단조 전주곡과 푸가 BWV 534; B단조 전주곡과 푸가 BWV 544; D단조 토카타와 푸가 BWV 538.[74]
  • 요한 세바스찬 바흐: C단조 파사칼리아 BWV 582; E단조 전주곡과 푸가 BWV 533; A단조 전주곡과 푸가 BWV 543; G장조 전주곡과 푸가 BWV 541; D단조 토카타와 푸가 BWV 565.[75]
  • 세자르 프랑크: 오르간 코랄, 1번 E장조; 2번 B단조; 3번 A단조.[76]


그의 저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역사 연구보다는 그의 바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직감이 나타나는 매력적인 작곡가상을 그리는 데 성공하여, 지금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실천적인 음악가로서의 시각이 반영되어 낭만적인 과장이 많은 바흐 연주에 이의를 제기하고,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연주법 연구를 통한 해석을 강조했다.

오르간 연주자로서 파리 바흐 협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말년까지 공개 연주를 했다. 1935년 이후 행한 녹음도 남아 있지만, 기교적인 약점이 보여 그 기량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5. 평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20세기 대표적인 인도주의자이자 평화 운동가로 칭송받는다. 윈스턴 처칠은 그를 "인간성의 천재"라고 칭찬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몇 세기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불렀다.[84]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의료 활동을 통해 이를 실천했다.[81]

하지만 그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유럽 제국주의의 착취에 의해 아프리카가 병들어간다는 사실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사회선교를 했다고는 하나, 그의 활동이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89] 가봉의 람바레네 병원의 열악한 의료 수준과 슈바이처의 진료 실력은 과대평가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05] 물론 현대의학자들이 보기에는 슈바이처의 의료가 수준 이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1차 세계대전 영향을 받았고, 물자와 약품이 부족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진료를 하던 환경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정주의적이고 백인 우월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88] 그는 "인류애"를 외치면서도, 결국 백인을 형, 흑인을 동생으로 대우했다.[88] 가봉의 독립이 너무 일찍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등, 현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사회선교를 한 그의 헌신과 실천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슈바이처가 적국인 독일사람이라서 프랑스 군대가 가택연금을 하자 현지 주민들과 백인 이민들이 진료를 받지 못해 항의할정도로 그의 실천은 현지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생명 존중 사상은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6. 한국과의 관계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일본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으며, 그의 일생은 아동 대상 위인전 등을 통해 소개되었다. 슈바이처의 '생명에 대한 경외' 사상은 한국 사회의 생명 윤리 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인도주의적 헌신은 많은 한국인에게 귀감이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이일선 목사가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슈바이처와 함께 한센인을 섬겼다.

6. 1. 슈바이처와 한국인

1958년부터 1961년까지 한센인을 섬긴 이일선 목사(1922-1995)가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함께 당시 프랑스자치공화국이었던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일했다. 이일선 목사는 슈바이처가 나무에 그물침대를 걸면 나무가 아파할 것이라고 말한 일화를 통해 슈바이처의 생명 존중 사상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슈바이처는 일본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으며, 그의 일생은 아동 대상 위인전 등을 통해 소개되었다. 진언종 승려 후루카와 타이류는 슈바이처의 유골을 보관하고 "생명산 슈바이처 사찰"을 열었다. 슈바이처가 좋아한 음식은 후지야의 고풀이었고, 랑바레네를 방문하는 일본인들은 고풀을 가져오는 것이 관례였다.

6. 2. 슈바이처 사상의 영향

슈바이처의 '생명에 대한 경외' 사상은 한국 사회의 생명 윤리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인도주의적 헌신은 많은 한국인에게 귀감이 되었다.

슈바이처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51] "평화의 문제"라는 제목의 연설로 수상을 받았다. 33000USD의 상금으로 그는 람바레네에 나병원을 설립했다.[8] 195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토 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실험핵무기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1957년과 1958년, 그는 오슬로 방송을 통해 네 번의 연설을 방송했는데, 이 연설들은 ''평화 또는 원자 전쟁''에 게재되었다. 1957년 슈바이처는 건전한 핵 정책을 위한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1957년 4월 23일, 슈바이처는 "양심 선언"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오슬로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되었고 핵무기 폐지를 호소했다. 그의 연설은 "원자 폭탄 실험의 종식은 고통받는 인류가 갈망하는 희망의 초기 햇살과 같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52]

1955년,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공로훈장(OM) 명예 회원이 되었다.[54]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 라자로 군사 및 병원 수도회의 기사이기도 했다.

슈바이처는 1965년 9월 4일, 독립된 가봉의 그의 사랑하는 람바레네 병원에서 사망했다. 오고웨강변에 있는 그의 무덤은 그가 직접 만든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다.

그의 사촌인 안 마리 슈바이처 사르트르는 장 폴 사르트르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샤를 슈바이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아버지 루이 테오필의 형이었다.[55]

알베르트 슈바이처 펠로우십은 1940년 슈바이처가 전쟁으로 유럽의 보급로가 차단되었을 때 그의 병원에 대한 지원 부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의 지지자들을 결합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람바레네 병원을 지원하고 있다. 슈바이처는 그의 병원이 아니라 생명 존중 윤리가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하며, 람바레네 병원은 단지 "생명 존중이라는 주제에 대한 나만의 각색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람바레네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슈바이처의 저술과 삶은 자주 인용되며,[63] '슈바이처 효과'와 같은 동음이의어를 만들어냈다. '슈바이처 효과'는 그의 말인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모범은 주요한 것이 아니다. 유일한 것이다'"를 의미한다.[63]

20세기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인물로, 30세에 의료와 전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아프리카 적도 부근의 가봉(Gabon) 람바레네(Lambarene)에서 현지 주민들을 위한 의료 활동 등에 평생을 바쳤다.[79]

철학에서도 업적을 남겼으며,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개념으로 세계 평화에도 기여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린다. 또한 음악에도 정통하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연구로도 유명하다. "인생의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음악과 고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80]

생명에 대한 경외는 슈바이처의 사상과 실천의 근본이 되는 생각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모든 생명체에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 살아가려는 의지는 자아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의지이다. 슈바이처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살아가려는 의지를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자신과 함께 살아가려는 다른 생명체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 그리고 생명체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아프리카에서의 의료 활동은 바로 그 실천이었다.[81]

7. 저서


  •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 Von Reimarus zu Wredede) [20]
  • 《문명 철학》
  • 《물과 원시림 속에서》
  • 《나의 삶과 사상》(자서전, 1931년) [23]
  • 《사도 바울의 신비》
  • 《현 세계의 평화문제》
  • 《바흐의 오르간 작품》
  •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의료선교일기)
  • 《하늘의 축복》(슈바이처의 마태복음서 팔복 설교 모음)
  • 《문화와 윤리》
  • 《칸트의 종교 철학》
  • 《인도 사상가의 세계관: 신비주의와 윤리》


이 중 《하늘의 축복》,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나의 생애와 사상》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특히, 독문학자 천병희 선생이 《나의 삶과 사상》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슈바이처의 저서들은 신학, 철학, 음악, 자서전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그의 깊이 있는 사상과 실천적 삶을 보여준다. 《예수의 생애 연구사》에서는 예수의 삶을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과 묵시론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 해석을 비판했다.[21][22]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에서 슈바이처는 바울의 신비주의를 원시적 신비주의와 발전된 신비주의의 중간 형태로 규정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이는 마르틴 루터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라는 해석과 대조되는 관점이다.

다음은 슈바이처의 주요 저서를 정리한 표이다.

제목출판 연도분야비고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신학Von Reimarus zu Wredede
《문명 철학》철학
《물과 원시림 속에서》
《나의 삶과 사상》1931년자서전
《사도 바울의 신비》신학
《현 세계의 평화문제》
《바흐의 오르간 작품》음악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의료선교일기
《하늘의 축복》설교 모음마태복음서 팔복 설교
《문화와 윤리》철학
《칸트의 종교 철학》철학
《인도 사상가의 세계관: 신비주의와 윤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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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서적 나의 생애와 사상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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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서적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 한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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