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뤼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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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빔 뤼스카는 네덜란드 출신의 유도 선수이자 프로 레슬러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유도 헤비급과 무제한급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며, 단일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유도 선수가 되었다. 유도 선수 은퇴 후 프로 레슬링 선수로 활동하며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에서 활약했으며, 2013년 국제 유도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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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뤼스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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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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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빌럼 뤼스카 |
별칭 | '다다미의 타잔' |
출생일 | 1940년 8월 29일 |
출생지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사망일 | 2015년 2월 14일 |
신장 | 1.89m |
체중 | 110kg |
유도 정보 | |
국가 | 네덜란드 |
체급 | +93kg, 무제한급 |
단 | 8단 |
소속 클럽 | (정보 없음) |
은퇴 | 1972년 |
메달 기록 (남자 유도) | |
올림픽 | 금메달 2개, 은메달 0개, 동메달 0개 |
세계 선수권 대회 |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0개 |
유럽 선수권 대회 | 금메달 7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 |
총합 | 금메달 11개, 은메달 4개, 동메달 2개 |
올림픽 메달 | |
1972 뮌헨 | +93kg급 금메달 |
1972 뮌헨 | 무제한급 금메달 |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메달 | |
1967 솔트레이크시티 | +93kg급 금메달 |
1971 루트비히스하펜 | +93kg급 금메달 |
1969 멕시코시티 | 무제한급 은메달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메달 | |
1966 룩셈부르크 | +93kg급 금메달 |
1967 로마 | +93kg급 금메달 |
1969 오스텐데 | +93kg급 금메달 |
1969 오스텐데 | 무제한급 금메달 |
1971 예테보리 | +93kg급 금메달 |
1972 포르뷔르흐 | +93kg급 금메달 |
1972 포르뷔르흐 | 무제한급 금메달 |
1965 마드리드 | 무제한급 은메달 |
1970 동베를린 | +93kg급 은메달 |
1970 동베를린 | 무제한급 은메달 |
1965 마드리드 | +93kg급 동메달 |
1967 로마 | 무제한급 동메달 |
프로레슬링 경력 (생략) |
2. 유도 선수 경력
암스테르담 출신인 뤼스카는 20세에 유도를 시작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훈련하며 기량을 쌓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유럽 및 세계 무대에서 활약했으며, 욘 블루밍 등의 지도를 받았다.[1] 그는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총 7번의 우승(헤비급 5회, 무제한급 2회)을 차지했고[2],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1967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와 1971년 루트비히스하펜 대회에서 두 차례 정상에 올랐다.[3]
뤼스카의 선수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72년 뮌헨 올림픽이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헤비급과 무제한급 두 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단일 올림픽 대회 유도 종목에서 2관왕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4] 이 기록은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 프랑스의 클라리스 아그베뉴누가 여자 하프미들급과 혼성 단체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의 올림픽 성공은 대회 기간 중 발생한 뮌헨 참사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래기도 했다.[4] 뤼스카는 포인트를 따기보다는 정면으로 승부하여 한판승을 노리는 경기 스타일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72년 올림픽 이후 현역 유도 선수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잠시 프로 레슬링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5]
2. 1. 초기 생애 및 훈련
뤼스카는 1940년 8월 2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10대에 네덜란드 해군에 입대하여 복무 중 유도를 접했고, 20세에 본격적으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실력 향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현지 스승들에게 지도를 받으며 훈련했다.1960년대 중반에는 네덜란드 내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톤 헤이싱크와 대등하게 겨룰 정도의 강자로 성장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욘 블루밍의 지도를 받았다.[1] 특히 1972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는 세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오카노 이사오가 주최하는 쇼키주쿠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뤼스카는 타고난 힘의 소유자로 알려졌으며(거목을 웃으며 양 어깨에 짊어진 사진이 전해진다), 헤비급 선수로서는 큰 체격이 아니었음에도 과학적 검사 결과 뛰어난 체력과 운동 능력을 보였다. 이러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유럽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 유럽 선수권 대회 +93kg급에서 5회(1966–67, 1969, 1971–72), 무제한급에서 2회(1969, 1972) 우승하며 총 7개의 유럽 타이틀을 획득했다.[2]
2. 2. 주요 대회 성적
뤼스카는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총 7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93kg급(헤비급)에서 5번(1966년, 1967년, 1969년, 1971년, 1972년), 무차별급에서 2번(1969년, 1972년) 정상에 올랐다.[2]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두 차례(+93kg급) 우승(1967년 솔트레이크시티, 1971년 루트비히스하펜)을 기록했다.[3]특히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헤비급(+93kg급)과 무차별급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며, 단일 올림픽 대회 유도 종목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딴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4] 이 기록은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 프랑스의 클라리스 아그베뉴누가 여자 하프미들급(-63kg)과 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아래는 뤼스카의 주요 국제 대회 성적이다.
연도 | 대회 | 체급 | 결과 |
---|---|---|---|
1963년 | 독일 국제 | 무제한급 | 우승 |
1963년 | 독일 국제 | 무차별급 | 우승 |
1964년 | 독일 국제 | 무차별급 | 우승 |
1965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3위 |
1965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차별급 | 2위 |
1965년 | 독일 국제 | 무차별급 | 우승 |
1966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66년 | 독일 국제 | 무차별급 | 우승 |
1967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67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차별급 | 3위 |
1967년 | 1967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솔트레이크시티) | +93kg급 | 우승 |
1969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69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차별급 | 우승 |
1969년 | 1969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차별급 | 2위 |
1970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2위 |
1970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차별급 | 2위 |
1971년 | 프랑스 국제 | 무제한급 | 우승 |
1971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71년 | 1971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루트비히스하펜) | +93kg급 | 우승 |
1972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72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차별급 | 우승 |
1972년 | 뮌헨 올림픽 | +93kg급 (헤비급) | 우승 |
1972년 | 뮌헨 올림픽 | 무차별급 | 우승 |
2. 3. 1972년 뮌헨 올림픽 2관왕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유도 헤비급(+93kg)과 무제한급 부문에서 모두 우승하여, 단일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한 최초의 유도 선수가 되었다. 당시 헤비급 선수로서는 큰 체격이 아니었음에도 거구의 선수들이 즐비했던 대회에서 거둔 성과였다. 특히 무제한급에서는 3회전에서 소련의 비탈리 쿠즈네초프에게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에 다시 진출하여 쿠즈네초프에게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17]뤼스카는 이 대회를 앞두고 일본을 세 차례 방문하여 오카노 이사오가 운영하는 쇼키주쿠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으며, 시상식에는 쇼키주쿠의 트레이닝 저지를 입고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공은 대회 중 발생한 뮌헨 참사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래기도 했다.[4]
뤼스카의 이 기록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끝으로 무제한급 경기가 폐지되고 한 선수가 여러 체급에 중복 출전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더욱 특별한 성과로 남게 되었다. 이후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 프랑스의 클라리스 아그베뉴누가 여자 하프미들급과 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하기 전까지 올림픽 유도에서 단일 대회 2관왕은 뤼스카가 유일했다.
3. 프로레슬링 경력
유도 선수 은퇴 후, 빔 뤼스카는 1976년 프로레슬링계에 입문하여 1980년까지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월드 와이드 레슬링 페더레이션(WWWF) 등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150번 이상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렀으며, 동료 유도 선수 출신인 앨런 코지와 태그팀을 이루어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6]
프로레슬러 데뷔 초창기인 1976년에는 안토니오 이노키 및 이반 고메스와 각각 경기를 가졌는데, 이 경기들은 이후 여러 논란과 화제를 낳았다. 특히 이반 고메스와의 경기는 슛 레슬링 양상으로 번지며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판정 논란과 함께 브라질 현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7][8][9][10][11][12] 뤼스카는 이후에도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에서 활동하며 여러 유명 레슬러들과 대결했지만[22], 프로레슬링 스타일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3. 1. 신일본 프로레슬링 활동
뤼스카는 유도 선수 은퇴 후, 1976년부터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참전하며 프로 격투가로 전향했다.[6] 그는 1980년까지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월드 와이드 레슬링 페더레이션(WWWF) 프로모션에서 활동하며 150번 이상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렀다. 이 중 일부 경기에서는 동료 유도 선수 출신인 앨런 코지와 태그팀을 이루기도 했다.[6]1976년 2월 6일,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격투기 세계 제일 결정전"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와 이종격투기 시합을 가졌다. 이는 "프로레슬링 대 유도"의 대결로 큰 주목을 받았다. 뤼스카는 이노키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백 드롭 3연발을 맞고 세컨드로 나선 크리스 돌먼이 타월을 던져 TKO로 패배했다.[20][21]
같은 해 8월 7일, 브라질 투어 중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전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러이자 발리 투두 파이터인 이반 고메스와 특별 경기를 가졌다. 경기 규칙과 결과에 대한 사전 협상이 난항을 겪으며 양측 간 긴장감이 높았다. 다카하시 테루오 심판 아래 시작된 경기에서 고메스가 실제 타격과 반칙성 펀치를 가하자, 뤼스카도 주먹으로 응수하며 경기는 순식간에 슛 레슬링 양상으로 변했다. 고메스가 뤼스카를 길로틴 초크로 제압하려 했으나 뤼스카는 탈출 후 마운트 포지션을 점했다. 로프 근처에서 고메스가 피를 흘리며 뤼스카의 등 뒤에서 리어 네이키드 초크를 시도했고, 뤼스카는 규칙에 따라 로프를 잡았다. 그러나 고메스가 기술을 풀지 않자, 심판은 고메스의 몸 대부분이 로프 밖에 있다고 판단하여 9분 3초 만에 카운트 아웃으로 경기를 종료시켰다.[7] 이 초크와 로프 이스케이프의 유효성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8][9]
관중들은 고메스가 판정에 불리하게 되었다고 여겨 폭동 직전까지 갔으나, 안토니오 이노키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 회장이 직접 나서 진정시켰다. 브라질 현지에서는 고메스가 반칙으로 싸움을 시작했음을 인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판정에 대한 논란과 함께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쟁이 이어졌다.[10] 결국 리우데자네이루 체육 위원회는 다카하시 심판과 뤼스카의 모든 스포츠 대회 출전을 금지했다.[11] 반면 일본 측에서는 고메스가 오른쪽 눈 주위에 9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은 반면 뤼스카는 상대적으로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을 들어 뤼스카를 승자로 간주했다.[12] 이노키가 뤼스카의 출전 금지에 대한 보상으로 비밀리에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11] 1995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TV 프로그램 '월드 프로 레슬링'에서 이 경기의 90초 분량 영상이 방영되었고, 이노키는 이를 UFC의 종합격투기 경기에 비유하기도 했다.[13]
뤼스카는 이후에도 프로레슬러로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계속 출전하여 앙드레 더 자이언트, 타이거 제트 신, 스탠 한센, 밥 백랜드, 헐크 호건 등 당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들과 태그 매치 등에서 맞붙었다.[22] 하지만 프로레슬링 스타일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여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오랜 공백기 후, 1994년 9월 23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이노키와 재대결을 펼쳤다. 잘 단련된 몸을 보여주었으나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패배했다. 같은 해 신일본 프로레슬링 내 그룹인 헤이세이 유신군의 흥행에도 참가하여 고토 타츠토시를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꺾었다.[20]
당시 심판이었던 미스터 타카하시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뤼스카를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다만, 관객에게 어필하는 프로레슬링 센스가 부족했고, 상대의 말을 잘 듣는 성격 탓에 쉽게 패배하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등 자기 주장이 약해 프로레슬러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타카하시는 이종격투기 시합을 포함한 경기들이 사전에 승패가 정해진 프로레슬링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뤼스카는 삼보 세계 챔피언 크리스 돌먼과 절친한 친구였으나, 뤼스카가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일 때 돌먼이 마에다 아키라의 파이팅 네트워크 링스에 합류하면서 잠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9월, 이노키가 오가와 나오야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화해했으며, 2015년 뤼스카가 사망할 때까지 연락을 유지했다.[14]
3. 2. 이반 고메스와의 대결
뤼스카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월드 와이드 레슬링 페더레이션 프로모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150번 이상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가졌으며, 그 중 일부 경기에서는 동료 유도 선수인 앨런 코지와 태그팀 파트너로 활동했다.[6]1976년 브라질 투어 중, 뤼스카는 8월 7일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유명한 발리 투두 파이터이자 전 신일본 프로레슬링(NJPW) 레슬러인 이반 고메스와 특별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기 결과와 시간에 대한 사전 협상이 순조롭지 못했고, 이로 인해 양측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다카하시 테루오 심판 아래 시작된 경기에서 고메스는 뤼스카에게 실제 타격과 규칙에 어긋나는 주먹질을 가하며 공격했다. 뤼스카 역시 비슷한 오른손 펀치로 맞받아치면서 경기는 순식간에 슛 레슬링 양상으로 변했다. 체중이 약간 더 나가는 고메스는 뤼스카를 길로틴 초크로 넘어뜨렸지만, 뤼스카는 이를 빠져나와 고메스를 마운트 자세로 제압했다. 링 로프 근처에서 고메스는 피를 흘리며 뤼스카의 등 뒤에서 리어 네이키드 초크를 시도했다. 뤼스카는 경기 규칙에 따라 로프를 잡아 기술을 중단시키려 했다. 하지만 고메스는 초크를 풀지 않았고, 심판은 고메스의 몸 대부분이 로프 밖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9분 03초 만에 카운트 아웃으로 경기를 종료시켰다.[7] 이 과정에서 초크 기술과 로프를 이용한 방어의 유효성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8][9]
경기장의 관중들은 고메스가 판정 때문에 억울하게 패배했다고 여겼고,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 회장 안토니오 이노키가 직접 나서서 관중을 진정시키기 전까지 폭동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그럼에도 브라질 현지에서는 경기 결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이어졌고, 일부 전문가들은 고메스가 먼저 반칙으로 싸움을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10] 결국 리우데자네이루 체육 위원회는 심판 다카하시와 뤼스카의 모든 스포츠 대회 출전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11] 반면 일본 측에서는 뤼스카를 승자로 간주했는데, 이는 난투극 과정에서 고메스가 오른쪽 눈 주위에 9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은 반면, 뤼스카는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기 때문이다.[12] 또한, 이노키 회장이 뤼스카의 출전 금지에 대한 보상으로 비밀리에 현금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11]
1995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TV 프로그램인 '월드 프로 레슬링'에서는 이 격투 장면 중 90초 분량의 영상이 방영되었다. 방송에서 이노키는 이 경기를 UFC의 종합격투기 경기에 비유하며 그 격렬함을 설명했다.[13]
3. 3. 프로레슬러로서의 평가
미스터 타카하시는 자신의 저서에서 빔 뤼스카를 "자신이 보아온 사람 중 가장 강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다만, 뤼스카 본인은 관객을 상대로 어필하는 프로레슬링적 센스가 부족했고, 또한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반면 쉽게 져주는 역할을 하여 자기 주장이 약한 점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것이 그가 프로레슬러로서 성공하지 못한 원인이라고 보았다.[18] 또한 미스터 타카하시는 뤼스카가 치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이종격투기 시합을 포함한 일련의 경기들이 실제로는 승패가 미리 정해진 프로레슬링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4. 은퇴 이후
1974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후, 뤼스카는 유도 코치, 카지노 경비원으로 활동하다가 부인과 함께 술집을 경영했다.
이후 프로 격투가로 전향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참전했다. 1976년 2월 6일,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격투기 세계 제일 결정전'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와 이종격투기 시합을 가졌다. 이 경기에서 뤼스카는 이노키를 압박했으나, 백 드롭 3연발을 맞고 세컨드로 나선 크리스 돌먼이 타월을 던져 TKO 패배를 당했다.[20][21] 이후에도 프로레슬러로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계속 출전하며 앙드레 더 자이언트, 타이거 제트 신, 스탠 한센, 밥 백랜드, 헐크 호건 등 당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들과 태그 매치로 맞붙기도 했다.[22] 그러나 프로레슬링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8] 1994년 9월 23일에는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이노키와 재대결했으나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패배했다. 같은 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내부 그룹인 헤이세이 유신군의 흥행에 참가하여 고토 타츠토시를 꺾기도 했다.[20] 당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레퍼리였던 미스터 타카하시는 뤼스카를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남자"라고 평가하면서도, 관중 어필 능력 부족과 자기주장이 약한 점 때문에 프로레슬러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뤼스카는 삼보 세계 챔피언 크리스 돌먼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뤼스카가 안토니오 이노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소속되고 돌먼이 마에다 아키라의 파이팅 네트워크 링스에 합류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9월, 이노키가 오가와 나오야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화해했으며, 2015년 뤼스카가 사망할 때까지 연락을 이어갔다.[14]
4. 1. 명예의 전당 헌액
2013년 국제 유도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5]4. 2. 사망
2001년 요트를 타던 중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졌고,[23] 이로 인해 신체 마비와 언어 장애라는 후유증을 얻었다. 이후 14년간 휠체어 생활을 했다.[24] 2014년에는 요양원에 입원했으며,[16] 2015년 2월 14일 노르트홀란트주 호른에 있는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25] 유족으로는 아내와 두 자녀, 다섯 명의 손주가 있다.[16]5. 주요 전적
빔 뤼스카는 유도 선수로서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주요 성과로는 1967년과 1971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우승, 그리고 1972년 하계 올림픽 헤비급 및 무제한급 2관왕 달성이 있다.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정상에 올랐으며, 이 외에도 프랑스 국제 유도 대회, 독일 국제 유도 대회 등 다수의 국제 대회에서 우승 및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5. 1. 유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뤼스카는 10대에 네덜란드 해군 수병으로 입대하여 유도를 시작했으며, 20세에 본격적인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1] 이후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사범들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욘 블루밍의 지도를 받았으며,[1] 1960년대 중반에는 이미 네덜란드 내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톤 헤이싱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자로 성장했다. 그는 타고난 힘의 소유자로 알려졌으며, 헤비급 선수로서 특별히 큰 체격은 아니었지만 과학적 검사 결과 다양한 체력 및 운동 능력 지표에서 뛰어난 수치를 기록했다.뤼스카는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총 7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93kg급에서 5번(1966년, 1967년, 1969년, 1971년, 1972년), 무제한급에서 2번(1969년, 1972년) 정상에 올랐다.[2] 또한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도 두 차례 우승했다. 1967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와 1971년 루트비히스하펜 대회에서 헤비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3]
1972년 뮌헨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는 세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오카노 이사오가 운영하는 쇼키주쿠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그는 헤비급과 무제한급 두 체급에 출전하여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단일 올림픽 대회 유도 종목에서 금메달 2개를 딴 최초의 기록이었다. 무제한급에서는 3회전에서 소련의 비탈리 쿠즈네초프에게 패배했으나,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에 진출하여 쿠즈네초프에게 승리하며 설욕에 성공했다.[17] 시상대에는 쇼키주쿠의 트레이닝 저지를 입고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올림픽 2관왕이라는 위업은 대회 기간 중 발생한 뮌헨 참사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래기도 했다.[4]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끝으로 무제한급 경기가 폐지되고 한 선수가 여러 체급에 중복 출전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뤼스카의 기록은 오랫동안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았다. 이후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 프랑스의 클라리스 아그베뉴누가 여자 하프미들급과 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뤼스카 이후 처음으로 단일 올림픽 유도 2관왕이 되었다. 뤼스카의 경기 스타일은 점수 따기에 급급하기보다는 정면 대결을 통해 한판승을 노리는 공격적인 유도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72년 올림픽 이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2013년에는 국제 유도 연맹(IJF)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주요 성적'''
연도 | 대회 | 체급 | 결과 |
---|---|---|---|
1963년 | 독일 국제 | 헤비급 | 우승 |
1963년 | 독일 국제 | 무제한급 | 우승 |
1964년 | 독일 국제 | 무제한급 | 우승 |
1965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헤비급 | 3위 |
1965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2위 |
1965년 | 독일 국제 | 무제한급 | 우승 |
1966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66년 | 독일 국제 | 무제한급 | 우승 |
1967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67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3위 |
1967년 | 세계 선수권 | +93kg급 | 우승 |
1969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69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우승 |
1969년 | 세계 선수권 | 무제한급 | 2위 |
1970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2위 |
1970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2위 |
1971년 | 프랑스 국제 | +93kg급 | 우승 |
1971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71년 | 세계 선수권 | +93kg급 | 우승 |
1972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93kg급 | 우승 |
1972년 | 유럽 유도 선수권 대회 | 무제한급 | 우승 |
1972년 | 뮌헨 올림픽 | 헤비급 (+93kg) | 우승 |
1972년 | 뮌헨 올림픽 | 무제한급 | 우승 |
5. 2. 프로레슬링
뤼스카는 유도를 은퇴한 후 프로 격투가로 전향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참전했다. 그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신일본 프로레슬링(NJPW)과 월드 와이드 레슬링 페더레이션(WWWF) 프로모션에서 활동했으며, 150번 이상의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렀다. 이 중 일부 경기에서는 동료 유도 선수인 앨런 코지와 태그팀 파트너로 활동하기도 했다.[6]1976년 2월 6일, 뤼스카는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격투기 세계 제일 결정전"이라는 이름의 이종격투기 시합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와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뤼스카는 이노키를 압박했으나, 결국 이노키의 백 드롭 3연발 공격 이후 뤼스카의 세컨드였던 크리스 돌먼이 타월을 던져 TKO 패배를 당했다.[20][21]
같은 해 8월 7일, 브라질 투어 중 뤼스카는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유명 발리 투두 파이터이자 전 NJPW 레슬러인 이반 고메스와 특별 경기를 가졌다. 경기 결과와 시간에 대한 사전 협상이 원활하지 않아 양측 간에 긴장감이 흘렀다. 다카하시 테루오 심판 아래 시작된 경기에서 고메스가 실제 타격과 반칙성 주먹질을 가하자, 뤼스카도 오른손 펀치로 응수하며 경기는 순식간에 슛 레슬링 양상으로 변했다. 체중이 조금 더 나가는 고메스는 뤼스카를 길로틴 초크로 제압하려 했으나, 뤼스카는 이를 빠져나와 마운트 자세를 잡았다. 이후 로프 근처에서 고메스가 피를 흘리며 뤼스카의 등 뒤에서 리어 네이키드 초크를 시도했고, 뤼스카는 규칙에 따라 로프를 잡았다. 하지만 고메스는 기술을 풀지 않았고, 심판은 고메스의 몸 대부분이 로프 밖에 있다고 판단하여 9분 3초 만에 카운트 아웃으로 경기를 중단시켰다.[7] 이 과정에서 초크 기술과 로프 탈출의 유효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8][9]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은 관중들은 고메스가 불리한 판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소요 사태 직전까지 갔으나, 안토니오 이노키 NJPW 회장이 직접 나서서 관중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브라질 현지에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고, 일부 전문가들은 고메스가 먼저 반칙을 저질렀음을 인정하면서도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에 대해 논쟁했다.[10] 결국 리우데자네이루 체육 위원회는 심판 다카하시와 뤼스카에게 모든 스포츠 대회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다.[11] 반면 일본 측에서는 고메스가 오른쪽 눈 주위에 9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은 반면 뤼스카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는 점을 들어 뤼스카를 승자로 간주했다.[12] 또한, 이노키가 뤼스카의 출전 금지에 대한 보상으로 비밀리에 현금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보도도 있었다.[11] 1995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TV 프로그램인 '월드 프로 레슬링'에서는 이 경기의 일부 영상(약 90초)을 방영했으며, 이노키는 이 경기를 UFC의 종합격투기 시합에 비유하기도 했다.[13]
이후에도 뤼스카는 프로레슬러로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계속 출전하여 앙드레 더 자이언트, 타이거 제트 신, 스탠 한센, 밥 백랜드, 헐크 호건 등 당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들과 태그 매치 경기를 가졌다.[22] 하지만 프로레슬링 스타일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오랜 공백기를 거친 후, 1994년 9월 23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이노키와 재대결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뤼스카는 잘 단련된 몸을 보여주었으나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패배했다. 같은 해, 신일본 프로레슬링 내 그룹인 헤이세이 유신군의 흥행에 참가하여 고토 타츠토시를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꺾기도 했다.[20]
훗날 프로레슬링의 이면을 폭로한 미스터 타카하시는 자신의 저서에서 뤼스카를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다만, 뤼스카 본인이 관객에게 어필하는 프로레슬링 특유의 센스가 부족했고, 상대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편이어서 쉽게 패배하는 역할을 맡는 등 자기 주장이 약했던 점이 프로레슬러로서 성공하지 못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미스터 타카하시는 뤼스카가 치른 일련의 이종격투기 시합 역시 실제로는 승패가 사전에 정해진 프로레슬링 경기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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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etters to the Editor
Black Belt magazine
1966-12
[2]
웹사이트
Obtained results (du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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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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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m Ruska
https://www.sports-r[...]
[4]
웹사이트
Wim Ruska op 74-jarige leeftijd overleden
http://www.ad.nl/ad/[...]
Algemeen Dagblad
2015-02-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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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m Ruska Biographical information
https://www.olymp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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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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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G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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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J 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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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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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ube de Aut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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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artial Arts Death Battle - The stormy story of the fools who wanted to be the strongest
Takarajimasha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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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at World Scandal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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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The Fierce! History of Violence in Mat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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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ウィリアム・ルスカとクリス・ドールマンの物語~日本マット界に多大な影響、大親友としての別離と氷解 - プロレス/格闘技 カクトウログ
http://kakutolog.coc[...]
[15]
웹사이트
Judolegende Wim Ruska overl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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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Telegraaf
2015-02-14
[16]
웹사이트
JUDO NEWS: THE GREAT DUTCH JUDO CHAMPION WILLEM "WIM" RUSKA HAS PASSED AWAY
http://judotal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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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and Olympic Results
http://www.sports-re[...]
[18]
웹사이트
来日全外国人レスラー名鑑 ウイレム・ルスカ
http://www.showapuro[...]
昭和プロレス研究室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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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Ru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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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estlingdata.com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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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新日本プロレス 来日外国人選手 PERFECTカタロ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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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猪木さん死去】坂口征二戦“黄金コンビ”初のシングル対決ほか/名勝負ベスト30&番外編
https://www.nikkan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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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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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JPW 1980 The 1st Madison Square Garden Tag Team Le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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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oresu.com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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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鬼」ルスカ氏が死去 五輪柔道2階級制覇 猪木とも対戦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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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追悼!“赤鬼”ルスカ、同じ柔道からプロレスを舞台に戦ったあの男が語る 「腕相撲、そしてポルノ映画の思い出」
https://wpb.shueisha[...]
[25]
웹사이트
元K-1王者ホーストが死去前日に見舞った最期の姿、ウイリエム・ルスカの知られざる晩年
https://wpb.shuei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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