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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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지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법에 엄격하고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사마랑의 족형으로, 젊은 시절에는 명성이 없었지만, 형주에서 조조에게 발탁되어 현령을 지냈으며, 광평 현령으로 재직하며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하남윤을 11년간 역임하며, 동소와 조홍의 측근도 엄하게 다스렸으며, 명제에게 농업 장려를 진언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진수가 "위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하남윤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는 없다"고 칭찬했다. 그의 아들 사마기가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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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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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사마지 |
원어 이름 | 司馬芝 |
자 | 자화 (子華) |
출생지 | 사례 하내군 온현 |
배우자 | 동소의 조카 |
자녀 | 사마기 |
친척 | 사마랑 (사촌), 사마의 (사촌), 사마의 가계도 참고 |
관직 정보 | |
직위 | 대사농 |
임기 시작 | 230년대 경 |
임기 종료 | 불명 |
군주 | 조예 |
직위 | 하남윤 |
임기 시작 | 220년대 초 경 |
임기 종료 | 230년대 초 경 |
군주 | 조비 / 조예 |
직위 | 양평태수 |
임기 시작 | 210년대 경 |
임기 종료 | 220년대 초 경 |
군주 | 헌제 (220년까지) / 조비 (220년부터) |
승상 | 조조 (220년까지) |
직위 | 패태수 |
임기 | 210년대 경 |
군주 | 헌제 |
승상 | 조조 |
직위 | 감릉태수 |
임기 | 210년대 경 |
군주 | 헌제 |
승상 | 조조 |
직위 | 대리정 (大理正) |
임기 | 210년대 경 |
군주 | 헌제 |
승상 | 조조 |
직위 | 광평 현령 |
임기 | 210년대 경 |
군주 | 헌제 |
승상 | 조조 |
직위 | 건현 현장 |
임기 시작 | 208년 |
임기 종료 | 210년대 경 |
군주 | 헌제 |
승상 | 조조 |
기타 정보 | |
작위 | 관내후 (關內侯) |
2. 생애
사마랑의 족형으로, 초기에는 사마랑보다 명성이 덜했으나 양준으로부터는 "일찍이 이름을 떨친 점에서는 사마랑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51] 젊은 시절 전란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형주로 피난하여 십여 년간 농사를 지으며 절의를 지키며 머물렀다.
건안 13년(208년) 형주를 평정한 조조에게 발탁되어 연현의 현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광평령으로 옮겼다. 현령 시절 법에 따라 엄정하게 다스려 유훈과 같은 권세가의 청탁도 거절하며 공정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대리정과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위 황초 연간(220년~226년)에는 수도권 행정을 담당하는 하남윤으로 임명되어 11년간 재직했다. 재임 중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왔으며, 동소나 조홍과 같은 고위 관료의 측근이 연루된 사건에서도 사적인 청탁을 받지 않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다. 황초 7년(226년) 명제가 즉위하자 관내후에 봉해졌으나, 이후 제후들의 규율 위반 사건에 대한 감독 소홀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후에 대사농으로 복직하여, 당시 관리들이 상공업에 치중하는 세태를 우려하며 명제에게 농업에 힘쓸 것을 진언하여 받아들여졌다. 성실한 인품이었으나 스스로의 올바름을 내세우지 않았고, 논쟁 시에는 날카로웠으나 뒤끝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재임 중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거의 재산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청렴했다. 아들 사마기가 작위를 이었다. 서진 시대에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위나라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하남윤 중 사마지를 능가하는 자는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2. 1. 초기 생애와 형주 피난
하내군(河內郡중국어) 온현(溫縣중국어) (현재의 허난성 원현) 출신이다.[1] 사마랑, 사마의와는 먼 친척 관계였으며, 이들의 후손은 훗날 진나라 황실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족제인 사마랑에 비해 명성이 덜했으나, 양준만은 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일찍이 이름을 떨친 점에서는 사마랑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2][51]원래 학자였던 사마지는 후한 말기, 중국 전역에 혼란이 발생하자 전란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을 떠나 남쪽의 형주(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로 향했다. 피난길에 노양현(魯陽縣, 현재의 루산현, 허난성) 근처 산에서 강도를 만났다.[3] 다른 여행자들은 늙고 병든 동료들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사마지는 홀로 남아 어머니를 보호했다.[3] 강도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다가오자, 그는 땅에 엎드려 절하며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어머니는 연로하십니다. 제발 어머니를 돌봐주십시오!"[4] 그의 효심에 감동한 강도들은 "그는 효자다. 그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며 모자를 해치지 않고 보내주었다.[4] 이후 사마지는 수레를 구해 어머니가 남쪽으로 가는 여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4]
사마지는 형주에서 10년 이상 머물면서 직접 농사를 지었으며, 절의(節義)를 굳게 지키며 도덕적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생활했다.[5]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형주를 평정한 조조에게 임관하여 현장이 되었다. 이후 광평령(廣平令)으로 옮겨 법에 따라 엄정하게 다스렸으며, 조조의 오랜 측근이었던 유훈의 청탁도 거절하고 법대로 처리하여 명성을 얻었다.[14][15]이후 대리정(大理正)과 여러 군의 태수를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았다.[20] 조위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는 수도권 지역의 행정 장관 격인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하남윤으로 재임하는 동안 동소나 조홍과 같은 고위 관료들의 측근이 연루된 사건에서도 사적인 청탁을 받지 않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다. 관직이 대사농에 이르렀을 때는 명제에게 농업 장려의 중요성을 진언하기도 했다. 재임 중 사망하였으며, 아들 사마기가 작위를 이었다.
2. 2. 1. 현령 시절
건안 13년(208년), 형주를 평정한 조조는 사마지를 등용하여 연현(菅縣|연현중국어, 현재 산둥성 지양현 동쪽에 위치)의 長|현장중국어으로 임명했다.[6] 당시 한나라는 혼란스러워 법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이들이 많았다.[7]연현이 속한 청주 지난군(濟南郡|지난군중국어)에는 主簿|주부중국어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1,000명이 넘는 가신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강도나 부패한 관리들이었다.[7] 유절의 가신 王同|왕통중국어 등이 군 복무를 해야 할 때가 되자, 사마지는 유절이 이전부터 가신들의 병역 의무를 회피시켜 왔음을 지적하며 그에게 서신을 보내 왕통 등을 제때 군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8][9]
병역 명령이 내려지자 유절은 왕통 등을 군영으로 보내는 한편, 몰래 군 감찰관에게 손을 써 사마지의 행정을 흠잡으려 했다. 사마지의 부하들은 감찰관을 두려워하여 유절의 가신들을 대신해 군 복무에 동의하려 했다.[10] 이 사실을 안 사마지는 지난군 태수 郝光|하광중국어에게 편지를 보내 유절의 잘못을 상세히 알렸다.[11] 사마지를 신뢰하던 하광은 유절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게 직접 군 복무를 명했고, 유절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청주에는 "(사마지가) 군 주부를 병사로 만들었다"는 말이 돌았다.[12]
이후 사마지는 광평현(廣平縣|광평현중국어, 현재 허베이성 취저우현 북쪽에 위치)의 令|현령중국어으로 전임되었다.[13] 당시 조조의 오랜 측근이었던 유훈은 자신의 지위를 믿고 오만하게 행동했으며, 친척과 부하들이 법을 어기는 것을 방치했다.[13] 유훈은 한번 사마지에게 서명도 없이 사적인 청탁이 담긴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지는 이를 묵살하고 모든 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며 법률에 따라 그의 일파를 재판했다.[14] 훗날 유훈이 모반 혐의로 실각하고 처형되었을 때, 그와 연루된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으나 사마지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사마지가 유훈과 거리를 둔 것을 현명했다고 칭찬하며 그의 공정함을 높이 평가했다.[15]
2. 2. 2. 사법 관리와 태수 시절
사마랑의 족형으로, 처음에는 사마랑에 비해 명성이 높지 않았으나 양준은 "일찍이 이름을 떨친 점에서는 사마랑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뛰어나다"고 높이 평가했다.[51] 젊은 시절 전란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형주로 피신했으며, 도적을 만났을 때도 노모를 지키며 도망가지 않아 효심에 감복한 도적들이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형주에서 십여 년간 농사를 지으며 절의를 지켰다.건안 13년(208년) 형주를 평정한 조조에게 발탁되어 연현의 현장(縣長)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제남군의 주부 유절(劉節) 일파가 군 밖에서 도적질하며 치안을 어지럽혔는데, 사마지는 그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절의 자식들을 병사로 징용하려 했다. 유절이 이를 숨기자 사마지는 그의 죄를 군에 보고했고, 사마지를 존경하던 제남 태수 호광(胡爌)은 유절의 자식들 대신 유절 본인을 병사로 징용했다.
이후 광평령(廣平令)으로 옮겨갔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조조와의 오랜 인연을 내세운 유훈 일파가 법을 자주 어겼다. 유훈이 자기 자식들의 죄를 사면해달라고 청탁했지만, 사마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했다. 나중에 유훈이 실각하고 처형되면서 사마지의 공정함은 더욱 칭송받았다.
216년 헌제가 조조를 위왕(魏王)으로 봉한 후, 사마지는 조조의 위나라에서 대리정(大理正)이라는 고위 사법 관리직을 맡았다.[16] 이때 그는 하녀가 관청 창고의 비단을 훔쳐 변기에 숨긴 절도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녀는 이미 체포되어 심문을 위해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17] 사마지는 이 사건을 심리한 후, 조조에게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 "형사 사법 제도의 결함 중 하나는 그 가혹함과 잔인함에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피의자는 심문을 받기 전에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피의자가 심문 과정에서 고문에 굴복하면, 실제로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소된 범죄를 거짓으로 자백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문을 통해 얻은 자백은 피의자의 유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법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들어 일반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고대 성인들의 가르침에 부합합니다. 모든 피의자를 유죄로 간주하고, 진정으로 유죄인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백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저속하고 조잡한 방식입니다. 피의자를 석방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일반 백성이 이 제도의 작동 방식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니겠습니까?"[18]
조조는 사마지의 조언을 따랐다.[19]
사마지는 이후 감릉(甘陵, 현재 린칭, 산둥성 일대), 패(沛, 현재 쉬저우, 장쑤성 일대), 양평(陽平, 현재 한단, 허베이성 일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20]
조위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는 수도권 지역의 행정 장관 격인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그는 부하 관리들에게 교훈을 주어 직무에 힘쓰게 했고,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우며 어떠한 사적인 청탁도 받지 않았다. 한 관리가 사마지의 아내의 백부이자 당시 중신이었던 동소를 통해 청탁을 시도했으나, 동소조차 사마지를 두려워하여 중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또한 조홍의 측근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했다. 황초 7년(226년), 명제가 즉위하자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하남윤으로 11년간 재임했으나, 임기 말에 여러 왕들이 금령을 어긴 사건에 대한 감독 소홀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서진 시대에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위나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하남윤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는 없다"고 칭찬했다.
2. 3. 조비, 조예 시대의 관료 생활
조조 사후 조비가 건국한 조위에서도 벼슬을 이어갔다. 황초 연간(220년~226년)에는 수도 낙양의 행정관인 하남윤河南尹중국어으로 임명되었다.[21] 그는 하남윤으로 재직하는 동안 권력자들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명성을 얻었다.[21] 또한 조비에게 한나라 시대의 오수五銖중국어 주화를 조위의 공식 화폐로 다시 사용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황초 7년(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관내후에 봉해졌다.[51] 그러나 이후 왕들의 규율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감독 소홀의 책임을 지고 하남윤에서 면직되었다.
면직 후 대사농으로 복직하여 농업 정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관리들이 상공업에 치중하여 이익을 얻는 세태를 비판하며, 조예에게 농업에 집중할 것을 상소하였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사마지는 성실한 성품을 지녔으나 스스로의 올바름을 내세우지 않았고, 논쟁에서는 상대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논쟁 후에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재임 중 사망하였으며, 사후에는 남은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아들 사마기가 작위를 이었다.
2. 3. 1. 하남윤 시절
조위 황초 연간(220년~226년)에 하남윤( 河南尹|중국어 , 수도 사령부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21] 조비 재위 중에 임명된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엘리트들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으며, 누구에게도 편애를 보이지 않고 공정하게 통치했다.[21]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왔으며, 개인적인 청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 관리가 사마지의 아내의 백부이자 중신인 동소를 통해 청탁을 시도했으나, 동소조차 사마지를 두려워하여 중재하지 못했다.[22]사마지는 조비에게 한나라 시대에 사용되었던 오수( 五銖|중국어 ) 주화를 조위의 공식 통화로 복원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군주는 정부의 규칙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관리들이 항상 규칙을 어기지 않도록 보장할 수는 없다. 관리들이 규칙을 어길 때 군주가 항상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보장할 수도 없다. 관리들이 규칙을 어기면 그것은 군주의 잘못이고, 군주가 관리들의 잘못을 알아차리면 그것은 관리들의 잘못이다. 정부가 실패하면 군주가 먼저 잘못한 것이고, 그 밑의 관리들이 다음 책임을 져야 한다. 여러분 모두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23] 라고 훈계하며 직무 수행을 독려했다. 그의 부하들은 이 말을 따라 근면하고 충실하게 일했다.[24]
한번은 사마지의 부하 중 한 명의 부하로 일하던 파수꾼이 비녀를 훔쳤다는 혐의로 체포된 일이 있었다. 그의 진술은 증거와 모순되었지만, 당국은 그를 유죄로 판단하고 감옥에 가두었다.[25] 이 소식을 들은 사마지는 "때로는 너무 비슷해서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봐야 한다. 어떻게 비녀 하나 잃었다고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이 문제를 추궁할 필요가 없다."[26] 라고 말하며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마지는 하남윤으로 11년간 재임했다. 황초 7년(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관내후가 되었으나, 이후 여러 왕들이 금령을 어긴 사건에 연루되어 감시 소홀의 죄로 면직되었다.
서진 시대에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위나라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하남윤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는 없다"고 평가하며 그의 공정함과 치적을 높이 샀다.
2. 3. 2. 관내후 책봉과 면직
황초 7년(226년), 조예가 제위에 오르자 관내후에 봉해졌다.[51] 사마지는 하남윤河南尹중국어을 11년 동안 역임했는데, 재임 기간 동안 수많은 복잡한 법적 사건들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처리하여 위나라 조정에서 높은 평판을 얻었다.[33]그러나 231년,[34] 여러 제후들이 각자의 봉지에서 낙양으로 와 조예에게 조공을 바칠 때, 일부 제후들이 황제의 허락 없이 낙양에 주재하는 관리를 사적으로 방문하여 황실 의례를 위반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제후들은 황제의 허가 없이는 중앙 정부 관리와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드러나자, 사마지는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발생한 일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태만 혐의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 일로 사마지는 하남윤 관직에서 면직되었다.[35]
훗날 서진 시대에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사마지에 대해 "위나라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하남윤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는 없다"고 평가하며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2. 4. 사망
사마지는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재임 중에 사망했다.[41] 그는 청렴하여 사망 당시 집에 남은 재산이 거의 없었다.[41] 조위 시대 하남윤을 지낸 인물 중 사마지만큼 뛰어난 평가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41] 서진 시대의 역사가 진수는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위나라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남윤을 지낸 이들 중 사마지를 능가하는 자는 없다"고 극찬했다. 사후 아들 사마기가 작위를 이었다.3. 평가
양준은 사마지에 대해 "일찍이 이름을 떨친 점에서는 (족제) 사마랑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51]
사마지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공정하고 강직한 일 처리로 명성을 얻었다. 연현 현장 시절에는 세력을 믿고 법을 어기던 제남군 주부 유절의 아들들을 법대로 병사로 징용했으며, 이를 숨기려 한 유절의 죄를 군에 보고하여 결국 유절 본인이 대신 징용되게 하였다. 광평 현령으로 있을 때에는 조조와의 친분을 내세워 범죄를 저지르던 유훈 일파의 청탁을 거절하고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하여 공정함을 칭송받았다.
황초 연간에 하남윤이 되어서는 부하들을 잘 이끌어 직무에 힘쓰게 했으며,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도우며 어떠한 사적인 청탁도 받지 않았다. 그의 아내의 백부이자 중신이었던 동소조차 사사로운 부탁을 하려다 사마지를 두려워하여 중재하지 못할 정도였다. 비록 재임 11년 만에 관할 지역의 왕들이 법을 어긴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기도 했으나, 서진 시대에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는 "위나라 때부터 지금까지의 하남윤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는 없다"고 극찬하며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후 대사농으로 복직해서는 관리들이 상공업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고, 본업인 농업에 힘쓸 것을 조예에게 상소하여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성품은 성실했지만 자신의 올바름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논쟁 시에는 상대방의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했지만, 논쟁이 끝나면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는 어떠한 재산도 남기지 않아 청렴함을 보여주었다.
4. 후손
사마지의 아들 사마기(司馬岐)는 아버지의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하남(河南)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사법관으로 옮겼고, 이후 진류국(陳留國; 현재의 카이펑, 허난성 일대)의 재상(相)으로 승진했다.[42]
사마기가 진류국 재상으로 있을 때, 위(魏) 황실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은 죄수들을 량군(梁郡; 현재의 상추, 허난성 일대)에서 진류국의 여러 현(縣)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의 관리들은 죄수들을 수용하기 위해 감옥을 더 짓고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야 한다며 사마기에게 허가를 요청했다.[43] 그러나 사마기는 "그런 죄수가 수십 명이나 된다. 그들은 교활하고 속임수를 쓰는 자들이다. 죄를 자백하지 않았지만, 이미 구금 생활에 지쳐 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을 계속 오랫동안 가두어 두어야 하는가?"라고 말했다.[44] 죄수들이 이송되자 사마기는 직접 그들을 심문하여 죄를 밝혀내고 모든 사건을 반나절 만에 처리했다. 이후 그는 중앙의 사법기관인 정위(廷尉)로 승진했다.[45]
사마기가 정위로 있을 당시, 위나라 조정은 섭정 조상과 그의 측근인 하안, 등양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남양군 출신의 관리 귀태(圭泰)가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정위부로 보내졌다. 사건을 맡은 등양은 귀태에게 심한 고문을 가해 죄를 자백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46] 이 소식을 들은 사마기는 등양을 꾸짖으며 말했다. "중앙 정부의 관리들은 나라의 기둥이다. 당신은 이미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옛 성현들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소한 원한으로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가? 당신은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당신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 아닌가?"[47]
등양은 사마기의 질책에 분노하고 당황하여 물러났다. 사마기는 이후 조상과 그의 무리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48] 그는 동아시아 나이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사마조(司馬肇)는 아버지의 관내후 작위를 이어받았다.[49] 사마조는 이후 진나라 무제 시대인 태강 연간(280–289)에 상서(尚書)와 기주 자사를 지냈다.[50]
참조
[1]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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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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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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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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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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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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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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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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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魏書 楊俊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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