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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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성통해는 1517년 최세진이 편찬한 한자 운서로, 조선 초기의 한자음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신숙주 등이 편찬한 《홍무정운역훈》과 《사성통고》를 보완하여, 한자음을 정음, 속음, 금속음 세 가지로 제시하고, 한글 주석을 덧붙였다. 《사성통해》는 당시 북경의 한자음을 반영하고 다양한 중국 운서를 참고하여 조선 시대 한자음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현대 음운학 연구에도 활용된다.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은 1375년 명나라에서 편찬한 《홍무정운》을 조선 실정에 맞게 고쳐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했다. 그러나 원본 형식을 유지하려다 보니 주석이 많고 내용이 방대하여 실제 사용이 어려웠고, 학자들이 참고한 《중원음운》, 《오음집운》, 《고금운회거요》 등과 형식도 달라 익숙하지 않았다.
《사성통해》는 사성통고를 보완하기 위해 한자에 주석을 추가하고, 한자음을 정음, 속음, 금속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표기한 것이 특징이다. 최세진은 다양한 중국 운서를 참고하여 당시의 현실적인 한자음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2. 편찬 과정
세종은 신숙주 등에게 《홍무정운역훈》을 간소화한 《사성통고》를 편찬하게 했다. 《사성통고》는 《동국정운》처럼 한자를 배열하고, 주석을 모두 없앴으나, 서문만 《사성통해》에 전한다.
최세진은 《홍무정운역훈》을 보완하고자 《속첨홍무정운》을 편찬, 반절 표기법 대신 16세기 초 북경의 한자음(북방음)을 '금속음'으로 병기했다. 나아가 《속첨홍무정운》을 《사성통고》 식으로 고쳐 《사성통해》를 편찬, 4년간 7번 다듬어 1517년(중종 12년) 완성했다.
2. 1. 《홍무정운역훈》의 편찬과 한계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이 1375년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친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홍무정운》의 체재(體裁)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에 주석이 지나치게 많고 내용이 방대하여, 실제 사용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학사들은 《동국정운》을 편찬할 때 한자를 운별로 나눈 뒤 사성에 따라 배열한 《중원음운》(中原音韻)이나, 한자를 사성에 따라 배열한 뒤 한 운 안에서 성모, 운모, 성조가 모두 같은 글자들은 성모의 자모 순서에 따라 배열한 《오음집운》(五音集韻),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 등을 참고하였는데, 《홍무정운》(역훈)의 형식은 이와 달라 익숙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세종은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홍무정운역훈》을 간소화한 《사성통고》(四聲通攷)를 편찬하게 하였다. 《사성통고》는 한자를 《동국정운》과 같은 방식으로 배열하였고, 《홍무정운역훈》과는 반대로 한자에 달린 모든 주석을 없앴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서문만 《사성통해》에 실려 있다.
2. 2. 《속첨홍무정운》의 편찬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한 《홍무정운역훈》은 주석이 많고 내용이 방대하여 읽기 어려웠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최세진은 《속첨홍무정운》(續添洪武正韻)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홍무정운역훈》과 같은 순서로 한자를 배열하였으나, 반절 표기법을 채택하지 않았고, 명나라 수도 북경의 16세기 초 현실 한자음인 북방음(北方音)을 '금속음(今俗音)'이라는 이름으로 병기하였다.
2. 3. 《사성통해》의 완성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이 1375년에 명나라에서 지은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조선에 맞게 고친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하였지만, 홍무정운의 체재(體裁)를 훼손하지 않으려 한 결과 주석이 너무 많고 내용도 방대하여 정작 읽기가 어려웠다. 또 학사들은 한자를 먼저 운별로 나눈 뒤 사성에 따라 배열한 《중원음운》(中原音韻)이나, 한자를 먼저 사성에 따라 배열한 뒤 한 운 안에서 성모, 운모, 성조가 모두 같은 글자들은 성모의 자모 순서에 따라 배열한 《오음집운》(五音集韻),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동국정운》을 지을 때 참고하였는데, 홍무정운(역훈)의 형식은 이와 달랐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세종은 신숙주 등에게 다시 명하여 홍무정운역훈을 간소하게 한 《사성통고》(四聲通攷)를 편찬하게 하였다. 사성통고는 한자를 동국정운과 같은 방식으로 배열하였고, 홍무정운역훈과는 정 반대로 한자에 달린 모든 주석을 없앴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고 서문만 사성통해에 실려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최세진은 우선 홍무정운역훈을 보완한 《속첨홍무정운》(續添洪武正韻)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홍무정운역훈과 같은 순서로 한자를 배열하였으나, 반절 표기법을 채택하지 않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의 16세기 초 현실 한자음인 북방음(北方音)을 금속음(今俗音)이라는 이름으로 병기하였다. 나아가 최세진은 속첨홍무정운을 사성통고 식으로 고쳐 《사성통해》를 편찬하였다. 사성통해 서문에 따르면 4년에 걸쳐 원고를 일곱 번 다듬은 끝에 1517년(중종 12년)에 완성되었다.
3. 특징
3. 1. 주석
사성통고를 보완하고자 한자에 주석을 달았다. 《사성통해》 범례에 따르면 원나라 때의 《고금운회》(古今韻會, 약칭 《운회》)의 주석을 따 왔다 하나, 실은 웅충(熊忠)이 이를 고쳐 쓴 《고금운회거요》를 말한다. 450여 개의 한자에는 한글로도 주석을 달았다.
한자음은 정음, 속음, 금속음의 세 가지가 기재되었다. 이 가운데 정음과 속음은 홍무정운역훈과 같은데, 정음은 15세기 당시 중국인이 널리 썼고 홍무정운의 반절 표기에도 맞는 중국 한자음을, 속음은 15세기 당시 중국인이 사용하였지만 운서와는 맞지 않던 한자음을 말한다. 금속음은 홍무정운 발간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음과 이미 차이가 생긴 16세기 당시의 북방음을 말한다. 그 외에 최세진은 《몽고운략》(蒙古韻略), 《고금운회거요》, 《집운》(集韻), 《중원아음》(中原雅音), 《중원음운》(中原音韻), 《운학집성》(韻學集成) 등의 중국 운서를 폭넓게 참고하였으며, 간혹 그 한자음을 정음, 속음, 금속음과 더불어 적기도 하였다. 한자음을 나타낼 때는 반절을 사용하지 않았고, 성조도 이름만 표시할 뿐 방점을 찍지 않았다.
3. 2. 한자음 표기
최세진은 한자음을 정음, 속음, 금속음의 세 가지로 기재하였다. 정음과 속음은 홍무정운역훈과 같은데, 정음은 15세기 당시 중국인이 널리 썼고 홍무정운의 반절 표기에도 맞는 중국 한자음을, 속음은 15세기 당시 중국인이 사용하였지만 운서와는 맞지 않던 한자음을 말한다. 금속음은 홍무정운 발간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음과 이미 차이가 생긴 16세기 당시의 북방음을 말한다.
최세진은 《몽고운략》(蒙古韻略), 《고금운회거요》, 《집운》(集韻), 《중원아음》(中原雅音), 《중원음운》(中原音韻), 《운학집성》(韻學集成) 등의 중국 운서를 폭넓게 참고하였으며, 간혹 그 한자음을 정음, 속음, 금속음과 더불어 적기도 하였다. 한자음을 나타낼 때는 반절을 사용하지 않았고, 성조도 이름만 표시할 뿐 방점을 찍지 않았다.
4. 구성
이 중 '운모정국'에서는 《사성통해》의 운목을 제시하고 있으며, '광운 36자모지도'에 대해서 강신항은 송나라 때의 운서인 《광운》이 조선에 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당시에 통용되던 36자모에 《광운》이라는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운회 35자모지도'는 《운회》의 36성모 체계에서 하나가 부족하다. '동정자음'에서는 성조에 따라 음과 훈이 달라지는 한자를 수록하였다.
4. 1. 서문
최세진이 1451년 훈민정음으로 중국어의 발음을 표기한 책인 《사성통해》의 서문이다.4. 2. 운목
《사성통해》의 '운모정국'에 제시된 운목이다.4. 3. 자모지도
강신항은 송나라 때의 운서인 《광운》이 조선에 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당시에 통용되던 36자모에 《광운》이라는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운회 35자모지도'는 《운회》의 36성모 체계에서 하나가 부족하다. '홍무운 31자모지도'와 함께 내용을 비교, 분석한다.4. 4. 범례
《사성통해》 본문, 〈사성통고 범례〉, 〈번역노걸대·박통사 범례〉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4. 5. 동정자음
動靜字音중국어은 성조에 따라 음과 훈이 달라지는 한자를 수록한 목록이다.5. 음운 체계
중국의 전통적인 음운학에서는 음절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의 결합으로 파악한다. 성모는 초성, 운모는 중성과 종성에 해당한다.
《사성통해》의 운류는 《홍무정운역훈》과 거의 같지만, 진운(眞韻)에서 문운(文韻)이 분리되어 23개 운류, 80개 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정음을 기준으로 한 22개 운류와 그 중성은 다음과 같다.
운류 | 중성 | 운류 | 중성 | ||
---|---|---|---|---|---|
1 | 동동송옥(東董送屋) | ㅜㅠ | 13 | 소효소(簫篠嘯) | ㅕ |
2 | 지지치(支紙寘) | ㅡㅣ | 14 | 효교효(爻巧效) | ㅏㅑ |
3 | 제제제(齊薺霽) | ㅖ | 15 | 가가개(歌哿箇) | ㅓㅝ |
4 | 어어어(魚語御) | ㅠ | 16 | 마마마(麻馬禡) | ㅏㅑㅘ |
5 | 모모모(模姆暮) | ㅜ | 17 | 차자자(遮者蔗) | ㅕㆊ |
6 | 개해태(皆解泰) | ㅐㅒㅙ | 18 | 양양양약(陽養漾藥) | ㅏㅑㅘ |
7 | 회회대(灰賄隊) | ㅟ | 19 | 경경경맥(庚梗敬陌) | ㅣㅢㅟㆌ |
8 | 진진진질(眞軫震質) | ㅣ | 20 | 우유유(尤有宥) | ㅡㅣ |
9 | 문문문물(文吻問物) | ㅡㅜㅠ | 21 | 침침심집(侵寢沁緝) | ㅡㅣ |
10 | 한한한갈(寒旱翰曷) | ㅓㅝ | 22 | 담감감합(覃感勘合) | ㅏㅑ |
11 | 산산간할(刪産諫轄) | ㅏㅑㅘ | 23 | 감염염엽(監琰豔葉) | ㅕ |
12 | 선선선견(先銑霰肩) | ㅕㆊ |
《사성통해》는 《홍무정운역훈》과 달리 종성(운미)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입성 운미가 그러하다. 《홍무정운역훈》은 입성 운미로 정음에 ㄱ, ㄷ, ㅂ를 표기하였고, 속음에는 ㆆ(약운(藥韻)은 ㅸ)을 표기하였다. 반면 《사성통해》는 정음에 입성 운미를 표기하지 않았고(단 약운은 ㅸ), 속음은 《홍무정운역훈》과 동일하다. 이는 16세기 당시 북방음에 입성 운미가 이미 없어져 있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사이에 사라진 북방음의 입성이 《홍무정운역훈》 편찬 당시(15세기 초)만 해도 성문 파열음(성문 파열음)으로 약화되어 남아 있었으나, 한 세기가 더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지는 통시적인 음운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사성통해》는 《홍무정운》의 틀에 맞게 입성을 포함한 사성을 모두 설정하였기에 후대에 비판받았다.
5. 1. 성모 체계
《사성통해》의 성모 체계는 《홍무정운역훈》과 같은데, 삼십육자모와 달리 다섯 개의 성모가 부족하다. 16세기 당시 중국어 음운은 20-21성모 체계였던 것으로 재구(再構)되는데, 최세진이 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에도 《사성통해》의 정음, 속음, 금속음은 모두 31성모 체계를 따랐다. 이는 《홍무정운》의 권위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5. 2. 운모 체계
《사성통해》의 운류는 《홍무정운역훈》과 거의 같지만, 진운(眞韻)에서 문운(文韻)이 분리되어 23개 운류, 80개 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정음을 기준으로 한 22개 운류와 그 중성은 다음과 같다.운류 | 중성 | 운류 | 중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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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동동송옥(東董送屋) | ㅜㅠ | 13 | 소효소(簫篠嘯) | ㅕ |
2 | 지지치(支紙寘) | ㅡㅣ | 14 | 효교효(爻巧效) | ㅏㅑ |
3 | 제제제(齊薺霽) | ㅖ | 15 | 가가개(歌哿箇) | ㅓㅝ |
4 | 어어어(魚語御) | ㅠ | 16 | 마마마(麻馬禡) | ㅏㅑㅘ |
5 | 모모모(模姆暮) | ㅜ | 17 | 차자자(遮者蔗) | ㅕㆊ |
6 | 개해태(皆解泰) | ㅐㅒㅙ | 18 | 양양양약(陽養漾藥) | ㅏㅑㅘ |
7 | 회회대(灰賄隊) | ㅟ | 19 | 경경경맥(庚梗敬陌) | ㅣㅢㅟㆌ |
8 | 진진진질(眞軫震質) | ㅣ | 20 | 우유유(尤有宥) | ㅡㅣ |
9 | 문문문물(文吻問物) | ㅡㅜㅠ | 21 | 침침심집(侵寢沁緝) | ㅡㅣ |
10 | 한한한갈(寒旱翰曷) | ㅓㅝ | 22 | 담감감합(覃感勘合) | ㅏㅑ |
11 | 산산간할(刪産諫轄) | ㅏㅑㅘ | 23 | 감염염엽(監琰豔葉) | ㅕ |
12 | 선선선견(先銑霰肩) | ㅕㆊ |
중성과 달리 종성(운미)은 《사성통해》와 《홍무정운역훈》이 차이를 보이며, 특히 입성 운미가 그러하다. 《홍무정운역훈》은 입성 운미로 정음에는 ㄱ, ㄷ, ㅂ를 표기하였고, 속음에는 ㆆ(약운(藥韻)은 ㅸ)을 표기하였다. 반면 《사성통해》는 정음에 입성 운미를 표기하지 않았고(단 약운은 ㅸ), 속음은 《홍무정운역훈》과 동일하다. 이는 16세기 당시 북방음에 입성 운미가 이미 없어져 있던 것을 반영한 것이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사이에 사라진 북방음의 입성이 《홍무정운역훈》 편찬 당시(15세기 초)만 해도 성문 파열음(성문 파열음)으로 약화되어 남아 있었으나, 한 세기가 더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지는 통시적인 음운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사성통해》는 《홍무정운》의 틀에 맞게 입성을 포함한 사성을 모두 설정하였기에 후대에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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