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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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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봉건적 신분 질서에 반대하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으며, '독립자존'을 강조하며 개인과 국가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게이오기주쿠를 설립하고,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서양의 사상과 제도를 일본에 소개했다. 또한, 1882년에는 신문 시사신보를 창간하여 여론을 주도했으며, 여성의 권리 신장에도 힘썼다. 한편, 그는 탈아론을 주장하며 조선의 개혁을 지원했지만, 갑신정변 실패 후에는 조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01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상은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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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91년 후쿠자와 유키치
1891년경의 초상
이름후쿠자와 유키치
한자 표기福澤 諭吉
구자체 표기福澤 諭吉
다른 이름시이 (子圍)
산주잇코쿠진 (三十一谷人)
한 (範)
출생일1835년 1월 10일
출생 장소에도 막부 셋쓰 국오사카 도지마신치 5초메 나카쓰 번 구라야시키 (현재의 오사카부오사카시후쿠시마구후쿠시마 1초메)
사망일1901년 2월 3일
사망 장소일본 제국 도쿄부도쿄시시바구미타 2초메 (현재의 도쿄도미나토구 미타 2초메)
학문적 배경
시대19세기
지역일본 제국
학파계몽사상
주요 관심 분야난학
정치사상
철학
교육
출신 학교데키주쿠
경력
직장나카쓰 번
반코도 (晩香堂)
고세이지 (光永寺)
에도 막부 외국방 번역국
외국봉행
게이오기주쿠
메이로쿠샤
고아회
도쿄학사회원
지지신보
사상 및 업적
주요 사상국가 독립
독립 자존
권리
자유
남녀 동등론
국민
사립
관민 조화론
상업국가론
주요 저서서양사정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
제실론
복옹자전
척아만의 설
기타
영향 받은 인물
영향을 준 인물
기관
수상

2. 생애

그의 생가와 나카쓰번 창고터 기념비 (오사카부 오사카시)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1월 10일(음력 1834년 12월 12일) 오사카부 오사카 현에서 부젠(豊前)국 나카쓰번(中津藩) 소속의 하급 무사 후쿠자와 하쿠스케(福澤百助)와 오쥰(於順)의 2남 3녀 중 2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185] 그의 이름이 유키치(諭吉, 유길)로 정해진 것은 그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가 대명률의 《상유조례 (上諭條例)》를 구했기 때문에 그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상유조례에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185]

그의 집안은 그 곳에서 대대로 하급 무사이자 유학자였던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하쿠스케는 당시 43세, 어머니 오쥰은 31세였다. 아버지 하쿠스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였으나 명문가의 자손이 아니었고 배경도 없는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었기에 시골 나카쓰번의 회계담당 관리자 겸 번의 창고지기로 살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836년 후쿠자와의 나이 2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183] 훗날 후쿠자와는 늘 회상하기를 "신분사회와 문벌 제도는 부모의 원수(かたき)였다"고 회상하곤 했다. 그의 형 후쿠자와 산노스케(福澤三之助) 역시 저명한 유학자로 죽기 직전까지 늘 동생과 자신의 가족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하였다. 지적,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지만 집안 배경이 변변치 못해 결국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와 형의 불행을 보고, 그는 봉건제도는 물론이고 문벌사회, 족벌체제에 대해 평생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이타 현(大分県) 나카쓰번(中津藩)(현재의 오이타(Ōita), 규슈)의 오쿠다이라 씨(奥平氏)에 속한 빈곤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일본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오사카에 살았다.[1]

5세 무렵부터 藩士(はんし)·하토리 고로베에에게 한학과 일도류의 손길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독서를 싫어했지만, 14, 5세가 되어서야 근처에서 자신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세간 체면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실력을 쌓아, 이후 여러 가지 한서를 탐독하고, 한적을 닦았다.

18세가 되면, 형·미노스케도 사사한 노모토 신조, 시라이시 쇼잔의 숙·만향당에 다니기 시작한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은 물론, 『사기』 『좌전』 『노자』 『장자』에 이르고, 특히 『좌전』은 특기로 15권을 11번이나 되풀이 읽어 재미있는 부분은 암기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선배를 능가하여 "한학자의 전좌 정도(자전)"는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또 학문과 함께 입신신류의 거합술을 습득했다.

안세이 원년(1854년), 유키치는 형의 권유로 19세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란학을 배운다(가에이 7년 2월). 나가사키시의 고에이지에 기숙하고, 현재는 비석이 남아 있다. 흑선내항에 의해 포술의 수요가 높아지고, "네덜란드식 포술을 배우려면 네덜란드어 원전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을 읽어볼 생각은 없느냐"고 형에게서 권유받은 것이 계기였다. 나가사키 부교 배하의 역인으로 포술가 야마모토 부지로의 집에 거주하며, 네덜란드 통사(통역 등을 직업으로 하는 나가사키의 역인)의 집으로 다니면서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야마모토 집에는 만사의 옥 당시 다카시마 아키호로부터 몰수한 포술 관련 서적이 보관 소장되어 있었다. 야마모토는 그러한 포술 관련 서적을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베껴 쓰게 하여 사례금을 받고 있었고, 유키치도 열람을 허락받아 철포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야마모토 집의 손님들 중에, 사쓰마번의 마츠자키 테이호가 있으며, 알파벳을 배운다.

; 복제 가계도(福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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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젊은 시절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1월 10일(음력 1834년 12월 12일) 오사카부오사카 현에서 부젠(豊前)국 나카쓰번(中津藩) 소속의 하급 무사 후쿠자와 하쿠스케(福澤百助)와 오쥰(於順)의 2남 3녀 중 2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185] 그의 이름이 유키치(諭吉, 유길)로 정해진 것은 그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가 대명률의 《상유조례 (上諭條例)》를 구했기 때문에 그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상유조례에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185]

그의 집안은 그 곳에서 대대로 하급 무사이자 유학자였던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하쿠스케는 당시 43세, 어머니 오쥰은 31세였다. 아버지 하쿠스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였으나 명문가의 자손이 아니었고 배경도 없는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었기에 시골 나카쓰번의 회계담당 관리자 겸 번의 창고지기로 살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836년 후쿠자와의 나이 2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183] 훗날 후쿠자와는 늘 회상하기를 "신분사회와 문벌 제도는 부모의 원수(かたき)였다"고 회상하곤 했다. 그의 형 후쿠자와 산노스케(福澤三之助) 역시 저명한 유학자로 죽기 직전까지 늘 동생과 자신의 가족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하였다. 지적,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지만 집안 배경이 변변치 못해 결국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와 형의 불행을 보고, 그는 봉건제도는 물론이고 문벌사회, 족벌체제에 대해 평생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이타 현(大分県) 나카쓰번(中津藩)(현재의 오이타(Ōita), 규슈)의 오쿠다이라 씨(奥平氏)에 속한 빈곤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일본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오사카에 살았다.[1]

5세 무렵부터 藩士(はんし)·하토리 고로베에에게 한학과 일도류의 손길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독서를 싫어했지만, 14, 5세가 되어서야 근처에서 자신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세간 체면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실력을 쌓아, 이후 여러 가지 한서를 탐독하고, 한적을 닦았다.

18세가 되면, 형·미노스케도 사사한 노모토 신조, 시라이시 쇼잔의 숙·만향당에 다니기 시작한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은 물론, 『사기』 『좌전』 『노자』 『장자』에 이르고, 특히 『좌전』은 특기로 15권을 11번이나 되풀이 읽어 재미있는 부분은 암기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선배를 능가하여 "한학자의 전좌 정도(자전)"는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또 학문과 함께 입신신류의 거합술을 습득했다.

안세이 원년(1854년), 유키치는 형의 권유로 19세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란학을 배운다(가에이 7년 2월). 나가사키시의 고에이지에 기숙하고, 현재는 비석이 남아 있다. 흑선내항에 의해 포술의 수요가 높아지고, "네덜란드식 포술을 배우려면 네덜란드어 원전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을 읽어볼 생각은 없느냐"고 형에게서 권유받은 것이 계기였다. 나가사키 부교 배하의 역인으로 포술가 야마모토 부지로의 집에 거주하며, 네덜란드 통사(통역 등을 직업으로 하는 나가사키의 역인)의 집으로 다니면서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야마모토 집에는 만사의 옥 당시 다카시마 아키호로부터 몰수한 포술 관련 서적이 보관 소장되어 있었다. 야마모토는 그러한 포술 관련 서적을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베껴 쓰게 하여 사례금을 받고 있었고, 유키치도 열람을 허락받아 철포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야마모토 집의 손님들 중에, 사쓰마번의 마츠자키 테이호가 있으며, 알파벳을 배운다.

; 복제 가계도(福澤家)





나가사키의 미쓰나가사


어머니와 그의 형제자매와 생활하다가 나카쓰번(中津, 현 오이타 현 나카쓰시)로 보내져 그곳에 살던 외삼촌인 나카무라 쓰히로(中村術平)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본래의 성을 따서 후쿠자와라고 하였지만 때로는 외삼촌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외삼촌의 성을 따서 나카무라 유키치로도 부른다. 그러나 후에 본래의 성을 복구하고 후쿠자와 라는 성을 사용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음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장난끼 많은 악동으로 성장하였다. 10대 초의 그는 다다미 장롱을 만드는 외가의 일을 돕기도 했다.

8살 때 그는 자신의 친형 후쿠자와 산노스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4,15세 무렵에는 시라이시 쇼잔(白石照山)이 세운 서실에 다니며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떼고, 이어 사기, 춘추좌씨전, 노자, 장자 등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그는 좌씨전은 책의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열네살 이후부터 인문고전을 접한 이후로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광이 되어 두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후,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187]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이타 현(大分県) 나카쓰번(中津藩)(현재의 오이타(Ōita), 규슈)의 오쿠다이라 씨(奥平氏)에 속한 빈곤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일본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오사카에 살았다.[1] 그의 아버지 역시 유학 학자였으나 요절하여 그의 가족은 빈곤하게 살았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학을 시작했고, 열네 살이 될 무렵에는 『논어』, 『도덕경』, 『좌전』, 『장자』와 같은 주요 저술들을 공부했다.[2] 후쿠자와는 평생 스승이었던 유학과 한학 학자인 시라이시 쇼잔(白石昌三)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안세이 원년(1854년), 유키치는 형의 권유로 19세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란학을 배운다(가에이 7년 2월). 나가사키시의 고에이지에 기숙하고, 현재는 비석이 남아 있다. 흑선내항에 의해 포술의 수요가 높아지고, "네덜란드식 포술을 배우려면 네덜란드어 원전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을 읽어볼 생각은 없느냐"고 형에게서 권유받은 것이 계기였다.

오사카도지마 신지 5정목에 있던 부젠국 나카츠번(현재의 오이타현 나카츠시)의 창고저택에서 하급 藩士(はんし)·후쿠자와 히야스케와 아내·오준 사이에서 둘째 아들(8~9세 위의 형·미노스케와 3명의 누이(6세 위, 4세 위, 2세 위)를 둔 막내)로 태어났다. 유키치라는 이름은 유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상유조례』(청나라 건륭제 치세 하의 법령을 기록한 책)를 손에 넣은 밤에 그가 태어난 데서 유래한다.

참고로, 어머니와 형제와 함께 살았지만, 어릴 적부터 삼촌·나카무라 쥬헤이의 양자가 되어 나카무라 성을 사용했다. 나중에 후쿠자와가로 복귀한다.

덴포 6년(1836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카무라 류엔의 배웅을 받으며 오사카에서 귀환하여, 나카츠(현: 오이타현 나카츠시)에서 지낸다. 부모 형제나 당시 일반적인 무가의 자제와 달리, 효제충신이나 신불을 공경한다는 가치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찰을 밟아도 타타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해 보거나, 신사에서 장난을 치는 등, 악동에 가까운 활기찬 아이였던 것 같지만, 도검 세공이나 다다미의 표가에, 쇼지의 바꿔 붙이기를 해내는 등 내직에 능한 아이였다.

5세 무렵부터 藩士(はんし)·하토리 고로베에에게 한학과 일도류의 손길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독서를 싫어했지만, 14, 5세가 되어서야 근처에서 자신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세간 체면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실력을 쌓아, 이후 여러 가지 한서를 탐독하고, 한적을 닦았다. 18세가 되면, 형·미노스케도 사사한 노모토 신조, 시라이시 쇼잔의 숙·만향당에 다니기 시작한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은 물론, 『사기』 『좌전』 『노자』 『장자』에 이르고, 특히 『좌전』은 특기로 15권을 11번이나 되풀이 읽어 재미있는 부분은 암기했다고 한다.

오가타 고안이 세운 적석제숙(適夕齋塾)에 입학하여 난학을 배웠다. 원래 후쿠자와 유키치가 형과 함께 네덜란드어를 배우기로 한 것도 페리 내항 이후 일본열도를 달군 포술(砲術)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베끼거나 번역한 책도 주로 의학서나 축성서 따위였다.[186] 그러나 적숙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적숙을 자퇴하고 다시 나카쓰번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수개월 간 요양 끝에 1856년 다시 모리 번의 적숙으로 가서 학업을 계속한다.

1856년 형이 사망하면서 결국 그가 집안의 상속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오사카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학업을 계속한다. 당시의 일본은 아버지 혹은 형이 사망하면 전통에 따라 가독상속을 해야 했는데, 이를 거부하고 오사카로 다시 나오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공부를 하면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있어봤자 대단한 출세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86] 아버지가 남긴

2. 1. 1. 출생과 가계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1월 10일(음력 1834년 12월 12일) 오사카부오사카 현에서 부젠(豊前)국 나카쓰번(中津藩) 소속의 하급 무사 후쿠자와 하쿠스케(福澤百助)와 오쥰(於順)의 2남 3녀 중 2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185] 그의 이름이 유키치(諭吉, 유길)로 정해진 것은 그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가 대명률의 《상유조례 (上諭條例)》를 구했기 때문에 그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상유조례에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185]

그의 집안은 그 곳에서 대대로 하급 무사이자 유학자였던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하쿠스케는 당시 43세, 어머니 오쥰은 31세였다. 아버지 하쿠스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유학자였으나 명문가의 자손이 아니었고 배경도 없는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었기에 시골 나카쓰번의 회계담당 관리자 겸 번의 창고지기로 살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836년 후쿠자와의 나이 2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183] 훗날 후쿠자와는 늘 회상하기를 "신분사회와 문벌 제도는 부모의 원수(かたき)였다"고 회상하곤 했다. 그의 형 후쿠자와 산노스케(福澤三之助) 역시 저명한 유학자로 죽기 직전까지 늘 동생과 자신의 가족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하였다. 지적,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지만 집안 배경이 변변치 못해 결국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와 형의 불행을 보고, 그는 봉건제도는 물론이고 문벌사회, 족벌체제에 대해 평생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이타 현(大分県) 나카쓰번(中津藩)(현재의 오이타(Ōita), 규슈)의 오쿠다이라 씨(奥平氏)에 속한 빈곤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일본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오사카에 살았다.[1]

5세 무렵부터 藩士(はんし)·하토리 고로베에에게 한학과 일도류의 손길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독서를 싫어했지만, 14, 5세가 되어서야 근처에서 자신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세간 체면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실력을 쌓아, 이후 여러 가지 한서를 탐독하고, 한적을 닦았다.

18세가 되면, 형·미노스케도 사사한 노모토 신조, 시라이시 쇼잔의 숙·만향당에 다니기 시작한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은 물론, 『사기』 『좌전』 『노자』 『장자』에 이르고, 특히 『좌전』은 특기로 15권을 11번이나 되풀이 읽어 재미있는 부분은 암기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선배를 능가하여 "한학자의 전좌 정도(자전)"는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또 학문과 함께 입신신류의 거합술을 습득했다.

안세이 원년(1854년), 유키치는 형의 권유로 19세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란학을 배운다(가에이 7년 2월). 나가사키시의 고에이지에 기숙하고, 현재는 비석이 남아 있다. 흑선내항에 의해 포술의 수요가 높아지고, "네덜란드식 포술을 배우려면 네덜란드어 원전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을 읽어볼 생각은 없느냐"고 형에게서 권유받은 것이 계기였다. 나가사키 부교 배하의 역인으로 포술가 야마모토 부지로의 집에 거주하며, 네덜란드 통사(통역 등을 직업으로 하는 나가사키의 역인)의 집으로 다니면서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야마모토 집에는 만사의 옥 당시 다카시마 아키호로부터 몰수한 포술 관련 서적이 보관 소장되어 있었다. 야마모토는 그러한 포술 관련 서적을 사람에게 빌려주거나 베껴 쓰게 하여 사례금을 받고 있었고, 유키치도 열람을 허락받아 철포의 설계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야마모토 집의 손님들 중에, 사쓰마번의 마츠자키 테이호가 있으며, 알파벳을 배운다.

; 복제 가계도(福澤家)




2. 1. 2. 불우한 유년기



어머니와 그의 형제자매와 생활하다가 나카쓰번(中津, 현 오이타 현 나카쓰시)로 보내져 그곳에 살던 외삼촌인 나카무라 쓰히로(中村術平)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본래의 성을 따서 후쿠자와라고 하였지만 때로는 외삼촌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외삼촌의 성을 따서 나카무라 유키치로도 부른다. 그러나 후에 본래의 성을 복구하고 후쿠자와 라는 성을 사용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음에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장난끼 많은 악동으로 성장하였다. 10대 초의 그는 다다미 장롱을 만드는 외가의 일을 돕기도 했다.

8살 때 그는 자신의 친형 후쿠자와 산노스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4,15세 무렵에는 시라이시 쇼잔(白石照山)이 세운 서실에 다니며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떼고, 이어 사기, 춘추좌씨전, 노자, 장자 등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그는 좌씨전은 책의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열네살 이후부터 인문고전을 접한 이후로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광이 되어 두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후,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187]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이타 현(大分県) 나카쓰 번(中津藩)(현재의 오이타(Ōita), 규슈)의 오쿠다이라 씨(奥平氏)에 속한 빈곤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일본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오사카에 살았다.[1] 그의 아버지 역시 유학 학자였으나 요절하여 그의 가족은 빈곤하게 살았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학을 시작했고, 열네 살이 될 무렵에는 『논어』, 『도덕경』, 『좌전』, 『장자』와 같은 주요 저술들을 공부했다.[2] 후쿠자와는 평생 스승이었던 유학과 한학 학자인 시라이시 쇼잔(白石昌三)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안세이 원년(1854년), 유키치는 형의 권유로 19세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란학을 배운다(가에이 7년 2월). 나가사키시의 고에이지에 기숙하고, 현재는 비석이 남아 있다. 흑선내항에 의해 포술의 수요가 높아지고, "네덜란드식 포술을 배우려면 네덜란드어 원전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을 읽어볼 생각은 없느냐"고 형에게서 권유받은 것이 계기였다.

오사카도지마 신지 5정목에 있던 부젠국 나카츠번(현재의 오이타현 나카츠시)의 창고저택에서 하급 藩士(はんし)·후쿠자와 히야스케와 아내·오준 사이에서 둘째 아들(8~9세 위의 형·미노스케와 3명의 누이(6세 위, 4세 위, 2세 위)를 둔 막내)로 태어났다. 유키치라는 이름은 유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상유조례』(청나라 건륭제 치세 하의 법령을 기록한 책)를 손에 넣은 밤에 그가 태어난 데서 유래한다.

참고로, 어머니와 형제와 함께 살았지만, 어릴 적부터 삼촌·나카무라 쥬헤이의 양자가 되어 나카무라 성을 사용했다. 나중에 후쿠자와가로 복귀한다.

덴포 6년(1836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카무라 류엔의 배웅을 받으며 오사카에서 귀환하여, 나카츠(현: 오이타현 나카츠시)에서 지낸다. 부모 형제나 당시 일반적인 무가의 자제와 달리, 효제충신이나 신불을 공경한다는 가치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찰을 밟아도 타타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해 보거나, 신사에서 장난을 치는 등, 악동에 가까운 활기찬 아이였던 것 같지만, 도검 세공이나 다다미의 표가에, 쇼지의 바꿔 붙이기를 해내는 등 내직에 능한 아이였다.

5세 무렵부터 藩士(はんし)·하토리 고로베에에게 한학과 일도류의 손길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독서를 싫어했지만, 14, 5세가 되어서야 근처에서 자신만 공부를 하지 않는 것도 세간 체면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문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실력을 쌓아, 이후 여러 가지 한서를 탐독하고, 한적을 닦았다. 18세가 되면, 형·미노스케도 사사한 노모토 신조, 시라이시 쇼잔의 숙·만향당에 다니기 시작한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은 물론, 『사기』 『좌전』 『노자』 『장자』에 이르고, 특히 『좌전』은 특기로 15권을 11번이나 되풀이 읽어 재미있는 부분은 암기했다고 한다.

2. 1. 3. 적숙 시절

오가타 고안이 세운 적석제숙(適夕齋塾)에 입학하여 난학을 배웠다. 원래 후쿠자와 유키치가 형과 함께 네덜란드어를 배우기로 한 것도 페리 내항 이후 일본열도를 달군 포술(砲術)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베끼거나 번역한 책도 주로 의학서나 축성서 따위였다.[186] 그러나 적숙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적숙을 자퇴하고 다시 나카쓰번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수개월 간 요양 끝에 1856년 다시 모리 번의 적숙으로 가서 학업을 계속한다.

1856년 형이 사망하면서 결국 그가 집안의 상속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오사카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학업을 계속한다. 당시의 일본은 아버지 혹은 형이 사망하면 전통에 따라 가독상속을 해야 했는데, 이를 거부하고 오사카로 다시 나오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공부를 하면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에는 있어봤자 대단한 출세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186] 아버지가 남긴 장서와 가재 도구를 팔아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는 학업을 계속하려 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다시 오사카로 가서 적숙에서 공부한다. 학비를 조달할 여건이 되지 않은 그는 직접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는 한편 동료 학생의 교과서를 필사하여 그 필사본으로 수업을 받았다. 훗날 자서전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난학을 배우는 데라 대체로 동료들의 직업이 의사였다[186]' 한다.

1857년 적숙의 학원장이 자신의 후임으로 나가요 센사이를 지목했다. 나가요 센사이가 교장으로 부임한 뒤 그의 설명에 따라 화학 실험 수업과 간단한 과학 실험 등도 배웠다. 그러나 화학과 의술에 거부감을 느낀 사혈이나 수술 해부는 피하고 대신 네덜란드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이때 그는 간단한 전기기기 조립과 암모니아 제조 등을 배웠다. 1858년 적숙을 졸업하고 일부 난학원의 강사로 전전하였다. 학창시절 그는 베개를 베고 잔 적이 없다 한다. 공부하느라 베개를 베고 잔 기억이 없다[186]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쓰번(中津藩)(현재의 오이타(Ōita), 규슈)의 오쿠다이라 씨(奥平氏)에 속한 빈곤한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일본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던 오사카에 살았다.[1]

안세이 2년(1855년), 유키치는 그를 소개한 오쿠히라 이키와 그의 친가인 오쿠히라가(나카쓰번 가로 집안)와 불화하게 되어, 나가츠로 돌아가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하지만 유키치 자신은 전년에 나가츠를 떠날 때부터 나가츠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사카를 거쳐 에도로 갈 계획을 강행한다. 오사카에 도착하자, 과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카쓰번 창고 관리소에서 일하던 형을 찾아간다. 그러자 형에게서 "에도에는 가지 마라"며 만류당하고, 오사카에서 란학을 배우도록 설득당한다. 그래서 유키치는 오사카나카쓰번 창고 관리소에 얹혀살면서, 당시 "카쇼초의 선생"이라 불리며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던 아시모리번 하사이자 란학자인 오가타 고안의 "적숙"에서 배우게 된다(음력 3월 9일(4월 25일)).

그 후, 유키치가 장티푸스를 앓자, 오가타 고안은 "나는 네 병을 확실히 진찰해 주겠다. 진찰은 해주겠지만, 내가 직접 처방할 수는 없다. 어느 약을 써야 할지 망설이게 되어, 나중에 그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다시 약을 바꾸는 등, 결국 어떤 치료를 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병은 진찰해 주겠지만, 치료는 다른 의사에게 부탁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라"(자서전)라고 말했고, 고안의 친구인 나이토 스케마가 치료를 해주어 체력이 회복된다. 그리고 잠시 나가츠로 귀향한다.

안세이 3년(1856년), 유키치는 다시 오사카로 나가서 공부한다. 같은 해, 형이 죽어 후쿠자와가의 가독을 잇게 된다. 하지만 오사카 유학을 포기할 수 없어, 아버지의 장서와 가재도구를 팔아 빚을 갚은 후, 어머니를 제외한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사카적숙에서 공부했다. 학비를 지불할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에, 유키치는 오쿠히라 이키에게서 빌려 몰래 필사한 축성학 교과서(C.M.H.Pel,''Handleiding tot de Kennis der Versterkingskunst'',Hertogenbosch、1852년)를 번역한다는 명목으로 적숙의 식객(숙식을 제공받는 학생)으로서 공부하게 된다.

안세이 4년(1857년), 유키치는 최연소 22세의 나이로 적숙의 숙두가 되고, 후임으로 나가요 센사이를 지명한다. 적숙에서는 네덜란드어 원서를 읽거나 필사했고, 때로는 그 기록에 따라 화학 실험, 간단한 이과 실험 등을 했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피를 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사혈이나 수술 해부 같은 것에는 손대지 않았다. 적숙에는 진료소가 부설되어 있었고 의학 서당이었지만, 유키치는 의학을 배웠다기보다는 네덜란드어를 배웠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또한 공예 기술에도 열심이었는데, 화학(케미스트)의 도구를 사용하여 색깔이 검은 황산을 제조했는데, 쓰루타 센안이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다칠 뻔한 일도 있었다.[20] 또한, 후쿠오카번주 쿠로다 나가히로가 금 80냥을 들여 나가사키에서 구입한 『반데르벨츠』라는 제목의 물리 책을 필사하여, 원소를 배열하고 거기에 긍정 부정(플러스 마이너스)의 순서를 정하는 것과 패러데이의 전기설(패러데이 법칙)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이러한 전기의 새로운 이론 등을 알고 발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시마나 미역에서 요오드 단체를 추출하거나, 요도가와에 띄운 작은 배 위에서 암모니아를 제조하기도 했다.

2. 1. 4. 난학숙 개설과 영어 공부

1858년 도쿄에도에 난학숙(蘭學塾, 네덜란드어 어학교)인 일소학숙(一小家塾,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전신)을 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가쓰라가와 호슈, 간다 타카히로, 미쓰쿠리 슈헤이, 우쓰노미야 사부로 등과 교류하고 그들과 학문과 사상을 주고받았다.[21]

1862년 유럽 시찰시 시바타 사타로, 후쿠자와 유키치, 오타 겐사부로, 후쿠다 자타로


미국에 방문한 카린 마루 일행(1860년 12월), 맨 오른쪽에 앉은 이가 후쿠자와


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인 등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된 요코하마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요코하마의 미국인 거주지는 거의 독점적으로 영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간단한 영어를 했지만 상당히 서툴렀고, 자신이 배운 네덜란드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으며 미국인 거주지 간판의 문자조차 읽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충격을 받는다.[186] 그 이후로 영어의 필요성을 통감한 후쿠자와는 영란사전(영어-네덜란드어 사전)을 구하여 거의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훗날 “몇 년 동안 수영을 배워 간신히 헤엄칠 수 있게 되자 수영을 포기하고 나무타기를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노라고 했다. 도쿄에 가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미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학문의 방향을 영학(英學)으로 바꾸었다.[182] 그러나 영어의 해석이 쉽지 않자 그는 막부의 통역관 모리야마 에이노스케를 찾아가 2년간 영어를 사사(師事)하고 전문용어를 번역하고, 유창하게 회화를 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간린마루''의 선원들, 1860년 미국 일본 사절단 일원. 후쿠자와 유키치는 오른쪽에 앉아 있다.


186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한 후쿠자와 유키치 (사진사의 열두 살 딸인 테오도라 앨리스 슈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859년 겨울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 교환을 위한 막부측 사절단이 미국 군함 포하탄 호를 타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1860년 그는 네덜란드 선박 간린마루 함장 기무라 셋쓰의 수행원으로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만난 간린마루의 호위무관 가쓰 가이슈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후 그는 가쓰 가이슈와 평생 원수처럼 지냈다 한다. 한편 셋쓰의 천거로 후일 그는 일본 외무성에 잠시 출사하기도 했다.

2. 2. 개혁 운동과 정치 활동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0년 미국 일본 대사관(워싱턴 조선소)의 일원이었다.


1862년, 유럽 최초의 일본 대사관의 일원으로 위트레흐트에서 포즈를 취한 후쿠자와 유키치


1860년 귀국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막부의 공식 통역관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첫 번째 출판물인 영어-일본어 사전 "가에이 통고(開成通語)"를 출판했는데, 이는 중국어-영어 사전을 번역한 것이었고 그의 후속 저서들의 시작이었다. 1862년 그는 유럽 최초의 일본 대사관의 두 명의 영어 통역관 중 한 명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유럽 체류 기간 동안 대사관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했다. 러시아에서는 양국 간 오랜 분쟁의 원인이었던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 남단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6]

이 여행에서 수집한 정보는 그가 1867년, 1868년, 1870년에 10권으로 출판한 유명한 저서 ''서양사정(西洋事情)''(Seiyō Jijō)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서구 문화와 제도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곧 서구 문명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고, 그는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동포들을 교육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사명이라고 결론지었다.

1868년 그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의 이름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로 변경하고 그때부터 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또한 교육 과정에 연설을 추가했다.[2] 게이오기주쿠는 처음에는 서양 연구의 사립학교였지만 확장되어 1890년에 첫 번째 대학 학부를 설립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고등 교육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일본 여성의 권리 신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평등,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모두의 교육, 그리고 딸과 아들에 대한 동등한 사랑을 옹호하며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그는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기혼 남성이 정부를 두었을 때 발생하는 가정 불화와 같은 해로운 관습에 주목했다. 그러나 후쿠자와조차도 남성과 여성의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 하지는 않았고, 단지 남편과 아내에게만 그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또한 1899년 저서 ''여성을 위한 새로운 대학습''에서 좋은 결혼이 항상 젊은 여성에게 최고의 결과라고 말했고, 후쿠자와의 몇몇 개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친구들이 딸들을 고등 교육에 보내는 것을 만류하여 결혼 후보자로서 덜 매력적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2] 교육 개혁과 같은 후쿠자와의 다른 개혁 제안들은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다지 열렬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1873년 언론사인 메이로쿠샤(明六社)를 창설한 후 사주이자 동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개화 청년 양성과 토론 제도 보급, 실용적인 학문 등을 장려하였으며, 부국강병론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 만인 평등론을 주장하여 일본의 국력 향상,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는 청나라조선의 개혁 실패를 보고 "서양문명의 유행은 막을 방도가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이념이 '탈아(脫亞)'다. 근대화를 거부하는 중국과 조선은 서양이 압박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일본은 이웃과 헤어져 서양열강처럼 그들을 대하자.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188]"며 서구 문물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만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이 기고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189]

1880년 12월, 참의(參議)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저택에서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정부 고관 3명과 면담하여 공보 신문 발행을 의뢰받았다. 유키치(諭吉)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유보하고 수일간 숙고했지만, “정부의 진의를 대중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 신문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려고 1881년 1월 이노우에를 방문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정부는 국회 개설을 결의했다”고 말하자 유키치는 그 단호한 결단에 환희하여 신문 발행을 맡게 되었다.[35]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가 당시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겨졌던 영국식 정당 내각제 안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전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제출한 것 때문에 이토는 오쿠마의 급진적인 경향을 경계하게 되었다.[36] 또한, 바로 이 무렵에는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문제”에 대한 반대 집회가 각지에서 열리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쿠마도 그 반대론자였고,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출신자들 중에도 이 문제를 비판하는 사람이 연설회나 신문에서 많았다. 그 때문에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오쿠마·후쿠자와·게이오기주쿠의 음모라는 소문이 사실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881년에는 오쿠마 일파를 정부 직책에서 사퇴시키는 메이지 14년의 정변(明治十四年の政変)이 일어나게 되었다. 불과 3개월 전에 오쿠마, 이토, 이노우에와 면담했던 유키치는 이 사건에 당황하여 이토와 이노우에에게 위약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다.[36] 2,500자에 달하는 인생에서 가장 긴 편지였다. 이 편지에 대해 이노우에는 답장을 보냈지만 이토는 답장하지 않았다.[37]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답신을 요청했지만 이토로부터의 답신은 결국 없었고, 이노우에도 마지막 서한에는 답장하지 않았다. 이로써 유키치는 두 정치가와의 교류를 오랫동안 끊게 되었다.[38] 유키치의 이해로는 이토와 이노우에는 처음에는 오쿠마와 함께 국회 개설을 결의했지만, 정부 내부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보고 도중에 변절하여 오쿠마 단독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38]

유키치는 이미 공보 발행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오쿠마가 실각하고 이토와 이노우에는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에, 이전 3명과의 회담에서 나온 공보 이야기도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공보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을 자신의 신문 발행에 전용하기로 하고, 1882년 3월부터 『시지신포(時事新報)』를 발간하게 되었다.[39] 『시지신포』 창간에 앞서 제시된 동지 발행의 취지 말미에는 “다만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일신일가의 독립에서 그것을 널리 퍼뜨려 일국의 독립에 이르고자 하는 정신이며, 만약 이 정신에 따르지 않는다면, 현재의 정부이든, 또는 세상에 많은 정당이든, 각종 상공회사이든, 여러 학자들의 모임이든, 그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친구로 삼아 돕고, 그것에 반대한다고 인정되는 자는 그 상대를 묻지 않고 모두 적(敵)으로 삼아 배척할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0]

2. 2. 1. 미국, 유럽 시찰



문구 2년(1862년), 파리의 프랑스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서 촬영.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소장


함린선 난항도(스즈후지 유지로 그림)


안세이 6년(1859년) 겨울, 막부는 일미수호통상조약 비준 교환을 위해 막부 사절단(만엔 원년 遣米사절)을 미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 파견은 이와세 다다무네의 건의로 진행되었고, 사용하는 배는 미군함 「포하탄호」, 그 호위선으로 「함린선」이 결정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인인 가쓰라가와 호슈를 통해 군함봉행 기무라 셋쓰노카미의 종자로 이 사절단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안세이 7년 1월 13일, 막부 사절단은 시나가와를 출발, 1월 19일에 우라가를 출항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군함봉행 기무라 셋쓰노카미(함린선 함장), 가쓰 가이슈,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 등과 같은 「함린선」에 탑승했지만, 이 함린선의 항해는 출항 직후부터 엄청난 폭풍우를 만났다. 함린선은 이 폭풍우로 큰 피해를 입고, 배의 각 부분이 크게 파손되었다. 승원들 중에는 익숙하지 않은 배 여행으로 배멀미를 하는 사람, 피로로 녹초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한 힘든 긴 여행을 거쳐, 안세이 7년 2월 26일(양력 3월 17일), 막부 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여기서 유키치는 3주 정도 머문 후, 수리가 완료된 함린선에 탑승, 하와이를 경유하여, 만엔 원년 5월 5일(1860년 6월 23일)에 일본으로 귀국한다.

이번 함린선에 의한 항해에 대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증기선을 처음 본 지 불과 7년 만에 일본인만의 손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일본인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예이다」라고 나중에 말하고 있다{{efn|



併(しか)しこの航海に就(つい)ては大(おおい)に日本の為(た)めに誇ることがある、と云(い)うのは抑(そ)も日本の人が始めて蒸気船なるものを見たのは嘉永六年、航海を学び始めたのは安政二年の事で、安政二年に長崎に於(おい)て和蘭(オランダ)人から伝習したのが抑(そもそ)も事の始まりで、その業(ぎよう)成(なつ)て外国に船を乗出(のりだ)そうと云うことを決したのは安政六年の冬、即(すな)わち目に蒸気船を見てから足掛(あしか)け七年目、航海術の伝習を始めてから五年目にして、夫(そ)れで万延元年の正月には出帆しようと云うその時、少しも他人の手を藉(か)らずに出掛けて行こうと決断したその勇気と云いその伎倆(ぎりよう)と云い、是(こ)れだけは日本国の名誉として、世界に誇るに足るべき事実だろうと思う[23][24]



}}。

선상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와 가쓰 가이슈의 관계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으로, 말년까지 불화 관계가 계속되었다[25].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와 기무라 셋쓰노카미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이 두 사람은 메이지 유신으로 기무라가 직책을 사임한 후에도 말년까지 친밀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미국에서는 과학 분야에 관해서는 서적에 의해 이미 알고 있는 사항도 많았지만, 문화의 차이에 관해서는 유키치는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군주의 자손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반해, 미국 국민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자손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등을 기록하고 있다.

유키치는 통역으로 수행했던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와 함께 『웹스터 대사전』의 약어판을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와 연구에 도움으로 삼았다. 미국에서 구입한 광동어·영어 대역 단어집인 『화영통어』의 영어에 유키치는 카타카나로 읽기를 붙이고, 광동어의 한자 옆에는 일본어 번역어를 붙인 『[https://dcollections.lib.keio.ac.jp/en/fukuzawa/a01/1 증정화영통어]』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유키치는 「v」의 발음을 나타내기 위해 「우」에 濁点を 붙인 글자 「ヴ」나 「와」에 濁点を 붙인 글자 「ヷ」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후 전자의 표기는 일본에서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문구(文久) 원년(1861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나카쓰 번의 사무라이 토키 타로하치(土岐太郎八)의 차녀 오니시키(お錦)와 결혼했다. 같은 해 12월, 막부는 타케우치 야스토쿠(竹内保徳)를 정사로 하는 막부 사절단(文久遣欧使節)을 구성하여 유럽 각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유키치도 "번역관(翻訳方)"으로서 이 막부 사절단에 참여하여 동행하게 되었다. 당시 동행자에는 마쓰키 히로야스(松木弘安), 미나사키 슈헤이(箕作秋坪) 등이 있었고, 사절단 전체 인원은 약 40명이었다. 문구(文久) 원년(1861년) 12월 23일, 막부 사절단은 영국 함선 "오딘호(オーディン号, HMS Odin (1846))"를 타고 시나가와(品川)를 출항했다. 12월 29일, 나가사키(長崎)에 기항하여 석탄 등을 보급했다. 문구(文久) 2년(1862년) 1월 1일, 나가사키(長崎)를 출항하여 1월 6일, 홍콩(香港)에 기항했다. 막부 사절단은 홍콩에서 약 6일간 체류했는데, 홍콩에서 만연하는 식민지주의(植民地主義)·제국주의(帝国主義)를 목격하고, 영국인(イギリス人)들이 중국인(中国人)을 마치 개(犬)나 고양이(猫)처럼 다루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1월 12일, 홍콩(香港)을 출항하여 싱가포르(シンガポール)를 거쳐 인도양(インド洋)·홍해(紅海)를 건너 2월 22일, 수에즈(スエズ)에 도착했다. 막부 사절단은 여기서 육로로 기차를 이용하여 수에즈 지협(スエズ地峡)을 넘어 북쪽의 카이로(カイロ)로 향했다. 카이로에 도착하여 다시 기차를 타고 알렉산드리아(アレクサンドリア)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영국 선박 "히말라야호(ヒマラヤ号)"를 타고 지중해(地中海)를 건너, 몰타섬(マルタ島)을 경유하여 3월 5일 프랑스(フランス)의 마르세유(マルセイユ)에 도착했다. 거기서 리옹(リヨン)으로 가서 3월 9일, 파리(パリ)에 도착했다. 막부 사절단은 "오텔 뒤 루브르(オテル・デュ・ルーブル)"라는 호텔에 숙박하고 파리 시내의 병원, 의학교, 박물관, 공공 시설 등을 견학했다.(체류 기간은 약 20일)

문구(文久) 2년(1862년) 4월 2일, 막부 사절단은 도버 해협(ドーバー海峡)을 건너 영국(イギリス)의 런던(ロンドン)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막부 사절단은 런던 시내의 역, 병원, 협회, 학교 등 많은 공공 시설을 견학했다. 런던 만국박람회(ロンドン万国博覧会 (1862年))에도 참가하여 증기기관차(蒸気機関車), 전기 기기(電気機器), 타자기(タイプライター, 植字機) 등을 접했다. 런던 다음에는 네덜란드(オランダ)의 위트레흐트(ユトレヒト)를 방문했다. 거기서도 도시의 모습을 견학했는데, 그때 우연히 독일계 사진가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막부 사절단 사진 4점이 위트레흐트의 화폐 박물관에 소장된 기념 앨범에서 발견되었다.[26] 그 후 막부 사절단은 프로이센(プロイセン王国)으로 간 후 러시아(ロシア帝国)로 갔다. 러시아에서는 사할린(樺太) 국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サンクトペテルブルク, ペテルブルク)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막부 사절단은 육군 병원(病院)에서 요로결석의 외과 수술을 견학했다. 그 후 막부 사절단은 다시 프랑스(フランス)의 파리(パリ)로 돌아가 마지막 방문국인 포르투갈(ポルトガル王国)의 리스본(リスボン)에 문구(文久) 2년(1862년) 8월 23일 도착했다.

유럽 6개국 방문의 긴 여정에서 막부 사절단은 막부에서 지급받은 400량의 여비로 영어 책, 물리학 책, 지리(地理) 책을 많이 사서 일본으로 가져왔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이번 긴 여정을 통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유럽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이지만 일본인에게는 미지의 일인 일상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예를 들어 병원, 은행(銀行), 우편법(郵便法), 징병령(徴兵令), 선거 제도(選挙制度), 의회 제도 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서양 사정(西洋事情)』, 『서항기(西航記)』에 정리했다.

또한 유키치는 이번 여행에서 일본어를 잘 하는 현지 프랑스 청년 레옹 드 로니(レオン・ド・ロニー)(후의 파리 동양어학교 일본어 학과 초대 교수)와 만나 친분을 맺었다. 그리고 유키치는 레옹의 추천으로 "미국 및 동양 민족지 학회"의 정회원이 되었다.

문구(文久) 2년(1862년) 9월 3일, 막부 사절단은 일본을 향해 리스본(リスボン)을 출항하여 문구(文久) 2년(1862년) 12월 11일(구력), 일본 시나가와(品川)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하여 귀국했다.

고종 3년(1867년), 막부는 미국에 주문한 군함을 받으러 가기 위해 막부 사절단(사절단장: 오노 토모고로, 에도 막부 군함 인수위원회)을 미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 수행단원에 복자 유길이 포함되었다. 고종 3년(1867년) 1월 23일, 막부 사절단은 우편선 "콜로라도호"를 타고 요코하마항을 출항했다. 유길은 이 콜로라도호의 항해에 대해 "매우 쾌적한 항해였고, 22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다"라고 「복옹자전」에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후, 막부 사절단은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이때 유길은 기슈번과 센다이번으로부터 받은 자금, 약 5,000량으로 많은 사전과 물리학 서적, 지도첩을 구입했다고 한다.

고종 3년 6월 27일(1867년7월 28일), 막부 사절단은 일본으로 귀국했다.

2. 2. 2. 개항론과 서구 문물 수용 역설

그는 청나라조선의 개혁 실패를 보고 "서양문명의 유행은 막을 방도가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이념이 '탈아(脫亞)'다. 근대화를 거부하는 중국과 조선은 서양이 압박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일본은 이웃과 헤어져 서양열강처럼 그들을 대하자.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188]"며 서구 문물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만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이 기고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189]

|섬네일|왼쪽|후쿠자와 유키치, 1862년]]

1860년 귀국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막부의 공식 통역관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첫 번째 출판물인 영어-일본어 사전 "가에이 통고(開成通語)"를 출판했는데, 이는 중국어-영어 사전을 번역한 것이었고 그의 후속 저서들의 시작이었다. 1862년 그는 유럽 최초의 일본 대사관의 두 명의 영어 통역관 중 한 명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유럽 체류 기간 동안 대사관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했다. 러시아에서는 양국 간 오랜 분쟁의 원인이었던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 남단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여행에서 수집한 정보는 그가 1867년, 1868년, 1870년에 10권으로 출판한 유명한 저서 ''서양사정(西洋事情)''(Seiyō Jijō)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서구 문화와 제도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곧 서구 문명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고, 그는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동포들을 교육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사명이라고 결론지었다.

1863년 1월 30일 귀국 이후부터 3년간 그는 《서양사정 (西洋事情)》을 집필하였으며, 막부기구의 개혁을 주창했다. 그는 귀국 직후 이화학과 기계학을 배울 것을 특히 강조하고, 병원, 보험, 은행, 대부업, 우편, 징병제와 그 시설에 대해 언급, 강연하며 일본의 개혁을 역설하였다.

서양사정을 통해 그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각국의 정치, 사회, 경제, 역사, 지리, 문화 제도 등을 알기 쉽게 묘사하여 곧 널리 읽히게 되었다. 이후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며, 쉬운 문체를 개발해내고 대중 강연과 대중 토론을 처음으로 시도, 보급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직전 일본은 반(反)외세 감정이 팽배해 있었기에, 존왕양이와 함께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그는 막부파 등으로부터 자객이 파견되는 등 몇 차례 암살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서구 문물이 일본을 망친다는 괴담이 돌았다. 그가 시나가와에 도착한 다음날인 12월 12일에는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이 일어났고, 1863년 3월이되면 조메이 천황은 오리 양사에 가서 양이들을 쫓아내 줄 것을 신사에 기원하였다. 4월에는 조메이 천황이 이와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으로 피신하고 조슈번이 시모노세키 해협 통과 미국 상선을 포격하는 등 과격한 양이론이 눈에 띄게되었다. 1863년 4월 그는 친구들을 방문하고 귀가하던 길에 낭인의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1863년 영국 함대에 의한 가고시마 포격으로 살영(薩英) 전쟁이 시작되자, 1863년 7월부터 그는 나카사키 봉행(奉行, 공무수행자)인 마쓰다이라 야스히데의 집에서 생할하며 외교 문서를 번역을 맡아보았다. 1864년 10월에는 막부에 통역관에 채용, 외국인 오야토이(御雇) 통역관이 되어 번역업무를 맡아보았다.

1868년 그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의 이름을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로 변경하고 그때부터 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또한 교육 과정에 연설을 추가했다.[2] 게이오 기주쿠는 처음에는 서양 연구의 사립학교였지만 확장되어 1890년에 첫 번째 대학 학부를 설립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고등 교육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2. 2. 3. 재야 활동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사정’(1866년)을 비롯한 엄청난 저술활동으로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또 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기주쿠를 창설하였다.[182]

1867년 음력 1월 23일(1867년 2월 27 일) 쓰다 센(津田仙), 세키 신파치(尺振八) 등과 함께 막부의 군함수취사절단장 오노 우고로(小野友五郎) 등 막부 군함 수취위원회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미국 콜로라도 호 우편환을 타고 요코하마에서 다시 도미,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같은 해 음력 6월 27일(1867년 7월 28일)에 귀국했다. 현지에서 오노에게 아부하였다는 이유로 귀국 후 잠시 근신하게 되었지만, 나카지마 사부로스케(中島三郎助)의 변호로 근신에서 풀려났다. 미국 체류 중 그는 기슈 번, 센다이 번에서 지원받은 여비와 활동비 약 5,000냥으로 영어 사전과 실제 설명서, 미국의 지도 책을 사들여 탐독하고, 일본 귀국 후 《서양여안내 (西洋旅案内)》를 저술하였다.

1860년 귀국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막부의 공식 통역관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첫 번째 출판물인 영어-일본어 사전 "가에이 통고(開成通語)"를 출판했는데, 이는 중국어-영어 사전을 번역한 것이었고 그의 후속 저서들의 시작이었다. 1862년 그는 유럽 최초의 일본 대사관의 두 명의 영어 통역관 중 한 명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유럽 체류 기간 동안 대사관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했다. 러시아에서는 양국 간 오랜 분쟁의 원인이었던 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 남단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여행에서 수집한 정보는 그가 1867년, 1868년, 1870년에 10권으로 출판한 유명한 저서 ''세이요 지조(西洋事情)''(Seiyō Jijō)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서구 문화와 제도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곧 서구 문명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고, 그는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동포들을 교육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사명이라고 결론지었다.

1868년 그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의 이름을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로 변경하고 그때부터 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또한 교육 과정에 연설을 추가했다.[2] 게이오 기주쿠는 처음에는 서양 연구의 사립학교였지만 확장되어 1890년에 첫 번째 대학 학부를 설립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고등 교육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경응 3년(1867년) 12월 9일, 궁정은 왕정복고를 선포하였다. 에도 개성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신정부로부터 출사를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이후에도 관직에 취임하지 않았다.[30] 다음 해에는 칼을 버리고 평민이 되었다.[30]

경응 4년(1868년)에는 란학숙을 '''게이오기주쿠'''로 명명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미타번, 센다이번, 기슈번, 나카쓰번, 에치고 나가오카번과 친분을 맺고, 많은 번사들을 받아들였다.[31] 특히 기슈번의 경우 게이오 란학소 내에 "기슈숙"이라는 기슈번사 전용 방까지 만들어졌다. 나가오카번은 번의 대참사로서 지도하고 있던 미시마 오키지로가 유키치의 생각에 공감하였기에, 번사들을 게이오기주쿠에 다수 보냈고, 카사하라 겐페이 등이 운영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요코하마의 타카시마 카우에몬의 란샤숙과도 학생 파견 교류가 시작되었다. 관군과 쇼기대의 합전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의 『경제학 원론』(The Elements of Political Economy, 1866) 강의를 계속하였다. 경제학이라는 단어는 유키치와 칸다 코헤이 등에 의해 political economy 또는 economics의 번역어로 자리 잡았다. 로쥬 이나바 마사쿠니로부터 천표취의 오쓰카반으로 출사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6월에는 막부에 사직서를 제출하여 퇴관하였다. 메이지 유신 후, 전국적으로 의회 개설 운동이 확산되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영국식 헌법론을 주장하였다.

아내 오니시키의 친가인 도키가와 에노모토 타케아키의 외가인 하야시가가 친척이었던 관계로, 에노모토의 구명을 위해 테라시마 무네노리(이전의 마쓰키 히로야스)의 소개로 관군 참모장 쿠로다 키요타카와 면담하여 사면을 요구하였다. 그 후, 이전부터 장주번에 고용되어 있던 오무라 마스지로나 사쓰마번 출신의 테라시마 무네노리, 칸다 코헤이 등 동료들이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를 결정하고, 유키치에게도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모토 료준 등으로부터 출사 제의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쿠키 류이치, 시라네 센이치, 하마오 아라타, 와타나베 코우키 등을 신정부의 문부 관리로 보내는 한편, 자신은 게이오기주쿠 운영과 계몽 활동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신센자의 땅을 공옥사의 숙장 콘도 마코토에게 300엔에 양도하고, 게이오기주쿠의 새로운 땅으로 눈여겨본 미타의 구 시마바라번 중야시키 땅의 할당 협상을 도쿄부와 진행하였다. 메이지 3년에는 유키치를 두텁게 신뢰하고 있던 내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의 도움을 얻어 그것을 실현하였다.[32] 메이지 4년부터 여기에 게이오기주쿠를 이전시켜 "장합지법(현재의 복식부기)" 등의 강의를 시작하였다. 또한 명육사에 참가하였다. 당시 문부 관리에는 류이치나 타나카 후지마로, 모리 아리요시 등 유키치 계열 관리가 많았기에, 1873년(메이지 6년), 게이오기주쿠와 도쿄 영어학교(옛 개성학교에서 후에 대학예비문, 그리고 구제 제일고로 개편되어 현재: 도쿄대학 교양학부)는 예외적으로 징병령 면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폐번치현을 환영하고, "정권"(군사와 외교)과 "치권"(지방의 치안 유지와 교육) 모두를 정부가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치권"은 지방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한 『분권론』에는, 이를 성립시킨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감사와 함께, 지방분권이 사족의 불만을 해소할 것이라고 논하고, 이어지는 『정축공론』에서는 정부가 태도를 바꾸어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를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33]

『통속민권론』, 『통속국권론』, 『민간경제록』 등도 관민 조화 주장 또는 초보적인 계몽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소개할 때는 "'''자유재불자유중(자유는 불자유 속에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제멋대로주의로 빠지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메이지 6년(1873년) 9월 4일 오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에 수행하고 있던 나가요 센사이의 소개로 키도 다카요시와 회담하였다. 키도가 문부경이었던 기간은 4개월 남짓에 불과하였지만, "학제"를 제정하고, "문부성은 다케바시에 있고, 문부경은 미타에 있다"는 말이 있었다.

메이지 7년(1874년), 이타가키 타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가 야에 내려오자, 고치의 립시학사에 문하생을 교사로 파견하는 한편, 고토의 정치 활동을 지원하고, 의회 개설 운동의 선두에 서서 『우편보지신문』에 "의회론"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였다. 특히 고토에게는 매우 몰입하여, 고토의 부인에게 직접 지원 의사를 전할 정도였다. 같은 해, 지하랑인이었던 이와사키 야타로와 면담하고, 야타로가 산시가 아니라고 평가한 유키치는 미쓰비시 상사에도 쇼다 헤이고로, 토요카와 료헤이 등 문하생을 투입하는 한편, 고토가 경영하는 다카시마 탄광을 이와사키에게 매각시켰다. 또한, 애국사의 부탁을 받고 『의회를 개설하는 허가를 상원하는 서』의 기초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메이지 9년(1876년) 2월, 유키치는 친분이 있던 모리 아리요시의 저택에서 테라시마 무네노리, 미나쓰쿠리 아키쓰보 등과 함께 처음으로 오쿠보 도시미치와 회담하였다. 이때의 유키치에 대해 오쿠보는 일기에 "여러 가지 담화가 있어 재미있고, 과연 유명인에게 부끄럽지 않다"라고 적고 있다.[34] 유키치에 따르면 만찬 후에 오쿠보가 "천하 유행의 민권론도 좋지만, 백성이 정부에 권리를 다투려면, 또한 이에 따르는 의무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유키치는 오쿠보가 자신을 민권론자의 수괴로 오해하고 있다고 느껴, 민권 운동을 날뛰는 벌집에 비유하여 "벌의 무리에 들어가 날갯짓을 함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그대가 민권론자라고 평가한 후쿠자와가 착실한 인물로 그대들에게 믿음직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여러모로 안심하시오"라고 답했다고 한다.[34]

2. 2. 4. 교육, 저술, 계몽 강연 활동

1860년 귀국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막부의 공식 통역관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첫 번째 출판물인 영어-일본어 사전 "가에이 통고(開成通語)"를 출판했는데, 이는 중국어-영어 사전을 번역한 것이었고 그의 후속 저서들의 시작이었다. 1862년 그는 유럽 최초의 일본 대사관의 두 명의 영어 통역관 중 한 명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유럽 체류 기간 동안 대사관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했다. 러시아에서는 양국 간 오랜 분쟁의 원인이었던 사할린 (일본명: 가라후토) 남단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여행에서 수집한 정보는 그가 1867년, 1868년, 1870년에 10권으로 출판한 유명한 저서 ''세이요 지조(西洋事情)''(Seiyō Jijō)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서구 문화와 제도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곧 서구 문명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고, 그는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동포들을 교육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사명이라고 결론지었다.

1868년 그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의 이름을 게이오기주쿠 (게이오 대학)로 변경하고 그때부터 교육에 전념했다. 그는 또한 교육 과정에 연설을 추가했다.[2] 게이오기주쿠는 처음에는 서양 연구의 사립학교였지만 확장되어 1890년에 첫 번째 대학 학부를 설립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고등 교육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일본 여성의 권리 신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평등,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모두의 교육, 그리고 딸과 아들에 대한 동등한 사랑을 옹호하며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그는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기혼 남성이 정부를 두었을 때 발생하는 가정 불화와 같은 해로운 관습에 주목했다. 그러나 후쿠자와조차도 남성과 여성의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 하지는 않았고, 단지 남편과 아내에게만 그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또한 1899년 저서 ''여성을 위한 새로운 대학습''에서 좋은 결혼이 항상 젊은 여성에게 최고의 결과라고 말했고, 후쿠자와의 몇몇 개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친구들이 딸들을 고등 교육에 보내는 것을 만류하여 결혼 후보자로서 덜 매력적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2] 교육 개혁과 같은 후쿠자와의 다른 개혁 제안들은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다지 열렬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술은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으며, 서양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60년, 그는 그의 첫 출판물인 영어-일본어 사전("增訂開化通語", Zōtei Kaei Tsūgo)을 출판했다. 그는 186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어-중국어 사전("開化通語", Kaei Tsūgo)을 구입하여 일본어로 번역하고 원서에 일본어 번역을 추가했다. 그의 책에서 그는 VU 발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일본어 문자 ヴ(VU)와 VA 발음을 나타내는 ヷ(VA)를 고안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이름은 현대 일본어로 ベートー'''ヴ'''ェン으로 표기된다.

그의 유명한 교과서 『세계국지가』(세계의 나라들, 어린이를 위한 운문, 1869)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공식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책을 쓰게 된 영감은 아들들에게 세계 지리를 가르치려고 했을 때 얻었다. 당시에는 그러한 주제에 대한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직접 쓰기로 결정했다. 그는 먼저 『みやこじ』(도시 길)와 『江戸方角』(도쿄 지도)라는 이름의 일본 아동 지리 책 몇 권을 사서 소리 내어 읽는 연습을 했다. 그런 다음 같은 서정적인 스타일로 6권으로 된 『세계국지』를 썼다. 1권은 아시아, 2권은 아프리카, 3권은 유럽, 4권은 남아메리카, 5권은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다루었다. 6권은 세계 지리에 대한 소개를 제공하는 부록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바타 도쿠지로가 저술한 「https://www.keio-up.co.jp/np/isbn/9784766416848/ 학문의 すすめ」(1872년 초판)


1835년과 1856년판 브라운 대학교 총장 프랜시스 웨이랜드의 저서 『도덕 과학의 원리』(Elements of Moral Science)의 영향을 받아,[3] 후쿠자와 유키치는 1872년부터 1876년까지 17권의 『학문의 권유』(学問のすすめ일본어, 또는 보다 관용적으로 "학문에 대해"[4])를 출판했다. 이 저술들을 통해 후쿠자와는 기회균등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그 원리에 대한 이해를 탐구하며, 교육이 이 원리를 최대한 활용하고 위대함을 달성하는 열쇠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공립학교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학습과 학구적인 태도를 통한 굳건한 정신적 기반을 믿었다. 후쿠자와는 또한 이 저술에서 그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모토인 "개인의 독립을 통한 국가 독립"을 주장했다.[5] 일본이 고립주의의 강제적인 종식으로 인한 정치적 격변과 제품, 방법 및 아이디어의 엄청난 신기술 유입으로 인한 문화적 격변으로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자기 결정적인 사회적 도덕성을 창출함으로써 후쿠자와는 일본 국민들에게 개인적 강인함을 심어주어 다른 모든 나라들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서구 국가들은 그들의 사회가 교육, 개인주의(독립), 경쟁 및 아이디어 교류를 촉진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 강력해졌다.

http://www.keio-up.co.jp/kup/eng/philo/15600.html 문명론 개요(An Outline of a Theory of Civilization)」(1875) 초판


후쿠자와 유키치는 많은 영향력 있는 수필과 비평 작품들을 출판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예로는 1875년에 출판된 「문명론의 개략」(일본어: 文明論之概略, [6])가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문명 이론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는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 문명사」(1828년, 영어 번역본은 1846년)와 헨리 토머스 버클의 「영국 문명사」(1872-1873년, 런던 2판)의 영향을 받았다. 후쿠자와에 따르면, 문명은 시간과 상황, 그리고 비교에 따라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당시 중국은 일부 아프리카 식민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문명화되었고, 유럽 국가들은 가장 문명화된 국가였다.

명치육사 지식인 사회의 동료들은 후쿠자와의 견해를 많이 공유했는데, 그는 이를 자신이 출판을 도왔던 학술지인 「명치육사잡지(명치 육사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책과 잡지에서 종종 "문명"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 서술했다. 그는 "문명"으로의 이행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문명"이란 물질적·정신적 안녕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의 삶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물질적·정신적 안녕은 지식과 "덕"에 해당했기 때문에 "문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식과 덕을 발전시키고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문명"에서 자신의 삶이나 현재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강한 자와 약한 자,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는 단지 그들의 지식과 교육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이 총과 물자를 수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신 지식 습득을 지원해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용적이거나 실리적인 일본의 개념(실학, ''jitsugaku'')과 다른 사람들에게 기본적이고 유용한 것을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간단히 말해, 후쿠자와에게 "문명"은 본질적으로 지식과 교육의 발전을 의미했다.

교육의 표준화·중앙집권화·관립화가 확립되면서 도쿄대학교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게이오기주쿠는 경영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후쿠자와 유키치가 가쓰 가이슈에게 자금 조달을 요청했지만, 가이슈로부터 "그런 교육기관은 당장 그만두고 메이지 정부에 벼슬길에 나서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시마즈 가문에 유지 비용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게다가 우수한 제자들은 대학남교와 대학동교, 도쿄사범학교(도쿄교육대학, 쓰쿠바대학의 전신)의 교수로 스카우트되는 현상도 발생했다.

미나토구를 흐르는 후루카와에 다누키바시라는 다리가 있는데, 다리 남쪽에 위치한 다누키소바라는 소바집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주 방문했다. 메이지 12년(1879년)에 다누키바시 남안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별장을 마련했다.[41] 그곳에 게이오기주쿠 유치원이 이전했고, 동쪽 부분은 쓰쿠시가오카 요생원, 후일 기타사토연구소, 기타사토대학교가 되었다.

메이지 13년(1880년), 오쿠마 시게노부와 친분이 있었기에 자유민권운동의 선구자로서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눈총을 받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는 "게이오기주쿠 유지 법안"을 작성하고 스스로 경영에서 손을 떼고 와타나베 쿠마하치, 몬노 이쿠노신, 하마노 테이시로 세 사람에게 경영을 맡겼다. 이 무렵부터 평민 학생이 증가함에 따라 운영이 점차 흑자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립 종합학교가 게이오기주쿠뿐이었기에 더 많은 사립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제자들을 오사카 상업강습소나 상법강습소에서 활동하게 하는 한편, 전문학교와 도쿄전문학교(와세다 대학), 영국법률학교(주오 대학)의 설립을 지원하고 개교식에도 참석했다.

메이지 25년(1892년)에는 나가요 센사이의 소개로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를 맞이하여 전염병연구소와 쓰쿠시가오카 요생원을 모리무라 이치자에몬과 함께 설립했다. 마침 제국대학의 구상이 제기되던 때였지만, 게이오기주쿠에 대학부를 설치하고 고이즈미 신키치를 초빙하여 일관 교육 체제를 확립했다.

평민적인 신란의 사상을 참고하여 당시 기준으로 평이한 문체를 사용하는 “속문주의(俗文主義)”를 의식하였다.[92]

저작물의 관리 및 판매 권리를 저자에게 독점시키는 영국의 저작권 사상을 일본에 도입하여,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에 신정부에 해적판 단속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이듬해 5월 13일 저작권 사상에 기반한 출판 조례 공포를 실현시켰다. 이로써, 그 이전까지는 유식자들 사이에서 판단되던 저작권에 대한 최종 판단이 사법부로 이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유키치는 병행하여 메이지 2년(1869년) 11월에 출판업계에 진출하여 “福澤屋諭吉(후쿠자와야 유길)”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고,[93] 메이지 6년(1873년) 3월에는 히나나기 마사사쿠의 저서 『啓蒙天地文(계몽천지문)』에 자신의 저서 『啓蒙手習之文(계몽수습지문)』을 무단으로 인용한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당시에는 출판사가 저작물의 권리를 쥐고 있었고, 표절이 발생해도 저자에게 금전적 피해가 전혀 없었기에 도쿄닛폰신문처럼 히나나기를 옹호하는 언론이 많았지만, 유키치의 이러한 활동은 문장의 무단 인용이 불법 행위라는 인식을 사회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2. 5. 언론, 문필 활동

1873년 언론사인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 사주이자 동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개화 청년 양성과 토론 제도 보급, 실용적인 학문 등을 장려하였으며, 부국강병론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 만인 평등론을 주장하여 일본의 국력 향상,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860년 귀국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막부의 공식 통역관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첫 번째 출판물인 영어-일본어 사전 "가에이 통고(開成通語)"를 출판했는데, 이는 중국어-영어 사전을 번역한 것이었고 그의 후속 저서들의 시작이었다. 1862년 그는 유럽 최초의 일본 대사관의 두 명의 영어 통역관 중 한 명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유럽 체류 기간 동안 대사관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했다. 러시아에서는 양국 간 오랜 분쟁의 원인이었던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 남단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여행에서 수집한 정보는 그가 1867년, 1868년, 1870년에 10권으로 출판한 유명한 저서 ''세이요 지조(西洋事情)''(Seiyō Jijō)로 이어졌다. 이 책들은 서구 문화와 제도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곧 서구 문명의 최고 전문가로 여겨졌고, 그는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동포들을 교육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사명이라고 결론지었다.

1868년 그는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학교의 이름을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로 변경하고 그때부터 교육에 전념했다.[2] 그는 또한 교육 과정에 연설을 추가했다. 게이오 기주쿠는 처음에는 서양 연구의 사립학교였지만 확장되어 1890년에 첫 번째 대학 학부를 설립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고등 교육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일본 여성의 권리 신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평등,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모두의 교육, 그리고 딸과 아들에 대한 동등한 사랑을 옹호하며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그는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기혼 남성이 정부를 두었을 때 발생하는 가정 불화와 같은 해로운 관습에 주목했다. 그러나 후쿠자와조차도 남성과 여성의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 하지는 않았고, 단지 남편과 아내에게만 그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또한 1899년 저서 ''여성을 위한 새로운 대학습''에서 좋은 결혼이 항상 젊은 여성에게 최고의 결과라고 말했고, 후쿠자와의 몇몇 개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친구들이 딸들을 고등 교육에 보내는 것을 만류하여 결혼 후보자로서 덜 매력적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2]

1880년 12월, 참의(參議)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저택에서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정부 고관 3명과 면담하여 공보 신문 발행을 의뢰받았다. 유키치(諭吉)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유보하고 수일간 숙고했지만, “정부의 진의를 대중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 신문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하려고 1881년 1월 이노우에를 방문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정부는 국회 개설을 결의했다”고 말하자 유키치는 그 단호한 결단에 환희하여 신문 발행을 맡게 되었다.[35]

그러나 오쿠마 시게노부가 당시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겨졌던 영국식 정당 내각제 안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전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제출한 것 때문에 이토는 오쿠마의 급진적인 경향을 경계하게 되었다.[36] 또한, 바로 이 무렵에는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문제”에 대한 반대 집회가 각지에서 열리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쿠마도 그 반대론자였고,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출신자들 중에도 이 문제를 비판하는 사람이 연설회나 신문에서 많았다. 그 때문에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오쿠마·후쿠자와·게이오기주쿠의 음모라는 소문이 사실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881년에는 오쿠마 일파를 정부 직책에서 사퇴시키는 메이지 14년의 정변(明治十四年の政変)이 일어나게 되었다. 불과 3개월 전에 오쿠마, 이토, 이노우에와 면담했던 유키치는 이 사건에 당황하여 이토와 이노우에에게 위약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다.[36] 2,500자에 달하는 인생에서 가장 긴 편지였다. 이 편지에 대해 이노우에는 답장을 보냈지만 이토는 답장하지 않았다.[37]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답신을 요청했지만 이토로부터의 답신은 결국 없었고, 이노우에도 마지막 서한에는 답장하지 않았다. 이로써 유키치는 두 정치가와의 교류를 오랫동안 끊게 되었다.[38] 유키치의 이해로는 이토와 이노우에는 처음에는 오쿠마와 함께 국회 개설을 결의했지만, 정부 내부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보고 도중에 변절하여 오쿠마 단독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38]

유키치는 이미 공보 발행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오쿠마가 실각하고 이토와 이노우에는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에, 이전 3명과의 회담에서 나온 공보 이야기도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공보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을 자신의 신문 발행에 전용하기로 하고, 1882년 3월부터 『시지신포(時事新報)』를 발간하게 되었다.[39] 『시지신포』 창간에 앞서 제시된 동지 발행의 취지 말미에는 “다만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일신일가의 독립에서 그것을 널리 퍼뜨려 일국의 독립에 이르고자 하는 정신이며, 만약 이 정신에 따르지 않는다면, 현재의 정부이든, 또는 세상에 많은 정당이든, 각종 상공회사이든, 여러 학자들의 모임이든, 그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친구로 삼아 돕고, 그것에 반대한다고 인정되는 자는 그 상대를 묻지 않고 모두 적(敵)으로 삼아 배척할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0]

헌법, 황실전범 교육칙어, 군인 칙유의 초안 모두에 참여했고 후쿠자와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타케시 등과 절교하였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는 관계회복이 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도쿄부 의회 부의장이 사퇴하고, 도쿄학사회원 오바타 토쿠지로오(小幡篤次郎), 쓰기무라 코우지(杉亨二), 미쓰쿠리 슈헤이, 스기타 겐하시(杉田玄端) 등 후쿠자와파 학자들은 헌법 작성 등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서구식 교육령 개정에도 참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교육령 제정에서도 손을 떼게 되었다.

평산 요시(平山洋)는 이타(井田)의 분석을 바탕으로 현행 전집 7권까지는 서명이 있는 저서로 발표된 것에 반해, 8권 이후의 『時事新報論集』(시사신보론집)는 대부분이 무명(無署名)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이쇼 시대의 『후쿠자와 전집』(1925-26년)과 쇼와 시대의 『속 후쿠자와 전집』(1933-34년)의 편찬자였던 제자 이시카와 칸메이(石河幹明)가 『시사신보』(時事新報)에서 선정한 것을 그대로 이어서 수록했다고 밝혔다. 또한 현행판 『전집』(1958-64년) 16권에는 유길(諭吉) 사후 몇 달 후에 게재된 논설이 6편 수록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141]

2. 3. 생애 후반

1879년 동경학사회원(현: 일본학사원)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동경부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민정일신』을 간행하였다.[61] 1880년 전수학교(현: 전수대학) 설립에 협력하고, 교바시구의 부기강습소와 기바타초의 메이지회당을 설립자 4명에게 제공하였다. 게이오기주쿠가 학생 감소로 재정난을 겪자 폐교를 결심했지만, 「게이오기주쿠 유지 법안」을 발표하여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61]

1881년 1월 23일 「게이오기주쿠 가헌법」을 제정하고 사회장이 되었다. 8월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정부 요인과 절교하고, 우에노 - 아오모리 간 일본철도회사 설립에 협력하였다. 1882년 3월 일간 신문 『시사신보』를 창간, 불편불당·국권황장의 이념 아래 여론을 선도하였다. 『제실론』을 간행하였다. 10월 21일 동경전문학교 개교식에 참례했다.[62]

1885년 9월 19일 영국법률학교 개교식에 참례했다.[63] 1886년 12월 11일 메이지법률학교 남코가초 교사 이전 개교식에 참례했다.[64] 1887년 이토 히로부미 수상이 주최한 가면무도회를 가사 형편을 이유로 불참하였다. 1889년 8월 「게이오기주쿠 규약」을 제정하였다. 1890년 1월 게이오기주쿠에 대학부를 발족, 문학과·리재과·법률과의 3과를 설치했다.

1892년 「전염병연구소」를 설립하고 (기타자토 시바사부로가 초대 소장), 1893년 「도부시가오카 요양원」을 개설하였다. 1894년 고향 나카쓰의 경승·경수봉을 자연 보호를 위해 매입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하코네,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이세신궁, 산요 지방으로 여행하였다.

1898년 5월 게이오기주쿠의 학제를 개혁하고 일관 교육 제도를 수립, 정치과를 증설하였다. 9월 26일뇌출혈로 쓰러졌으나 회복하였다. 1899년 1월 21일가쓰 가이슈 사망. 황실로부터 금 5만 엔을 하사받았다. 8월 8일 다시 쓰러졌으나 약 1시간 후 의식을 회복하였다. 『수신요령』 완성.

1900년 2월 24일 미타 연설회에서 『수신요령』을 발표했다.[65]12월 31일 게이오기주쿠 학생들과 19세기20세기의 「세기송영회」를 개최했다.[66] 유키치의 「독립자존영신세기」라는 대서(大書)는 이 회에서 처음 공개되었다.[67]

1901년 1월 25일 뇌출혈로 다시 쓰러졌다. 2월 3일 재출혈로 사망했다.[68]오쿠마 시게노부가 눈물을 흘리며 가져온 꽃을 후쿠자와 가는 받았다. 후쿠치 게니치로가 쓴 기사는 메이지 시대의 명문으로 꼽힌다. 작위를 거절하였다. 2월 7일중의원에서 만장일치로 애도를 결의했다.[69] 2월 8일 장례식은 생전 생각에 따라 「숙장(塾葬)」으로 하지 않고, 후쿠자와 가의 사사로 여겨진다.[70]

2. 3. 1. 조선인 유학생과의 관계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확대되자, 후쿠자와는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지원하여 그들이 스스로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182]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182]

후쿠자와는 조선인 개혁자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 등과의 만남을 계기로 조선의 개혁 운동에 지원과 자문을 하게 되었다. 후쿠자와는 당시 조선이 일본메이지 유신 직전 상황과 흡사하고 소규모 무력 투쟁도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고, 이때 조선에서 개혁을 실시한다면 자유주의적인 영세중립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들을 지원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 문명 개화의 주역이라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이들 조선인 청년 개화인사들은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1875년 후쿠자와가 저술한 《문명의 개략》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의 문명개화론은 1880년대 조선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81년부터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등이 일본을 방문하여 후쿠자와를 만나면서 그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후쿠자와는 자신의 조국을 개혁하겠다는 이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여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1881년 3월 6일 김옥균은 후쿠자와와 면담하며 조선 독립에 협력을 의뢰했다.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후쿠자와는 요코하마 정금 은행에서 17만원의 대출금을 얻어 조선 측 배상금의 일부를 대신 납부해주기도 했다.[43]갑신정변 당시 후쿠자와는 프랑스 공사의 함대에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 청년들을 보내,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82년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과 그의 동지 박영효와 친분을 쌓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문제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군비는 일본 한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함으로써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일본 국내에서 가장 강경한 대청 주전론자가 되었다.[42]

1882년 10월에 조선에서 사죄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 사절단의 정사는 박영효였고, 김옥균은 부사 중 한 명이었다. 박영효는 귀국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추천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출신의 우시바 타쿠조(牛場卓蔵)를 조선 정부 고문으로 맞이했다.[44]

조선 종주권 상실을 우려한 청은 원세개가 이끄는 3,000명의 군대를 경성에 파병했고, 이로 인해 조선 정부 내는 사대당(청파)과 독립당(일본파) 그리고 중간파로 분열되었다. 독립파의 김옥균과 박영효는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사대당의 요청에 응한 청군의 출병으로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이 혼란 속에서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真三) 대위 이하 일본군인 40여 명이 청군과 조선군에 살해되었고, 일본인 거류민들도 중국인과 조선인의 살상과 약탈을 당했다.[45]

이 사건으로 일본 국내의 주전론이 고조되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강경하게 주전론을 주장한 것이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몇 달 동안 미타(三田)의 저택에 숨겨주었다.[47]

이때의 개전 위기는 1885년 1월 조선 정부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와의 협상에서 사과와 배상을 약속한 것과, 4월에 일청 양국이 조선에서 철병을 약속한 텐진 조약(1885년)(天津条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주전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결과를 청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고 불만을 품었다.[48]

후쿠자와 유키치의 장남, 후쿠자와 이치타로(福澤一太郎). 게이오기주쿠 학두를 역임함.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진심은 그의 아들 후쿠자와 이치타로(福澤一太郎)에게 보낸 편지(1884년 12월 21일)에서, "조선 사변의 실상을 말하자면, 일본 공사와 일본군은 12월 6일 중국군 때문에 경성에서 쫓겨나 인천으로 도망쳤습니다. 일중 병력의 많고 적음은 있지만, 일본인이 중국인에게 진 것은 개벽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화전의 갈림길은 앞으로 반 달이나 한 달 안에 공공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49]에서 엿볼 수 있다.

2. 3. 2. 조선인 개화파 지원과 실패

1882년 조선에서 유학생이 파견되었는데, 이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생면부지의 함경남도병마절도사윤웅렬의 부탁을 받고 윤치호가 도진샤로 가도록 편의를 봐주었다.[193] 그는 조선인 유학생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귀국 후에도 꾸준히 연락했다. 특히 독립신문 등에 관여한 윤치호와는 서신을 통해 언론 경영에 대한 조언을 주고받았다.[193] 또한 유길준에게 자신의 저술 《문자지교》를 국한문혼용으로 번역하게 하였다.[193]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壬午事變)으로 조선의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조선 정부와 제물포 조약(済物浦条約)을 체결했다. 후쿠자와는 청이 방해한다면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43] 1882년 10월 조선 사죄사절단의 정사 박영효는 귀국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추천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출신의 우시바 타쿠조(牛場卓蔵)를 조선 정부 고문으로 맞이했다.[44]

말년의 후쿠자와


1882년에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와 친분을 쌓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 문제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일본 국내에서 가장 강경한 대청 주전론자가 되었다.[42]

조선 종주권 상실을 우려한 청은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3,000명의 군대를 경성(京城)에 파병했고, 조선 정부 내는 사대당(청파)과 독립당(일본파) 그리고 중간파로 분열되었다. 1884년 12월 4일, 독립파의 김옥균박영효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청군의 출병으로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真三) 대위 이하 일본군인 40여 명이 청군과 조선군에 살해되었고, 일본인 거류민들도 피해를 입었다.[45]

이 사건으로 일본 국내의 주전론이 고조되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사신보에 글을 쓰면서 청과의 개전을 강력하게 호소했다.[46] 또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몇 달 동안 숨겨주었다.[47]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개화파 인사들이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당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대성통곡하며,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그는 조선독립당의 처형(朝鮮独立党の処刑)이라는 글을 발표,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하였다.

1885년 1월 조선 정부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와의 협상에서 사과와 배상을 약속, 4월에 일청 양국이 조선에서 철병을 약속한 텐진 조약(1885년)(天津条約)이 체결되면서 개전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결과를 청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고 불만을 품었다.[48]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진심은 그의 아들 퓨쿠자와 이치타로(福澤一太郎)에게 보낸 편지(1884년 12월 21일)에서 "조선 사변의 실상은...일본인이 중국인에게 진 것은 개벽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49]에서 엿볼 수 있다.

1885년 3월 16일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 가담한 이들과 그 유가족의 비참한 처우를 전해듣고 분개,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하였다. 1885년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国の滅亡を賀す)'며 조선 정부를 규탄했다. 그는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며 조선 정부를 강력 비판하였다.

1894년 12월 조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유길준, 윤치호와 손잡고 신문사 개설을 시도할때, 후쿠자와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그는 시사신보사의 시찰, 견학부터 신문 인쇄기와 활자, 타자기와 잉크, 종이 등도 알아봐 주었다. 그는 이들에게 국한문 혼용 방법을 권고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의 간행에도 후견, 조언을 해주었다.

2. 3. 3. 동학 농민군 비난과 반중 감정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관련자들에 대한 악형과 연좌제도 적용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혐오감을 증폭시켰다. 1894년 봄 조선의 삼남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그는 동학 농민군에 대한 상당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며 동학 농민군을 비난하였다.[188] 그는 청국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드러냈다. "서울에 주둔중인 청국병을 몰살하라.[188]"고 호소하였다.

이후 그는 "지나,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히 대우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서양인이 이를(일본인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4]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시사신보에 공개적으로 중국을 비판했다.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다." 일본군이 '벌레와 짐승'을 죽이는데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188] 그는 자신의 반중 감정에 대해 평소의 합리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자, 중국인의 미개함과 욕심을 지적하고, 이것이 바로 중국인을 짐승으로 볼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일본군의 정훈교재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발행한 신문인 「시사신보」였고, 그것이 그가 생각한 문명이었다.[188]

그러나 1898년 3월 22일자 사설에서는 그는 '지나인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194]'는 글을 발표한다. 사설에서 그는 일본이 중국에 요구할 것은 영토가 아니라 무역이라고 주장한다. 양국은 이를 통해 상호 이익을 도모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인은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고조된 중국인 멸시를 삼가야 한다고 주문한다.[194] 이 사설은 익명으로 기고되었지만 1934년 이와나미쇼텐 출판사 간행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 그의 작품이라고 밝혀지게 된다. 이는 개인적 반성보단 학문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전쟁에 대해서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894년(明治 27년) 3월, 일본 망명 중이던 김옥균(金玉均)이 상하이([上海]])로 유인되어 조선 정부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 내 주전론이 다시 고조되었다.[50]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며, 친분이 있던 승려에게 법명과 위패를 만들어 자택 불단에 모셨다.[51] 같은 해 4월부터 5월에 걸쳐 동학농민운동(東学党の乱) 진압을 명분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 정부도 이에 대응하여 조선에 출병했고, 마침내 청일전쟁(日清戦争)이 발발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사신보(時事新報)를 통해 지속적으로 정부와 군대를 열렬히 지지하며 전쟁 수행을 독려했다.[52]

국회 개설 이후 정부와 제국의회(帝国議会)는 여러 차례 대립했고(건함비 부결 등), 이는 일본의 외교력 약화로 이어져 청나라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전쟁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개전 초 시사신보에 ‘일본 신민의 각오’를 발표하여 “관민 모두 정치적 원한을 잊을 것”, “일본 신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신중하게 정부의 정책을 비판해서는 안 될 것”, “서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그 아름다운 행위를 칭찬하며, 각자 인내해야 할 것”을 호소했다.[53]

또한 전비 모금 운동(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급금(遽金)’이라고 명명했다)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자신이 1만 엔이라는 거금을 기부하는 동시에, 미쓰이 재벌(三井財閥)의 미쓰이 하치로에몬(三井八郎右衛門),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의 이와사키 히사야(岩崎久弥), 시부사와 재벌(渋沢財閥)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등과 함께 전비 모금 단체 ‘보국회(報国会)’를 결성했다(정부가 별도로 5,000만 엔의 공채 발행을 결정함에 따라 해산했다).[54]

2. 3. 4. 저술 활동과 최후

1897년 이후에는 메이지 유신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개혁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의 강연, 칼럼 등을 기고, 발표하였다. 시사신보의 한 사설에는 메이지 정부의 국가주의적인 서구화 정책, 근대화 정책에 대한 비판 칼럼을 발표하고, 민정일신이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사회보다 구 막부 쪽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라는 견해를 역설하기도 했다. 1897년 9월 4일자의 시사신보 칼럼에서는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에 대해 "종교 안에는 다양한 종파가 있지만, 그 차이는 보통 차와 홍차의 차이 정도이고, 두 차를 마셔도 큰 차이는 없다"며 일부 종교들의 독단성과 독선을 비판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여성도 인간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고,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등 일본 여성의 기본권 향상 및 여성도 국민이라는 인식을 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195] 저서에는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의 개략》과 《복옹자전 (福翁自傳)》, 《신여대학 (新女大學)》 등을 남겼다.

죽기 직전인 1901년부터 저술한 자신의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에서 그는 메이지 유신으로 모든 봉건적 특권들과 인습들을 상당부분 폐지하였지만 그때까지도 일본 사회에는 구습의 폐단이 잔존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으며, 1894년과 1895년의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권위를 제압한 것과 청나라를 꺾음으로서 일본이 세계열강 대열에 끼는 계기가 된 일 등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보람스러운 순간이었음을 자부하였다. 여기서 그는 단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요시다 쇼인을 비롯한 그의 많은 친구들이 이러한 훌륭한 변화를 보지 못하고 뇌출혈에 의해 죽은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유키치 저택 터에 있는 후쿠자와 공원. 메이지 시대에는 이곳에서 도쿄만이 한눈에 보였다.


유키치가 말을 매었다고 전해지는 말 매는 돌


유키치는 일청전쟁 이후 말년에도 오전 3시간에서 4시간, 오후 2시간은 공부하고, 또한 칼 뽑기와 벼 찧기도 계속하며, 마지막까지 소탈한 노학자 같은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56] 이 무렵에는 게이오기주쿠가 대학부를 설치하여 총 학생 수가 1000명이 넘는 거대 학교가 되었고, 또한 시사신보도 신용이 두터운 대신문이 되었다.[56]

말년의 유키치의 주요 활동으로는 해군 확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언론 활동을 하거나, 남녀 도덕의 쇄신을 기도하여 『여대학 평론 신여대학』을 저술하거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의 전염병 연구소 설립을 지원한 것 등이 있다.[57] 또한 메이지 30년(1897년) 8월 6일에 히나하라 마사조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산주의의 대두를 우려하는 편지를 남기고 있다.[58]

유키치는 1898년 9월 26일, 처음으로 뇌출혈로 쓰러져 일시적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지만, 이때는 회복했다. 그 후, 게이오기주쿠의 『수신 요령』을 편찬했다.[59]

하지만 1901년 1월 25일, 뇌출혈이 재발하여 2월 3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67세(66세로 사망). 7일에는 중의원이 "중의원은 일찍이 개국의 설을 주장하고, 힘을 교육에 쏟았던 후쿠자와 유키치 씨의 부음을 접하고 여기에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원의를 결의하고 있다.[60] 8일 유키치의 장례식에는 미타의 자택에서 아자부 선복사까지 1만 5천 명의 조문객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59] 그는 도쿄 아자부(麻布) 지역의 선복사(善福寺)에 매장되었습니다.[2] 게이오기주쿠 대학(慶應義塾大学) 동문들은 매년 2월 3일에 그곳에서 기념식을 거행합니다.

3. 사상과 신념



후쿠자와 유키치 상 (미타)


후쿠자와 유키치 상 (히요시)


그의 이상은 그가 남긴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자존’이라는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

=== 봉건질서에 대한 반감 ===

후쿠자와는 봉건질서와 신분제도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신분제도 외에도 그는 문벌에 대해서도 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는 어려서 학자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신분과 배경, 재력 때문에 좌절해야 했던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의 좌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186]

봉건질서가 강고하게 자리잡은 시대에 하급 무사가문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탈아(脫我)’에 대한 욕망이 강렬했다. 그의 아버지 하쿠스케는 오사카의 갑부들과 교제하면서 번의 채무를 해결하는 일을 도맡았다. 유키치에 의하면 생부 하쿠스케는 '원래 책만 읽는 학자로 성장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주판을 들고 돈 계산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했으니, 아버지의 좌절감은 깊었으리라' 한다.[186] 보잘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 저명한 유학자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형의 좌절은 그로 하여금 현재의 신분 제도 사회를 타파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중을 경멸하였고 봉건제를 찬양하였으며 우민을 양산하는 유교 사상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199] 이는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우월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생애 초기에는 민중이나 우민을 옹호하는 유학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으나 현실을 깨닫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족의 비극이 영향을 준 것인지 귀족들을 은근히 부정적으로 묘사했으며 비민중적 정체성을 지닌 자본가들을 긍정적으로 보았다.[200]

福澤諭吉는 한학을 철저히 비판했다. 그 때문에 공자맹자 숭배자들로부터 증오를 샀지만, 그에 대해 諭吉는 자서전에서 “나는 단지 한학에 불신앙적일 뿐만 아니라 한학을 중시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썩은 유생들의 썩은 주장을 일소해 버리려고 젊은 시절부터 마음먹었다."라고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81]

『문명론개요』에서는 공자맹자를 “고대에 드물게 있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유교적인 “정교일치”의 결점을 지적했다.[82] 『학문의 すすめ』에서는 공자의 시대는 2000년 전의 야만스럽고 미개한 시대였으며, 천하의 민심을 유지하기 위해 속박하는 권력의 길밖에 없었지만, 후세에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시대를 고려하여 취사선택해야 한다고 비판한다.[83]

=== 자유주의론 ===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권위와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이는 그가 1860년대 구미 순방을 다녀온 뒤 신분 제도 폐지론을 주장한 것과 일맥상통하였다. 그의 저서 《학문의 권장》의 서두에도 이 내용이 있다. 후쿠자와는 만인이 평등함을 역설하였데, 다만 사람마다 그의 능력과 인격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떤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을 역설했다. 후쿠자와는 "인생은 연극과 같다. 훌륭한 배우가 걸인도 되고 삼류배우가 대감이 될 수 도 있다. 어쨌든 지나치게 인생을 거북하게 생각을 하지 말고 솔직하게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하라.[201]"고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12년(1879년)의 『민정일신(民情一新)』에서 “현대에 국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권력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교체되는 것이며, 국민의 투표에 의해 권력자가 바뀌어 가는 영국의 정당정치·의회정치를 크게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개설 시기에 대해서는 “점진론에 찬성한다”고 밝히면서도, 지나치게 신중한 의견에 대해서는 “우리 일본은 개국 20년 만에 200년의 일을 이룬 것이 아닌가.", “인민 일반에 지덕이 생긴 후에야 국회를 연다는 설은, 1년 내내 하루도 궂은 날씨 없는 화창한 날씨를 기다려 여행을 계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도저히 출발 시기가 없을 것이다”, “현재에 있어 12년 전의 왕정복고를 아직 이르다고 말하지 않는 자는, 또 오늘날 국회 개설이 이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며 반박했다.[84]

그러나 유키치는 국내의 투쟁보다도 국외에 일본의 국권을 확장하는 것을 더 중시하여 “내안외경(内安外競)”, “관민조화(官民調和)”를 자신의 주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는 급진파에는 결코 동조하지 않고, 그들을 “다민권론자(駄民權論者)”, “헤코오비 쇼세이(ヘコヲビ書生)”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개가 짖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85] 『시사소언(時事小言)』에서 유키치는 “정부는 국회를 열어 국내의 안녕을 도모하고, 뜻을 모아 외적으로 국권을 펼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86]

또한 유키치가 메이지 14년(1881년)에 런던에 체류하고 있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학생 고이즈미 신키치(小泉信吉)에게 보낸 편지에는 “각지의 연설, 소위 헤코오비 쇼세이(ヘコヲビ書生) 무리들, 그 풍속이 매우 좋지 않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현관(県官)을 욕하는 것은 지나치고, 극도에 이르면 무쓰히토(ムツヒト)(=메이지 천황) 등등을 발언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정말 연설도 한도를 넘어 매우 나쁜 징조이다. 이렇게 되면 방치할 수 없는 일이므로, 조금씩 내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으며, 황실에 대한 불경한 태도 등 자유민권론자들의 무례함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87]

=== 학문관 ===

그는 독립을 위해서라도 힘써 배워 익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양 열강으로부터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학문을 통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198] 그는 실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문이란 그저 어려운 글자를 알고 와카를 즐기고 시를 짓는 등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학이다.[198]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론이 거창하더라도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학문은 쓸모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편지를 쓰는 법, 장부 처리하는 법, 주판알 놓는 법 등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지리학, 역사, 경제학, 수신학 등 배울 것이 많다고 강조하였다.[198]

또 다른 학문의 목적은 정부로부터 인민의 독립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학문의 권장》에서“인민들이 폭정을 피하고 싶으면 학문에 정진하여 재주와 덕행을 높임으로써 정부와 동등하게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198] 그는 스스로 관리로의 등용을 거부하고, 대신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거나 신문을 간행하는 등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198] 그는 타인 혹은 정부, 또는 외세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스스로 깨닫고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福澤諭吉는 한학을 철저히 비판했다. 그 때문에 공자맹자 숭배자들로부터 증오를 샀지만, 그에 대해 諭吉는 자서전에서 “나는 단지 한학에 불신앙적일 뿐만 아니라 한학을 중시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썩은 유생들의 썩은 주장을 일소해 버리려고 젊은 시절부터 마음먹었다."라고 밝혔다. "이렇게 내가 한학을 적대시한 것은, 지금 개국의 시기에 낡고 썩은 한학의 주장이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서양의 문명이 결코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굳게 믿었고, 그들을 구해내 내가 믿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모든 힘을 다 쏟았다. 내 진심을 말하자면, 일본 전국의 한학자들이 다 와도 내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는 각오였다.”라고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81]

『문명론개요』에서는 공자맹자를 “고대에 드물게 있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유교적인 “정교일치”의 결점을 지적했다.[82] 『학문의 すすめ』에서는 공자의 시대는 2000년 전의 야만스럽고 미개한 시대였으며, 천하의 민심을 유지하기 위해 속박하는 권력의 길밖에 없었지만, 후세에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시대를 고려하여 취사선택해야 하며, 2000년 전에 행해진 가르침을 그대로 현재에 행하려는 자는 사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또 서양의 여러 대가들은 잇따라 새로운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을 문명으로 이끌고 있지만, 이는 그들이 고대인이 확정한 주장에도 반박하고, 세상의 관습에도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논했다.[83]

=== 문명관 ===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이 지선(至善)이 아니라 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진보의 순간순간을 일컫는 것이라 했다.[71] 건강하다고 해도 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듯이 문명화되었다 하여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문명화가 곧 정답은 아니고 다만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일 뿐이라고 보았다.[71]

그는 문명이 대세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보았다. “세계의 교류가 나날이 빨라지고 서양문명이 동양으로 전파되어 그 이르는 곳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할 것 없이 모두 감화되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71] 서양문명이 온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피하기 힘든 형세이며, 동양의 민족은 저항할 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도쿄 사람이 나가사키로부터 번져온 홍역을 치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비유했다.[71]

후쿠자와는 어떤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계속 발전, 문명화되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양한 수사학을 사용하면서 문명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님을 역설했다. 어떤 화살을 쓰건 표적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듯, 강이 어떤 모양으로 흐르건 결국 바다로 모여들듯, 어떤 제도를 어떻게 활용하여 ‘안락과 품위의 진보’를 이룰지는 저마다 놓인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71] 생활이 편리해지고 윤택해진다 하여 그것이 정답은 아니며, 편리한 삶이 전적으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고 전망했다.[71]

후쿠자와는 동양의 구습에 집착하며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71] 특히 청나라중국인의 서양화·근대화에 대한 태만함을 비판하며, 그들이 100년 동안 서양과 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느린 것은 중국인이 광대한 영토를 자부하며 다른 나라를 멸시하고, 수천 년 동안 음양오행의 망설에 미혹되어 사물의 진리 원칙을 구하는 열쇠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72]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권 확장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서양 학문과 유교의 사상 전쟁"이라고 보았다.[73] 풍도해전 직후에는 "문야(文野)의 전쟁", "문명 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74]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야마구치 히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 주장해 온 서양식 문명주의의 실제 상황을 보게 되었고, 이웃 나라 중국조선도 문명 속에 포괄하려 한다는 확신을 표명했다.[75]

하지만 후쿠자와의 본래 목적은 서양 열강의 동진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78] 일본의 군사력은 일본 한 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78] 그렇기 때문에 이씨조선의 김옥균 등 아시아의 "개혁파"를 지원했다.[79] 고이즈미 신키치와 히하라 쇼조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조선인 유학생을 게이오기주쿠에 입학시키고 친근감을 가지고 접하며, 조선의 개화를 돕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80]

=== 인간관 ===

그는 인간의 이중잣대와 편견을 지적하며 조소하였다. 그는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내가 아니라면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202]" 라며, 자신의 고통은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수양이 덜된 인간, 비루하고 천한 인품을 가진 인간일 수록 사소한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려 하고, 다른사람에게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기 좋아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편이 더 낫다고 지적하였다.

후쿠자와는 학력이 낮다 하여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학력이 높아서 박사, 석사 학위를 받더라도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석사, 박사 학위를 자랑삼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고, 아집만 부리려 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 사회의 석사, 박사 학위가 자신을 치장하는 치장품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 종교관 ===

그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서라도 종교는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권리를 부여해봤자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판단력이 결여된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믿을 뿐이며 그런 인간에게는 애당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바보와 병신들에게는 종교가 꼭 맞는 구색'이라고 냉소하기도 했다.[203]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 자신은 무신론자였다.[203]

=== 여성관 ===

후쿠자와 유키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남녀 차별 없는 동등한 교육 기회 제공, 부부간 평등,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을 주장했다.[204] 그는 모리 아리노리의 파격적인 서양식 결혼식에 참석하여 증인 겸 사회를 보았는데, 이 결혼식은 전통적인 혼례식을 거부하고 양장 차림의 신부와 소례복을 입은 신랑이 서로 팔짱을 끼고 치러졌다.[205] 모리 아리노리는 축첩 폐지, 일부일처제, 부부 평등, 결혼에 따른 권리와 의무에 대해 부부간 상호 준수를 주장한 개혁적 관료였다.[206][207] 당시 언론은 이 결혼식을 '신식 부부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206][207]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의 여성 해방 사상을 일본에 가장 먼저 소개한 그는 "인륜의 근본은 부부이다"라며 일부다처와 을 비난하고, 여성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하며,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간이므로 동일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88] 자신의 딸에게도 어릴 때부터 예술을 가르쳤으며, 하인리히 폰 지볼트 부인에게 예술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론에 큰 영향을 받아, 『학문의 권유』에서 그의 선구적인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89] 1874년에 설립된 게이오기주쿠 유치원은 1877년 이후 한동안 남녀 공학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근대화 이후 일본 교육에서 남녀 공학의 매우 드문 초기 사례였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는 농촌 여성의 교육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여자 외국어 학교 붐에 대해 "시집가서 남편의 낡은 옷을 기워 입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영어 교본을 가르쳐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90]

한편, 그는 빈민 출신 가라유키상에 대한 발언에서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208] 가라유키상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에 알선업자들의 해외취업 사기에 속거나 유괴를 당해 해외로 나가 성매매업에 종사한 여성들을 말한다.[209] 일본 정부는 유괴와 인신매매 사실을 묵인하고 뒤에서 암암리에 알선업자들의 활동을 부추기고 장려했는데,[210] 가라유키들의 외화벌이가 메이지 개혁 과업 수행과 일본 근대화 과정에 필요한 재원 조달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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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들은 돈벌이로 여자들을 해외에 보내는 것을 보고 유감과 함께, 비천한 추태에 나라의 체면을 더럽히는 행위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논하고 있지만, 인간사회에 창부는 어디든지 있는 것, 또한 식민지(각 나라 현지)에는 필요하므로 그들을 굳이 비난한다 해도, 이주의 장려와 함께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할 수 밖에 없다.[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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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연대론 ===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을 지지할 때까지 아시아 연대론, 소위 흥아론(興亜論)을 주장했다.[213] 그는 조선과 청을 일본보다 낮은 국가로 보았지만, 이들 국가가 힘을 키워 아시아를 부흥시켜 서구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13]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아시아 민중의 우매함을 탓하며, 그들과 함께 문명화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 주도의 독자적인 활동, 즉 구미 세력과 동등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탈아론'을 주장했다.[213] 다만, '탈아론'이라는 사설은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213]

후쿠자와 유키치는 동양의 낡은 관습에 얽매여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71] 그는 『학문의 수양』에서 "문명의 진보는, 천지 사이에 있는 유형의 사물이든 무형의 인사이든, 그 작용의 경위를 탐구하여 진실을 발명하는 데 있다."라고 주장하며, 서양 여러 나라의 문명 발전을 칭송했다.[71] 반면,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미신과 허황된 믿음에 갇혀 있고, 성현(공자 등)의 말에만 얽매여 발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71]

특히 청나라중국인이 서양화와 근대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72] 1881년, 후쿠자와는 중국인들이 100년 동안 서양과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느린 개혁 속도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72] 그는 중국인들이 자신의 나라가 광대하다는 것에 자만하여 다른 나라를 멸시하고, 수천 년 동안 음양오행과 같은 미신에 갇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72]

후쿠자와에게 청일전쟁은 "일본의 국권 확장을 위한 전쟁"이자 "서양 학문과 유교 사상의 전쟁"이었다.[73] 그는 풍도해전 직후인 1894년 7월 29일 시사신보에서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 "문명 개화의 진보를 추구하는 자와 방해하는 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74]

전쟁 승리 후, 후쿠자와는 야마구치 히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해 동안 서양식 문명주의를 주장해 왔는데, 평생 그 실제 상황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라며 기뻐했다.[75] 그는 이웃 나라 중국과 조선도 일본의 문명 속에 포함시키려 한다며, 평생의 즐거움이자 기대 이상의 일이라고 표현했다.[75] 그는 『복옹자전』에서 "한 나라 전체의 대세는 개진 진보의 한쪽으로, 차례차례 상진하여, 수년 후 그 형태로 나타난 것은 청일전쟁 등 관민 일치의 승리"라며, 전쟁의 승리를 통해 문명 개화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자평했다.[76][77]

하지만 후쿠자와의 본래 목적은 『국권론』, 『내안외경론』에서 나타나듯 서양 열강의 동진(東進)을 저지하는 것이었다.[78] 그는 일본의 군사력이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 열강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78] 그래서 이씨조선의 김옥균 등 아시아의 "개혁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79] 1881년 6월, 제자 고이즈미 신키치와 히하라 쇼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쿠자와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게이오기주쿠에 입학시키고 친근하게 대하며, 조선의 개혁을 돕겠다는 의지를 밝혔다.[80]

=== 탈아론 ===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그는 조선의 조정이 외세를 끌어들여 체제 유지에 급급하고, 흥선대원군 일파의 폐쇄성과 잔인성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을 지원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크게 좌절하였다.[214] 갑신정변의 실패와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이후, 후쿠자와는 '탈아론'을 발표하여 조선 조정의 부패와 잔인성을 비판하였다.[214]

탈아론에서 후쿠자와는 유럽미국 등 구미 열강이 아프리카동남아시아에서처럼 일본이 동아시아에 대한 세력 확대와 식민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화에 맞서 조선 개화인들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근대화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일본이 청과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는 주변 국가와 민족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화를 돕고, 이를 통해 일본이 구미 열강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14]

후쿠자와 유키치는 동양의 구습에 집착하며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학문의 수양』에서 "문명의 진보는, 천지 사이에 있는 유형의 사물이든 무형의 인사이든, 그 작용의 경위를 탐구하여 진실을 발명하는 데 있다."라고 언급하며 서양 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했다.[71] 특히 청나라중국인의 서양화·근대화에 대한 태만함을 비판하며, "중국인이 그 나라의 광대함을 자부하여 다른 나라를 멸시하고, 또 수천 년 동안 음양오행의 망설에 미혹되어 사물의 진리 원칙을 구하는 열쇠를 버린 죄이다."라고 비판했다.[72]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문야(文野)의 전쟁", "문명 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74] 전쟁 승리 후에는 야마구치 히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의 즐거움, 실로 기대 이상의 일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사상적 승리를 확신했다.[75] 복옹자전에서도 "돌이켜 세상을 보면 참기 어려운 일도 많은 것 같지만, 한 나라 전체의 대세는 개진 진보의 한쪽으로, 차례차례 상진하여, 수년 후 그 형태로 나타난 것은 청일전쟁 등 관민 일치의 승리, 즐겁다고도 고맙다고도 말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76][77]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본래 목적은 서양 열강의 동진 저지였으며, 일본의 군사력은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78] 그래서 이씨조선의 김옥균 등 아시아의 "개혁파"를 지원했다.[79] 고이즈미 신키치와 히하라 쇼조에게 보낸 서간에서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지원과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80]

=== 친구론 ===

후쿠자와 유키치는 좋은 친구를 사귈 것과 나쁜 친구를 배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탈아론(脫亞論)에서도 좋은 친구를 사귀고 그렇지 못한 친구는 피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웃나라라고 해서 딱히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고, 가까운 곳에 있다 하여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으며 좋지 못한 개인, 국가는 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이중잣대와 편견을 지적하며 조소하였다. 그는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내가 아니라면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214]" 라며, 자신의 고통은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수양이 덜된 인간, 비루하고 천한 인품을 가진 인간일 수록 사소한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려 하고, 다른사람에게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기 좋아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편이 더 낫다고 지적하였다.

후쿠자와는 학력이 낮다 하여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학력이 높아서 박사, 석사 학위를 받더라도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석사, 박사 학위를 자랑삼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고, 아집만 부리려 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 사회의 석사, 박사 학위가 자신을 치장하는 치장품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가쓰 가이슈(勝海舟)을 계속 비판했다. 무진전쟁(戊辰戰爭) 당시 시미즈 항에 정박 중이던 탈주 함대의 한 척인 간린마루(咸臨丸) 선원이 신정부군과 교전하여 도쿠가와 측 전사자가 방치된 사건(이후 시미즈 지로초(清水次郎長)가 매장하고 의로운 행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으로 인해, 메이지 시대가 되어 시미즈의 세이켄지(清見寺)에 전사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유키치는 가족 여행으로 시미즈에 놀러 갔다가 이 비문을 쓴 사람이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로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이 "食人之食者死人之事(사람의 밥을 먹는 자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즉 도쿠가와를 섬긴 자는 도쿠가와가를 위해 죽는다는 뜻)"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고 한다.[97]

『척아만의 설(瘠我慢の説)』이라는 공개 서한을 통해 가이슈와 에노모토 다케아키(둘 다 구막신이면서 메이지 정부에 봉직했다)를 논리 정연하게, 과거와 현재의 인용을 끌어들이면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는 공정한 입장을 강조하면서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 참고로 유키치는 가이슈에게 돈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한 적이 있다.[98] 당시 게이오 기주쿠의 경영은 서남전쟁(西南戰爭)의 영향으로 구 사쓰마 번 학생들의 제적

3. 1. 봉건질서에 대한 반감

후쿠자와는 봉건질서와 신분제도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신분제도 외에도 그는 문벌에 대해서도 심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는 어려서 학자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신분과 배경, 재력 때문에 좌절해야 했던 아버지 후쿠자와 하쿠스케의 좌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186]

봉건질서가 강고하게 자리잡은 시대에 하급 무사가문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탈아(脫我)’에 대한 욕망이 강렬했다. 그의 아버지 하쿠스케는 오사카의 갑부들과 교제하면서 번의 채무를 해결하는 일을 도맡았다. 유키치에 의하면 생부 하쿠스케는 '원래 책만 읽는 학자로 성장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주판을 들고 돈 계산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했으니, 아버지의 좌절감은 깊었으리라' 한다.[186] 보잘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 저명한 유학자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 형의 좌절은 그로 하여금 현재의 신분 제도 사회를 타파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민중을 경멸하였고 봉건제를 찬양하였으며 우민을 양산하는 유교 사상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199] 이는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우월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생애 초기에는 민중이나 우민을 옹호하는 유학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으나 현실을 깨닫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족의 비극이 영향을 준 것인지 귀족들을 은근히 부정적으로 묘사했으며 비민중적 정체성을 지닌 자본가들을 긍정적으로 보았다.[200]

福澤諭吉는 한학을 철저히 비판했다. 그 때문에 공자맹자 숭배자들로부터 증오를 샀지만, 그에 대해 諭吉는 자서전에서 “나는 단지 한학에 불신앙적일 뿐만 아니라 한학을 중시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썩은 유생들의 썩은 주장을 일소해 버리려고 젊은 시절부터 마음먹었다."라고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81]

『문명론개요』에서는 공자맹자를 “고대에 드물게 있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유교적인 “정교일치”의 결점을 지적했다.[82] 『학문의 すすめ』에서는 공자의 시대는 2000년 전의 야만스럽고 미개한 시대였으며, 천하의 민심을 유지하기 위해 속박하는 권력의 길밖에 없었지만, 후세에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시대를 고려하여 취사선택해야 한다고 비판한다.[83]

3. 2. 자유주의론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권위와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이는 그가 1860년대 구미 순방을 다녀온 뒤 신분 제도 폐지론을 주장한 것과 일맥상통하였다. 그의 저서 《학문의 권장》의 서두에도 이 내용이 있다. 후쿠자와는 만인이 평등함을 역설하였데, 다만 사람마다 그의 능력과 인격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떤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을 역설했다. 후쿠자와는 "인생은 연극과 같다. 훌륭한 배우가 걸인도 되고 삼류배우가 대감이 될 수 도 있다. 어쨌든 지나치게 인생을 거북하게 생각을 하지 말고 솔직하게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하라.[201]"고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 12년(1879년)의 『민정일신(民情一新)』에서 “현대에 국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권력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교체되는 것이며, 국민의 투표에 의해 권력자가 바뀌어 가는 영국의 정당정치·의회정치를 크게 참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개설 시기에 대해서는 “점진론에 찬성한다”고 밝히면서도, 지나치게 신중한 의견에 대해서는 “우리 일본은 개국 20년 만에 200년의 일을 이룬 것이 아닌가.", “인민 일반에 지덕이 생긴 후에야 국회를 연다는 설은, 1년 내내 하루도 궂은 날씨 없는 화창한 날씨를 기다려 여행을 계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도저히 출발 시기가 없을 것이다”, “현재에 있어 12년 전의 왕정복고를 아직 이르다고 말하지 않는 자는, 또 오늘날 국회 개설이 이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며 반박했다.[84]

그러나 유키치는 국내의 투쟁보다도 국외에 일본의 국권을 확장하는 것을 더 중시하여 “내안외경(内安外競)”, “관민조화(官民調和)”를 자신의 주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는 급진파에는 결코 동조하지 않고, 그들을 “다민권론자(駄民權論者)”, “헤코오비 쇼세이(ヘコヲビ書生)”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개가 짖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85] 『시사소언(時事小言)』에서 유키치는 “정부는 국회를 열어 국내의 안녕을 도모하고, 뜻을 모아 외적으로 국권을 펼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86]

또한 유키치가 메이지 14년(1881년)에 런던에 체류하고 있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학생 고이즈미 신키치(小泉信吉)에게 보낸 편지에는 “각지의 연설, 소위 헤코오비 쇼세이(ヘコヲビ書生) 무리들, 그 풍속이 매우 좋지 않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현관(県官)을 욕하는 것은 지나치고, 극도에 이르면 무쓰히토(ムツヒト)(=메이지 천황) 등등을 발언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정말 연설도 한도를 넘어 매우 나쁜 징조이다. 이렇게 되면 방치할 수 없는 일이므로, 조금씩 내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으며, 황실에 대한 불경한 태도 등 자유민권론자들의 무례함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87]

3. 3. 학문관

그는 독립을 위해서라도 힘써 배워 익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서양 열강으로부터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학문을 통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198] 그는 실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문이란 그저 어려운 글자를 알고 와카를 즐기고 시를 짓는 등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학이다.[198]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론이 거창하더라도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학문은 쓸모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편지를 쓰는 법, 장부 처리하는 법, 주판알 놓는 법 등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지리학, 역사, 경제학, 수신학 등 배울 것이 많다고 강조하였다.[198]

또 다른 학문의 목적은 정부로부터 인민의 독립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학문의 권장》에서“인민들이 폭정을 피하고 싶으면 학문에 정진하여 재주와 덕행을 높임으로써 정부와 동등하게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198] 그는 스스로 관리로의 등용을 거부하고, 대신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거나 신문을 간행하는 등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198] 그는 타인 혹은 정부, 또는 외세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스스로 깨닫고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福澤諭吉는 한학을 철저히 비판했다. 그 때문에 공자맹자 숭배자들로부터 증오를 샀지만, 그에 대해 諭吉는 자서전에서 “나는 단지 한학에 불신앙적일 뿐만 아니라 한학을 중시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썩은 유생들의 썩은 주장을 일소해 버리려고 젊은 시절부터 마음먹었다."라고 밝혔다. "이렇게 내가 한학을 적대시한 것은, 지금 개국의 시기에 낡고 썩은 한학의 주장이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서양의 문명이 결코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굳게 믿었고, 그들을 구해내 내가 믿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모든 힘을 다 쏟았다. 내 진심을 말하자면, 일본 전국의 한학자들이 다 와도 내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는 각오였다.”라고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81]

『문명론개요』에서는 공자맹자를 “고대에 드물게 있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유교적인 “정교일치”의 결점을 지적했다.[82] 『학문의 すすめ』에서는 공자의 시대는 2000년 전의 야만스럽고 미개한 시대였으며, 천하의 민심을 유지하기 위해 속박하는 권력의 길밖에 없었지만, 후세에 공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시대를 고려하여 취사선택해야 하며, 2000년 전에 행해진 가르침을 그대로 현재에 행하려는 자는 사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또 서양의 여러 대가들은 잇따라 새로운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을 문명으로 이끌고 있지만, 이는 그들이 고대인이 확정한 주장에도 반박하고, 세상의 관습에도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논했다.[83]

3. 4. 문명관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이 지선(至善)이 아니라 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진보의 순간순간을 일컫는 것이라 했다.[71] 건강하다고 해도 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듯이 문명화되었다 하여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문명화가 곧 정답은 아니고 다만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일 뿐이라고 보았다.[71]

그는 문명이 대세이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보았다. “세계의 교류가 나날이 빨라지고 서양문명이 동양으로 전파되어 그 이르는 곳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할 것 없이 모두 감화되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71] 서양문명이 온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피하기 힘든 형세이며, 동양의 민족은 저항할 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도쿄 사람이 나가사키로부터 번져온 홍역을 치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비유했다.[71]

후쿠자와는 어떤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계속 발전, 문명화되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양한 수사학을 사용하면서 문명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님을 역설했다. 어떤 화살을 쓰건 표적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듯, 강이 어떤 모양으로 흐르건 결국 바다로 모여들듯, 어떤 제도를 어떻게 활용하여 ‘안락과 품위의 진보’를 이룰지는 저마다 놓인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71] 생활이 편리해지고 윤택해진다 하여 그것이 정답은 아니며, 편리한 삶이 전적으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고 전망했다.[71]

후쿠자와는 동양의 구습에 집착하며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71] 특히 청나라중국인의 서양화·근대화에 대한 태만함을 비판하며, 그들이 100년 동안 서양과 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느린 것은 중국인이 광대한 영토를 자부하며 다른 나라를 멸시하고, 수천 년 동안 음양오행의 망설에 미혹되어 사물의 진리 원칙을 구하는 열쇠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72]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권 확장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서양 학문과 유교의 사상 전쟁"이라고 보았다.[73] 풍도해전 직후에는 "문야(文野)의 전쟁", "문명 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74]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야마구치 히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 주장해 온 서양식 문명주의의 실제 상황을 보게 되었고, 이웃 나라 중국조선도 문명 속에 포괄하려 한다는 확신을 표명했다.[75]

하지만 후쿠자와의 본래 목적은 서양 열강의 동진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78] 일본의 군사력은 일본 한 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78] 그렇기 때문에 이씨조선의 김옥균 등 아시아의 "개혁파"를 지원했다.[79] 고이즈미 신키치와 히하라 쇼조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조선인 유학생을 게이오기주쿠에 입학시키고 친근감을 가지고 접하며, 조선의 개화를 돕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80]

3. 5. 인간관

그는 인간의 이중잣대와 편견을 지적하며 조소하였다. 그는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내가 아니라면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202]" 라며, 자신의 고통은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수양이 덜된 인간, 비루하고 천한 인품을 가진 인간일 수록 사소한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려 하고, 다른사람에게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기 좋아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편이 더 낫다고 지적하였다.

후쿠자와는 학력이 낮다 하여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학력이 높아서 박사, 석사 학위를 받더라도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석사, 박사 학위를 자랑삼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고, 아집만 부리려 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 사회의 석사, 박사 학위가 자신을 치장하는 치장품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3. 6. 종교관

그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서라도 종교는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권리를 부여해봤자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판단력이 결여된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믿을 뿐이며 그런 인간에게는 애당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바보와 병신들에게는 종교가 꼭 맞는 구색'이라고 냉소하기도 했다.[203]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 자신은 무신론자였다.[203]

3. 7. 여성관

후쿠자와 유키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남녀 차별 없는 동등한 교육 기회 제공, 부부간 평등,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을 주장했다.[204] 그는 모리 아리노리의 파격적인 서양식 결혼식에 참석하여 증인 겸 사회를 보았는데, 이 결혼식은 전통적인 혼례식을 거부하고 양장 차림의 신부와 소례복을 입은 신랑이 서로 팔짱을 끼고 치러졌다.[205] 모리 아리노리는 축첩 폐지, 일부일처제, 부부 평등, 결혼에 따른 권리와 의무에 대해 부부간 상호 준수를 주장한 개혁적 관료였다.[206][207] 당시 언론은 이 결혼식을 '신식 부부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206][207]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의 여성 해방 사상을 일본에 가장 먼저 소개한 그는 "인륜의 근본은 부부이다"라며 일부다처와 을 비난하고, 여성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하며,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간이므로 동일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88] 자신의 딸에게도 어릴 때부터 예술을 가르쳤으며, 하인리히 폰 지볼트 부인에게 예술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론에 큰 영향을 받아, 『학문의 권유』에서 그의 선구적인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89] 1874년에 설립된 게이오기주쿠 유치원은 1877년 이후 한동안 남녀 공학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근대화 이후 일본 교육에서 남녀 공학의 매우 드문 초기 사례였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는 농촌 여성의 교육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여자 외국어 학교 붐에 대해 "시집가서 남편의 낡은 옷을 기워 입는 가난한 여성들에게 영어 교본을 가르쳐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90]

한편, 그는 빈민 출신 가라유키상에 대한 발언에서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208] 가라유키상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에 알선업자들의 해외취업 사기에 속거나 유괴를 당해 해외로 나가 성매매업에 종사한 여성들을 말한다.[209] 일본 정부는 유괴와 인신매매 사실을 묵인하고 뒤에서 암암리에 알선업자들의 활동을 부추기고 장려했는데,[210] 가라유키들의 외화벌이가 메이지 개혁 과업 수행과 일본 근대화 과정에 필요한 재원 조달에 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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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들은 돈벌이로 여자들을 해외에 보내는 것을 보고 유감과 함께, 비천한 추태에 나라의 체면을 더럽히는 행위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논하고 있지만, 인간사회에 창부는 어디든지 있는 것, 또한 식민지(각 나라 현지)에는 필요하므로 그들을 굳이 비난한다 해도, 이주의 장려와 함께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할 수 밖에 없다.[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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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아시아 연대론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을 지지할 때까지 아시아 연대론, 소위 흥아론(興亜論)을 주장했다.[213] 그는 조선과 청을 일본보다 낮은 국가로 보았지만, 이들 국가가 힘을 키워 아시아를 부흥시켜 서구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13]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고 아시아 민중의 우매함을 탓하며, 그들과 함께 문명화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 주도의 독자적인 활동, 즉 구미 세력과 동등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탈아론'을 주장했다.[213] 다만, '탈아론'이라는 사설은 후쿠자와 유키치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213]

후쿠자와 유키치는 동양의 낡은 관습에 얽매여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71] 그는 『학문의 수양』에서 "문명의 진보는, 천지 사이에 있는 유형의 사물이든 무형의 인사이든, 그 작용의 경위를 탐구하여 진실을 발명하는 데 있다."라고 주장하며, 서양 여러 나라의 문명 발전을 칭송했다.[71] 반면,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미신과 허황된 믿음에 갇혀 있고, 성현(공자 등)의 말에만 얽매여 발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71]

특히 청나라중국인이 서양화와 근대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72] 1881년, 후쿠자와는 중국인들이 100년 동안 서양과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느린 개혁 속도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72] 그는 중국인들이 자신의 나라가 광대하다는 것에 자만하여 다른 나라를 멸시하고, 수천 년 동안 음양오행과 같은 미신에 갇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72]

후쿠자와에게 청일전쟁은 "일본의 국권 확장을 위한 전쟁"이자 "서양 학문과 유교 사상의 전쟁"이었다.[73] 그는 풍도해전 직후인 1894년 7월 29일 시사신보에서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 "문명 개화의 진보를 추구하는 자와 방해하는 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74]

전쟁 승리 후, 후쿠자와는 야마구치 히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해 동안 서양식 문명주의를 주장해 왔는데, 평생 그 실제 상황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라며 기뻐했다.[75] 그는 이웃 나라 중국과 조선도 일본의 문명 속에 포함시키려 한다며, 평생의 즐거움이자 기대 이상의 일이라고 표현했다.[75] 그는 『복옹자전』에서 "한 나라 전체의 대세는 개진 진보의 한쪽으로, 차례차례 상진하여, 수년 후 그 형태로 나타난 것은 청일전쟁 등 관민 일치의 승리"라며, 전쟁의 승리를 통해 문명 개화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자평했다.[76][77]

하지만 후쿠자와의 본래 목적은 『국권론』, 『내안외경론』에서 나타나듯 서양 열강의 동진(東進)을 저지하는 것이었다.[78] 그는 일본의 군사력이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 열강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78] 그래서 이씨조선의 김옥균 등 아시아의 "개혁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79] 1881년 6월, 제자 고이즈미 신키치와 히하라 쇼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쿠자와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게이오기주쿠에 입학시키고 친근하게 대하며, 조선의 개혁을 돕겠다는 의지를 밝혔다.[80]

3. 9.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그는 조선의 조정이 외세를 끌어들여 체제 유지에 급급하고, 흥선대원군 일파의 폐쇄성과 잔인성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을 지원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크게 좌절하였다.[214] 갑신정변의 실패와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이후, 후쿠자와는 '탈아론'을 발표하여 조선 조정의 부패와 잔인성을 비판하였다.[214]

탈아론에서 후쿠자와는 유럽미국 등 구미 열강이 아프리카동남아시아에서처럼 일본이 동아시아에 대한 세력 확대와 식민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화에 맞서 조선 개화인들도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근대화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일본이 청과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는 주변 국가와 민족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화를 돕고, 이를 통해 일본이 구미 열강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14]

후쿠자와 유키치는 동양의 구습에 집착하며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학문의 수양』에서 "문명의 진보는, 천지 사이에 있는 유형의 사물이든 무형의 인사이든, 그 작용의 경위를 탐구하여 진실을 발명하는 데 있다."라고 언급하며 서양 문명의 우수성을 강조했다.[71] 특히 청나라중국인의 서양화·근대화에 대한 태만함을 비판하며, "중국인이 그 나라의 광대함을 자부하여 다른 나라를 멸시하고, 또 수천 년 동안 음양오행의 망설에 미혹되어 사물의 진리 원칙을 구하는 열쇠를 버린 죄이다."라고 비판했다.[72]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문야(文野)의 전쟁", "문명 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는 자의 싸움"이라고 정의했다.[74] 전쟁 승리 후에는 야마구치 히로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생의 즐거움, 실로 기대 이상의 일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사상적 승리를 확신했다.[75] 복옹자전에서도 "돌이켜 세상을 보면 참기 어려운 일도 많은 것 같지만, 한 나라 전체의 대세는 개진 진보의 한쪽으로, 차례차례 상진하여, 수년 후 그 형태로 나타난 것은 청일전쟁 등 관민 일치의 승리, 즐겁다고도 고맙다고도 말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76][77]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본래 목적은 서양 열강의 동진 저지였으며, 일본의 군사력은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동양 여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78] 그래서 이씨조선의 김옥균 등 아시아의 "개혁파"를 지원했다.[79] 고이즈미 신키치와 히하라 쇼조에게 보낸 서간에서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지원과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80]

3. 10. 친구론

후쿠자와 유키치는 좋은 친구를 사귈 것과 나쁜 친구를 배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탈아론(脫亞論)에서도 좋은 친구를 사귀고 그렇지 못한 친구는 피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웃나라라고 해서 딱히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고, 가까운 곳에 있다 하여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으며 좋지 못한 개인, 국가는 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이중잣대와 편견을 지적하며 조소하였다. 그는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내가 아니라면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214]" 라며, 자신의 고통은 고통스럽게 여기면서 타인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인간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수양이 덜된 인간, 비루하고 천한 인품을 가진 인간일 수록 사소한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려 하고, 다른사람에게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기 좋아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싶다면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편이 더 낫다고 지적하였다.

후쿠자와는 학력이 낮다 하여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다만 학력이 높아서 박사, 석사 학위를 받더라도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석사, 박사 학위를 자랑삼아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고, 아집만 부리려 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 사회의 석사, 박사 학위가 자신을 치장하는 치장품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가쓰 가이슈(勝海舟)을 계속 비판했다. 무진전쟁(戊辰戰爭) 당시 시미즈 항에 정박 중이던 탈주 함대의 한 척인 간린마루(咸臨丸) 선원이 신정부군과 교전하여 도쿠가와 측 전사자가 방치된 사건(이후 시미즈 지로초(清水次郎長)가 매장하고 의로운 행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으로 인해, 메이지 시대가 되어 시미즈의 세이켄지(清見寺)에 전사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유키치는 가족 여행으로 시미즈에 놀러 갔다가 이 비문을 쓴 사람이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로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이 "食人之食者死人之事(사람의 밥을 먹는 자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즉 도쿠가와를 섬긴 자는 도쿠가와가를 위해 죽는다는 뜻)"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고 한다.[97]

『척아만의 설(瘠我慢の説)』이라는 공개 서한을 통해 가이슈와 에노모토 다케아키(둘 다 구막신이면서 메이지 정부에 봉직했다)를 논리 정연하게, 과거와 현재의 인용을 끌어들이면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는 공정한 입장을 강조하면서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 참고로 유키치는 가이슈에게 돈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한 적이 있다.[98] 당시 게이오 기주쿠의 경영은 서남전쟁(西南戰爭)의 영향으로 구 사쓰마 번 학생들의 제적 등으로 좋지 않았고, 구막신에게 비교적 쉽게 차별 없이 융통성 있게 대했던 가이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가이슈는 유키치가 정부로부터 1만 4천 평에 달하는 넓은 미타의 좋은 땅을 하사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땅을 매각해도 (게이오 기주쿠 경영에) 부족하면 도와주겠다고 답했지만, 유키치는 미타의 땅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매각하지 않았다. '瘠我慢の説' 발표는 이후의 일이다. 또한 『후쿠옹자전(福翁自伝)』에서 유키치는 빚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99]

가이슈도 유키치와 마찬가지로 외모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잘 농담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우에노 세이요켄의 메이로쿠샤(메이지 유신)에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고 박쥐 우산을 들고 나타난 가이슈가 "나에게 군함 3척 정도 빌려주지 않겠나? 일본이 가난해졌으니 중국에 강도질이라도 하러 가려고 한다. 상대가 시끄럽게 굴면, 저 녀석은 머리가 이상하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된다. 마음껏 돈을 벌어오겠다. 자, 후쿠자와 씨, 돈을 벌면 조금 나눠주겠다"라고 놀렸다고 한다.[100]

그러나 가이슈는 유키치를 학자로서 존경했고, 자신이 배운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아들 사쿠마 가쿠지로(佐久間恪二郎)이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열남이자 양자인 가쓰 세이(勝精)을 게이오 기주쿠에 입학시키는 등 잘 챙겨주는 면도 있었다.

3. 11. 조선에 대한 관점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후원자였다.[186] 그는 당시 서양인들이 ‘미개한 야만’을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봤다.[214] 강화도 조약(1875)을 앞두고는 “스스로 조정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다.[214] 그는 1880년부터 파견된 조선의 청년들을 보고 조선의 개혁에 기대를 품게 되었으며, 특히 김옥균서재필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의 개혁에 대한 그의 기대는 곧 냉소와 증오로 변하게 된다.

1880년부터 그는 일본을 방문하는 조선인 청년에게 부국강병론과 신분 제도, 문벌 특권층의 타파 등을 역설하였다. 그는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 등의 청년들이 조선을 개혁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1881년 조선은 일본의 개화 문명을 배우겠다며 젊은 관료들이 참여한 ‘조사시찰단’을 파견했다.[215] 후쿠자와 유키치가 발행하는 지지신보(時事新報) 등 일본 신문에 조선의 수구당과 개화당의 갈등이 자주 소개되는 등 조선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던 상황이었다.[215] 후쿠자와는 일본이 선도자가 되어 조선중국, 베트남의 개혁과 계몽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이상론에 따라 조선의 춘향전, 별주부전, 흥부전 등의 작품들을 자신의 지지신보와 다른 잡지 등을 통해 일본에 적극 소개하기도 했다.

후쿠자와의 권고로 니카라이 도스이는 조선의 소설 춘향전을 필두로 조선의 전설들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아사히 신문에 기고했다. 1882년 6월 ‘계림정화 춘향전’을 아사히 신문에 20회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는 일본에서 발표된 한글 고전문학 번역본의 효시로 손꼽힌다.[215] 나카라이는 '계림정화 춘향전'의 역자 서문에서 “조선의 풍토와 인정에 대한” 정보제공을 꾀했고, 이것이 “통상무역을 원활하게 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215]

후쿠자와는 일본이 주변국의 개화와 개혁을 지원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조선국은(…) 미개하므로 이를 유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 인민 정말로 완고하고 고리타분하므로 이를 깨우치고(…) 끝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 진보를 도와야 한다."(1882.3)라고 주장하였다.[216] 그는 갑신정변이 터지자 프랑스 잠수함에 일본 자유당의 일본 민병대라도 지원하자고 일본 조정과 주일 프랑스 공사관에 건의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된다.

갑신정변 관련자들의 처형과 도피 직후 그는 조선독립당의 처형(朝鮮独立党の処刑)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하였다. 1885년 3월 16일에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며 어떤 나라가 조선을 점령하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든 당시의 조선왕국은 멸망하는 것만이 조선 백성들을 속박에서 풀어줄 수 있는 지름길로 내다봤다.

갑신정변 당시 관련자와 가족에 대한 연좌제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결국 그는 부패하고 견고한 조선 체제의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조선 인민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203]'이라고 냉소하게 된다.

한편 그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이동인,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최남선, 이광수 등 쟁쟁한 구한말 한국 지식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217]

그는 동양의 구습에 집착하며 서양 문명을 거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특히 청나라중국인의 서양화·근대화에 대한 태만함을 비판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국권 확장을 위한 전쟁"과 동시에 "서양 학문과 유교의 사상 전쟁"이기도 했다.[73]

3. 12. 후쿠자와 유키치의 7심훈

후쿠자와 유키치는 7개의 가르침을 남겼다. 이는 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시대정신(時代精神)으로 인식되었으며, 근현대 일본의 명언이자 잠언의 하나로 알려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작자불명의 위작이다.[218] 「후쿠자와 심훈」, 「후쿠자와 유키치옹 심훈」, 「후쿠자와 칠훈 칠칙」, 「유키치 심훈」, 「심훈」, 「칠칙」 등으로 불린다.

#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일생을 바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간으로서 교양이 없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타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물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219]

후쿠자와 유키치는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을 왜곡하면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인간관계는 비참한 인간관계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항상 참되고 진실하고 성실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며 최종 결정은 자기 스스로 내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4. 평가

후쿠자와 유키치


엔 1만 엔 지폐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 오시키리 가쓰조(押切勝造)의 작품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높은 지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평생 평범한 일본 시민으로 남았다. 사망 당시 그는 근대 일본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존경받았다. 그의 모든 저술은 일본 사회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불평등 조약 체결 후 일본 국민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정부의 약점과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을 막지 못한 무능력 속에서 발표되었다. 후쿠자와는 일본 국민들이 미국과 유럽의 강압적인 조약과 제국주의에 대해 분개해야 할지, 아니면 서구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시기에 글을 썼다. 후쿠자와는 근대화를 지지하는 세력의 궁극적인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후쿠자와는 1984년과 2004년 발행된 1만 엔 지폐에 등장했으며,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과 비교되기도 한다. 2004년 시리즈가 발행될 때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인물이 변경되었지만, 후쿠자와는 1만 엔 지폐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초상은 2024년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교체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교육이 일본 교육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의회 토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1860년대 초, 후쿠자와 유키치는 유럽미국을 여행했다. 그는 일본의 문제는 수학과 과학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이라고 믿었다.[7] 또한 이들은 "독립의 개념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일본 보수파는 후쿠자와의 서구 교육에 대한 견해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보수파의 가족 친구였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후쿠자와는 나중에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고 말했다.[7]

그의 모든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독립"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국가 독립이 서구 사회의 기본틀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과 개인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후쿠자와는 서구 학문을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더욱 교육을 받으면 공공 도덕이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다.[1]

평산 요시(平山洋)는 이타(井田)의 분석을 바탕으로 현행 전집 7권까지는 서명이 있는 저서로 발표된 것에 반해, 8권 이후의 『時事新報論集』(시사신보론집)는 대부분이 무명(無署名)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이쇼 시대의 『후쿠자와 전집』(1925-26년)과 쇼와 시대의 『속 후쿠자와 전집』(1933-34년)의 편찬자였던 제자 이시카와 칸메이(石河幹明)가 『시사신보』(時事新報)에서 선정한 것을 그대로 이어서 수록했다고 밝혔다. 또한 현행판 『전집』(1958-64년) 16권에는 유길(諭吉) 사후 몇 달 후에 게재된 논설이 6편 수록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141]

중국에서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좋지 않아 게이오 출신자들 사이에서는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다. 게이오대학 문학부 출신 히라야마 요는 "중국인들의 후쿠자와 비판의 목소리가 커서 혼란스럽지만, 그 주장에는 거의 다양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게이오대학 법학부 출신 오가와하라 마사미치는 "2010년 11월 베이징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후쿠자와의 문화 사상이나 종교 사상 등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동 대학의 저명한 교수로부터 "후쿠자와에게는 『탈아론』 이외의 측면도 있군요"라고 순수하게 놀라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144]

또한, 후쿠자와의 대외 사상에 가장 비판적인 야스카와 토시노스케의 저서가 최근 중국에서 활발하게 번역되고 있다.[145]

게이오기주쿠 후쿠자와 연구센터 객원 연구원[146] 구 젠잉의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 후쿠자와는 오히려 뛰어난 계몽 사상가,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인식되었다.[147]

#또한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주목하여 일본에 성공의 비결을 배우려는 경향이 생겼다. 후쿠자와도 일본 "근대화"를 지탱한 사상가이자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지며, 그의 "탈아론"을 재평가하는 시각도 등장했다.[148]

#결코 후대의 후쿠자와=탈아론자라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도쿄대학 출신 마루야마 마사오는 중국에서의 후쿠자와 인물상에 대한 주요 반론으로 다음 5가지를 제시한다.

# "탈아"는 후쿠자와의 키워드가 아니었다.[149]

# 후쿠자와가 1885년에 단 한 번 "탈아"라는 글자를 사용하여 쓴 사설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를 배경으로 집필되었다. 일시적인 감정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150]

# "탈아"라는 말은 "흥아"라는 말에 대한 반어적 표현으로 생각된다.[151]

# 후쿠자와의 사상에서는 시종일관 정부(정권)와 국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입장을 취했고, 정부의 흥망과 국민의 흥망을 엄격하게 별개의 문제로 다루는 생각이 관철되었다. 공격의 대상은 중국·조선의 국민이 아니라, 결국 청나라·이씨조선의 정부이다.[152]

# "탈아입구"라는 표현이 후쿠자와의 모든 사상의 키워드로 세계에 유통되는 것은 1950년대 이후의 경향이다.[153]

이등휘는 강연 「학문의 수양과 일본 문화의 특징」에서 푸코쿠론에 대해, 유럽과 미국을 일본에 소개할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수양』을 저술함으로써 사상 투쟁을 벌이고, 일본 문화의 새로운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일본 문화의 전통을 잃지 않고 유지했다고 평가하고 있다.[154]

대한민국에서 탈아론을 인용한 연구 논문이 등장하는 것은 1970년 이후이며,[155] 1980년대 일본에서 역사 교과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 논리로 재인식되어 현재는 한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160]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원한 이조의 개화파는, 그 중심에 있던 박영효가 일제 강점기에 작위를 얻는 등의 우대를 받았고, 김옥균은 사후에 작위를 받은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친일파로 간주되어 유키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북한이 더 높고,[157] 그 영향을 받아 역사 연구가인 강재언이 1974년(쇼와 49년)에 「김옥균의 일본 망명」을 발표하였으며,[158] 유키치에 대해 "최근 연구에서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듯이, 유키치 사상에서의 국권론적 측면"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당시 일본에서는 유키치를 자유주의자로서가 아니라 국권론자로 받아들이고 침략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높았지만, 강재언은 유키치에게 양면성을 보고, "일본을 맹주로 하는 침략론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개화파에 대한 지원에는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159]

현재 한국에서 매우 일반적인 유키치에 대한 이미지는 일본의 교과서 문제를 받아들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극도로 부정적인 것이다.[160]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유키치는 흔히 정한론자로 여겨지며, 탈아론 등 유키치의 조선 관련 시사 논설이 쓰였던 당시 상황은 고려되지 않고, 신공황후 전설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일본인의 침략 사상의 흐름 속에서 인식되고 있다. 1990년대 무렵부터 재일 학자들의 저서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예로 1996년(헤이세이 8년) 한계옥의 『「정한론」의 계보』,[161] 2006년 금병동[162]의 『일본인의 조선관 그 빛과 그림자』[163]를 들 수 있다.

1990년대 한국의 이러한 상황이 일본 측 교과서 문제에서 유키치의 침략성을 보는 시각과 계속 연동되고 있다는 점은, 안카와 토시스케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인식』의 「후기」에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타카시마 노부키가 1992년(헤이세이 4년)에 집필한 교과서에서 일본인의 아시아 차별과 관련하여 탈아론을 인용하여 검정에서 부적절하다고 판정되어 소송이 발생하였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시민 운동에 참여했던 안카와는 이 소송을 계기로 유키치를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을 짓밟고 파탄으로 몰아넣은 우리 민족 전체의 적"으로 여기는 한국의 논조에 공감하여 30년 만에 유키치 연구에 다시 착수했다.

키네부치 노부오는 안카와와 달리 『후쿠자와 유키치와 조선』에서 "탈아론의 선언을 너무 주목한 나머지 (유키치는) 아시아와의 연대에서 침략으로 이후 전환했다는 오해가 생겼다"고 하면서 유키치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1997년(헤이세이 9년) 시점에서 "이조의 적폐를 통렬히 비난하고, 종종 거침없는 표현을 즐겨 쓴 유키치의 이름이 이웃 나라에서는 불쾌한 감정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라고 하여 한국의 감정적인 반발에 이해를 보이고 있다.[164]

한편, 1990년대 한국에서 유키치 연구에 착수한 연구자들이 여러 명 등장했다는 점을 임종원은 언급하고 있다.[165] 임종원의 소개에 따르면, 그 관점도 일본에서의 "자유주의자인가 제국주의자인가"라는 논쟁을 계승하는 것, 조선의 개화주의자와 유키치를 비교하는 것, 유키치와 조선 개화파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 유키치의 반유교론을 비판 분석하는 것 등 다양하며,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학문적인 노력과 병행하여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유키치에 대한 일정 부분 이해가 신문 논조에도 나타나기 시작한다.[166] 2004년(헤이세이 16년) 전후에 등장한 뉴라이트는 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를 높이 평가하고, 일제 강점기의 근대화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며, 기존의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난 역사관을 제창하는 등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같은 해 임종원에 의해 『福翁自伝』이 한국어로 번역·출판된 것도 한국에서 유키치에 대한 이미지에 긍정적인 색채를 더했다. 한국 주요 일간지는 모두 호의적인 서평을 내놓았고, 한겨레는 "한겨레가 뽑은 올해의 책" 번역서 중 하나로 소개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키치에게 침략성을 보는 기존의 견해는 여전히 강하며, 일본에서도 탈아론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경향이 현저하다.[160] 2005년, 놀리미츠 오오니시 뉴욕 타임스 도쿄 지국장은 "일본인의 혐한 감정의 근저에는 유키치의 탈아론이 있다"[167]고 했다. 도쿄발 이러한 보도의 영향인지, 중앙일보는 다시 유키치를 "아시아를 멸시하고 침략을 긍정한 혐한의 아버지이자 우익의 원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68][169]

또한, 이나바 쓰기오는 한국에서 유키치의 침략성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고 논하며,[170] 한국에서 유키치의 이미지는 한국 국내 정치 상황과 함께, 한일 외교 관계, 여론의 주고받기에 따라 크게 흔들리고 있다.

4. 1. 긍정적 평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 일본을 주권적 국민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토대를 만든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된다.[220] 그는 개인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해 서양 문명의 도입이 급선무라고 하며, 영국의 입헌정체 실천을 주장하였다.[221] 후쿠자와의 대표적인 명언은 ‘독립자존’으로 그의 계명이기도 했다. 이는 심신을 독립시키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며, 품위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서양사정》, 《문명론의 개략》 등의 저서를 통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중화사상유교 정신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후쿠자와는 복식부기와 근대 보험 제도를 일본에 소개했다. 《서양안내서》에서 “재난청합”이라는 표현으로 생명보험, 화재보험, 손해보험을 설명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관계 진출 권유를 거절하고 언론과 대학을 세워 일본 정신의 근대화를 위한 계몽사상가로 활동하여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222] 1882년 창간한 (時事新報일본어, "시사신보")는 국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회에 대한 정부 견해를 전달하고, 국민들에게 자기 계몽과 온건한 정치적 태도를 장려했다. 그는 화학, 예술, 군사, 사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서적과 저널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서구 사회, 자신의 철학, 변화 등을 설명하는 책과 저널을 직접 출판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으로, 평생 평범한 시민으로 남았다. 사망 당시 그는 근대 일본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불평등 조약 체결 후 일본 국민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력,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 속에서 일본 국민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근대화를 지지하는 세력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1984년과 2004년에 발행된 1만 엔 지폐에 그의 초상이 등장했으며,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과 비교되기도 한다. 2024년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초상이 교체되었다. 후쿠자와는 서구 교육이 일본 교육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지만, 의회 토론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문제는 수학, 과학의 저평가와 "독립의 개념 부족"에 있다고 보았다.[7] 그는 국가와 개인의 독립을 위해 서구 학문을 주장했고, 교육을 통해 공공 도덕이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다.[1]

2000년 아사히 신문의 “이 1000년・일본의 정치 리더 독자 인기 투표”에서 7,863표 중 330표를 얻어 7위에 랭크되며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142] 이등휘는 『학문의 수양』을 통해 사상 투쟁을 벌이고, 일본 문화의 새로운 측면을 강조하면서도 전통을 유지했다고 평가했다.[154]

하지만, 대한민국과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부르짖은 탈아론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오늘날 일본 우익의 뿌리로 평가된다. 그는 1885년 《시사신보》 사설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탈피를 주장하며 “중국과 조선을 클리어(청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220] “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4. 2. 부정적 평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의 '탈아' 이론은 일본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이끌어 결국 원폭 피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22] 특히, '아시아의 악우를 배척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경시하고 침략을 긍정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131]

태평양 전쟁 이후, 하토리 요시스케, 토오야마 시게키 등의 역사학자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을 재조명하며 이러한 비판을 제기했다.[131] 마루야마 마사오는 하토리 요시스케의 유키치 해석을 「논적」으로 여겼다고 한다.[132] 2001년에는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안카와 토시노스케의 논설과 히라야마 히로시의 반론으로 인해 이른바 「안카와·히라야마 논쟁」이 시작되었다.[133][134][135]

히라야마는 이다 신야의 문헌 분석을 바탕으로[136],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멸시가 이시카와 간메이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137] 히라야마에 따르면, 유키치는 중국이나 조선 정부를 비판했을 뿐, 민족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 병사를 돼지에 비유한 논설 등, 차별주의적 내용의 것은 이시카와의 논설이며, 전집 편찬 시 유키치의 것으로 속여 수록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무명 논설의 집필자를 문헌학(텍스트 크리티크)적으로 확정하지 않고서는 결론을 내기 어렵다.[138]

후쿠자와는 서구 교육이 일본 교육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지만, 의회 토론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문제는 수학, 과학의 저평가와 "독립의 개념 부족"에 있다고 보았다.[7] 그는 서구 학문을 통해 사람들이 교육을 받으면 공공 도덕이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다.[1]

후쿠자와 유키치는 백인을 극찬하는 한편, 황색 인종에 대해서는 “애써 노력하더라도 재능이 부족하여 사물의 발전이 매우 더디다”라고 평가했으며, 그 외의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야만인이라고 평가했다.

{{인용문|위와 같이 세계 인구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각 인종의 성정과 풍속의 대강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백색 인종: 피부가 곱고, 머리카락은 가늘고 길며, 두정골이 크고 이마가 높으며, 용모와 골격이 모두 아름답다. 그 성정은 총명하여 문명의 극치에 이를 수 있는 성질이 있다. 이를 인종 중 최고로 친다. 유럽 전역, 아시아 서부,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아메리카에 거주하는 백인은 이 종류의 사람이다.

(2) 황색 인종: 피부색이 누르고 기름과 같으며, 머리카락은 길고 검으며 곧고 뻣뻣하다. 머리 모양은 약간 네모나고 이마가 낮으며, 턱뼈는 평평하고 넓고, 코는 짧고 눈은 가늘며, 게다가 눈꼬리가 비스듬히 위로 올라간다. 그 성정은 고난을 잘 참고 애써 노력하더라도 재능이 부족하여 사물의 발전이 매우 더디다. 중국, 핀란드(러시아령 북서부 지역), 라플란드(같은 곳, 핀란드 북부 지역) 등의 주민은 이 종류의 사람이다.

(3) 적색 인종: 피부는 적색과 갈색을 띠고 구리와 같으며, 검은 머리카락은 곧고 길다. 두정골이 작고 턱뼈가 높으며 이마는 낮고 입은 넓으며, 눈빛은 어둡고 깊으며, 코 모양은 뾰족하고 굽어서 갈고리 같고 매의 부리 같다. 체격은 크고 건장하며, 성정은 사나워 싸움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항상 사라지지 않는다. 북미와 남미의 토착민은 이 종류의 사람이다. 다만 이 인종은 백색 인종의 문명에 따르면서 점차 쇠퇴하고 인구가 날마다 감소한다고 한다.

(4) 흑색 인종: 피부색이 검고 곱슬머리는 양털을 묶은 것 같으며, 머리 모양은 가늘고 길며, 턱뼈가 높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이마는 낮고 코는 납작하며 눈은 크고 튀어나오고 입은 크고 입술은 두껍다. 그 신체는 건장하여 활발하게 일할 수 있지만, 성질이 게으르고 개화와 발전의 맛을 모른다. 아프리카 사막 남부에 있는 토착민과 노예로 아메리카에 이주한 흑인들은 이 종류의 사람이다.

(5) 갈색 인종: 피부는 갈색이고 짙은 색이며, 검은 머리카락은 거칠고 길다. 이마는 낮고 넓으며 입은 크고 코는 짧으며, 눈꼬리는 황색 인종과 같이 비스듬히 위로 올라간다. 그 성정은 맹렬하고 복수심이 매우 강하다. 태평양과 아프리카 해안에 가까운 여러 섬과 말라카(동인도 지역) 등의 토착민은 이 종류의 사람이다.|후쿠자와 유키치|『쇼츄 반코쿠 이치란』21-26쪽}}

중국에서는 후쿠자와에 대한 평가가 일반적으로 좋지 않다.[143] 게이오대학 출신 히라야마 요는 중국인들의 후쿠자와 비판이 하토리 요시스케, 토오야마 시게키, 야스카와 토시노스케 등의 연구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43] 오가와하라 마사미치는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교수로부터 "후쿠자와에게는 『탈아론』 이외의 측면도 있군요"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고 한다.[144]

마루야마 마사오는 중국에서의 후쿠자와 인물상에 대해 "탈아"는 후쿠자와의 키워드가 아니었고,[149] "탈아"라는 말은 "흥아"라는 말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며,[151] 후쿠자와는 정부와 국가를 명확히 구분하여 공격의 대상은 중국·조선의 국민이 아니라 청나라·이씨조선의 정부였다고 반론한다.[152]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 이후 탈아론을 인용한 연구 논문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155] 1980년대 역사 교과서 문제를 계기로 일본의 조선 침략 논리로 재인식되었다.[160] 현재 한국에서 유키치는 흔히 정한론자로 여겨지며, 그의 조선 관련 시사 논설은 당시 상황과 관계없이 일본인의 침략 사상의 흐름 속에서 인식되고 있다.[160]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유키치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침략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강하다.[165] 2004년 전후 뉴라이트는 일제 강점기의 근대화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며 유키치에 대한 이해를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키치를 "아시아를 멸시하고 침략을 긍정한 혐한의 아버지이자 우익의 원조"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168][169]

5. 관련 자료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126153656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 프레시안 2010.11.26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050929023001& [문화단신] 후쿠자와 유키치 사상 토론회]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057287 [어제의 오늘] 1898년 후쿠자와 유키치 ‘지나인’ 사설 게재] 경향신문 2010.03.21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71581481 26. 후쿠자와 유키치「문명론 개략」] 한국경제 2009.07.17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1971491 [자서전 읽기] (4)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경향신문 2008.08.15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271754091&code=960207 [책읽기 365]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의 권장’] 경향신문 2007.09.27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옛집 (오이타현 나카쓰시)


오이타현(大分県) 나카쓰시(中津市)에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어린 시절 집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1971년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8][9] 과 인접한 후쿠자와 유키치 기념관(福澤諭吉記念館)에는 「학문의 권고(学問のすすめ, Gakaku no Susume)」의 원고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10]

;주요 저서

{{columns-list|colwidth=13em|

  • 『증정화영통어』
  • 『서양사정』
  • 『뢰총조법』
  • 『서양여안내』
  • 『조약십일국기』
  • 『서양의식주』
  • 『병사회중편람』
  • 『훈몽궁리도해』
  • 『양병명감』
  • 『장중만국일람』
  • 『영국의사원담』
  • 『청영교제시말』
  • 『세계국진』
  • 『계몽수습의문』
  • 『학문의 수수메』
  • 『히비노오시에』
  • 『동몽교초』
  • 『카타와무스메』
  • 『개력변』
  • 『장합지법』 - 최초의 부기학 서적.
  • 『일본지도초지』
  • 『문자지교』
  • 『회의변』
  • 『문명론지개략』
  • 『학자안심론』
  • 『분권론』
  • 『민간경제록』
  • 『복자문집』
  • 『통화론』
  • 『통속민권론』
  • 『통속국권론』
  • 『민정일신』
  • 『국회론』
  • 『시사소언』
  • 『시사대세론』
  • 『제실론』
  • 『병론』
  • 『덕육여하』
  • 『학문지독립』
  • 『전국징병론』
  • 『통속외교론』
  • 『일본부인론』
  • 『일본부인론후편』
  • 『사인처세론』
  • 『품행론』
  • 『남녀교제론』
  • 『일본남자론』
  • 『존왕론』
  • 『국회의 전도』
  • 『국회난국유래』
  • 『치안소언』
  • 『지조론』
  • 『실업론』
  • 『복자전집서언』
  • 『복자전집』
  • 『수업입지편』
  • 『복옹백화』
  • 『복옹백여화』
  • 『복자선생부세담』
  • 『여대학평론』
  • 『신여대학』
  • 『메이지 10년 정축공론』
  • 『척만감의설』
  • 『복옹자전』
  • 『구번정』
  • 『당인왕래』

}}

;저서집

  • 『[http://www.keio-up.co.jp/yukichi/ 福澤諭吉著作集]』(전 12권), 게이오기주쿠대학 출판회에서 2002년-2003년에 간행. 2009년에 저서집의 일부(선서 전 5권)가 [http://www.keio-up.co.jp/kup/sp/fukuzawa/ 콤팩트판]으로 신장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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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팩트판 ISBN 978-4-7664-16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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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팩트판 ISBN 978-4-7664-1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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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팩트판 ISBN 978-4-7664-16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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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팩트판 ISBN 978-4-7664-16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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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팩트판 ISBN 978-4-7664-1626-8)

;사전




;저서 번역

  • - 『문명론지개략』의 영역.
  • - 『학문의 수수메』의 영역.
  • 『학문의 수수메』,『복옹자전』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 그리하여 자유의 종은 울린다 (1954년, 연기: 2대째 오노에 구로에몬)
  • 후쿠자와 유키치의 소년 시대 (1958년, 감독: 세키가와 히데오, 제작: 도에이 교육영화부)
  • 후쿠자와 유키치 (1991년, 연기: 시바타 쿄헤이)
  • 젊은 피에 불타는~후쿠자와 유키치와 메이지의 군상(1984년 1월 2일 「신춘 와이드 드라마」, TV 도쿄, 역: 나카무라 마사토시)
  • 막말 청춘 그라피티 후쿠자와 유키치(1985년, TBS 드라마, 역: 나카무라 칸쿠로)
  • 봄의 파도(1985년, NHK 대하드라마, 역: 고바야시 케이주)
  • 아사가 왔다(2015년, NHK 연속 TV 소설, 역: 다케다 테츠야)
  • 청천을 꿰뚫다(2021년, NHK, 역: 나카무라 만타로)
  • 복제 유길 선생을 찬양하는 노래(1951년, 작사: 니시카와 고지로, 작곡: 모리 간지)

: 후지야마 이치로가 노래했다.

  • 론인의 부상(2024년,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성우: 우에다 유지)

{{columns-list|colwidth=21em|

  • 아시아주의
  •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화전은 우리의 영욕에 관한 중대한 문제이다
  • 일만 엔 지폐
  • 연설
  • 오사카
  • 과학
  • 가나가키 로분
  • 관존민비
  • 교토 슈쇼인
  • 게이오기주쿠
  • 경제
  • 경세제민
  • 흥아회
  • 황실 제도
  • 교순사
  • 고상
  • 갑신정변
  • 시사신보론집
  • 사상사
  • 중국인 친하게 할 것
  • 시마 삼상회
  • 유학
  • 수신요령
  • 신수관
  • 수학
  • 탈아사상
  • 탈아론
  • 토지는 병합해서는 안 되고 국사는 개혁해야 한다
  • 나카츠시
  • 나가누마 사건
  • 니카라과 운하
  • 일본학사원
  • 일본의 해양 국가론
  • 막말의 인물 일람
  • 한글
  • 후쿠자와 상
  • 후쿠자와 심훈
  • 후쿠자와 유키치 구거
  • 무사
  • 문전당 본포
  • 문명 정치의 여섯 가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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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이지 시대
  • 메이지 시대의 인물 일람
  • 명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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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는 평민적인 親鸞(신란)의 사상을 참고하여 당시 기준으로 평이한 문체를 사용하는 “속문주의(俗文主義)”를 의식하였다.[92]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 신정부에 해적판 단속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이듬해 저작권 사상에 기반한 출판 조례 공포를 실현시켰다. 메이지 2년(1869년) 11월 “福澤屋諭吉(후쿠자와야 유길)”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고,[93] 메이지 6년(1873년) 3월에는 자신의 저서를 무단 인용한 것에 대해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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