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마 노부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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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마 노부모리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긴 무장으로, 오다 가문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물러서는 사쿠마"라는 별명처럼 후방 지휘에 능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에서 부진을 겪어 노부나가의 징계를 받았다. 1580년, 노부나가는 노부모리에게 19개 조항의 징계장을 내리고 고야산으로 추방했다. 이후 1582년, 기이국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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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쿠마 노부모리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사쿠마 노부모리 |
| 일본어 이름 | 佐久間 信盛 |
| 이명 | 데와노스케 (出羽介) 우에몬노조 (右衛門尉) |
| 출생 | 1528년 |
| 출생지 | 미나미구, 오와리국 |
| 사망 | 1582년 2월 18일 |
| 사망지 | 도쓰카와, 야마토국 |
| 별명 | "시리조키 사쿠마" (退き佐久間, 퇴각하는 사쿠마) |
| 계명 | 도무케이간 (洞無桂巌) |
| 법명 | 소유 (宗祐) |
| 묘소 | 교토부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고토인 나라현도쓰카와촌 무사시 |
| 가문 | 간무 헤이시요시후미류 미우라 씨계 와다 지류 사쿠마 씨 |
| 아버지 | 사쿠마 노부하루 |
| 형제 | 사쿠마 노부모리 사쿠마 노부타쓰 묘가쿠 |
| 배우자 | 마에다 다네토시의 딸 |
| 자녀 | 사쿠마 노부에이 모(병위개) 사쿠마 노부자네 아즈미 우콘 다이후 처 후쿠시마 마사요리 실 사사 씨 처 |
| 관직 | |
| 주군 | 오다 노부히데 → 노부나가 |
| 영지 | 구리타군 영주 |
| 임관 시작 | 1571년 |
| 임관 종료 | 1580년 |
| 군사 정보 | |
| 소속 | [[파일:Mon-Oda.png|15px]] 오다 씨 |
| 지휘 | 구리타군 |
| 주요 전투 | 기요스 성 전투 이노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 이나바야마 성 포위전 초코지 포위전 미쓰쿠리 성 포위전 나가시마 포위전 히에이 산 포위전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치조다니 성 포위전 나가시노 전투 이시야마 혼간지 포위전 |
2. 생애
사쿠마 노부모리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야마자키(현재의 나고야시 미나미구)에서 태어나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다. 이후 어린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는 중신이 되었고, 노부히데 사후 가독 상속 문제에서도 일관되게 노부나가를 지지했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의 반란 때에는 이나이 전투에서 노부나가 측 장수로 싸웠다. 그 공으로 이후 가신단의 수장으로 대우받으며, “'''물러서는 사쿠마'''”(후퇴전(殿軍) 지휘를 잘했던 것에서 유래)라고 불렸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젠쇼지 요새를 수비했고, 전후 나루미성을 하사받았다. 1568년 오미국의 로쿠가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와의 칸논지성 전투에서는 미나사키성을 함락시키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관료로서도 활동하여 156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에게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가 시집갈 때 오카자키성까지 수행했고, 이에야스의 영지와 접하는 서미카와를 맡았다. 1568년 노부나가 상락 후에는 키나이의 행정 담당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야마토국의 마쓰나가 히데히데와 협상했다. 1570년 아사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와 적대 관계가 된 직후, 오미 나가하라성에 배치되어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남오미를 평정(노즈가와라 전투)하고, 아네가와 전투, 시가의 진에도 출진했다.
1571년 히에이잔 방화에서 군공을 세웠고, 마쓰나가 히데히데와 다투고 있던 츠츠이 준케이의 귀순 협상도 담당하여 히데히데와 준케이를 화해시켰다. 같은 해 12월, 키나모리 200석, 노즈군·쿠리타군, 키리하라·시마고에 있던 타네무라 씨의 옛 영지 500석을 하사받았다.
1572년 다케다 신겐이 오다 가문에 대한 적대를 드러냈을 때 기후성에 2,000명이 넘는 병사와 함께 주둔하여 미노의 방비를 굳혔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거의 싸우지 않고 후퇴했다.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화해 협상을 벌였다.[11] 이치죠다니성 전투 직전, 전장에서 이탈하는 아사쿠라 요시카게군의 추격을 게을리 한 오다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질책을 받았다. 그때 신모리는 “저희 같은 우수한 가신단을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대답을 해서 노부나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1576년 덴노지 전투에서 이시야마 홍난사 공략전 사령관 하나와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덴노지 요새 성주로 입성하여 대홍난사 사령관(후에 키나이 방면군으로 개편)에 취임했다. 1580년 조정으로부터 본원사에 파견된 강화 칙사의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교뇨의 본원사 철수를 검시하는 칙사에 다시 동행하여 본원사와의 10년간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같은 해, 노부나가로부터 19개 조항에 달하는 징계장을 제기받고 키나이 방면군 군단장과 수장 지위를 버리고 오다 가문을 떠났다.
1582년 기이국 구마노 또는 고야산에서 사망[5]했다. 향년 55세. 법명은 동무계암 또는 종우.
2. 1. 초기 생애 및 오다 가문 섬김
사쿠마 노부모리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야마자키(현재의 나고야시 미나미구)에서 태어나 오다 노부히데를 섬겼다.[10] 이후 어린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는 중신이 되었고, 노부히데 사후 가독 상속 문제에서도 일관되게 노부나가를 지지했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의 반란 때에는 이나이 전투에서 노부나가 측 장수로 싸웠다. 그 공으로 이후 가신단의 수장으로 대우받으며, “'''물러서는 사쿠마'''”(후퇴전(殿軍) 지휘를 잘했던 것에서 유래)라고 불렸다.[10]에이로쿠 3년 (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젠쇼지 요새를 수비했고, 전후 나루미성을 하사받았다.[10] 에이로쿠 11년 (1568년), 오미국의 로쿠가쿠 요시카타·요시하루 부자와의 칸논지성 전투에서는 미나사키성을 함락시키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10]
관료로서의 활동도 보이며, 에이로쿠 10년 (1567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에게 노부나가의 딸인 도쿠히메가 시집갈 때 오카자키성까지 수행했고, 이에야스의 영지와 접하는 서미카와를 맡았다.[10] 이듬해 에이로쿠 11년 노부나가 상락 후에는 키나이의 행정 담당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야마토국의 마쓰나가 히데히데를 협상으로 끌어들였다.[10]
겐키 원년 (1570년) 5월, 오미 나가하라성에 배치되어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남오미를 평정(노즈가와라 전투)하고, 아네가와 전투, 시가의 진에도 출진했다.[10] 겐키 2년 (1571년) 히에이잔 방화에서 군공을 세웠다.[10]
겐키 3년 (1572년) 10월, 다케다 신겐이 오다 가문에 대한 적대를 드러냈을 때에는 기후성에 2,000명이 넘는 병사와 함께 주둔하여 미노의 방비를 굳혔다. 11월에는 히라테 모토히데·미즈노 노부모토와 함께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군 8,000명의 원군으로 파견되었지만, 신모리는 전장이 된 미카타가하라에서 27,000명의 다케다군을 목격하고 도쿠가와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거의 싸우지 않고 함나호의 이마키리까지 후퇴했다(미카타가하라 전투).[10]
텐쇼 원년 (1573년) 4월, 노부나가의 대리로 오다 노부히로,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함께 니조 고쇼에 파견되어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화해 협상을 벌였다.[11] 같은 달, 시바타 카츠이에, 다니와 나가히데, 가모 가타히데와 함께 로쿠가쿠 요시하루가 농성하는 나마즈에성 공격을 명령받고, 사방에 부성을 쌓고 포위했다. 4월 말에 요시아키와 노부나가 가신들 사이에 기청문이 교환되었는데, 요시아키가 보낸 가신 명단은 사쿠마 노부모리·타키가와 카즈마스·하나와 나오마사이며,[11] 노부나가 측 발급자는 하야시 히데사다·사쿠마 노부모리·시바타 카츠이에·이나바 이테쓰·안도 모리나리·우지이에 토쿠마사·타키가와 카즈마스이며,[11] 신모리가 중신이었음을 보여준다.
8월, 이치죠다니성 전투 직전, 전장에서 이탈하는 아사쿠라 요시카게군의 추격을 게을리 한 오다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질책을 받았다. 그때 신모리는 무심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저희 같은 우수한 가신단을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대답을 해서 노부나가를 더욱 화나게 만들어, 영지 몰수의 엄벌을 받을 뻔했지만, 시바타 카츠이에, 아케치 미쓰히데, 마에다 토시이에 등 다른 가신들이 필사적으로 간청하여 그 자리에서는 노부나가의 분노가 가라앉았다.[10]
2. 2. "퇴각의 사쿠마" 별명 획득 및 주요 전투 활약
1554년, 노부모리는 오다 노부토모와의 기요스 성 전투에 참전했다.[1]1555년에는 오다 노부유키와의 이노 전투에 참전했다.[1]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주력 부대 중 한 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젠쇼지 요새를 수비했고, 전투 후 나루미성을 하사받았다.[1]
1567년 사이토 다쓰오키와의 이나바야마 성 공방전에서 예비 부대에 속해 싸웠다.[1]
1570년 롯카쿠 씨와의 전투에서 미쓰쿠리 성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고, 에치젠 국에서 불교 종파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5월, 오미 나가하라성에 배치되어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남오미를 평정(노즈가와라 전투)하고, 아네가와 전투, 시가의 진에도 출진했다.[1]
1571년 나가시마 공방전에서 잇코잇키의 반란과 싸웠다. 또한 히에이산 공방전에서 엔랴쿠지를 불태웠다. 같은 해 11월, 오미국 구리타 군을 지행지(가신 영지)로 받았다.[1]
1572년 다키가와 가즈마스와 함께 3,000명의 부대를 이끌고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30,000명의 군대에 맞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약 8,000명의 병사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증원군의 일부를 이루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사쿠마는 예비 접전 후 후퇴했다. 그러나 도쿠가와군과 함께 싸운 그의 동료 사령관 히라테 히로히데는 목숨을 잃었고, 전투는 도쿠가와-오다 연합의 압도적인 패배로 끝났다.[1][2]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거의 싸우지 않고 함나호의 이마키리까지 후퇴했다.[1]
1573년 아사쿠라 씨와의 이치죠다니 성 공방전과 두 번째 나가시마 공방전에 참가했다.[1]
1574년 세 번째 나가시마 공방전에 참가했다.[1]
1575년 다케다 씨와의 나가시노 전투에 참가했다.[3]
1576년 오사카의 요새화되고 잘 보급된 홍간사에 대한 전투 중 하라다 나오마사가 사망한 후, 사쿠마는 하라다의 후임으로 이시야마 홍간사 공방전의 사령관으로 선택되었고 7개 국의 군대를 받아 오다 가신들 중 가장 큰 오다 씨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덴노지 전투에서 하나와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덴노지 요새가 포위되었고, 아들 노부히데를 포함한 농성군은 궁지에 몰렸다. 구원을 향한 오다군과 홍난사 세력의 전투는 노부나가가 부상을 입을 정도의 격전이 되었지만, 신모리도 선봉을 서서 분전하여 홍난사 세력을 격파하고 농성군의 구원에 성공했다. 그 후 덴노지 요새의 성주로 입성하여 대홍난사 사령관(후에 키나이 방면군으로 개편)에 취임했다.[1]
1580년 이시야마 홍간사 전투에서 10년간의 전쟁 후, 노부나가는 천황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을 중재하도록 했다.[1]
2. 3. 관료로서의 활동
에이로쿠 10년(156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에게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가 시집갈 때 오카자키성까지 수행했고, 이에야스의 영지와 접하는 서미카와를 맡았다. 이듬해 에이로쿠 11년 노부나가 상락 후에는 키나이의 행정 담당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야마토국의 마쓰나가 히데히데와 협상했다.[10] 아사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와 적대 관계가 된 직후인 겐키 원년(1570년) 5월, 오미 나가하라성에 배치되어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남오미를 평정(노즈가와라 전투)했다.겐키 2년(1571년) 8월, 마쓰나가 히데히데가 시라이가와라 전투에서 전사한 와다 코레마사의 거성 다카츠키성을 접수하려 했으나, 노부모리가 협상을 벌여 철병시켰다. 11월에는 마쓰나가 히데히데와 다투고 있던 츠츠이 준케이의 귀순 협상도 담당하여 히데히데와 준케이를 화해시켰다. 같은 해 12월, 키나모리 200석, 노즈군·쿠리타군, 키리하라·시마고에 있던 타네무라 씨의 옛 영지 500석을 하사받았다.
텐쇼 원년(1573년) 4월, 노부나가의 대리로 오다 노부히로,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함께 니조 고쇼에 파견되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화해 협상을 벌였다. 4월 말 요시아키와 노부나가 가신들 사이에 기청문이 교환되었는데, 요시아키가 보낸 가신 명단은 사쿠마 노부모리·다키가와 카즈마스·하나와 나오마사였고,[11] 노부나가 측 발급자는 하야시 히데사다·사쿠마 노부모리·시바타 카츠이에·이나바 이테쓰·안도 모리나리·우지이에 토쿠마사·다키가와 카즈마스로,[11] 노부모리가 중신이었음을 보여준다.
2. 4. 이시야마 혼간지 전투와 부진
1576년, 오사카의 요새화되고 잘 보급된 혼간지에 대한 전투 중 하라다 나오마사가 사망한 후, 사쿠마 노부모리는 하라다의 후임으로 이시야마 혼간사 공방전의 사령관으로 선택되었고 7개 국의 군대를 받아 오다 가신들 중 가장 큰 오다 씨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1] 그러나 아케치 미쓰히데, 시바타 가쓰이에, 하시바 히데요시 등 다른 동료들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노부모리는 용감한 불교 광신도들에 대해 전혀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1]1580년, 이시야마 혼간사 전투에서 10년간의 전쟁 후, 오다 노부나가는 천황에게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을 중재하도록 했다.[1] 같은 해, 노부나가는 혼간사와의 전투에서 과거 실패를 포함한 사쿠마에 대한 19가지 혐의를 담은 문서를 작성했다. 노부나가는 사쿠마와 그의 아들 사쿠마 노부히데를 고야산의 사찰로 추방했고, 그들은 승려 생활을 강요받았다.[1] 노부모리가 추방된 후 킨키 지방(간사이)에서 가장 큰 군대를 이끌게 된 사람은 아케치 미쓰히데였고, 이는 가신들에게 불안을 가져온 심각한 인사 문제였다. 이 추방은 종종 노부나가의 혼노지의 변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1]
전후, 노부모리는 그 여력들을 이끌고 덴노지 요새에 성주로 입성하여, 하나와 나오마사의 후임인 대홍난사 사령관(후에 키나이 방면군으로 개편)에 취임했다. 미카와·오와리·오미·야마토·가와치·와카야마 등 7개 국의 여력을 받은 노부모리 휘하의 군단은 당시 오다 가문에서 최대 규모였지만, 노부모리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대홍난사 전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고, 오다군의 부장으로서 각지로 출진을 반복했다.
텐쇼 8년(1580년) 3월 1일, 조정으로부터 본원사에 파견된 강화 칙사(고노에 사키히사, 간슈지 하루토요, 니와다 시게야스)의 수행원으로 마쓰이 유칸과 함께 동행을 명령받았다. 같은 달 10일, 오다와라성 주인인 호조 우지마사로부터 노부나가에게 보내진 헌상품 공개를 담당했다. 또 다키가와 가즈마스, 다케이 유안과 함께 호조 씨 사자의 중개 역할도 맡았다.
8월 2일, 교뇨의 본원사 철수를 검시하는 칙사에 유칸과 함께 다시 동행했다. 이렇게 본원사와의 10년간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시점까지 노부모리는 긴키 지방에서 오다 가문 최대 규모의 군단을 통솔하고 있었다. 단, 원래 오와리의 토호였던 사쿠마 가문은 아케치나 하시바처럼 성이나 영지를 받아 스스로 다이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근위 사단적인 대우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추방에 순응하게 된다.
같은 달 25일, 노부나가로부터 19개 조항에 달하는 징계장을 받고 노부모리는 키나이 방면군 군단장과 수장 지위를 버리고 오다 가문을 떠났다. 이 노부모리의 결단은 실질적으로 추방이라는 형태가 되었고, 적남인 노부히데와 소수의 가신들과 함께 고야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고야산에 거주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더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지며, 가신들도 노부모리 부자를 버리고 떠났다. 고야산으로 갈 때는 따르는 자가 2, 3명, 구마노로 갈 때는 1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지막까지 따른 자는 후에 노부히데가 사면되어 복귀했을 때,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낮은 신분에서 무사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노부나가공기』는 이 시기 사쿠마 부자의 몰락을 애석하게 기록하고 있다. 노부모리 퇴임 후 키나이 방면군 군단장에 취임한 것은 아케치 미쓰히데이며,[1] 하치야 요리타카가 이어받은 와카야마를 제외하고 옛 사쿠마 군단은 혼노지의 변의 실질적인 실행 부대가 되었다. 아케치 군기에는 사쿠마 등에 대한 무자비한 처분을 예로 들어, 내일은 자신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가신들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기 면에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2. 5. 오다 노부나가와의 불화 및 추방
오다 노부나가는 1580년 8월, 사쿠마 노부모리와 그의 아들 노부히데에게 19개 조항에 달하는 징계장을 보내 그들의 무능과 태만을 질책하며 기나이 방면군 군단장 직위에서 해임하고 추방했다.[5] 이 징계장은 오다 노부나가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기 불과 2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노부나가는 징계장에서 사쿠마 부자가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전투에서 5년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또한, 시바타 가쓰이에, 아케치 미쓰히데,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다른 가신들의 활약과 비교하며 사쿠마 부자의 무능함을 강조했다.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가 가신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미즈노 노부모토 사후 카리야성을 주었음에도 가신을 늘리지 않고, 오히려 미즈노의 옛 가신들을 추방한 점, 야마자키 땅을 주었음에도 미리 정해둔 사람들을 추방한 점 등을 예로 들었다.
또한, 1573년 이치죠다니성 전투 직전,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을 추격하지 않은 오다 가신들을 질책할 때, 사쿠마 노부모리가 눈물을 흘리며 "저희 같은 우수한 가신단을 모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대답한 사건을 다시 언급하며 그의 불손한 태도를 꾸짖었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 군에 패배했을 때, 히라테 히로히데를 버리고 도망친 일도 언급하며, 사쿠마 노부모리의 비겁함을 비판했다.
결국, 노부나가는 사쿠마 부자에게 머리를 깎고 고야산에 은둔하여 용서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사쿠마 부자는 이 명령에 따라 고야산으로 추방되었고, 이후 기이국 구마노에서 사망했다.[5]
사쿠마 노부모리의 추방은 오다 가문 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아케치 미쓰히데 군의 기록에는 사쿠마 등에 대한 무자비한 처분을 예로 들며, 가신들이 반란에 기울었다는 기록도 있다.
칸다 센리에 따르면, 사쿠마 노부모리 자신의 서장과 타몬인 일기의 기록에서 신모리가 고야산에서 평온하게 여생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고야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노부나가 공기의 오류라고도 한다.[21]
사쿠마 씨의 무공을 기록한 사쿠마 군기에는 추방에 대해 "누군가의 참언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미의 내용이 적혀 있다. 관정중수제가보에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참언이 있었다는 것이 명기되어 있지만, 출전이 명확하지 않아 주의가 필요하다.
2. 6. 죽음
사쿠마 노부모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냉혹한 처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단점을 부각하는 사건이다.[5]하지만 노부모리는 자주 다도회를 열 정도로 군사 문제보다는 다도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간사에 대한 어떠한 포괄적인 군사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또한 어릴 적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기록도 있다.
1580년 8월 25일, 노부나가로부터 19개 조항에 달하는 징계장을 제기받고 키나이 방면군 군단장과 수장의 지위를 버리고 오다 가문을 떠났다. 이 결단은 실질적으로 추방이라는 형태가 되었고, 적남인 노부히데와 소수의 낭인들과 함께 고야산으로 올라갔다. 그 후, 고야산에 거주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더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지며, 낭인들도 신모리 부자를 버리고 떠났다. 고야산으로 갈 때는 따르는 자가 2, 3명, 구마노로 갈 때는 1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지막까지 따른 자는 후에 노부히데가 사면되어 귀참이 이루어졌을 때, 그 충성심을 상으로 낮은 신분에서 무사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노부나가공기』는 이 사이의 사쿠마 부자의 몰락을 애석하게 기록하고 있다.
칸다 센리에 따르면, 사쿠마 노부모리 자신의 서장과 『타몬인 일기』의 기록에서 신모리가 고야산에서 평온하게 여생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고야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노부나가공기』의 오류라고도 한다.[21]
1582년 1월 16일, 기이국 구마노 또는 고야산에서 사망[5]했다. 향년 55세. 법명은 동무계암 또는 종우. 직후 노부히데는 오다 노부타다 측 가신으로 귀참을 허락받았다.
3. 인물 및 평가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타카를 평가하면서, "사쿠마 덴(노부모리) 외에는 고키(五畿内)에서 이처럼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려 깊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며, 또한 훌륭한 무사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22]
4. 가신 및 여력
사쿠마 노부히데: 아들
| 미카와(三河) 사람들 | 오와리(尾張) 사람들 | 오우미(近江) 사람들 | 야마토(大和) 사람들 | 카와치(河内) 사람들 | 이즈미(和泉) 사람들 | 키이(紀伊) 사람들 |
|---|---|---|---|---|---|---|
5. 등장 작품
=== 드라마 ===
- 태합기(1965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이노우에 가즈유키)
- 국토리 이야기(197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안도 미치오)
- 다케다 신겐(1988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우치다 나오야)
- 신장 KING OF ZIPANGU(199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타나카 켄)
- 히데요시(199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오리모토 준키치)
- 리케와 마츠~가가 백만석 이야기~(200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타나카 켄)
- 공명의 거리(200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다와라기 도타)
- 적은 본노지에 있다(2007년, TV아사히, 배우: 야마다 메이쿄)
- 군사관베(2014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다치카와 미쓰타카)
- 여성 성주 나오토라(2017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사카니시 료타)
- 기린이 온다(2020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가네코 노부아키)
- 도대체 이에야스(202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다치카와 단슌)
=== 만화 ===
=== 소설 ===
5. 1. 드라마
- 태합기(1965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이노우에 가즈유키)
- 국토리 이야기(197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안도 미치오)
- 다케다 신겐(1988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우치다 나오야)
- 신장 KING OF ZIPANGU(199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타나카 켄)
- 히데요시(199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오리모토 준키치)
- 리케와 마츠~가가 백만석 이야기~(200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타나카 켄)
- 공명의 거리(200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다와라기 도타)
- 적은 본노지에 있다(2007년, TV아사히, 배우: 야마다 메이쿄)
- 군사관베(2014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다치카와 미쓰타카)
- 여성 성주 나오토라(2017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사카니시 료타)
- 기린이 온다(2020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가네코 노부아키)
- 도대체 이에야스(202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다치카와 단슌)
5. 2. 만화
5. 3. 소설
기하라 미노루의 소설 《추방》이 북국신문사의 북국문화 제81호(2019년 가을)에 게재되었다.[1]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2]
서적
Battle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1987
[3]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4]
서적
Sakuma Nobumori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10-27
[5]
서적
信長公記
[6]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7]
서적
高野春秋編年輯録
[8]
문서
田島文書
[9]
서적
信長と消えた家臣たち
中央公論新社
2007
[10]
서적
戦国遺文
[11]
서적
信長と将軍義昭―提携から追放、包囲網へ―
中央公論新社
2014
[12]
서적
シリーズ・実像に迫る021 長篠の戦い 信長が打ち砕いた勝頼の〝覇権〟
戎光祥出版
2020
[13]
서적
シリーズ・実像に迫る021 長篠の戦い 信長が打ち砕いた勝頼の〝覇権〟
戎光祥出版
2020
[14]
서적
織田信忠―天下人の嫡男―
中央公論新社
2019
[15]
서적
織田権力の領域支配
岩田書院
2011
[16]
서적
シリーズ・実像に迫る019 筒井順慶
戎光祥出版
2019
[17]
서적
松井友閑
吉川弘文館
2018
[18]
서적
完訳フロイス日本史〈3〉安土城と本能寺の変―織田信長篇(3)
2000
[19]
서적
信長公記
[20]
서적
キリシタン大名 -布教・政策・信仰の実相-
宮帯出版社
2017
[21]
서적
當代記 駿府記
続群書類従完成会
2006
[22]
서적
織田信長家臣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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