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우복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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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주 우복 종택은 경상북도에 위치한 조선시대 건축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대문채, 사당, 별묘, 계정, 대산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조 건축 양식을 기반으로 하며, 총 면적은 631.7㎡이다. 우복 정경세 선생의 별서 건축에서 시작되어 종택으로 발전하였으며, 대산루의 독특한 평면 구성과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 소장, 제례 문화 전승 등을 통해 역사적, 학술적, 민속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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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우복 종택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상주 우복 종택 |
영문 이름 | Ubok Head House, Sangju |
문화재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국가민속문화재 |
지정 번호 | 296 |
지정일 | 2018년 11월 1일 |
해지일 | 해당 없음 |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46외 (우산리 193-1외) |
시대 | 조선시대 |
관리 | 진주정씨종중 |
참고 | 해당 없음 |
면적 | 2필지, 19,048m² |
수량 | 8동, 631.7m² |
전승지 | 해당 없음 |
전승자 | 해당 없음 |
설명 | 해당 없음 |
웹사이트 | 해당 없음 |
문화재청 ID | 18,02960000,37 |
지정 해제 정보 | |
이름 (지정 해제) | 우복종가 |
문화재 분류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지정 번호 (지정 해제) | 31 |
지정일 (지정 해제) | 1982년 2월 24일 |
해지일 (지정 해제) | 2018년 11월 1일 |
문화재청 ID (지정 해제) | 24,00310000,37 |
2. 역사
상주 우복 종택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가묘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된 영남 지방의 대표적인 반가 건축물이다.[2] 안채는 'ㄱ'자형으로 부엌, 안방, 윗방, 대청, 상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一'자형 구조로 사랑방, 대청, 건넌방이 배열되어 있다. 특히 집 몸채의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 잡고 있는 점이 건축적 특징이다.
종택 내의 대산루는 영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T'자형 평면 구성을 가지고 있다.[2] 또한, 이 종택은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을 소장하고 있으며,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 시대 제례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민속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2]
2. 1. 종택의 형성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38세 때 이 고장에 들어와 남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을 우복동천이라고도 부른다. 정경세는 1602년 대산루를 짓고 1603년 별서 기능을 가진 계정을 지었다.[2] 이후 영조는 선조와 인조 때 정경세가 성실하게 활동한 것을 기려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이 땅에 정경세의 5대손(또는 고손자[2])인 정주원이 종택을 건립하면서[2]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이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자리하고 있으며, 종택이 들어서기 전에 지어진 계정과 대산루는 본래 별서 기능을 하였으나 종택 건립 이후에는 종택의 별당이나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기능이 변화하였다.[2]
3. 구조 및 특징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이 튼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는 종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한 영남 지방 반가의 특징을 보여준다.[2] 집의 주요 건물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 잡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종택 내 계정과 대산루는 종택 본채보다 먼저 건립된 건물로, 처음에는 별서 기능을 하였으나 종택 건립 이후 별당이나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기능이 변화하였다.[2] 특히 대산루는 영남 지방 반가에서는 보기 드문 T자형 평면 구성을 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2]
또한, 이 종택은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을 소장하고 있으며,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시대 제례 문화가 현재까지 잘 전승되고 있어 역사적·학술적·민속적 가치가 높다.[2]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2]
3. 1. 배치
튼 ㅁ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가묘 등이 남아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부엌, 안방, 윗방, 대청, 상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一자형 구조로 사랑방, 대청, 건넌방이 배열되어 있다. 집 몸채의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각 건물의 세부 정보는 다음과 같다.
명칭 | 시대 | 구조/형식/형태 | 크기/수량 | 소유자 | |
---|---|---|---|---|---|
상주 우복 종택 | 안채 | 조선시대 | 목조, 5량(몸채), 3량(익사), 팔작지붕 | 141.7m2 | 진주정씨종중 |
사랑채 | 조선시대 | 목조, 5량, 팔작지붕 | 81.4m2 | ||
아래채 | 조선시대 | 목조, 3량, 맞배지붕 | 83.2m2 | ||
대문채 | 1991년 | 목조, 3량, 맞배지붕 | 81.3m2 | ||
사당 | 조선시대 | 목조, 5량, 맞배지붕 | 72.2m2 | ||
별묘 | 조선시대 | 목조, 3량, 맞배지붕 | 46.4m2 | ||
계정 | 조선시대 | 목조, 3량가, 초가지붕 | 13.9m2 | ||
대산루 | 조선시대 | 목조, 5량가, 팔작지붕 | 111.6m2 | ||
계 | 631.7m2 |
3. 2. 건축 양식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종택의 건물 배치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ㅁ자형을 이루고 있어, 종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남 지방의 반가이다.[2]종택 내 건물 중 계정과 대산루는 종택 본채보다 먼저 건립되었다. 우복(禹伏) 정경세(1563~1633)가 1602년 대산루를, 1603년 계정을 지었을 당시에는 별서 기능을 하였으나, 이후 종택이 건립되면서 별당 또는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기능이 변화하였다.[2] 특히 대산루는 T자형 평면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는 영남 지방 반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이다.[2]
각 건물의 세부 사항은 다음과 같다.
명칭 | 시대 | 구조/형식/형태 | 크기/수량 | 소유자 | |
---|---|---|---|---|---|
상주 우복 종택 | 안채 | 조선시대 | 목조, 5량(몸채), 3량(익사), 팔작지붕 | 141.7m2 | 진주정씨종중 |
사랑채 | 조선시대 | 목조, 5량, 팔작지붕 | 81.4m2 | ||
아래채 | 조선시대 | 목조, 3량, 맞배지붕 | 83.2m2 | ||
대문채 | 1991년 | 목조, 3량, 맞배지붕 | 81.3m2 | ||
사당 | 조선시대 | 목조, 5량, 맞배지붕 | 72.2m2 | ||
별묘 | 조선시대 | 목조, 3량, 맞배지붕 | 46.4m2 | ||
계정 | 조선시대 | 목조, 3량가, 초가지붕 | 13.9m2 | ||
대산루 | 조선시대 | 목조, 5량가, 팔작지붕 | 111.6m2 | ||
계 | 631.7m2 |
이처럼 상주 우복 종택은 전통적인 배치와 더불어 대산루와 같은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조선시대 반가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2]
3. 3. 특징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1563년 ~ 1633년) 선생이 38세 때 이곳에 들어와 남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우복동천이라고도 불린다. 정경세는 선조와 인조 때 성실하게 활동하였으며, 이를 높이 평가한 영조가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하사하였다. 이로 인해 5대손인 정주원 때부터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종택은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가묘가 남아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부엌, 안방, 윗방, 대청, 상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一'자형 구조로 사랑방, 대청, 건넌방이 배열되어 있다. 집의 주요 건물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게 자리 잡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명칭 | 시대 | 구조/형식/형태 | 크기/수량 | 소유자 | |
---|---|---|---|---|---|
상주 우복 종택 | 안채 | 조선시대 | 목조, 5량(몸채), 3량(익사), 팔작지붕 | 141.7m2 | 진주정씨종중 |
사랑채 | 조선시대 | 목조, 5량, 팔작지붕 | 81.4m2 | ||
아래채 | 조선시대 | 목조, 3량, 맞배지붕 | 83.2m2 | ||
대문채 | 1991년 | 목조, 3량, 맞배지붕 | 81.3m2 | ||
사당 | 조선시대 | 목조, 5량, 맞배지붕 | 72.2m2 | ||
별묘 | 조선시대 | 목조, 3량, 맞배지붕 | 46.4m2 | ||
계정 | 조선시대 | 목조, 3량가, 초가지붕 | 13.9m2 | ||
대산루 | 조선시대 | 목조, 5량가, 팔작지붕 | 111.6m2 | ||
계 | 631.7m2 |
4. 문화적 가치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禹伏) 정경세와 그 후손들의 생활 공간이자 조선 시대 양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다. 종택 자체의 건축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먼저 지어진 별서인 계정과 대산루가 시대에 따라 기능을 달리하며 종택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대산루의 독특한 T자형 평면은 영남 지방 반가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2]
또한,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詩文板)을 소장하고 있으며,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 시대의 제례 문화가 현재까지 잘 전승되고 있어 살아있는 민속 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2] 이처럼 상주 우복 종택은 역사적, 학술적, 민속적, 건축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지니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2]
4. 1. 별서 건축
우복(禹伏) 정경세(1563~1633)는 1602년 대산루(大山樓)를 짓고 1603년 별서 기능을 가진 계정(溪亭)을 지었다.[2] 이후 그의 고손자인 주원(柱元)은 영조가 하사한 사패지(賜牌地)에 종택을 건립하였다.[2]종택보다 먼저 지어진 계정과 대산루는 처음에는 별서로 사용되었으나, 종택이 건립된 후에는 종택의 별당(別堂)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접빈공간)으로 기능이 변화하였다.[2] 특히 대산루의 T자형 평면 구성은 영남 지방의 반가(班家)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2]
이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튼 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종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남 지방의 반가이다.[2]
또한,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詩文板)을 소장하고 있고,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 시대의 제례 문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어 역사적·학술적·민속적·건축적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보존할 가치가 있다.[2]
4. 2.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종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건축적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남 지방의 반가이다.[2] 종택보다 먼저 지어진 계정과 대산루는 본래 별서의 기능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택의 별당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기능이 변화하였다. 특히 대산루의 T자형 평면 구성은 영남 지방의 다른 반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2] 또한, 정조 임금이 하사한 시문판을 보관하고 있고,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시대의 제례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학술적·민속적·건축적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2]참조
[1]
간행물
문화재청공고제2018-239호(국가지정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지정예고)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18-07-13
[2]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8-149호(국가지정문화재 지정〈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 상주 우복 종택〉)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1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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