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무라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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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샴무라마트는 기원전 9세기에 활동한 아시리아의 여왕으로,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섭정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시리아 비문에서 "Sammu-rāmat"으로 표기되며, 서셈어 또는 동셈어 아카드어에서 유래되었다. 샴무라마트는 파자르지크 석비에 아들과 함께 쿰무흐 왕국에 대한 군사 원정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아수르에서 발견된 석비는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인 권력을 보여준다. 샴무라마트는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의 주요 영감으로 여겨지며, 세미라미스 전설은 고대 근동의 여러 인물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크테시아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루스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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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무라마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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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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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삼무-라마트 또는 삼무-라마트 |
원어 | 아카드어: Sammu-rāmat 또는 Sammu-ramāt |
배우자 | 샴시-아다드 5세 |
자녀 | 아다드-니라리 3세 |
출생 | 기원전 850년경 |
사망 | 기원전 798년경 (52세 추정) |
직함 | |
칭호 | 궁궐의 여인 |
생애 및 통치 | |
활동 시기 | 기원전 9세기 |
역할 | 신아시리아 제국의 여왕 |
주요 활동 | 아들인 아다드-니라리 3세가 어렸을 때 섭정 역할을 함 |
가족 관계 | |
시아버지 | 살만에세르 3세 |
기타 정보 | |
관련 전설 | 셈족 전설에서 샴무라마트는 세미라미스의 원형으로 여겨짐 |
2. 이름의 어원
샴무라마트의 이름은 아시리아 비문에서 .''sa-am-mu''–''ra-mat'' (Sammu-rāmat, Sammu-ramāt 또는 Šammu-ramat로 음역)으로 표기되며 서셈어 또는 동셈어 아카드어에서 유래되었다. 서셈어에서는 šmyrm 또는 šmrmt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이름의 가장 유력한 어원은 서셈어와 아카드어 모두에서 흔한 이름 원형을 따르는데, 서셈어에서는 -rāmu/rāmat ("은 존귀하다"), 아카드어에서는 -ramāt ("은 사랑받는다")의 형태이며, 여기서 은 신성 요소이다. Sammu는 ''dsa(-a)-mu'' ("붉은")로 표현되며, 신아시리아 시대에 기록이 빈약한 신의 이름이었다.
샴무라마트는 기원전 850년경에 태어났다. 샴무라마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동시대 자료에서 알려진 바가 없다. 후대의 고전적 전통에서는 샴무라마트를 레반트 출신 또는 토착 아시리아인/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 다양하게 묘사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러 가지 다른 기원을 제시했지만, 그러한 제안은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1910년, 칼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레만-하우프트는 그녀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공주였을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빌헬름 아이를러스는 1971년에 그녀가 우라르투 출신의 공주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고, 1991년에는 바이네펠트가 그녀가 아스칼론 출신의 공주라고 제안했다. 아스칼론은 아시리아 제국의 당시 야망을 훨씬 벗어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아시리아 왕이 외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도시 출신의 사람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아스칼론은 출신지로 보기에 타당하지 않다. 2001년, 제이미 노보트니는 그녀가 시리아 출신의 아시리아 또는 아람 공주였을 수 있으며, 아마도 카르케미시, 구르굼, 남리, 쿠에, 파티나, 수브리아, 비트 아디니 또는 사말 출신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고대 그리스 자료에서 샴무라마트의 이름은 세미라미스/Σεμιραμιςel와 세무라미스/Σεμυραμιςel의 형태로 나타난다. 기원전 1세기 고대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이 이름이 궁극적으로 "비둘기"를 뜻하는 아시리아/아카드/바빌론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Σεμι- (Semi-)를 아카드어 summatu 또는 summu (비둘기)와 동일시하는 어원을 근거로 한다고 주장했다.[3] 7세기 유대교 미드라쉬 레위기 라바는 이 이름의 어원을 서셈어 šmy rʻm ("하늘의 천둥")으로 추적하며, 그녀가 천둥 속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과 연관시킨다. 1991년, 모세 바이펠드는 이 이름이 페니키아어 šmm rmm ("높은 하늘")에서 유래했다고 제안했다.[4]
3. 역사적 배경 및 기원
4. 샴무라마트의 통치
샴무라마트의 이례적인 권력과 영향력은 여러 증거를 통해 확인된다.
파자르지크 석비는 현대 파자르지크 근처에 아다드 니라리 3세가 세운 경계석으로, 샴무라마트가 시리아의 쿰무흐 왕국에 대한 군사 원정에 아들과 동행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대 아시리아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알려진 사례이다. 원정에서 아시리아는 쿰무흐 왕 우슈필룰루메와 그 동맹군을 격파했고, 샴무라마트와 아다드 니라리 3세는 공동으로 경계석을 세웠다. 석비에는 아다드-니라리 3세를 "아시리아 왕 샴시-아다드 5세의 아들, (그리고) 아시리아 왕 샴시-아다드 5세의 여왕, 아다드-니라리의 어머니, 강력한 왕, 아시리아 왕, 살마네세르의 며느리, 사방의 왕"으로 칭하며, 왕들이 일반적으로 부계 혈통만 언급했던 것과 달리 샴시-아다드 5세와 샴무라마트 모두로부터의 혈통을 밝히고 있어 중요하다.
아수르에서 발견된 샴무라마트의 석비 사진 및 그림
''스텔렌라이헨'' (아수르에 세워진 일련의 석비)에서 샴무라마트의 석비는 예외적인 여성만이 세울 수 있었던 석비 중 하나이다.
칼후에서 발견된 두 개의 동일한 조각상 비문에는 샴무라마트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벨-타르시-일루마가 신 나부에게 헌정하면서 아시리아 왕 아다드 니라리 3세와 여왕 샴무라마트의 생명을 위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1. 권력과 영향력의 증거
샴무라마트의 이례적인 권력과 영향력은 여러 증거를 통해 확인된다.
파자르지크 석비는 현대 파자르지크 근처에 아다드-니라리 3세가 세운 경계석으로, 샴무라마트가 시리아의 쿰무흐 왕국에 대한 군사 원정에 아들과 동행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대 아시리아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알려진 사례이다. 원정에서 아시리아는 쿰무흐 왕 우슈필룰루메와 그 동맹군을 격파했고, 샴무라마트와 아다드-니라리 3세는 공동으로 경계석을 세웠다. 석비에는 아다드-니라리 3세를 "아시리아 왕 샴시-아다드의 아들, (그리고) 아시리아 왕 샴시-아다드의 여왕, 아다드-니라리의 어머니, 강력한 왕, 아시리아 왕, 살마네세르의 며느리, 사방의 왕"으로 칭하며, 왕들이 일반적으로 부계 혈통만 언급했던 것과 달리 샴시-아다드와 샴무라마트 모두로부터의 혈통을 밝히고 있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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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렌라이헨'' (아수르에 세워진 일련의 석비)에서 샴무라마트의 석비는 예외적인 여성만이 세울 수 있었던 석비 중 하나이다.
칼후에서 발견된 두 개의 동일한 조각상 비문에는 샴무라마트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벨-타르시-일루마가 신 나부에게 헌정하면서 아시리아 왕 아다드-니라리와 여왕 샴무라마트의 생명을 위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세미라미스 전설
샴무라마트는 오랫동안 전설적인 아시리아의 여전사이자 영웅인 세미라미스의 주요 영감으로 인식되어 왔다.[5][7] 세미라미스 전승은 고대 근동의 다른 여러 실존 인물 및 신화적 인물들에게서도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후대의 아시리아 배필들인 아탈리아 (사르곤 2세의 아내)와 나키아 (센나케리브의 아내) 등이 있다. 세미라미스 전설에 관한 쐐기 문자 기록은 남아있지 않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는 원래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토착 전설에서 유래하여, 이후 페르시아어 문학과 그레코-로마 문학으로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설은 오늘날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와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크테시아스의 저술을 통해 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샴무라마트는 재색을 겸비하였고, 사치와 허영을 좋아하며 호색하고 잔학무도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리아의 여신 데르케토와 어느 시리아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버림을 받아, 비둘기에게 교육을 받았다. 성장한 후, 니네베의 수도를 건축했던 아시리아 왕 니누스의 총애를 받아 왕자 니뉴아스를 낳았다. 그러나 최후에는 니뉴아스에게 배반당하게 되었는데, 신탁을 보다 니뉴아스의 모반을 알고 그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비둘기가 되어 승천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향년 62세, 섭정으로서 재위는 42년에 달하였다. 또, “니누스 왕은 세미라미스가 독살하였다”라는 전설이 남아 있으며, 이것은 전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독살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세미라미스는 아스칼론에서 레반트의 인간과 그리스 여신 데르케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데르케토는 아프로디테를 화나게 한 결과로 평범한 레반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딸을 낳았지만, 나중에 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를 죽이고 딸을 버린 후 호수에 몸을 던졌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인어와 같은 존재로 변했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후 아스칼론과 레반트 지역의 주민들은 더 이상 물고기를 먹지 않고, 대신 물고기를 신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아기 세미라미스는 비둘기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는데, 비둘기들은 날개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먹이를 주다가 결국 심마스라는 목동에게 발견되어 입양되었다. 세미라미스가 아스칼론과 물고기 숭배와 관련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 나부가 때때로 물고기, 인어와 연결되었으며, 그의 신전과 도상학에 인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샴무라마트를 언급한 벨-타르시-일룸마의 신전 헌정문이 나부의 신전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역사적 여왕과 허위적인 연관성을 추론할 수 있다. 아스칼론에 네보(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나부의 서부 셈족 버전)의 숭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이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영감, 특히 세미라미스가 비둘기와 연결되고 세미라미스와 그녀의 어머니가 연인을 죽이는 것과 관련된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이슈타르일 수 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왕들은 도상학에서 이슈타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샴무라마트가 은퇴하여 신전 여인이 되었다면, 이는 그녀를 신성한 인물로 지정하는 후대 전통의 영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전설에서 세미라미스는 니누스 (순전히 전설적인 인물)의 아내가 되는데, 니누스는 니네베와 아시리아 제국의 전설적인 창시자이며,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그의 아내에게 가려지는 인물이다. 크테시아스는 세미라미스와 아시리아 제국의 건국 시기를 기원전 2166년으로 추정했다. 크테시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세미라미스는 처음에는 아시리아 장군 오네스와 결혼했으며, 그와 함께 두 자녀를 두었다. 오네스는 박트라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니누스와 함께 싸운 것으로 묘사된다. 포위 공격이 길어지자, 그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부르는 메시지를 보냈고, 세미라미스는 이를 군사 지원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녀는 전쟁에 대비하고 옷과 갑옷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세미라미스는 장비를 갖추는 과정에서,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나중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바지의 전신인, 착용자의 성별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긴 소매 바지를 발명했다. 박트라에 도착한 세미라미스는 숙련된 전사임을 증명하고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니누스의 존경과 매력을 얻었다. 니누스가 오네스에게 아내를 넘기지 않으면 눈을 멀게 하겠다고 위협하자, 오네스는 스스로 목을 맸다. 그 후, 세미라미스는 니누스의 아내가 되었다. 왕이 장군의 아내를 빼앗는 것은 아시리아 역사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미상의 날짜에 한 관리가 왕실의 하렘에 자신의 아내가 들어간 일로 인해 왕에게 반역했다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진다.
크테시아스의 기록에서 고대 이슈타르를 연상시키는 용맹한 여성으로 묘사되었지만, 세미라미스와 데르케토는 후대의 작품에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인물로 변형되기도 했다. 기원전 1세기의 ''니누스 로망스''에서 니누스와 세미라미스는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만나는 비극적인 연인으로 묘사된다. 이 이야기에서, 이제 데르케이아라고 불리는 데르케토는 로맨스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상한 어머니이며, 세미라미스는 혀가 짧고 수줍어하며 우는 십대이다.
크테시아스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기록에서 니누스는 결혼 당시 나이가 많았으며, 아들 니니아스가 태어난 직후 사망한다. 니누스가 죽고 니니아스가 어리다는 것은 세미라미스가 제국을 통치하게 만든다. 세미라미스는 니누스의 무덤 위에 거대한 흙무덤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사용하여 니네베를 장식하고, 그의 무덤을 자신의 힘과 권력의 기념비로 만들었다. 나중에는 장군, 관리, 그리고 이전 연인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몇 개의 흙무덤을 더 건설했는데, 때로는 산 채로 묻기도 했다. 남편이 세운 니네베에 맞서기 위해, 세미라미스는 이후 바빌론을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크테시아스는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이를 후대의 왕에게 귀속시킨다. 샴무라마트가 바빌론 출신이라는 근거 없는 추측 외에는, 샴무라마트와 바빌론 사이의 역사적 연관성이나, 아닷-니라리 (바빌로니아를 통치하지 않음) 통치 하에 바빌론에서 건설된 건축물에 대한 증거는 없다.
전설 속의 세미라미스는 또한 아르메니아와 인도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이끈 것으로 묘사된다. 세미라미스와 아르메니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닷-니라리의 원정, 그중 일부가 우라르투 (아르메니아의 전신)를 상대로 한 원정에 대한 기억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 아닷-니라리의 빈번한 적 중 한 명은 샴무라마트의 동시대인이었던 메누아의 아들 우라르투의 아르기쉬티 1세였는데, 그는 나중에 세미라미스의 이름을 따서 샤미람 운하로 불리게 된 거대한 운하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과 유사한 인도 원정은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세미라미스가 인도 왕에게 두 번 부상을 입고 물러나야 했던 유일한 실패였다고 한다. 크테시아스의 이야기 등 여러 전설에서, 세미라미스의 삶은 그녀가 남성들과 군사 활동을 피했던 나약한 남자, 그녀의 아들 니니아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끝을 맺는다. 서기 2세기의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니니아스는 세미라미스가 그와 성관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고 한다. 성적 탐욕에 대한 비난은, 그들의 특이한 지위 때문에, 그리고 과부들에게 자주 역사적으로 쏟아졌다. 다른 몇몇 후대의 전통에서는 세미라미스가 말과 성관계를 갖고 스스로 불에 타 자살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묘사는, 세미라미스가 연인들을 죽이고 왕좌를 잃을까 두려워 재혼하지 않았다는 크테시아스의 이야기와 같은, 더 오래된 전설의 버전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전설의 여왕 세미라미스는 일반적으로 신화 속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시리아 기록에는 세미라미스가 실제로는 샴무라마트를 그리스어로 변형시킨 인물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물론 이러한 동일시에는 이견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샴무라마트가 죽은 후 수메르 신의 칭호를 받았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여성이면서도 통치를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아시리아인들은 샴무라마트를 특별히 존경했고, 샴무라마트의 통치 성과(파괴적인 내전 이후 제국의 안정과 강화 포함)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졌기 때문에 샴무라마트는 결국 신화적 인물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르주 루는 훗날 그리스인과 이란 민족 (페르시아인과 메디아 왕국 사람들)이 세미라미스 신화를 만들어낸 것은 샴무라마트가 이러한 민족에게 군사적으로 성공했고, 그런 제국을 지배하는 여성이 특이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5. 1. 크테시아스의 기록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샴무라마트는 아스칼론에서 레반트의 인간과 그리스 여신 데르케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데르케토는 아프로디테를 화나게 한 결과로 평범한 레반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딸을 낳았지만, 나중에 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여 그를 죽이고 딸을 버린 후 호수에 몸을 던졌다. 이로 인해 그녀는 인어와 같은 존재로 변했다.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후 아스칼론과 레반트 지역의 주민들은 더 이상 물고기를 먹지 않고, 대신 물고기를 신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아기 샴무라마트는 비둘기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는데, 비둘기들은 날개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먹이를 주다가 결국 심마스라는 목동에게 발견되어 입양되었다.어린 샴무라마트는 처음에는 아시리아 장군 오네스와 결혼했으며, 그와 함께 두 자녀를 두었다. 오네스는 박트라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니누스와 함께 싸운 것으로 묘사된다. 포위 공격이 길어지자, 그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부르는 메시지를 보냈고, 샴무라마트는 이를 군사 지원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녀는 전쟁에 대비하고 옷과 갑옷을 사용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샴무라마트는 장비를 갖추는 과정에서,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나중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바지의 전신인, 착용자의 성별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긴 소매 바지를 발명했다. 박트라에 도착한 샴무라마트는 숙련된 전사임을 증명하고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니누스의 존경과 매력을 얻었다. 니누스가 오네스에게 아내를 넘기지 않으면 눈을 멀게 하겠다고 위협하자, 오네스는 스스로 목을 맸다. 그 후, 샴무라마트는 니누스의 아내가 되었다.
크테시아스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기록에서 니누스는 결혼 당시 나이가 많았으며, 아들 니니아스가 태어난 직후 사망한다. 니누스가 죽고 니니아스가 어리다는 것은 샴무라마트가 제국을 통치하게 만든다. 샴무라마트는 니누스의 무덤 위에 거대한 흙무덤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사용하여 니네베를 장식하고, 그의 무덤을 자신의 힘과 권력의 기념비로 만들었다. 나중에는 장군, 관리, 그리고 이전 연인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몇 개의 흙무덤을 더 건설했는데, 때로는 산 채로 묻기도 했다. 남편이 세운 니네베에 맞서기 위해, 샴무라마트는 이후 바빌론을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크테시아스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샴무라마트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디오도루스 시쿨루스는 이를 후대의 왕에게 귀속시킨다.
전설 속의 샴무라마트는 또한 아르메니아와 인도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이끈 것으로 묘사된다. 샴무라마트와 아르메니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닷-니라리의 원정, 그중 일부가 우라르투 (아르메니아의 전신)를 상대로 한 원정에 대한 기억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과 유사한 인도 원정은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샴무라마트가 인도 왕에게 두 번 부상을 입고 물러나야 했던 유일한 실패였다고 한다. 크테시아스의 이야기 등 여러 전설에서, 샴무라마트의 삶은 그녀가 남성들과 군사 활동을 피했던 나약한 남자, 그녀의 아들 니니아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끝을 맺는다.
5. 2. 다른 기록들
전설에 따르면, 샴무라마트는 재색을 겸비하였고, 사치와 허영을 좋아하며 호색하고 잔학무도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리아의 여신 데르케토와 시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버림받아 비둘기에게 교육받았다. 성장 후, 니네베를 건설한 아시리아 왕 니누스의 총애를 받아 왕자 니뉴아스를 낳았으나, 결국 니뉴아스에게 배반당했다. 신탁을 통해 니뉴아스의 모반을 알고 권력을 넘겨준 뒤 비둘기가 되어 승천했다고 전해지며, 향년 62세에 섭정으로서 42년간 재위했다. 니누스 왕은 세미라미스에게 독살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는 전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독살 사건 중 하나이다.후대의 여러 기록들 또한 샴무라마트를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기 2세기의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니니아스는 세미라미스가 그와 성관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고 한다. 성적 탐욕에 대한 비난은, 그들의 특이한 지위 때문에, 그리고 과부들에게 자주 역사적으로 쏟아졌다. 다른 몇몇 후대의 전통에서는 세미라미스가 말과 성관계를 갖고 스스로 불에 타 자살했다고 비난했다.
6. 한국과의 관계 및 현대적 의의
참조
[1]
웹사이트
Sammu-ramat(queen of Assyria)
http://www.britannic[...]
2013-01-04
[2]
논문
プロコピオス『秘史』──翻訳と註(1)
[3]
문서
ルートヴィヒ・マクシミリアン大学ミュンヘン(ドイツ)教授
[4]
간행물
Sammu-ramat
https://epub.ub.uni-[...]
The Neo-Assyrian Text Corpus Project
[5]
웹사이트
Sammu-Ramat and Semiramis: The Inspiration and the Myth
http://www.ancient.e[...]
2016-04-13
[6]
서적
Ancient Iraq
Penguin Books
[7]
문서
Georges Roux - Ancient Ir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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