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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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산성 전투는 554년에 백제, 가야, 왜 연합군과 신라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약화된 틈을 타 한강 유역을 두고 경쟁하였고, 신라가 한강 이남을 차지하자 백제 성왕은 왜와 가야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전투 초반에는 백제 연합군이 관산성을 함락하는 등 우위를 점했지만, 신라군의 반격으로 백제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군은 대패했다. 이 전투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으며, 백제는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왕권이 약화되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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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관산성 전투 |
시기 | 554년 |
장소 | 신라 관산성 (현재 충청북도 옥천) |
결과 | 신라의 승리, 백제ㆍ가야ㆍ왜 연합군의 패배, 백제 성왕 사망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신라 |
교전국 2 | 백제 가야 왜 |
지휘관 및 지도자 | |
신라 | 신라 진흥왕 김무력 우덕 탐지 도도 |
백제, 가야, 왜 | 백제 성왕 부여창 모노노베노 마가무 가야 고전해 왜 쓰쿠시노 구니노미야쓰코 |
병력 규모 | |
신라 | 불명 |
백제, 가야, 왜 | 좌평 4명과 군사 2만 9600명 전멸 |
피해 규모 | |
신라 | 불명 |
백제, 가야, 왜 | 좌평 4명과 군사 2만 9600명 전멸 |
2. 원인
551년에 나제 동맹(433~553)을 맺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가 내부에 큰 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평양을 공격해 죽령 이북 10개군을 빼앗았다. 한강 이북을 확보한 신라는 군현을 설치하여 방어 체계를 갖춰 나갔으며, 다시 북진하자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나제 동맹 중이었던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고, 552년 신라와 고구려가 형식적으로 정전이 성사되었다.[1]
이와 같은 정황은 일본서기에서도 나타난다. 552년 혹은 553년 5월에 백제에서 중부(中部) 덕솔 목리금돈(木刕今敦) 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일본에 보내었는데,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하여 '백제와 임나'를 공격하고자 하니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한다.[2]
한편, 외교 관계가 고립된 백제의 성왕은 한강 이남을 포기하고 군사를 물렸다. 이에 신라의 진흥왕은 553년 7월 군사를 파병하여 한강 이남까지 확보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으며 그 예하에 신주정(新州停)을 두었지만 나제동맹은 파기되었다.
553년 9월, 성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요청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의 소비(小妃)로 삼게 한 뒤, 554년 7월 왜군이 도착하자 태자 부여창으로 하여금 왜와 가야를 동원해서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성왕도 전사하면서, 끝까지 적으로 지내게 된다.
2. 1. 나제 동맹의 형성과 결렬
551년, 나제 동맹(433~553)을 맺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내분이 발생하자, 이를 틈타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 이북 10개 군을 빼앗았다.[1] 고구려는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였고, 552년 신라와 고구려는 형식적으로 정전이 성립되었다.[1]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 혹은 553년 5월에 백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하여 '백제와 임나'를 공격하고자 하니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2]
성왕은 한강 이남을 포기하고 군사를 물렸고, 이에 신라 진흥왕은 553년 7월, 군사를 보내 한강 이남까지 확보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1] 이로써 나제동맹은 파기되었다.
553년 9월, 성왕은 왜에 군대를 요청하였으며, 554년 7월 왜군이 도착하자 태자 부여창으로 하여금 왜와 가야를 동원해서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1]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성왕도 전사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적대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2. 2. 백제의 고립과 신라-고구려 화친
551년 나제 동맹(433~553)을 맺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내부 혼란을 틈타 남평양을 공격해 죽령 이북 10개 군을 빼앗았다. 한강 이북을 확보한 신라는 군현을 설치하고 방어 체계를 갖췄으며, 백제의 북진 요청을 거절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에 화친을 요청, 552년 신라와 고구려가 형식적으로 정전이 성사되었다.[1]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 혹은 553년 5월 백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으로 '백제와 임나'가 공격받을 위협에 놓여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한다.[2]
외교적으로 고립된 백제의 성왕은 한강 이남을 포기하고 군사를 물렸다. 553년 7월, 신라 진흥왕은 군사를 보내 한강 이남을 확보하고 신주(新州)를 설치, 나제동맹은 파기되었다.
553년 9월, 성왕은 왜에 군대를 요청하고, 10월에는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의 소비(小妃)로 삼게 했다. 554년 7월 왜군이 도착하자 태자 부여창은 왜와 가야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크게 패하고 성왕도 전사하면서 양국은 적대 관계로 남게 되었다.
2. 3. 백제의 군사적, 외교적 노력
551년 나제 동맹(433~553)을 맺고 있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내부 혼란을 틈타 남평양을 공격해 죽령 이북 10개 군을 빼앗았다. 한강 이북을 확보한 신라는 군현을 설치하고 백제의 북진 요청을 거절했다. 552년 신라와 고구려는 형식적으로 정전이 성사되었다.[1]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 혹은 553년 5월 백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하여 '백제와 임나'를 공격하려 하니 선제공격을 계획한다고 전한다.[2]
성왕은 한강 이남을 포기하고 군사를 물렸으나, 신라 진흥왕은 553년 7월 한강 이남까지 확보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553년 9월, 성왕은 왜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고, 10월에는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소비(小妃)로 보내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3. 전개 과정
3. 1.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공격
3. 2. 신라의 반격과 성왕의 죽음
진흥왕은 신라의 장군 김무력으로 하여금 원군을 출병시켰고, 관산성으로 향하던 신라의 원군은 신라의 영토인 대본영(大本營)으로 향하던 성왕을 구천(狗川)에서 사로잡았다.[3] 그리고 신라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백제 성왕을 처형하였다.[5][6]4. 결과
400년, 404년 아신왕 때처럼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는 백제의 주력군 말고도 가야와 왜국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서기》긴메이키(欽明紀)에 보면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기부련(物部莫奇武連)의 군사를 앞세워 함산성(函山城, 管과 函은 같은 뜻)을 공격하게 했다. 관산성은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하류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지였다. 12월 9일 유시(酉時)에 연합군은 관산성을 불태우고 함락시켰다. 이때 신라에서는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등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에 맞섰지만, 부여창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모두 격파당하고 드디어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연합군 요새가 수축되었다.
4. 1. 백제의 피해
《일본서기》 긴메이키(欽明紀)에 따르면, 백제는 가야, 왜국의 원병과 함께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기부련(物部莫奇武連)의 군사를 앞세워 함산성(函山城, 관산성)을 공격했다. 관산성은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지였다. 12월 9일 유시(酉時)에 연합군은 관산성을 불태우고 함락시켰으며, 이때 신라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백제군에 맞섰지만 부여창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격파당했다. 이후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연합군 요새가 수축되었다.《삼국사기》에는 좌평 4명과 29,600명의 백제군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김유신 열전에는 1만여 명의 백제군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정확한 군사적 피해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성왕과 주요 귀족들의 죽음으로 백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4. 2. 신라의 승리와 영향
신라는 관산성 전투의 승리로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백제는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신라에 합병되었다. 《일본서기》긴메이키(欽明紀)에 따르면, 554년 12월 9일 유시(酉時)에 백제는 가야, 왜국의 연합군과 함께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기부련(物部莫奇武連)의 군사를 앞세워 관산성(함산성)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함락시켰다. 관산성은 신라가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에서는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에 맞섰지만, 부여창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모두 격파당했다.5. 평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관산성 전투 초반에는 백제가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7] 이희진 교수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에는 좌평 네 명과 29,600명의 백제군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7] 김유신 열전에는 김무력이 백제왕과 장수 네 명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어[8] 수치에 차이가 있다. 이희진 교수는 김무력 부대 자체의 성과가 1만여 명이며, 다른 신라군의 성과가 합쳐져 29,600명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탐지와 우덕이 이끌던 신라군이 연합군에게 격파당한 상황에서, 백제ㆍ왜ㆍ가야 연합군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김무력 부대뿐이었고, 다른 신라군 부대가 1만에 준하는 전과를 올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9]
신라에서의 논공행상 과정을 보면, 신라군 지휘부의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신주군주 김무력의 행보는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탐지는 관산성 전투 이후 《삼국사기》에서 더 이상 이름을 찾아보기 힘든 반면, 김무력은 승승장구하여 후손들까지 신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아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탐지가 김무력에 비해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패배한 책임을 물어 실각당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10]
이희진 교수는 성왕이 처음부터 백제 주력군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으며, 《삼국사기》에서 성왕이 데리고 간 50명은 경호병력이자 주요 측근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왕이 불과 50명으로 야습을 감행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며, 측근까지 대동한 것은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태자 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에 의해 관산성이 함락된 직후, 후방에서 호위병을 이끌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산성으로 오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입은 타격은 군사적인 측면보다는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더 컸다. 일본서기에서 '기로(耆老)' 혹은 '노신(老臣)'으로 대표되는 백제 유력귀족들은 전쟁을 극구 반대했고, 전쟁을 밀어붙인 것은 백제군을 최전방에서 지휘하던 창이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귀족들 앞에서 왕권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성왕과 태자 창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나 관산성이 이미 함락된 상황에서 성왕이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죽고, 성왕의 정책을 지지하고 추진할 측근, 즉 《삼국사기》에서 '네 명의 좌평'으로 대표되는 요인들까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전쟁을 반대했던 귀족들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백제의 왕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5. 1. 전투 초반 백제의 우세 (이희진 교수)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관산성 전투 초반에는 백제가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7] 이희진 교수는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에는 좌평 네 명과 29,600명의 백제군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7] 김유신 열전에는 김무력이 백제왕과 장수 네 명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어[8] 수치에 차이가 있다. 이희진 교수는 김무력 부대 자체의 성과가 1만여 명이며, 다른 신라군의 성과가 합쳐져 29,600명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탐지와 우덕이 이끌던 신라군이 연합군에게 격파당한 상황에서, 백제ㆍ왜ㆍ가야 연합군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김무력 부대뿐이었고, 다른 신라군 부대가 1만에 준하는 전과를 올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9]신라에서의 논공행상 과정을 보면, 신라군 지휘부의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신주군주 김무력의 행보는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탐지는 관산성 전투 이후 《삼국사기》에서 더 이상 이름을 찾아보기 힘든 반면, 김무력은 승승장구하여 후손들까지 신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아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탐지가 김무력에 비해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패배한 책임을 물어 실각당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10]
이희진 교수는 성왕이 처음부터 백제 주력군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으며, 《삼국사기》에서 성왕이 데리고 간 50명은 경호병력이자 주요 측근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왕이 불과 50명으로 야습을 감행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며, 측근까지 대동한 것은 처음부터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태자 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에 의해 관산성이 함락된 직후, 후방에서 호위병을 이끌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산성으로 오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입은 타격은 군사적인 측면보다는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더 컸다. 일본서기에서 '기로(耆老)' 혹은 '노신(老臣)'으로 대표되는 백제 유력귀족들은 전쟁을 극구 반대했고, 전쟁을 밀어붙인 것은 백제군을 최전방에서 지휘하던 창이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귀족들 앞에서 왕권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성왕과 태자 창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나 관산성이 이미 함락된 상황에서 성왕이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죽고, 성왕의 정책을 지지하고 추진할 측근, 즉 《삼국사기》에서 '네 명의 좌평'으로 대표되는 요인들까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전쟁을 반대했던 귀족들의 발언권이 커지면서 백제의 왕권은 위협받게 되었다.
5. 2. 백제 왕권 약화와 정책 변화
성왕과 측근들의 죽음으로 백제 왕권은 약화되었고, 전쟁을 반대했던 귀족들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일본서기》에서 '기로(耆老)' 혹은 '노신(老臣)'으로 대표되는 백제 유력귀족들은 창이 백제군을 최전방에서 지휘하며 밀어붙인 신라에 대한 공격을 극구 반대했다. 왕권의 입지를 더 넓히기 위해서도 성왕과 태자 창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런데 관산성이 이미 함락된 상황에서 성왕이 뜻하지 않게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죽고, 성왕뿐 아니라 성왕의 정책을 지지하고 추진할 측근, 《삼국사기》에서 '네 명의 좌평'으로 대표되는 요인들까지 함께 목숨을 잃었다. 반대로 처음 전쟁을 반대했던 귀족들의 발언권이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한층 더 커지면서 백제의 왕권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대고구려전에 비중을 두던 백제의 정책 기조는 관산성 전투를 기점으로 대신라전으로 옮겨갔으며, 이후 백제는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가야 지역은 신라에 합병되었다.6. 역사적 의의
7. 대중문화 속 관산성 전투
참조
[1]
서적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흥왕
[2]
웹인용
권제19 천국배개광정천황(天國排開廣庭天皇;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스메라미코토) 흠명천황(欽明天皇;킨메이텐노)
http://contents.nahf[...]
2024-09-18
[3]
서적
후백제 견훤정권 연구
[4]
서적
삼국사기
[5]
서적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6]
서적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
[7]
서적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조
[8]
문서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9]
서적
가야정치사연구
[10]
서적
전쟁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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