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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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두수는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경성 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진남포 상공학교와 이화여전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으로 서야두수로 개명했으나 해방 후 서두수로 복귀했다. 해방 후 연희전문, 서울대학교 등에서 국문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서울대학교 교무처장을 지냈다. 미국 유학 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한국학 연구와 강의를 했다.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설립에 기여하고 보스턴 한인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워싱턴 대학교에서 명예부교수로 은퇴 후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나 해임되었으며, 1994년 사망했다. 경성 제국 대학 국문학(일본문학)을 전공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일제시대 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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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수 (교수)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서두수 |
| 출생 | 1955년 10월 21일 |
| 학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사 한국과학기술원 석사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박사 |
| 소속 | 카이스트 |
| 직업 | 대학 교수 |
| 경력 | |
| 주요 경력 |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개발실장 (부사장)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카이스트 인공지능대학원 겸직 교수 |
| 학문 분야 | |
| 연구 분야 | 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인공지능 반도체 |
| 수상 | |
| 수상 내역 |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웅비장 IEEE Ernst Weber Award |
2. 생애
서두수는 1907년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 미국에서의 교수 생활 등 격동의 시기를 겪은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 제국 대학에서 일본어문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활동했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어문학으로 전향하여 서울대학교 교무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후에는 하버드 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고광림의 도움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한국학 연구소 설립에 기여했으며, 보스턴 한인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재미 한인 사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62년에는 성균관 대학교 총장으로 잠시 재직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해임되었다.
워싱턴 대학교에서 은퇴한 후에는 보스턴 인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4년 사망하였다.
2. 1. 일제강점기 (1907년 ~ 1945년)
서두수는 1907년 대한제국에서 태어났다. 1925년 경성 제국 대학 예과(예비과) 2회생으로 입학하여, 문과B반에서 공부하였고, 1927년에 국문학 전공(일본어문학)으로 진입하여 1930년 졸업하였다.[1]1934년부터 진남포 상공학교에서 국어과(일본어과) 교사로 재직하였다. 1938년 경에는 이화여전의 국문학(일본문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2]
1941년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창씨개명령에 따라 서두수는 법적 성명을 '''서야두수(徐野斗銖)'''로 변경하였으나,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1946년 조선 성명 복구령이 내려져, 원래 이름인 서두수로 법적 성명을 회복하였다.[3]
2. 2. 해방 이후 한국 활동 (1945년 ~ 1949년)
해방 후 서두수는 일본어문학에서 모국어였던 한국어문학으로 전향하여, 연희전문과 경성대학 등에서 국문학과(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4] 1949년 3월 15일 서울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취임하였으나, 4개월만인 같은 해 7월 15일 제3회 서울대학교 졸업식 날 교무처장직을 사임하였다.[5]2. 3. 미국 유학 및 교수 활동 (1949년 ~ 1977년)
1949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5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하버드 대학교, 워싱턴 대학교 등에서 한국어, 한국문학과 한국학 관련 연구와 강의를 하였다.[4]고광림이 하버드-옌칭 연구소 소장 직무대행이던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설득해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당시) 설립을 도왔고, 고광림의 도움으로 서두수는 한국학 방문부교수로 채용되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학 강의를 바탕으로 한국학 관련 전공이 개설되었는데, 1981년 설립된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연구소(The Korea Institute of Harvard University) 설립소장인 에드워드 와그너가 하버드 한국학 교수가 되어 한국학 강의를 하였다.[6]
1953년 11월 24일, 서두수는 자신을 하버드에 채용하게 도와 준 고광림과 함께 보스턴 한인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이 되고, 고광림은 부회장이 되었다.[7] 3년 계약 종료 후 하버드를 떠난 서두수는 1955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 아시아어문학과에 방문 강사로 채용되었다가,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1977년 명예부교수로 은퇴하였다. 워싱턴 대학교에서는 한국어, 한국문학 고전, 한국의 1인 혹은 2인 가곡 등을 가르치고 연구하였다.[7]
2. 4. 한국 일시 귀국 및 성균관대학교 총장 재임 (1962년 ~ 1963년)
1962년 12월 성균관대학교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이듬해 1963년 6월 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8] 당시 성균관대학교 재단과 이사진은 이승만 정권의 잔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서두수는 이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학내 분규를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재단의 비협조와 방해로 인해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5. 은퇴 이후 (1977년 ~ 1994년)
워싱턴 대학교에서 은퇴한 후에는 머지않아 자식들이 거주하던 보스턴 인근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94년 사망하였다.[7] 워싱턴대 명예부교수로 은퇴할 당시 시애틀에 거주했던 서두수는, 한국어 제자이자 훗날 주 상원의원이 되는 신호범의 자서전에 따르면, 과거 해방 전 일본어문학 전공자로서의 자세와는 완전히 다른 민족주의자가 되어 한복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고, 노크 대신 "이리오너라"하고 말을 하던 조선시대 풍습을 고수하였다고 한다.[8] 서두수는 시애틀에서 한인회장을 맡기도 하였다.[8]3. 국문학사에서의 의미
서두수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국문학 전공(일본어문학과)을 졸업한 유일한 조선 출신 인물이었다. 당시 현대 한국어문학과는 조선어문학과로 불렸다. 서두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경성제국대학 국문학(일본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일제시대 문학사 연구와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경성제국대학 국문학 전공으로 입학한 또 다른 조선인으로는 최성희가 있었으나, 최성희는 이후 법학부로 전공을 옮겨 서두수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9]
4. 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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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족
2남 4녀를 두었으며, 차남은 MIT 기계공학과 교수를 지낸 서남표이다. 장남은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다.[11]
참조
[1]
서적
'국문학'과 조선문학이라는 제도의 사이에서- 한 식민지 '국문학자'의 학문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韓民族語文學 第54輯
2009-06
[2]
서적
'국문학'과 조선문학이라는 제도의 사이에서- 한 식민지 '국문학자'의 학문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韓民族語文學 第54輯
2009-06
[3]
서적
일제침략과 친일파
청사
1982
[4]
서적
'국문학'과 조선문학이라는 제도의 사이에서- 한 식민지 '국문학자'의 학문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韓民族語文學 第54輯
2009-06
[5]
웹사이트
서울대학교 홈페이지상의 역사기록
http://www.snu.ac.kr[...]
[6]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2-01-06
[7]
웹사이트
History of the Korea Studies Program at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http://jsis.washingt[...]
[8]
서적
기적을 이룬 꿈
삼성문화사
2006-09-25
[9]
서적
'국문학'과 조선문학이라는 제도의 사이에서- 한 식민지 '국문학자'의 학문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韓民族語文學 第54輯
2009-06
[10]
간행물
"서두수의『만엽집(萬葉集)』번역에 관한 연구 -「防人歌(사키모리노우다) : 치졸한 이식」을 중심으로-"
2011
[11]
뉴스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7-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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