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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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상돈은 황해도 재령 출신의 정치인으로, 일본 메이지 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민주국민당, 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4.19 혁명 이후 초대 민선 서울시장을 역임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사직했다.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벌이다 미국으로 망명하여 반독재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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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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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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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직책 | 대한민국의 공무원, 전 강남구청장 |
2. 생애
황해남도 재령군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 학원 신학부와 미국 태평양종교대학 사회사업과에서 수학했다. 유학 중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재미 대한인 국민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문화운동과 농촌교화사업에 참여했다.
1945년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마포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반민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친일 청산에 힘썼으나 이승만 정권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
이후 민주국민당과 민주당에 참여하며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으며, 제3대, 제4대, 제5대 민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4.19 혁명 이후 1960년 실시된 최초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초대 민선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시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군사정권 하에서 정치 활동 규제, 이주당 사건 연루 의혹 등 탄압을 받았다. 1963년 정계에 복귀하여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정치적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반독재 활동을 이어갔다.
2. 1. 초기 활동
황해남도 재령군 출신이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신학부에 입학했다. 메이지 학원 신학부 재학 중에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등에서 활동했다.1925년 메이지 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 취재부 기자로 활동하며 문화운동을 펼쳤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28년 태평양종교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했다. 미국 체류 중에는 재미 대한인 국민회 교육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농촌교화사업을 벌이는 한편, 다시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부역 조직인 망원합정 정대(町代)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1945년 조선일보의 취체역 이사가 되었고, 같은 해 광복을 맞이하자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조선일보사 취체역 이사로는 1950년까지 근무했다. 1948년 남북 협상론과 단독 정부 수립론이 대립할 때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으며, 같은 해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마포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 2. 해방 이후 정치 활동
1949년 반민특위 부위원장으로서 일제 강점기 부일 협력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활동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겪었다. 반민특위에서 사퇴한 뒤 민주국민당에 입당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했으며, 그해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했다.1954년 제3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자유당, 대한국민당 등을 상대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같은 해 호헌동지회에 참여했으며, 1955년에는 자유당 정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여 야당 세력이 연합하여 창당한 민주당에 합류했다. 1957년에는 민주당 중앙훈련소장을 지냈다.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60년 5월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민주당 구파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같은 해 7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자로 출마하여 당선, 초대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선정되어 정치 활동이 규제되자, 경기도 시흥군 안양(현 안양시)으로 내려가 농축업에 전념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이주당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장면 전 총리와 함께 군사 법정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았다. 3개월간의 소송 끝에 1962년 9월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1963년 정치정화법 대상에서 해제되자 정계에 복귀했으며,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곧 정계를 은퇴했다.
2. 3. 군사정권 반대 운동과 망명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서울특별시장 직에서 물러난 후, 군사정권 하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1962년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선정되어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고, 경기도 시흥군 안양(현 안양시)으로 내려가 농축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중앙정보부는 그를 이주당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장면 전 총리와 함께 군사법정에 세웠으나, 3개월간의 재판 끝에 9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1963년 정치정화법 해제와 동시에 정계에 복귀하였다.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잠시 정계를 떠났다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추진이 본격화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정계에 다시 복귀했다. 그는 개헌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70년에는 신민당에 재입당하여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의 출마를 반대하며 박기출, 장준하 등과 함께 탈당하였다. 이후 1972년 10월 17일 윤보선이 조직한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하지만 결국 3선 개헌이 통과되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 기반이 마련되자, 이어질 10월 유신 하에서의 정치적 억압을 예상하며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정치 망명을 선택했다.
미국 망명 중에도 그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1928년 미국에서 재미한국인국민회 교육부장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던 그는, 박정희 정권이 애국심을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반독재 홍보 활동을 이어갔다.
3. 연보
- 일본 메이지가쿠인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 1945년 8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남북 협상 주장이 대립할 때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서 제헌 국회의원(마포구)으로 당선되었다.
- 1948년 10월 23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을 맡았다. (위원장: 김상덕)[1][2]
- 1954년 12월 뉴델리 밀서조작사건 직후, 그의 집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명의로 된 남북 협상을 촉구하는 문서가 투입되는 사건이 있었다.[3]
- 1960년 7월 건국 후 처음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 1961년 5월 20일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서울시장에서 사퇴하였다.
- 1963년 이후 군정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
- 초대(제헌), 제3대, 제4대, 제5대 민의원의원을 역임하였다.
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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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8년 | 총선 | 1대 | 국회의원 | 서울 마포구 | 무소속 | 20,056표 (35.94%) | 1위 | 당선 | 초선 |
1950년 | 총선 | 2대 | 국회의원 | 서울 마포구 갑 | 민주국민당 | 5,342표 (13.19%) | 2위 | 낙선 | |
1954년 | 총선 | 3대 | 국회의원 | 서울 마포구 갑 | 민주국민당 | 9,835표 (52.05%) | 1위 | 당선 | 재선 |
1958년 | 총선 | 4대 | 국회의원 | 서울 마포구 | 민주당 | 44,857표 (79.52%) | 1위 | 당선 | 3선 |
1960년 | 총선 | 5대 | 국회의원 | 서울 마포구 | 민주당 | 59,029표 (77.66%) | 1위 | 당선 | 4선 |
참조
[1]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3
[2]
웹사이트
민족정기의 심판
http://www.history.g[...]
2007-03-22
[3]
서적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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