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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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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범승은 1887년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교토 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며 도서관 설립 운동을 펼쳤고, 경성도서관을 인수하여 운영하며 한국 최초로 어린이 열람실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서울시장을 역임했으며, 제2대 국회의원과 제5대 참의원을 지냈다. 1964년 한국도서관협회 표창을 받았으며, 1976년에 사망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이범승은 1887년 음력 8월 29일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광평대군의 17대손으로 태어났다. 경성부 창신동,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등에서 성장했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경성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나고야의 제8고등학교를 거쳐 1913년 교토 제국대학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법률학을 전공했다. 1918년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서 법제사와 조선법제사를 연구하며 조선에 도서관 설립을 결심하고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1]

1918년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 입사했으나, 1919년부터 도서관 설립 운동을 위해 조선을 오가며 활동했다.[1] 1920년 회사를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와 보성전문학교 강사,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조선에도 도서관을 세워야겠다는 신념으로 조선총독부에 도서관 설립을 꾸준히 건의했다.[1]

191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도서관 설립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으나, 매일신보 사장 아베 노부유키에게 도서관 설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노력을 계속했다.[1]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정책이 바뀌면서, 2년간의 설득 끝에 1921년 총독부의 도서관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는 야마구치 비가 설립한 경성문고를 인수하여 무료 도서관으로 개방하고, 한국 최초로 어린이열람실을 설치했다.

도서관 운영과 함께 문화 강좌를 열어 방정환 등을 초빙하여 동화회를 개최하고, 여성들을 위한 강좌도 개설했다.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윤익선 등이 설립한 취운정 경성도서관을 인수하여 분관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 위원으로 활동했고,[7]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7] 1924년에는 반일운동 배척 단체인 동민회 평의원 겸 이사로 활동했다.[7] 1925년 경성부교육회 평의원, 경기도교육회 대의원에 선출되었다.[7] 그러나 재정난으로 1926년 도서관을 경성부에 기증하게 되었다.[7]

1927년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 취직하여 사무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1] 1932년 황해도청 내무부 산업과장, 경상북도청 이사관 등을 지냈다.[1] 1936년 사직했으나 반려되었고, 1938년 의원면직되었다.[1] 이후 도서관 설립 및 독서 운동을 추진했다.[1]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이 되었고,[1] 1940년 창씨개명을 거절했다.[1] 1941년 명륜전문학원 강사가 되었다.[1]

1945년 광복 후 양주면 자치위원장, 경성부 부부윤으로 추대되었고, 미 군정에 의해 양주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김창영에 이어 서울 시장으로 1945년 10월부터 1946년 5월까지 재직하며 서울시립도서관 설치 조례 제정을 추진했다. 1945년 11월 서울시 인민위원회의 서울시장직 반대 운동이 있었다.

1946년 서울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기미독립선언기념준비회 증선위원, 대동한묵회 이사로 활동했다.[4][5] 1947년 한국인권옹호연맹 위원,[6] 국제연합(UN) 조선지회 이사, 조선적십자회 서울지사 지사장에 위촉되었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했다.[9]

1948년 미군정 노동조정위원회 운영위원이 되었다.[10] 1949년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사장에 선출되었다.[https://www.redcross.or.kr/seoul/branch_history.do?action=list&year=0000] 1950년 6.25 부역자심사위원회 경기도지구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2년 제2대 국회 보궐선거에서 연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 농림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총선에 낙선했다.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에 선출 되었으나, 재정난으로 매각하였다.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반자유당 운동에 참여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0년 제5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어 참의원 지방자치법 개정법률안 심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물러났다.

5.16 군사 정변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장, 유도회(儒道會) 부회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4년 도서관협회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1976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활동 (1887년 ~ 1919년)

1887년(고종 24년) 음력 8월 29일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17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경성부 창신동 590번지,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원서동 9동 등으로 이주하였다.

고향 연기군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경성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나고야의 제8고등학교를 1913년 7월 졸업하고, 같은 해 8월 교토 제국대학 법과대학 법률과에 입학하여 독법학을 전공했다. 1918년 7월 교토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9월 교토 제국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장학생으로 법제사와 조선법제사를 전공하였다. 1918년 무렵 조선에 도서관 설립을 결심하고 관련 연구를 시작하였다.

1919년 7월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1918년 ~ 1945년)

1918년 7월 교토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9월에 동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법제사를 연구, 1919년 7월 수료했다. 1918년 무렵 그는 조선에도 도서관을 설립해야겠다는 뜻을 품고 도서관 관련 연구를 시작하였다.

2. 2. 1. 회사원 생활과 도서관 설립 운동 (1918년 ~ 1920년)

1918년 9월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 1919년 9월부터 도서관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조선을 수시로 오가며 도서관 설립 운동, 홍보 활동을 하였다.[1] 1920년 6월 남만주 철도회사를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잠시 지내다가 잠시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근무했다.

이범승은 우연한 기회에 독서하는 장면을 보고 조선에도 도서관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한다. 도서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조선총독부의 공보국, 학무국 관계자와 시학담당을 상대로 도서관 설립을 건의하게 된다.[1]

2. 2. 2. 도서관 설립 운영 (1919년 ~ 1926년)

1919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도서관 설립을 허가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은 인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1919년 4월 29일 매일신보사 대표이사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에게 조선에 도서관을 설립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며, 조선에 도서관을 설립하는 일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하는 장문의 긴 편지를 보냈다.[1] 1919년 5월 17일부터 5월 23일까지 일주일 동안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도서관 설립 희망”이라는 주제로 어느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3.1 운동 직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일부 일본 지식인들의 건의와 함께 총독부의 정책이 변경되자, 그는 계속해서 총독부에 도서관 설치를 건의하였다.

2년간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계속 설득한 결과, 1921년 총독부는 그에게 도서관 설립 및 운영 허가를 내주었다. 그는 야마구치 비(山口 精)가 1909년(융희 3년) 경성 종로에 설립한 경성문고를 인수하여 무료 도서관으로 개방하였다. 동시에 한국 최초로 도서관 어린이열람실을 설치하여 아동, 청소년 전용 도서시설을 시행하였다.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도서관 설립을 설득해서 허락을 얻은 사연은 곧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도 보도되었다.

도서관 설치와 동시에 문화 강좌를 운영하였다. 특별히 소파 방정환과 정홍교(丁洪敎) 등을 초빙하여 5세 이상 어린이와 보통학교(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회를 개최하였고, 주말을 이용한 문화강좌를 준비, 부인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학술, 위생, 가사 등의 강사를 초빙하여 강좌를 개설하였다. 사정상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어린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일본어, 국어, 산수, 과학 등의 기초교육 프로그램을 2년 단기 과정으로 진행하였다. 야간에도 도서관을 개방, 조선여자청년회 등에 아동열람실을 무료로 대여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한 부인과 여성들에게도 강의를 개설하였다.

취운동에 있던 취운정 경성도서관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취운동의 경성도서관은 1920년 윤익선(尹益善) 등이 1909년 경성일본인 상업회의소 서기장 야마구치 세이(山口精)가 다년간 수집한 도서로 설립한 사설 문고의 장서를 매입, 인수하여 종로구 가회동의 취운정(翠雲亭)에 경성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다. 이범승이 세운 종로 경성도서관과는 같은 이름이었으나 소재지는 달랐다. 윤익선 등이 세운 취운정 경성도서관 역시 재정난으로 운영이 어려워지고 이를 인수하려는 인사가 없자, 이범승이 이를 인수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종로 경성도서관의 분관으로 운영하였다. 이후 윤익선에게 취운정 분관을 운영하게 했다.

2. 2. 3. 사회 활동 (1921년 ~ 1926년)

1921년 6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준비회 준비위원이 되고, 7월 조선인산업대회 위원이 되었다.[7]

1923년에 취운정 분관을 같이 운영하던 윤익선이 만주 간도에 사립중학교인 간도 동흥중학교(間島東興中學校)를 설립, 교장으로 부임하여 떠나면서 취운정의 분관은 문을 닫고, 취운정 분관의 도서는 종로의 본관으로 이관되었고, 이범승은 홀로 경성도서관을 운영하게 되었다.[7] 1923년 3월 윤치호, 조만식, 안재홍, 송진우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민립대학기성회 회원으로도 가입, 활동하였다.[7] 4월 보성전문학교의 강사가 되었다.[7] 1923년 11월 경성부 부협의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7] 1924년 4월 경성부 학교비평회 위원이 되었다.[7]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 단체인 동민회에 가입하고 평의원이 되었으며 본부 이사도 겸하여 동민회 이사 겸 평의원이 되었다.[7] 1925년 3월 경성부교육회 평의원에 선출되고, 같은 해 5월 경기도교육회 대의원에 선출되었다.[7] 1926년 7월 다시 동민회 평의원이 되어 1929년 4월까지 활동했다.[7]

그는 무료 도서관을 운영하며 자신의 사재를 투자했지만 경영난과 은행 부채 등에 시달렸다.[7] 결국 일부 언론과 조선청년 학생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운영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그는 1926년 도서관을 경성부에 기증하게 되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으로 개칭되었다.[7]

2. 3. 일제 강점기 후반 (1927년 ~ 1945년)

1927년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 취직하였다. 이후 총독부 농무과 사무관,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1] 1929년 4월 조선박람회 사무위원이 되었다.[1] 1930년 1월부터 1932년 2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1]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진회 고문에 위촉되었다.[1]

1932년 2월 황해도청 내무부 산업과장, 겸임 황해도청 물산진열관이 되고, 이후 황해도청 내무부 이사관, 경상북도청 이사관 등을 지내고, 1936년 5월 경상북도청 산업부 산업과장을 거쳤다.[1] 그밖에 경성부 학교 평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1] 1936년 6월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되었다.[1] 같은 해 6월 휴직 신청하고 휴직, 대기발령했다가 1938년 6월 휴직 만기가 되었으나 복직하지 않고 다시 사직서를 제출, 의원면직되었다.[1] 이후 도서관 설립 운동 및 전국민 독서하기 운동, 1인 1독서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전국민 독서하기 운동, 1인 1독서 운동에 대한 홍보활동, 순회강연 등을 다녔다.[1]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이 되었다.[1] 1940년 5월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령이 포고, 6개월의 계도기간을 거쳐 창씨개명이 단행되었지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했다.[1] 1940년 9월 경성에서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였고, 1941년 5월 명륜전문학원 강사가 되었다.[1] 그는 조선총독부 공보국으로부터 각종 자원병, 모집병, 학도병 관련 권고문을 내줄 것을 요청, 연락받았지만 거절하거나 회피하였다.[1]

2. 4. 해방 이후 (1945년 ~ 1976년)

1945년 광복 직후, 이범승은 경기도 양주군 양주면(현 의정부시)에서 자치위원장에 추대되었고, 경성부 부부윤으로도 추대되었다. 9월 2일 미 군정에 의해 경기도 양주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0월에 사퇴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김창영에 이어 두 번째 서울 시장에 올라 1945년 10월부터 1946년 5월까지 재직했다. 당시 서울이라는 이름이 확정되기 전이었으며, 이범승은 한성이라는 이름이 좋다면서 스스로를 한성시장으로 불렀다.[3]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서울시립도서관 설치 조례 제정을 추진, 지시하였다. 특히 자신이 인수하여 운영하던 종로의 경성도서관을 경성부립종로도서관(현 서울시립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

1945년 11월 서울시 인민위원회에서 이범승의 서울시장직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가 피검되기도 했다. 11월 13일 경성부청 간부 및 윤보선 등 저명인사들을 대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및 귀국 인사들을 환영하러 김포비행장에 갔다.

1946년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같은 해 2월 14일 기미독립선언기념준비회 증선위원에 선출되어 독립기념관 건립 운동에 참여했다.[4] 3월 3일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 창립에 참여하고, 참여이사로 선출되었다.[5] 5월 9일 건강상의 이유로 서울시 미군정장관 윌슨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여 승인받았다. 8월 16일 경성부 본정 5정목 55번지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정구영 등과 함께 경성법조회 창립에 참여했고, 조선법학회 설립에도 참여하여 12월 3일 조선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서울시 대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7년 인권 운동에도 참여했다. 4월 미국인권옹호연맹 볼드윈의 후원하에 정구영, 이홍종 등과 함께 한국인권옹호연맹을 조직, 4월 23일 경성부 조선호텔에서 결성하고 인권연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6] 이후 해방 정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정치테러 사건에 대한 진상과 피해사실을 조사했다.[7] 10월 국제연합(UN) 조선지회 이사와 조선적십자회 서울지사 지사장에 위촉되었다.

1947년 6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경성법조회, 조선변호사회 공동으로 미소공위에 참석할 대표자를 선출할 때, 조선변호사회 서울지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8] 6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했다.[9] 12월 국제연합 조선준비위원단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8년 4월 미 군정 윌리엄 F. 딘 군정장관은 노동문제 조절을 위한 미군정 노동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조정위원회 운영위원으로 임명하였다.[10] 4월 26일 조선법조회를 탈퇴하고, 조선법학회 회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1949년 9월 24일 초대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사장에 선출되었다.[https://www.redcross.or.kr/seoul/branch_history.do?action=list&year=0000]. 1949년 10월 대한적십자사 법률고문에 위촉되었고,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에는 6.25 부역자심사위원회 경기도지구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이후 서울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11]

이긍종 사망으로 인한 1952년 제2대 국회 보궐선거 때 고향인 연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2대 국회에서 1953년 정부전복음모사건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과 국회 농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5월 제3대 총선에 연기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변호사사무실을 개소하였고,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 창립에 참여, 사장에 선출 되었으나, 재정난으로 1955년 7월 회사를 매각하였다. 국제연합한국협회 이사에도 위촉되었다.

1955년 11월 민주당에 입당하고 반자유당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5년 11월 7일부터 1958년 2월 9일까지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1957년 7월 조선유도회총본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제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5대 국회에서는 참의원 지방자치법 개정법률안 심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물러났다.

5.16 군사 정변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장, 유도회(儒道會) 부회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4년 도서관협회로부터 국내 도서관 설립 및 운영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으며, 당시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치풍토가 도서관 시설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다.

만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4동 403-22번지로 이사하였다. 1976년 9월 3일 저녁 8시 15분경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4동 403-22번지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2. 4. 1. 미군정기 공직 활동 (1945년 ~ 1946년)

1945년 8월 16일 광복 직후, 이범승은 거주하던 경기도 양주군 양주면(현 의정부시)에서 자치위원장에 추대되었고, 동시에 경성부 부부윤으로 추대되었다. 9월 2일 미 군정에 의해 경기도 양주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0월에 사퇴하였다. 양주경찰서장 사직은 11월 13일부로 윤홍병이 부임하면서 처리되었다.

미군정 하에서 김창영에 이어 두 번째 서울 시장에 올라 1945년 10월부터 1946년 5월까지 재직했다. 당시 서울이라는 이름이 확정되기 전이었으며, 이범승은 한성이라는 이름이 좋다면서 스스로를 한성시장으로 불렀다.[3]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서울시립도서관 설치 조례의 제정을 추진, 지시하였다. 특히 자신이 인수하여 운영하던 종로의 경성도서관을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에서, 경성부립종로도서관(현 서울시립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

1945년 11월 서울시 인민위원회에서 이범승의 서울시장직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가 피검되기도 했다. 11월 13일 경성부청 간부 및 윤보선 등 저명인사들을 대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및 귀국 인사들을 환영하러 김포비행장에 가서 임정 요인을 영접하였다.

2. 4. 2. 군정기, 정부 수립 초기 활동 (1946년 ~ 1952년)

1946년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같은 해 2월 14일 기미독립선언기념준비회 증선위원에 선출되어 독립기념관 건립 운동에 참여했다.[4] 3월 3일 서예 교육 운동과 서예 전람회, 강연회 등을 지원하는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 창립에 참여하고, 참여이사로 선출되었다.[5] 5월 9일 건강상의 이유로 서울시 미군정장관 윌슨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여 승인받았다. 8월 16일 경성부 본정 5정목 55번지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정구영 등과 함께 경성법조회 창립에 참여했고, 조선법학회 설립에도 참여하여 12월 3일 조선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서울시 대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7년 인권 운동에도 참여했다. 4월 미국인권옹호연맹 볼드윈의 후원하에 정구영, 이홍종 등과 함께 한국인권옹호연맹을 조직, 4월 23일 경성부 조선호텔에서 한국인권옹호연맹을 결성하고 인권연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6] 이후 해방 정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정치테러 사건에 대한 진상과 피해사실을 조사했다.[7] 10월 국제연합(UN) 조선지회 이사에 위촉되었다. 조선적십자회 서울지사 지사장에 위촉되었다.

1947년 6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경성법조회, 조선변호사회 공동으로 미소공위에 참석할 대표자를 선출할 때, 조선변호사회 서울지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8] 6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하는 한국인 대표자 중 변호사협회 서울지부 대표로 참석했다.[9] 12월 국제연합 조선준비위원단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8년 4월 미 군정 윌리엄 F. 딘 군정장관은 노동문제 조절을 위한 미군정 노동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조정위원회 운영위원으로 임명하였다.[10] 4월 26일 조선법조회를 탈퇴하고, 같은 날 조선법학회 임원 선거에서 법학회 회장에 다시 선출되었다. 1949년 9월 24일 초대 대한적십자사 서울특별시지사 사장에 선출되었다.[https://www.redcross.or.kr/seoul/branch_history.do?action=list&year=0000]. 1949년 10월 대한적십자사 법률고문에 위촉되었고,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에는 6.25 부역자심사위원회 경기도지구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이후 서울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11]

2. 4. 3. 2대 국회의원과 3대 낙선, 5대 국회의원 (1952년 ~ 1961년)

이긍종 사망으로 인한 1952년 제2대 국회 보궐선거 때 고향인 연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2대 국회에서 1953년 정부전복음모사건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과 국회 농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5월 제3대 총선에 연기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변호사사무실을 개소하였고, 그해 11월 김도진, 하응모 등과 함께 제일생명보험회사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1954년 12월 6일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 창립총회에서 사장에 선출 되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1955년 7월 심문(沈文)에게 회사를 매각하였다. 국제연합한국협회 이사에도 위촉되었다.

1955년 11월 민주당에 입당하고 반자유당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5년 11월 7일부터 1958년 2월 9일까지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1957년 7월 조선유도회총본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제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5대 국회에서는 참의원 지방자치법 개정법률안 심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참의원 재직 중이던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고 국회가 해산되면서 물러났다.

2. 4. 4. 1961년 이후

5.16 군사 정변 이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장, 유도회(儒道會) 부회장 및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4년 도서관협회로부터 국내 도서관 설립 및 운영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으며, 당시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치풍토가 도서관 시설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다.

만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4동 403-22번지로 이사하였다. 1976년 9월 3일 저녁 8시 15분경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4동 403-22번지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사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관료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1]

4. 상훈

이범승한국어은 1964년 한국도서관협회 제1회 도서관주간 표창장을 수상하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부인김은엽
아들이광종
아들이규종


참조

[1] 웹인용 서울특별시립종로도서관 http://www.encyber.c[...]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8-02-29
[2] 서적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역사비평사 1998-11-05
[3] 뉴스 [서울 만들기] (1) 서울특별시 탄생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8-02-29
[4] 뉴스 獨立記念館 建立 동아일보 1946-02-14
[5] 뉴스 =大東翰墨會創立(대동한묵회창립)= 동아일보 1946-03-03
[6] 뉴스 朝鮮人權擁護聯盟을 結成 경향신문 1947-05-25
[7] 뉴스 人權擁護委員會 테로眞相을 調查 동아일보 1947-06-15
[8] 뉴스 共委에 參加할 法曺人들 동아일보 1947-06-20
[9] 뉴스 共委協議에 參加할 代表 南北各政黨과 團體멤버 경향신문 1947-06-22
[10] 뉴스 勞動調停委員 任命 동아일보 1948-04-04
[11] 뉴스 四議員의 略歷 경향신문 195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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