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녕대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성녕대군은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아들로, 1405년에 태어나 1418년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1411년 성녕군에 책봉되었고, 1414년 성녕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경녕옹주 성씨와 혼인했다. 총명하고 온순한 성품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나, 14세에 요절했다. 사후 변한국 소경공에 추봉되었으며, 안평대군이 봉사손이 되었으나 계유정난으로 제외되었다. 효령대군의 후손인 원천군이 양자로 들어와 봉사했고, 고종 때 후손을 찾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드라마 용의 눈물, 대왕 세종, 조선구마사 등에 등장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05년 출생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1405년에 태어나 1449년 황제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 속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며 동로마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 1405년 출생 - 교황 비오 2세
교황 비오 2세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이름으로 1458년부터 1464년까지 재임한 210대 교황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 원정을 추진하고 학자 및 작가로 활동했으며, 코르시냐노를 피엔차로 재개발하여 도시 계획을 시행했다. - 홍역으로 죽은 사람 - 페드루 4세
페드루 4세는 17세기 후반 콩고 왕국의 왕으로 아구아 로사다 가문의 창시자이며, 왕위 계승의 어려움 속에서 왕국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경쟁 가문 간 왕위 교대 계승 유언을 남겼다. - 홍역으로 죽은 사람 - 홍휘
- 1418년 사망 - 심종
심종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청원군에 봉해지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회안군 이방간과 내통한 죄로 폐서인되어 사망했다. - 1418년 사망 - 심온
심온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태종 때 중용되어 세종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으나 역모 혐의로 사사된 후 문종 때 복권되었으며, 드라마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성녕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성녕대군 |
원래 이름 | 성녕대군(誠寧大君) |
작위 | 조선 태종의 왕자 |
휘 | 이종(李褈) |
출생일 | 1405년 8월 12일 |
사망일 | 1418년 3월 20일 |
아버지 | 태종 |
어머니 | 원경왕후 |
배우자 | 삼한국대부인 창녕 성씨 |
자녀 | 안평대군(양장자) 원천군(양차자) |
시호 | 변한국소경공(卞韓國昭頃公) |
2. 생애
1405년(태종 5년) 7월 9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4] 1411년(태종 11년) 성녕군(誠寧君)에 책봉되었고, 1414년(태종 14년) 1월 성녕대군으로 진봉되었다. 같은 해 12월, 성억(成抑)의 딸 경녕옹주 성씨와 혼인하였다.[5] 1417년(태종 17년) 대광보국의 품계를 받았다.
1418년(태종 18년) 1월 26일, 홍역에 걸려 위독해지자 태종은 흥덕사의 승려와 무당을 모아 기도하게 하고, 승정원에 명하여 점성사들을 불러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6] 형 충녕대군은 직접 약을 짓고 병구완을 하였으나,[3] 발병 10여 일만인 2월 4일 사망하였다.
태종은 성녕대군을 잃은 슬픔에 식사를 물리치고, 형조의 청에 따라 성녕대군의 병세를 점친 맹인과 무녀 일부를 벌주라고 명하였다.[7] 또한 성녕대군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 양홍달을 파직하고 원학 등의 직책을 강등하였다.[8] 태종은 대군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변계량과 효령대군, 충녕대군을 불러 귀신의 이치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9]
誠寧大君 李褈卒。 褈, 上第四子。 幼而聰明智慧, 容貌端潔, 擧止恭順。 上與靜妃, 鍾愛之, 常在宮中, 不忍離側。 年十二, 尙摠制成抑女, 未嘗出宮闈。 至是, 遘瘡疹, 方劇, 無所不至, 盡心禱祀。 忠寧大君, 率醫員元鶴, 日夜常在褈側, 潛究醫方, 未嘗釋卷, 親調藥餌, 以救療之, 兩殿感其至誠。 卒, 年十四。 上輟膳, 深哀悼之, 罷朝市三日。 越翌日未明, 其柩出敦化門, 斂殯于私第。 褈忠孝友愛, 出於天性。 勤學善射, 無他嗜好。|성녕대군 이종의 졸기중국어
1418년(태종 18년) 3월 13일, 예조의 건의로 변한국 소경공(卞韓國昭頃公)에 추봉되었다. 성녕대군은 고양현 북쪽 산리동 진방(震方) 산기슭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성녕대군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안평대군이 강화도로 귀양 가고, 그해 10월 19일 멸문당하면서 봉사손에서 제외되었다.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성녕대군의 아내 성씨 또한 연좌되어 경주로 유배되었다가, 1456년(세조 2년) 7월 7일 세조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1459년(세조 4년),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 봉행을 못하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宜)을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종손이 일곱 번이나 끊겼다. 고종은 입직강관 이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나, 이승보의 농간으로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성녕대군의 사후 양가 후손들이 주경야독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대군의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 여유가 생기면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10]
효령대군의 후손이 성녕대군 가문에 출계되었기 때문에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에서는 성녕대군의 양가 종손을 같은 종손(從孫)으로 예우하고 있다.
2. 1. 탄생과 혼인
1405년(태종 5년) 7월 9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4] 1411년(태종 11년) 성녕군(誠寧君)에 책봉되었고, 1414년(태종 14년) 1월 '''성녕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이해 12월, 성억(成抑)의 딸 경녕옹주 성씨와 혼인하였다.[5] 1417년(태종 17년) 대광보국의 품계를 받았다.2. 2. 요절과 사후
1418년(태종 18년) 1월 26일, 홍역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태종은 흥덕사의 승려들과 무당을 모아 기도하게 하고, 승정원에 명하여 점성사들을 불러 성녕대군의 길흉화복을 점치게 하였다.[6] 형인 충녕대군은 직접 약재를 짓고 병구완을 하였으나[3] 발병 10여 일만인 2월 4일 사망하였다.태종은 성녕대군을 잃은 슬픔에 식사를 물렸으며, 형조의 청에 따라 성녕대군의 병세를 점친 맹인과 무녀 중 일부를 벌주라고 명하였다.[7] 뿐만 아니라 성녕대군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 양홍달을 파직하고 원학 등의 직책을 강등하였다.[8] 또한 대군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변계량과 효령대군, 충녕대군을 불러 귀신의 이치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9]
誠寧大君 李褈卒。 褈, 上第四子。 幼而聰明智慧, 容貌端潔, 擧止恭順。 上與靜妃, 鍾愛之, 常在宮中, 不忍離側。 年十二, 尙摠制成抑女, 未嘗出宮闈。 至是, 遘瘡疹, 方劇, 無所不至, 盡心禱祀。 忠寧大君, 率醫員元鶴, 日夜常在褈側, 潛究醫方, 未嘗釋卷, 親調藥餌, 以救療之, 兩殿感其至誠。 卒, 年十四。 上輟膳, 深哀悼之, 罷朝市三日。 越翌日未明, 其柩出敦化門, 斂殯于私第。 褈忠孝友愛, 出於天性。 勤學善射, 無他嗜好。|성녕대군 이종의 졸기|align=center중국어
1418년(태종 18년) 3월 13일, 예조의 특별 건의로 변한국 소경공(卞韓國昭頃公)에 추봉되었다. 성녕대군은 고양현 북쪽 산리동 진방(震方)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성녕대군의 묘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성녕대군에게 입적되어 봉사손이 되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가고, 그 해 10월 19일 그 일가가 멸문당하면서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봉사손에서 제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인 성녕대군의 아내 성씨 또한 연좌되어 경주로 유배되었다. 이후 1456년(세조 2년) 7월 7일, 세조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1459년(세조 4년),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宜)을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종손이 일곱 번이나 끊겼다. 훗날 이러한 사태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입직강관이었던 이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입직강관 이승보의 농간으로 인하여 고종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계속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하향까지 하였다. 이후 성녕대군의 사후 양가 후손들이 주경야독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대군의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 여유로운 훈풍이 불면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10]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 성녕대군 가문에 출계되었기 때문에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에서는 성녕대군의 양가 종손을 같은 종손(從孫)으로 예우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성녕대군이 등장하는 대중 매체는 다음과 같다.
=== 드라마 ===
4. 1. 드라마
참조
[1]
문서
음력 7월 9일
[2]
문서
음력 2월 4일
[3]
서적
태종실록
1418-02-04
[4]
서적
태종실록
1405-07-09
[5]
서적
태종실록
1414-12-22
[6]
서적
태종실록
1418-01-26
[7]
서적
태종실록
1418-03-05
[8]
서적
태종실록
1418-02-23
[9]
서적
태종실록
1418-03-04
[10]
웹사이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http://www.rfo.co.kr[...]
2006-04-0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