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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전제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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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전제공국은 1402년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데스포트 칭호를 받으면서 성립된 중세 국가이다.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시작되었으며, 스테판 라자레비치 시대에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고 문화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이후 주라지 브란코비치 시대에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영토를 상실하고, 1459년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통치 하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멸망 이후 망명 정부가 시르미아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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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전제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 (현지어)/ }} (스르프스카 데스포토비나)
통칭세르비아
존속 기간1402년–1442년
1444년–1459년
수도베오그라드
스메데레보
바르
공용어고대 세르비아어
종교세르비아 정교회
통화세르비아 디나르
지도
1422년의 세르비아 전제공국
1422년의 세르비아 전제공국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군주 칭호데스포티스
주요 지도자스테판 라자레비치 (1402년–1427년)
쥬라지 브란코비치 (1427년–1456년)
라자르 브란코비치 (1456년–1458년)
스테판 브란코비치 (1458년–1459년)
스테판 토마셰비치 (1459년)
역사
주요 사건건국 (1402년 2월 22일)
오스만 제국에 정복 (1439년)
재건 (1444년)
오스만 제국에 재정복 (1459년 6월 20일)
멸망정복당함
이전 국가
모라비아 세르비아 국기
모라비아 세르비아 국기
브란코비치 가문 문장
브란코비치 가문 문장
발시치 가문 문장
발시치 가문 문장
이후 국가
제타 국기
제타 국기
현재 국가
기타 정보
ISO 3166-1 코드생략
주민세르비아인

2. 역사

2. 1. 성립 배경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공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로 세르비아를 계승하였다. 스테판의 어머니인 밀리차 공주는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통치했다. 현명하고 외교적인 여성이었던 그녀는 딸 올리베라를 술탄 바예지드 1세와 결혼시켜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완화했다.

1390년 또는 1391년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고,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야 했다. 그는 1395년 루미니아의 미르체아 1세 공과 맞선 로비네 전투와 1396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 맞선 니코폴리스 전투에 참전했다. 술탄 바예지드는 니코폴리스에서 헝가리 왕과 편을 든 브크 브란코비치의 영토 대부분을 스테판에게 하사했다.

티무르의 군대가 오스만 제국에 들어왔을 때,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02년 앙카라 전투에 참전했고,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지도자 바예지드가 포로로 잡혔다. 세르비아로 돌아온 스테판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로부터 데스포트 칭호를 받았다. 이전에는 이 칭호가 데스포트가 일부 종속국을 통치한다는 의미였지만, 비잔틴 제국이 그러한 통치를 주장하기에는 너무 약했기 때문에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군주적인 칭호로 채택했다.

2. 2. 스테판 라자레비치 시대 (1402-1427)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지은 베오그라드에 있는 데스포트 문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르비아로 돌아오던 중, 그라차니차 수도원 근처 트리폴리에에서 그의 형제 부크 라자레비치의 군대와 충돌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판이 승리하였으나, 부크는 새로운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 첼레비와 동맹을 맺었다.




1404년, 오스만 제국 내의 불안(오스만 내전)을 우려한 스테판은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었다. 지그문트는 스테판에게 베오그라드, 마치바 지역, 골루바츠 요새를 하사했고, 스테판은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 남은 그의 형제 부크와 화해했다.




1405년, 스테판은 레스보스 섬의 통치자인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인 카테리나 가틸루시오와 결혼했고, 그의 어머니 밀리차는 사망했다.




1408년, 스테판과 부크 형제는 다시 갈등을 빚었고, 부크는 오스만 군대를 이끌고 1409년 초 베오그라드를 공격했다. 포위된 스테판은 세르비아 남부를 부크에게 넘겨주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술레이만의 형제 무사가 술레이만에 반란을 일으켰고, 스테판은 1410년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무사를 지원했다. 무사의 군대는 패배했고, 술레이만은 부크를 보내 스테판의 영토를 요구하게 했다. 부크는 무사의 봉신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황제 마누엘 2세를 통해 자신의 전제적인 권리를 확인받고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부크의 영토를 합병했다.




1411년, 헝가리 왕 지그문트는 스테판의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스레브레니차와 그 주변 지역을 하사했다.




스테판 라자레비치 시대(1422년)의 세르비아 전제공국과 아드리아 해안에 있는 베네치아의 소유지 경계





1412년 초, 무사의 군대가 세르비아를 공격했지만 코소보에서 패배했다. 이후 스테판은 술탄 메흐메드 첼레비를 초대하여 함께 무사를 공격했다. 헝가리 군대와 함께 그들은 1413년 7월 5일 비토샤 산(현대 불가리아) 근처의 참르루 전투에서 무사를 격파했고, 무사는 전장에서 사망했다. 스테판은 니시 근처의 코프리얀 마을과 세르비아-불가리아 지역인 즈네폴제를 얻었다. 그 후 12년 동안 스테판은 메흐메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는 중세 세르비아의 회복을 가능하게 했다.




세르비아 전제공국, 1421–1427





1421년 4월 28일, 스테판의 조카이자 제타의 통치자인 발샤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그의 영토를 삼촌에게 남겼다. 이로써 헝가리 왕국으로부터의 영토 확장을 통해 세르비아는 전통적인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1425년,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남부 모라바 계곡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동시에 보스니아 왕은 세르비아로부터 스레브레니차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스테판은 침공에 맞서 싸웠고 술탄과의 협상을 시작했으며, 그 후 오스만 군대가 세르비아를 떠났다. 그러나 이 공격은 다가올 일에 대한 불길한 징조였다.

==== 문화 발전 ====

시인, 사상가이자 예술가인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통치 기간은 세르비아의 예술 발전을 새롭게 이룬 시기였다. 스테판은 중세 세르비아의 주요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슬로보 류브베/Слово љубавиsr('사랑의 말')를 썼으며, 당시 발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 중 하나를 소장했다.

==== 경제적 안정 ====

스테판이 오스만 제국헝가리 왕국 모두와 거리를 유지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정치적 안정 외에도, 세르비아 경제는 매우 풍부한 은광, 스레브레니차와 노보 브르도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 중 일부였다. 베오그라드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인구는 10만 명이 넘었다. 데스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통치와 업적은 동시대의 학자이자 작가인 코스토네츠의 콘스탄틴에 의해 묘사되었으며, 그는 "''데스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생애''"(1430년경)를 저술했다.

2. 2. 1. 문화 발전

시인, 사상가이자 예술가인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통치 기간은 세르비아의 예술 발전을 새롭게 이룬 시기였다. 스테판은 중세 세르비아의 주요 문학 작품 중 하나인 슬로보 류브베/Слово љубавиsr('사랑의 말')를 썼으며, 당시 발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 중 하나를 소장했다.

2. 2. 2. 경제적 안정

스테판이 오스만 제국헝가리 왕국 모두와 거리를 유지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정치적 안정 외에도, 세르비아 경제는 매우 풍부한 은광, 스레브레니차와 노보 브르도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 중 일부였다. 베오그라드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인구는 10만 명이 넘었다. 데스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통치와 업적은 동시대의 학자이자 작가인 코스토네츠의 콘스탄틴에 의해 묘사되었으며, 그는 "''데스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생애''"(1430년경)를 저술했다.

2. 3. 주라지 브란코비치 시대 (1427-1456)

스메데레보 요새, 세르비아 전제공국의 수도


데스포트 스테판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1427년 7월 19일 그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전제공국을 물려받았다. 주라지는 1429년 비잔틴 황제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에 의해 데스포트로 확정되었다.

스테판의 죽음으로 인해 세르비아는 벨그라드를 헝가리 왕국에 반환해야 했고, 수도를 잃었다. 부유한 남부 도시들이 오스만 제국 국경과 너무 가까워지자 주라지는 헝가리 국경 근처의 다뉴브 강변에 웅장한 스메데레보 요새를 건설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1428년부터 1430년까지 건설된 스메데레보는 역사에 대한 많은 오해를 낳았는데, 특히 주라지의 아내 예리나와 관련하여 그러했다. 예리나의 그리스 국적과 그녀의 형제들이 새로운 데스포트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를 싫어하게 되었고, 변덕스러운 이유로 스메데레보를 건설한 것을 포함하여 그녀에게 많은 악의적이고 사악한 특징을 부여했다. 민간 시가에서는 그녀를 ''프로클레타 예리나''(저주받은 예리나)라고 불렀다.

1427년 여름, 세르비아의 통치자가 된 직후 주라지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오스만 제국은 크루셰바츠, 니시, 레스코바츠를 포함한 두보치카 지역, 그리고 토플리카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노보브르도를 포위하는 데 실패한 후 철수했다.

1433–1439년의 세르비아 전제공국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2세는 1430년 11월, 부카신 즈라토노소비치와 세르비아 전제공국 간의 협력 혐의를 놓고 보스니아 귀족 가문인 즈라토노소비치와 갈등을 겪었다. 이 갈등은 부카신의 죽음과 즈라토노소비치 가문의 완전한 멸망으로 끝났지만, 곧바로 세르비아 자체와의 또 다른 갈등으로 이어졌다. 1433년 봄, 데스포트 주라지는 우소라의 일부와 무역 전초 기지인 즈보르니크와 테오차크 요새를 합병했다.

주라지는 세르비아의 북부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1433년 딸 카타리나를 헝가리 여왕의 가까운 사촌인 첼레의 울리히 2세와 결혼시켰다. 그는 다른 딸 마라를 술탄 무라트 2세에게 넘겨야 했다. 결혼은 1433년에 계획되었지만, 주라지는 오스만 제국이 침략 위협을 가한 1435년까지 결혼을 연기했다. 결혼이 이루어진 후 술탄 무라트는 오스만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 맹세는 2년 만에 깨졌다. 1437년 오스만 제국은 침략하여 세르비아 국경 내에서 약탈을 시작했다. 주라지는 브라니체보 마을을 넘겨주면서 술탄과 불리한 평화 협정을 맺었다. 1438년 술탄은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데스포트가 즈드렐로와 비세사브를 빼앗기도록 해야 했다. 그 후의 평화는 이전 평화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2. 3. 1.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일시적 점령 (1439-1444)

1439년, 술탄 무라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다시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약탈했다. 데스포트 쥬라지는 1439년 5월 헝가리로 피신했고, 그의 아들 그르구르 브란코비치와 예리나의 오빠 토마스 칸타쿠제노스가 스메데레보를 방어하도록 남겨졌다.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스메데레보는 1439년 8월 18일에 함락되었고, 노보브르도는 2년 동안 저항하다가 1441년 6월 27일에 함락되었다. 그 시점에서 남은 유일한 자유 지역은 제타였다. 그러나 제타는 곧 베네치아인들과 보이보드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의 공격을 받았다. 이 지역의 쥬라지의 마지막 도시들은 1442년 3월에 정복되었다.

세르비아의 초대 오스만 제국 총독은 이샤크베그였으며, 그는 1443년에 이사베그 이사코비치로 교체되었다.

2. 3. 2.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지속

세르비아 전제공국, 1451–1454


헝가리에서, 쥬라지 브란코비치는 헝가리 지도자들에게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그리하여 헝가리인(야노시 후녀디 지휘), 세르비아인(전제공 쥬라지 지휘) 및 루마니아인(블라드 2세 드라쿨 지휘)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기독교 연합이 1443년 9월에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1443년 초 가을에 도나우강을 건넌 대규모 기독교 군대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온 약 25,000명의 병사, 8,000명 이상의 세르비아 기병 및 보병, 그리고 700명의 보스니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세르비아는 1444년 8월 15일에 체결된 세게드 평화 조약에 의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 국경은 1437년 이전과 동일했으나, 베네치아에 남아 있던 제타 남부와 1427년에 훨씬 이전에 상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에 반환된 골루바츠 요새를 제외했다.

보스니아 왕 토마시 오브 보스니아는 1446년에 전제공 쥬라지와 또 다른 전쟁을 시작했고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448년 9월, 보스니아군은 토마스 칸타쿠제노스[Thomas Kantakouzenos]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에게 패배했고, 그들은 스레브레니차를 재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비셰그라드도 점령했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데 전제공 쥬라지가 겪었던 어려움은 1447~48년에 전제공 쥬라지가 콘스탄티노플 성벽 복구를 위해 비잔틴인에게 자금을 제공했지만,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1453년 5월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정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천 명의 병사를 보내야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나중에 정복자라고 불릴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451년에 호의의 표시로 토플리차와 두보치차 지역을 세르비아에 반환했다. 그 기회에 메흐메트 2세와 쥬라지는 평화 조약을 연장하는 것에 대해 협상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평화 조약을 공식적으로 종료 선언하지 않고, 1454년 7월 중순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세르비아 중부의 많은 지역이 함락되었지만, 수도는 잘 준비되어 있었고, 후녀디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도나우강을 건너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오스만군은 곧 스메데레보 포위를 풀었다. 술탄은 약탈품과 노예를 가지고 소피아로 후퇴했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크루셰바츠에 남겨두었다. 두보치차에 있던 니콜라 스코발리치 부대(보이보드)는 북쪽에서 차단되어, 9월 24일 레스코바츠 근처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으며, 쥬라지 브란코비치와 후녀디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가 함께 크루셰바츠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 그들의 지휘관 피루즈 베이[Firuz-bey]를 포로로 잡았다.

Vršac Castle은 브란코비치가 건립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겨우 시간을 벌어준 것에 불과했다. 니콜라 스코발리치의 저항은 그의 군대의 적은 수 때문에 터키인들 스스로도 존경하게 되었지만, 11월 16일 또 다른 오스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는 처형되었다. 1455년 초 봄, 술탄은 세르비아 침공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오스만군이 먼저 세르비아 남부를 점령하는 데 집중했다. 노보 브르도는 대포로 포위되었고 40일간의 저항 끝에 1455년 6월 1일에 함락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비아 남부의 나머지 지역이 점령되었다. 동시에, 전제공 쥬라지는 헝가리인들에게 또 다른 십자군을 시작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빈손으로 스메데레보로 돌아왔다. 1456년 초, 그는 술탄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세르비아 남부는 오스만 제국에 남게 되었다.

평화 조약 몇 달 후, 오스만 제국이 다시 공격했다. 터키의 주요 목표였던 스메데레보와 벨그라드는 성공적으로 저항했지만, 시골은 더욱 황폐해졌다. 전제공 쥬라지 브란코비치는 1456년 12월 24일에 사망했다.

2. 4. 라자르 브란코비치 시대 (1456-1458)

라자르 브란코비치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시력을 잃지 않은 쥬라지 1세의 유일한 아들로, 아버지를 계승했다. 그는 세르비아가 미래의 오스만 침략을 격퇴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판단하여, 1457년 1월 15일 술탄 메흐메트 2세와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 거래에 따라 그는 아버지의 영토 대부분을 돌려받았고, 라자르가 죽을 때까지 세르비아를 오스만 제국이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라자르는 대신 조공을 지불해야 했는데, 노보브르도의 풍부한 광산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공액은 감소했다. 남쪽의 위협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라자르는 북쪽으로 눈을 돌려 헝가리의 내전에 참여하여 국왕 라디슬라우스의 편에 섰고, 1457년에 코빈 마을과 도나우강 좌안의 여러 다른 마을을 점령했다.

1457년 5월 3일 어머니 예리나의 사망 직후, 브란코비치 가문의 젊은 세대는 계승 분쟁으로 갈등을 겪었다. 사생아 아들 부크의 권리를 요구하며, 시력을 잃은 그르구르 브란코비치는 마라와 토마스 칸타쿠제노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라자르의 형제인 시력을 잃은 스테판 브란코비치는 그의 편을 들었고 함께 남았다. 데스포트 라자르는 1458년 1월 20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5. 섭정 시대와 스테판 브란코비치 (1458-1459)

세르비아 전제공국, 1455–1459


전제공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 이후 세 명으로 구성된 섭정이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라자르의 형제인 시각 장애인 스테판 브란코비치, 라자르의 미망인 헬레나 팔레올로기나와 대공 미하일로 안젤로비치가 포함되었다. 형이 오스만 제국의 재상인 마흐무드 파샤 안젤로비치인 미하일로 안젤로비치는 스테판과 헬레나 몰래 오스만 제국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3월, 그는 전제공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 오스만 군대를 스메데레보로 데려왔다. 그러나 병사들은 예상치 못하게 성벽에 오스만 깃발을 게양하고 술탄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분노한 스메데레보 시민들은 3월 31일 안젤로비치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그를 포로로 잡고 대부분의 오스만 군대를 생포하거나 살해했다. 새로운 전제공으로 선포된 스테판 브란코비치는 헬레나 팔레올로기나와 함께 스메데레보와 전제공국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라자르의 죽음과 임시 섭정의 분열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보스니아의 국왕 스테판 토마시는 드리나강 서쪽에 있는 전제공국의 영토를 공격하여 대부분을 정복하고 테오차크만 남겨두었다. 미하일 실라지 또한 도나우강 북쪽의 라자르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다. 미하일로 안젤로비치의 쿠데타가 실패한 직후,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또 다른 침략을 시작했다. 1459년까지 그들은 어떠한 상당한 영토적 이득도 얻지 못했지만, 이것이 세르비아 전제공국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스테판 브란코비치는 1459년 4월 8일까지 통치하다가 헬레나 팔레올로기나와 토마시 국왕 사이의 음모로 전복되었고, 그의 아들이 잠시 새로운 전제공으로 통치했다.

2. 6.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전제공국의 멸망 (1459)

스테판 토마셰비치는 1459년 세르비아, 1463년 보스니아 두 나라를 오스만 제국에게 잃었다. 새 전제공으로의 그의 임명은 매우 인기가 없었지만, 그의 아버지인 보스니아의 국왕 스테판 토마스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 무렵 세르비아는 다뉴브 강을 따라 좁은 땅으로 축소되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완전히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스메데레보에 도착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도시를 방어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협상 후 보스니아인들은 도시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고, 세르비아는 1459년 6월 20일 터키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복되었다.

2. 7. 망명 전제공국

1404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드는 시르미아, 바나트, 바치카의 일부를 세르비아 전제공 스테판 라자레비치에게 통치를 위해 빌려주었고, 이후 조르제 브란코비치가 계승했다. 오스만 제국이 1459년 세르비아 전제공국을 정복한 후, 헝가리 통치자들은 망명한 브란코비치 가문에게 전제공의 지위를 갱신했고, 이후 베리슬라비치 그바르스키 귀족 가문에게로 이어져 오스만 정복 전까지 시르미아의 대부분을 계속 통치했지만, 영토는 이론적으로 중세 헝가리 왕국의 행정 하에 있었다. 전제공들의 거처는 쿠피니크 (현대 쿠피노보)였다. 브란코비치 왕조 출신 전제공들은 부크 그르구레비치-브란코비치 (1471–1485), 조르제 브란코비치 (1486–1496), 요반 브란코비치 (1496–1502)이다.

시르미아, 바치카, 바나트의 세르비아 전제공국의 영토 (15~16세기)


마지막 형식적 전제공들은 이바니쉬 베리슬라비치 (1504–1514), 스테판 베리슬라비치 (1520–1535), 라디치 보지치 (1527–1528, 자폴야 세력의 칭하자), 파블레 바키치 (1537)이다.

3. 국가 행정

세르비아 전제공국에는 군주이자 최고 권위자인 전제공 밑에서 국가의 중앙 행정에서 중요한 의무와 역할을 수행하는 몇몇 귀족 관직이 있었다.


  • 대 로고테테(Велики Логотет/''Veliki Logotet''): 비잔틴 제국에서 처음 사용된 칭호로, 세르비아 왕국에서 채택되었으며, 전제공국에서도 유지되었다. 대 로고테테는 전제공의 재상실 수장으로서 중앙 행정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대 로고테테는 또한 전제공과 세르비아 총대주교 외에는 교회 문제에 대한 특정 관할권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 루카
  • 보그단
  • 보이흐나
  • 마노일로
  • 보그단
  • 토도르
  • 스테판 라트코비치 (1457–59)
  • 대 보이보드(Велики Војвода/''Veliki Vojvoda''): 전제공 다음으로 국가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의 군사 지휘관이었으며, 일반 보이보드보다 더 많은 권력과 위신을 가지고 있었다.
  • 라도슬라브 미할례비치
  • 드미타르 크라이코비치
  • 미하일로 안젤로비치 (1456–58)
  • 마르코 알토마노비치
  • 대 첼니크(Велики Челник/''Veliki Čelnik''): 사법 및 기타 민간 문제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칭호로, 통치자의 포고령을 집행하고 영지 간의 영토 분쟁 해결과 같은 사건에서 통치자를 대표했다. 대 첼니크라는 칭호는 서유럽의 ''궁정 백작'' 칭호와 대략 동등했다.
  • 부크 쿠베트
  • 흐레벨랸
  • 라디치 (1428–1433년경)
  • 미하일로 안젤로비치 ( 1445)
  • 주라지 골레모비치
  • 프로토베스티아르(Протовестијар/''Protovestijar''): 세르비아 왕국에서 채택된 또 다른 비잔틴 궁정 칭호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이다. 프로토베스티아르는 수입과 지출 및 재정 정책의 감독을 포함한 국가 재정을 담당했다. 1444년 세르비아가 처음 멸망했다가 해방된 후, 프로토베스티아르라는 칭호는 사라졌고 그의 역할은 이전에 통치자의 개인 금고 관리를 담당했던 '''재무관'''(세르비아어: Ризничар/''Rizničar'') 또는 ''첼니크 리즈니치키''가 맡았다.
  • 이반 (1402년경)
  • 보그단 (1407–13년경)
  • 니콜라 로도프 (1435년경)
  • 파스코예 소르코체비치 (1444년 이후)
  • 라도슬라브 (1444년 이후)

3. 1. 주요 관직

세르비아 전제공국에는 군주이자 최고 권위자인 전제공 밑에서 국가의 중앙 행정에서 중요한 의무와 역할을 수행하는 몇몇 귀족 관직이 있었다.

  • 대 로고테테(Велики Логотет/''Veliki Logotet''): 비잔틴 제국에서 처음 사용된 칭호로, 세르비아 왕국에서 채택되었으며, 전제공국에서도 유지되었다. 대 로고테테는 전제공의 재상실 수장으로서 중앙 행정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대 로고테테는 또한 전제공과 세르비아 총대주교 외에는 교회 문제에 대한 특정 관할권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 대 보이보드(Велики Војвода/''Veliki Vojvoda''): 전제공 다음으로 국가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계급의 군사 지휘관이었으며, 일반 보이보드보다 더 많은 권력과 위신을 가지고 있었다.
  • 대 첼니크(Велики Челник/''Veliki Čelnik''): 사법 및 기타 민간 문제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칭호로, 통치자의 포고령을 집행하고 영지 간의 영토 분쟁 해결과 같은 사건에서 통치자를 대표했다. 대 첼니크라는 칭호는 서유럽의 ''궁정 백작'' 칭호와 대략 동등했다.
  • 프로토베스티아르(Протовестијар/''Protovestijar''): 세르비아 왕국에서 채택된 또 다른 비잔틴 궁정 칭호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이다. 프로토베스티아르는 수입과 지출 및 재정 정책의 감독을 포함한 국가 재정을 담당했다. 1444년 세르비아가 처음 멸망했다가 해방된 후, 프로토베스티아르라는 칭호는 사라졌고 그의 역할은 이전에 통치자의 개인 금고 관리를 담당했던 '''재무관'''(세르비아어: Ризничар/''Rizničar'') 또는 ''첼니크 리즈니치키''가 맡았다.

4. 영토 조직

1410년, 데스포트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는 전제공국의 영토를 구역으로 나누는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구역은 '''Vlast'''(세르비아어 키릴 문자: Власт)라고 불렸으며, 각 Vlast는 데스포트의 이름으로 보예보다가 다스렸다. 터키의 침략 위협이 커짐에 따라 필요해진 이 개혁은 해당 지역의 보예보다에게 민간 및 군사 문제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Vlast는 전제공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스메데레보, 노보 브르도, 네쿠딤, 오스트로비차, 골루바츠, 보라치, 페트루스, 레페니차, 크루셰바츠, 즈드렐로의 Vlast에 대한 문서가 보존되어 있으며, 드리나 강 서쪽에는 테오차크, 티슈니차, 즈보르니크, 스레브레니차의 4개의 Vlast가 있었다. 1421년 세르비아 전제공국에 편입된 후, 제타는 바르에 보예보다가 주재하고, 이후 포드고리차 (1444)를 거쳐 최종적으로 메둔에 주재하는 하나의 거대한 Vlast로 조직되었다.

전제공국 내 다른 Vlast의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데스포트 주라지(Đurađ)의 문장, 프로이센판 콘스탄츠 공의회 연대기(1437년 이전)

5. 역대 통치자

이름재위 기간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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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라자레비치(1374–1427)
1402년 8월 – 1427년 7월 19일라자레비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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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지 브란코비치(1375–1456)
1427년 7월 19일 – 1439년 8월 18일브란코비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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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구르 브란코비치(1416–59)
1439년 5월 – 1439년 8월 18일주라지의 공동 섭정
토마 칸타쿠진1439년 5월 – 1439년 8월 18일주라지의 공동 섭정
이샤크 베그 (d. 1443)1439–1443오스만 제국의 총독
이사 베그1443 – 1444년 6월 12일오스만 제국의 총독
주라지 브란코비치(1375–1456)1444년 6월 12일 – 1456년 12월 24일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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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르 브란코비치(1421–58)
1456년 12월 24일 – 1458년 1월 19일브란코비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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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브란코비치(1420–76)
1458년 1월 19일 – 1459년 3월 21일1458년 3월까지 공동 섭정
미하일로 안젤로비치 (d. 1464)1458년 1월 19일 – 1458년 3월공동 섭정
옐레나 팔레올로기나 (1432–73)1458년 1월 19일 – 1458년 3월공동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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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토마셰비치(1438–63)
1459년 3월 21일 – 1459년 6월 20일코트로마니치 왕조
망명 중 세르비아 전제공국의 명목상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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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크 그르구레비치 브란코비치(1438–85)
1471 – 1485년 4월 16일브란코비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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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제 브란코비치(1461–1516)
1486년 2월 – 1497년 7월브란코비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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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반 브란코비치(1462–1502)
1492 – 1502년 12월 10일브란코비치 왕조
이바니슈 베를라비치(d. 1514)1504 – 1514년 1월베를라비치 가문
스테판 베를라비치(1504–35)1520–1535베를라비치 가문
라디치 보지치(d. 1528)1527년 6월 29일 – 1528년 9월
파블레 바키치(d. 1537)1537년 9월 20일 – 1537년 10월 9일바키치 귀족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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