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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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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배압은 요나라 황족 야율씨와 혼인 관계를 맺은 소씨 가문 출신으로, 요 경종의 사위이자 소손녕의 형이다. 그는 거란의 여러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북송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1010년과 1018년 두 차례 고려를 침공했으나, 1019년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에게 패배하여 몰락했다. 이후 빈왕으로 봉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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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소배압
현지어 표기蕭排押
국적요나라
성별남성
충성요나라
작위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 동정사문하평장사(同政事門下平章事), 동경유수(東京留守)
군사 정보
복무요나라군
근무요나라 육군

2. 생애

요나라의 황족인 야율씨(耶律氏)와 혼인 관계를 맺은 소씨(蕭氏) 가문 출신으로, 요 경종(景宗)의 사위이자 소손녕(蕭遜寧)의 형이다.

초기에는 서북 방면의 몽골족 정벌과 986년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군사적 공적을 세웠다. 이후 남경통군사(南京統軍使), 동정사문하평장사(同政事門下平章事), 동경유수(東京留守) 등 여러 중요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1004년 요 성종(聖宗)이 허베이성 방면으로 친정(親征)할 때에는 전군을 지휘하기도 했다. 북송과의 전연의 맹이 성립된 후에는 북부재상(北部宰相)이 되어 온건하고 관대한 통치로 지지를 받았다.

1010년1018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 침공을 이끌었다. 1차 침공 당시에는 고려의 수도 개경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나, 2차 침공에서는 1019년 귀주에서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인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파면되었다.

1023년 빈왕(豳王)에 봉해져 잠시 재기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동생으로는 소항덕이 있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사 경력

경종의 사위이자 소손녕의 형이다. 통화 초년에 좌피실상온(左皮室詳穩)이 되어 저복을 쳐서 공적을 세웠으며, 서북 방면의 몽골족 정벌에도 공을 세웠다.

986년(통화 4년), 북송조빈, 미신 등이 이끄는 군대를 허베이성 망도에서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얼마 뒤 영흥궁(永興宮)의 갑병(甲兵), 사리(斜鄰), 췌랄(啜剌), 이피실(二皮室) 등의 군을 이끌고 추밀사 야율사진과 함께 군에게 빼앗겼던 산서성의 성읍들을 탈환했다. 같은 해 겨울, 북송 공격의 선봉을 맡아 만성을 함락시키고 남경 통군사(統軍使)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경통군사, 동정사문하평장사(同政事門下平章事), 동경유수(東京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의 딸인 위국공주(衛國公主) 야율장수녀(耶律長壽女)와 결혼하여 부마도위가 되었고,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관직이 더해졌다. 995년(통화 13년)에는 북원선휘사(北院宣徽使)와 남원선휘사(南院宣徽使)를 지냈다. 당시 정치의 문제점과 부역 제도에 대한 의견을 성종에게 상서하여 받아들여졌다. 997년(통화 15년)에는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이 더해졌고, 동경유수로 임명되었다.

1004년(통화 22년)에 다시 북송을 공격할 때는 발해 군을 이끌고 덕청군(德清軍)을 함락시켰으며, 북송의 위부(威虜) 관료인 전봉길(田奉吉), 곽수영(郭守英), 상현(常顯), 유착(劉鑿) 등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 성종이 허베이성 방면으로 친정(親征)할 때에는 전방의 총지휘를 맡았다. 소달림이 전사하자 남면(南面)의 행정을 전담하게 되었다. 북송과의 사이에 화의(전연의 맹)가 성립되자 북부재상(北部宰相)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온건하고 관대하여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2. 2. 고려와의 전쟁

1010년(현종 1년), 성종(聖宗)이 고려 정벌을 시작하자 소배압은 도통(都統)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북쪽 길을 따라 진군하여 개경 서쪽 교외에서 고려 군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고려의 현종은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남쪽의 나주까지 피난 가야 했다. 소배압은 이듬해 1011년 1월, 개경에 입성하여 점령하고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다. 전쟁 후 요나라로 돌아가 난릉군왕(蘭陵郡王)에 봉해졌다.

이후 1013년(개태 2년)에는 재상 자격으로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가 되었고, 1016년(개태 5년)에는 동평왕(東平王)으로 진봉되었다.

1018년(개태 7년, 현종 9년) 12월, 소배압은 다시 도통이 되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개경 부근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1019년 2월, 귀환하던 중 다하(茶河), 타하(陀河)를 건너려다 고려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특히 귀주에서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이 전투에서 소배압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겨우 패주했다. 1019년(개태 8년) 본국으로 돌아간 소배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파면되었다.

2. 3. 몰락과 죽음

개태 7년(1018년), 소배압은 다시 도통이 되어 고려를 침공하여 개경까지 진군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귀주 인근에서 고려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참패했다. 그는 무기와 군수물자를 버리고 겨우 도망쳤다. 개태 8년(1019년), 요나라로 돌아온 소배압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다.

태평 3년(1023년), 빈왕(豳王)에 봉해지며 재기를 노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3. 평가

요나라의 장군으로서 소배압은 몽골족 정벌과 송나라 군대 격파 등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여러 요직을 거쳤다. 요 성종1004년 하북 방면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을 때 전방의 총지휘를 맡을 정도로 신임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입장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략을 감행한 명백한 침략자이다. 특히 1010년 침입 당시 수도 개경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대규모 약탈을 자행한 것은 고려 백성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행위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비록 요나라 내에서는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았으나, 1018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재침략했을 때 1019년 귀주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파면됨으로써 그의 군사 경력은 큰 오점으로 마무리되었다.

4. 소배압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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