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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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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감찬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명장으로, 948년에 태어나 1031년에 사망했다. 그는 98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018년 요나라의 침입 때 귀주 대첩에서 승리하여 고려를 지켜낸 인물로 유명하다. 강감찬은 흥화진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1030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사후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인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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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강감찬
출생일948년 12월 22일
사망일1031년 9월 9일 (82세)
본관금주(衿州)
별호은천(殷川)
시호인헌(仁憲)
국적고려
이름 (언어별)
한글 표기강감찬
한자 표기姜邯贊, 姜邯瓚
로마자 표기Gang Gamchan
매큔-라이샤워 표기Kang Kamch'an
예일 표기Kang Kamchan
관직 및 작위
문하시중 재임 기간1030년~1031년
군주고려 현종
봉호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작위고려문하시중, 천수군개국후
주요 경력예부시랑
한림학사
동북면행영병마사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상원수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문하시중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
군사 정보
군 복무고려군
최종 계급상원수
주요 전투고려-거란 전쟁
제2차 고려-거란 전쟁
제3차 고려-거란 전쟁
귀주 대첩
가족 관계
아버지강궁진(姜弓珍)
자녀강행경(姜行經)
기타 정보
출생지고려 금주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학력983년(고려 성종 3년) 문과 장원급제
묘정 배향현종 묘정 배향
추증수태사 겸 중서령 추증
이미지
강감찬 초상화
태사 강감찬의 초상화
강감찬 동상
낙성대공원에 있는 태사 강감찬 동상

2. 생애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다.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하여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다.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고려 태조를 섬겨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아버지 강궁진에게서 유교 사상, 군사 전략 및 무술을 배웠다. 96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전국을 여행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집 쪽으로 별똥별이 떨어졌고, 왕의 고문이 그 집을 방문하여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가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강감찬의 출생지는 낙성대이다.

983년(성종 3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1]

1010년(현종 1년)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군으로 서경을 침공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1] 하공진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1]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다.[1]

993년, 요나라는 소배압(蕭排押) 장군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했다. 강감찬은 협상을 주장했고, 왕도 이를 공식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였다. 서희가 고려 대표로 소배압 장군에게 파견되었고, 성공적인 휴전 협상으로 거란군이 철수하고 요와 고려 간 우호 관계가 수립되었다.[1]

1004년, 거란은 송나라를 패퇴시키고 송나라 황제에게 조공을 강요했다. 1009년,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 목종을 폐위하고 살해하여 거란과의 평화 관계를 깨뜨렸다. 거란은 이를 고려를 공격할 명분으로 삼았고, 1010년 요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군을 지휘하며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5차례의 주요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른 거란은 결국 고려군을 패퇴시키고 강조 장군을 처형했다.[1]

그러나 강감찬은 고려 현종에게 궁궐에서 탈출하여 침략한 요군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왕은 강감찬의 조언을 따랐고, 불타는 수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려의 의병들이 거란군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결국 성종은 군대를 철수해야 했다. 거란은 전쟁에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고, 귀중한 자원을 헛되이 낭비하고 국고를 탕진했다. 1011년, 거란 침입이 끝난 후 강감찬은 한림학사 승지로 승진했다.[1]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1] 이때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귀주 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1018년, 요나라 정부의 명령을 받은 소배압 장군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원정을 감행했다. 강감찬은 적의 병력이 이전 침략 때보다 훨씬 적으므로 요나라와 전쟁을 선포할 것을 왕에게 권고했다. 그는 71세의 나이에 전쟁 기간 동안 전쟁부의 임시 차관으로 봉사했다. 그는 약 20만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요 국경으로 향했다.[1]

전쟁의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 전투였는데, 거란이 강을 건널 때 강물을 막고 둑을 무너뜨림으로써 고려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소배압 장군은 개경(개성) 함락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진군했다. 후에 소배압 장군은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군이 전쟁에서 철수할 것을 알고 귀주 요새에서 그들을 기다렸고, 1019년 후퇴하는 거란군과 조우했다.[1]

낙담하고 굶주린 거란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했다. 소배압 장군과 소수의 생존자만이 참패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귀주 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강감찬 장군은 수도로 돌아와 왕국을 구원한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전쟁 후인 1020년, 강감찬은 이미 국민적 영웅이 된 만큼 나이가 너무 많아 군과 정부에서 은퇴하여 휴식을 취했다. 그는 1031년 사망하기 1년 전인 1030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 그는 1031년 8월 20일(양력 9월 9일)에 사망했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 청주시에 매장되어 있다.[1]

전란이 수습된 뒤 1019년(현종 10년) 강감찬은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1] 1020년(현종 11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에 식읍 3백호가 되었다.[1]

1030년 문하시중에 올랐고,1031년(현종 22년)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에 이르렀다. 같은 해 84세로 사망했다.[1]

2. 1. 어린 시절

94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9일)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다.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하여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다. 어릴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고려 태조를 섬겨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아버지 강궁진에게서 유교 사상, 군사 전략 및 무술을 배웠다. 96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전국을 여행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집 쪽으로 별똥별이 떨어졌고, 왕의 고문이 그 집을 방문하여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그가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강감찬의 출생지는 낙성대이다.

2. 2. 관직 생활과 거란의 침입

983년(성종 3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1]

1010년(현종 1년)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군으로 서경을 침공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강감찬은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1] 하공진이 적을 설득하자 요나라군은 고려에서 물러갔다. 요나라 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가 고려에서 물러가는 요군을 뒤에서 쳐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고 요는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1]

1011년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 등을 역임했다.[1]

993년, 요나라는 소배압(蕭排押) 장군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했다. 강감찬은 협상을 주장했고, 왕도 이를 공식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였다. 서희가 고려 대표로 소배압 장군에게 파견되었고, 성공적인 휴전 협상으로 거란군이 철수하고 요와 고려 간 우호 관계가 수립되었다.[1]

1004년, 거란은 송나라를 패퇴시키고 송나라 황제에게 조공을 강요했다. 1009년,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 목종을 폐위하고 살해하여 거란과의 평화 관계를 깨뜨렸다. 거란은 이를 고려를 공격할 명분으로 삼았고, 1010년 요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군을 지휘하며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5차례의 주요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른 거란은 결국 고려군을 패퇴시키고 강조 장군을 처형했다.[1]

그러나 강감찬은 고려 현종에게 궁궐에서 탈출하여 침략한 요군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왕은 강감찬의 조언을 따랐고, 불타는 수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려의 의병들이 거란군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결국 성종은 군대를 철수해야 했다. 거란은 전쟁에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고, 귀중한 자원을 헛되이 낭비하고 국고를 탕진했다. 1011년, 거란 침입이 끝난 후 강감찬은 한림학사 승지로 승진했다.[1]

1018년, 요나라 정부의 명령을 받은 소배압 장군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원정을 감행했다. 강감찬은 적의 병력이 이전 침략 때보다 훨씬 적으므로 요나라와 전쟁을 선포할 것을 왕에게 권고했다. 그는 71세의 나이에 전쟁 기간 동안 전쟁부의 임시 차관으로 봉사했다. 그는 약 20만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요 국경으로 향했다.[1]

전쟁의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 전투였는데, 거란이 강을 건널 때 강물을 막고 둑을 무너뜨림으로써 고려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소배압 장군은 개경(개성) 함락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남쪽으로 진군했다. 후에 소배압 장군은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군이 전쟁에서 철수할 것을 알고 귀주 요새에서 그들을 기다렸고, 1019년 후퇴하는 거란군과 조우했다.[1]

낙담하고 굶주린 거란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했다. 소배압 장군과 소수의 생존자만이 참패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귀주 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강감찬 장군은 수도로 돌아와 왕국을 구원한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전쟁 후인 1020년, 강감찬은 이미 국민적 영웅이 된 만큼 나이가 너무 많아 군과 정부에서 은퇴하여 휴식을 취했다. 그는 1031년 사망하기 1년 전인 1030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 그는 1031년 8월 20일(양력 9월 9일)에 사망했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 청주시에 매장되어 있다.[1]

2. 3. 귀주 대첩

1018년(현종 9) 요나라는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1] 이때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로 있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귀주 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침략 야욕을 포기하게 되었고,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식 외교 관계는 단절하였지만, 무역 및 문화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고, 요나라도 송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송과도 긴장된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강감찬이 승리를 거두고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오자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금화팔지(금으로 만든 꽃 여덟 송이)를 머리에 꽂아 주고 오색비단으로 천막을 쳐서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벌였다.

2. 4. 전쟁 이후

전란이 수습된 뒤 1019년(현종 10년) 강감찬은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식읍 3백 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1] 1020년(현종 11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남(特進檢校太傅 天水縣開國子)에 식읍 3백호가 되었다.[1]

1030년 문하시중에 올랐고,1031년(현종 22년)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에 이르렀다. 같은 해 84세로 사망했다.[1]

3. 사후

사후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이성계 때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1968년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면 국사리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충현사가 건립되었다.

서울 낙성대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과 흥화진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라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나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명량대첩과 자주 비교된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감찬 장군은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동아시아 세 강국 간의 평화가 정착되었다. 고려이나 고려를 정복하려는 희망을 포기한 요나라와 평화롭지만 긴장된 관계를 맺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했지만, 중국과의 무역은 계속 이어졌다. 송나라는 요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요나라는 서하에게 조공을 받았으며, 서하는 거란에게 조공을 바치는 관계였다. 이 평화는 약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건국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이 기간을 이용했다. 송나라는 이 평화에서 가장 적은 이익을 얻었고, 비밀리에 여진족이 요나라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지만, 거란이 멸망한 후 여진족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중국인들을 남쪽으로 몰아냈다. 따라서 강감찬 장군의 승리는 국가 간 전쟁의 연쇄의 종지부를 찍었으며, 삼각 외교(고려, 요, 송)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여진족의 부상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앙국사는 오늘날 서울 관악구 사당동에 있다.

4. 가족 관계

5. 저서

저서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중국어〉과 〈구선집/求善集중국어〉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6. 설화

강감찬은 키가 작고 얼굴에 마마 자국이 많았다. 전설에 따르면, 강감찬은 원래 미남이었지만, 미남은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고 말하며, 천연두 신을 불러 얼굴에 마마 자국을 만들었다고 한다.

강감찬이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고 하며, 그가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부른다. 의 사신이 그를 보고 "염정성(별 이름)이 중원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동방에 있었다"고 말했다는 전설도 있다.

강감찬이 한양 판관이었을 때, 한양(현 서울특별시)에는 호랑이가 많았다. 강감찬이 노승으로 변장한 호랑이를 꾸짖자, 호랑이는 다음 날 다른 호랑이들을 이끌고 한양을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

7. 평가

재상으로 있을 때 송나라에서 온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저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바로 여기에 있었구려!"라고 말했다.[7]

고려사에 따르면 강감찬은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체구가 작고 외모가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해어져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로 조정에 서서 국가대사가 생길 때마다 정책을 결정지으며 나라의 우뚝한 기둥이자 초석 역할을 하였다. 당시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하며 나라 안팎이 무사하자, 사람들은 그 모두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7]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과 흥화진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라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나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명량 해전과 자주 비교된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감찬 장군은 이들과 함께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동아시아 세 강국 간의 평화가 정착되었다. 고려는 이나 고려를 정복하려는 희망을 포기한 요나라와 평화롭지만 긴장된 관계를 맺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했지만, 중국과의 무역은 계속 이어졌다. 이 평화는 약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건국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이 기간을 이용했다. 송나라는 이 평화에서 가장 적은 이익을 얻었고, 비밀리에 여진족이 요나라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지만, 거란이 멸망한 후 여진족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키고 중국인들을 남쪽으로 몰아냈다. 따라서 강감찬 장군의 승리는 국가 간 전쟁의 연쇄의 종지부를 찍었으며, 삼각 외교(고려, 요, 송)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여진족의 부상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앙국사는 오늘날 서울 관악구 사당동에 있다.

8. 관련 문화재

9. 기념

대한민국 해군 소속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은 강감찬함(DDH-979 강감찬)이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과 흥화진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라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나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명량대첩과 자주 비교된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감찬 장군은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동아시아 세 강국 간의 평화가 정착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와 평화롭지만 긴장된 관계를 맺었고, 결과적으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했지만, 중국과의 무역은 계속 이어졌다. 송나라는 요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요나라는 서하에게 조공을 받았으며, 서하는 거란에게 조공을 바치는 관계였다. 이 평화는 약 1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여진족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송나라는 비밀리에 여진족이 요나라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지만, 거란이 멸망한 후 여진족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시켰다. 강감찬 장군의 승리는 국가 간 전쟁의 연쇄의 종지부를 찍었으며, 삼각 외교(고려, 요, 송)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여진족의 부상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앙국사는 오늘날 서울 관악구 사당동에 있다.

10. 대중 문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주현이 강감찬 역을 연기했다. 2009년 KBS2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이덕화가 강감찬 역을 맡았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방영된 KBS2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최수종이 강감찬을 연기했다.

10. 1. 드라마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주현이 강감찬 역을 연기했다. 2009년 KBS2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이덕화가 강감찬 역을 맡았다.[2]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방영된 KBS2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최수종이 강감찬을 연기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강감찬(姜邯贊) https://encykorea.ak[...] 2023-11-05
[2] 웹사이트 [단독]최수종, '고려거란전쟁'서 강감찬 된다..KBS 대하사극 귀환! https://entertain.na[...] MT Star News 2023-02-20
[3] 웹사이트 (7)진주 강씨(晋州姜氏)-966,710명 http://www.seoulecon[...] 2014-07-06
[4] 서적 カン・ガムチャンと「クジュ大捷」 朝鮮の声 観光のページ
[5] 서적 고려사
[6] 간행물 흥국사 석탑 탑명
[7] 웹사이트 고려사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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