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스케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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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스케쿠니는 소 씨 가문의 수장이자 쓰시마 국의 부지두(副地頭)였다. 1274년 몽골의 쓰시마 침공 당시, 80명의 사무라이를 이끌고 몽골군에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 그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용장으로 평가받으며, 사후 종3위로 추증되었고, 쓰시마 지역에서는 그를 기리는 행사와 기념물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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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스케쿠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소 스케쿠니 |
원어 이름 | ja, ja |
다른 이름 | 소 시게쿠니(ja) |
직업 | ja(지토다이), ja(슈고다이), 쓰시마 도지(対馬島司), 쓰시마 부지사(対馬副司) |
출생 | 1207년 |
사망 | 1274년 11월 4일 |
국적 | 일본 |
활동 시기 | 가마쿠라 시대 |
알려진 이유 | 몽골의 침략에 맞서 쓰시마 방어 |
가문 | |
씨족 | 소 씨(宗氏)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소 도모무네(宗智宗) |
양아버지 | 소 시게히사(宗重尚) |
형제 | 소 시게히사 |
배우자 | 다테이시 모리마사(立石盛昌)의 딸 |
자녀 | 모리아키라(盛明), 우마타로(右馬太郎), 우마지로(右馬次郎) |
관직 및 직위 | |
관위 | 우마노조(右馬允), 추증 종3위 |
막부 |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
기타 정보 | |
묘소 | 고모다하마 신사(小茂田浜神社) |
2. 생애
소 씨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이후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1274년 몽골 제국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한 분에이의 역에서, 소 스케쿠니는 쓰시마 국의 부지두(副地頭, ''지토다이'')로서 방어 책임을 맡고 있었다.
1274년 몽골의 쓰시마 침공 당시, 스케쿠니는 쓰시마 국의 부지두(副地頭, 지토다이)로서 해안에 함대가 나타난 후 급하게 방어 체제를 갖춰야 했다. 그날 하치만 신사가 불에 탔는데, 이는 불길한 징조였지만 스케쿠니는 경고의 징조로 해석했다.[1]
80명의 기마 사무라이와 그 수행원들을 이끌고, 스케쿠니는 ''소 씨 가보''에서 900척의 배에 8,000명의 병사가 탑승한 침공군과 맞섰다.[1] 몽골군은 11월 4일 새벽 2시에 상륙하여, 일본 측의 협상 시도를 무시하고 궁수로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을 후퇴시켰다.[1] 스케쿠니는 고향 섬을 지키다 전사했다.[1][2]
3. 분에이의 역 (제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스케쿠니와 그를 따르던 이들의 유골은 오늘날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정(厳原町) 고모다(小茂田) 땅 안에 "어수총"(御首塚), "어동총"(御胴塚)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몽골군이 상륙했던 사쓰우라에는 소 스케쿠니를 비롯한 당시 전투의 일본측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고모다하마 신사(小茂田浜神社)가 세워졌다. 신사에서는 해마다 11월 12일에 고모다하마 신사 대제(小茂田浜神社大祭)를 열어 갑주 차림으로 행군하며 바다를 향해 화살을 쏘아 섬의 평화를 기원하는 「우는살의 의식」(鳴弦の儀)을 거행한다.
소 스케쿠니는 1896년 11월 2일에 쓰시마 도민들의 청원에 따라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종3위(従三位)가 추증되었다.[6]
3. 1. 몽골군의 침공
분에이 11년(1274년) 10월 5일(양력 11월 4일), 쓰시마 고쿠후(対馬国府)의 하치만구 가전(八幡宮仮殿)에서 연기 없이 불꽃이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같은 날 오후, 쓰시마 서쪽 해안에 몽골군의 대규모 선단이 나타났다. 몽골군은 450척의 군선에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쓰시마 하도(下島) 서쪽 사쓰우라(佐須浦)[5]에 상륙했다.
쓰시마의 지토이자 슈고(守護) 쇼니 가게스케(少弐景資)의 현지 대관(代官)이었던 소 스케쿠니는 80여 기(騎)를 거느리고 밤중에 바위가 많은 비탈길을 지나 사쓰우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통사(通事)를 보내 몽골군이 온 이유를 묻고자 하였으나, 몽골군은 7, 8척의 배에서 1천 명 정도의 병력을 상륙시켜 격렬하게 화살을 퍼부으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스케쿠니 등은 급히 진을 치고 응전하였으나, 스케쿠니의 큰아들 우마지로(右馬次郎), 양자 야지로(弥次郎), 소노 타로 뉴도(庄の太郎入道), 히고국(肥後国)의 고케닌(御家人) 다이 도자부로(田井藤三郎) 등 스케쿠니를 따랐던 80기 전원이 몰살되었다.[1][2]
몽골군은 사쓰우라에 불을 질러 모조리 불태웠고, 고타로(小太郎)와 효에지로(兵衛次郎) 두 사람만이 배를 타고 하카타로 도주하는데 성공하여 쓰시마 함락의 전말을 알렸다.
3. 2. 소 스케쿠니의 항전
분에이 11년(1274년) 10월 5일, 쓰시마 고쿠후(対馬国府)의 하치만구 가전(八幡宮仮殿)에서 연기 없는 불꽃이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같은 날 오후, 몽골의 대규모 군선이 쓰시마 서쪽 바다에 나타났고, 450척의 배에 3만 명의 군사가 쓰시마 하도(下島) 서쪽 해안의 사쓰우라(佐須浦)에 접근했다.[5] 6시경, 이 소식은 고쿠후의 지토도코로(地頭所)에 전달되었다.
쓰시마의 지토이자 슈고(守護) 쇼니 가게스케(少弐景資)의 현지 대관(代官)이었던 소 스케쿠니는 80여 기(騎)의 병력을 이끌고 밤길을 달려 사쓰우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스케쿠니는 통사(通事)를 보내 몽골군에게 온 이유를 묻고자 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1천여 명의 병력을 상륙시켜 화살 공격을 퍼부으며 전투를 개시했다.[1][2]
스케쿠니와 그의 병력은 급히 진을 치고 응전했으나, 수적으로 열세였다. 스케쿠니, 그의 큰아들 우마지로(右馬次郎), 양자 야지로(弥次郎), 히고국(肥後国)의 고케닌(御家人) 다이 도자부로(田井藤三郎) 등 80여 기 전원이 전사했다.
몽골군은 사쓰우라에 불을 질렀고, 고타로(小太郎)와 효에지로(兵衛次郎) 두 사람만이 배를 타고 하카타로 도주하여 쓰시마 함락 소식을 알렸다.
4. 사후
소 스케쿠니와 그를 따르던 이들의 유골은 현재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즈하라정(厳原町) 고모다(小茂田) 땅에 「어수총」(御首塚)과 「어동총」(御胴塚)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5]
4. 1. 추증 및 현창
1274년 몽골군의 침략 당시 일본측 전사자들의 위령을 위해 고모다하마 신사(小茂田浜神社)가 세워졌다. 이 신사는 몽골군이 상륙했던 사쓰우라에 위치해 있다. 신사에서는 해마다 11월 12일에 고모다하마 신사 대제(小茂田浜神社大祭)를 열어 갑주 차림으로 행군하며 바다를 향해 화살을 쏘아 섬의 평화를 기원하는 「우는살의 의식」(鳴弦の儀)을 거행한다.[5] 1896년(메이지 29년) 11월 2일, 쓰시마 도민들의 청원에 따라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소 스케쿠니에게 종3위(従三位)가 추증되었다.[6]5. 평가
소 스케쿠니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싸운 용장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용맹함과 애국심은 일본 역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쓰시마 지역에서는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와 기념물이 존재한다. 현대 한국의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소 스케쿠니를 외세 침략에 굴하지 않고 국권을 수호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항전을 통해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2]
참조
[1]
웹사이트
So Sukekuni
https://japanese-wik[...]
2020-07-18
[2]
웹사이트
The Mongol Invasions of Japan, 1274 & 1281 CE
https://www.worldhis[...]
2020-07-18
[3]
간행물
官報 第4006号、「叙任及辞令」
1896-11-04
[4]
서적
쓰시마 편년략
[5]
문서
지금의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対馬市) 이즈하라정(厳原町) 고모다하마(小茂田浜). 훗날 이곳에 고모다하마 신사가 세워졌다.
[6]
간행물
官報 第4006号、「叙任及辞令」
189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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