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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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요시아키라는 쓰시마 후추번의 16대 번주로, 1847년에 태어나 1902년에 사망했다. 1862년 번주가 되었으나, 번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재정난에 직면했다. 1864년 조슈번 정벌 이후 쿠데타와 존왕양이파 숙청이 있었고, 이후 번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보신전쟁에서 신정부를 지원했으며, 판적봉환 이후 번지사로 임명되어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다. 메이지 유신 후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외무대승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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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아키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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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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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메이지 시대 |
출생 | 고카(弘化) 4년 11월 6일 (1847년12월 13일) |
사망 | 메이지 35년 (1902년) 5월 25일 |
초명 | 젠노조(善之丞) |
휘 | 요시다쓰(義達), 시게마사(重正) |
시호 | 섭정원(摂政院) |
묘소 | 도쿄도시나가와구니시오이 요쿠타마인(養玉院) |
관위 | 종4위하 시종 대마도후추 번주 대마도수 종4위상 좌근위소장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모치 요시노부 메이지 천황 |
번 | 대마도후추 번주 |
씨족 | 소 씨 |
부모 | 아버지: 소 요시카즈 어머니: 민(勝井氏) |
형제자매 | 히코시치로(彦七郎) 가쓰치요(勝千代) 요시다쓰(義達) 하라 가즈노리 이노우에 가즈토요 구로다 가즈시 사가 가즈이치 니이 가즈쿠니 스기무라 가즈히가시 가즈코(和子) 우에코(植子) 난바 소레의 부인(難波宗礼室) |
배우자 | 나베시마 나오마사 양녀 리우(水島氏) 사키(永田氏) |
자녀 | 시게모치 우지이에 마사요시 마쓰다이라 다케나가(松平武修) 정실 세키코(績子) |
기타 사항 | 요시다쓰는 "요시아키"라고도 불림 메이지 2년(1869년)에 소 시게마사(宗 重正)로 개명 |
2. 생애
고카(弘化) 4년(1847년) 11월 6일, 소 요시아키라는 쓰시마 후추번 15대 번주 소 요시요리(義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요시아키라는 애초에 요시요리의 뒤를 이을 세자로 지명되었으나, 요시요리가 측실 소생의 아들(요시아키라의 이복 형) 가즈치요(勝千代)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로 삼으려 하면서 폐적되었다. 그러나 안세이(安政) 6년(1859년) 가즈치요가 죽고, 이듬해인 만엔(万延) 원년(1860년)에는 요시요리의 측실마저 쫓겨나면서 요시아키라는 세자 지위를 회복하였다.
2. 1. 번주 시절
분큐 2년(1862년) 12월 25일[7] 아버지 소 요시요리(義和)가 은거하면서, 가독(家督)을 이어받아 쓰시마 후추번의 16대 번주가 되었다.겐지(元治) 원년(1864년) 막부의 제1차 조슈 정벌(長州征伐)에서 조슈번(長州藩)이 패배하자, 요시아키라의 외삼촌 가쓰이 고하치로(勝井五八郎)가 좌막파인 보수속론당(保守俗論党)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번을 주도하던 존왕양이파 의당(義党)의 가로(家老) 오우라 교노스케(大浦教之助) 등 100여 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게이오 원년(1865년) 가쓰이 등 보수속론당도 의당 잔당의 반격을 받아 암살당하는 등 번의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아직 젊은 나이에 경험도 많지 않았던 새 번주는 이러한 혼란상을 수습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생산방(生産方)을 설치해 무역품 판매를 행했지만 실패했고, 해상 방비 비용 팽창이나 계획성 없는 차입으로 번의 재정은 파탄났다.
2. 2.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
1868년 보신 전쟁에서 소 요시아키라는 신정부 편에 서서 오사카까지 군대를 파견했다.[8] 1869년 판적봉환으로 쓰시마 후추번은 이즈하라번으로 개칭되었고, 소 요시아키라는 번지사로 임명되어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다.[8] 소 요시아키라는 조선에 보내는 서계에 신정부로부터 받은 도장을 사용하고, 자신의 직함과 조선 측에 대한 호칭을 변경하는 등 새로운 외교 방식을 따랐다.[8] 그러나 이는 조선 측의 반발을 샀고, 동래 부사 정현덕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조정에 보고하여 서계를 수정하도록 요청했다.[8]1871년 폐번치현으로 소 요시아키라는 번지사에서 물러났고, 이후 외무대승으로 임명되었다.[8] 1884년 소 요시아키라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8] 1890년 소 요시아키라는 산조 사네토미에게 후작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소 씨 가문이 국주급 다이묘였다는 점을 들어 요청했으나, 쓰시마 소 씨의 석고(石高)는 자작에 해당했고, 과거 조선과의 외교적 역할을 감안하여 백작 작위가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8] 소 요시아키라는 1902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작위 및 관직
4.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宗義達
https://kotobank.jp/[...]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7-12-28
[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2-07-07
[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8-06-21
[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8-12-17
[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2-05-27
[7]
문서
[8]
기록물
승정원일기
1869-12-14
[9]
간행물
서임급사령
《관보》(官報)
1887-12-28
[10]
간행물
서임급사령
《관보》(官報)
189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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