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헤이자카 학문소
1. 개요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1630년 하야시 라잔이 우에노에 유학 사숙을 연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간다 유시마에 부지를 하사하여 사숙을 이전하고, 1797년에는 막부 직할 기관으로 개편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양학의 가이세이쇼, 의학소와 함께 교육 기관으로 언급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창평학교로 개칭되었으나, 유학파와 국학파의 갈등으로 폐지되었다.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도쿄 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은 아니지만, 그 원류로 여겨지며, 현재 부지에는 도쿄 의과 치과 대학 유시마 캠퍼스가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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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학 -
번교
번교는 에도 시대에 각 번에서 무사 계급 자제 교육을 위해 설립한 기관으로, 유교적 가치관 함양과 문무 겸비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폐번치현 이후 중등 및 고등 교육기관의 모체가 되었다. -
일본의 유학 -
회덕당
1724년 에도시대 오사카 상인들이 설립한 사학인 회덕당은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개방적인 학풍을 지향하며 상인 교육에 기여하고 실학 사상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교되었다가 재건되어 오사카 대학으로 이관되었고 현재 장서는 '개덕당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
에도 시대의 교육 -
고베 해군 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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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해군 전습소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는 에도 막부가 해안 방어 강화를 위해 1855년 나가사키에 설립한 해군 장교 양성 기관으로, 네덜란드 해군의 지원을 받아 서양식 해군 기술을 교육하고 가쓰 가이슈,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 일본 해군을 이끌 인물들을 배출하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
지요다구의 역사 -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국가적 위기와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A급 전범을 포함한 전쟁 관련 인물들의 합사로 인해 주변국들의 반발을 일으키며 과거사 논쟁의 중심에 있는 신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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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니치니치 신문
도쿄니치니치 신문은 1872년 창간되어 정부 발표 대행, 어용 신문 비판, 후쿠치 겐이치로 주필 취임 후 대중지 전환,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매각 후 국제 정세 보도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진보적 논조, 도쿄 5대 신문 성장, 관동대지진 이후 아사히 신문과 경쟁, 시사신보와 합병 후 마이니치 신문 통합, 문화 사업 기여, 전쟁 찬양 보도 비판, 석간 복간 후 휴간 등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일간 신문이다.
2. 연혁
163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하사받은 우에노 닌오카(忍岡)의 저택 자리에 하야시 라잔이 유학 사숙을 열고 공자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이후 하야시가 당주가 대대로 제사를 이었다. 1690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유시마로 공자묘 이전을 명했고, 남은 자리에 강당과 기숙사를 만들어 학교로 바꾸면서 공자의 출생지인 창평향(昌平郷)에서 따와 쇼헤이자카로 이름 붙였다.
1790년 간세이 이학금지령(寛政異学の禁)으로 주자학이 장려되었고, 1797년 쇼헤이자카는 하야시가에서 분리되어 막부 직할기관이 되었다. 비토 지슈, 고가 세이리 등이 교수로 초빙되었고, 직참 외에 번사, 향사, 낭인 등도 청강할 수 있었다.
막부 말기에는 양학의 가이세이쇼나 의학을 가르치던 의학소와 함께 언급되는 교육기관이었지만, 메이지 유신기의 혼란으로 일시 폐쇄되었다가 1868년 창평학교로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창평학교는 유학이 아닌 황학(신도, 국학) 위주여서 유학파와 대립했고, 대학본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70년 휴교 후 폐교되었다.
2.1. 하야시 가문의 사숙 시기 (1630년 ~ 1797년)
1630년(간에이 7년), 하야시 라잔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하사받은 우에노 닌오카(忍岡)의 저택 자리에 유학 사숙을 열었다. 라잔은 이곳에 공자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이후 하야시 가문 당주가 대대로 제사를 이어갔다.
1690년(겐로쿠 3년),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간다 유시마에 6천 평의 토지를 하사하여 성묘를 짓고 하야시 가문의 사숙을 이전하도록 명했다. 쓰나요시는 자신이 직접 쓴 "대성전" 편액을 하사했고, 이에 따라 강당은 선성전에서 대성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성전 및 부속 건물을 통칭하여 "성당"이라 칭하고, 지명을 따서 "유시마 성당"이라고 불렀다. 또한, 이 지역은 공자의 출생지인 "창평향"을 본따 "쇼헤이자카"라고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쇼헤이자카 성당"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있던) 남은 자리에는 강당과 기숙사를 만들어 학교로 바꾸었다.
1691년(겐로쿠 4년), 쓰나요시는 하야시 가문 3대인 하야시 노부아쓰(호코)에게 종5위하의 관직과 대학두(제주)의 관직을 주었다. 이후 대학두 관직은 하야시 가문이 대대로 세습하며 성당의 책임자 역할도 담당했다.
2.2. 막부 직할 학문소 시기 (1797년 ~ 1868년)
1790년 (간세이 2년), 이른바 "간세이 이학의 금"에 의해 막부의 교육 정책으로서 주자학이 장려되었다. 그 일환으로 성당을 하야시 가문의 사숙으로 하는 종래의 위치를 변경하여, 1797년 (간세이 9년)까지 "성당 학규"와 직제 제정 등 제도 정비를 추진하여 막부의 직할 기관 "쇼헤이자카 학문소" (쇼헤이코)를 설치했다.
1792년 (간세이 4년) 9월에 유시마 성당의 교고몬 내에 강사가 완공되자, 하타모토나 가인을 가리지 않고 막신과 그 자제들의 학문 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1817년 (분카 14년)에는 학문 장려를 위해 17세부터 19세까지의 자에게 매년 소독 음미를 실시하게 되었다. 쇼헤이자카 학문소의 교사는 하야시 가문에 한정되었지만, 이윽고 하야시 가문 이외의 유학자에 의한 강의도 행해지게 되었다. 외부에서 초빙된 사람으로는 비토 지슈나 고가 세이리가 있다. 또한, 청강 입문도 막신에 한정되지 않고, 배신, 낭인, 조닌에게도 허가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양학(洋学)의 가이세이쇼(開成所)나 의학을 가르치던 의학소와 함께 언급되는 교육 기관이었다.
2.3. 메이지 유신과 쇼헤이 학교 (1868년 ~ 1870년)
메이지 유신 시기의 혼란 속에서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가 신정부에 접수되어 1868년 8월 17일(게이오 4년 6월 29일)에 관립 '쇼헤이 학교(昌平学校)'로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이 쇼헤이 학교는 이전과 같은 유학·한학 중심의 교육 기관이 아니라, 황학(국학·신도)을 상위에 두고 유학을 종으로 하는 기관으로 위치 지어졌기 때문에, 구 황학소 출신의 국학 교관과 쇼헤이자카 학문소 이래의 유학파 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특히 쇼헤이 학교가 고등 교육 및 학교 행정을 담당하는 '대학교'(이후 '대학')의 중추로 위치하면서, 유학파·국학파의 주도권 다툼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대학 본교'로 이름이 바뀌었던 쇼헤이 학교는 1870년 8월 8일(메이지 3년 7월 12일) 당분간 휴교에 들어갔고 그대로 폐지되었다.
3. 폐교 이후
막부의 가이세이 학교(開成学校), 도쿄 의학교(東京医学校)로 개편되었고 이것이 도쿄 대학의 전신이 되었으나,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도쿄 대학의 설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쇼헤이자카 학문소 터에는 도쿄 사범 학교(東京師範学校)와 도쿄 여자 사범 학교(東京女子師範学校)가 세워졌다. 1870년 태정관 포고로 도쿄부 중학교(東京府中学校)도 이 자리에 가건물로 세워졌다.
유시마 성당(湯島聖堂) 구내에는 일본 문부성(文部省), 국립박물관, 도쿄 사범 학교, 도쿄 여자 사범 학교 등이 함께 있었다. 이후 문부성은 가스미가세키(霞が関)로, 국립 박물관은 우에노(上野)로, 도쿄 사범 학교 및 부속 학교는 분쿄구(文京区) 오쓰카(大塚)로 각각 이전했다.
도쿄 사범 학교의 후신인 고등사범학교는 신제 도쿄 교육대학(東京教育大学)이 되었다가 쓰쿠바시(筑波市)로 이전하여 쓰쿠바 대학(筑波大学)이 되었다. 도쿄 여자 사범 학교의 후신인 도쿄 여자 고등사범학교는 오차노미즈 여자대학(お茶の水女子大学)이 되었다.
막말~유신기에 쇼헤이자카 학문소 주변에는 주오 대학(中央大学), 메이지 대학(明治大学), 니혼 대학(日本大学) 등과 구제 법률학교, 간다(神田) 대학가와 고서점가가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