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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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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회덕당은 1724년 오사카의 상인들이 설립한 학교로,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에 걸쳐 운영되었다. 미야케 세키안을 학주로 하여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을 가르쳤으며, 신분과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1869년 폐교되었으나, 1916년 회덕당의 정신을 이어받아 재건되었고, 태평양 전쟁으로 소실된 후 오사카 대학에 자료와 기능을 이관하여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회덕당 문고는 오사카 대학 부속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에도 시대와 재건 회덕당 관련 자료를 포함하여 약 5만 점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회덕당은 상인 계층의 교육 참여를 장려하고, 평등 사상을 옹호하는 등 일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2. 에도 시대의 회덕당 (1724년 - 1869년)

1724년 오사카 상인들이 미야케 세키안을 학주로 초빙하여 회덕당을 설립했고, 1726년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공인받아 부지를 받았다. 공인은 받았으나 재원은 상인들이 계속 조달하여 '상인의 학교'라는 성격을 가졌다.[3]

회덕당은 중국 고전을 연구했으며, 1838년 개교 이후 인기를 얻은 근처 테키주쿠의 외국어 학교, 의학 및 기타 (서양) 과학의 부상에 따라 쇠퇴했다.[5] 메이지 유신 이후 구 막부에서 받은 모든 권한이 사라져 1869년 폐교되었다.

회덕당은 미덕과 학습 능력에서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야마가타 반토의 저작에서처럼, 더 광범위한 과학적, 지리적 학문을 수용하는 것을 옹호했다. 야마가타 반토의 지식 재조직과 서양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흠모는 학교 범위를 벗어나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이후 학자들은 야마가타를 과학에 영향을 준 인물로 언급했다.[5]

2. 1. 설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724년 오사카의 거상들이 출자하여 미야케 세키안을 지도자로 삼아 회덕당을 설립하였다. 위치는 현재의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시)이다. 출자자들은 미츠보시야 무에몬, 토미나가 호슌(도묘지야 키치자에몬), 후나하시야 시로에몬, 비젠야 키치베에, 코노이케 마타시로 등이며, 이들은 '오동지'(五同志)라 불렸다.[3] 1726년 도쿠가와 요시무네에게 공인을 받아 부지를 받았다. 공인은 받았으나 재정은 상인들이 계속 조달하여 이후로도 '상인의 학교'(町人の学校)라는 성격을 가졌다.[3]

회덕당은 도쿠가와 시대에 상인들의 고등 교육 참여가 드물거나 권장되지 않던 시기에 설립되어, 상인들이 자유롭게 고등 교육에 참여하고, 거의 상인 교육에만 집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3] 회덕당 학자들은 도쿠가와 사회에서 상인과 당시 상인에 대한 관점을 조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지식의 입증 가능성에 대한 요구와 역사로서의 텍스트 읽기에 대한 의존성 사이의 모순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3]

회덕당의 설립 및 초기 역사에 대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724년오사카 호상(豪商)들(오동지)이 회덕당 설립, 미야케 세키안을 학주로 초빙
1726년나카이 슈안의 노력으로 에도 막부의 공인을 받아 관허 학문소가 됨, 슈안은 사무장에 해당하는 예인(例人)에 취임
1730년세키안 사망, 슈안이 예인을 겸임하며 2대 학주 취임


2. 2. 학풍 및 교육 방식

회덕당은 신분 차별 없이 누구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개방적인 교육을 지향했다. 개교 당시 삼택 석암은 현관에 세 가지 조항을 내걸었다.[3]

조항
서적을 소지하지 않은 자도 강의를 들어도 좋다.
부득이한 용무가 있으면 도중에 퇴석해도 좋다.
자리 배치는 무가를 상석으로 정하지만, 강의 시작 후에는 신분에 따라 구분하지 않는다.



삼택 춘루 대에는 정식 입문 절차 없이도 청강이 가능했고, 자리 배치는 신구, 장유, 이해의 깊이에 따라 서로 양보하도록 정해졌다. 이때의 정서에는 "서생의 교제는, 귀천 부귀를 논하지 않고, 동배로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고, 이후에도 이 방침은 지켜졌다.[3]

초기에는 주자학, 양명학 등을 섞은 잡박한 학풍으로 "요괴 학문"이라고도 비판받았다. 1739년(겐분 4년) 고이 란슈 복귀 이후, 정통 주자학을 표방하여 오규 소라이 학파를 배격했고, '''소라이학 비판'''은 나카이 치쿠잔 등의 시대에 정점을 맞이했다. 회덕당은 도미나가 나카모토, 야마가타 반토와 같은 개성적인 초닌 학자들을 배출했다.[5]

2. 3. 역대 학주 및 주요 인물

재임 기간직책이름비고
1726년 ~ 1730년학주미야케 세키안나카이 슈안이 외부 업무 담당
예인(사무장)나카이 슈안
1730년 ~ 1758년학주 겸 예인나카이 슈안미야케 세키안 사망 후
1730년 ~ 1782년학주미야케 슌로고이 란주와 나카이 치쿠잔이 공개 강연 진행
1758년 ~ 1782년예인나카이 치쿠잔나카이 슈안 사망 후
1782년 ~ 1804년학주 겸 예인나카이 치쿠잔미야케 슌로 사망 후
1804년 ~ 1817년학주나카이 리켄강연은 했지만, 학원 밖에서 거주하며 행정에 관여하지 않음[6]
1797년 ~ 1803년예인나카이 쇼엔나카이 치쿠잔 은퇴 후
1803년 ~ ?예인, 교수나카이 세키카나카이 쇼엔 사망 후
1817년 ~ ?예인나미카와 칸센나카이 치쿠잔의 손자
1832년 ~ ?예인나카이 토엔나카이 세키카의 양자, 나미카와 칸센 퇴거
? ~ 1840년교수나미카와 칸센나카이 토엔 예인 취임



'''주요 인물'''

2. 4. 쇠퇴

회덕당은 1838년 개교 이후 인기를 얻은 근처 데키주쿠의 외국어 학교, 의학 및 기타 (서양) 과학의 부상에 따라 쇠퇴했다.[5] 메이지 유신 후 구막부에서 받은 모든 권한이 사라져 1869년 일단 폐교되었다.

3. 근대 회덕당 (1916년 - 1945년)

1910년, 스미토모와 오사카의 상업 활동가들의 기금으로 회덕당의 정신을 계승한 아카데미가 부활하여 강연과 회의를 후원하는 간행물 《개덕》(Kaitoku)을 발행했다. 아카데미 건물은 개축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어로 된 도서 대부분은 보존되어 오사카 대학의 《개덕당 문고》(Kaitokudō Bunkan)에 소장되어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1868년에 멸망하면서 회덕당은 문을 닫았다.[1]

오사카 대학 도요나카 캠퍼스에 있는, 재건 회덕당의 디오라마


1916년 재건된 회덕당(재건 회덕당)에는 니시무라 텐슈등 많은 인물들이 이사, 강사, 고문 등으로 참여했다.[1]

3. 1. 재건 배경 및 역사

나카이 텐쇼(키즈마로)는 회덕당 폐지 후에도 그 부흥을 염원했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었던 니시무라 텐슈는 뛰어난 한학자이기도 하여, 역시 회덕당 부흥을 기원했다. 주로 니시무라 텐슈가 오사카의 재계 및 정계에 노력하여 1916년에 회덕당이 재건되었다. 이를 에도 시대의 회덕당과 구별하여 재건(ちょうけん) 회덕당이라고 부른다.[1]

연도사건
1911년 (메이지 44년)니시무라 텐슈 등의 발의로 회덕당 사유 공제가 거행되어, 회덕당 기념회가 설립되었다.
1913년 (다이쇼 2년)회덕당 기념회가 재단법인으로 인가되었다.
1916년 (다이쇼 5년)오사카시 히가시구 분고마치(현·혼마치바시)의 부유지를 무상으로 빌려, 재건 회덕당을 건립했다.
1917년 (다이쇼 6년)마쓰야마 나오조를 교수로, 텐슈를 강사로 강의를 시작했다.
1923년 (다이쇼 12년)회덕당 도우회가 발족했다.
1926년 (다이쇼 15년)서고 및 연구실이 준공되었다.
1945년 (쇼와 20년)오사카 대공습으로 강당과 사무동이 소실되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서고만 화재를 면했다.
1946년 (쇼와 21년)사무소를 재건했다.
1949년 (쇼와 24년)장서와 직원을 오사카 대학으로 이관했다.
1953년 (쇼와 28년)서고·사무소를 처분했다. 부지를 오사카 부에 반환하여, 재건 회덕당은 소멸했다.


3. 2. 운영 및 학풍

재건 회덕당은 아사히 신문의 주필 니시무라 텐슈가 설립에 깊이 관여하여, 아사히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화 센터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 회덕당은 재단법인 회덕당 기념회가 운영하였고, 재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운영은 일반 기부와 행정 보조에 의존했다.

에도 시대의 회덕당처럼 서민 교육을 중시하면서도, 교토 제국 대학나이토 고난 교수 등을 고문으로 초빙하여 전문적인 연구 활동도 수행했다. 재건 회덕당의 전임 강사였던 다케우치 요시오가 교정한 『논어의소(論語義疏)』는 1936년 회덕당에서 출판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최선의 판본으로 인정받는다.

4. 전후 회덕당 (1949년 - 현재)

1949년 쇼와 24년에 오사카 대학이 신제 대학으로 발족하면서, 오사카 대학 법문학부와 협정을 맺고 재건 회덕당의 자료와 직원(서기)을 이관했으며, 강의도 계속 이어갔다.[1] 1951년 쇼와 26년에는 오사카 대학 부속 도서관 내에 회덕당 기념 문고가 설치되었다.[1]

재단법인 회덕당 기념회는 오사카 대학과는 독립된 재단 법인이며, 기업이나 개인 찬조 회원의 기부로 운영된다.[1] 오사카 대학 교직원들이 운영위원, 학술 전문 위원 등으로 다수 참여하고 있으며, 상설 고전 강좌, 춘추 강좌 및 특별 강좌·강연 등에 오사카 대학에서 강사를 파견하고 있다.[1]

4. 1. 오사카 대학과의 통합

전후 혼란기에 회덕당은 독자적인 운영이 어려워졌다. 1949년 쇼와 24년에 신제 대학으로 오사카 대학이 발족하면서, 오사카 대학 법문학부와 협정을 맺고 재건 회덕당의 자료와 직원(서기)을 오사카 대학으로 이관했으며, 재건 회덕당에서 진행되던 강의 등도 계속 이어가는 것이 확인되었다.[1]

1951년 쇼와 26년에는 오사카 대학 부속 도서관 내에 회덕당 기념 문고가 설치되었다.[1]

4. 2. 현재의 활동

재단법인 회덕당 기념회는 오사카 대학과는 독립된 재단 법인이며, 그 운영은 기업이나 개인의 찬조 회원으로부터의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1] 오사카 대학 교직원들이 운영위원, 학술 전문 위원 등으로 다수 참여하고 있으며, 상설 고전 강좌, 춘추 강좌 및 수시로 열리는 특별 강좌·강연 등에는 오사카 대학에서 강사를 파견하고 있다.[1]

개최하는 강좌는 다음과 같다.[1]

  • 고전 강좌
  • 춘추 기념 강좌
  • 회덕기(懐徳忌)
  • 아카이브 강좌
  • 법인 강좌
  • 기타

5. 회덕당 문고

오사카 대학 부속 도서관에는 '회덕당 문고(懐徳堂文庫)'라는 귀중한 자료 컬렉션이 있다. 이 컬렉션에는 에도 시대 회덕당 관련 자료, 재건 회덕당에서 이관된 도서 및 자료, 전후 오사카 대학에 기증된 자료 등이 포함되어 있다.[1] 태평양 전쟁의 화재로 소실되지 않고 보존된 도서들은 대부분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으며, 오사카 대학의 '회덕당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1]

5. 1. 주요 자료

오사카 대학 부속 도서관에는 에도 시대 회덕당과 관련된 귀중한 자료, 재건 회덕당(重建懐徳堂)에서 이관된 도서·자료 외에, 전후에 오사카 대학에 기증된 자료들을 포함하는 「회덕당 문고(懐徳堂文庫)」 컬렉션이 있다.

「회덕당 문고(懐徳堂文庫)」의 내역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자료명설명
회덕당본(懐徳堂本)재건 회덕당(重建懐徳堂)이 구입한 자료.
아이코 문고(愛甲文庫)아이코 켄타츠의 구장서. 다이쇼 8년에 회덕당에 기탁. 쇼와 23년에 이관.
세키엔 기념 문고(碩園記念文庫)니시무라 텐슈의 구장서. 다이쇼 14년에 재건 회덕당에 이관.
나카이 가 자료(中井家資料)나카이 텐세이·나카이 시즈코 등의 구장 자료. 쇼와 8년·14년에 재건 회덕당에 이관.
유후이사이 본(有不為斎本)이토 스케오의 구장서. 쇼와 14년에 재건 회덕당에 이관.
반리 문고(万里文庫)오에 분죠의 구장서. 쇼와 22년에 재건 회덕당에 이관.
오카다 문고(岡田文庫)오카다 이자에몬의 구장서. 쇼와 27년 - 쇼와 28년에 오사카 대학에 이관.
키타야마 문고(北山文庫)요시다 토시오의 구장서. 쇼와 31년·54년에 오사카 대학에 이관.
키마세 문고(木間瀬文庫)키마세 사쿠조의 구장서. 쇼와 32년.
닛타 문고(新田文庫)닛타 카즈코의 구장서. 쇼와 54년·58년.
칸센 문고(寒泉文庫)나미카와 칸센 관련 자료. 쇼와 60년.
사카세 문고(逆瀬文庫)사카세 타다지로의 구장 자료. 쇼와 61년 - 쇼와 62년.
요시나가 문고(吉永文庫)요시나가 타카오의 구장 자료. 헤이세이 원년.



「회덕당 문고(懐徳堂文庫)」의 자료 총수는 약 5만 점이라고 하며, 현재도 증가 중이다.

쇼와 51년 이전의 도서에 대해서는 『회덕당 문고 도서 목록(懐徳堂文庫図書目録)』(오사카 대학 문학부)이 있지만, 같은 해 이후의 수입 도서, 및 모든 문서·기물 자료에 대해서는 정리되지 않았다.

6. 의의 및 영향

회덕당은 도쿠가와 시대에 상인들이 고등 교육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상인 교육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덕당 학자들은 도쿠가와 사회에서 상인과 당시 상인에 대한 관점을 조화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지식의 입증 가능성에 대한 요구와 역사로서의 텍스트 읽기에 대한 의존성 사이의 모순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3]

회덕당은 사람들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야마가타 반토의 저작에서처럼, 더 광범위한 과학적이고 지리적인 학문을 수용하는 것을 옹호했다. 야마가타 반토는 지식의 급진적인 재조직과 서양 과학적 방법론을 옹호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과학에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았다. 회덕당은 중국 고전을 연구했으며, 1838년 개교 이후 인기를 얻은 테키주쿠와 같은 외국어 학교, 의학 및 기타 (서양) 과학의 부상에 따라 쇠퇴했다.[5]

1739년 고이 란슈가 복귀한 이후 회덕당은 정통 주자학을 표방하며 오규 소라이 학파를 배격했다. 나카이 치쿠잔 등의 시대에 소라이학 비판은 정점을 맞이했다. 쿠사마 나오카타, 도미나가 나카모토, 야마가타 반토와 같은 특징적인 정인 학자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회덕당은 신분제 사회에서 상인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실학 사상과 유사하게, 평등한 교육 기회 제공과 실용적인 학문 추구라는 가치를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Visions of Virtue in Tokugawa Japan. The Kaitokudo, Merchant Academy of Osak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 문서 ibid, esp pp. 99–196
[3] 문서 1987
[4] 문서 1987
[5] 문서 1987
[6] 문서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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